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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는 2013년 2월25일부터 2018년 2월24일까지 우리나라를 책임 질 차기 대통령으로 서강대 전자공학과를 나왔으며 61살이다>
1.박근혜는 어떻게 태어난 거임?
소개로 1950년 육군 중령이었던 박정희와 육영수(전 옥천공립여자전수학교 가사과목 교사)와 결혼하여 1남 2녀중 장녀로 태어났다.그 당시 6.25전쟁중이었고,대지주였던 아버지가 심하게 반대하여서,어머니와 충북 옥천집을 나와 경상북도 대구 하숙집으로 건너가 결혼 후 박근혜를 낳았다.
그녀는 아버지의 직업특성상 이사를 다녀서 전라남도 광주시,서울특별시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2.육영수 여사가 암살당했다는데..
74년 8월 15일 박정희 암살을 시도하려는 문세광이 경호원과 총격을 하는 과정에서 경호원을 향한 총탄이 빗나가서 육영수 여사가 맞아서 숨졌다.(경호원이 암살했다는 설도 있다.하지만 대부분은 경호원 총격과정에서 숨진 것으로 예상되어진다.)
<박정희를 겨냥하던 문세광의 저격은 박정희가 몸을 낮추어 피했지만 , 영부인이 대신 맞아서 숨졌다.재일교포출신이었던 문세광은 북한과 접촉하고 북한의 지령을 받고 일본인의 여권을 위조한 것들을 진술하였으며,4개월 후에 사형을 당하였다.당시 육영수여사는 국민의 신망을 얻고 있어 안타깝게 하였고,다음해에 김영삼과의 회담에서 새 한마리가 홀로 날아오르자 박정희는 "내 신세같다"라고 말하며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았다고 한다>
육영수 여사는 항상 한복 차림의 단아한 인상에 어린이와 보건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몇 차례나 고아원이나 보육원에 가서 아이들을 돌보며 그에 관련된 정책을 펴기도 한 현모양처이기도 하였다.
자녀들에게 종이한장도 아껴쓰라고 교육을 하였고,청와대 호위경찰에게 손수 간식을 전달할 만큼 마음씨가 따듯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 한센병(문둥병)이 창궐 할 시기였는데,특히 문둥이 병옮는 혐오분자로 취급한 당시에 육영수 여사는 직접 현장에 자활활동을 하면서 "잘못없이 주위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억울한 일이 생길 경우 청와대에 방문해 달라"라고 소외와 빈곤에 시달리는 그들을 격려하며 소와 돼지를 키워 자립을 하게 장려하기도 하였다.
<한센병(문둥병) 환자의 모습,그들의 고통은 사람들이 벌레로 취급하는 시선에 더 비참했을 것이다.육영수 여사들은 이들을 직접 방문하고 자립할 수 있게 도와주려고 하였다.>
그 외에 훌리들이 좋아하는 서울대학교에 정영사(기숙사) 설치를 주관하였으며,육영재단(어린이 복지재단)을 건립하며 어린이 날에 맞춰 어린이대공원 건립, 부산 어린이집 건립,73년에는 불우한 청소년과 빈자들을 대상으로 한 정수직업훈련원을 건립하였다.
<어린이 대공원은 1973년 어린이날에 맞춰 개장하였다.>
3.박근혜의 학창시절을 어떠했나요??
그녀는 서울 장충초등학교를 62년 2월에 졸업 후 성심여자중학교(미션스쿨),성심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70년에 서강대학교를 입학 후 74년 학위를 받고 곧 프랑스로 유학을 갔다.
<박근혜의 학창시절 사진,대부분 중학교 때 사진이다>
74년 프랑스 그르노블 대학교를 입학하며 해외파를 다져나가는 도중 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행사에서 시발 어머니가 문세광의 저격으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귀국 한다.
<박근혜는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수석으로 졸업하여 장학금을 받아,알프스 언저리에 있는 그로노블 대학으로 유학을 간다.대통령의 딸 답지 않게 하숙집에서 생활한 박근혜는 당시 어머니의 육영수 여사의 엄격한 교육에 따라 소박하고 특권의식을 갖지 않은 사람이었다.하지만 아버지의 피살 사건으로 다시 한국으로 귀국 하게 된다.>
이 때부터 박근혜의 정치생활이 시작되는데,이유는 아버지인 박정희가 재혼을 전혀 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박근혜가 영부인 대행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다.이때가 그녀가 만으로 22살에 불과하였으니 그녀는 정치계의 갑툭튀가 아닌 정치경력만 40년 가까이 되는 셈이다.
4.박근혜는 대충 정치행보를 어떻게 하였나요?
