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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4월 27일 금요일 [(백) 부활 제4주간 금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바오로 사도는 피시디아 안티오키아의 회당에서,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그들의 후손인 우리에게 실현시켜 주셨다고 말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시며, 당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고 하신다(복음).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약속을 실현시켜 주셨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13,26-33 그 무렵 바오로가 피시디아 안티오키아에 가 회당에서 말하였다. 26 “형제 여러분, 아브라함의 후손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 파견되셨습니다. 27 그런데 예루살렘 주민들과 그들의 지도자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고 단죄하여, 안식일마다 봉독되는 예언자들의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였습니다. 28 그들은 사형에 처할 아무런 죄목도 찾아내지 못하였지만, 그분을 죽이라고 빌라도에게 요구하였습니다. 29 그리하여 그분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을 그들이 그렇게 다 이행한 뒤, 사람들은 그분을 나무에서 내려 무덤에 모셨습니다. 30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일으키셨습니다. 31 그 뒤에 그분께서는 당신과 함께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이들에게 여러 날 동안 나타나셨습니다. 이 사람들이 이제 백성 앞에서 그분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32 그래서 우리는 여러분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우리 선조들에게 하신 약속을, 33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다시 살리시어 그들의 후손인 우리에게 실현시켜 주셨습니다. 이는 시편 제이편에 기록된 그대로입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4,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1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2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 3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4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 5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입니다. 선택은 본능에 따르는 경우도 있고, 취향이나 가치관을 따르기도 합니다. 어떤 선택이든 그 선택의 결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에, 선택에 대한 후회는 우리 마음을 언제나 산란하게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도 선택에 따른 확신이 서지 않을 때마다 혼란을 겪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와 기적을 보면 확신이 서다가도, 예수님께서 수난을 예고하시거나 율법 전통과 다른 내용을 가르치실 때마다, 정말 이분이 메시아가 맞을까 하는 고민도 생겼을 것입니다. 토마스는 불안감을 떨치지 못하고,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고 싶어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분명하고도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내가 가야 할 길이 분명하고, 그 길이 보편적인 진리이자 내게 생명을 주는 길이라면, 주저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길은 세상의 논리로 쉽게 따르기 힘든 길처럼 보입니다. 메시아라면 어떤 세속의 권력을 넘어서야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으신데도 불의하게 사형 선고를 받으셨고, 십자가에 처형되셨으며, 무덤에 묻히셨기 때문입니다. 의심과 불신은 인간적인 고뇌에서 생깁니다. 그러나 믿음의 확신은 이 불신을 넘어 예수님의 부활과 제자들의 복음 선포의 진실성을 받아들이는 결단에서 나옵니다. 누군가 예수님의 고난의 길에 동참하고서 부활의 기쁨을 누린다면, 그것이 가장 훌륭한 삶의 권위이자 확신이 아닐까요?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어떤 오해와 편견에도 흔들림 없이 신앙을 지켜 가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께 모든 것을 맡기면, 그분께서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는 믿음을 주님께 청해 봅시다.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 |
