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창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껍게 드리워진 커튼의 가운데을 엄지와 검지로 가볍게 잡은 나는 살짝 그것을 열어젖혔다.
기다란 이등변삼각형처럼 열려진 커튼 사이로 저 멀리서 번쩍이는 푸른색 섬광이 느껴졌다.
그리고 곧 이어 커다란 유리창 바깥면을 따라 누군가의 눈물처럼 빗물이 주루룩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봄날의 아지랭이처럼 빗물은 꿈틀대듯 흘러내렸고, 그 창에 비친 나의 모습도 꿈틀대기 시작했다.
나의 복잡한 심경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나의 형상은 빗물과 함께 심하게 요동쳤다.
눈의 초점을 조금 더 멀리두자 나의 뒤로 창에 비친 복층의 다락방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남자가 말한 30센티 높이의 안전턱이 보였다.
'복층 다락방에 30센티 높이의 안전턱이 있잖아요.......
거기에 웬 아이가 걸터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겁니다.'
순간 남자의 그 말이 떠오르자 나는 재빨리 창을 커튼으로 덮어버렸다.
그리고 잠시 동안 초점을 잃은 눈으로 커튼 앞에 서서 마음을 추스렸다.
내 등 뒤에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름끼치는 상상이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나는 애써 다락방에 시선을 두지 않은 채 다시 의자로 돌아와 몸을 뒤로 눕혔다.
잔잔한 노래소리가 계속 이어지자 작은 피로감이 몰려오면서 옛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때 부모님를 교통사고로 모두 잃었다.
언젠가는 누구나 한번쯤 받아들여야 하는 이별의 고통이었지만 어린 나에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영원히 함께 할 것 같았던 것들.....
아침이면 들리던 엄마의 잠깨우는 소리, 식사를 준비하던 주방의 달그락거리는 소리,
밥솥에서 뿜어져 나오는 쌀이 익어가는 냄새.........
화장실의 물 내려가는 소리, 아빠의 전기면도기 소리, 작업복 걸치는 소리......
아무런 주제도 없지만 늘 밥상에서 재잘거리던 엄마의 수다소리....
너무나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린 나에게
너무나도 큰 고통이었다.
모두들 나를 위로하고 안타까워 했지만 그것이 내 가슴속 깊이 잠재된 트라우마를 씻어주진 못했다.
준혁과 친구가 된 건 2학기 때 자리배치를 다시 할 때부터이다.
그 때 준혁은 내 짝꿍이 되었다.
늘 뭔가 세상에 불만이 가득한 표정을 짓고 다녔으며, 짝꿍인 나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던 놈이다.
어디서 싸우고 다니는지 가끔은 얼굴과 팔뚝에서 멍자국이 보이기도 하고, 귀에서 피를 흘리기도 하였다.
쉬는 시간이 끝나서 자리에 앉는 준혁에게서 풍겨나오는 담배냄새도, 간접적으로 준혁이 어떤 아이인지
설명해 주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준혁과 친해지고 싶지도 않았고, 그 또한 나와 같이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 준혁과 친해진 계기가 있었다.
같은 반에 건달같은 길중이라는 아이가 있는데 준혁을 극도로 싫어했다.
길중은 싸움 좀 하는 아이였다. 그러나 준혁도 거기에 버금가는 아이였다.
그 둘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 폭탄 같은 존재였다.
그런 준혁을 향한 길중의 증오감은 당사자가 아닌 짝꿍인 나에게로 향했다.
길중과 그 패거리들은 나를 빵셔틀처럼 부려 먹었다.
우악스런 길중의 주먹이 무서웠던 나는 그가 시키는대로 따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의 낄낄대는 소리, 다른 아이들의 시선, 굴욕감 등은 모두 참을 수 있었다.
그러나 내 부모에 대한 말은 그 어떤 것도 용서의 대상이나 인내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길중의 딱 그 몇마디였다.
"뭐..돈이 없다고? 아...맞다. 니 돈줄되시는 분들이 멀리 가셨지?"
나에게 어떻게 그런 힘이 나왔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용수철처럼 튀어올라 길중과 뒤엉켜
그의 얼굴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손에 잡히는 대로 뭐가 되었든지 그것을 길중의 얼굴에 쏟아부었다.
그의 패거리들이 나에게 달려들려고 하자 준혁이 가로 막았다.
