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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일암 해돋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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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조 | "절망에 빠져 있을수록, 마음이 평화를 간절히 원할수록,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미지의 곳으로 떠나야 한다. 그것이 말뿐인 위로보다, 고통스런 현실을 넘어서는 하나의 방편일 수 있고 도약의 계기가 될 수 있다." (백경훈의 <마지막 은둔의 땅, 무스탕을 가다> 중에서)
우리는 살면서 가끔은 무작정 길을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적막한 밤, 그저 밤기차를 타고 목적지도 없이 훌쩍 떠나고 싶을 때가 있다. 시외버스를 타고 뿌연 먼지 일으키는 신작로를 따라 하염없이 달리고 싶다. 뱃고동 울리는 여객선을 타고 끝없이 펼쳐진 바다의 한가운데에 다다르고 싶다. 그것이 어쩌면 백경훈의 시처럼 절망에 빠져 있을수록 가야할 길인지도 모른다.
나는 수원대 이원영 교수가 이끄는 '국토사랑방' 1월 남도여행에 동참하기로 했다. 아침 7시 서초구청 주차장에서 관광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 버스는 남쪽으로, 남쪽으로 내려간다. 얼마쯤 갔을까 이윽고 순천만이 보이고, 우선 허기를 때우려 음식점을 찾는다. 순천만 한쪽 켠 순천시 별량면 학산리 '쇠리회관'에 당도한다.
그곳에 차려진 풍성하고 신선한 해물탕은 모두의 미각을 자극한다. 서울 도심이 아닌 바닷가에서 막 잡아낸 싱싱한 조개, 낙지와 물고기들의 향연이 어우러진다. 현지의 맛이 바로 이것일 터이다. 마지막을 장식했던 꼬막은 이 지방 특산물의 위력을 보여준다. 실컷 먹고 배가 불렀지만 모두 꼬막 까먹기에 여념이 없다. 순천만을 바라보며 먹은 점심에 한결같이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그래 다음에 먹을 밥이 맛이 없으면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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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행의 또 다른 맛, 식도락, 왼쪽:쇠리회관에서의 점심식사, 오른쪽 위:쇠리회관의 해물탕, 아래:삼학집의 서대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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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조 |
| 그리고 달려간 곳은 철새도래지로 유명한 순천만 갈대밭과 갯벌. 순천시 교량동과 대대동, 해룡면의 중흥리, 해창리 선학리 등에 걸쳐 있는 순천만 갈대밭의 전체 넓이는 약 15만 평이나 된다고 한다. 순천 시내를 뚫고 달려온 동천과 순천시 상사면에서 흘러 온 이사천이 만나는 곳부터 강어귀에 이르는 3킬로미터쯤의 물길 양쪽이 죄다 갈대밭으로 뒤덮여있다.
사람의 키보다 훨씬 더 웃자란 갈대들이 빈틈없이 자리잡고 있다. 국내에서 가장 큰 규모인 갈대밭과 함께 1.6평방킬로미터에 달하는 갯벌은 흑두루미, 재두루미, 황새, 저어새, 검은머리물떼새 등 국제적인 희귀조이거나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11종뿐만 아니라 도요새, 청둥오리, 혹부리오리, 기러기 등을 포함해 약 140종의 새들이 날아드는 곳으로 전 세계 습지 가운데 희귀 조류가 가장 많은 지역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 연안습지(갯벌)로는 처음으로 전남 순천만 갯벌과 보성 벌교 갯벌이 국제적 습지관련 기구인 람사(RAMSAR)협약에 최근 등록됐다(제1594호). 이 순천만을 제대로 보기 위해 나루에서 우리는 탐사선에 올랐다. 선장의 친절한 안내가 뒤따른다. 갈대밭의 장관 속을 헤쳐 나간다. 그러자 갯벌이 보이기 시작하고, 철새떼들이 여기저기 무리를 이루고 먹이를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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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천만의 갈대밭과 철새들(위: 붉은부리 갈매기, 아래:흑두루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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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조 |
| 우아한 자태의 백로가 보이고, 아름다운 부리를 뽐내는 붉은부리갈매기, 천연기념물 제228호인 흑두루미가 보인다. 처음 만나는 새들이었지만 선장의 구수한 설명 솜씨에 모두 망원경으로 확인하고,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다. 좀 더 가까이 다가가 새들과 이야기를 나눠봤으며 하는 마음이지만 새들이 그를 허락해 줄 리도 없고, 시간도 허락지 않는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하고, 우린 다시 버스에 올라 여수 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부지런히 가 여수시 소라면 한 카페에 당도한다. 여기서 맥주 한잔을 마시며 해넘이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잠시 뒤 해는 아쉬운 작별을 고하고 있다. 온 세상을 비추던 해는 하나의 붉은 동그라미가 되어 서서히, 서서히 얼굴을 감추어 간다. 저 붉고 작은 동그라미가 온 세상을 불사르던 그 해가 맞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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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넘이(여수시 소라면의 한 카페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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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조 |
| 해가 바다 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우린 다시 갈 길을 재촉한다. 여수시내의 '삼학집'이란 횟집에서 저녁을 먹기로 했다. 차린 음식은 '서대회'. 채소와 어우러진 서대회의 맛은 가히 일품이다. 처음 먹어보는 회였지만 앞으론 제법 즐기고 싶은 음식이 될 것이다. 덤으로 시킨 갈치구이는 서대회를 배가 부르게 먹은 것을 후회한다.
