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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男子!欲學木輪相者,先當刻木如小指許,使長短減於一寸,正中令其四面方平,
自餘向兩頭斜漸去之。仰手傍擲,令使易轉,因是義故,說名為輪。
又依此相,能破壞眾生邪見疑網,轉向正道,到安隱處,是故名輪。
「小指許」,「許」는 바로 한 부분을 가르키는데, 작은 손가락 한 마디 만하게 만들라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는 사람의 몸이 현재 사람들의 몸의 크기와 다릅니다. 목륜상의 크기는 현대인들의 몸의 크기에 의거하여 길이를 1寸정도로 줄여야 합니다. 정 중앙에 네 면을 조각도로 평평하게 판다. 목륜의 양 끝부분은 사선으로 깍아서 뾰족하게 한다. 손으로 들고 옆으로 던질 때에 쉽게 굴러가게 한다. 「輪」이라고 한 까닭은 여러분도 잘아는 法輪常轉과 같이「輪」은 돌려서 소멸시킨다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의심과 업장을 소멸시킬 수 있습니다. 이러한 뜻을 가지고 있음으로 점찰윤상을 써서 우리의 의심과 삿된 지견을 없애고 정도를 향해가서 편안한 곳에 도달하며 근심이 없도록 해줌으로 「輪」이라고 이름합니다.
其輪相者,有三種差別。何等為三?
一者,輪相能示宿世所作善惡業種差別,其輪有十。
二者,輪相能示宿世集業久近,所作強弱、大小差別,其輪有三。
三者,輪相能示三世中受報差別,其輪有六。
첫 번째 윤상은 10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열 가지 업業입니다. 과거에 지은 선악의 업의 종자와 현재 행하고 있는 업의 종자를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 윤상은 신구의身口意 세 개가 입니다. 과거의 인과 현재 받는 과와 현재에 짓는 인, 미래에 불러올 과인 것입니다. 윤상을 통해서 다생겁동안 지은 업의 강약과 많고 적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세 번째 윤상은 6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숫자입니다. 우리가 삼세가운데 받게 되는 업보의 차별을 보여줍니다. 어느 세계에서 왔는지? 인간세계에서 왔는지? 아귀세계에서 왔는지? 아니면 축생계에서 왔는지? 혹은 보살도에서 왔는지? 이승도二乘道에서 왔는지? 대승도大乘道에서 왔는지? 우리 자신은 분명히 알 수가 없지만 지장보살께서 숙세의 선근이 깊은지 낮은 지를 알려주십니다. 자신이 전생에 어느 곳에서 온 지를 알면 수행을 할 마음이 일어나도록 도와줍니다.
若欲觀宿世所作善惡業差別者,當刻木為十輪。依此十輪,書記十善之名。
一善主在一輪,於一面記。次以十惡書對十善,令使相當,亦各記在一面。
言十善者,則為一切眾善根本,能攝一切諸餘善法。
과거 숙세에 지은 선업과 악업이 얼마나 중한지를 알려고 하면 첫 번째 10개의 윤상으로 살펴봅니다. 첫 번째 윤상에 十惡과 十善을 빨간 색과 검은 색으로 구분합니다. 빨간 색은 善인데 증장된다는 뜻을 표시하고 검은 색은 惡인데 손해되고 줄어든다는 의미를 표시합니다. 善과 惡을 각각 한 면에 기입하고 十善과 十惡을 대칭해서 양쪽 면에 두고 두 면은 공백으로 두는데 공백은 곧 無記인데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님을 표시합니다. 왜 十善業과 十惡業을 첫 번째에 두는가하면 十善業은 일체 모든 선의 근본이 되어 모든 선법을 다 섭수하기 때문입니다. 十惡은 바로 모든 업의 근본으로 일체 악한 법을 섭수하기 때문입니다.
三業은 두 번째 윤상입니다. 네 면에 모두 小善、小惡、大善、大惡을 표시한 것있니다.
세 번째 윤상은 세 면에 숫자가 있습니다. 한 면에는 숫자가 없습니다. 1부터 18까지입니다. 왜 18까지의 숫자를 썼는가 하면 18은 18界를 표하고 육근六根인 안이비설신의를 가르키며 육진六塵경계인 색성향미촉법을 六根이 六塵을 대해서 생기는 六識, 즉 眼識、耳識、鼻識、舌識 身識、意識입니다. 識이 없으면 根이 塵에 대해서 작용을 일으킬 수 없습니다. 根을 잃어버리고 識만 있으면 色을 대할 때에 識 또한 식별해내지 못합니다. 根、塵、識 이 세 가지가 함께 모이면 과거 현재 미래 삼세에 받는 과보의 차별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십팔계十八界는 모두 의식의 경계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집착을 한다면 윤상을 쓴다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고 부처님께서 눈앞에 나타나신다해도 여러분을 가르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부처님 당시에 한 비구스님이 자다가 일어나서 동아줄을 밟았습니다. 부드러운 감촉을 느끼고 뱀을 밟아서 죽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집착하여 내려놓치 못하고 반드시 과보를 받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부처님께서 “그것은 동아줄이지 뱀이 아니라네.”라고 말씀해주셨습니다.그러나 그 스님은 믿지 않았습니다. 계속 뱀이라고 집착을 하여 목숨값을 갚아야 한다고 근심하다가 죽었습니다. 집착을 할 때에는 그런 업이 아닐 경우가 많습니다. 집착하는 그런 업이 아닙니다. 마음이 일어나면 여러 가지 법이 일어나니 공성을 관해야 합니다. 만법은 마음으로부터 생김으로 만법은 마음으로부터 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집착을 없애야 합니다. 일체 법은 양면성이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일심으로 지장보살을 관한다면 관상을 할 때 자신이 지장보살이라고 집착한다면 이러한 집착은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은 곧 지장보살이 될 것입니다.
