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에 관한 시 모음> 고은영의 '7월에게' 외
+ 7월에게
계절의 속살거리는 신비로움 그것들은 거리에서 들판에서 혹은 바다에서 시골에서 도심에서 세상의 모든 사랑들을 깨우고 있다 어느 절정을 향해 치닫는 계절의 소명 앞에 그 미세한 숨결 앞에 눈물로 떨리는 영혼
바람, 공기, 그리고 사랑, 사랑 무형의 얼굴로 현존하는 그것들은 때때로 묵시적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노래를 부른다 나는 그것들에게 안부를 묻는다
"안녕, 잘 있었니?" (고은영·시인, 1956-)
+ 7월이 오면 훨훨 날아가는 갈매기 옛친구같이 찾아올 7월이 오면 이육사를 만나는 것으로 첫날을 열어보리
활활 타오르는 태양이 소낙비처럼 쏟아질 7월이 오면 청포도를 맛보는 것으로 첫날을 시작하리 (오정방·재미 시인, 1941-)
+ 7월
넓은 들판에 태양열보다 더 세차고 뜨거운 농부들의 숨결이 끓는다
농부들의 땀을 먹는 곡식 알알이 야물게 자라 가을걷이 때면 황금빛으로 찰랑거리며 세상의 배를 채울 것이다 그런 기쁨 잉태되는 칠월
우리네 가슴속 응어리진 미움, 슬픔, 갈등 같은 것일랑 느티나무 가지에 빨래처럼 몽땅 내걸고 얄밉도록 화사하고 싱싱한 배롱나무 꽃향기 연정을 그대에게 바치고 싶다 (안재동·시인, 1958-)
+ 7월
한 해의 허리가 접힌 채 돌아선 반환점에 무리 지어 핀 개망초
한 해의 궤도를 순환하는 레일에 깔린 절반의 날들 시간의 음소까지 조각난 눈물 장대비로 내린다
계절의 반도 접힌다
폭염 속으로 무성하게 피어난 잎새도 기울면 중년의 머리카락처럼 단풍 들겠지
무성한 잎새로도 견딜 수 없는 햇살 굵게 접힌 마음 한 자락 폭우 속으로 쓸려간다 (목필균·시인)
+ 7월 푸른색 산하를 물들이고 녹음이 폭격기처럼 뚝뚝 떨어진다
길가 개똥참외 쫑긋 귀기울이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토란 잎사귀에 있던 물방울 또르르르 몸을 굴리더니 타원형으로 자유낙하한다
텃밭 이랑마다 속알 탱탱해지는 연습을 하고 나뭇가지 끝에는 더 이상 뻗을 여백 없이 오동통한 햇살로 푸르름을 노래한다
옥수숫대는 제철을 만난 듯 긴 수염 늘어뜨린 채 방방곡곡 알통을 자랑하고 계절의 절반을 넘어서는 문지방은 말매미 울음소리 들을 채비에 분주하다 (반기룡·시인)
+ 7월
직장 잃고 집에서 빈둥대는 스물아홉살 옆집 아가씨 지어미 잔소리에 죄 없는 여름햇빛 나무라며 뽀얀 종아리 휘저으며 동네 슈퍼에 들러 오백원 짜리 아이스크림 입에 물고 싸구려 여름을 가슴 깊이 엎지르는 두터운 브래지어 같은 7월. (유봉길·시인)
+ 7월 어디선가 속삭이는 소리 옆집 은행나무 두 그루가 사랑을 하고 있나봐
숨가쁜 호흡이 들려
잔뜩 귀 기울이다 더 가까이 가 보았더니 시치미 뚝 떼고 잔기침 소리만 내고 있잖아
짓궂은 생각이 들어 툭툭 건드렸더니 하늘 한쪽 기울여 가장 깨끗한 햇살 파편들을 눈 못 뜨게 쏟아 붓잖아. (김지헌·시인, 1956-)
+ 7월
은행나무가 세상의 빛을 다 모아 초록의 알 속에 부지런히 쟁여넣고 있네 이파리 사이로 슬몃슬몃 보이는 애기 부처의 동그란 이마 같은 말, 말씀들 무심히 지나치면 잘 보이지도 않는 한결같이 동글동글 유성음으로 흐르는 푸른 음성들 그 사이로 푸득푸득 파랑새 날고, 긴 개울이 물비늘 반짝이며 흐르는 나무 아래, 물가를 떠난 숨가쁜 돌멩이 말씀에 오래 눈 맞추어 온몸이 파랗게 젖네 그렇게 길 위의 돌멩이 떠듬떠듬 꽃피기 시작하네 (홍일표·시인, 1958-)
+ 7월의 시
산이나 들이나 모두 초록빛 연가를 부르고 있습니다 보일 듯 보일 듯 임의 얼굴 환시를 보는 것도 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한적하고 쓸쓸한 노을지는 창가에서 눈물을 견디고 슬픔을 견디는 것은 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나무의 눅눅한 그림자까지 초록빛으로 스며드는 7월의 녹음 나무는 나무끼리 바람은 바람끼리 모여 사는데 홀로 있어 외롭지 않음은 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깊은 산 속 작은 옹달샘을 찾아 애절히 불타는 이 가슴을 식혀볼까, 6월도 저물어 한 해의 반나절이 잦아드는데 노을빛 가슴을 숨기고 애연히 그리움으로 흐르는 것은 임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김태은·시인)
+ 7월의 천사
칠월의 장마비가 쉬어가는 듯 잠시 목을 축이고 늦은 새벽 정형외과 632호 병실 창가 커튼 사이로 기웃거리며 엷은 아침햇살이 한 가닥 길게 내려앉는다
어제 떠난 두 사람 주인 보낸 침대 위엔 아픔의 상처들이 이리저리 어지럽게 빈자리만 지키고 있다 나는 언제쯤 퇴원할까 마음만은 가볍지가 않다 만나야 할 사람 설렘 반 기다림 반 그리움이 넘칠 때 병실 출입문이 살짝 열리더니 가을 낙엽 위에 이슬 구르는 작은 목소리 혈압시간이에요 백의천사 환한 미소가 아침햇살 가득히 병실 안을 꽉 채워준다 (장수남·시인, 1943-)
+ 땡볕
7월이 오면 그리 크지 않는 도시의 변두리쯤 허름한 완행버스 대합실을 찾아가고 싶다.
죽이 다 된 캐러멜이랑 다리 모자라는 오징어랑 구레나룻 가게 주인의 남도 사투리를 만날 수 있겠지.
함지에 담긴 옥수수 몇 자루랑 자불자불 조는 할머니 눈부신 낮꿈을 만날 수 있겠지.
포플린 교복 다림질해 입고 고향 가는 차 시간을 묻는 흑백사진 속의 여학생 잔잔한 파도를 만날 수 있고
떠가는 흰 구름을 바라보며 행려승의 밀짚모자에 살짝 앉아 쉬는 밀잠자리도 만날 수 있겠지.
웃옷을 벗어 던진 채 체인을 죄고 기름칠을 하는 자전거방 점원의 건강한 웃음이랑
오토바이 세워 놓고 백미러 들여다보며 여드름 짜는 교통 경찰관의 초록빛 선글라스를 만날지도 몰라.
7월이 오면 시멘트 뚫고 나온 왕바랭이랑 쏟아지는 땡볕 아래 서 있고 싶다. (손광세·시인, 1945-)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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