다음 해인 75년도에 그녀는 박정희가 주도한 새마을운동에 참여하며,박정희의 해외 순방과 행사에 참여하며 정치적인 행보를 이어 갔으며,그 해에 육영수여사추모기념사업회의 이사가 되었다.
<새마음 봉사단과 육영수 기념사업회 회장에 근화봉사단까지 운영한 박근혜> , <육영수 여사 추모기념사업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며 눈물을 훔치는 박근혜의 모습>
하지만 79년에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마저 살해당하자 그녀는 신당동 사저로 동생들과 돌아갔다.
당시에 동생인 박지만은 육사에 재학중이었는데 군 복무중 교통사고를 당하여 휴유증을 겪자 마약에 손을 댔으며,윤락녀를 사서 공동 투약한 혐의로 여러 차례 유죄를 선고 받는 등 집안꼴이 졸라 풍비박산 나는 가운데,전두환으로부터 아버지가 남긴 통치자금 6억원 가량을 수령하게 되어 현재까지 이에대해 공격을 받고 있다.
<박정희의 암살을 재현하고 있는 김재규(육사,한양대대학원 및 중앙정보부 부장)는 1980년 5월 사형당하였다.>
그럼에도 그 자금과 인맥을 기반으로 그녀는 80년도 한국문화재단 이사장,82년 육영재단 이사장,94년도 정수장학회 이사장으로 활동한다.
육영재단은 육영수 여사가 어린이 복지사업을 위해 건립한 재단이며 교육,복지,문화 분야 어린이 관련 연구사업, 난치성 질환 어린이 후원, 불우학생 장학 사업 등에도 주력하고 있다.이 재단의 간행지인 <꿈나라>,<보물섬>,<어깨동무>등의 어린이 잡지나 만화는 현재는 폐간 되었다.
<현재는 폐간된 보물섬,어깨동무는 육영재단에서 간행한 어린이 잡지이다>
정수장학회는 경제적 어려움으로 학문적 꿈을 성취 못하는 이들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된 재단이다.박'정'희와 육영'수'의 이름을 따서 만든 재단으로 부산일보 지분의 100%,문화방송 지분의 30%를 보유하고 있으며,현재는 최필립(연세대 중퇴,UCLA 역사졸 및 전 샌프란시스코 영사,대통령비서실 비서,각국가 대사,2002월드컵 집행의원)이 이사장으로 있다.
5.최태민이라는 사람과 박근혜와 뭔 관계가 있다던데요
박근혜는 어머니가 피살되자 슬퍼하는 와중에 최태민이라는 목사를 알게된다.
최태민은 격려 편지를 하며 박근혜를 위로해 준다.물론 박근혜는 고마워 한다.
근데 최태민 이씹새기는 위로를 해 주며 이를 박근혜와의 친분으로 이용하여 기업인들을 자신이 운영하던 구국봉사단의 운영위원으로 위촉 후 그들로부터 1인당 2천~5천만원의 입단비와 찬조비로 월 200이상 받았다.
간 큰 이새끼의 행보가 박정희 귀에 들게 되자 박정희는 최태민을 바로 빼내버리고 최태민과 관련된 구국봉사단을 해체하라고 한다.
<대한구국봉사단이 세운 경로병원 개원식에 당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던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오른쪽)와 구국봉사단 총재인 최태민 씨가 참석해 테이프를 자르고 있다.>
이후에 1980년대 군사정부 때 그는 강원도로 잠시 보내졌는데,박근혜는 그를 1982년에 육영재단에 합류 시키며,육영수 추모단체인 근화봉사단을 조직하였고 박정희와 육영수 여사를 추모하는 근화보 발간에도 관여하였다.
하지만 당시 육영재단의 간부들이 '특별한 직책도 없으면서 육영재단 운영을 좌우해온 최태민을 박근혜와 막역한 관계 때문에 어느 누구도 기를 펴지 못하였다'며 시위를 하기도 하였다.
이에 관련해 박근혜는 "내가 누구의 조종을 받는다는 말은 나에대한 인격모독이다,최 목사는 88년 박정희 기념사업회를 만들 때 잠시 나를 도와준 일을 한 것 밖에 없다"라고 말하며 94년 최태민이 사망 후에 그의 대한 평가를 물어보면 "그는 나에게 고마운 분이다"라고 말하여서 후에 논객인 조갑제가 "박근혜는 한번 믿어버린 사람에 대해서는 객관적인 평가를 안하는 경향이 있는 듯 하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6.정계에는 언제 입문하였나요?
97년 한나라당 대통령선거에서 이회창 후보를 지지하며 한나라당에 입당하였다.
