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우물과 호암산성(9.16) 날씨가 좋지 않을까 했는데 생각보다 날씨에 문제가 없었다. 그동안 살던 호암산을 가보기로 했다. 안양1번가에서 버스를 타고 금천구 시흥동 한양아파트 앞 시흥동 성당 골목길로 산으로 올라갔다. 예전에 수없이 많이 갔던 산이었는데 이번에 보니 그동안 눈에 띠지 않던 고마리가 널려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더니 아니까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시흥동 성당으로 해서 올라가는 길은 흙길이라서 아주 올라가기 좋다. 그런데도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거기 올라가면 땀이 흥건히 젖는다. 아마도 흙길이라서 올라가기는 편하지만 상당한 경사인 지도 모르겠다. 예전에는 한적한 길이었는데 IMF경제난 이후부터인가 등산하는 사람이 많아진 것같다. 이 길은 남녀 노소를 불문하고 많이 다니는 길이다. 여기서 올라 한우물을 거쳐 호압사로 내려가는 사람도 있고 아니면 되돌아서 올라왔던 길로 내려가기도 하며 불영암으로 해서 시흥동으로 내려가는 사람도 있다. 좀 멀리 등산하고 싶으면 찬우물로 해서 서울대로 내려가기도 하고 삼막사로 가면 길도 있으며 아주 멀리는 무너미재인가 거기로 내려가서 다시 연주암으로 올라가서 과천이나 봉천동, 남현동으로 내려갈 수도 있고 관양동으로 내려갈 수도 있다. 한우물 가는 길에는 호암산성 흔적이 있다. 이 곳은 신라시대부터 산성이 있던 곳이다. 통일신라시대때 당나라와 전쟁때 사용하던 요새라는 설이 있는데 남쪽으로는 많이 무너진 흔적이 있고 동쪽으로는 성벽이 많이 남아 있는데 초가을 이라서 그런 지 성벽이 예전처럼 잘 보이지는 않는 것이다. 조금 가다보면 헬기착륙장이 있고 거기서 더 북쪽으로 가면 제2 우물터가 있는데 아직 복원하지는 않았다. 제2우물터 동쪽에서 집을 지었던 흔적이 있으며 기와조각같은 것이 아직도 널부러져 있다. 제2우물터에서 가면서 왼쪽에 한우물이 있고 그 오른쪽에 석구상이 있다. 한우물은 한동안 물은 전부 빼버렸었는데 최근 비가 많이 와서 그런지 물이 조금 차오르고 있었다. 한우물 옆에는 불영암이 자리를 잡고 있는데 그동안 초라하던 절을 번듯하게 다시 지었고 단청도 새로 해서 아주 그럴듯하게 변모를 했다. 한우물 앞에는 시흥동 전체와 서울시내 상당부분을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를 작년인가 언제 만들어서 날씨가 좋은 날은 아주 멀리까지 처다볼 수 있다. 63빌딩도 보이고 멀리 인천 앞바다도 보인다. 불영암에서 시흥동으로 내려가는 길은 좀 가파른 계단이지만 시흥동 주민들이 많이 이용하는 등산로 이다. 바로 밑이 벽산아파트여서 아마도 그곳 주민들이 많이 이용하는 것같다. 불영암에서 바로 내려갈려는 지점에 일제의 만행의 현장이 있다. 아마도 관악산의 정기를 끊으려는 속셈같은데 쇠말뚝을 박은 것이 그대로 있다. 이거 누가 뽑아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은데 아직도 방치되어 있다. 예전에 진로에서 쇠말뚝 뽑기 캠페인을 해서 신고를 했는데 안 뽑아주는 것이다. 석구상은 경복궁의 해태와 바라보면서 관악산의 화기를 억누르기 위한 목적이라는데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실제적으로 찬우물 근처의 관악산에는 인공으로 만든 아주 작은 연못이 여러개 있다. 이것도 모두 관악산의 화기를 억누르기 위한 것일 것같다. 호압사로 해서 내려왔는데 어떤 사람이 앵무새 종류 2마리를 가지고 왔는데 사람을 잘 따르는데 한 마리에 약 2백만원이고 40년 수명이라고 하였다. 벽산아파트 옆에서 1번 마을 버스를 타고 시흥동으로 내려와서 집으로 돌아왔다. 아래 내용은 금천구청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한우물은 금천구 시흥동 산93-2 호암산 정상 (해발 315m)에 위치해 있다. 한우물은 천정, 용복 또는 용초로 불리워졌으며, 통일신라시대(6∼7세기경)축조되고 그후 조선시대에 서쪽으로 약간 이동하여 다시 축조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그 규모가 동서17.8m, 남북 13.6m, 깊이 2.5m였으며, 조선시대에 축조된 우물은 동서 22m, 남북 12m, 깊이 1.2m였다. 이 우물은 가뭄때에는 기우제를 지냈고 전시에는 군용으로 사용되었다.
