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월의 봄비는 속절없이 내린다. 천지사방에는 꽃이 피는 소리가 들리건만 당신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나의 동서는 몇 달 전 감기 증세가 보여 병원을 찾았는데 간암 말기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은 동서는 그 날 저녁 밤새 울었단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탓으로 유달리 삶의 대한 애착이 강했고 돈의 노예가 되어 살았던 사람이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며 기쁨이 변하면 슬픔이 된다. 포항의 야산엔 홍조 빛을 띤 진달래 꽃잎이 한들거리며 어느 한적한 마을을 강타하고 있었다. 들녘엔 매화꽃이 하얀 물결을 이루어 계곡마다 굽이치며 올라가고 있다. 뒤뜰엔 왕과 왕비의 산책길을 만들어 주는 듯한 목련이 눈이 부시도록 우아하다. 흙마당엔 골을 타서 파종을 준비하고 있다. 희망과 절망이 교차하는 어느 농촌마을에 40대 초반의 여인이 암 말기의 시한부 삶을 선고 받고 요양하고 있는 모습이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하다. 그래, 영화였으면 얼마나 성행을 할지 더 관심사가 되지 않았을까?
삶의 애착이 유달리 강했던 나의 동서는 이젠 깡마른 모습으로 얼굴엔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동서의 모습을 보니 동정보다 먼저 무서움이 내 몸을 휘감고 지나갔다. 이젠 더 이상 이땅의 사람이 아닌 것 같아 섬뜩하기까지 하다. 사람이 죽으려고 하면 정을 뗀다는 말이 언뜻 스친다. 간암 말기환자에게 더 이상 손을 쓸 수도 없다는 병원의 판정을 받고 기적을 기다리며 요양을 하고 있다. 마지막 방법으로 한의학에 기대를 걸면서 치료하고 있는 중이다. 폐교된 초등학교를 한의원으로 개원해서 환자를 치료하고 있는 포항의 어느 마을의 오후는 고요와 적막이 녹아내려 고요한 봄바다가 펼쳐지고 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니 온 산천은 생명의 숨 쉬는 소리가 소음으로 들리건만 한 생명은 이젠 점점 꺼져간다. 며느리 간호를 하고 계시는 칠순이 넘으신 시어머니는 그동안 쌓였던 원한들을 말끔히 씻어 내어 달라고 우리들에게 당부하신다. 짧은 43년을 살면서 아니 결혼생활 19년 정도를 하면서 주위사람들에게 원망을 많이 싸기도 했었다. 나의 동서는 보통 여자와 달랐다. 샘 질투가 유달리 많았던 그리 흔하지 않은 여자인 것 같다. 동서는 내가 결혼을 하고 난 뒤 나에게 심한 질투를 했다. 나는 동서에게 모함을 받은 적도 있다. 나를 시댁식구들 사이에 한쪽 코너로 몰아넣고 그녀는 희열을 느끼지 않았을까? 시간이 지나고 나니 동서의 모함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동서는 삼 개월 정도 요양을 하다 2002년 4월 4일날 시어머님의 가슴에 힘없이 쓰러졌다. 유언 한마디 하지 않고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동서의 사망소식을 들었지만 왠지 모르게 자꾸만 무서움이 엄습해 왔다. 남편을 먼저 영안실로 보내고 나는 하루 늦게 갔다. 부산 침례병원의 영안실을 찾아서 들어서니 죽은 자들이 살아생전의 맺어 놓았던 사람들이 마지막 인사를 하느라 북적되고 있었다. 동서의 영정사진이 내 눈앞에 들어왔을 땐 난 오열하고 있었고, 내 감정은 도저히 조절이 되지 않아 하염없이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대학에 입학한 딸과 고등학교에 입학한 아들은 상복을 입고 지팡이를 짚고 마침 문상 온 외삼촌과 이모에 휩싸여 함께 울고 있었다.
