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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50대이상 불자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본래면목
밀교 (密敎, Esoteric Buddhism)
밀교는 대승 불교의 최종적인 형태로 화엄 사상, 중관파(中觀派), 유가행파(瑜伽行派) 등과 힌두교적인 요소가 결합되어 나타난 불교이다.
주술, 상징 체계, 신비주의 등을 특징으로 하며, 진리의 세계를 나타내는 만다라와 같은 도상(圖像), 다양한 형태의 불상을 발달시켰다.
5세기경에 이르면 인도에서 힌두교의 교세가 확장되어 불교가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도시의 지식인을 중심으로 한 불교는 농촌이나 일반 서민층이 이해하기 어려운 종교였으며, 주술과 현실 긍정적인 논리를 중심으로 한 힌두교가 발달하였다.
불교계에서는 이에 대응 하여 힌두교적인 요소를 수용하는 한편, 즉신성불 즉 현세에서 성불할 수 있다는 주장을 하기에 이르는데, 이것이 곧 밀교이다.
금강승 불교라고도 한다.
밀교는 탄트라 불교, 금강승, 구생승, 시륜승 등으로 불린다.
밀교의 기원은 불교의 기원과 궤도를 같이하며, 그것이 비밀불교라는 하나의 체계로 성립된 시기는 〈대일경〉·〈금강정경〉 등의 밀교경전이 형성된 7세기 중엽이다.
밀교의 경전을 탄트라라고 한다.
탄트라의 수는 상당히 많지만 인도와 티베트에서는 시간과 내용에 따라 소작 탄트라, 행 탄트라, 요가 탄트라, 무상요가 탄트라의 4종류로 나눈다.
밀교는 중생에서 부처를 향해 깨달아가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이미 깨달음을 성취한 보리의 세계에서 모든 교리와 사상을 전개해나간다.
1203년 이슬람교도들이 갠지스 강변의 밀교 최종 근거지 비트라마시라 사를 쳐부숨과 동시에 밀교는 인도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밀교는 8세기 이후 티베트와 네팔에 전파되어 오늘날 라마교가 되었다
개요
실제로 비밀불교라고 부를 때도 있으며, 탄트라 불교(Tantric Buddhism), 금강승(金剛乘 vaijra-yana), 구생승(俱生乘 sahaja-yana), 시륜승(時輪乘 kalacakara-yana) 등의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더욱이 이러한 각각의 명칭에는 각기 역사적 배경과 내용의 차이가 있다.
인도에서는 비밀승(秘密乘 Guhya-yana)이라는 용어가 있지만 잘 쓰이지 않았다.
비밀불교의 가장 일반적인 호칭은 금강승이었다.
그러나 금강승과 탄트라 불교를 동일하게 취급하여 후세의 타락한 형태의 불교로 이해하는 입장이 있는데 이 두 말이 가리키는 것은 똑같지 않다.
'금강승'은 분명히 후세의 인도 불교, 특히 후세의 비밀불교를 가리키는 가장 일반적인 호칭이며 거기에는 '탄트라 불교'보다도 명확한 문제의식이 일관하고 있다.
금강승은 금강대승, 대승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대승불교를 정통적으로 계승한 궁극적인 대성자(大成者)라고 자각했음을 뜻한다.
이 자각이 '금강승'이라는 호칭으로 결실된 것은 비교적 후기의 밀교경전에서 보이나, 7~8세기 중국의 밀교승 사이에서도 볼 수 있다.
이에 비해 탄트라 불교, 또는 탄트리즘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밀교'의 범위는 훨씬 넓고 막연하다.
이 말이 표현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인도 토착민의 종교적 배경에 의해 불교가 계승적인 발전을 한 것이라기보다는, 미신과 주술을 본질적 요소로 삼는 비불교적, 힌두적 종교가 변형·혼합된 신비주의적 종교를 의미한다.
