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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란한 한 주간입니다. 우리나라 정치가 국민의 수준을 따라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진작 알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지도자 부족 사태에 직면하고 있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정치권에도 인재 부족 사태를 앓고 있습니다. 때로는 그런 생각도 해봅니다. 어서 이 세대가 지나가야 할 텐데. 그런데 지도자 양성도 없이 그냥 미래를 맞는다는 것도 참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이를 어찌 할꼬, 탄식만 하고 있자니 답답하지요. 정말 답답하고 우울해집니다. 다른 거의 모든 분야에서 K - ㅇㅇ 이렇게 나아가고 있는데 유독 정치만 바닥을 헤매고 있는 듯합니다. 어서 세대 교체가 이루어져야 하는 문제입니다. 소위 늙은 닭들이 우리 젊은이들의 미래까지 암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습니다.
우리는 12월 초까지 단풍을 보는 시대에 살게 되었습니다. 한달이나 미루어진 것입니다. 세상에! 대단하지 않나요? 빨간 단풍에 하얀 눈이 기막히게 어우러진 가을의 끝이었지요. 대단한 광경이지만 이게 대단한 현실로 다가올 때가 멀지 않구나 싶어 역시 걱정됩니다. 동태와 꽁치가 진작 저 멀리 북쪽으로 올라간지도 꽤 됩니다. 이제 땅에서는 사과가 올라가고 있답니다. 대신 바나나가 올라오고 있지요. 우리의 겨울 이야기도 언제 끝날지 모릅니다. 난방비 적게 든다고 좋아할 일이 아닙니다. 여름날 예어컨 비용이 훨씬 비쌉니다. 이게 보통일입니까? 점점 보통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피부로 느낄 때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습니다. 얼마나 더 살아야 하나 셈을 해봅니다. ㅋㅋ
2024, 12월이라, 대단한 연말입니다. 산타할아버지가 사람 하나 담아와주면 좋겠습니다. 덕스럽고 똑똑하지만 따뜻한 사람으로, ㅎㅎ 우리나라는 그래도 복 받은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대 - 한민국!! 선진들이 피 훌려 지킨 나라, 어디 감히 넘봅니까? 힘을 냅시다. 언제나 백성이 이깁니다. ㅎㅎ
복된 주말입니다. ^)^
2024년 12월 7일 김종우 목사 드림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아가 8 : 6)
<청설>
‘첫눈에 반하다’는 일이 생깁니다. 그 모습 지워지지 않습니다. 가능하다면 둘이서 만나고 싶어집니다. 먼저 말을 걸여야 합니다. 쉽지 않지요. 어떻게든 기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주변을 맴돌기도 합니다. 다행히 서로 멀지 않은 거리에서 오가고 있다면 말 그대로 행운이지요. 기회를 만들 만한 여건을 보다 쉽게 찾을 수도 있을 테니 말입니다. 그래도 때로는 공을 들여야 합니다. 아무튼 마음이 자꾸 가고 있으니 기꺼이 자신을 투자합니다. 사실 정작 맞닥뜨려도 첫마디 꺼내는 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글쎄, 사교성이 왕성한 사람이라면 그닥 어렵지도 않겠지만 일반적으로 처음 이성에게 도전하는 젊은이라면 이 또한 난관이기도 합니다.
스쿠터로 배달을 가고 있는데 마침 비슷한 스쿠터를 가지고 낑낑거리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말 그대로 절호의 기회를 만난 것입니다. 일단 바쁜 상황을 이해하고 스쿠터를 바꿔 타도록 합니다. 당장 급한 ‘여름’이에게는 어쩔 수 없이 택해야 하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연락처를 알려주고는 고맙다고 인사하고 떠납니다. ‘용준’이는 친구가 일하는 정비소로 가서 잘 처리해줄 것을 부탁합니다. 이튿날 청소까지 깨끗이 하여 마치 새 것처럼 만들어서 돌려줍니다. 그리고 서로 친구가 되자고 합니다. 빠르게 많이 진전되었습니다. 용준이는 기분이 그야말로 하늘을 나는 듯합니다. 나이 스물 여섯, 동갑입니다. 사실 그래서 친구하자는 말도 쉽게 나온 듯합니다.
