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몽고달단족(蒙古韃靼族)과 이성계(李成桂) 가계(家系) [4편]
2024년 09월 01일
○ 「몽고족(蒙古族)」은 과연(果然) 어떤 인종(人種)이며, 종족(種族)이었을까?
우리가 가장 크게 「“오해(誤解)”하는 부분(部分)이 바로 “몽고족(蒙古族)은 우리와 같은 황인종(黃人種)이다”라는 것이다.」 본래(本來)의 몽고족(蒙古族)은, 황인종(黃人種)이 아닌 색목인(色目人)이다.
백인종(白人種)? 황인종(黃人種)? 흑인종(黑人種)? 옛 역사서(歷史書)에 기록(記錄)된 백인종(白人種)은 색목인(色目人)에 속한다. 몽고(蒙古) 곧 원(元) 나라 역시(亦是) 색목인(色目人) 집단(集團)으로 색목인(色目人)들을 특히 우대(優待)했다고 적고 있다.
특히 「몽고족(蒙古族) 중에서도 색목인(色目人)으로 회색(灰色) 눈동자를 가진 자(者)들은 성길사한(成吉思汗) 동류(同類)로 귀족(貴族) 중의 귀족(貴族)이었다」라고 하였다.
특히「몽고족(蒙古族)은 본시(本是), 글란(契丹 : 거란)의 한 부락(部落)으로 글란(契丹)에 의탁(依託)해 살며 노역(勞役)을 담당(擔當)했던 부락(部落)이었다」라고 하였다.
➨ 「우리가 늘 잘못 생각하고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오늘날의 “몽골공화국”이다. 오늘날의 “몽골공화국”은 20세기(世紀) 초(初)【AD 1,924年】에 소련(蘇聯)에 의해 만들어진 몽고족(蒙古族)이 아닌 “황인종(黃人種)의 나라(國家)”로 만들어졌다.」
「본래(本來)의 몽고족(蒙古族) 활동영역(活動領域)은, 소련(蘇聯)에 의해 모조리 강제(强制) 병합(倂合)되어 버렸다.」
➨➨ 오늘날의 ‘몽골공화국’ 영토(領土)는 「본시(本是) 조선(朝鮮) 영토(領土)」로, 조선(朝鮮)이 쇠(衰)해지자 무주공산(無主空山)과도 같았던 그 땅에, 소련(蘇聯)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오늘날의 ‘몽골공화국’ 실체(實體)다.
그 땅의 본래(本來) 주인(主人)은 한민족(韓民族)이며, 그 땅의 주민(住民)들 역시(亦是) 한민족(韓民族)이다. 지금의 “몽골공화국”에는 옛 몽고족(蒙古族)은 없다.
「옛 몽고족(蒙古族)과 그 땅(地)」은 : 「러시아[Russia : 舊 蘇聯]가 모조리 차지해버리고, 몽고족(蒙古族)들은, 주변(周邊) 종족(種族)들에게 동화(同化)되고 흩어져 일부(一部)는 지금의 러시아인[Russian]으로 살아가며 옛 역사(歷史)와 조상(祖上)들을 잃어버린 째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다만 아이태산맥【阿爾泰山脈 = Altai, 山脈 = 金山 山脈】과 당노산맥(唐努山脈) 주변(周邊)에 소수민족(少數民族)으로 전락(轉落)해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의 “몽골공화국” 국민(國民)들은 옛 몽고족(蒙古族)의 후예(後裔)들이 아니다.」
➨「그들은 모두 옛 조선인(朝鮮人)들이다. 마찬가지로 그 땅 역시(亦是) 옛 조선(朝鮮)의 것이었다」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겠다.
※ 이미지 출처 : 위키백과 : 솔체꽃[Scabiosa]
“나무위키”에 따르면 : 「몽골공화국의 국화(國花) : ‘Scabiosa comosa’인데, 산토끼꽃과 솔체꽃속에 속하며 원산지가 한국인 국내 토종꽃이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한국(韓國)에서 건너간 곳이 아니라, 본래(本來) 몽골공화국 땅이 ‘원산지(原産地)’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아무려면 “몽골공화국” 측에서 한국(韓國)의 야생화(野生花)를 자국(自國)의 국화(國花)로 정해 놓고 수입(輸入)해 갔을 일은 없지 않은가! “입은 삐뚤어져도 말은 바로 해야 한다”라고 했다.
➡➡➡ 또 이성계(李成桂) 할아버지(祖父)는 발안첩목아(孛顔帖木兒)요, 아버지(父)는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이며, 큰아버지(伯父)는 탑사불화(塔思不花)라고 하였는데, 첩목아(帖木兒) 또는 불화(不花) 등으로 불린 이성계(李成桂)의 가계(家系)로 볼 때 분명(分明) 몽고(蒙古) 이름이 존재(存在)했을 것이나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다.
고의적(故意的)으로 지워버렸을 확률(確率)이 매우 높다.
---------------------------------------------------------------------
○ 「달단(韃靼)」은, 「달단(韃靼)=달달(韃韃)=달달(達達)=타타르(Tartar)」라고도 기록(記錄)되어 있는데, 이들은 몽고족(蒙古族)이며, 또한 원(元)의 잔당(殘黨)이라고 하였음을 볼 때, 몽고계(蒙古系)라는 것은 틀림없다. 21세기를 봐도, 이들은 ‘우랄산맥’ 서(西)쪽에 ‘타타르공화국(共和國)’이 실존(實存)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들은 우리와 형상(形相)이 다른, 전형적(典型的)인 「본시(本是)의 몽고인(蒙古人)」일 것으로 판단(判斷)할 수 있다.