言十惡者,亦為一切眾惡根本,能攝一切諸餘惡法。
若欲占此輪相者,先當學至心總禮十方一切諸佛。
因即立願:『願令十方一切眾生,速疾皆得親近供養,諮受正法。』
次應學至心敬禮十方一切法藏。
因即立願:『願[*]令十方一切眾生,速疾皆得受持讀誦,如法修行,及為他說。』
次當學至心敬禮十方一切賢聖。
因即立願:『願令十方一切眾生,速疾皆得親近供養,發菩提心,志不退轉。』
점찰윤상을 쓰려면 마땅히 먼저 의궤를 배워야 합니다. 시방에 일체제불과 법장, 현성승께 지극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예배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삼보님께 예배를 할 때에 시방에 일체중생에게 회향하고, 일체제불께 함께 예배하고, 청정하게 공양하며, 일체 법장을 독송하며, 여법하게 수행하고, 법을 연설하며, 중생을 이익케하여 성불하기를 발원하는 보리심에서 영원히 물러나지 않기를 발원해야 합니다.
용맹심을 발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기는 어렵습니다.
대보살이 중생을 이익케하는 가운데에 또한 퇴굴심을 낼 때도 있습니다. 《대비다라니경大悲陀羅尼經》에서 관세음보살께서 중생들을 이렇게 많이 생각하여 그렇게 오랜 세월을 제도하였지만 아직도 다 제도하지 못했습니다. 일찍이 만약 내가 한 생각이라도 퇴굴심을 내면 내 머리가 부서지고 몸이 천갈래 만갈래로 찢기리라고 일찍이 발원을 하였기 때문에 한 생각 일으키자 바로 머리가 갈라져버리고 몸이 찢어져 버렸습니다. 이 때에도 정신은 또렷하여 이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알아차리고 곧 시방에 계신 모든 부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제가 중생을 제도하겠다는 마음에 퇴굴심을 일으킨 것을 마음모아 참회하옵나니 부디 저를 가호하소서!”
지성으로 후회하고 참회를 하였기 때문에 시방에 무량제불께서 진짜 천수천안을 주셨습니다. 천수천안 관세음보살은 이와 같은 유래로 오신 것입니다. 또 사리볼존자가 보리심을 내어서 일체중생을 제도하고자 하였습니다. 제석천이 그가 보리심을 발한 것이 견고한지 아닌지를 시험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래서 여자아이로 변신을 해서 길에서 울고 있었습니다. 사리불이 길을 가다가 보고는 왜 울고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그녀가 대답하기를 어머니가 병이 나서 의사에게 보였는데 약을 찾을 수가 없어서 어머니를 구할 수가 없어서 너무 괴롭다고 하였습니다. 사리불이 무슨 약인데 그러냐고 물으니 사람의 눈이 필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사리불이 생각하기를 내가 방금 보리심을 발했는데 인연이 왔나보다하고 스스로 칼로 눈 한쪽을 빼서 그녀에게 주었습니다. 여자아이가 눈을 받아들고는 말하기를..
“아차...제가 말을 잘못했습니다. 제가 필요한 것은 오른 쪽 눈인데
당신은 왼쪽 눈을 파주어서 쓸 수가 없네요.”
사리불이 말했습니다.
“왜 진즉에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녀가 말했습니다.
“제가 잊어버렸네요.”
사리불이 다시 생각했습니다..“됐다. 어쨌든 이미 주어버렸으니 오른쪽 눈도 파주자.”
그녀는 오른쪽 눈을 받아들더니 냄새를 맡아보고 말했습니다.
“아유 비린내아!”하더니 땅 바닥에 버리고는 발로 뭉개버렸습니다.
사리불이 말했습니다.
“아니 약으로 쓴다고 안했습니까?”
그녀가 말했습니다.
“이렇게 비린내가 나는데 어떻게 약으로 쓴단 말이예요!”
사리불은 고개를 저으면서 한숨을 내쉬고 말했습니다.
“보살도를 실천하는 것이 정말 어렵구나!”
이 때에 제석천이 몸을 나타내며 말했습니다.
“다시 당신이 하던대로 소승의 도나 닦으시지요!”
이 이야기에서 우리 범부의 마음이 어떤 때는 앞으로 나아갔다가 어떤 때는 물러났다가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비록 보리심을 발하겠다고 말하다가도 경계를 만나면 곧 퇴굴해 버립니다. 그래서 보리도가 행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맹심은 발하기 쉽지만 그 마음을 오래도록 지키기는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오래 지키고 물러나지 않을 수 있를까요? 항상 이와 같이 생각하십시오.
“설사 뜨거운 쇠구슬이 내 정수리 위에서 돌더라도 끝내 고통으로 인해서 보리심에서 물러나지 않으리라.”
