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 依於仁 “仁에 의지하며,”
依者不違之謂 仁則私欲盡去而心德之全也 工夫至此而無終食之違 則存養之熟 無適而非天理之流行矣 의지한다는 것은 떠나가지(어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仁이란 사욕이 모두 제거되어 마음의 덕이 온전해진 것이다. 공부가 이런 경지에 이르러서 밥 한 끼 먹을 틈에도 仁에서 떠나지 않게 되면, 보존하고 기르는 것이 완전히 무르익어서(익숙해져서) 어디를 가더라도 천리가 유행하지 않는 곳이 없을 것이다.
朱子曰 依如依乎中庸之依 相依而不捨之意 此心常在不令少有走作無物欲之累 而純乎天理 道至此亦活 德至此亦活 주자가 말하길, “依는 ‘중용에 의지한다’(依乎中庸)는 依와 같으니, 서로 의지하여 버리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 마음을 항상 두어서 조금이라도 달아나지 않게 한다면, 物欲에 얽매임이 없어서 天理에 순수할 것이다. 道가 이런 경지에 이르면 또한 활발할 것이고, 덕이 이에 이르러도 역시 활발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德是逐件上理會底 得寸守寸得尺守尺 仁是全體大用相依靠處 志道據德而有一息之不仁 便間斷了 덕이란 건건마다 따라가면서 이해하는 것이니, 寸을 터득하면 寸을 지키고, 尺을 터득하면 尺을 지키는 식이다. 그러나 仁이란 全體와 大用이 서로 의지하는 부분이니, 道에 뜻을 두고 덕에 근거하더라도, 한순간의 不仁이 있기만 하면, 곧바로 중간에 끊어지는 것이다.
據德是因事發見 如因事父有孝 因事君有忠 依仁是本體不可須臾離底 又是據於德底骨子 덕에 근거한다는 것은 일로 인하여 발현되는 것이니, 예컨대 아비를 섬기는 일로 인하여 효도가 있고, 임금을 섬기는 일로 인하여 충성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仁에 의지한다는 것은 본체가 잠시라도 (仁에서) 떠날 수가 없다는 것이고, 또한 덕에 의거한다는 것의 골자이기도 하다.
陳氏曰 志道是一心向聖人路上行 據德是志道工夫成 向之所志者 今皆實得於己 如有物可執據 依仁則據德工夫熟 天理與心爲一矣 據如手執杖 依如身著衣 杖容有時而離手 衣則不容須臾離身 一節密一節也 진씨가 말하길, “도에 뜻을 두는 것(志道)은 한마음으로 성인의 길을 향하여 가는 것이고, 덕에 의거한다는 것은 志道의 공부가 이루어진 것으로, 뜻을 둔 곳을 향해 나아간 것이 지금 모두 실제로 나에게 터득되었다는 것이니, 마치 붙잡아 의거할 사물이 생긴 것과 같다. 仁에 의지한다는 것은 덕에 의거하는 공부가 무르익어서 天理가 마음과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다. 의거한다는 것은 마치 손으로 지팡이를 붙잡는 것과 같고, 의지한다는 것은 마치 몸에 옷을 착용한 것과 같은 것으로, 지팡이는 언젠가 손에서 떨어질 때가 있음이 용납되지만, 옷이라면 잠시라도 몸에서 떨어짐이 용납되지 않는 것이니, 한 마디 한마디가 말할수록 더욱 정밀해져만 간다.”라고 하였다.
