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단상 76/추모문집]”내 안에 백기완이 있다“
내가 읽은 모든 페이지(책) 중에서 ‘쾌저快著’ 세 권을 들라면, 단연코 으뜸은 함석헌 선생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1966년 초판, 제일출판사, 1800원)이고, 두 번째는 백기완 선생의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1979년 초판, 시인사, 1800원)이며, 정경모 선생의 『찢겨진 산하』(1986년 거름출판사, 2500원)라는 책이 그 다음이다. 쾌저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자기의 마음에 흡족할만큼 썩 잘 쓴 책)와 관계없이, 나는 쾌저를 ‘언제 읽어도 가슴이 뛰는, 펴내자마자 고전古典이 되어버린 책’으로 해석한다. 출판연도를 보니 대학1, 3학년 때이다. 정치상황이 너무 엄혹한 시국에서 이 책을 밤새 읽으며 가슴이 쿵쾅쿵쾅하던 밤이 무릇 기하이던가. 물론 문학부문으로는 내 마음에 쾌저로 자리매김된 수많은 소설집, 수필집, 시집들이 있지만, 정치․사회․역사적으로 그렇다는 말이다.
엊그제 백기완 선생의 1주기 추모글모음집 『백기완이 없는 거리에서-백기완 선생과 나』(여럿이 함께 씀, 돌베개 2022년 2월 15일 펴냄, 403쪽, 17000원)를 꼬박 하루동안 읽으면서, 불현 듯 이 쾌저들이 생각났다. 하여 책꽂이에 늘 소중히 모셔져 있던 낡은 책들을 꺼내 들춰보며 옛생각에 잠겼다.
- 우리의 역사를 ‘고난의 역사’로 규정하며 함 선생이 쓴 한국통사韓國通史는 통사痛史이기도 했지만, ‘뜻으로 보니’ 머지 않아 고난의 여왕이 되어 장미꽃을 받으리라는 예언서이기도 해 좋았다. 흥안령 마루턱에서 만주벌판으로 내달리던 몸집이 크고 힘줄이 불툭불툭한 큰 사람들이 우리 한민족의 선발대였다니? 그 장면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 ‘딸에게 주는 편지’라는 부제를 단 백 선생의 수상록은 조선의 처녀들에게 주는 짝사랑 편지에 다름 아니었다. 민족의 참뜻이 무엇이고, 민족통일이 무엇인지를 이 글처럼 뜨겁게 설파한 책이 어디에 있었던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백선생만의 ‘전매특허’,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준 울림은 청천벽력같았으리, 어찌 나만이었을까.
- 정 선생님을 모르시는 분들이 많으리라. 하지만, 문익환 목사가 당연히 국가보안법을 어기면서 평양에서 김일성을 만나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을 때, 바로 그 옆에, 그 역사적인 만남을 성사시키는데 지대한 공로를 한 재일동포, 그가 당시 이름도, 얼굴도 낯선 정경모 선생님이었다. 1986년 펴낸 이 책은 ‘김구․ 여운형․ 장준하 구름 위의 정담’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민족주의자 3인이 ‘구름 위에서’ 해방정국과 그 이후 분단으로 치달린 조국현실을 냉철하고 통렬하게 밝히고 있다. 책으로만 알 수 있는 뼈 아픈 ‘비하인드 스토리’를 낱낱이 한 서리게 고백하고 있다.
아무튼, 쾌저를 다시 한번 상기해준 백선생의 추모글모음집에 대해 말하자. 따님인 백원담 교수(성공회대 교수. 통일문제연구소장)의 머리글만 읽어봐도 이 책의 무게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선생의 50-60년 세월의 지인들과 신부, 스님, 언론인, 노동자를 비롯해 선생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은 각분야(작가, 시인, 화가, 영화감독, 조각가, 가수, 국악가 등)의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이 선생을 회억하고 있다. 펴낸 날 2월 15일은 1주기이다. 어느 분은 그립고 보고 싶다며 꺼이꺼이 울음의 글을 썼는가하면, 선생의 업적을 나열하기도 했다.
개인적으로도 존경하는 이 시대 ‘큰 어르신’이었지만, 새삼 43분의 면면과 글들을 보면서 ”이렇게도 큰 산이셨구나“ 새삼 놀라움이 더 했다. 선생님이 어떤 분이었고, 어떠한 한살매를 사셨는지, 어떻게 딱 한 마디로 말할 수 있으랴. 선생님은 ‘청년혁명가’이었고, 민중사상가이자 통일운동가였다. 어디 그뿐이랴. 예술가(시인, 소설가, 시나리오작가)였는가 하면, 우리말 전도사(한글애호가)였고. 누구도 흉내낼 수조차 없는 탁월한 이야깃꾼이었다. 진정한 노동자들의 아버지이었으므로, 때와 곳을 가리지 않고 눈물을 달고 다니셨다. 이 모든 이야기가 이 책 속에서 다 담겨 있다.
대학로 학림다방 그 좁은 공간에 100여명이 다닥다닥 붙어 선생님의 출판기념회가 있었을 때, 반주도 없이 ‘황토강으로’ 라는 노래를 주먹을 불끈 쥐며 열창하던 가수 정태춘은 차마 추모의 긴 글을 쓰기 어려웠나 보다. <내 안에 백기완이 있다>라는 붓글씨와 함께 짧은 문구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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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 뛰게 하는 사람이었다.
그 말고 소리와 몸짓은 높은 창공의 장산곶매였다.
거침없는 상상력이었다.
떨리는 붓으로 그 아름다운 이름을 쓴다.
깊이
내 가슴에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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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완, 그 아름다운 이름’이라며 ‘거침없는 상상력’이라고 했다. 대한민국의 제제다사濟濟多士들의 이름 석 자라도 옮겨야겠다. 구중서, 김도현, 김종철, 김학민, 방동규, 염무웅, 유명실, 유홍준, 이신범, 이호웅, 임진택, 한승헌, 권낙기, 공지영, 김명인, 명진, 문정현, 배은심, 손호철, 장회익, 최윤, 함세웅, 김정환, 김준태, 이기연, 이대로, 주재환, 정지영, 채희완, 최재봉, 홍선웅, 강재훈, 권영길, 김영호, 김진숙, 김흥현, 남경남, 단병호, 박석운, 박종부, 한도숙,
노나메기재단(https://baekgiwan.org) 이사장인 민중화가 신학철 님은 <한국현대사-산자여 따르라>는 제목의 그림을 실었다. 웅장하다. 누군들 그 노래를 따라 부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 소리치는 끝없는 함성
앞서서 가나니 산 자여 따르라
앞서서 가나니 산 자여 따르라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 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 데 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 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라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깨어나서 외치는 끝없는 함성
앞서서 가나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가나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가나니 산자여 따르라
앞서서 가나니 산자여 따르라
첫댓글 큰 어르신 백기완을 품은 우천님!
가슴이 쿵쾅쿵쾅 뛸정도로 글 잘 읽었소이다.
이런 큰 어르신들 덕분에 대한민국이 민주화되어 더 큰 코리아가 되리라 믿어의심치 않네그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