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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1627년(인조 5년) 정묘호란 & 1636년 12월 8일 병자호란.
청 태종에게 삼전도에서 치욕적인 굴욕을 겪어야만 했던.,인조
'이괄의 난'에 동조한 일부 군사들은 청나라로 망명했고
청태종과 함께 조선으로 처들어와.,광해군 재옹립을 시도.
청 사신은 툭하면 '광해군 재옹립' 엄포로 인조 정권을 압박.
청나라는 '광해군 재옹립' 히든 카드로
인조 정권 조선으로부터 실리를 취한 것.
그 바람에 인조는 재위 내내 피가 말랐다.
........................................................
인조 14년(1636) '북악산 동쪽 산줄기' 응봉(鷹峯) 계곡물을
소요암 뒤쪽으로 끌어들인 계류와 어정을 파서 나오는 샘물이
합쳐지는 일원에 인조가 정자를 짓고 정원을 꾸민.,옥류천 영역.
비원에서도 가장 깊고 높고 은밀한 곳.
인조가 심혈을 기울여 조성한.,옥류천 영역.
오늘날,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된.,비원.
다양한 정자, 연못, 수목이 어우러진.,창덕궁 비원.
'까마귀가 날자 배가 떨어진다.'는 속담 처럼
옥류천 영역이 완공된 그해 겨울에.,병자호란.
인조는 청태종에게 삼전도의 수모를 겪게 된다.
'옥류천 비원 조성에 몰두하느라고
병자호란을 예측조차 못한 것일까?'
창덕궁에서 옥류천 영역으로 들어가려면
'연경당의 정문' 장락문을 통과해야 만 한다.
'낙선재의 정문'과 이름이 같은.,장락문(長樂門).
이곳 장락문(長樂門) 역시 흥선대원군의 필체.
흥선대원군이 고종을 섭정할 때 남긴 흔적 같다.
비원 옥류천 영역은 사실 상.,'연경당의 후원' 같다.
'조선시대 연경당(演慶堂)은
어떤 목적으로 지은 건물일까?'
사도세자가 사대부의 생활상을 알기 위하여
아버지 영조에게 요청한 것이 처음에 건립한 동기.
그후, 1828년(순조 28) 보수 증축된 사대부 민가 주택.
영조에게 왕위를 물려받은
'사도세자의 아들'이.,곧 정조.
'정조의 아들' 순조가 지은.,건물.
.
그후 고종2년(1865)에 수리공사.,기록.
흥선대원군이 왕권을 강화 할 목적으로
오늘날과 같은 민가 주택 형식으로 완공
'연경당의 정문' 장락문을 거쳐야
비원(秘苑)으로 들어 갈 수 있게 하였고
왕명 없이는 누구도 출입할 수 없는.,금원(禁苑).
왕명이 있거나 왕과 동행해야만
출입이 가능한 왕의 영역이.,비원.
왕의 사생활이 보장되는.,성역(聖域)
궁궐에서 왕이 사생활을 즐길 수 있는.,연침공간
연침(燕
조선시대 역대 왕들은 과도한 업무와 스트레스로 단명.
조선 역대왕들의 평균수명은 47세였다.
사사된 단종을 제외하면 평균수명.,48세
최장수 왕은 21대 영조이며 향년 83세.
그 다음으로는 태조 이성계 향년 74세
그 다음으로는 15대 광해군 향년 67세
제 26대 고종.,63세,
제 2대 정종.,60세.
제 19대 숙종.,60세.
단명한 왕으로는
제6대 단종.,17세.
제8대 예종.,20세
제 24대 헌종 23세.
제 10대 연산군 31세.
제 12대 인종 33세
제 25대 철종 34세.
그래서, 비원에서는 역대 왕들이 건축한
다양한 연침공간과 궁궐 정원을 볼 수 있다.
역대 왕들의 건강에 도움 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창덕궁 비원 옥류천 영역.,정자들
창덕궁 부용지.,부용정(芙容亭)
부용정에서 바라본., 영화당(映
창덕궁 대조전 뒤뜰에서 후원으로 나가는.,홍예문
단종은 사사, 예종은 복상사.영조는 치매.
중종은 등창, 효종은 출혈사, 명종은 방사
효종은 출혈사, 경종은 게장을 먹다가 급사.
역대 조선왕의 근본적인 사인은.,스트레스.
태조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과 마찰로.,울화병.
세조는 단종을 페위시켜 사사한 업보로.,문둥병.
예종은 계비 안순왕후 한씨와 정사 도중에.,복상사.
'세조 비' 윤씨가 수렴청정했고 신숙주 구치관 등이
원상으로서 서정을 의결해 왕권이 약화된 시기의 군주.
19 나이에 정사(情事)로 스트레스를 해소 하려다가 사망.
조선 역대왕은 벼랑 끝에 핀 꽃과 같은 존재.
그 누구도 바라보기만 해야 할 위치에 있을 뿐.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지켜 내야하는 고독한 존재.
