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Lê Minh Đảo 준장
드디어 호치민, 랜딩 브리지 없이 맨땅을 밟는다. 나는 이 타이입이 꽤 마음에 든다. 교황은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땅에 입맞춤하지 않던가. 이국땅을 밟는 첫발자국,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이 콧잔등에 닿으며 그들 특유의 감촉을 낳는다. 분명 우리와는 다른 그들만의 냄새, 그들 고유의 향이다. 우리는 바로 이 냄새의 근원을 찾아 이곳에 온 것이다. 그런데 훅하고 순간 당기는 열기가 심상치 않다. 버스를 타고 청사로 향했다. 잠시 사이 땀이 비 오듯 한다. 2월엔 건조하다더니 헛말 같다. 습도가 70%는 족히 되지 않을까. 한두 달 찌는 더위를 못 참고 후텁지근하다며 불쾌지수 운운하는 우리로서는 건조기 때가 이 정도이니 호치민은 사시사철 ‘성질난다. 짜증스럽다.’ 라고 해야 할 판국이지 싶다.
실내에 들어와 가방을 챙겨 여름옷으로 갈아입었지만 더위는 그야말로 속수무책이다. 5시간 전만해도 춥다 추워하더니만 이런 날씨에 평생 산다는 것은 형벌이라는 생각이 이내 들다니 참 참을성 없는 간사한 조 아무개 씨다. 나는 동료가 가방을 찾고 화장실을 들르는 동안 면세점을 들렀다. 우리나라 담배가 눈에 띄었다. ESSE담배가 24불, 싸기는 싸다. 일행 중 왕 골초선생이 계신데 일행 숫자 수대로 인천공항을 떠나기 전 담배를 모두 챙겼다. 시중보다는 한 보루 당 2만 몇 천원은 싼 거라는 데 나는 이 정도 값 차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지난 번 캄보디아에서 우연히 한국담배를 보았는데 가격차가 상상을 초월했다. 나는 가짜 한국담배라고 생각했었다. 한국 상품이 좋다하더니 담배도 가짜로 둔갑을 하는가. 그런데 알고 보니 캄보디아에서는 담배 값이 매우 저렴한 것이지 가짜가 아니었다. 마일드 세븐이나 말보로 등이 1보루 당 10달러 선이다. 즉 1갑이 33바트 정도. 그래서 나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캄보디아 담배가 모두 가짜라고 생각들 한 것이다.
퇴임 연설을 하는 티우
GNP가 작년기준으로 500달러가 안 되는 캄보디아, 그래서 국민들이 70바트 즉 8000리엘을 주고 담배를 살 능력이 못된다. 수십 년 전 우리나라 솔담배가 500원 하듯이. 캄보디아담배가 싼 이유는 국민소득에 따른 세금비율이 태국이나 한국보다 아주 적은데서 기인한다. 특히 우리나라 담배가 캄보디아에서 많이 유통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내가 티엔 립에서 헛것을 본 것이 아니다. 에쎄, 원 ,레종, 제스트..등 몇 가지를 길거리나 마트에서 흔히 볼수 있는데 우리나라담배는 KT&G에서 직접 수출한다.
수출가격은 340~400원 정도. (세금 포함된 공급가가 7~8.5달러정도) 황당한 것은 세금이 얼마 포함되지 않아 면세점이 제일 비싸다는 거다. 면세점은 세금이 면제 되었다는 것이지 마진이 적다는 것은 절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호치민 면세점에 담배 진열 판을 들여다보는 것인데 캄보디아 정도만큼 싼 값은 아니다. 그래도 한국에서 되판다면 큰 이득은 될 것이다. 몇 년 전 담배 값이 엄청나게 올랐다.
이번 담배 값 인상은 사회적 다른 양상을 내포하고 있다. 현물 가치가 아니라 삶의 가치, 즉 공중 건강의 명분을 내세워 가격인상을 한 것인데 이것이 올바른 선택이었느냐는 지금도 말이 많다. 간단히 말해 인상을 하면 그만큼 소비가 줄고 금연도 늘어난다고 당국은 말한다. 적자 경제에 허덕이는 정부의 교묘한 세수확보 꼼수가 적용된 신의 한수 차원이라는 볼 멘 소리도 여전하여 국민건강증진을 위한 방책으로 말하기는 애매모호하다. 그렇다고 피던 담배를 하루아침에 끊을까. 내가 보기에는 서민경제를 힘들게 하는 측면이 보다 더 크다.