평화의 장인(匠人) 그토록 학수고대하던 남북정상회담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강경한 대치와 반목의 10년 세월이 가고, 거짓말처럼 해빙과 화해의 봄이 찾아온 것, 정말이지 꿈만 같습니다. 갑자기 마주한 기적같은 상황 앞에 너무 좋아 가끔씩,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자문하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민족을 저버리지 않으셨음에 깊이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이런 좋은 분위기가 이 땅 위에서 항구히 지속되고 진전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한반도를 극진히 사랑하시고, 오랜 분단의 세월로 인해 남북한 백성들이 겪어온 큰 고통에 가슴 아파하시는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축하와 격려의 메시지를 보내주셨습니다. 참으로 고마운 영적 아버지요 착한 목자이십니다. 격려의 메시지 끝에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특별한 문장 하나를 쓰셨습니다. 이탈리아어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Artigiani della pace.’ 한국 말로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평화의 장인(匠人)’ 혹은 ‘평화의 달인(達人).’ 교황님께서 분쟁 지역인 중동지역이나 난민들의 많이 발생하는 지중해 연안국가들을 방문하셨을 때에도 자주 사용하셨던 말씀입니다. 이토록 은혜로운 시기, 국가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 교황님의 당부 말씀을 마음 깊이 새겨야겠습니다 “남북 두 정상과 남북한 국민들은 평화의 장인(匠人)이 되어주십시오!” 남북간의 화해, 평화 통일 같은 일은 대통령이나 정부 당국자들의 일로만 망각하지 말아야겠습니다. 국민들 모두도 각자의 자리에서 평화의 장인, 평화의 사도로서의 역할을 해나가야겠습니다. 우리 민족의 오랜 염원이었던만큼 깊은 관심을 갖고, 온 몸과 마음으로 동참해야겠습니다. 특별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열심한 기도가 필요한 때입니다. 남북간의 대치과 긴장을 통한 분단의 고착화를 자신들의 배경이자 자산으로 삼고 살아온 일부 정치인들과 기자들에게 한반도 ‘해빙 무드’는 견디기 힘든 사건이 될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궤변과 억지에 일일이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수녀님들의 연례피정을 동반하면서 깜짝 놀란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수녀님들께서는 오래 전부터 수녀회 차원에서,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비핵화, 그리고 남북간의 화해와 긴장 완화, 경제 협력을 위해 정말 열심히 기도하고 계셨습니다. 만명 이상 되는 이땅의 수녀님들께서 한 마음, 한 목적으로 지향을 두고, 지극정성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바치신 기도에 주님께서 응답하시고, 또 성모님께서 도와주셨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습니다. 이토록 은혜롭고 경사스런 자리를 마련하기까지 수고하신 새 정부와 관계자들께 진심을 감사를 드립니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준비하셨으니, 내일 회담도 잘 성사될 것입니다. 이번 기회에 남북간의 긴장과 적대 관계가 말끔히 해소되길 수녀님들과 함께 열심히 기도합니다. 이번 회담을 통해 오랜 갈등과 불안의 원인이었던 비핵화 문제도 잘 해결되길 기원합니다. 이번 만남을 통해 단절되었던 남북간의 교류가 활기차게 재개되길 바랍니다. 멎었던 개성 공단이 재가동되고, 금강산 길도 다시 한번 재개통되면 좋겠습니다. 금강산길만 아니라 묘향산, 백두산 가는 길까지 활짝 열려,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평화 통일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향한 첫걸음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토록 중요한 국가적 대사를 앞두고 있는 우리나라와 민족을 위해 주님께서도 덕담을 한 마디 던지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요한복음 14장 6절)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께서 오늘 우리 민족에게 바라시는 바는 바로 평화의 길을 걷는 것입니다. 거짓과 계략이 아니라 마음 속에 오래 묻어둔 진솔한 대화를 통해 진리의 길을 찾는 것입니다. 반목과 전쟁을 통한 죽음이 아니라 용서와 화해를 통해 우리 모두 생명, 더 나아가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헬렌 켈러는 이런 말들을 남겼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보다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나의 생애에서 닥쳐오는 모든 고난은 하늘이 값없이 내리는 은혜다.”
“다른 사람에게는 내가 가는 길이 어두울 것으로 여기겠지만 나는 내 마음 속에 신비한 빛을 가지고 산다. 신앙이라는 강한 영적 등이 내 길을 비춰 주는 것이다.”
헬렌 켈러에게 신앙은 그녀의 삶을 행복으로 바꾸어준 가장 중요한 삶의 등불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녀는 신앙을 가지고,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못했던 자신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가 Water라는 한 글자를 배우는 데는 앤 설리반이라는 선생님의 7년 동안의 끊임없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헤렌 켈러는 출생 후 19개월 때 심한 열병으로 눈과 귀를 사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녀에게 이 세상은 암흑이고 빛이 무엇인지, 꽃이 무엇인지도 몰랐습니다.