西山眞氏曰 道者衆理之總名 德則行衆理而得於心者 仁則心之全德也 志乎道而弗他 可謂知所嚮矣 仁則歸宿之地而用功之親切處也 서산진씨가 말하길, “道라는 것은 온갖 이치를 총괄하여 부르는 이름이고, 덕이라면 온갖 이치를 행해서 마음에 터득한 것이며, 仁이라면 마음의 온전한 덕이다. 道에 뜻을 두고서 다른 것을 하지 않는다면, 향할 바를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仁은 곧 최종 귀착점이자 절실하게 힘써야 할 부분인 것이다.”라고 하였다. |
5 | ○ 此章言人之爲學當如是也 蓋學莫先於立志 志道則心存於正而不他 據德則道得於心而不失 依仁則德性常用而物欲不行 游藝則小物不遺而動息有養 學者於此有以不失其先後之序輕重之倫焉 則本末兼該 內外交養 日用之間 無少間隙而涵泳從容 忽不自知其入於聖賢之域矣 이 장은 사람이 학문을 하는 것이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함을 말한 것이다. 대개 배움에 있어 뜻을 세우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으니, 도에 뜻을 두면 마음이 올바른 곳에 보존되어 다른 데로 빠지지 않고, 덕에 근거하면, 도가 마음에 터득되어 잃지 않을 것이고, 인에 의지하면, 덕성이 늘상 작용하여 물욕이 행해지지 않게 되고, 예에 노닐면 작은 사물도 빠뜨리지 않고 움직이고 쉼에 항상 수양됨이 있을 것이다. 배우는 사람이 여기에서 그 선후의 순서와 경중의 차례를 잃지 않는다면, 근본과 말단이 모두 갖추어지고 내외가 서로 길러져서 날로 쓰는 사이에 조금이라도 간극이 없어서 조용히 함영될 것이니, 자신이 성현의 경지로 들어가는 것도 문득 스스로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
慶源輔氏曰 天理人欲不兩勝 一盛則一衰也 경원보씨가 말하길, “天理와 人欲은 둘 다 이길 수가 없는 것이니, 하나가 성하면 또 하나는 쇠하는 법이다.”라고 하였다.
慶源輔氏曰 不外物以求理 而常玩物理以養性 경원보씨가 말하길, “외물로써 이치를 구하지 않고, 항상 사물의 이치를 玩賞함으로써 性을 기르는 것이다.”고 하였다.
慶源輔氏曰 先後之序 謂道德仁藝之序 輕重之倫 謂志據依游之倫 先者重 後者輕也 本與內 謂道德仁 末與外 謂藝 在彼之序雖有先後 在我之倫 雖有輕重而 未嘗偏廢 所謂兼該而交養也 日用之間 如是用功 無少間隙 涵泳從容於義理事物之間 則將優游饜飫 而忽不知其入於聖賢之域矣 경원보씨가 말하길, “선후의 순서란 道德仁藝의 순서를 말한 것이고, 경중의 차례란 志據依游의 차례를 말한 것이다. 앞의 것은 중하고 뒤의 것은 가벼운 것이다. 근본과 안이란 道德仁을 가리켜 말한 것이고, 말단과 밖이란 藝를 일컬어 말한 것이다. 저것에 있는 순서에 비록 선후가 있고, 나에게 있는 차례에 비록 경중이 있을지라도, 일찍이 어느 하나라도 없앤 적이 없었으니, 이른바 겸해서 갖추어 서로 기른다는 것이다. 일상생활 중에 이와 같이 힘을 써서 조금이라도 간극이 없게 하고 義理와 事物 사이에서 조용히 涵泳할 수 있다면, 장차 여유 있게 노닐고 실컷 만족하여 홀연히 성현의 경지에 들어가도 알지 못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朱子曰 志於道 方是要去做 方是事親欲盡其孝 事兄欲盡其弟 方是恁地 至據於德 則事親能盡其孝 事兄能盡其弟 便自有這道理了 却有可據底地位 雖然如此 此只是就事上逐件理會 若不依於仁 則不到那事時 此心便沒頓放處 依於仁 則自朝至暮 此心無不在這裏 連許多德總攝貫穿 都活了 雖然 藝亦不可不去理會 如禮樂射御書數 一件事理會不得 此心便覺滯礙 惟是一一去理會 這道理脈絡 方始一一流通 無那箇滯礙 因此又却養得這道理 以此知 大則道無不包 小則道無不入 小大精粗 皆無滲漏 皆是做工夫處 故曰 語大天下幕能載 語小天下莫能破 주자가 말하길, “道에 뜻을 두었다면 바야흐로 가서 하고자 하고, 비로소 부모를 섬김에 그 효를 다하고자 하며, 형을 섬김에 그 공손함을 다하고자 하는 것이고, 바야흐로 이렇게 하는 것이다. 