고인의 두 아이들은 문상객들과 맞절을 얼마나 많이 했던지 무릎에 피멍이 들어 있었다. 손님이 뜸할 때 아이 두 명은 그 자리에서 쓰러져서 잠깐씩 눈을 부친다. 죽마고우들과 이웃들이 찾아와 눈물바다로 만들었지만 나의 동서는 대답이 없었다. 동서는 영정사진으로 친구들에게 표정 없는 멍한 모습으로 바라보는 것 같았다. 젊디젊은 나이로 떠난 나의 동서 영정사진과 함께 하룻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아침 6시에 우린 장지인 시댁의 선산을 향했다. 영구차는 형님이 살던 양산의 아파트에 마지막으로 잠시 들렀다가 밀양으로 향했다.
창밖엔 가느린 빗줄기가 형님의 마지막 가는 길을 깨끗하게 씻어주고 있다. 분홍색 복숭아꽃들은 군데군데 쟁반처럼 피어 앉아 소담스러운 눈빛으로 우릴 지켜본다. 저 아름다운 산천의 모습을 구경하는 것도 형님에겐 마지막이리다. 난 그저 덧없는 인생에 홀린 기분으로 스치는 풍경만 바라볼 뿐 생각이 멈추어 버렸다. 차가 시댁 마을에 도착하니 꽃상여가 형님을 태워가기 위해서 덩그러니 기다린다. 동네 분들은 어느 집 둘째 며느리를 메고 가기위해 비를 맞고 분주하게 움직인다. 시댁 마을에서 노제를 지낸 상여는 뒷산으로 올라갔다. 상주들이 비둘기색 비옷을 입고 상여 뒤를 따라 올라가는 모습이 마치 갓 부화한 제비 새끼 같다. 엄마의 품을 찾아서 눈을 비비는 모습 같기도 하다. 내리는 빗물과 멈추지 않는 나의 눈물이 합쳐지면 작은 시냇물을 만들 것도 같다.
어느 듯 상여는 포크레인으로 파놓은 무덤에 도착했고 아이들은 엄마에게 마지막 절을 하고 엄마의 육신을 차가운 땅속에 묻었다. 2시간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나니 봉긋한 무덤이 하나 생겼다. 무덤이 참 예쁘게 만들어졌다. 앞이 시원하게 탁 트인 산 위, 그 옆에는 감나무와 매실나무 뒤엔 자두나무와 솔나무들이 든든하게 지키고 있어 사후의 파수꾼이 될 듯하다. 이젠 나의 형님은 고통과 근심과 걱정으로 얼룩진 이 땅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안식을 누리리라. 시어른들과 형제보다 먼저 떠나 좋은 명당자리에 누워서 오늘 첫 날 밤을 맞이할 것이다. 형님과 아주버님의 잦은 부부싸움도 이제는 끝이 난 것 같다.
그 길은 언젠가 나도 가야하는 길이고 누구도 피해갈수 없는 길이다. 다만 형님은 조금 더 빨리 갔다는 것이다. 인생은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란 말이 뇌리를 스친다. 앞으로 20년 후에 두 아이들이 오늘의 아픔으로 인해 인생의 훈련이 좀 혹독했지만 그로 인해 자신의 속사람은 더 단단해져 감사하다는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남편과 인연의 끈으로 16여년을 시댁에서 부딪히면서 때론 시기 질투와 미움으로 사이가 원만하지 못했지만 이젠 훌훌 털고 당신을 편안히 보내주고 싶다. 당신의 성격이 보통 사람들 보다 강했기에 남편과도 그렇게 싸움을 하며 결혼생활을 얼룩지게 만들었는 것 같기도 하다. 이제, 이제는 이 땅의 집착 모두 내려놓고 이제는 편안히 그리고 영원히 쉬오소서......
첫댓글 그 이후의 삶은.....
시아주버님은 아내가 죽고 나서 어린아이처럼 울고 불고 했었지요.
한데, 49제를 지내고 일 주일 후에 결혼 상담소를 찾아 아내감을 찾았는데....
근데 바로 함께 살았다고 하니... 그 주인공은 상식이 없는 사람도 아닌
교사 출신에 시인이지요. 서로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근데 부부사이는 좋은데 아이들과 관계가 좋지 않아서....