성길사한(成吉思汗) 곧 철목진(鐵木眞)의 가계(家系)는 회색(灰色) 눈동자를 가진 전형적(典型的)인 색목인(色目人)이며, 이들이 몽고(蒙古)의 귀족(貴族) 집단(集團)이었다고 하는데, 오늘날 이들의 직계(直系) 후예(後裔)는 보이지 않는다.
➨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두 잃어버려 다른 종족(種族), 부족(部族)에게 동화(同化)되고, 자신(自身)들의 정체성(正體性)을 잃어버려, 자신(自身)들이 누구인지조차 모른다」라는 것이 올바르고 정확(正確)한 표현(表現)이다.
「몽고족(蒙古族)」과 「달단(韃靼)」은,
고전(古典)에 따라 약간 그 설명(說明)이 다르긴 하지만 대동소이(大同小異)한 종족(種族)이다. 원【元 : 蒙古】의 후예(後裔) 또는 유종(遺種) 또는 달단(韃靼), 몽고(蒙古) 족(族)이라는 등이 그렇다. 확실(確實)한 것은, 몽고족(蒙古族)이란 사실(事實)이다. 그들 달단(韃靼) 실체(實體)를 알아야 다음 이야기가 이어질 수 있다.
몽고족(蒙古族)과 달단족(韃靼族)의 형상(形相)을 고전(古典)에서 찾아보면 : 전한서(前漢書)
➊「兩 顴 高. 眼 碧 髥 紫 :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이 푸르며 수염이 붉다」라고 하였고,
➋「醫巫一山之後. 盡屬蒙古之地. 茫茫大漠. 北海環之. 五年一氷. 而自古不通中國. 故海以外. 不知有何許物怪. : 의무려산(醫巫閭山) 뒤는, 모두 몽고(蒙古) 땅에 속하며, 망망한 큰 사막(沙漠)인데, 북해(北海)가 둘러 있다. 5년에 한 번 얼음이 얼고, 자고로 중국에 통하지 못하기 때문에 바다 밖에는, 무슨 괴물이 있는지 모른다」라고 하였다.
➌「그들의 후예(後裔)들이 바로 우랄산맥[Ural, 山脈] 서남(西南)에 있는 ‘타타르스탄【Tatarstan : 韃靼斯坦共和國 : 塔塔爾斯坦共和國, 又稱韃靼共和國】이며, 그들은 색목인(色目人)이며, 고전(古典)의 기록(記錄)과 인종(人種)이 정확(正確)하게 일치(一致)하고 있기 때문이다」
‘타타르스탄[Tatarstan : 韃靼斯坦共和國]’ : [출처(出處) 위키백과] :「위키백과」에 따르면 : 〈동유럽 평원에 접해 있다. 볼가강과 카마 강 사이에 접해 있고, 우랄산맥이 위치해 있다. 수도인 카잔은 모스크바에서 동쪽으로 797km 떨어져 있다. 타타르스탄 공화국 면적의 16%는 삼림으로 덮여 있다. 이 중 참나무, 박달나무, 사시나무 등의 활엽수가 대부분이며, 침엽수는 소나무와 전나무가 주로 자란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달단(韃靼)=달달(韃韃)=달달(達達)=타타르(Tartar)」
(1) 명사(明史) : 「韃靼,即蒙古,故元後也. : 달단(韃靼)은, 곧 몽고(蒙古)인데, 원(元)의 후손(後孫)이다.」라고 했으며,
「瓦剌, 蒙古部落也, 在韃靼西. : 와랄(瓦剌)은, 몽고(蒙古) 부락(部落)인데, 달단(韃靼)의 서(西)쪽에 있다.」라고 하였다.
(2) 新元史 / 卷一 本纪 / 第一 序纪 : 「蒙古之先, 出於突厥. 本為忙豁侖, 譯音之變為蒙兀兒, 又為蒙古. 金人謂之韃靼, 又謂之達達兒. 中略. : 몽고(蒙古)의 선대(先代)는, 돌궐(突厥)에서 나왔는데, 본래 ‘망활륜’이며, 역음이 변하여 ‘몽올아’가 되었는데, 또한 몽고(蒙古)이다. 금인(金人)이 부르기를 ‘달단(韃靼)’이라 했고, 또 ‘달달아(達達兒)’라 불렀다.」라고 하였다.
(3) 靑莊館全書 卷 23 / 宋史筌 蒙古列傳 에서는 : 《子孫蕃衍.各自爲部居.于烏桓之北.與畏羅,乃蠻,九姓,回鶻,故城,和林接壤.世修貢遼金.役屬于韃靼.中略.兩顴高.眼碧髥紫.皆悍惡麤健.不思室居. : 그 후 자손들이 번창하여, 저마다 부족을 이루어, 오환(烏桓)이북, 외라(畏羅), 내만(乃 蠻), 구성(九姓), 회골(回鶻)의 고성(故城) 화림(和林)과 접한 땅에서 흩어져 살며, 대대로 요(遼)ㆍ금(金)에게 조공(朝貢)하다가, 달단(韃靼)에게 붙었다. 중략.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이 푸르며 수염이 붉다. 그리고 모두 사납고 거칠며, 집에서 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4) 讀史方輿紀要 45 / 山西 7 / 外夷附考 의 서문(序文) : 《蒙古,契丹別部也.契丹部落之小者,曰蒙古,曰泰赤烏,曰塔塔兒,曰克列,各據分地.既而蒙古皆兼有之,或曰:蒙古即韃靼也. : 몽고(蒙古)는, 글란(契丹)의 별도의 부(部)이다. 글란(契丹) 부락(部落)의 소수(小數) 부락이며, 몽고(蒙古)라 하는데, 태적오라고도 하며, 탑탑아라고도 하며, 극열이라고도 하는데, 각각 나누어 살았다. 몽고가 모두 겸유(兼有)하였는데, 혹 이르기를 : 몽고(蒙古)는 곧 달단이다.》라고 하였다.