왕이 쌓인 스트레스를 해소 할
궐 내 유일한 공간., 금원(禁苑).
왕명이 아니면. 대신들도 출입할 수 없는..,금원(禁苑)
창덕궁에서도 가장 깊숙한 영역 안에 위치한 후원(後苑).
왕과 동행하거나 왕명이 있어야 출입 가능한.,비원(秘苑).
금원(禁苑), 후원(後苑), 비원(秘苑) 등
조선시대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워 왔다.
1904년 7월에 일제 치하에서는.,비원(秘苑).
1908년 4월 17일, 조선왕조 실록에
비원(秘苑에 관한 기록이 등장한다.
.
"순종이 비원(秘苑)에 나가 활을 쏘았다."
"비원(秘苑)" 이란 이름을 처음 사용한 기록.
명성왕후가 낳은 순종은 남자 구실을 못하는 왕.
그래서, '황귀비' 엄상궁이 낳은 영친왕이 후계자.
하여,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로 불리우는.,영친왕(이은).
.
임진왜란 후 다른 궁궐들이 불타 버리자
창덕궁은 순종 때까지 약 270 년간 정궁 역활.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비원은 '창덕궁과 창경궁' 사이에 위치.
사실 상, 담과 담 사이에 있어 독립된 공간.
오늘날, 관리 편의 상, 창덕궁을 통해 들어간다.
창덕궁 부용지 ~ 연경당~ 비원 옥류천.
조선시대에는 역대 왕의 침전 거처에 따라
비원의 출입문이 달라졌을 것으로 여겨진다.
조선시대 창덕궁 금원은 비원보다 훨씬 넓었다.
비원은 일제강점기 창덕궁 후원의 명칭이고
금원(禁苑)은 조선시대 창덕궁의 후원을 의미.
오늘날, 개방된 창덕궁의 비원은 일제강점기 규모.
창덕궁 후원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수록
크고 개방된 곳에서 작고 깊숙한 곳으로,
인공적인 곳에서 자연적인 곳으로 변화한다.
'과연, 여기가 궁궐의 후원 속일까? 산 속일까?'
도대체 보여준다던 비원(秘苑)은 어디 있는걸까?
의문이 들 만큼 옥류천 가는 길은 자연경관에 가깝다.
"여기가 비원(秘苑)? 정말로 맞습니까?"
"보여준다던 그 비원? 그곳이 여기.,입니까?"
가끔 일본인 관람객이 실망해 항의한다는.,산길.
일본인 관람객들이 가장 많이 즐겨찾는.,비원(秘苑).
창덕궁 4곳 골짜기는 모두 뒷산 응봉으로 이어지며
'능선과 골짜기' 숲의 호젓함은 비밀스럽게 펼쳐진다.
창덕궁에는 4개 골짜기에 조성한 연못 영역이 4곳 있다.
부용지(芙蓉池),
애련지(愛蓮池),
관람지(觀覽池),
옥류천(玉流川).
4곳은 곧.,왕의 영역.
왕명 없이는 출입불가.
부용지(芙蓉池),
애련지(愛蓮池)
관람지(觀覽池)
옥류천(玉流川)
창덕궁 4개 골짜기, 4개 연못 영역마다., 정자가 있다.
비원 내에서도 옥류천 영역의 정자들이 가장 인상 깊다.
옥류천을 들어올 때나 나갈 때 들러 쉬는 .,취한정(翠
소요암 곁에 소요정이란 정자가 있고
소요정 동쪽에 위치한 정자가 취한정(翠
주변 경관의 아름다움을 시로 남긴.,숙종 & 정조.
여름의 푸른나무와 숲을
군자의 절개에 비유한.,숙종
늘푸른 시내물과 소나무숲
새소리를 시로 표현한.,정조.
'온 뜨락에 핀 꽃의 그림자는 봄 밤에 머문 달이요.
정원 가득 소나무 바람소리는 밤에 들리는 파도소리
구천 이슬이 고이듯 금쟁반에 고여 무겁고
오색구름이 엉기어 푸른 일산 위에 걸리었네.'-정조 -
창덕궁에서 가장 깊고 높은 곳에 위치한.,옥류천.
조선시대 성균관이 위치한.,응봉 정상 자락 골짜기.
창덕궁 불로문, 애련지, 장락문, 연경당 거쳐.,옥류천.
불로문(不老門).
애련지 영역으로 가려면 불로문을 지나야 한다.
"한장의 판석(板石)으로 만들어진 문을 통과하면
불로장생(不老長生) 한다."고 하여.,불로문(不老門).
애련정(愛蓮亭)
'연꽃이 피는 연못’이라는 애련지(愛蓮池)는
창덕궁의 불로문(不老門)을 지나 왼쪽에 있고,
애련지 북쪽에 있는 간결한 정자.,애련정(愛蓮亭)
숙종 18년(1692년)에 만들어진 연못과 정자
'숙종과 장희빈이 사랑을 나눴다.'는 정자이다.
