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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달리니 kundalini 란 무엇인가] | |||
"쿤달리니"라는 말은 뱀과 같은 또아리(coiling)를 의미한다. 하타 요가의 고전적인 문헌에서는 쿤달리니는 척추 기저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뱀으로 묘사되고 있다. 용수철과 같은 또아리 이미지는 개발되지 않은 잠재 에너지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아마 더 의미있는 쿤달리니는 척추 기저에 있는 창조적인 에너지의 거대한 저수지로 기술될 수 있다. 우리 머리 속의 의식을 교정할 필요나 척추를 오르내리는 외적인 힘으로 쿤달리니를 생각할 필요는 없다. 불행하게도 뱀의 이미지는 이미지의 외적인 본성을 강조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쿤달리니가 우리 몸을 통해 움직일 때, 의식이 그와 같이 변화할 수 있도록 하는 의식의 기초로 생각하는 것이 더 유용하다. 프라나와 쿤달리니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기와 쿤달리니 사이의 차이는 무엇인가? 먼저 동일한 전통으로부터 온 2가지 개념인 프라나와 쿤달리니에 대해 설명하기로 한다. 프라나는 "심호흡"과 "생체 에너지적 운동성"이라고 번역되고 있으며, 심신의 기능을 유지하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프라나 쿤달리니 형태 안에서 쿤달리니는 프라나와 동일하다 : 그러나 쿤달리니도 의식으로서, 그리고 우주 에너지를 통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사람들은 이들 동일한 국면들을 프라나에 돌릴 수도 있으며, 어떤 점에서는 차이를 갖지 않는 구분이 된다. 쿤달리니 각성을 실재로 경험하는 주관적인 입지점으로부터 나는 3가지 완전히 다른 의견을 발견했다. 중국의 기(氣)라는 개념은 인도의 프라나 개념과 동일시하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만약 이 모든 것이 혼란스러우면, 걱정하지 말라. 상관없다. 이들 모두는 동일한 경험들을 다루는 다른 용어들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들 관점들 중의 어느 것이라고 해도 경험의 전 범위를 기술하는 데 적합하다. 종종 혼동되는 두가지 다른 셩험들을 구분하는 것이 아마 더 적절할 것이다. 개인들은 척추를 통해 전자적인 에너지의 흐름을 기분 좋게 활성화하는 것을 느낀다. 이들 경험 자체는 광범위한 경험을 야기하고 활력과 감수성을 가져다 준다. 또 다른 매우 두드러진 경험은 스숨나를 들어와 척추 위로 올라가는 쿤달리니의 경험이다. 쿤달리니가 스숨나에 들어오자마자, 이 경험은 완전히 일반적인 의식 각성을 압도할 것이다. 쿤달리니가 스숨나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경험하는 주체의 의식과 경험 객체 사이의 구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훨씬 더 심오하게 의식을 변형시킨다. 만약 쿤달리니가 일반적이라면, 왜 어떤 쿤달리니 요가 수행자들은 다른 사람보다 더 쿤달리니 에너지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가? 쿤달리니는 영적인 깨달음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무엇이 쿤달리니 요가의 목적인가? 먼저 우리는 몇가지 개념이 필요하다. 요가의 해부학에서 스숨나는 중앙의 통로이고 척추를 따라 흐르고 정수리까지 올라가는 쿤달리니 에너지의 도관이다. 이 통로를 따라 차크라라고 하는 부가적인 통로망들이 위치한다. 이들 챠크라들은 우리의 해부학의 주요 국면들과 관련되어 있는데 - 예를 들면, 목, 심장, 태양총, 그리고 차례로 이들 해부학은 인간의 본성의 국면들과 관련되어 있다. 쿤달리니 요가의 문헌들에 따르면, 이들 센터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그 가운데로 가는 에너지의 흐름으로 적당하게 제한된다. 세 개의 매듭들은 특히 중요하다. 척추 기저 중심을 제한하는 브라흐마의 매듭과 심장 가운데를 제한하는 비시누의 매듭, 양미간의 중심을 제한하는 루드라의 매듭, 이들 매듭들은 요가적인 사고에서 중요한 뼈대를 형성하고 있으며, 각성을 향한 단계들은 몇 가지 요가, 우파니샤드에서만이 아니라, 요가의 고전 하타 요가 프라디피카에서는 이들 매듭을 통한 호흡으로 깨달음에 이르는 단계들이 그려지고 있다. 1. 