배달 나가기 싫어하던 녀석이 갑자기 나서서 배달을 나갑니다. 그리고 표정이 전같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그런가보다 했는데 아무래도 뭔가 수상하지요. 특히 여자들은 눈치가 빠릅니다. 저 녀석 분명 무슨 일이 있었구나. 아니 무슨 일에 엮었구나 싶지요. 맞아 여자를 만난 거야, 엄마는 이미 눈치챕니다. 도대체 누구일까 궁금하지만 대놓고 물어볼 수도 없습니다. 아직 어디까지 나아갔는지도 모르겠고 얼마나 빠져있는지도 잘 모릅니다. 자칫 괜히 상처 입울 수도 있기에 잠잠히 기다립니다. 취업준비가 어떻게 되는지 하는 문제로 신경 쓰다가 어느 날 갑자기 돌변한 것이기도 합니다. 나이 스물여섯, 하기야 그럴 만한 때도 지나기는 했습니다.
‘가을’이가 보기에도 언니의 표정이 달라졌습니다. 뭔가 이상합니다. 자기와 있을 때는 핸드폰 볼 일도 거의 없는데 매양 핸드폰을 끼고 있습니다. 누군가 있다는 증거지요. 슬쩍 건네봅니다. 그래, 맞아. 누구야? 그냥 친구. 하기야 처음부터 애인이라고 하기에는 그렇지. 아무튼 언니에게 좋은 사람이 생긴 듯합니다. 그리고 함께 만나는 기회도 가집니다. 하루 시간을 내어 소풍을 다녀오고 집으로 항하는 길 가을이는 먼저 자리를 비켜줍니다. 일부러 두 사람의 시간을 만들어주고 싶은 것이지요. 시간을 보내는 동안 먼저 돌아가 잠자리에 든 가을이가 사고를 당합니다. 화재가 발생하여 피하는 동안 연기를 흡입하고 말았습니다. 목숨은 건졌지만 몸이 예전 같지는 않습니다.
가을이는 수영선수로 국가대표가 되어 올림픽에 나갈 목표를 가지고 훈련 중입니다. 이를 위해 언니인 여름이가 뒤치다꺼리를 다 해주고 있습니다. 살림을 도맡아 하고, 시간 맞춰서 수영장에 실어다 주고 데려오고 합니다. 나머지 시간 아르바이트하며 생활비와 훈련비를 마련합니다. 좋은 성적으로 예선 통과, 조금만 더 노력하면 대표 선발에서 발탁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그 즈음 사고를 당한 것입니다. 이제 예전 같은 힘이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실망과 낙담으로 주저앉습니다. 언니가 다독여줍니다. 괜찮아, 너는 할 수 있어. 그런데 사실 가을이는 자신보다는 언니가 더 가엾게 보이는 것입니다. 도대체 언니는 뭐 하는 거야? 자기는 없고 동생만을 바라보고 사는 듯합니다.
목표가 뭐예요? 가을이 올림픽 출전하는 거요. 그러고 나면 뭐 할 건데요? 예? 잘 모르겠는데요. 그랬습니다. 여름이는 자기 삶이 없었던 것입니다. 더구나 가을이 사고 당하고는 좋아하는 용준이와도 강제 이별을 통보하였습니다. 만나지도 연락도 하지 말자고요. 자기에게 짐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용준이 당연히 상처 받고 돌아섰지만 이유가 석연치 않습니다. 도대체 왜? 뭐가 잘못되어서? 사실 여름이 자기 때문에 용준이마저 힘들까봐 마음과 달리 멀어지려 한 것입니다. 이래저래 마음이 정리되지도 않고 모든 게 힘들게 느껴집니다. 시골의 부모님을 찾아갑니다. 어쩌면 부모님을 대신하여 가을이에게 부모님 역할을 해주고 있던 것입니다.