옥류천으로 가는 길에 만나는., 두번째 연못 영역.
연꽃을 좋아했던 숙종이
애련(愛蓮)이란 이름을 붙여.
애련지(愛蓮池). & 애련정(愛蓮亭).
숙종이 불로문을 지나 연못 가운데
섬을 쌓고 정자를 세웠다."고 하는데
그 섬은 없어지고 정자 역시 사라졌다.
"내가 연꽃을 사랑함은 더러운 곳에 처하여 있더라도
맑고 깨끗하여 은은히 군자의 덕을 지녔기 때문이다."- 숙종-
'경종의 생모' 폐비 윤씨 장희빈은 숙종으로부터 사약을 받고 운명.
희빈(禧嬪)은 후궁의 지위 중 하나., 정1품 후궁
'빈'(嬪)으로서 받은 작호가 '희빈'임을 의미한다.
그래서 '장희빈'보다는 '희빈 장씨'로 불러야 옳다.
경종이 추존한 칭호는 옥산부대빈(玉山府大嬪).
그녀를 기리는 사당의 이름도 대빈궁(大嬪宮)이다.
그렇지만 그녀의 묘역 이름은 원(園)이 아닌.,대빈묘(墓).
조선시대 왕을 낳은 다른 후궁들과 다르게
그녀의 묘역은 '원'(園)이 아니라 '묘'(墓).
조선 역사 상 궁녀 출신으로 왕비까지 되었던 유일한 여성
본명은 장옥정(張玉貞). 하지만 정사에는 그녀의 이름이 없다.
애련지(愛蓮池).
장옥정의 아버지 장형은 역관 출신으로
사역원 정9품 봉사로 재직하였지만 일찍 은퇴
그녀가 막 11세가 된 1669년 1월 12일에 사망했다.
이후 당숙 장현의 슬하에서 자랐다.
이복오빠 장희식과 동복오빠 장희재
아홉살 이상 동복언니가 한명 있었다.
최고 관직이 정3품 첨지중추부사(무관직)에 이르렀고,
전쟁 중 참전도 했고 시재(詩才)도 뛰어난 인물이었다.
외할머니 변씨는 '조선 최고 갑부 역관' 변승업의 당고모.
소설 허생전에도 모델로 등장한 변부자 가문의 딸이었다.
외삼촌 윤정석도 시전의 거부.
당숙인 장현은 효종 8년에 이미 정2품
자헌대부를 제수받은 국제무역 거물 역관
국중거부로 종1품 숭록대부까지 올랐던 인물.
거기에 장현 형제의 자식들은
대부분 무관 및 역관, 의관 고위직.
그녀 일족은 조선에서 손꼽히는 대부호
사회적 위치 또한 결코 떨어지지 않았다.
사대부 명문은 아니어도 역관 대부호 가문.
애련지 북쪽 끝에 위치한.,애련정(愛蓮亭).
원래, 비원의 어수문 동쪽에 있었던., 정자.
현재, 애련정 정자는 장희빈과는 관련 없다.
조선시대 청렴결백 청백리는 신하의 덕목.
장옥정의 가문은 사관들에게도 질시의 대상.
장희빈에 관련된 기록은 상당히 왜곡되어 있다.
'조선 4대 요부'로도 손꼽히는.,장옥정.
장옥정은 중인인 역관 집안의 서녀(庶女)였다.
숙부 장현은 '숙종실록'에 '국중(國中)의 거부'.
조선에서 알아주는 부자인데다 역관의 우두머리.
1677년(숙종 3년) 종1품 숭록대부까지 오른 인물.
장옥정은 요즘으로 치면 미모의 재벌가 따님인 셈.
단숨에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곧 아들을 낳는다.
1687년(숙종 13년) 조사석이 우의정으로 발탁되었는데
항간에 떠도는 소문으로는 '장옥정의 어머니와 친밀해서
청탁으로 정승이 되지 않았는가?'라는 말이 많았을 정도다.
숙종이 경연(국왕에게 고전을 강독하고 논평하는 제도) 중
김만중을 통해 이 소문을 듣고 노해 "내가 한 나라 임금으로
한 여자에게 미혹해 뇌물을 받고 정승까지 시켰단 말인가?"
"그 말의
출처를 캐어
오늘 안으로
자수케 하라!"
영의정 남구만이 정승에서 물러나겠다며
어명을 거두어 달라 청했지만 듣지 않았다.
김만중을 잡아다 세 차례 문초해도
그 말의 출처가 나오지 않자 선천으로
귀양을 보내고 서인 정권을 실각시켰다.
이듬해(숙종 14년) 장옥정이 왕자를 낳자
친정어머니 윤씨가 딸인 산모를 보살피러
옥교(덮개 있는 가마)를 타고 궐에 들던 중
사헌부 지평 이익수와 이언기 등에게 발견돼
옥교를 빼앗기고 치죄 당한 사건이 일어났다.