하면서 자신을 독려하고 아울러 지심으로 삼보에 귀의하여 불보살께 불퇴전의 마음을 갖도록
가호하시기를 구하십시오.
後應學至心禮我地藏菩薩摩訶薩。
因即立願:『願令十方一切眾生,速得除滅惡業重罪,離諸障礙。資生眾具,悉皆充足。』
如是禮已,隨所有香華等,當修供養。修供養者,仰念一切佛法僧寶,體常遍滿,無所不在。
삼보님께 예경한 후에 다시 또 지장보살마하살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예배하고 그 명호를 칭명합니다. 그리고 다시 절하면서 지장보살님의 가피력으로 일체중생이 속히 모든 악업중죄를 소멸하도록 발원합니다. 그리고 수행하며 보리도를 행하는 길에서 아무런 장애없이 수행하는 동안에 모든 자량이 충족해지기를 기원합니다. 향과 꽃등으로 공양을 올리고 시방삼세의 모든불보살님들이 다 앞에 계시면서 내가 지성으로 공경히 올린 공양을 받는다고 관상합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공양을 올리면 불보살님도 정말로 우리가 올린 공양을 받습니다. 우리는 보현보살의 세 번째 대원大願인 “廣修供養”을 배워야 합니다. 생각으로 슈퍼마켓이나 과일가게 꽃시장에 있는 모든 좋은 공양물들을 다 부처님 앞으로 옮겨오고 시방에 모든 허공계에 모든 법계에 남섬부주, 사대부주 내지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공양물을, 모든 진주,마노등 칠보를 다 캐내어 시방제불에게 공양을 올리면 이 공양은 정말로 큰 공양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제게 물었습니다.
“이것이 정말로 그렇습니까?”
“그것은 사실입니다. 여러분이 공양한 유형의 물건들은 멸칠 지나면 곧 썩어버리지만 이러한 공양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한번 생각만 지으면 곧 옵니다. 이것을 보현의 공양이라 합니다.”라고 제가 말했습니다. 그것은 우리 사람과 같습니다. 사진은 거짓인 것이지만 여러분이 죽어도 사진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여러분 항상 이렇게 관상하십시오. 진실이라고 생각하면 이것이 바로 공양입니다. 공양을 올릴 때에 일체의 불법승 삼보님과 지장보살님 모두의 체體가
일체처에 통하며 없는 곳이 없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디에서 공양해도 다 됩니다. 이와 같이 관상하여 공양한 공덕은 실로 불가사의 합니다.
願令此香華,等同法性,普熏一切諸佛剎土,施作佛事。
이러한 향과 꽃등의 공양불로써 극락세계 아미타불,부동세계 아촉불, 약사유리광여래세계 내지는 모든 세계에 두루 편만하신 일체제불게 공양을 올린다고 관상합니다. 무량한 부처님 국토에 여러분이 올린 공양이 다 있습니다. 《彌陀經》에서 말씀하시기를..아침공양을 하기 전에 바로 십만 제불국토에 가서 모든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공양을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아침을 먹는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관상으로 공양하는 이러한 경계가 바로 《彌陀經》에서 말씀하신 경계와 같습니다. 「법성法性」은 일체처에 두루 합니다. 법에 있으면「법성法性」이고 일체중생에게 있는 것은 「불성佛性」입니다. 공양이 일체제불의 모든 국토에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일체제불은 여러분의 공양을 가지고 크게 불사를 짓습니다.
많은 염불행자들이 제게 묻습니다.
“제가 정말로 극락세계에 날 수 있을까요?”
“날 수 있습니다. 금생에 못나면 내생에, 내생에 태어나지 못하면 그 다음 생에 날 것입니다.”
라고 제가 말했습니다.
“다시 온다는 보증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시방에 부처님께서 호념하시어 만약 이미 났거나 지금 나거나 미래에 나거나 결정코 날 것입니다. 염불하여 극락세계에 왕생하기를 구하는 사람은 마땅히 이러한 신심이 있어야 합니다.
又念十方一切供具,無時不有。我今當以十方所有一切種種香華、瓔珞、幢幡、寶蓋、諸珍妙飾、種種音樂、燈明、燭火、飲食、衣服、臥具、湯藥,乃至十方所有一切種種莊嚴供養之具,憶想遙擬,普共眾生奉獻供養。當念一切世界中有修供養者,我今隨喜。
若未修供養者,願得開導,令修供養。
언제든지 시방국토에 있는 모든 공양물을 마음으로 옮겨올 수 있습니다. 물질은 거기에서 움직이지 않았고 우리도 가지 않았지만 생각만 한번 움직이면 모두 공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불가사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지금 십대원왕을 관상한다면 곧 보현행을 하는 것이고 이 사바세계가 곧 화장세계華藏世界입니다. 극락세계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제불국토가 모두 화장세계입니다. 이것을 여러 가지 광명의 예향당蕊香幢이라고 부릅니다. 하나의 세계에 무량무변한 세계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화장세계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시방세계에 여러 가지 향과 꽃、 영락、 당과 번、보개、모든 진귀한 장엄구와 음악、등불、 촛불、음식、의복、침구、탕약등 모든 공양할 수 있는 것들을 관상을 해서 옮겨와서 일체중생과 함께 공양을 올립니다. 동시에 시방세계에 모든 공양을 올리는 사람들을 수희찬탄합니다. 언제 공양을 올리는 가하면 시방세계는 모두 광명입니다. 어둠도 없고 낮도 없습니다. 단지 우리의 마음으로 생각이 미치면 바로 그때입니다. 생각을 크게 할수록 원만하게 할수록 좋습니다. 우리 마음이 커야합니다. 텅비어야 합니다. 대방광불화엄경처럼 커서 모든 것들을 포함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공空이란 반야의 진공을 말합니다. 대大는 진제眞諦인데 空은 진제와 속제를 포함하고 일체법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와같이 원융하게 관상해야 합니다. 아까울 게 무엇입니까? 아직도 집착하는게 있습니까? 만약 공양을 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다른 이가 이와 같이 공양하는 것을 가르칠 수 있도록 발원해야 합니다.