하지만 이를 전적으로 동의하기도 어렵다. 정부는 선진국을 들먹인다. 실제 캐나다에 담배는 엄청나게 비싸다. 담배를 사들고 오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담배 한 값에 11달러.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만 원 정도. 그런데 이유가 좀 색다르다. 환경 비, 청소비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캐나다에서는 담배를 피고선 경찰 앞에서 바닥에 버려도 상관없다. 건전지도 환경비가 포함되어 있기에 비싸다. 아무튼 이런 사회성으로 갹출되는 현상은 사회구성원의 마인드도 중요하다.
사실 담배 값 인상 정부의 방침은 이를 호응하는 사회성을 미리 재고 한 선택이기도 하다. 우리 사회에서는 담배를 필 수 있는 공간이 좁혀지더니만 급기야 길 밖으로 쫓겨나 이래저래 서글픈 게 사실이 아닌가. 어느 면 사회성은 생물처럼 어느 물결을 쫓아 어느 흐름이나 풍조를 남기며 도시 한복판을 유유히 활보한다. 그게 또 어느 시대를 사는 풍경이고 그 시대 생활상이기도 하다. 하다못해 항간에 시끄러운 국정교과서 문제라든지 소녀상등이 우려석인 사회성을 반영하고 있지만 성숙한 건강한 사회라 한다면 비록 한 동안 시끄러울 테지만 이의 해결에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게 사회의 건전성이다.
하지만 한낱 변모하는 사회패턴만으로 사회가 대변되는 것이나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국가와 사회는 병립하듯 같이 존립하지만 둘이 충돌할 때는 엄청난 혼란이 야기된다. 사회가 혼탁하여지고 혼란이 가중된다면 사회는 무너지고 국가는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진다. 삶의 정의라든지 진실이라든지 하는 말이 때로는 꽤 우스운 헌신짝 꼴이 되는 것이다. 베트남에서 가장 분주하다는 호치민시, 천만 명의 도시는 베트남 수도인 하노이를 능가하는 상공업 중심지이다. 공항의 정식 명칭은 떤손녓(tan son nhat). 하지만 나는 탄손누트란 말이 더 익숙하다. 아마 베트남 사람들에게 탄손누트라 하면 아무도 못 알아들을 것이다, 영어풀이로는 엇비슷한 말인데 전혀 달리 읽혀지고 만다.
내가 탄손누트라 하는 것은 과거 월남전 하면 신문지상에 나왔던 공항 이름이 탄손누트였기 때문일 것인데 마치 그 공항이름이 1975년 4월30일을 기점으로 운명이 달라지듯 이름도 색다르게 바뀐 것 같이만 느껴진다. 도시 이름이 사이공에서 호치민으로 바뀌었듯이 말이다. 1975년 4월 남베트남의 패망이 눈앞에 있을 때 대통령 자리에 연연했던 티우는 마지막 남아있는 며칠간의 아쉬움을 떨치고 사임을 결정하였다. 4월 21일 12:00 티우는 헌법절차대로 후옹 부통령에게 대통령 직을 인계하고 사임할 것을 통고하였다.
그리고 티우는 4월 25일 밤 탄손누트(Tan Son Nhut) 공항에서 자신의 망명을 받아준 대만으로 출국하였다. 이미 티우의 부인은 4월 24일 일반여객기로 출국하였었다. 부통령을 지냈던 키(Ky)는 4월25일 탄손누트에서 지지 군중들을 모아놓고 떠나갈 사람은 다 떠나가고 우리는 소련의 스탈린그라드 항전과 같이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우자고 떠벌렸던 인물인데 그도 역시 미국으로 망명했고 그의 부인과 자식들은 벌써 탄손누트를 통해 출국하고 없었다.