부모님의 입장을 듣습니다. 여름아 너만한 효녀도 없어. 하지만 우리도 남들 못지않게 행복하게 잘 살고 있어. 우리 생각하지 말고 너 자신의 인생을 만들도록 하렴. 그게 효도야. 가을이도 언니에게 말해줍니다. 언니가 부담된다고. 언니가 신경 쓰는 만큼 노력해야 한다는 짐을 안고 연습하니 너무 무겁다고. 나도 혼자서 얼마든지 할 수 있어. 그러니 언니도 언니 삶을 만들도록 해. 부모님 말씀대로 어찌 보면 과한 ‘동정’에 매달렸던 것인지도 모른다는 깨달음을 갖습니다. 가을이의 간청으로 다시 용준을 생각합니다. 용준이도 어디서 잘못되었는지 되돌아봅니다. 그리고 연습하던 수영장을 찾아갑니다. 그리고 여름이를 만납니다. 영화 ‘청설’(Hear Me: Our Summer)을 보았습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반전 또한 묘미 있습니다.
부자가 왜 지옥에?
코로나19로 긴 시간 힘들었습니다. 물론 아직 끝난 것도 아닙니다. 더구나 변종이 생겨서 여전히 위협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병에 대한 두려움은 언제나 있습니다. 사실 아직도 코로나보다 더 두려운 것은 암 아닙니까? 각종 암은 늘 우리 가까이 있습니다. 나는 아니겠지, 하고 살고 있을 뿐이지요. 나이가 있어서인지 장례식장을 종종 다녀옵니다. 한 번은 저에게 장례식까지 인도해달라는 부탁을 하여서 처음부터 장례식까지 그리고 벽제에 있는 시립승화원까지 다녀왔습니다. 예배를 드리며 말씀을 전하지요. 그 때 말씀을 전하면서 느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성도들에게도 모두 필요한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렇게 함께 나누게 되었습니다. 아니, 장례식장도 아닌데 우리가 왜 이 말씀을 들어야 하는가, 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언제 이것이 나의 현실로 다가올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모두 죽지 않을 것처럼 살고 있습니다. 물론 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 주님이 오신다면, 그렇지요? 그런데 그 날이 오늘이 될지 내일이 될지 아니면 1년 후가 될지 모릅니다. 더구나 살아있는 동안 오실지, 아니면 우리가 죽고 나서 오실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러니 대비하는 것입니다. 모르고 사는 것보다는 알고 사는 것이 낫고 알고 준비하는 신앙이 바람직하다는 것이지요.
오늘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장례식 때만 듣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더 필요한 말씀입니다. 바로 준비하는 문제 때문입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그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보겠습니다.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부자이고 한 사람은 가난하다 못해 거지입니다.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부자의 이름은 없고 거지의 이름은 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기를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고 하지요. 그런데 이 부자는 부자로 잘 살았음에도 이름이 없습니다. 오히려 거지는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 사람답게 산 겁니까? 물론 우리들 가운데는 ‘난 그래도 부자로 살고 싶다,’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배고픈 소크라테스보다 배부른 돼지가 낫다, 그 말이지요. 그렇습니까? 아 물론 가장 바람직한 것은 배부른 소크라테스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은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저 우리의 희망사항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도 아브라함과 이삭의 복을 주신다면 그렇게 될 수도 있겠지요. 우리 모두 그런 성도가 되면 좋겠습니다.