박근혜는 바로 다음해인 98년도에 대구광역시 달성군 보권선거에 당선되어 국회의원이 되엇다.
당시에 그녀는 박정희 대통령의 딸이라는 점과 미혼의 여성이라는 점에서 많은 주목을 받았다.
또한 박정희 대통령의 지지층인 영남과 육영수 여사의 고향인 충청지역의 지지를 받으며 정계 활동을 할 수 있었다.
<한나라당에 입당한 후 그후에 이 당은
한 때 그녀는 한나라당을 탈당하였는데,이회창을 비판하며 잠깐 탈당(이유는 훌리들이 달아주셈 난 잘모르겠음)하고 한국 미래연합을 창당 하였으나,대선전에 다시 한나라당으로 복귀하였다.이 때 창당과 맞물려 방북을 하게 된 박근혜>
04년에 한나라당에 위기가 한번 찾아오는데, 이유는 새천년민주당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하는 사건을 벌이는데 국민의 외면을 받고 차떼기 사건(사과상자에 돈을 담은 후 차로 옮겨가 정치자금으로 쓰인 사건)등으로 한나라당의 지지도가 유례없는 급락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노무현의 탄핵과 차떼기 사건을 통하여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엄청나게 떨어졌다>
그 때문에 최병렬(서울대 법대졸,미국 남가주대 신문대학원 석사)대표마저 사퇴한다.
최병렬은 언론인 출신의 국회의원으로 전 서울시장으로 최틀러라고도 불렸는데 그는 추진력,장악력 돌파력이 뛰어났으며 생긴것도 그렇게 생겨서 지어진 별명인데,이는 그를 두둔하거나 비판할 때 많이 사용하는 별명이다.)
하지만 그는 2007년 다시 복권해 현재 새누리당 상임고문으로 있다.
한나라당이 그렇게 역풍에 휘청거리는 상황에서 박근혜는 착실하게 입지를 다져간다.
기존의 운동권,중진의원,다선의원 등을 포섭하는 방침과 다르게 박근혜는 여러 차례 기자회견을 통하여 국민들에게 사죄를 하고 최대한 소동을 안 벌이며 입지를 다져 17대 총선에서는 121석을 차지하여 선전을 한다(물론 민주당쪽이 121석에 이겨서 제1당이 되었을 것이지만 당시 분위기에 비해 상당한 선전이었다고 한다)
이를 탄핵역풍위기에서 박근혜가 당을 살렸다고 해서잠재적 차기 대권후보로 여겨진다.
<사학법 직권상정에 반대하는 국회의원들,이들에 관한 자세한 정보는 훌리들이 덧붙여주셈요..난 잘 모르겠슴>
또한 열리우리당에서 05년에 사학법을 직권상정하여 처리하였는데,당시 당대표였던 박근혜는 바로 농성에 들어가고 거리로 나섰다.
하지만 이 행동은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회의적인 시선이 많았으며,여론압박도 심하였다.
하지만 박근혜는 장외 투쟁을 계속 하였고 3개월만에 사학법 재개정 논의에 합의하게 된다.
이는 주의의 반대에 불구하고 사학법 재개정을 이끌어 낸것으로 평가받으며 한나라당의 상징물로 평가받고 있다.(이것에 대해서는 천막당사,쇼라는 비판을 받고 있기도 하지만)
7.언제 한번 박근혜가 피습된 사건이 있었던 거 같은데 언제죠?
06년 5월 지방선거 유세중에,박근혜는 지충호에 의해 문구용 커터칼에 베여 11센치 길이에 1~3센치의 깊은 베인 상처를 입은 사건이 있었다.
<지충호(미혼모사생아로 중학교 중퇴)에 의해서 상해를 입은 박근혜.지충호는 수차례 강간,협박,공갈을 일삼아 교도소에 복역후 출소했다가 박근혜의 얼굴에 상해를 입혀 징역10년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원에게 선거판세를 물어보는 모습을 보이며 병원에서도 '대전은요..'라고 유세를 이어가서 많은 지지와 함께 지방선거를 승리로 이끌었다.
8.07년도에 이명박의 라이벌이었다면서요
<이명박과 박근혜의 모습.이들의 사이를 잘 보여주는 장면>
그녀는 한나라당의 재도약과 입지를 다져가서 유력한 대통령 후보였으나,당시 서울시장이었으며 청계천과 버스개편으로 인기몰이를 한 이명박에게 대선후보 경선에 패하게 된다.