(5) 심전고 제2권 / 유관잡록(留館雜錄) : 《蒙 古. 一 名 韃 靼. 居 沙 漠 : 몽고(蒙古)는, 일명 달단(韃靼)인데, 사막(沙漠)에서 살았다.》고 하였다.
(6) 신오대사(新五代史) 사이(四夷)부록(附錄) 3 :《達靼,靺鞨之遺種,本在奚,契丹之東北,後為契丹所攻,而部族分散,或屬契丹,或屬渤海,別部散居陰山者,自號達靼. : 달단(韃靼), 말갈(靺鞨)의 유종(遺種)이다. 본시(本是) 해(奚)와 글란(契丹)의 동북에 있었는데, 뒤에 글란(契丹)이 이들을 공격하자, 부족(部族)이 분산(分散)되어, 혹은 글란(契丹)에 속하고, 혹은 발해(渤海)에 속하였다. 별부(別部)가 흩어져 음산(陰山)에서 살았는데, 스스로 달단(韃靼)이라 불렀다.》
➨ 달단(韃靼)에 대해 고전(古典)의 설명(說明)을 보았는데, 『달단(韃靼)은 몽고(蒙古)족이며, 몽고족(蒙古族)은 달단(韃靼)이다.』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 위 글 (6)에 기록(記錄)된 “음산(陰山)”에 대해, 해국도지(海國圖志)에서는 현 신강성(新疆省)의 박격달산(博格達山 : 5,445m)이라고 하였다.
달단(韃靼)이란, 곧 타타르(Tartar)를 말하며,
○ ‘러시아’연방(聯邦)의 한 국가(國家)인, 『타타르스탄(Tatarstan)이라는 타타르 화국』 이 있다. 이곳은 ‘우랄산맥(山脈)의 서(西)쪽’이며, ‘카스피해(海)와 아랄해(海)의 북(北)쪽’ 지방(地方)에 있으며, ‘볼가강(江)’이 이곳 땅을 적시고 있다. 이곳은 지금도 달단어(韃靼語)를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이곳은 분명(分明), 옛 달단(韃靼)들의 고향(故鄕)이며, 본거지(本據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중국어(中國語) 위키백과를 봐도 “鞑靼斯坦共和国(달단사탄공화국)”이라고 하였다.』
➠ 옛 기록(記錄)에서의 “몽고인(蒙古人) 특색(特色)”은,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이 푸르며(靑眼), 수염 색깔이 붉다』라고 하였다. 이는 현(現) 몽고인(蒙古人), 반도인(半島人), 중국인(中國人) 대부분(大部分)의 인종(人種)과는 확연(確然)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본시(本是), “몽고인(蒙古人)이란 색목인(色目人)”을 말하는 것으로, 현재(現在)의 “몽골인”과는 전혀 다르다.
본시(本是)의 색목인(色目人), 몽고인(蒙古人)들은, 우랄산맥(山脈) 서(西)쪽 지대(地帶)에 있었으며, 이들이 강성(强盛)했을 때, 일시적(一時的)으로 우랄산맥(山脈)을 넘어 동방(東方)에 진출(進出)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연행록(燕行錄) / 계산기정(薊山紀程) 산천(山川) : 「醫巫閭山.堯封十二山之一也. 自我國長白山分脉而走. 橫遮大漠. 西北行七八百里. 散漫扶輿. 不見窮際. 山外則古凶(匈)奴地. 明稱韃靼. 今稱蒙古. 此天所以限夷夏也. : 의무려산(醫巫閭山)은, 요(堯) 임금이 봉한 12산 중의 하나이다. 우리나라 장백산(長白山)에서 산맥이 갈라져 내달아, 큰 사막(大漠)을 가로질러 막았다. 서북으로 7, 8백 리를 가도 산만(散漫)하여, 끝이 보이지 않는다. 산(山) 밖은 옛 흉노(凶 奴)의 땅이다. 명(明)에서는 달단(韃靼 타타르)이라 하였고, 지금은 몽고(蒙古)라고 일컫고 있으니, 이것이 하늘이 이적(夷狄)과 중화(中華)를 한계(限界)지어 준 것이다.」라고 하였으며,
➊ 「반도(半島) 북방(北方)의 백두산【白頭山 : 長白山】에서, 산맥(山脈)이 갈라져 힘차게 내달려, 큰 사막(沙漠)을 가로질러 막았다(橫遮)」라고 하였는데,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➋ 「‘백두산(白頭山)=장백산(長白山)’의 산맥(山脈)이, 서(西)쪽으로 뻗어 나와, 달려가 심양(瀋陽)을 지나고, 요하(遼河)를 도하(渡河)하여, 북진현(北鎭縣)의 해발고도(海拔高度) 867m의 의무려산(醫巫閭山)이 되었다.」라는 이야기는, 우리가 살고 있는 행성(行星)의 지형지세(地形地勢)를 설명(說明)하고 있는 것이 아닌, 수억(數億) 광년(光年) 떨어져 있는 외계인(外界人)들 고향(故鄕)의 지세(地勢)를 말하고 있어 “정신 줄 나간 놈들의 헛소리다”
➨ 「산맥(山脈)이 동서(東西)로 가로막고 있음에도, “요하(遼河)와 몇 개의 강물”은 수백만(數百萬) 년(年) 변함없이 흐른다」라고 설명(說明)한다면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 논자(論者)”들은 살아있는 인간(人間)이 아닌 죽은 자(者)들의 귀신(鬼神)이라는 증거(證據)다.