又願我身,速能遍至一切剎土,於一切佛法僧所,各以一切種莊嚴供養之具,
共一切眾生等持奉獻。供養一切諸佛法身、色身、舍利、形像、浮圖、廟塔一切佛事。
원컨대 내 몸이 시방에 일체국토에 두루해져서 일체 삼보님이 계신 곳에 여러 가지 광명의 공양구를 써서 일체중생과 함께 평등하게 수지하고 봉헌하여 일체제불의 법신에 공양하여지이다.
일체중생은 모두 제불의 법신입니다. 법신은 일체처에 두루합니다. 색신은 다릅니다. 모든 부처님의 색신은 공덕의 몸입니다. 그것은 법신에 응하여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색신은 업보의 몸입니다. 사리는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후에 남기신 영골입니다. 불상은 흙으로 빚은 것도 있고 나무로 깎아 조성한 것도 있습니다. 천에다 그린 탱화등 부처님 상은 후대의 사람들이 공양하여 예경하도록 모신 것입니다. 부도浮圖는 탑입니다. 또한 사원이라고도 하며 정사精舍라고도 하는데 모두 부도라고 부릅니다. 곧 부처님께 공양하는 탑입니다.
供養一切所有法藏及說法處,供養一切賢聖僧眾,願共一切眾生,修行如是供養已,
漸得成就六波羅蜜、四無量心。
深知一切法本來寂靜,無生無滅,一味平等,離念清淨,畢竟圓滿。
사무량심四無量心은 바로 자비희사의 네 가지 무량한 마음입니다. 육바라밀六波羅蜜은 곧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입니다. 이 육바라밀을 닦아서 생사고해로부터 열반의 언덕에 이를 수 있습니다.
又應別復係心供養我地藏菩薩摩訶薩。
「次當稱名,若默誦念。一心告言:『南無地藏菩薩摩訶薩。』如是稱名,滿足至千。
經千念已,而作是言:
『地藏菩薩摩訶薩!大慈大悲!唯願護念我及一切眾生,速除諸障,增長淨信,令今所觀稱實相應。』作此語已,然後手執木輪,於淨物上而傍擲之。如是欲自觀法,若欲觀他,皆亦如是。
삼보님께 공양하고나서 지장보살님께도 공양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무지장보살마하살을 칭명합니다. 왜냐하면 지장보살이 법주이기 때문입니다. 지극한 마음으로 천번을 지장보살 염불을 해서 감응을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불법승 삼보와 지장보살을 관상하고 원만하게 관상으로 공양하고 염불했는데 점찰윤상을 던져서 뭘하겠습니까? 왜냐하면 우리가 말하는 것은 理이지 事가 아닙니다. 말은 말일 뿐이고 일은 또 다릅니다. 우리는 현실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지장보살께서는 우리가 할 수도 없고 생각대로 안되는 일들이 있고 생각할 수 있는 것도 한계가 있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점찰윤상 쓰는 법을 가르쳐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장보살님께서 우리를 섭수하시기 위한 가장 수승한 선교방편법입니다. 현실생활에서 理로서 事를 성취하고 事가 理에 계합하여 理事에 걸림없는 사사무애事事無碍의 일실경계에 도달하게 합니다. 이것이 바로 화엄경에 함축되어 있는 이치입니다. 점찰윤상은 우리가 일실경계를 증득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선교방법을 쓰는 것은 우리가 수행하는데에 절대로 이익이 됩니다.