사헌부에서는 "천한 여인이 옥교를 타고
입궐은 법도에 어긋난다."고 상소하였다.
이에 숙종 - "궁중 시녀들도 천인에 불과하지만
품계가 상궁에 오르면 법에 따라 가마를 타거늘
하물며 왕자의 외가에서 출입하는데 어찌 모욕을.,"
숙종은 곧바로 사헌부 금리와 조례 두 관리를
호되게 쳐서 죽게 만들었고, 지평 두 명도 파면.
1689년(숙종 15년) 장옥정을 희빈으로 삼고
그 아들을 원자로 삼는다고 선언하기에 이른다.
조정은 발칵 뒤집혀 노론의 영수 송시열이 나서서
원자 책봉을 강력히 반대하다 사약을 받고 죽었다.
숙종과 장옥정의 수표교 만남이 없었다면
백년이 넘게 지속한 정쟁도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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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종이 수표교를 건너던 중 여염집 문밖으로
고개를 내민 장옥정을 발견한 것이 첫만남이다.
한눈에 미인임을 알아볼 정도로 눈부신 외모였다.
파유용색(頗有容色), '자못 얼굴이 아름다웠다'.
라는 기록은 조선실록에서도 이례적인 표현이다.
왕은 설, 추석, 단오 등 명절에는 수표교를 지나
영희전을 왕래했는데 이곳에 왕이 참배하러 올때는
융복(戎服)을 입고 영희전으로 향하던 길에 만난 장옥정.
.
수표교 남쪽, 지금의 서울 중부경찰서 자리에는
역대 어진(왕의 초상화)을 모신.,영희전(永禧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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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성 안의 모든 물은
도성을 동서로 가르는
청계천으로 모여 흘렀다.
이 물이 동쪽으로 흐르다가
왕십리 밖 살곶이 다리(전곶교)
근처에서 중랑천 따라 한강에 유입.
청계천의 본래 이름은 '개천(開川)'이었다.
청계천에는 마전교(馬廛橋) 다리가 있었다.
1420년(세종 2년) 우마(牛馬)를 매매하는
마전(馬廛)이 있었기 때문에 마전 앞에 있는
다리라는 의미에서 붙은 이름이 마전교(馬廛橋).
1441년(세종 23년) 나라에 가뭄과 홍수가 번갈아들자
세종은 강수량 측정도구 수표(水標)를 마전교에 세웠다.
수표는 하천이나 호수 등의 수위를 재는 측량 기구로
청계천 마전교에 설치할 당시에는 나무로 되어 있었다.
그뒤로 마전교는 수표교(水標橋)라 불렸는데 성종 때는
나무로 만든 수표가 쉽게 부식되자 돌로 만들어 세웠다.
이후 영조 때 대대적인
청계천 준설 공사를 하면서
수표석도 새로 만들어 세웠다.
영조는 준천 이후 수표교 교각에
경진지평(庚辰地平)이란 글자를 새겨
이후 개천 준설의 표준을 삼도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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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내 궐내각사 앞 향나무
높이 12m,둘레 5.9m 수령 750년.
조선왕조 519년 역사보다 뿌리 깊다.
'궁궐 안 관청' 궐내각사(闕內各司)는
관람 일반인들에게는 개방되지 않은 곳.
이곳은 고려시대부터의 관청 터로 추정된다.
즉, 창덕궁은 조선3대왕 태종 때 궁궐을 건축.
정원을 꾸몄다고 알려졌지만.,고려시대 관청터.
이곳 향나무는 고려 남경의 궁궐 터였음을 대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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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원이란 이름은 원래 일제시대에 붙여진 명칭.
조선시대에는 궁궐 북쪽에 있다 하여 '북원(北苑)'
또는 '후원(後苑)' 일반인이 접근할 수 없던 금원(禁苑).
애련지 인근에 위치한., 연경당(延
연경당의 정문(正門)은.,장락문(長樂門).
연경당(보물 제 1770호).,정문 장락문(長樂門)
연경당(延
효명세자가 순조의 존호를 올리는 의례를 치르기 위해
순조 28년(1828년) 진장각(珍藏閣) 옛터에 지어진 전각.
이곳에 2년 남짓 머물던 왕세자는 22세 젊은 나이로 운명.
................... 효명세자.................
'23대왕' 순조 12년(1812)에 왕세자 책봉.
순조 27년부터 대리청정하며 형옥을 삼가고
민정에 힘썼으나 4년 만에 운명(익종으로 추존)
................................................................
1828년(순조28년) 효명세자가 사대부 집을 모방하여
궐안에 지은 120칸 민가 형식의 집 대문.,장락문(長樂門).
조선 사대부 집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랑채와 안채가 있었다.
현재, 건축물은 효명세자 때 지어진 것이 아니고
고종 때 지은 109칸 건물로 단청을 하지않아 소박하다.
연경당 정문 장락문(長樂門)은 낙선재 정문 이름과 같다.