➌ 심양(瀋陽)을 위시한 요녕성(遼寧省)을 보면 : 이곳에 산맥(山脈)이, 동서(東西)로 가르는 곳은 없다. 이곳은 평야(平野)지대이며, 867m의 야산(野山) 정도의 ‘의무려산(醫巫閭山)’을 가지고, 북진(北鎭)을 설치(設置)했다는 말, 그 자체가 희극(戱劇)이다.
이 모두는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 논자(論者)들의 ‘매국사학(賣國史學)’이 만들어 놓은 조선사(朝鮮史) 조작(造作)의 결과(結果)물이다. 요녕성(遼寧省)에 “고비사막(沙漠)”이 있냐? 타클라마칸사막(沙漠)이 있냐?
➍ 「의무려산(醫巫閭山)을 기준(基準)하여 남(南)과 북(北)을 나누어 화이(華夷)를 경계(境界)지었다』는 말은 또 무엇인가? 이것은 하늘이(天) 정해 놓은, 한계(限界)이다. 이 말대로라면 :
의무려산(醫巫閭山) 남(南)쪽 : 요동(遼東), 한반도(半島)는, 화(華)이며, 중국(中國)이다.
의무려산(醫巫閭山) 북(北)쪽 : 이(夷)이며, ‘달단(韃靼)=몽고(蒙古)’들이 사는 곳이다.
의무려산(醫巫閭山) 서(西)쪽 : 이(夷)이며, ‘서이(西夷)=서융(西戎)=되놈’들이다.
➠ 과연(果然), 이러한 해설(解說)이 가능(可能)할까? 지형지세(地形地勢) 수억(數億) 년(年) 또는 수백(數百)만 년 전(前)에 이미 그 골격(骨格)이 만들어졌고, 그 형태(形態)를 유지(維持)하고 있다. 다만 특이(特異)한 곳에서, 지진(地震) 또는 화산(火山) 폭발(爆發) 등으로 그 지세(地勢)가 변화(變化)된 곳이 있으나, 이는 무시(無視)해도 좋을 정도(程度)로 특이(特異)한 땅에 존재(存在)할 뿐이다.
李成桂 家系 : 화척 【禾尺: 韃靼禾尺·白丁·楊水尺·才人】 출신(出身)?
○ 「이성계(李成桂) 가계(家系) : 화척【禾尺: 韃靼禾尺·白丁·楊水尺·才人】출신(出身)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疑問)은 오로지 필자(筆者)의 사견(私見)임을 밝혀둔다.
이는 몇 가지의 매우 의심(疑心)스러운 기록(記錄) 때문이다. 특히 전라도(全羅道) 전주(全州)나 삼척(三陟), 함흥(咸興) 등은 예나 지금이나 나라(國家)의 중요(重要) 지역(地域)으로 왕조(王朝)의 행정체제(行政體制)가 거미줄처럼 설치(設置)되어있던 곳으로 170 여호(餘戶)가 이안사(李安社)의 주도(主導)하에 야반도주(夜半逃走)했다거나, 또한 삼척(三陟)에서도 170 여호(餘戶)와 함께 이번에는 함경도(咸鏡道)로 도주(逃走)했다는 것은, 불가능(不可能)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야기는 허무맹랑(虛無孟浪)한 이야기다.
170 여호(餘戶)는, 곧 850명(名) 이상(以上)이 되는 무리(衆)가 된다. 「1,000명(名) 가까운 무리(衆)가 관청(官廳)의 승인(承認)도 없이 도주(逃走)했다」라는 기록(記錄)은, 기록(記錄)하지 못할 사연(事緣)이 있다는 것이다.
가족(家族) 몇 사람이 야반도주(夜半逃走)했다고 하더라도 전주(全州)의 관리(官吏)들이 그대로 두었을까? 이것에는 의미심장(意味深長)한, 결코 말하지 못할 사연(事緣)을 담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즉(卽)
(1) 「이성계(李成桂) 가계(家系)」는, 신라(新羅) 말엽(末葉)으로부터 이어졌다고 하였으니 이는 그저 가문(家門)에서 주장(主張)하는 설(說)일 뿐이다. 특히 “사공(司空) 벼슬을 했다”라고 하면서도 실제(實際)로는, “신라(新羅) 벼슬 이름에 사공(司空)은 없다”라는 것은 충격적(衝擊的) 이야기다.
(2) 또 말하기를 : 「용부(勇夫)가, 내시집주(內侍執奏) 인(璘)을 낳았고」하였는데, 「무신정변(武臣政變)을 주도한 이의방(李義方)이 1,174년【明宗) 4年】피살(被殺)되자 “동생(弟)인 이린(李璘)이 고향(故鄕)인 전주(全州)로 낙향(落鄕)했다.”」라고 전(傳)해지는데… …여기에 전주이씨(全州李氏) 가문(家門)에서는 “이의방(李義方)과 이준의(李俊儀)”는 아예 기록(記錄)에서 없애버렸다.
(3) 여기서 도무지 상식적(常識的)이지 않은 설명(說明)은 : 「무신정변(武臣政變)을 주도(主導)한 이의방(李義方)이 AD 1,174년에 피살(被殺)되었는데, 그의 동생(弟) “린(璘)”은 살아남아 전주(全州)로 가서 그 뒤에 호족(豪族)이 되었다.」라는 것은, “당시(當時)는 봉건왕조(封建王朝) 체제(體制)였다”라는 것을 생각지 못한 후손(後孫)의 작품(作品)일 가능성(可能性)이 있다. 곧 불가능(不可能)한 이야기라는 뜻이다.