천 번을 염하고 나서 이와 같이 기원합니다...“대자대비하신 지장보살이시어! 오직 원컨대 저와 일체중생을 호념하소서. 속히 모든 업장을 없애어 청정한 신심을 증장케 하소서. 제가 이제 관하는 모든 일이 여실하게 상응하게 하소서.” 이와 같이 말하고 나서 목륜상을 손에 들고 깨끗한 천위에 옆으로 던집니다. 이와 같이 스스로의 일을 관하고자 하거나 만약 타인의 일을 관하고자하면 다 또한 이와 같이 마땅히 알지니라.” 점찰윤상을 사용할 때에 절하고 염송하는 외에도 “오직 원컨대 나와 일체중생을 호념하사 모든 장애가 속히 소멸되게 하시고 장애가 사라져서 청정한 신심이 증장되게 하소서.” 라고 기도를 해야 합니다. 신심을 닦아서 견고한 마음을 갖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생각을 안주하는 것이 定이고 법답고 율답게 행을 하는 것이 바로 慧입니다. 그러므로 일체처에서 정과 혜를 표현해서 念住에 도달하려면 반드시 신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청정한 신심을 증장할 수 있습니다. 염불은 바로 다른 것을 생각하지 않고 염불만 하는 것입니다. 念住에 도달하면 바로 청정한 신심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점찰윤상을 사용할 때에는 반드시 마음속에 생각한 것과 요구하는 것, 질문한 내용과 진실하게 상응해야 합니다. 예를 들면 병이 나서 낫지를 않으면 지장보살님께 병이 나을 수 있는지 없는지를 지시해 달라고 한다고 하면 점찰참법 기도를 하고 나서 손에 들고 윤상을 던지며 바로 이 일을 전적으로 묻습니다. 그러면 지장보살께서 병이 나을 수 있는지 혹은 나을 수 없는지 알려줄 것입니다. 혹은 이 의사가 병을 치료할 수 없으니 다른 의사로 바꾸어야 한다고 말해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약을 잘못 복용하였다고 말해줄 것입니다. 일백팔십구 종류의 내용을 모두 잘 기억해 두십시오. 그 안에 다 설해져 있습니다. 「誠實相應」이란 곧 마음속에 생각한 것과 질문한 내용과 지장보살님의 대답이 서로 맞아야 합니다. 「相應」이란 인도말로는 바로 요가입니다. 요가는 곧 상응입니다. 일체 법성과 상응하는 것입니다. 일체 사물과 상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를 해서 마치고 나서 목륜을 손으로 잡습니다. 손을 올려 깨끗한 천위에 옆으로 던집니다. 깨끗한 천이란 깨끗한 수건이나 손수건을 말합니다. 가장 좋은 것은 한 조각의 비단 천입니다. 왜냐하면 목륜을 던졌을 때 굴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손을 올릴 때는 손바닥이 위로 향하게 합니다. 목륜을 던질 때는 바로 수행할 때 쓰는 그런 목륜을 말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목륜은 탐진치, 신구의 삼업을 가르킵니다. 첫 번째 목륜은 십업이고 이것은 참회할 때 쓰는 것입니다. 처음으로 참회실에 들어가서 참법기도를 할 때에 첫 번째 목륜을 던집니다. 던지고 나서 그 내용을 기록해 둡니다. 「自觀法」은 바로 자신이 구한 일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觀他」는 바로 타인이 목륜을 쓸 줄 몰라서 여법하게 그 사람을 대신해서 도와주기 위하여 목륜으로 관찰해 주는 데 그 사람도 따라서 절하게 해야 합니다. 점찰윤상을 사용하는 사람은 윤상을 쓸 때에 어떻게 하고 어떻게 점찰을 하는 지를 잘 알아야 합니다.
「應知占其輪相者,隨所現業,悉應一一諦觀思驗。或純具十善,或純具十惡,或善惡交雜,或純善不具,或純惡不具。如是業因,種類不同,習氣果報,各各別異,如佛世尊餘處廣說。應當憶念思惟觀察所現業種,與今世果報所經苦樂吉凶等事,及煩惱業習得相當者,名為相應;若不相當者,謂不至心,名虛謬也。
若占輪相,其善惡業俱不現者,此人已證無漏智心,專求出離,不復樂受世間果報,諸有漏業展轉微弱,更不增長,是故不現。又純善不具、純惡不具者,此二種人,善惡之業所有不現者,皆是微弱未能牽果,是故不現。
「隨所現業」은 바로 업業의 用, 즉 작용입니다. 신구의 삼문으로 짓는 것을 모두 업이라 부릅니다. 선업이 있고 악업이 있습니다. 반드시 이치에 맞게 관찰해야 합니다. 순수하게 열 가지 선업을 구족한 것으로 나타났다면 현생에 수행을 잘할 뿐아니라 전생에도 선근이 매우 두터워서 지장보살께서 긍정을 하신 것이니 자신이 선근이 있음을 알고 본래에 있는 이러한 선근의 기초위에 계속해서 증장시켜야 합니다. 선근을 증장시키는 것을 증상연增上緣이라 합니다. 증상연은 우리에게 신심이 증장되게 해주고 수행이 증장되게 해줍니다. 만약 한 가지도 선한 생각이 없다면 열 개의 윤상이 다 악으로 나올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에 선근이 없어서 악한 일만 한 것입니다. 이와 같이 전부 악업만 있다든지 혹은 전부 선업만 있다든지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문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모두 선과 악이 섞여 있습니다. 과거에 지은 인이 여러 가지로 다르기 때문에 선업가운데에 악업이 있고 악업가운데에 선업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어떤 때는 선한 생각을 해서 삼보님을 생각하고 어떤 때에는 나쁜 생각을 해서 나와 남의 시비를 가리면서 뒤얽힌 생각 속에 하루를 보냅니다. 우리가 매일 이와같이 업을 지으면서 내생까지 가지고 갑니다. 또한 미래의 무량겁 무량한 생애까지 가지고 갑니다. 또한 습기가 있어서 업과의 인과외에도 개인의 습기가 남아있는데 그것이 과보보다도 더 무섭습니다. 과보가 다 사라지더라도 습기는 아직 남아있습니다. 예를 들면 살생의 업이 중한 사람은 전생에 생명을 빚진 업보를 다 갚는다 하더라도 나머지 업보가 남아있습니다. 만약 구업가운데에 망어、기어、양설、악구의 업을 많이 지었다면 금생에 많은 문제들이 생길 것입니다. 일단 무슨 일이 닥치던지 시비가 유난히 많이 생깁니다. 이것이 과거에 지은 업보로 생기는 것임을 알아서 금생에 전적으로 구업을 참회해야 합니다. 이렇게 참회하면 어려운 경계들이 바뀔 수 있습니다. 만약 지장경을 독송할 때에 다른 사람의 훼방을 받게 되면 어느 업때문인지를 봐야 합니다. 자신이 생각한 문제와 윤상에서 대답하는 상이 부합하면 상응하는 것입니다. 만약 상응하지 않으면 마음이 오롯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허망한 착오가 있고 상응하지 않는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만약 점찰윤상에 선악의 업이 모두 나타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이미 무루지혜의 마음을 증득해서 삼계를 벗어났다는 증명입니다. 아라한이 바로 그렇습니다. 이미 일체지를 증득해서 유루의 업이 미약하여 증장하지 않아 과를 불러오지 않으므로 윤상에 나타나지 않는 것입니다.