'長樂門' 현판은 낙선재처럼 흥선대원군 필체.
연경당으로 들어가려면 실개천 위에 놓여 있는
오작교를 지나 연경당 정문 장락문으로 들어간다.
'연경당 정문' 장락문(長樂門)은 지체높은 양반이
수레나 사인교를 타고 들어 갈수 있는 솟을 대문으로
장락문은 즐거움을 오래 누리는 곳에 들어가는 문., 뜻말.
원래, 장락문은 장락궁(長樂宮)으로 들어가는 문.
장락궁(長樂宮)은 중국
아울러, 장락문은 달나라 신선들이 사는 장락궁 출입문.
선향재(善香齋).
연경당 서쪽 건물로 서재 겸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
서향(西向) 건물이라 오후가 되면 강한 햇살이 들어와
지붕 아래 동판 채양을 달아 들어오는 햇빛을 조절한 고종.
고종은 개화 격변기를 겪으면서 살아
새로운 서양 문물을 많이 사용한 것 같다
한때, "고종의 집무실 겸 서재" 였던.,선향재.
연경당(演慶堂)과 선향재(善香齋) 모두 한채의 집이다.
사랑채 연경당은 남성, 안채 선향재는 여성을 위한 공간.
그 안으로 들어가야만 숨겨진 자태를 드러내는 비원(秘苑)
비원에서도 가장 안쪽에 위치한.,옥류천 영역.
1976년부터 약 30년 간 금단 구역이었던.,비원.
장락문 앞 오작교는 은하수를 건너는 다리.
장락문 안 연경당은 신선들이 사는.,달 세계.
근심 걱정 많은 인간세계와는 다른.,신선세계.
도교에서 월궁(月宮)을 관장하는 여신.,항아(姮娥).
'서왕모의 불사약을 훔쳐 광한궁(廣寒宮)으로 도망쳐
달의 정령이 되어 불로장생했다.'는 중추절 전설 속 여신.
'고요한 달빛 아래 이 길을 걸으면.
월궁(月宮)이 눈 앞에서 어른거릴듯..'
비원 옥류천 영역으로 가는 길은 호젓하다.
'옥류천(玉流川)에는 어떤 의미가 담겼을까?'
'王(왕)이 '(점) 찍은.,선녀 같은 女子'.,玉女(옥녀)'
몸과 마음이 옥처럼 깨끗한 선녀 같은 여자' 옥녀(玉女).
옥류천으로 가는 길은 약간 등산하는 마음으로
언덕을 올라갔다가, 약간 내리막길로 걷다 보면
외부에서 잘 보이지 않는 폐쇠적이고 신비한 공간.
잠룡(潛龍)의 산실(産室)을
상징하는듯한.,소요암 옥류천.
잠룡(潛龍)의 산실(産室)을
상징하는듯한.,소요암 옥류천.
단 하루도 빠짐없이 정사를 즐겼다는.,한무제.
가마를 타고 가면서도 여색을 가까이 한.,진무제.
수십명 궁녀들과 밤낮 술래잡기를 했다는.,수양제.
'인조는 옥류천에서 무엇을 즐긴 것일까?'
비원(秘苑)’의 가장 깊은 곳.,옥류천(玉流川).
1636년(인조 14년)에 조성한 왕의 휴식처로서
소요암에 인공 물길을 파고 폭포까지 만들었다.
인조 친필 ‘玉流川’ 글씨가
소요암 바위에 새겨져 있다.
창덕궁 비원 내 정자와 전각들은
인조 때 조성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그후 숙종은 연꽃을 좋아해 애련정, 영화당 주변을 조성,
순조는 의두합기오헌, 연경당 농수정 등을 조성하였으며,
"조선 말에는 승재정과 관람정을 조성하였다."고 전해온다.
소요암.,숙종 오언절구.
飛流三百尺 비류삼백천
遙落九天來 요락구천래
看是白虹起 간시백홍기
飜成萬壑雷 번성만학뢰.
300척 폭포수의 물길
아득한 하늘에서 떨어진다.
이를 보니 하얀 무지개가 일고
골짜기에는 우뢰 소리가 가득하다.
금강산.,비봉폭포.
숙종은 '玉流川' 인조의 필체를 보고
소요암 일원을 금강산 옥류동에 비유하여
궐내 봉황(鳳凰)의 심중(心中)을 표현한걸까?
아니면, 인조의 필체를 각자하여
소요암 바위에 새겨 넣은 것일까?
인조는 숙종과는 다르게
필체를 남기지 않는.,성품.
그러나, 숙종은
금강산 옥류동에는
가본 적이 있는듯 하다.
금강산 외금강 구룡연계곡.,비봉폭포.
"봉황새가 날개를 펴고 꼬리를 휘저으며
날아오르는 것 같다."하여.,비봉(飛蓬)폭포.