무엇보다 딸이 제동을 걸어서 조금 힘든 상태이지만....
부부 사이에는 문제가 없이 잘 살고 있지요.
동서가 죽고 바로 쓴 글인데 퇴고를 조금 해서 올렸습니다.
그린 교수님, 가슴으로 읽었습니다.
산다는 것의 깊고 깊은 의미가 절절하게 느껴지는 동서분의 죽음...
그렇게 어린애처럼 우시다 언제 그랬냐는듯 새로은 짝을 만나 살고 계신다는 시아주버님도 다 어쩔 수 없는, 나약한 인간이시기에...
정말 삶이란 무엇인가요?
예, 허향 님? 글 올리고 돌아 서니...^^
근데 주위 사람들을 울 아주버님을 욕하고 난리가 났었지요.
옛날부터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니냐고 하면서.....
아내가 죽고 그토록 울고 불고 하든 사람이
그렇게 변한다고 말이죠.
하지만 울 신랑은 욕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구요.
왜냐면 남의 이목이 뭐 그렇게 중요하냐고 하데요.
저도 시아주버님을 이해할 수 없어 했지만
나약한 인간이라 그럴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근데 재혼한 부부는 싸움을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부부금실이 그렇게 좋데요.
그것을 제3자가 평가를 하기는 좀 그런 것 같았기도 하고 그래요.
한데 분명한 것은 인생에는 정답이 없는 것 같습니다.
^^
그린님의 글을 읽고 잔잔하게 밀려드는 어떤 애뜻함이 밀려오는 순간, 깼다는...
두 분의 댓글을 보고
게다가 말없는 김선생님의 웃음은 저를 더욱더 웃음 짓게 했다는 거 아세용
근데 울 신랑은 자신의 형 편을 강력하게 들더라구요.
정말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생각을 했지요.
울 신랑은 매우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사람이거든요.
남들이 욕을 하든 뭐라고 하든 그게 뭐가 중요하냐는 것이지요.
자신의 인생은 자신의 것인데 자신이 행복하면 된다는 논리더라구요.
이웃에서 흉을 한다고 해도 그들이 밥을 먹여 주는 것이 아니지 않으냐고....
한데 저는 시아아주버님이 좀 심했다는 생각을 합니다.
죽은 자에 대한 예의가 최소한 일 년은 지나야 하지 않을까요?
그토록 울고 불고 해 놓고 그렇게 마음이 변하냐고.....
근데 대부분 금실이 좋은 부부들이 아내가 죽고 나면
빨리 새장가를 간다고....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배우자가 죽으면 최소한 일 년 정도는
예의상 고인을 그리는 시간을 가지다가
그 이후에는 재혼을 해도 무방하다고 봅니다.
죽은 사람을 생각하면서 한평생 혼자서 살 수는 없지 않습니까?
먼저 생활여건상 주거 문제라든가 여러모로 불편을 겪게 되겠지요.
또한 대화를 할 수 있는 동반자도 필요할 것 같구요.
자식으로 부터의 받은 소외감을 혼자서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역시 부모님에게 그렇게 못하고 있으니요.
자식이 있다고 해도 결코 부부만 하겠습니까?
포청천님.
예리하십니다.^^
그린님의 원글을 읽고 비감한 마음이 드는데..아래 덧글을 읽고....
사람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남자들은 아내가 죽으면 화장실에가서 웃는다는 말도 있잖아요.
울 교수님이 하는 말이 생각이 납니다. 교수님의 아내가 평소에
늘 이렇게 묻는데요. 자신이 죽고 나면 재혼을 할 것이냐고??
근데 교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인 즉,
내 복에 그럴일이 있겠냐고? ^^ 하셨데요.^^
정말 그렇게 묻는 여자도 멍청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는 절대 그런 것 묻지 않지요.
내 죽으면 다른 여자와 살 수도 있고 안 살 수도 있고
그것은 온전히 본인의 선택의 몫 아닐까 싶어요.
내가 죽고 난 후에 다른 여자와 살든 안 살든 그게
무슨 상관이 있겠냐는 논리지요. 저의 논리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