덕에 의거하는 것에 이른다면, 부모를 섬김에 능히 그 효를 다할 수 있고, 형을 섬김에 능히 그 공손함을 다할 수 있으니, 곧 저절로 이러한 도리를 갖고 있게 되어서, 도리어 근거할만한 입지를 갖게 되는 것이다. 비록 이와 같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그저 일 위로 나아가 건건마다 따라가 이해하는 것이니, 만약 仁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저 일에 이르지 않을 때는 이 마음은 곧 안돈할 곳이 없게 될 것이다. 仁에 의지한다면, 곧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 마음은 여기에 있지 않을 때가 없으니, 수많은 덕들조차 모두 섭렵하여 꿰고 뚫는 것이 전부 활성화될 것이다. 비록 그렇다고 할지라도, 藝는 역시 가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되니, 예컨대 예악과 활쏘기, 마차운전, 글쓰기, 셈법 같은 것 중에서 그 하나라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 마음이 곧바로 막혀버리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오직 하나하나 가서 이해해야만, 이 道理의 맥락이 비로소 하나하나 흘러 통하게 되어서, 저 막히는 것이 없게 될 것이고, 이로 인하여 또한 도리어 이 道理를 기를 수 있는 것이다. 이로써 크게는 道가 포함하지 않음이 없고, 작게는 道가 들어가지 않음이 없으니, 大小와 精粗가 모두 스며서 빠져나감이 없다는 것을 알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다 공부해야 할 부분이다. 그러므로 말하길, 큰 것을 말하면, 천하에 어떤 것도 능히 그것을 실어줄 수 없고, 작은 것을 말하자면, 천하에 어떤 것도 능히 그것을 깨뜨릴 수 없다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志者心之所之 道者當爲之理 爲君有君之理 爲臣有臣之理 志於道 留心於此理而不忘也 德者得也 旣得之則當據守而弗失 仁者人之本心也 旣有所據守又當依於仁而不違 如所謂君子無終食之間違仁 是也 游於藝一句 比上三句稍輕 然不可大段輕說 如上蔡云 有之不害爲小人 無之不害爲君子 則是太輕了 古人於禮樂射御書數等事 皆至理之所寓 游乎此則心無所放 日用之間本末俱擧而內外交相養矣 志라는 것은 마음이 가는 바이고, 道라는 것은 마땅히 해야할 이치이니, 임금이 됨에는 임금의 이치가 있고, 신하가 됨에는 신하의 이치가 있는 것이다. 道에 뜻을 둔다는 것은 이 이치에 마음이 머물러 있게 하여 잊지 않는 것이다. 德이라는 것은 얻었다는 것이다. 이미 그것을 터득하였다면 마땅히 근거하여 지켜서 잃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仁이란 것은 사람의 본심이다. 이미 근거하여 지킬 바가 있으면, 또한 마땅히 仁에 의지하여 仁과 어긋나지 않아야 하는데, 예컨대 소위 군자는 밥을 먹는 사이라도 仁에서 떨어짐이 없다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藝에 노닌다는 한 구절은 위의 세 구절에 비하면 조금 가볍다. 그러나 너무 가볍게 말해서는 안 된다. 예컨대 상채가 말했듯이 ‘그것이 있어도 소인배가 됨에는 해가 되지 않고, 그것이 없어도 군자가 됨에 해가 없다’는 것은 너무 가볍게 말한 것이다. 옛사람은 예악과 활쏘기, 마차운전, 글쓰기와 셈하기 등의 일에 모두 지극한 이치를 깃들여 놓았으니, 여기에서 노닌다면, 마음은 放逸하는 바가 없을 것이고, 일상생활을 하는 사이에 근본과 말단이 함께 거행되고 내외가 서로 길러질 것이다.