비원 옥류천 일원은 도심 한복판 ‘자연의 보고(寶庫)’
검은댕기고리·딱따구리 등 희귀새 24종, 수목 160여종
창덕궁 후원의 옛 명칭이 ‘비원(秘苑)’ 또는 ‘금원(禁苑)’
비원 옥류천 영역.,어정(御
...................황해도 옥류천 샘물....................
황해도 평산군 안성면 총수리 옥류천 샘물과 유사.
총수산 바위 틈에서 구슬 같은 샘물이 방울져 떨어진다.
한모금만 마셔도 가슴 속 체증이 내려가듯 후련해지는 곳.
여름이면 이곳 샘물을 마시며,
더위를 식히는.,황해도 옥류천.
샘이 솟은 바위 위에는 명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쓴., 옥류천
각자가 크게 새겨져 있어,옥류천 이름은 각자(刻字)에서 비롯.
이곳에 ‘玉流靈泉(옥류영천)’, ‘廳泉仙榻(청천선탑)’ 각자도 있다.
......................................................................................
인조가 조성한 비원 '옥류천' 영역은
황해도 '옥류천' 명승지와 이름이 같다.
옥류천 영역.,소요암.
삼복더위에도 물이 차고 숲이 짙어 냉기를 느끼는 곳.
주변 숲은 심산유곡을 연상케하고 옥류천 영역에 들어가
계간에 피어오르는 운무를 보고있으면 선계에 들어온듯 하다.
관람지 가장자리에 부채꼴 형태의 정자.,관람정(觀纜亭)
주변 경관을 보다 아름답게 정자에 담기 위한.,부채꼴 형태.
6기둥 중 4 기둥이 물 속에 발을 담구어 마치 배 위에 오른 느낌.
그 건너편에는 '버선코 같은
처마 맵시' 정자.,승재정(勝在亭)
소요암.
왕과 신하가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즐기던.,소요암.
초여름 이마에 맺힌 땀도 금방 식어버릴 것 같은 이곳.
왕과 신하들이 도랑따라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돌리며
자신의 잔이 오기 전에 시를 짓는 풍류를 펼친 정자.,존덕전.
8자 형태 연못 & 존덕정(尊德亭)
8자 형태의 연못은 조선 팔도를 상징하고
연못 둘레 판석은 세자의 팔자걸음 연습 용도.
'왕은 발걸음마다 조선 8도를 두루 살펴야 한다.'
1644년(인조 22) 건축한 육면정을 존덕정으로 바꾸었다.
이 건물과 이어진 다리 남쪽에 시간을 재는 일영대(日影臺)
건물 처마에 잇대어 지붕을 따로 만들어 지붕이 두개인 정자.
4각 지붕을 2개 포개 얹어놓은 정자.
정작, 4각 정자 안에서 천장은 6면정.
바깥 지붕을 받치는 기둥은
하나 세울 곳에 가는 기둥 셋.
존덕정 천장 그림도., 이채롭다.
청룡과 황룡이 여의주를 희롱.
왕권의 지엄함을 상징하는 그림.
이 그림은 ‘황제국’을 꿈꾸었던
'정조'의 자주의식을 대변한다.
존덕정의 지붕 아래 걸린 끌씨.,萬川明月主人翁自序.
'세상의 모든 시냇물이 품고 있는 밝은 달의 주인공.'
정조가 재위 22년(1798) 자신의 호(號)를 스스로 지었다.
자신의 호를 나무판에 새겨 존덕정에 걸어 놓은.,정조.
‘뭇 개울들이 달빛을 받아 빛나지만 달은 오직 하나.
내가 바로 그 달이요. 너희들은 개울이니 내 뜻대로
움직이는 것이 태극, 음양, 오행의 이치에 합당하다’
신하들에게 강력하게 충성을 요구하는 내용이다.
평생 왕권강화와 개혁정치를 위해 노력했던 정조.
존덕정에 들어서면 그 준엄한 음성이 들리는듯하다.
어수문(魚水門) & 규장각(奎章閣)
규장각은 정조 원년인 1776년 창건된 2층 건축물.
1층 규장각은 왕실 도서관이며 출입문이 어수문(魚水門).
'왕과 신하는 물고기와 물의 관계처럼 하나이다' 뜻말.,어수문.
규장각 건축물 2층 누각이.,주합루(宙
주합(宙合)이란 우주와 하나가 된다는 뜻으로
자연의 이치에 따라 국가를 다스리고자 하는 뜻.
1776년(정조 1)에 지어 1층 규장각, 2층 주합루.
어필로 편액을 달고 조선의 역대 왕들의 글, 글씨,
영조 재위때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했던
신하들까지 포용해 중용하며 당파싸움을 없애려한 성군.
효심이 지극해 아버지 묘소를 갈때 한강에 놓였던.,배다리.
마포 견강상인들이 동원한 '용산진 ~노량진' 배다리.
소요정 북쪽에 위치한 정자.,태극정(太
'우주만물의 근원이 되는 실체'가 곧.,태극(太極).
유교에서 '세상만물 원시상태'.,천지(天地)의 도(道).