동물과 같았던 것입니다.
그녀가 하버드 대학의 래드클리프 칼리지에 입학하여 우등으로 졸업했을 때 전 세계가 놀랐습니다.
그녀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에는 앤 설리반 선생님이 평생을 그녀를 위해 바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앤 설리반 선생님 덕에 신앙을 알게 되었고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앙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헬렌 켈러가 하느님의 존재를 알기 이전에 이 세상을 먼저 알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알게 해 준 데는 설리반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설리반 선생님이 없었다면 헬렌이 신앙을 갖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아버지께 가기 위해서는 먼저 그 파견자이신 그리스도를 알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갈 수 없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파견하셨다면, 우리와의 거리가 너무 멀기 때문에 그 길을 내어주셨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 길을 통하지 않는다면 절대 아버지께 도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이 아버지께로부터 파견 받으신 것처럼 ‘교회’를 파견하셨습니다.
이 말은 또한 교회를 통하지 않고서는 당신께 올 수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교회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교회를 파견한 당신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고, 또한 당신을 파견한 아버지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아버지께서 세상에 오실 수는 없으셨을까요?
혹은 예수님이 지금까지 남아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실 수는 없으셨을까요?
아버지께서 세상에 오실 수 있으셨다면 아들을 파견하실 이유가 없으셨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와의 수준차이 때문입니다.
헬렌 켈러가 보고 들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곧바로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지닐 수 없는 차이와 같습니다.
저도 한 때 요한 바오로 2세의 손에 친구를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분의 손은 이웃집 아저씨의 손과 같이 편안했지만 감히 그분의 손에 입을 맞추지 못하고 입술이 손의 근처까지 갔다가 멈추었습니다.
그분이 교황님이기는 하지만 한 인간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두렵고 떨리는데 만약 지금 예수님이 나타나신다면 우리가 감당할 수 있을까요?
우리 삶은 굳어져서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보고 죽지 않는 자가 없다고 성경을 말합니다.
그분을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처지란 뜻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나이 산에서 하느님께서 머물러 계실 때 감히 그 근처에도 가지 못하고 벌벌 떨며 귀를 막았습니다.
오직 모세만이 그 위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모세만을 그들에게 파견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모세를 통하지 않고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만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가리옷 유다는 예수님이 나타나셨다고 하더라도 견디지 못하고 또 목을 맸을 것입니다.
물 위를 걸었던 베드로도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하고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떳떳이 만날 수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 안아주셔서 간신히 고개를 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3년 동안 함께 있었고 수많은 기적을 체험한 베드로도 그렇게 예수님을 감당하기 어려운데 우리가 감당해 낼 수 있을까요?
만약 그분을 감당할 수 있다면 성모님처럼 깨끗한 사람이거나 그분이 당신을 너무나 가려서 그저 한 보통 인간으로 보이거나 혹은 마귀에게 속는 것일 겁니다.
그분과 항상 함께 했던 이들도 부활하신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교회에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고 하늘나라의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권한까지 주셨는데 내가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 죄를 용서받겠다고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아버지를 직접 만나겠다는 말과 다름이 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도 사람의 모습이었지만, 제자들이 알아보지도 못하고 감당하기도 어려웠습니다.
하물며 우리 같은 죄인이 어찌 하느님을 직접 만나겠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분을 감당할 수준이었다면 이 세상에 떨어지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 갈 수 없다고 하신 더 근본적인 이유는, 당신께 오기 위해서는 당신이 파견하신 교회를 통해 오라는 말씀과 같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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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성인
성녀 지타(Zita)
신분 : 동정녀, 하녀
활동연도 : 1218-1272년
같은이름 : 시따, 시타, 지따, 치따, 치타
이탈리아 중북부 토스카나(Toscana) 지역의 루카(Lucca) 근처에 있는 몬사그라티(Monsagrati)라는 작은 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난 성녀 지타는 가난하지만 신심이 깊은 부모 밑에서 성장하였다.