自志道至依仁 是從粗入精 自依仁至游藝 是自本兼末 道에 뜻을 둔다는 것에서부터 仁에 의지한다는 것에 이르기까지는 거친 것으로부터 정밀한 것에 들어가는 것이고, 仁에 의지하는 것에서부터 藝에 노닌다는 것에 이르기까지는 근본으로부터 말단을 겸하는 것이다.
藝是小學工夫 若論先後 則藝爲先三者爲後 若論本末 則三者爲本而藝爲末 習藝之功固在先 游者從容潛玩之意 又當在後 文中子云 聖人志道據德依仁而後 藝可游也 此說得自好 藝라는 것은 소학의 공부다. 만약 先後를 논한다면, 藝는 先이 되고 세 가지의 것은 後가 된다. 만약 本末을 논한다면, 세 가지의 것은 本이 되고 藝는 末이 된다. 藝를 익히는 功은 본래 먼저 있는 것이지만, 노닌다는 것은 조용하게 침잠하여 玩賞한다는 의미가 있으므로, 또한 마땅히 뒤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글 중에서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성인께서 道에 뜻을 두고 덕에 의거하며 仁에 의지한 연후에 藝에서 노닐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여기서 말한 것이 저절로 참 좋다.
問道爲義理之總名 何也 曰 道以人所共由而得名 若父子之仁 君臣之義者 是也 曰 德者己之所自得 何也 曰 若爲父子而得夫仁 爲君臣而得夫義者 是也 曰 其志之據之 何也 曰 潛心在是而期於必至者 志也 旣以得之而謹守不失者 據也 曰 不違仁者 奈何 曰 吾於顔子之事 旣言之矣 敢問六藝之目與所以游之之說 曰 五禮 吉凶軍賓嘉也 六樂 雲門大咸大韶大夏大濩大武也 五射曰 白矢參連剡注襄尺井儀也 五馭 鳴和鑾 逐水曲 過君表 舞交衢 逐禽左也 六書 象形 會意 指事 轉注 假借 諧聲也 九數方田粟米差分少廣商功均輸 方程嬴不足旁要也 是其名物度數 皆有至理存焉 又皆人所日用而不可無者 游心於此 則可以盡乎物理 周於世用而其雍容涵泳之間 非僻之心 亦無自而入之矣 蓋志據依游 人心之所必有而不能無者也 道德仁藝 人心所當志據依游之地 而不可易者也 以先後之次言之 則志道而後 德可據 據德而後仁可依 依仁而後 藝可游 以踈密之等言之 則志道者未如德之可據 據德者未如仁之可依 依仁之密乎內 又未盡乎游藝之周於外也 詳味聖人此語而以身體之 則其進爲之序 先後疏密 皆可循序以進 而日用之間 心思動作 無復毫髮之隙漏矣 누군가 묻기를, “道가 義理를 총괄하여 부르는 이름이라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道는 사람들이 함께 말미암기 때문에 그러한 이름을 얻은 것이다. 예컨대 父子의 仁이나 군신의 義 같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말하길, “덕이란 자신이 스스로 터득한 것이라 함은 무엇 때문입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예컨대 父子가 되어서는 저 仁을 터득하고, 군신이 되어서는 저 의를 터득한다는 것 같은 것이 바로 이것이다.”라고 하였다. 말하길, “뜻을 둔다거나 근거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여기에 마음을 침잠하여 반드시 이를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뜻을 둔다는 것이다. 이미 터득하고서 삼가 지켜서 잃지 않는 것이 근거한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말하길, “仁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라고 하였다. 