'우주만물의 근원'을 찾아 이상국가 건설을 실현하는 곳.
'태극의 원리'를 찾아
이상국가를 만들려 한
왕의 마음이 투영된 정자.
'태극의 근원을 누구나 쉽게 찾을 수는 없지만
찾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보인다.'는.,태극의 원리.
초가지붕을 얹은., 청의정(淸漪亭)
'맑은 물결'(淸漪) 뜻말 이름을 품은.,정자.
농업은 천하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큰 기본이다.
농사짓는 농민들의 수고를 왕이 직접 체험하는 공간.
정자 앞에는 조그만 논을 만들어 두고
여기에 벼를 심고 수확한 후 볏집으로
초가지붕을 만든 그 소박함이 눈에 띈다.
“사람과 사물이 서로 맞아
하늘과 땅 사이에 어떤 물건이 있는 줄도
몰라야만 마음이 즐거울 수 있다.” 소요정(逍遙亭)
'아무 구속없이 천천히 노닌다.'.,소요.
"여유롭게 사색하고 소요하는 것이 이 나라 경영에
도움된다."며 후대에 소요정을 잘 보존할 것을 당부한 정조.
소요암 가까이 있는 정자.,소요정.
방과 부엌이 달려있는 정자.,농산정(籠山亭)
왕이 비원에서 산책하다가 하룻밤 묶을 수 있는 거처.
정조는 제사 전날 이곳에서 묶으며 마음을 깨끗히 하였다,
순조는 관리, 성균관 유생들과 함께 글을 짓던.,경전 시험장.
부용지(芙蓉地) & 부용정(芙蓉停)
왕이 과거에 급제한 이들에게
주연을 베풀어 축하해 주는 곳.
창덕궁 후원에 조성된 연못.,부용지.
그곳 열 십(十)자 모양의 정자.,부용정.
면적 10만 3,000여평. 사적 제122호로 지정된 비원.
창덕궁 안에 있는 조선시대 정원으로 조선왕궁의 놀이와
잔치 장소로 활용된 대표적인 조선시대 조원(造苑)유적이다.
1405년(태종 5)창덕궁이 이궁(離宮)으로 창건되고
1406년에는 후원 동북쪽에 해온정(解溫亭)을 지었고
그 앞에 못을 팠으며, 후원 북쪽에 인소전(仁昭殿)을 건축.
인소전은 1408년 문소전(文昭殿)으로 이름을 바꾸고
이 해에 태조와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신주를 모셨다.
문소전 동쪽에는 태조를 위한 원찰(願刹) 터.
1433년(세종 15) 문소전을 경복궁으로 옮기면서
태조 때 7명의 승려가 거주하던 원찰은 철거되었다.
세조가 1459년(세조 5)경복궁에서 창덕궁으로 옮기면서
후원에 연못을 팠으며 이 때 열무정(閱武亭)이 건립되었다.
열무정의 위치는 현재의 부용지(芙蓉池) 주변으로,
이곳에는 마니정(摩尼井)·파리정(玻璃井)·유리정(琉璃井)·
옥정(玉井) 등 네 곳의 샘이 있었고 사정기비(四井紀碑)가 있다.
1463년창덕궁 후원을 크게 확장하였는데
1462년 동쪽 담에 인접된 민가 73區를 철거하고,
다시 북쪽 담에 인접한 민가 58區를 철거하며 담 밖에 있던
동점(東坫)의 산줄기를 담안으로 넣기 위해 100척(尺) 더 뒤로 확장.
이 때 둘레가 4,000척이었으며
도성 주위의 주민을 징발하여 담을 쌓았는데,
109가(家)를 1통(統)으로 25척씩 쌓아., 160통이 동원되었다.
1467년(세조 13) 4월 신모정(新茅亭).
1468년 무일전(無逸殿)이 건립되는 등
세조 때에 원유(苑囿)의 시설이 대폭 확장.
연산군은 이 후원에서 여희(女姬)들과 잔치를 벌이고
새나 짐승을 놓아기르며 사냥하는 생활을 했다고 한다.
1497년에는 사람들이 엿본다 하여 서쪽 담을 높게 쌓았다.
1503년 동쪽과 서쪽 담 밑에 사는 민가를 모두 헐어냈다.
1504년에는 후원에 인접한 성균관을 다른 곳으로 이전했다.
이듬해 경회루(慶會樓)와 같은 서총대(瑞蔥臺)를 만들게 했다.
높이 10여척인 대 위에
1,000명이 앉을 수 있고
돌난간에 용을 조각했다.
'공사 감독관이 100명, 일꾼 수만명 동원되었다.'한다.
서총대 앞에 경회루 앞과 같이 큰 못을 조성했다고 하며
군인들이 양강(兩江)의 배를 끌어다 못에 띄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 못은 완공을 보지 못한 채
중종 즉위후, 철거되었다고 전해온다.
연산군 재위 때 공사한 것은 사실 같다.