특히 어머니의 보살핌과 신앙 교육으로 인해 그녀가 말을 알아듣기 시작할 때부터 하느님의 사랑을 깨달았을 정도였다. 12세의 어린 나이로 루카의 파티넬리(Fatinelli) 가문의 하녀가 된 그녀는 그곳에 평생 머물며 48년 동안 하녀로 일하였다.
그녀는 근면하고 열심하였을 뿐만 아니라 극도의 고행을 실천한 관계로 주인 부부는 물론 동료들의 시기와 음모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노동이 인간이 지은 죄에 대한 일종의 보속행위라고 생각하고 감사와 순명의 정신으로 모두를 대해 끝내는 그들을 감동시켰다.
시간이 흐른 후 하인들의 책임자가 되고 주인 부부로부터도 많은 재산을 받았지만 그녀는 이를 자선사업을 위해 사용하였다. 그녀는 가난한 사람들과 감옥에 갇힌 범법자들에게 사랑을 베풀었으며 많은 기적적인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성녀 지타는 신심이 매우 깊었고 기도하는 가운데 자주 탈혼 상태에 빠지곤 하였다. 탈혼에 빠져 있는 동안 그녀가 하던 빵 굽는 일 등을 천사가 와서 대신 해 주었다고 한다.
성녀 지타는 죽음이 가까웠을 때 고통 속에서 자신이 죽을 날짜를 알게 되었고, 임종일이 되자 자청하여 병자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1272년 4월 27일 55세로 루카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자 루카 지역을 중심으로 그녀를 공경하는 풍습이 빠르게 퍼져 나갔고, 결국 영국까지 전해졌다. 특히 가사를 담당하거나 집사를 담당하던 이들이 그녀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성녀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이 일어나고 몇 차례 성녀의 관을 공개할 때마다 시신이 썩지 않고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음이 확인되자 마침내 1696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Innocentius XII)는 지타의 시성식을 거행하고 그녀에 대한 공경을 공식적으로 허용하였다.
그리고 1748년 교황 베네딕투스 14세(Benedictus XIV)는 성녀의 이름을 로마 순교록에 기입하였다. 그녀는 1953년 9월 26일 하인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그래서 성녀 지타는 교회미술에서 주로 하인 복장을 하고 열쇠 꾸러미와 물 항아리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그녀는 영국에서 시타(Sitha) 또는 치타(Citha)로 불린다.
성 라파엘 아르나이즈 바론(Rafael Arnaiz Baron)
신분 : 수사
활동연도 : 1911-1938년
성 라파엘 아르나이즈 바론(Raphael Arnaiz Baron)은 1911년 4월 9일 에스파냐 부르고스(Burgos)의 한 부유한 그리스도인 가정에서 네 형제의 맏이로 태어났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몇몇 학교에 다녔고, 영성적 주제와 예술에 대한 감성은 어린 시절부터 두드러졌다. 이러한 자질들은 그가 열정적인 유머와 존경심과 겸손함을 갖고 세상을 향해 개방적이고 활발한 태도를 견지하도록 훌륭하게 균형을 잡아주었다.
그러던 중 발열과 늑막염의 발작으로 공부를 중단해야 했다. 그가 건강을 회복했을 때 아버지는 그를 사라고사(Zaragoza)의 기둥의 성모 대성당에 있는 기둥의 성모에게 봉헌하도록 했고, 가족들은 그가 중등교육을 수료한 오비에도(Oviedo)로 이사했다.