(4) 어떻게 역신(逆臣)의 아우인 “이린(李璘)”이 살아남아 그것도 고향(故鄕)으로 낙향(落鄕)으로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고, 겨우겨우 홀로 살아남아 고향(故鄕)으로 피신(避身)했다고 하더라도 그 가계(家系)는 숨어 살다시피 했을 것임에도, “전주(全州)” 땅에서 급부상(急浮上) 호족(豪族)이 된다? 이건 당시(當時)의 체제(體制)로 보면 불가능(不可能)한 이야기다.
(5) 그 뒤의 자손(子孫)인 “이안사(李安社)”는 전주(全州)에서 기생(妓生)의 수청(守廳)드는 문제(問題)로 지방관리(地方官吏)와 다퉈, 죽게 생기자, 자신(自身)을 따르던 170 여호(餘戶)를 데리고 삼척(三陟)으로 야반도주(夜半逃走)했다고 하는데, 이게 참 답답한 이야기다.
이러한 이야기는 전라도(全羅道)의 전주(全州)나 강원도(江原道)의 삼척(三陟) 땅은 “고려(高麗)의 왕권(王權)이 미치지 않는 치외법권지대(治外法權地帶)였다”라는 말과 같다. 곧 거짓이라는 말이다.
(6) 삼척에서 또한 이해불가(理解不可)한 일이 벌어지는데 : 「170여 호(戶)를 이끌고 야반도주(夜半逃走)한 이안사(李安社)는 : 이곳에서 또 전주(全州)에서 기생(妓生) 수청(守廳) 문제(問題)로 다퉜던 그 관리(官吏)가 다시 삼척(三陟)의 관리(官吏)로 부임(赴任)하자, 이번에도 170여 호(戶)를 이끌고 함경도(咸鏡道)로 도주(逃走)해버렸다」라는 것이다.
(7) 또 「몽고(蒙古)가 강력(强力)하게 흥성(興盛)하자, 고려(高麗)의 관리(官吏)임에도 영토(領土)를 수호(守護)할 생각은 하지 않고, 1,000여 호(戶)를 인솔(引率)해 몽고(蒙古)에 투항(投降)하니, 몽고(蒙古) 달는 이안사(李安社)에게 남경(南京) 오천호(五千戶)의 달로화적(達魯花赤)에 임명(任命)되었다」라는 것이다.
(8) 「원(元) 나라가 쇠퇴(衰退)해지자, 이번에 다시 원(元)을 배신(背信)하고 고려(高麗)에 귀화(歸化)하여 군벌(軍閥), 토호(土豪) 세력(勢力)으로 급부상(急浮上)하였다」라고 하였으니… …
(9) 그 뒤, 요동(遼東) 땅을 수복(收復)하려는 “고려(高麗) 왕(王)”의 어명(御命)을 받고 출정(出征)하였으나, 출정군(出征軍)을 회군(回軍)시켜 반역(叛逆)을 일으키고 고려(高麗)의 “왕(王)과 함께 최영(崔瑩)을 중심(中心)으로 하는 대신(大臣)들을 살해(殺害)하고, 황족(皇族)들의 씨를 말렸다”라고 전(傳)해진다.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일으켜 “조선(朝鮮)”을 개국(開國)시켰다.
(10)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의 가계(家系)의 몽고(蒙古) 이름은,
➨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따르면, 「조부(祖父 : 할아버지)는, 발안첩목아(孛顔帖木兒) 또는 학안첩목아(學顔帖木兒), 부(父)는 오로사불화(吾魯思不花), 백부(伯父)는 탑사불화(塔思不花)」이다.
「모두 몽고(蒙古)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나 밝혀진 것이 없다」라는 것일 뿐이다. 이성계(李成桂) 자신(自身) 또한 몽고(蒙古) 이름이 있었을 것이나, 후손(後孫)들이 이를 기록(記錄)해 놓지 않은 것이다. 왜? 알 수 없는 일이다,
(11) 이런 여러 기록(記錄)을 살펴보면 : 이성계(李成桂) 가계(家系)는 : 화척【禾尺: 韃靼禾尺·白丁·楊水尺·才人】출신(出身)이라는 특수집단(特殊集團) 출신이 아니었을까? 하는 매우 합리적(合理的)인 의심(疑心)을 갖게 된다. 이러한 화척(禾尺) 출신(出身)이 아니었다면 불가능(不可能)한 설명(說明)을 바로 전주이씨(全州李氏) 가문(家門)에서, 또 족보(族譜)에서, 선원보략(璿源譜略)【AD 1,681년(肅宗 7)에 처음 간행되어, 1,931년(年)까지 계속(繼續) 보완(補完)되었다】에서 스스로 의심(疑心)을 불러일으키도록 설명(說明)하고 있기 때문이다.
禾尺(화척)【양수척(楊水尺)=무자리=백정(白丁)】의 기원(起源)은 북방유목족(北方遊牧族)들이 신라(新羅) 말엽(末葉), 고려(高麗) 초(初)에 유입(流入)되었는데, 이들 대부분(大部分)이 달단계(韃靼系)로 파악(把握)된다고 전해진다.