"꺼져 새끼들아!!! 가까이 오는 놈은 내 손에 죽는다!!!"
모두가 얼어있는 사이 준혁은 조용히 내게 다가와 내 오른손 높이 들려진 철제 필통을
천천히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내게 다가와 조그려 앉더니 속삭였다.
"그만해라.....애 죽겠다. 누가 길중이를 데리러 온 것 같다."
그게 무슨 말인지 나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제서야 피범벅이 되어 있는 길중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정학이 풀리고 학교에 들어섰을 때 길중이를 포함한 모두가 나를 경계하는 것 같았다.
실은 나의 광기 뒤에 그림자처럼 버티고 서있는 준혁을 더 두려워했는 지도 모른다.
그 무엇이 준혁과 나의 공통점인지 모르지만 그 뒤로 우리는 왠지모를 동질감을 느끼게 되었고,
서로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었다.
내 휴대폰의 단축번호 1번은 준혁이다.
나는 옛 생각에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팟!!!!'
옛 상념에 빠져있는 나를 깨운건 정전이었다.
갑자기 주변이 칠흑같이 어두워졌다.
은은하게 울려퍼지던 음악소리는 사라지고, 죽음보다 더한 적막감이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작은 비상등이 켜지면서 빛을 찾아 해매는 내 동공을 작아지게 만들었다.
어슴푸레한 노란 불빛이 오히려 음산한 기운을 더하는 것 같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살짝 젖히고 밖을 살폈다.
하늘에서 번쩍이는 푸른색 섬광과 비상등 외에는 그 어떤 빛도 보이지 않았다.
하필 오늘 정전이라니....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차가운 기운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나의 등뒤로 몰려왔다.
그와 동시에 정수리부터 꼬리뼈까지 하나씩 얼어붙는 듯한 공포가 몰려왔다.
'....누군가가 숨을 쉬듯.... 주기적으로 차가운 입김을 불어넣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 있죠...'
그 남자의 말처럼 그 찬 기운은 숨을 쉬고 있었다.
나는 뻣뻣하게 굳은 자세로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릴 뿐 뒤를 돌아볼 생각은 엄두도 못냈다.
주책없이 떨고 있는 내 오른손에 들려있는 휴대폰이 느껴졌다.
단축번호 1번만 누르면 준혁에게 연결이 된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이 바보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용기를 내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고, 온 몸의 관절이 본드칠을 한 듯 굳어있었지만 나는 힘을 내어 뒤를 돌아봤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단지 나의 나약한 생각일 뿐인걸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정말 아무것도 없는 건 같진 않았다.
다락방쪽에서 스며나오는 듯한 차가운 기운이 내 얼굴을 쓸어내듯 스쳐지나갔다.
누군가 지금 나와 같이 있다.
이제야 그 남자의 두려움을...아니, 준혁의 고통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쓰러질 듯한 몸을 추스리고 나는 의자에 털썩 몸을 내던졌다.
그리고 책상에 팔꿈치를 기대어 고개숙인 자세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방을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뭔지 모를 자존심이 나를 의자에 묶어두고 있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그 순간......... 내가 잊은 듯한 뭔가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어둠속에서 창이나 거울을 보지 말아요.....'
그 남자의 말......그 남자의 말......
비치는 것이 창이나 거울 뿐인가?
빛을 내기 때문에 평소에 미처 생각지 못했던 그 것.....
바로 내 앞에 있는 불꺼진 모니터였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나는 질끈 감았던 눈을 풀었다.
그리고 자세를 고정한 채 천천히 눈동자를 들어올렸다.
검은 모니터 속에서 고개를 처들고 있는 나의 모습이 희미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나의 어깨 뒤에서 천천히 흔들거리는 사람의 발끝이 눈에 들어왔다.
기절하고 싶다.
이것 만이 지금 나를 해방시켜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내 의지인지 아니면 자연스러운건지 모르지만, 나는 의자와 함께 뒤로 넘어졌다.
그러나 그런 나의 바램은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천장에 매달려 길게 축 늘어진 어떤 남자의 시체가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가위에 눌린걸까?
나는 눈동자 외에는 몸의 그 어떤 근육도 움직이지 못했다.
그냥 바라만 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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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 · 괴담
오피스텔 이야기 5
앤젤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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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1.13 17: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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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잘봤어요 ^^*
잘보았습니다~*
잘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