「菩薩畏因, 衆生畏果」(보살은 인因을 두려워하고 중생은 과果를 두려워한다.) 보살은 마음 속으로 조그마한 나쁜 일도 감히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나쁜 생각도 나쁜 과보를 받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을 두려워하여 업을 짓지 않습니다. 보리심을 발한 사람은 생각생각에 중생의 이익만을 생각합니다. 우리 범부중생은 그렇지 않습니다. 고통을 당하고서야 비로소 두려워합니다. 고통의 과보가 드러나지 않으면 무슨 말을 들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보자면..“그대가 매일같이 계를 범하니 장차 지옥에 떨어질텐데 몇 만년동안 고통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라는 말을 들고는 “상관없소! 그때 일은 그때가서 봅시다.”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고는 여전히 업을 짓고 과보가 오기를 기다렸다가 그제서야 참회를 합니다.
보살은 일단 마음에 생각이 동하면 잘못을 알고는 바로 부처님 전에 참회합니다. 선악의 업이 매우 미약하여 과보를 이끌어내지 못하니 드러나지 않는 것입니다. 범부중생은 업을 짓고도 깨우치고 참회할 줄을 모르기 때문에 점찰을 할 때에 여러 가지 다른 선악의 윤상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若當來世佛諸弟子,已占善惡果報得相應者,於五欲眾具得稱意時,勿當自縱以起放逸。即應思念:『由我宿世如是善業故,今獲此報。我今乃可轉更進修,不應休止。』若遭眾厄種種衰惱不吉之事擾亂憂怖,不稱意時,應當甘受,無令疑悔,退修善業。即當思念:『但由我宿世造如是惡業故,今獲此報,我今應當悔彼惡業,專修對治及修餘善。無得止住懈怠放逸,轉更增集種種苦聚。』是名占察初輪相法。
점찰을 해서 상응이 되려면 지장보살님께서 말씀해주시는대로 해야합니다. 삼보님께 예경하고 지장보살을 생각하고 지장보살 명호를 모시고 삼보님과 지장보살의 가피를 얻어서 업장이 소멸되어야 오욕의 경계도 만족할 수 있고 마음과 같이 뜻하는 바대로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로 오욕을 방종하거나 몸과 마음을 방종하지 마십시오. “상응을 얻고 나서 다섯가지 욕망에 만족을 얻고 나면 방일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라고 지장보살께서 당부하셨습니다.
이 때에 마땅히 “이것은 내가 과거세에 이와 같은 선업이 있었기 때문에 금생에 이와 같은 복의 과보를 얻은 것이다.”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복의 과보를 얻은 후에 그것을 다 누려서 써버리면 안됩니다. 동시에 삼보님과 지장보살, 중생들을 잊으면 안됩니다.
만약 여러 가지 액난과 번뇌와 불길한 일들을 만나서 여러분들에게 근심과 두려움, 장애가 생기거나, 마음에서 원하던 일이 뜻대로 안될 때에 지장보살님께서..“이 때에는 마치 설탕물을 마시듯이 달게 받으십시오. 이것은 과보를 갚는 것이니 의심하거나 후회하지말고 기쁘게 받으십시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숙세에 지은 업을 금생에 받는 것입니다. 인과를 깊이 믿고 이것은 과거에 지은 자신의 업임을 알고 현재에는 다시 짓지 말아야 합니다. 이미 지은 것은 바로 참회하십시오. 악업을 참회하고 점찰참법 기도를 하여 업을 바꾸십시오. 점찰윤상법은 바로 참회법입니다.
「悔」는 후회하고 고친다는 뜻입니다. 나쁜 법을 막고 고쳐서 선법을 부지런히 닦도록 해서 해태하고 방일함을 멈추게 하여 미래에 고통의 과보 받는 것을 면하게 합니다. 첫 번째 윤상인 십악업과 십선업을 점찰할 때에는 이렇게 생각해야 합니다.