이들은 자기들끼리 무리를 이루어 수초(水草)를 따라 유랑(流浪)하며 가축(家畜)을 기르며 별도(別途)로 부락(部落)을 이뤄 살며 심지어는 일반(一般) 백성(百姓)들과는 통혼(通婚)조차 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 「이들 禾尺(화척)【양수척(楊水尺)=무자리=백정(白丁)】무리(衆)가 아니고서는, 170 여호(餘戶)를 이끌고 이곳저곳으로 도주(逃走)하고 또 몽고(蒙古)로 도망(逃亡)을 갔다」라는 말은 이해불가(理解不可)하며, 왕권(王權)이 미치고 있는 당시(當時)의 고려(高麗) 땅에서는 불가능(不可能)한 일이기 때문이다.
○ 이때 사서(史書)에서는 :
(12) 硏經齋全集外集 59 / 筆記類 / 蘭室譚叢(난실담총) : 「楊禾尺 : 楊禾尺者. 多居雲中道. 中略. : 양화척(楊禾尺) : 양화척(楊禾尺)은, 운중도(雲中道)에 많이 산다. 중략(中略)」하였다.
星湖先生僿說卷之二十三 / 經史門 : 「官妓 : 我國之妓種本出扵楊水尺. 楊水尺多居興化雲中道 : 관기(官妓) : 우리나라의 기생은 본래 양수척(楊水尺)에서 생겼는데, 중략(中略), 양수척이 흥화(興化)ㆍ운중도(雲中道)에서 많이 살았다.」라고 하였다.
「화척(禾尺)은 흥화도(興化道)와 운중도(雲中道)에 많이 살고 있다」라고 하였다.
➨ 운중도(雲中道)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고려시대 22개 장수역【長壽驛 : 지금의 평양(平壤)】을 중심(中心)으로 한 역도(驛道)로써, 「서북계(西北界)의 운중도(雲中道)·흥화도(興化道)」와 「동북계(東北界)의 연해도(沿海道)·명주도(溟州道)·삭방도(朔方道)와 동북로(東北路)」등이 있었다고 하였고, 「이곳에는 감창사(監倉使) ·분도장군(分道將軍) ·분대(分臺) 등을 두었다」라고 하였다.
➨➨「운중도(雲中道)」 : 본시(本是)부터 운중(雲中)이란 곳은 반도(半島)나 현 중원(中原) 땅에는 없다. 「운중(雲中)」이란 지명(地名)은 현(現) 신강성(新疆省) 땅에 두었던 지명(地名)이며, 행정조직(行政組織)의 이름이었다. 산서(山西)란 알타이산맥(山脈)의 서(西)쪽 지대(地帶)를 말하며, 운중(雲中)은 바로 이 산서(山西) 땅 안(內)에 있다. 【자치통감(資治通鑑)과 당서(唐書)를 인용(引用), 우리 카페(Cafe)에 게재(揭載)되어 있다.】
---------------------------------------------------------------------
(13) 자치통감(資治通鑑) 당기(唐紀) 고종(高宗) 용삭(龍朔) 3년 (서력 663년) :
〈二月, 徙燕然都護府於回紇, 更名瀚海都護:徙故瀚海都護於雲中古城, 更名雲中都護. : 2월에, 연연도호부(燕然都護府)를 회흘(回紇)로 옮기고, 이름을 바꿔 한해도호(瀚海都護)로 하였다 : 옛 한해(瀚海)도호(都護)는 운중(雲中)의 고성(古城)으로 옮기고, 이름을 바꿔 운중도호(雲中都護)로 하였다. 以磧為境, 磧北州府皆隸瀚海, 磧南隸雲中. : 적(磧)을 지경(地境)으로 하여, 적북(磧北)의 주(州)와 부(府)는 한해도호(瀚海都護)에 붙이고, 적남(磧南)지방은 운중(雲中)에 붙였다〉라고 하였다.
「적북(磧北)은 한해도호(瀚海都護)에 속하게 하고, 적남(磧南)은 운중도호(雲中都護)에 속하게 했다.」라는 이야기다. 여기서 “적(磧)”은 특이(特異) 사막(沙漠)을 말하는 곳으로, 신강성(新疆省) 토노번(吐魯番) 서남(西南)쪽에 있는 박사등호(博斯騰湖)【포류해(蒲類海)=포택해(蒲澤海)=파실해(婆悉海)=파이고륵박(巴爾庫勒泊) : 주위가 4백리(百里)나 되는데, 포창(蒲昌)현과 포류(蒲類)현의 양(兩)현 사이에 있어, 모두 이것으로 이름이 되었다. 】동(東)쪽 땅의 특이(特異) 지형대(地形帶)를 말하는데, 바로「적(磧)이란 “사타(沙陀)”를 말하며, 사타(沙陀)란 “비탈진 모래언덕”」이란 뜻이다.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서역(西域) : 금산(金山) : 《西突厥別部處月種居金娑山之陽,蒲類海之東,有大磧名沙陀,因自號沙陀. : 서돌궐(西突闕)의 별부(別部)인 처월(處月)종류가 금사산(金娑山)의 북(北)쪽에서 살았는데, 포류해(蒲類海)의 동(東)쪽에 대적(大磧)이 있어 이름이 사타(沙陀)인데, 비탈진 모래언덕으로 인하여 부르게 된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2천리(千里)에 걸쳐있다고 하였다.
이곳은 박사등호(博斯騰湖)의 동(東)쪽, 토노번(吐魯番)의 남(南)쪽이고, 공작하(孔雀河)의 북(北)쪽 사막지대를 말하는 것이다. 이곳을 적중(磧中)이라고 하며, 북(北)은 적북(磧北)·남(南)은 적남(磧南)·서(西)는 적서(磧西)라고 한다.