4월 28일 오전 남베트남군 참모총장 카오 반 비엔(Cao Van Vien)은 별이 4개 달린 전투복을 벗어버리고 사복으로 갈아입고 테니스 코트장에서 헬기로 미 해군 함정으로 탈출하였다. 아직 전장에는 수만 명의 남베트남군이 북베트남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있는데 군의 최고 선임자이며 티우가 사임한 이후 사실상의 군 총사령관이라는 사람마저 모든 것을 팽개치고 혼자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하여 일찍 도주를 한 것이다. 북베트남군은 4월 28일 야간에 탄손누트 공항을 폭격하여 심리적인 충격을 준 후 4월 29일 05:00에 일제히 치열한 공격준비사격을 실시한 후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그런데 탄손누트 공항 폭격의 선봉장에 선 조종사는 의외로 남베트남 소속이었다. 구엔 탄 트룽(Nguyen Thanh Trung) 중위, 그는 1975년 4월 8일 08:25 어수선한 사이공에 충격을 주는 사건을 터트린 장본인이다. 당시 남베트남 공군 소속이었던 그는 F-5E 전투기로 독립궁을 폭격하고 그해 1월에 북베트남이 점령하였던 푸옥롱(Phuoc Long)에 착륙하였다. 티우는 있을지도 모르는 쿠데타에 대비하여 독립궁(나중 통일궁으로 이름이 바뀐다.)에서 잠을 자지 않았기 때문에 폭격 시에 현장에 없었지만 이의 심리적 충격과 국제적인 영향은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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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그가 또 탄손누트 공항 폭격에 선봉에 선 것이다. 나중에 밝혀진 내용이지만 트룽 중위는 북베트남 노동당 평생당원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대 프랑스 항쟁 시 전사하였고 그는 사이공 대학 재학 중에 베트콩들의 지령에 따라 차후에 큰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1969년에 남베트남 공군에 입대하여 미국에서 조종훈련을 받은 바 있었다. 북베트남의 지하 공작원과 접촉을 계속하고 있었던 트룽은 판랑(Phan Rang) 지역 폭격임무를 부여받고 비엔 호아(Bien Hoa) 공군기지를 이륙한 후 편대장에게 계기 고장이라고 허위보고한 후 독립궁을 폭격한 것이었다.
월남으로서는 배신자지만 북베트남으로서는 그는 시대 영웅이다. 세상이 바뀐 것이다. 앞서 말했지만 1975년 4월 9일사이공 함락이 가능한 쑤안록까지 북베트남이 진격했을 무렵 그들과 싸울 수 있는 남베트남 인력은 단 6천명이었는데 4만이 넘는 북베트공을 막아선 인물. Lê Minh Đảo 준장, 하지만 그 승리는 큰 의미가 없었다. 이는 그곳을 지키던 장군의 의지였을 뿐이다. 그는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최선을 다한 것이지만 패자로써 큰 과오를 범한 신세로 전락했다. 그는 끝까지 싸운 대가로 17년간 감옥살이를 했다. 어느 때 정의와 진실은 사회성과는 전혀 무관하다. 어수선한 사회 망조는 국가존립을 위태롭게 하더니만 결국 그 뿌리가 송두리째 뽑히고 말았다.
Lê Minh Đảo 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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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40년이 훌쩍 넘은 시대, 나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변모한 그 두 사람이 무척 궁금했다. 또 다른 사회질서가 옹립한 마당 그 둘은 과연 어느 모습일까. 구글 인물 검증으로부터 어렵게 그들의 행적을 알 수 있었다. 구엔 탄 트룽(Nguyen Thanh Trung) 중위는 바로 탄손누트와 떤썬녓 공항을 두루 평정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얼마 전까지 베트남 항공의 사장으로 재직을 하였으며 Lê Minh Đảo 준장은 1992년까지 옥살이를 하였고 미국 카톨릭 단체의 도움으로 보트 피풀인 딸들이 사는 버지니아로 건너가 여생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끝까지 전향거부로 추방형식으로 미국에 보내졌다. 나로서는 투철한 군인정신으로 대변되는 Lê Minh Đảo 준장이 먼저 떠오른다. 그로부터 옛 정취의 탄손누트 공항이 연상되고 떤손녓으로는 구엔 탄 트룽이 연상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런 나는 떤손녓 공항을 빠져 나와 그들만의 사회 속으로 이제 막 들어서고 있다. 사회와 국가는 불가분의 관계라는 생각을 다시금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