그리곤 숙소인 한 모텔에 들어간다. 나는 이원영 교수, 개인사업을 하는 김건영씨와 함께 같은 방을 쓰기로 한다. 이 교수와 몇 사람이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간 사이 호승호 총무가 방에 들어왔다.
김건영씨, 호승호 총무와 나는 대화의 광장을 연다. 맨 처음, 오랫동안 기수련을 해온 호총무의 기의 세계가 펼쳐지고, 김건영씨의 사업얘기, 그리고 나의 한복과 전통문화 이야기가 교차한다. 1시까지 피곤한 줄 모르는 이야기 나눔은 정말 서로 따뜻하게 감싸주는 매력이 있음이다. 사실 여럿이 하는 여행의 즐거움은 동행과의 이야기에 있지 않을까?
다음날 아침 6시가 되기 전에 서둘러 잠을 깬다. 부지런히 세수를 하고, 향일암으로 해돋이 장관을 맞으러 간다. 출발이 계획보다 다소 늦어지자 마음이 급하다. 향일암 주차장에 도착한 나는 급한 마음에 내처 뛰어오른다. 숨이 가빠오지만 바다를 뚫고 솟아오르는 해님을 맞는데 게으름을 피울 수는 없다. 향일암 바로 아래 좁은 바위틈으로 올라가는 관문을 통과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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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세의 찌든 때를 씻어주는 향일암 절집의 풍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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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조 |
| 많은 사람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올라가니 이미 많은 사람이 올라와 자리를 틀고 있다.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조용한 다툼도 있다. 그 사이 멀리 수평선이 희뿌옇게 밝아온다. 어둠 속에서 조그만 붉은 점이 머리를 내밀기 시작한다. 그리곤 점점 커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 저것이 정녕 사람들에게 희망의 덩어리로 보이는 해란 말인가? 가슴이 벅차오른다. 아니 아득해진다. 잠시 숨이 막혀온다.
향일암 한 절집에 매달린 풍경이 조용히 맑은소리를 토해낸다. 드디어 우리는 병술년을 떠오르는 해와 함께 맞고, 풍경소리를 통해 속세에 찌든 때를 씻어내고 있다. 향일암도 절집도 저녁노을처럼 불그스레한 기운이 감돈다. 당신의 얼굴도 붉게 상기된다. 아직 차가운 기운이 남아있는 새벽공기를 해는 삼켜버린다. 오늘의 이 갓밝이는 병술년의 서곡일레라.
해돋이를 본 우리는 서둘러 주로 낚시꾼들을 태워다주거나 유람을 하는 10톤의 작은 배를 탄다. 선실에 19명의 일행이 들어가니 가득 찬다. 우리는 배 선실에서 흔들리며, 생선매운탕과 갈치구이로 아침식사를 한다. 역시 싱싱한 생선이 우리 입맛을 한껏 돋운다. 이런 맛을 꿀맛이라 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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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중다담을 하시는 금둔사 주지 지허스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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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조 | 이 배는 금오도, 안도를 지나 소리도까지 나가본다. 이 뱃길은 이름하여 '신강수로'라고 한다나? 중간의 작은 섬 부도엔 황새들이 하얗게 진을 치고 있어 일행들의 눈길을 끈다. 그리고 섬마다 바다 낚시꾼들이 즐비하다. 가파른 절벽의 작은 공간에 비집고 앉아 낚시를 하는 것을 보며 누가 '의지의 한국인'이라 말한다.