➨ 운중도호(雲中都護) 관할(管轄) : 신강성(新疆省)의 공작하(孔雀河) 이남(以南)이, 곧 운중(雲中)도호(都護) 관할이 되며,
➨ 한해도호(瀚海都護) 관할(管轄) : 토노번(吐魯番)북방(北方)지대(地帶) 준갈이(準喝爾) 분지(盆地)가 곧 적북(磧北)이며, 한해도호(瀚海都護)관할(管轄)이 된다
그렇다면, 「현(現) 산서성(山西省) 북방(北方)에 있는 운중(雲中)이라는 지명(地名)은 무엇이냐 하는 문제(問題)가 대두(擡頭)된다.」 이것은 짝퉁이며, 「조선사(朝鮮史)를 왜곡(歪曲), 조작(造作)하기 위한, 지명(地名)의 이동(移動)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
(14)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14권 高宗 3年)」기록(記錄)을 보면 : 「初, 契丹遺種金山王子, 金始王子, 以其黨鵝兒乞奴二人爲將, 脅河朔之民, 自稱大遼收國王, 建元天成 : 거란(契丹)의 유종(遺種)인 금산왕자(金山王子)와 금시왕자(金始王子)가 그의 무리 아아(鵝兒)ㆍ걸노(乞奴) 두 사람을 장수로 삼아 하삭(河朔)의 백성들을 위협하고, 스스로 대요수국왕(大遼收國王)이라 일컫고는 건원(建元) 천성(天成)이라고 하였다. 蒙古, 大擧伐之, 二王子, 席卷而東. : 몽고(蒙古)가 대거(大擧) 치니, 두 왕자가 기세를 몰아 동쪽으로 갔다. 八月乙丑,契丹將鵝兒乞奴,引兵數萬,渡鴨綠江,侵寧朔定戎之境. : 8월 을축(乙丑), 글란(契丹) 장수 아아(鵝兒)와 걸로(乞奴)가 병사(兵士) 수만(數萬)을 이끌고, 압록강(鴨綠江)을 건너와서, 영주(寧州)ㆍ삭주(朔州)ㆍ정주(定州)ㆍ융주(戎州)의 지경을 침범하였다」라고 하였고,
「양화척(楊禾尺)」은, 글란【거란 : 契丹】의 유종(遺種)인 금산왕자(金山王子)와 금시왕자(金始王子)가 고려(高麗)를 쳐들어오자 이들에게 항복(降伏)하고, 향도(嚮導)가 되었다」라고 전하고 있다.
➨➨ 여기서 핵심(核心)은 : 〈글란(契丹)의 유종(遺種)인「금산왕자(金山王子)·금시왕자(金始王子)」가 하삭(河朔)의 백성(百姓)을 위협(威脅), 협박(脅迫)하고는, 스스로 ‘대요수국왕(大遼收國王)’이라고 참칭(僭稱)했다〉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하삭(河朔)”은 어딘가?
「하삭(河朔)」 : 「하(河)의 북(北)쪽 땅」을 말하는 것이다. 「글란(契丹)의 유종(遺種)인 금산왕자(金山王子)·금시왕자(金始王子)와 수만(數萬)의 병사(兵士), 그리고 그 가족(家族)들이라면 십만(十萬) 이상(以上)의 집단(集團)이다. 이들을 뿌리 뽑기 위해, 몽고(蒙古)가 대거(大擧) 병력(兵力)을 동원(動員)하여 공격(攻擊)하니, 동(東)쪽으로 도주(逃走)했는데, 그곳이 압록강(鴨綠江)이었다」라는 이야기다.
그렇다면「압록강(鴨綠江) 서(西)쪽에 “하삭(河朔)의 땅”이 있어야 한다. 그곳이 어디냐?」 중원대륙(中原大陸) 요충지(要衝地)가 하삭(河朔) 땅인가? 압록강(鴨綠江) 서(西)쪽은 바다(海)이며, 바다를 건너면 중원(中原)의 요충지(要衝地) 땅이다. 어디에 “하삭(河朔)의 땅”이 있다는 것인가? 기막힌 조선사(朝鮮史) 해설(解說)이다.
〈「고려(高麗)」의「삼한통일(三韓統一)=천하통일(天下統一)=통일환영(統一寰瀛)」과정(過程)에서, 여러 이민족(異民族)이 복속(服屬)되고, 의탁(依託)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環境)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라고 밖에 볼 수 없다. 이때 복속(服屬)되고 의탁(依託)했던 이민족(異民族)들이 농경사회(農耕社會)에 적응(適應)하지 못하고 그들 본래(本來)의 생활방식(生活方式)에 따라 이동(移動), 유랑(流浪)하며 살게 된 복속(服屬)된 이민족(異民族)들을 곧 화척(禾尺)【양수척(楊水尺)=무자리=백정(白丁)】으로 불리게 된 것이다.
➨➨➨ 삼한통일(三韓統一)【천하통일(天下統一)·통일환영(統一寰瀛)】을 이룬 고려(高麗) 영토(領土)는 : 「동구라파(東歐羅巴)·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중원대륙(中原大陸)·반도(半島)·열도(列島)까지를 아울렀던 천자(天子)의 나라였다」는 것이고,
이를 증거(證據), 확인(確認)해 주는 것이 철륵(鐵勒)【칙륵(勅勒) : 통전(通典)에 의하면 : 장안(長安)으로부터 8 천리(千里)∼17, 500리(里) 사이에 살던 부족(部族), 종족(種族)으로 그 종류(種類)가 가장 많았다고 하였다.】들을 징발(徵發), 가장 힘들었다는 후백제(後百濟)와의 전투(戰鬪)에 투입(投入)한 것이 그 좋은 예(例)다.