자 이제 말씀 보겠습니다. 눅 16 : 19 - 22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어떻게 살았든 두 사람이 어떻게 되었더라? 죽었다는 것입니다. 부자도 죽고 거지도 죽었다는 사실이지요. 거지는 죽고 부자는 안 죽고, 그런 일은 없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에 생깁니다. 제가 가까운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처음 경험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인 것으로 기억합니다. 친할머니가 우리 가족과 몇 년을 함께 사셨습니다. 나중에 중풍으로 한 3년 고생하시다 돌아가셨습니다. 꼼짝 못하시고 누워서 사셨기에 어머니가 병 수발을 다 하셨습니다. 사실 할머니보다 어머니가 고생을 하신 것이지요. 아무튼 그런데 할머니가 저를 유독 사랑하고 좋아하셨습니다. 그래서 돌아가신 후 어리지만 저는 화장터까지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주변 어른들이 말씀해주었습니다. 할머니 이제 돌아가셨다고요. 그 때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돌아가셨다고? 어디로? 어디로 돌아가셨을까? 우리는 어디로 돌아가지요? 물론 저도 그랬고 우리 가족이 그 때는 예수를 알지도 못하던 때입니다. 돌아가셨다고 말하는 그 사람들도 어디로 돌아가는지 알까요, 모를까요? 모르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말합니다. 돌아가셨다고 말입니다. 분명 어딘가로 돌아가는 모양입니다. 단지 어디인지 모를 뿐입니다. 지금도 그냥 돌아가셨다고 말할 뿐입니다. 어디인지 말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답은 이제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가르쳐주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 그 답이 있습니다. 그런데 답이 두 개입니다. 가는 곳이 두 곳이란 말입니다. 거지가 간 곳과 부자가 간 곳이 같습니까, 다릅니까? 다릅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여기서 준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야 하는 곳이 어디서 결정된다고요?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여기서 결정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되는 대로 살아서는 된다, 안 된다? 안 된다, 그 말입니다. 장차 우리가 가는 곳이 지금 살아있는 여기서 결정되기 때문에 준비해야 합니다.
보겠습니다. 눅 16 : 22 - 23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자 여러분은 이 장면을 보고 이제 부자이기를 원하십니까, 거지이기를 원하십니까? 천국과 지옥이란 용어는 나타나지 않았어도 그 내용을 보면 금방 알겠지요? 거지는 어디 있고 부자는 어디 있습니까? 예, 거지는 천국에 있고 부자는 지옥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질문해보아야지요. 왜 이런 결과가 나왔는가? 부자는 다 지옥 갑니까? 그런 이야기가 아니지요. 교회 다녀본 성도는 이 말씀에 대해서도 설교를 들은 기억이 날 것입니다. 그다지 어렵지 않습니다. 부자는 자기 집 문간에서 구걸하는 이 불쌍한 거지를 돌아볼 줄 모르는 아주 인색한 자였습니다. 그래서 지옥 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여태 그렇게 듣고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또 말씀을 보니 그렇게 생각도 듭니다. 이 부자는 인간의 기본적인 자비심도 없는 아주 못된 사람입니다. 그러니 지옥 가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그렇다면 거지도 생각해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거지 나사로는 왜 천국에 가야만 합니까? 그만큼 착한 일을 했습니까? 보겠습니다. 20 - 21절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한 일이라고는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한 것뿐입니다. 여러분 부자의 상 밑에 가서 그 떨어지는 것 주워 먹으면 천국 갑니까? 이게 도무지 말이 됩니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말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이 도대체 무엇을 말씀하려고 이 부자와 거지 나사로 이야기를 하셨을까요? 부자가 되어도 가난한 사람들 도와주며 착하게 살라고, 이 이야기를 성경에 기록하셨습니까? 그런 건 세상 윤리 도덕책에나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래요, 안 그래요? 도대체 이 거지 나사로가 무엇을 잘한 것이 있어서 천국에 가야 합니까? 그리고 부자는 자기 재산 가지고 잘 먹고 잘살았는데 왜 지옥에 가야 합니까? 이해하기 힘들지요.
우선 이것부터 알아야 합니다. 이 부자는 하나님을 알고 있다, 모르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자다, 아니다? 이 부자가 지옥에서 뭐라고 하지요? 23 - 24절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이 부자가 누구를 부릅니까? ‘아버지 아브라함이여’하고 부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는 누구의 자손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밝히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시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누구 백성입니까? 하나님 백성입니다. 확실하게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이 어디 갈 수 있다는 말입니까? 지옥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백성이면 당연히 천국 가야 하는 것으로 알고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보니 그렇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 백성이 지옥에 갑니다. 왜 하나님 백성이 지옥에 갑니까? 이상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기 있는 우리들도 지옥 갈 수 있다는 뜻 아닙니까? 도대체 어쩌란 말인가요?