善男子!若欲占察過去往昔集業久近,所作強弱、大小差別者,
과거에 지은 업과 지은 악업이 강한지 약한지 업이 두터운지 경미한지 큰지 작은 지의 차별을 알고자 하면
當復刻木為三輪,以身口意各主一輪,書字記之。
이 때에 마땅히 나무를 깎아서 신구의 삼업의 세 가지 윤상을 만들어 각각에 하나씩 새깁니다. 신구의 삼업의 세 가지 윤상은 과거에 쌓은 업을 점찰하는 것입니다.
又於輪正中,一面書一畫,令麁長使徹畔。次第二面書一畫,令細短使不至畔。次第三面作一傍刻如畫,令其麁深。次第四面亦作傍刻,令使細淺。當知善業莊嚴猶如畫飾,惡業衰害猶如損刻。其畫長大者,顯示積善來久,行業猛利,所作增上。其畫細短者,顯示積善來近,始習基鈍,所作微薄。其刻麁深者,顯示習惡來久,所作增上,餘殃亦厚。其刻細淺者,顯示退善來近,始習惡法,所作之業,未至增上。或雖起重惡,已曾改悔,此謂小惡。善男子!若占初輪相者,但知宿世所造之業善惡差別,而不能知積習久近、所作之業強弱大小,是故須占第二輪相。
이상은 바로 두 번째 윤상의 작법과 관상법입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라 실제의 일입니다. 반드시 여법하게 해야 합니다. 「善業莊嚴」은 바로 장식품을 그리듯이 합니다. 악업은 쇠락하고 번뇌로와서 마치 손해나고 줄어드는 것 같아서 조각칼로 깊고 무겁게 파냄니다. 선업은 붉은 색을 씁니다. 그것은 장엄한 세계를 가르킵니다. 악업은 검은 색을 씁니다. 그것은 불국토를 망가트리고 손해를 끼침을 상징합니다. 붉은 색을 써서 길고 크게 그리는 것은 바로 선을 쌓은 지 오래되어 선업의 공력이 매우 세고 수행도 매우 맹렬하게 하여 증상연을 지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가늘고 짧게 그린 것은 바로 선을 쌓은 지 오래지 않아 기초가 안정되지 못하고 지은 선업도 미약하여 쉽게 동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검은 색을 써서 거칠고 깊게 파는 것은 바로 악을 쌓은 지가 오래되었고 현재에도 다시 또 악업을 짓고 있어서 재앙이 매우 크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가늘고 낮게 판 것은 악업을 지은 지 오래지 않아 악법을 배워서 지은 업이 증상의 정도에 도달하지 못해서 악업이 강하지 않아서 참회하기가 쉽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중한 악업을 지었지만 이미 참회하고 다시 짓지 않는다면 그 악업은 작은 악업으로 바뀝니다. 첫 번째 윤상은 단지 숙세에 지은 선악업의 차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선악업을 쌓은 지가 오래인지 아닌지, 강한지 약한지, 큰 지 작은 지는 두 번째 윤상으로 점찰해야 알 수 있습니다.
若占第二輪相者,當依初輪相中所現之業。若屬身者,擲身輪相;若屬口者,擲口輪相;若屬意者,擲意輪相。不得以此三輪之相一擲通占。應當隨業主念,一一善惡,依所屬輪,別擲占之。
復次,若占初輪相中,唯得身之善,於此第二輪相中得身惡者,謂無至心,不得相應,名虛謬也。又復不相應者,謂占初輪相中,得不殺業,及得偷盜業,意先主觀不殺業,而於第二輪相中得身惡者,名不相應。
復次,若觀現在從生以來,不樂殺業,無造殺罪,但意主殺業,而於此第二輪相中得身大惡者,謂名不相應。自餘口意中業不相應義,亦如是應知。
첫 번째 윤상은 열 개를 한꺼번에 던집니다. 두 번째 윤상은 세 개를 한꺼번에 던지면 안되고 하나씩 던져야 합니다. 身業에 속하는 것은 身의 윤상을 던집니다. 身業은 殺、盜、淫을 포함하는데 만약 殺、盜、淫 세 개가 모두 있다면 반드시 세 번을 다 던져야 합니다. 口業은 네 개, 意業은 세 개인데 또한 이와 같이 던집니다. 그리고 마땅히 주의할 것은 두 번째 윤상을 던질 때에도 첫 번째 윤상과 마찬가지로 가르침대로 관상해야 합니다. 절하고 삼보에 공양하고 지장보살님께 절하고 지장보살명호를 천 번 염송한 후에 던지기 시작합니다. 두 번째 윤상을 던지면 반드시 첫 번째 윤상과 상응해야 합니다. 만약 첫 번째 윤상은 몸의 악업을 보여주었는데 두 번째 윤상에서 선업이 나왔다면 이것은 상응하지 않은 것입니다. 만약 금생에 청정했는데 윤상에 청정하지 못하다고 나왔다면 숙업이 있음을 설명하는 것이니 참회법 기도를 하면 빨리 없어져서 청정한 윤상을 얻을 것입니다. 지장보살께서 또 우리에게 지시해 주신 것은 만약 현재 태어난 이래로 살생의 업을 즐기지 않고 살생하는 것을 보면 바로 도피하거나 심지어는 태어나면서부터 채식만 했다면 근본적으로 살생의 업이 없는 것입니다. 다만 意業 가운데에 살생의 업이 있는데 윤상을 던질 때에 몸의 악업이 나왔다면 이것을 또한 상응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理이고 理는 사실이 아닙니다. 우리가 지금 말하는 것은 事이기 때문에 理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예를 들자면 한 스님이 그의 어머니가 임신을 했을때 전혀 고기를 먹을 수가 없었다면 이것은 과거의 숙업에서 온 것입니다. 그리고 태어나자마자 고기를 안먹고 일생동안 살생의 업을 전혀 좋아하지 않았는데 윤상을 던졌을 때 살생의 업이 나왔다면 두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한 가지는 다생겁 이래의 살생의 업이 현재의 업보로 나타난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마음이 지극하지 못해서 윤상에 드러난 것이 정확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身業 혹은 口業、意業이 첫 번째 윤상과 두 번째 윤상이 서로 모순되게 나왔다면