이러한 사실(事實)은 더 이상 숨길 수 없다. 위에서 이야기하는 것들은 모두 고려(高麗) 땅의 서북방(西北方)이었던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북방지대(北方地帶) 【흑해(黑海), 리해(裏海), 함해(鹹海) 주변(周邊)】및 오늘날의 신강성(新疆省) 북(北)쪽의 서(西) 시베리아(Siberia) 분지(盆地)【西伯利亞=鮮卑利亞】등지(等地)」에서 벌어졌던 일들이다. [제5편으로 계속(繼續)]
2024년 09월 01일 [글쓴이 : 문무(文武)]
|
첫댓글 * 혹시나 "전주이씨"인 분들은 이게 뭔 설명인가? 하며 눈을 부라릴 수 있으나, 위의 설명은 역사서에 근거한 것이며, 특히 전주이씨의 '화척=양수척' 기원설은 필자의 사견임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역사해설은,
* 머리로 하는 것이고,
* 가슴의 감정으로 해설하는 것이 아니니, 오해없으시길 바라며, 왜 역사서에서는 이성계 가문의 확실하고 명백한 사실을 기록하지 않고, 생뚱맞은,이해불가한 이야기들로 채워 놓은지를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 이성계 가문은 군왕 자신들의 가계이기 때문에,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천명을 이야기하려면 그에 합당한 시조설과 이성계 출생관계를 설명해야 함에도...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정당한 합당한 이유있는 설명은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 특히 "몽고와 달단"과의 이야기는 이성계 가문의 흥성과 직접 관계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들을 빼고는 이성계가문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 가슴이 아닌 머리로부터 역사서를 중심으로해설하는 것이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슴과는 차이가 많다고 볼 수 있습니다.
'5'편에서는 주로 달단의 영역과 관계되는 근세의 기록을 가지고 논해보기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달단에 대해서 관심이 많아서 실록에서 몇번 찾아봤습니다.
선생님 삼위위라고 하는 곳이 진짜 만주땅이죠?
신록에는 삼위달자라는 말이 있더라고요.
달자와 야인의 혼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야인과 조선인의 혼혈이나 중국인의 혼혈 이야기는 없어요.
그렇다면 외모적으로 달자와 야인은 확연한 차이가 있다는 것인데
왜 지금의 몽골을 달단이라고 할까요?
억지죠? 오히려 삼위 달자라고 하면 모를까요
예전에 김홍필 서생님 활동하셨을 때도 보면
몽골에서 벽안인 사람들 사진을 몇번 올리시더라고요.
인터넷에서도 쉽게 검색이 되었고요.
적어도 지금 몽골땅은 달단은 아닌 것 같더라고요.
외모가 확실히 달랐기 때문에 혼혈이 구분이 되었던 거잖아요.
고로 선생님이 주장하시는 서양인의 외모가 맞을 겁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실록에 보면 알타리가 자주 나옵니다.
삼위달자가 올량합이라고 하고 그옆에 올적합
그리고 알타리가 있다고 하는데 이들은 백두산 근처의
야인들이라고 하더라고요.
이들이 혹시 알타이 공화국의 사람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알타이 공화국은 몽골과 접해 있고 카자흐스탄과도 접해 있잖아요.
그게 참 궁금했습니다.
"Romantic"님!
그동안 안녕하셨는지요! 반갑습니다.
"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그 의미를 잘 알것 같습니다.
옛 "몽고(蒙古)"은 황인종 곧 우리들과 같은 소위 몽골리안이 아니라는 것은 : 바로 우리들의 선대분들의 기록에서 말씀을 해주시고 계십니다. 더불어 근세의 기록이라고 하는 해국도지에서도 "달단"은 "몽고"로 그들의 터전은 중앙아세아 땅이라고 정확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조상들의 역사"에 관해서만은 "무지(無知)와 무식(無識)속에서 살고 있다"고 해도 과장된 표현이 아닐 정도로 거짓을 진실인 냥 믿으면서 사는 이상(?)한 국민들이라고 봅니다.
* 오늘날의 몽골공화국 국민들은 대부분이 몽골반점을 가지고 태어나며, 반도 땅의 국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옛 "몽고인"인 색목인도 몽골반점을 가지고 태어날까요?
그래서 오늘날의 몽골공화국 국민들을 옛 몽고인의 후손이 아닌 옛 조선인들의 후손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고황제가 설치했다는 삼위의 땅이 바로 "오리지널 만주 땅"입니다.
그래서 백두산은 오늘날의 한반도 백두산이 될 수 없는 것이며,
*** 조선의 '백두산=장백산'은 "금산(金山)이며, 알타이산이며,아이태 산"인 오늘날의 벨루하산이라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곳의 백두산과 그 동쪽의 당노산맥에 올량합들의 살던 곳입니다.
한반도와는 전혀 관계없는 종족들이자 부족들입니다.
알타이공화국 또한 그 범주에 포함됩니다.
*** 다음 편과 그 다음게재 예정인 글에서 좀 더 깊은 조선사 이야기를 주제로 하고자 합니다. 오늘날 한국인들이 얼마나 역시인식이 부족한지 요녕성 심양 주변을 흐르는 하천 주변에서 옛 조선장수와 사졸들이 전사한 곳을 기리고자 막걸리를 뿌리며 제를 지낸다는 기가 막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옛 선인들을 기리고자하는 마음은 가상합니다만, 번짓수가 1만리도 넘게 떨어져 있으니 기가 콱 막힐 일이지요!
관심과 성원에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