말하길, “나는 안자의 일에서 이미 그것을 말하였다.”고 하였다. 또 말하길, “六藝의 세목과 노닌다고 하는 말에 대하여 감히 묻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말하길, “五禮는 吉禮, 凶禮, 軍禮, 賓禮, 嘉禮다. 六樂은 운문, 대함, 대소, 대하, 대호, 대무다. 五射는 백시, 참련, 섬주, 양척, 정의를 말한다. 五馭는 명화란, 축수곡, 과군표, 무교구, 축금좌다. 六書에는 상형, 회의, 지사, 전주, 가차, 해성(形聲)이다. 九數란 방전, 속미, 차분, 소광,상공, 균수, 방정, 영부족, 방요다. 그 사물에 이름을 붙이고 수를 헤아림에는 모두 지극한 이치가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또한 모두 사람들이 날로 쓰는 것이어서 없어서는 안 될 것들이다. 여기에서 마음을 노닐게 한다면, 사물의 이치를 다 깨치고 세상의 활용에 두루 통할 수 있어서, 그 온화하고 涵泳하는 사이에 그릇되고 편벽한 마음이 또한 말미암아서 들어갈 곳이 없게 될 것이다. 대체로 뜻을 두고 근거하고 의지하고 노니는 것은 인심이 반드시 갖고 있어서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道와 德과 仁과 藝는 인심이 마땅히 뜻을 두고 근거하고 의지하고 노닐어야 하는 곳이자 또한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선후의 차례로 말하자면, 道에 뜻을 둔 연후에 덕에 근거할 수 있고, 덕에 근거한 연후에 仁에 의지할 수 있고, 仁에 의지한 연후에 藝에 노닐 수 있는 것이다. 疏密(소원하고 밀접함)한 등급으로 말하자면, 道에 뜻을 두는 것이 덕에 근거할 수 있는 것만 못하며, 덕에 근거하는 것이 仁에 의지할 수 있는 것만 못한 것이다. 仁에 의지하는 것이 안에 밀접한 것은 또한 藝에 노니는 것이 밖에 두루 통하는 것보다는 미진한 것이다. 성인의 이 말씀을 상세히 음미하여 몸으로써 體得한다면, 그 나아가서 행하는 순서와 先後 및 疏密에 있어서, 모두 순서에 따라 나아갈 수 있기에, 일상생활을 하는 중에 心思와 動作에는 더이상 터럭 하나만큼이라도 틈으로 새어나가는 것이 없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勉齋黃氏曰 道者義理之總名 德者吾身所學而有得之善 仁者本心之德 藝者六藝之事 是四者皆人所不可不留意者 但三者最重而藝稍輕 四者之序 則志者向之而不忘 據者守之而不失 依者隨之而不離 是三者皆不可須臾捨也 游則若用力若不用力而已 上三者 則互擧並行而不相悖 游藝 則有不必專心致志耳 면재황씨가 말하길, “道라는 것은 義理를 총괄하여 부르는 이름이고, 덕이라는 것은 내가 몸소 배워서 터득한 善이다. 仁이란 것은 본심의 덕이고, 藝라는 것은 六藝의 일이다. 이 네 가지는 모두 사람이 留意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단지 3가지는 제일 중요하지만 藝는 조금 가볍다. 네 가지의 순서는 곧 志라는 것은 그것을 향하여 잊지 않는 것이고, 據라는 것은 그것을 지켜서 잃지 않는 것이며, 依라는 것을 그것을 따라서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모두 잠시라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游라면 힘쓸 쓰는 듯 힘을 쓰지않는 듯할 따름이다. 