아람브하(arambha) 아람브하는 브라흐마 매듭의 호흡과 쿤달리니 각성과 관련이 되어 있다. 가타는 비쉬누 매듭의 호흡과 내적인 흡수와 관련되어 있다. 파리차야는 흡수를 깊게 하고 니쉬파티에서 루드라 매듭이 뚫리고 쿤달리니가 정수리 가운데로 상승한다. 이 상태에서 초월이 통합되고 요가 문헌에 따르면, 요가 수련자는 성취하게 된다. 그러면 모든 사람들이 쿤달리니 각성이 깨달음에 필수적인 것이라고 동의하는가? 쿤달리니 각성이 깨달음에 필수적이라는 견해는 카슈미프 샤이비즘의 다양한 문헌과 다른 힌도 탄트라 문헌에 나오고 있다. 이것은 하타 요가와 나타 삼프라다야의 문헌에서 발견되고 있다. 쿤달리니 요가를 단지 건강을 증진시키기 위해 사용할 수 있나? 전통적으로 쿤달리니를 각성하기 위해 준비하면서 몸을 정화하는 데 사용되는 요가 수련들은 또한 단순히 건강을 증진하기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다. 건강을 증진시키기 위한 목표를 가지고 쿤달리니를 활성화시켜 주는 기술을 활용하는 것은 이들 강력한 기술을 요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쿤달리니와 차크라의 과학적인 근거가 있는가? 나는 진정 이 모든 차크라들이 물리적으로 존재한다고 믿어야 하는가? 쿤달리니에 대한 연구는 특히 한결같지 않다. 이 체제가 실제의 인간의 해부적 구조를 통찰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강력한 글은 없다. 그러나 쿤달리니와 통로와 차크라의 네트워크가 요가 수행자들이 그들의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선택해온 방식과 많은 문화들로부터 요가 수행자들이 비록 동일하지는 않지만 유사한 개념에 다다르고 있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들 경험에 놓여 있는 진정한 물리적인 메카니즘은 여러 군데에서 다르게 설명되고 있다. Izaak Benthov는 쿤달리니를 두뇌 안에서의 미세 움직임(micro-motion)이라는 용어로 설명하는 모델을 제안했다. 이 모델에서 경험은 몸의 부분과 관련된 두뇌의 그 부분이 미세 진동들에 의해 자극되기 때문에 심장과 같은 몸의 부분들과 관련되어 있다. 그의 모델은 Sannella가 쓴 "쿤달리니 경험"에서 다루고 있다. 실재적인 관점에서 중요한 일은 우리의 주관적인 경험이며, 이들 주관적인 경험의 안내 지도가 그려져 있는 것이다. 중국의 기공은 쿤달리니 요가의 일종인가? 만약 쿤달리니 요가보다 접근법에서 보다 광범위한 현대의 가르침이 있다면, 그것은 기공일 것이다. 결과적으로 쿤달리니 요가와 기공을 비교하는 것은 어렵다. 기공에 대한 내가 제한적으로 접한 바에 의하면, 쿤달리니 요가 수련과 동일한 많은 기공 수련이 있음에 틀림이 없다. 또한 분명한 것은 기공 참여자들이 쿤달리니 요가 수련자들과 동등한 경험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 각 수련법은 기 / 프라나 에너지의 제한을 제거하는 것이 목표기 때문에 그들은 공동의 배경을 공유하고 있다. 티벳불교는 어떤가? 쿤달리니는 티벳에 알려져 있는가? 티벳 불교의 나타 삼프라다야와 바즈라야나 양자는 그들의 기원을 8세기에서 12세기까지 인도에서 활동했던 마하시다스로부터 기원을 잡고 있다. 쿤달리니 요가 수련은 이들 수많은 마하시다스의 가르침의 핵심을 형성했고 티벳 불교 수련과 현대의 쿤달리니요가 수련 양쪽에 강력하게 나타나고 있다. 쿤달리니 요가는 이들 마하시다스에 의해 "칸달리 요가"라고 불리며 티벳에서는 그툼모 말 비오르로 알려지게 되었다. 칸달리 요가는 유명한 티벳 요가 밀라레파의 주요한 수련이다. 쿤달리니 인식을 보이는 다른 전통이 있는가? 만약 쿤달리니가 영적 발전의 기초에 있다고 믿는다면, 모든 분명한 영적인 전통은 쿤달리니의 인식을 하고 있음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기독교(특히 궤이커 교도와 성령강림주의), 수리즘, 쿼벌 신비주의, 연금술과 주술 모두는 쿤달리니 과정에 이해를 보이는 문헌들을 가지고 있지만, 이들 전통들은 그들의 저자의 인식에 따르면, 그 기술에 대해 직접 공개하지는 않고 그래서 그들 전통에서 명백한 이해의 깊이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상이 이 전통에서는 잘못된 것은 아니기 때문에, 각자는 적어도 동시에 쿤달리니 운동과 관련이 있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간접적으로 쿤달리니는 헌신, 비이기적인 서비스에 의해서 깨어날 수도 있고, 혹은 지적인 탐구에 의해서 깨어날 수도 있다. 