그러나 하나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우리가 잘못 알고, 잘못 믿고 있었을 뿐입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불신자 즉 이방인이 지옥 간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말할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당연한 말을 뭐하려고 합니까? 시간 낭비 아닙니까? 다시 되새깁니다. 성경은 무슨 책입니까? 구약과 신약, 즉 약속입니다. 약속은 모르는 사람들이 합니까, 아는 사이에서 합니까? 서로 아는 사이에서 합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택한 백성 즉 이스라엘과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에게 말씀하십니다. 오늘날은 누가 하나님 백성입니까?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하나님은 저 불당에 있는 사람들이나 이슬람사원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 교회에 있는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듣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백성 앞에 항상 두 가지 길이 있음을 말씀하십니다. 복과 저주, 생명과 사망의 길입니다. 즉 우리 앞에는 늘 이 두 가지 길이 놓여있음을 알고 신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가 택합니까? 우리 자신이 택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끌고 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우리 자신이 택합니다.
그런지 아닌지 보겠습니다. 신 11 : 26 - 28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 누가 복을 받고 누가 저주를 받습니까? 둘 다 하나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요, 안 들으면 저주입니다. 신 30 : 15 ”보라 내가 오늘날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 그렇다면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어느 쪽일까요? 당연히 복을 받기 원하십니다. 19절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그렇지요? 우리가 우리 자식 복 받기를 원하듯이 우리 하나님도 그 백성이 복 받기를 원하십니다. 문제는 하나님은 그렇게 원하셔도 백성이 따라간다, 안 따라간다? 그렇습니다. 말을 듣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저주를 받고 사망의 구렁텅이에 빠지는 것 곧 지옥 가는 것이 누구 탓이다? 하나님 탓, 내 탓? 누구를 탓합니까? 다 우리 자신 탓입니다.
자 이제 하나님 믿는 이 부자가 왜 지옥에 가야하고 나사로가 왜 천국에 가야하는지 보겠습니다. 성경이 세상 윤리 도덕 수준의 말씀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그 이야기하자고 이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 이야기는 세상에도 다른 종교에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건가요? 부자를 다시 봅니다. 눅 16 :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이 부자가 얼마나 잘 꾸몄는지 보입니까? 성경에서 옷은 무엇을 말씀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계 19 : 8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옷은 성도의 행실입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행실은 세마포 흰옷 즉 옳은 행실입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화려하게 꾸몄습니다.
예수님이 서기관 바리새인들에게 뭐라고 질타하셨지요? ‘외식하는 서기관 바리새인들아’ 그러셨죠? 외식, 겉을 꾸미는 자들이란 말입니다. 이 부자가 그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옳은 행실은 무엇입니까? 부모님 공경하고 도적질하지 않고 등등, 제발 그 수준 넘어갑시다. 예수님 당시 옳은 행실은 바로 율법을 이루시고 그것을 증거하시는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옳은 행실입니다. 한 마디로 서기관 바리새인들을 떠나 예수님을 따라가는 것이 옳은 행실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신약시대의 진리의 말씀은 무엇일까요? 생각해봐야 하지 않습니까? 그냥 교회 다니기만 하면 됩니까? 이 시대의 진리의 말씀이 무엇인지 찾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시대를 분별하라고 말씀하신 것은(눅 12 : 56) 그 시대를 따라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다음으로 이 거지 나사로는 어떻게 천국을 갈 수 있었는지 보겠습니다. 우리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답니까, 부자가 복이 있답니까? 마 5 :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가난한 것은 맞는데 무엇이 가난한 자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답니다. 그래서 어디 간다고요? 천국이 저희 것이랍니다. 그러니 돈 없고 집 없고 차 없고, 그런 가난한 자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돈 많고 집 있고 차 굴리고 그런 부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시 말합니다. 성경은 세상 이야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사로가 하나님 말씀에 갈급하였다는 말입니다. 혹시나 부자에게 먹을 것이 있나 싶어서 그 대문에 누워 뭐 떨어지는 것은 없나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있어요, 없어요? 거기서 떨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의 계명입니다. 먹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그나마 있는 자기 것을 개들이 와서 핥습니다. 개들이 빼앗아가는 것입니다. 이 개도 개가 아니라 사람을 비유하는 것입니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 세상에서는 충성스런 개도 있지만 성경에서 비유하는 개는 그다지 좋지 않습니다. 벧후 2 : 22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때문에 경고해줍니다. 빌 3 : 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나쁜 줄 알고 토했다가 나중에 다시 그 나쁜 것으로 돌아갑니다. 사람의 계명인 줄 알고 버렸는데 다시 그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지요. 진리의 말씀 앞에 왔다가 옛날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배신하는 자입니다.