위의 세 가지는 서로 모두 병행하되 서로 어긋나지 않게 해야 하지만, 藝에 노니는 것은 반드시 전심으로 뜻을 지극하게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志於道一章 古者八歲卽敎之以六藝之事 明爲學之所當先也 今於此章末言之 而朱子復以爲學者於此當求其先後之序輕重之倫 似以藝爲可後 抑志道據德依仁 是大學之事 而游藝乃大學至極功也 潛室陳氏曰 此却有首尾本末 與前章別敎之 六藝小學之初事 游於藝文 成德之餘功 小學之初習其文 成德之游 適於意 生熟滋味逈別 누군가 묻기를, “志於道 1장에서는 옛날에 8살이 되면 六藝의 일로 가르쳤다고 하면서, 학문을 함에 마땅히 먼저 해야 할 바를 밝혔습니다. 지금 이 장의 끝에서 그것을 말하였지만, 주자는 학문을 하는 자가 여기에서 마땅히 그 선후의 순서와 경중의 차례를 구해야 한다고 반복하였으니, 이는 마치 藝는 뒤로 돌릴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志道와 據德, 그리고 依仁은 대학의 일이고, 游藝는 도리어 대학의 지극한 공인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잠실진씨가 말하길, “여기에서는 도리어 首尾가 있고 本末이 있어서, 앞 장과는 달리 가르치신 것이다. 六藝는 소학의 첫 일이고, 藝文에 노니는 것은 덕을 이룬 나머지 공이다. 소학을 하는 자는 처음에 그 文을 익히고, 덕을 이룬 사람은 노닐어서 그 뜻에 적합하게 하니, 익지 않거나 무르익은 재미가 서로 완전히 다른 것이다.”라고 하였다.
胡氏曰 道德仁所當先 藝可以少後 志據依所當重 游可以少輕 務本而不廢其末 事內而不忽乎外 以其先後輕重之倫序而言 固不無差別 以其本末兼該內外交養而言 則又未嘗不相資也 호씨가 말하길, “道와 德과 仁은 마땅히 우선해야 할 것이고, 藝는 조금 뒤로 돌려도 된다. 뜻을 두고 근거하고 의지하는 것은 마땅히 중시해야 할 바이고, 노니는 것은 조금 경시해도 된다. 근본에 힘써야 하지만 그 말단도 폐할 수는 없다. 안을 일삼지만 밖도 홀대해서는 안 된다. 그 선후와 경중의 순서로써 말하자면, 본래 차별을 무시할 수 없지만, 그 본말과 내외를 함께 갖추어 서로 기르는 것으로써 말하자면, 또한 일찍이 서로 도움이 되지 않은 적이 없었다.”라고 하였다.
雙峯饒氏曰 志道如人行路 據德如行路而有宿迫處 依仁則又就宿迫處漸漸立得家計成却安居了 游藝如居家有時出游也 須游於藝 若游從別處去 則出乎道德仁之外 而爲放心矣 쌍봉요씨가 말하길, “道에 뜻을 두는 것은 마치 사람이 길을 가는 것과 같고, 덕에 근거하는 것은 마치 길을 가다가 숙박하는 곳이 있는 것과 같으며, 仁에 의지하는 것은 또한 숙박하는 곳에 나아가 점점 가계를 세워서 이루어지면 도리어 편안하게 거주하는 것과 같다. 藝에 노니는 것은 마치 집에 기거하다가 가끔 나와서 노는 것과 같다. 그러나 반드시 藝에서 노닐어야 하는 것이지, 만약 놀다가 다른 곳으로 따라서 가버린다면, 道와 德과 仁의 밖으로 나오게 되어서 마음을 놓아버리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新安陳氏曰 志道據德而依於仁 則本之立於內者旣粹 由此而復游於藝 則末之該於外者不遺 能深用功於本而以餘功及其末 則內外交養而體用益貫矣 신안진씨가 말하길, “도에 뜻을 두고 덕에 근거하며 또 仁에 의지한다면, 근본이 안에서 확립됨이 이미 순수할 것이고, 이를 말미암고서 다시 藝에서 노닌다면, 말단이 밖에서 갖추어짐이 빠짐 없을 것이다. 능히 근본에 힘쓸 수 있으면서 그 나머지 공력을 그 말단에까지 미칠 수 있다면, 내외가 서로 길러져서 體用이 더욱 관통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