1930년 성 라파엘은 마드리드(Madrid)에서 건축학 공부를 시작했다. 그리스도께 헌신하려는 그의 마음이 더욱 깊어진 것도 그 해였다. 그는 중등교육을 완벽히 마친 후, 그 해 여름 마케다(Maqueda)의 공작과 공작부인인 그의 삼촌과 숙모의 집이 있는 아빌라(Avila) 근처에서 휴가를 보냈다. 삼촌과 숙모는 그에게 산 이시도로 데 두에나스(San Isidoro de Duenas)의 트라피스트 수도원을 소개해주었고, 그는 그곳의 아름다움과 기도 분위기에 깊이 매료되었다.
그는 그곳에서 성소를 느꼈지만 분명 활동적인 직무를 수행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래서 그는 마드리드에서 건축학도로서의 길을 포기하고, 엄률 시토회(트라피스트회) 안에서 ‘절대자’의 신비를 찾기로 결심하였다. 1934년 1월 16일 23세의 나이로 수도회에 입회하며 기쁘게 수도생활을 받아들였다. 그는 자신의 입회 결정에 대해 고통이나 실망에 자극받아 이루어진 것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삶 안에서 주어진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주고자 하시는 무한히 선하신 하느님에 의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성 라파엘은 그레고리안 성가와 시간전례(성무일도)의 수도원 선율에 깊이 빠져드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의 어머니와 삼촌과 숙모, 친분이 있던 사람들에게 많은 편지를 썼고, 그의 어머니는 그가 죽은 후에 이 편지들을 모아 책으로 냈다.
수도회에 입회하고 네 달이 지나고, 매우 엄격하고 소박한 사순시기를 보낸 뒤 그는 급작스럽고 심각한 상태의 당뇨병에 걸려 치료를 위해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는 1935년과 1937년 사이에 네 번이나 어쩔 수 없이 집과 수도원 오가는 생활을 반복해야만 했다. 그때는 에스파냐 내전이 한창일 때였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수도원에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을 봉헌하며 공동체의 끝자리를 선택하고 바깥 가장자리에서 살게 되었다. 당시 교회법은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이 수도 서원을 행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었다. 그는 1938년 4월 26일, 불과 27세의 젊은 나이에 질병의 마지막 공격을 받고 수도원 의무실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수도원 묘지에 묻혔고, 그의 유해는 나중에 대수도원 성당으로 옮겨졌다.
그는 짧은 생애에도 불구하고 놀라우리만큼 순수한 방법으로 시토회의 은총을 온몸으로 구현해나갔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모순과 당혹스런 질병, 전쟁, 자신의 서원을 발하는 데 있어서의 무능함, 온전히 자기 자신을 포기할 때까지의 비정상적 공동체 관계 등 이 모든 것을 연속해서 겪을 수밖에 없었다. 굴욕감은 그의 일상의 동반자였다.
그의 한 가지 소망은 예수님과 성모님, 십자가, 트라피스트 수도회를 사랑하기 위해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의 성덕에 대한 명성은 에스파냐 전역으로 급속히 퍼져나갔고, 산 이시도로에 있는 그의 무덤은 많은 은혜를 받는 순례지가 되었다.
1989년 8월 19일, 산티아고 데 콤프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a)에서 열린 제3차 세계청년대회(World Youth Day)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는 성 라파엘 수사를 현대 젊은이들의 모범으로 제안했고, 1992년 9월 27일 로마에서 그를 복자품에 올렸다. 시복미사 강론을 통해 교황은 이 에스파냐 출신 트라피스트 회원을 특별히 하느님의 부르심에 무조건적으로 응답하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모범이라 칭송했다.
성 라파엘 아르나이즈 바론은 2009년 10월 11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 베네딕투스 16세(Benedictus XVI)에 의해 시성되었다. 교황은 이날 함께 시성된 다섯 복자들의 시성미사 강론에서 “새로 시성된 성인들은 인간의 이해와 계산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자기희생과 하느님에 대한 소명을 보여준 이들”이라며, 새 성인들의 거룩한 삶을 본받는 신앙생활을 해나가라고 당부했다. 성 라파엘의 축일은 선종일인 4월 26일이나 그 다음날인 4월 27일에 기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