그 배신자들이 거지 나사로의 그나마 가진 것조차 핥아 빼앗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의인의 고난이 크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성경을 누가 가지고 있었습니까? 서기관 바리새인들 제사장 율법사들입니다. 그런데 그 성경을 가지고 하나님의 계명을 전합니까, 사람의 계명을 전합니까?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멀다고 하였지요. 마 15 : 8 - 9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 하시고” 오늘날은 어떨까요? 교회마다 설교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계명이 나오기를 소망합니다. 그런데 하늘의 소리가 많습니까, 땅의 소리가 많습니까? 하나님의 계명입니까, 사람의 계명입니까? 잘 분별하여 먹어야 될 줄 압니다. 내가 무엇을 먹고 있는 줄도 모르고 무조건 아멘, 아멘 했다가는 독을 마시는 것입니다.
정리해봅니다. 하나님 백성 앞에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천국이고 또 하나는 지옥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신자는 천국, 불신자는 지옥’ 이 사고방식부터 지워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우리 신자들 속에서 나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한 밭에 곡식과 가라지가 함께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 13 : 29 - 30 “주인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어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숫군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곳간에 넣으라 하리라” 언제 나뉩니까? 추수 때, 곧 세상 끝, 주 재림 때입니다. 그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아무튼 한 밭 곧 한 교회에 다닌다고 안심할 일이 아닙니다. 주 재림 때 나뉩니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둘 다 하나님 믿는다고, 예수님 믿는다고 교회 다니고 있습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 부르짖습니다.
하나 더 경고합니다. 서기관 바리새인들, 유대인들도 자기네 아버지는 한 분 하나님이라고 확고하게 믿었습니다. 문제는 그들이 믿는 하나님이 예수님이 아버지라고 부르시던 하나님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요 8 : 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그들이 믿는 아버지 하나님은 사실, 하나님이 아니라 마귀였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누구일까요? 입으로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런데 과연 어떤 하나님일까요? 무엇으로 확인합니까? 오늘 세상에서 친자관계 확인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유전자 확인입니다. 즉 그 아비의 씨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씨를 가지고 있다면 오케이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씨가 무엇입니까?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눅 8 : 11) 교회마다 하나님 말씀 아니라고 전하는 곳은 없습니다. 모두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옛날 서기관 바리새인들도 하나님 말씀이라고 전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의 계명’이라고 평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에서 전해지는 말씀이 과연 하나님의 계명인지 사람의 계명인지 분별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지막 때를 이야기하시며 마지막 결론에서는 ‘때를 따라 양식을 주는 종’을 찾으신 것입니다. 이 양식이 육의 양식이 아니라 우리 영의 양식 곧 하나님 말씀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을 것입니다. 문제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때를 따른 양식’ 곧 시대에 맞는 하나님 말씀이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오셨는데 율법에 매여 있다면 시대착오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 다시 오시면 똑같습니다. 그 때에 맞는 말씀을 양식으로 주십니다. 그런데 초림 때 유대인들처럼 묵은 포도주에 매여 있으면 버림당할 것입니다. 새 것을 찾아가야 합니다.(마 26 :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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