그러나, 당시 토목공사 목적은
그후, 상당부분 폄하된듯 보인다.
'원각사를 폐지하여 기생양성소로 개편하고,
그도 모자라 성균관 일부를 대기장으로 만들고
채홍사가 모집한 미녀들을 대기시켰다.'던.,연산군.'
'8도미녀 중에서 왕의 눈에 들어 선정된 운평은
대궐로 불러들이며 '흥청(興靑)'으로 바꿔 부르고
왕과 잠자리를 같이 하면., 천과(天科)흥청이 되었고
그렇지 못한 흥청은 지과(地科)흥청에 머물렀다 전한다.'
'연산군은 벼슬아치 선비가 흥청 가마를 메게 하였으니
천지가 바뀐다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 일을 저질렀단다.
그러한 식으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놀아났다는 연산군.'
'자신이 말이 되어 흥청을 등에 태우고 기어 다니거나
자신이 흥청들의 등에 올라 말놀이를 즐겼다고 전한다.
그도 모자라 민간 유부녀도 함부로 겁탈하였다는 연산군.'
'그 결과 중종반정이 일어나 궐에서 쫓겨나
교동도 위리안치 유배 3개월 후, 33세에 운명.
그리하여, "흥청망청"이란 말이 생겼다고 전한다.'
조선왕조 재정이 가장 넉넉하였던.,연산군조.
연산군의 왕권정치가 권신 정권에게 패한 결과.
중종반정 권신정권 세력이 연산군을 매도한 흔적들.
연산군 일기는
중종반정 권신들의
승자가 쓴 실록에 불과.
연산군조 실록은 상당부분 재조명되어야 할듯.
당시 왕권정치를 주창하였던 중신들도 많았던듯.
중종은 재위 내내 허수아비 왕노릇만 하다가 운명.
'중종반정은 성공한 구데타에 불과하였을뿐.,'
중종 이후부터 조선의 재정과 국력은 급격히 기울어간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난뒤 비원은 20년간 폐허가 되었다
1610년 광해군이 창덕궁을 복구하고 영화당(暎花堂)을 건립.
1636년(인조 14)에는 탄서정(歎逝亭 : 뒤에 逍遙亭으로 개칭)·
운영정(雲影亭 : 뒤에 太極亭으로 개칭)·청의정(淸漪亭)을 짓고
옥류천(玉流川) 어정(御井)을 팠고 1642년 관덕정(觀德亭)을 건축.
1643년 심추정(深秋亭), 1644년 존덕정(尊德亭),
1645년에 취향정(醉香亭 : 뒤에 喜雨亭으로 개칭),
1646년에 벽하정(碧荷亭 : 뒤에 淸荷閣으로 개칭),
1647년에 취승정(聚勝亭 : 뒤에 樂民亭으로 개칭)·
관풍정(觀豐亭)이 건립되었는데 인조가 후원에 정자를
많이 건립한 것은 세자가 북경의 궁관제도를 보고 와서
왕에게 알리자 이를 본뜬 데에 그 이유가 있었다고 전한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양란 후
국력이 피폐하고 쇠약해졌던 조선.
숙종에 이르러 국력은 살아나기 시작한다.
강력한 왕권정치를 실현한.,숙종.
조선 역사 상, 가장 수준 높은 정치가.
태종, 세종 만큼 위대한 업적을 남긴 왕.
인조, 효종, 현종, 숙종으로 이어진.,혈통.
숙종은 인조 재위 당시 실정을 만회하였던 왕.
그래서, 인조가 조성한 비원에 애착을 쏟은걸까?
1688년(숙종 14)에 청심정(淸心亭)을 지었고
1691년 능허정(凌虛亭), 1692년 애련정(愛蓮亭)
1704년 명나라 신종을 봉사(奉祀)하는 대보단 조성
이어 숙종은 1707년에 척뇌당(滌惱堂)을 건립하였다.
부용지.,부용정.
1777년(정조 1) 왕의 영정, 글씨, 보책, 인장 등을 두는 규장각 건축
1792년에는 숙종 33년에 건립한 택수재를 헐고 부용정(芙蓉亭)을 건축.
정조 연간에는 옛 열무당 터에 왕의 글씨를 보관하는 봉모당(奉謨堂)을 건립
1827년(순조 27)에 의두합(倚斗閤)을 짓고,
1828년에는 효명세자(익종으로 추존)가 순조에게
존호례를 올리면서 의례를 치르는 연경당(演慶堂)을 건립
조선왕조 역대 왕과 왕비의 초상화를 모시던.,선원전(璿
1921년에는 후원 서북쪽에 선원전(璿源殿)이 건립되었다.
창덕궁 후원의 명칭에 대하여는 역대 왕조실록에 후원· 북원·
금원(禁苑) 등이 보이는데 후원이라고 부른 기록이 가장 많다.
‘비원’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한 때는
1904년(고종실록 광무 8년 7월 15일).
수령 750년 고목.,향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