상응하지 않거나 윤상에 드러난 것이 정확하지 않은 때이니 마땅히 잘 이해해야 비로소 모순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합니다. 다시 절을 하고 다시 점찰해야 합니다. 처음으로 참법기도를 하면 상응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오래되고 참회법 기도를 하면 지장보살 명호를 염하면 업장이 많이 소멸되어 지극한 마음에 이르게 되고 아주 쉽게 상응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세간에서 점치는 것과는 다릅니다. 점치는 사람은 출가한 스님들에게는 점을 쳐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수행하면 운명을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지장보살께서는 이 방법을 통해서 말법시대 중생들이 숙세의 업장을 참회하고 더 나아가서 定과 慧를 닦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점찰윤상 쓰는 법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래서 처음 던질 때에는 반드시 인내심이 있어야 합니다. 상응한 후에는 매일매일 점찰을 해서 하루동안 선악의 업을 관찰하고 악업이 있으면 빨리 참회합니다. 마치 옷을 세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약간의 때가 묻으면 빨기만 하면 곧 깨끗해집니다. 그러나 때가 찌들으면 여러차레 세탁을 해야 합니다. 가벼운지 무거운지는 윤상이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습니다. 만약 매일 매일 점찰참법을 수행하면서 던져보면 아주 빨리 상응합니다. 만약 던졌을 때 악업이 무겁고 선업이 가볍게 나오면 열심히 점찰참법기도를 해서 두 번째 윤상의 세 가지가 모두 가볍다고 나오면 숙세의 삼업이 청정해진 것이니 이 때에는 곧 定과 慧를 닦을 수 있습니다. 점찰참법기도를 하는 도중에나 혹은 수행을 하는 중에 감응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지장보살상에서 방광을 하는 것을 본다든지 혹은 꿈 속에서 지장보살상을 본다든지 또는 기타 다른 감응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 주의를 해야 합니다. 만약 윤상이 청정상을 보이지 않는다면 반드시 지혜로서 진위를 변별해야 합니다. 경계에 휘둘려서 자만심을 내게 되면 오히려 다치게 됩니다. 만약 자신의 참회한 공력이 이 정도에 미치지 못했다면 이 현상은 진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마땅히 계속해서 수행하고 바깥 경계에 휘둘리지 말아야 합니다. 나타나는 경계가 좋은 경계든 나쁜 경계든지 간에 다 그 경계에 끄달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수행에 공력이 생길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큰 마음을 내서 사찰을 건립하고 스님들을 잘 외호하려고 하지만 처음 발심했을 때에 장애가 아주 많습니다. 발심을 안했을 때에는 괜찮은데 하면서 절대로 후회하는 마음을 내어서는 안됩니다. 윤상으로 살펴보십시오. 아마도 이전에 보호해주던 것은 호법선신이 아니고 마구니의 자손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 발심을 하니 그들이 모두 물러간 것입니다. 그러나 선업의 힘이 아직 모이지 않아서 호법선신이 아직 오지 않은 것이니 마땅히 계속해서 해야 합니다. 대한민국에 왕자였던 김교각스님이 구화산에 왔을 때에 몇 십년을 살았는데도 아무도 그를 찾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열심히 화엄경을 독송하고 절을 했습니다. 30년동안 절을 했는데도 먹을 쌀이 없어서 관음보살의 흙을 먹고 살았습니다. 그가 입적한 후에 많은 수승한 이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선한 업보에서 나타나는 수승한 일은 갑자기 얻어지는 게 아닙니다. 반드시 열심히 정진하고 노력해서 수행해야 비로소 얻을 수 있습니다. 과거에 조사대덕들을 보십시오. 발심하여 수행하는 도중에 얼마나 많은 역경과 시련을 거쳤지만 터럭끝만큼도 퇴굴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신심이 오히려 더욱 견고해져서 끊임없는 노력으로 마구니의 난을 물리치고 결국에는 성취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보리심을 발하고 어떤 좋은 일을 할 때에 장애를 만나더라도 후회하는 마음을 내서는 안됩니다. 만약에 후회하는 마음을 일단 내게 되면 신심의 힘이 없어져서 마구니의 침노를 당하게 되고 非法의 일을 하게 됩니다. 지장보살의 점찰윤상은 우리에게 신심을 주어서 우리 수행에 큰 도움이 되고 가피력도 매우 큽니다.
첫댓글 스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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