당시 박근혜는 이명박을 부패비리 혐의를 집중 조명하였으며,이 시기에 BBK에 관한 이야기가 최초로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박근혜 역시 전두환에게 수수한 6억원에 대한 대답을 인정하면서도 회피,비판하여 이에 비판을 받았다.이에 일반당원,대의원 국민선거인간 경선에서 박근혜가 모두 승리하였지만 여론조사에 뒤져 이명박에게 패하고 이명박이 경선에 올라가게 된다.
당연히 이후에 이명박정부의 공천에는 박근혜 계열 정치인들이 대거 탈락시키며 홀대를 받게 되었다.
9.친박연대는 뭔가요?
공천에 박근혜 계열 정치인들이 대거 탈락되면서 한나라당 내에서 정당명을 친박연대라는 것으로 창당한다.
<박근혜의 잦은 친박연대 복당 권유는 그에게 복당녀라는 별명을 주었다>
이는 대한민국 정당상 유례없는 개인의 이름을 사용한 정당창당으로 이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시시비비가 엇갈리기도 하였다.
지역구 6석,전국구 8석이라는 예상높은 지지율을 기록한 이 정당은 이 기세를 몰아서 무소속 친박 연대도 12명을 당선시키며 박근혜는 꾸준히 무소속과 친박연대의 복당을 요구하였다.
한나라당의 친박연대의 수는 60명을 기록하는 등 수가 불어났다.
하지만 미국산 소고기 수입 사건에서 원론적인 이야기만 반복하던 그녀는 줄곧 친박 측근들의 복당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해서 "복당녀"라는 별명을 얻었다.
그러는 와중에 박근혜는 이명박 대통령의 유럽 특사로 임명되면서 둘의 갈등은 점차 완화되는 듯 싶었지만 그 이후 실랑이가 계속 된 것 같다.
<이명박의 특사로 우럽 3개국을 방문중인 박근혜>
10.그 이후 정치 행보에 대해서 설명 해 주세용
2010년 대구광역시 달성군수로 출마했던 한나라당 의원을 박근혜는 밀어주지만 그는 무소속 후보에게 패하고 만다.
이후 11년 12월 29일에 홍준표(고려대 행정)가 디도스 파문에 못이겨 사퇴하자 박근혜를 비상대책의원회로 임명한다.
비상대책의원 선출 한달 후인 그녀는 선출 1달 후에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꾼 후 중앙 선거 대책의원장으로 임명되어 19대 총선에 대비하기 시작한다.
<비상대책위원회 시절 박근혜>
12년 4월 11일에 19대총선에서 새누리당은 152석으로 과반+1석을 유지하여 이재오,김문수,정몽준과 대통령 후보선출에 대립하였으나,이재오,정몽준이 도중 포기하여 박근혜가 압도적 지지속에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게 된다.
12년 7월 10일에 대통령 선거에 공식 출마 한 이후에 12월 10일에 "대통령 당선이 되지 않으면 정계를 떠나겠다"며 배수진을 치며 국회의원직을 사퇴한다.12월 19일에 18대 대통령 선거에 나설 새누리당 후보로 선출된 후에 12월 19일에 1577만 3128표를 득표하여 문재인을 누르고 당선되었다
<51.6%득표율로 48%의 문재인을 이긴 박근혜(약 108만표를 앞섰다)>
주요 의정활동에 관해서는 2편에서 계속 하겠다.
그리고 오늘 나는 용산의 전쟁 기념관을 탐방하러 곧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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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리와 함께하는"시리즈는 오로지 훌리건 천국에서만 볼 수 있습니다.
첫댓글 아 시발 전쟁기념과 6시까지네 시브랄
ㅅㅂ 개인적으로 박근혜가 경제나,복지부분 못 살릴꺼 같은디..
좀 말하는 게 모호하지만 지네들 측근이 뭐 도와주겠지
오오
6666666
삭제된 댓글 입니다.
할말없다.근데 한 인물에 대해서 단시간안에 쓰려니까 좀 뒤죽박죽이 되더라.전쟁기념관 가려고 수정안했는데..지금 다시 보니까 수정할게 많은 듯
오 좋다
감사해영 ㅎㅎㅎ
정치에 대해 거의 모르는 나에게는 굉장히 유익했다
이런거 많아졌으면 좋겠음
해팔해팔 이젠 정치계까지 ㅎㄷㄷ
중구난방인 감이 좀 있지만 치우치지 않고 준수하게 쓴 듯ㅇㅇ
아버지 사망하고 난 뒤 동생은 개망나니, 본인은 낙동강 오리알 신세 되기 십상이었는데 용케 여기까지 왔다. 평가의 전부는 아니지만, 그 사실만을 놓고 봤을 때 박근혜가 대단하긴 하구나.
61살이면 졸라 동안이네
동안같은소리하네. 병신 ㅉㅉ 똥푸산사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촌놈의시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