임진왜란 때에는 우리나라 장군 선거이(宣居怡)가 진을 치고 행주산성의 권율장군과 함께 왜군과 대응해 전투를 하면서 이 우물을 군용수로 사용하였으며 「동국여지승람」에 「虎岩山 有固城 城內有一池 天早祈雨」라 기록하고 있어 가물 때에는 기우제를 지냈음을 알수 있다.
한편, 조선조 건국설화와 관련하여 방화용설도 있다. 그리고 「제2우물터」는 한우물에서 동남쪽으로 300m 떨어진 곳에 있으며 남북 18.5m, 동서 10m, 깊이 2m로 1990년 발굴결과 밝혀졌으나 아직 복원되지 못하고있다.
산 정상에 있으면서도 늘 물의 양이 변함없고, 항상 맑은 상태로 고여있어 신비로움을 더한다.
1990년 3월∼5월에 실시한 한우물 및 주변 산성지에 대한 학술발굴 조사시 한우물과 제2우물지에서 12개 기종의 1,313개체의 토기자료가 출토되었는데, 이는 통일신라시대 유적으로 안압지(경주소재) 다음으로 많은 양이며, 그 시기를 8세기 중엽으로 볼 수 있는 잉벌내(仍伐內)라는 명문이 새겨진 청동숟가락 등이 함께 출토되어 한성유역 뿐 아니라 경주지방의 토기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시기와 규모를 달리하는 3기 이상의 건물이 겹쳐져 있는 건물터가 확인되었고 이곳에서도 6,556개체분의 기와류가 출토되었는데, 주로 사용문양은 선조문(線條文), 어골문(漁骨文), 격자문(格子文) 등이며, 여기에서도 잉대내(仍大內)라 새겨진 기와가 출토되어 이 건물터 역시 그 시기를 8세기 중엽에 세워진 것으로 볼 수 있어 평와류(平瓦 類)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산성터의 평면형태는 북동-남서 방향으로 길쭉한 마름모꼴인데 표고 325m 능선을 따라 축조한 전형적인 퇴뫼식 산성이며, 자연지형을 잘 이용하여 축성한 것으로 성벽의 총 길이는 1,250m 가량된다. 산성은 오랜 기간 동안 방치되어 있던 관계로 지금은 약 300m 가량의 석성만이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남아있을 뿐이다. 호암산성의 축성 목적과 시기를 알려주는 직접적인 문헌자료는 없지만 산성발굴 조사과정에서 출토된 유물, 유적과 산성이 위치한 입지조건, 지형을 근거로 하여 관련문헌 자료와 비교한 결과 축성시기는 통일신라시대 문무왕 12년경으로 신라가 나당전쟁시 한강을 넘어 수원으로 넘어가는 육로와 남양만으로 침입하는 해로를 효과적으로 방어, 공격하기 위하여 세워진 요새로 추정하고 있다.
한우물 동북방 50m지점에 동물석상 1구가 있는데, 이것을 일반인에게는 조선왕조의 도읍설화와 관련된 해태상으로 알려져 있다. 즉, 경복궁의 해태와 마주보게 하여 관악산의 화기를 누름으로써 서울 장안의 화재를 막기위해 세운 해태상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석상의 형상이 해태로 보기 보다는 개의 형상에 가깝고, 경기읍지(1956년) 등 기록에 의하면 석구상으로 보는 것이 옳을 듯 싶다. 형상의 크기는 길이 1.7m, 폭 0.9m, 높이 1.0m 가량으로 석상기법이 세밀하며 사실적이어서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부각되어 있고 발과 꼬리부분 또한 사실적으로 잘 묘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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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금수강산 원문보기 글쓴이: 청초호
첫댓글 잘보고 가니더
한번쯤 가 볼만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