이들 경로에서 쿤달리니의 각성에 제한은 천천히 제거된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 과정에서 개인들은 갑자기 쿤달리니를 깨달을 수도 있지만 제한은 서서히 제거된 쿤달리니 유사 경험은 이 경로에서 진화한다. 쿤달리니를 깨우기 위해 시다 마하요가에서 구루들의 은혜를 주는 것과는 반대로, 쿤달리니 요가에서 노력하는 득실은 무엇인가? 모든 참여자들은 자신의 독특한 경향과 요가 수행에 장애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점에서 일반화하기 어렵다. 실재로 쿤달리니의 각성을 위해서는 시다 마하요가의 그루들은 쿤달리니는 개인들의 노력에 의해서보다는 그루의 은총에 의해 보다 쉽고 확실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의 제한된 경험에서 볼 때, 나는 이 주장에 대해 동의한다. 두 수련을 하는 장기 수도자들이 쿤달리니 각성의 징조를 반드시 보여줄 필요가 없는 반면에 많은 사람들이 시다 구루로부터 입문을 통해 쿤달리니의 즉각적인 각성을 해오는 방법은 놀라운 것이다. 각성된 쿤달리니의 징표는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 고전적인 문헌에 따르면, 각성된 쿤달리니의 징표는 정신적 징표, 음성 징표 그리고 물리적 징표로 분류할 수 있다. 정신적 징표는 지극한 쾌락으로부터 무시무시한 두려움에까지 이르는 광경 등이다. 음성적인 징표는 만트라 낭송으로부터 으르렁거리거나 짹짹거림과 같은 다양한 동물 음성을 만드는 것까지 이르는 의도적인 음성 표현 등이다. 물리적인 징표는 떨림, 흐들림과 자동적으로 하타 요가 동작과 프라나야마스를 수행 등이다. 쿤달리니를 각성하는 이들 방법은 위험하지 않은가? 고피 크리시나의 책은 어떤가? 만약 심리적인 관점을 취하여 쿤달리니를 우리 무의식에 잠재되어 있는 힘으로 보면, 이 힘을 깨우치는 것은 보다 거대한 양의 무의식적인 재료를 우리의 의식으로 가져가려고 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환경에서조차도 이것은 불만족스러울 수도 있으며, 한 개인이 그의 무의식을 정상적인 환경 아래에 둔다면, 쿤달리니를 깨우치는 것은 개인을 정신 이상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 현상은 여러번 보고된 바 있다. 쿤달리니가 위험하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보다 빠른 길이 아닌가? 무엇보다 무수한 개인들을 빨리 깨달음으로 나가게 하는 것이라고 지구상에 알려진 기술은 없다. 왜냐하면 쿤달리니 요가는 강력한 깨달음의 힘으로 대단히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보다 빠르게"보이는 것이 자연적이지만 그러나 신참 쿤달리니 요가 수행자들이 수련하는 때에 많은 고통과 부정적인 현상들이 나타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쿤달리니 요가를 시작하고 있고, 강력한 입문 경험을 하고 있으며, 그러면 위협을 느끼게 된다. 이 입문 단계를 참고 통과한 많은 사람들은 그 에너지에 의해 제한되고, 에너지의 임시적이고 현상적인 응용에 집중한다. 쿤달리니 요가 교사들 사이에 특히 성적인 스캔들 들이 많이 있었다. 성적인 스캔들과 쿤달리니 요가 수련 사이에 관련이 있나? 영적이고 비 영적인 많은 경로의 스승들에 대한 스캔들이 있어왔으나, 이것은 쿤달리니 수련자들이 그들의 부담보다 더 많은 것을 가졌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공정할 것이다. 나의 쿤달리니가 깨어나면, 나는 나의 생존방식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는가? 당신의 과자를 받는 것도 어렵고 이를 먹는 것도 어렵다. 만약 쿤달리니를 삶을 변화시키고 풍요롭게 하기 위해 일깨운다면, 당신은 그 결과 생활 양식을 변화시킬 필요가 있다는 것을 기대하는 것에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 고전적인 문헌과 경험 양쪽의 추천은 잠과 단식이 심각한 불편함이 일어나는 것을 완화시키는 데 필요하다. 더욱이 성적인 활동과 물리적인 활동을 완화하지 않고 쿤달리니를 대단히 성공적으로 경험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생활의 이들 요소를 변화시킬 필요 정도는 개인의 본성에 달려 있다. 쿤달리니로부터 일어나는 진정한 정신적인 불균형이 희박함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쿤달리니 요가 수행자는 그가 특히 민감한 경우에는 잠과 침묵 그리고 단식을 할 필요가 있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