배에서 내려 이젠 북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순천시 낙안면 낙안읍성민속마을 옆 옥성별가든에서 한정식을 먹는다. 여기 음식은 비교적 담백하다. 식사 뒤 홍매화로 유명한 금둔사에 들른다. 이곳은 전 선암사 주지였으며, 50년 동안 우리나라 전통차의 맥을 잇기 위해 노력해온 지허스님이 주지로 계신다. 지허스님은 내가 2002년 12월 인터뷰를 하여 기사를 올렸던 "속세를 벗어나 선암사에서 차 한잔을"의 주인공이다. 미리 연락을 해두었더니 스님은 반갑게 맞아 주신다.
"손님이 오시면 술도 좀 대접해야 할 텐데 여긴 그게 없으니 안 됐습니다. 하지만, 내가 손수 덖은 전통차 '천강월'(千江月)잎차 공양을 드릴까 합니다" 천 개의 강에 비친 달이란 뜻의 이름이 참 운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스님은 차공양 전에 먼저 '산중다담(山中茶談)'을 하신다. 스님은 예전 선암사에 계실 땐 매주 일요일 차에 관심있는 사람들을 맞아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는 '산중다담'을 해오신 바 있다.
스님의 이야기는 차의 정의, 종류, 우려 마시는 방법, 차 상식 따위의 다양한 이야기를 쉽게 설명하신다. 쉬워서 이해가 잘 된다며, 모두 관심있게 듣고 있다. 그리곤 마셔보는 '천강월잎차'. 평소에도 차를 즐겨온 이원영 교수는 단박에 최고의 차라며, 탄복한다. 그리고 차를 한 통 구입한다. 그러자 몇 사람이 따라서 차를 구입하며, 50년을 차만 덖어오신 스님의 귀중한 천강월잎차에 너무 흡족해 한다. 스님과의 아쉬운 작별을 하고, 마지막 여행지인 선암사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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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명당에 물려있는 선암사 대웅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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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조 |
| 스님이 선암사에 전화해주신 덕에 매표소도 쉽게 통과하고, 중간 주차장까지 단숨에 올라간다. 이후로 선암사에 올라가는 비포장 길에서 우리는 앙상한 가지의 겨울 정취를 느껴본다. 이 비포장길은 지허스님이 주지로 계실 때 생태자연을 생각해서 포장을 거부했다는 길이다.
이번 여행은 명당안내자 덕원선생이 갑자기 몸이 아파 빠진 관계로 명당에 대한 설명은 생략됐다. 다만, 이 교수는 선암사 대웅전을 비롯한 절 전체가 명당으로 둘러싸인 대표적인 명당지임을 덕원선생과 이미 확인한 적이 있다며 그냥 기만 받아오면 될 것이란 말을 한다.
그러면서 그는 강조한다. "선암사는 뒷간마저도 명당에 물려있을 정도입니다. 따라서 꼭 뒷간에서 일을 보고 기를 듬뿍 받아가길 바랍니다" 절의 정문인 일주문에 당도하기 전 작은 호수가 있다. 이 호수는 산속인데도 불구하고, 해거름까지 햇빛이 멈추지 않는 명당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대웅전, 석탑, 누워있는 소나무, 승선교 등에서 기를 받으려 천천히 손을 들어올리고, 숨을 들이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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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암사의 전통 뒷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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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조 |
| 선암사에서 기를 받는 것으로 이번 여행은 마무리된다. 그 어느 여행보다도 이번은 기를 듬뿍 받고, 해넘이와 해돋이를 온몸으로 느꼈으며, 갈대밭과 갯벌 그리고 철새, 섬 섬 섬들 그뿐만 아니라 싱싱한 해물의 식단까지 어우러진 환상의 여행은 아니었을까?
백경훈의 시처럼 "절망에 빠져 있을수록, 마음이 평화를 간절히 원할수록"은 아니었지만 나는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미지의 곳까지 떠났다가 되돌아왔다. 말뿐인 위로보다, 고통스런 현실을 넘어서서 도약의 계기가 된 그런 아름다운 여행이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