※ 밀교를 '금강승'·'금강대승'이라고 정의한다면, 그것은 의식(儀式)에 관해서는 대승불교 중 가장 발전된 것이며, 그 사상은 대승불교의 양대 조류인 중관사상과 유식사상을 계승 발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밀교를 '탄트라 불교'로 볼 때, 그 기원은 대승불교 속에서만 찾을 수는 없으며 석가모니 당시의 인도에 존재한 모든 힌두적, 드라비다적 요소와 그러한 요소들의 불교적인 수용을 밀교의 기원으로 보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사변의 방법, 우주론, 제사, 주술, 서사시, 제천사상(諸天思想), 시간론, 내세론, 행위론, 윤회, 해탈, 신앙, 기도, 도상학(圖像學), 사원 형식, 속죄의 형식, 의사과학(疑似科學), 정법(淨法), 카스트 제도, 일상 윤리 등 모든 분야에 이른다.
밀교는 불교의 출발 당시부터 힌두교와 공통으로 가지고 있던 이러한 요소가 7세기 이후 불교의 실천과 의례의 과정에서 태동된 것이다.
따라서 밀교의 기원은 불교의 기원과 궤도를 같이하며, 그것이 비밀불교라는 하나의 체계로 성립된 시기는 〈대일경 大日經〉·〈금강정경 金剛頂經〉 등의 밀교경전이 형성된 7세기 중엽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성립배경
서유럽 제국의 멸망(475)은 인도와 서방세계와의 무역을 위축시켰다.
인도 서안과 아라비아 반도 남안에 둘러싸인 인도양, 페르시아만, 홍해 일대는 예부터 에류트라해라고 하여 동방과 서방의 상업활동의 무대였다.
그러나 서로마 제국의 멸망으로 인도와 로마 제국과의 교역이 끊기고 5세기말부터 강력한 통일왕조였던 굽타 왕조가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이민족(흉노)의 침입과 지방왕조의 분립이 계속된다.
이러한 사회상황의 변화 속에서 상인계층의 지지를 받고 있던 불교와 자이나교는 자연히 쇠퇴했고 반면에 브라만교와 힌두교는 발전을 계속하여 민간의 신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불교 내에서도 4세기말까지 중관, 유가행유식, 여래장 등의 대승불교의 경전들이 대부분 완성되었고 이와 함께 체계적인 교리를 갖추게 되어 사상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인도 사회에 넓고 깊게 침투해갔다.
그러나 후기의 중관학파나 유식학파는 상징적 신비주의에 근거한 종교적 실천행위로 기울어지기 시작했고, 대승불교와 논란을 주고받던 설일체유부나 경량부 등의 소승불교의 부파들은 쇠퇴의 징조를 보이기 시작했다.
대승불교는 정착되고 소승불교는 쇠퇴해가는 역사적·교리적인 변화 속에서, 인도의 커다란 종교적 조류 속에 잠재해 있던 밀교적인 흐름은 7세기경부터 서서히 분명한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원류
밀교에서는 경전을 '탄트라'라고 한다.
탄트라의 수는 상당히 많지만 인도와 티베트에서는 시간과 내용에 따라 4종류로 나눈다.
① 소작(所作) 탄트라(kriya tantra):밀교경전 중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며 밀교적인 대승경전을 포함하고 있다.
주로 다라니(dharani)나 의례의 산발적인 서술을 하고 있다.
비계통적이고 비조직적인 낮은 단계의 밀교이다.
② 행(行) 탄트라(carya tantra):대표적인 것은 〈대일경〉이다.
여기에 속하는 경전은 그리 많지 않지만,
독립된 수행체계를 가지며 대일여래(大日如來)를 교주로 한다.
③ 요가 탄트라(yoga tantra):신심일여(身心一如) 경지의 요가수행을 제시하는 경전들로서 〈금강정경〉의 18회 중 제1회가 여기에 해당한다.
④ 무상(無上)요가 탄트라(anutrara-yoga tantra):최고의 탄트라를 모아놓은 것이다.
요가를 최고의 경지까지 높여 자재(自在)의 해탈을 체득하는 것을 설하는 경전들로서 15회의 〈금강정경〉과 〈헤바쥬라 탄트라,〈카라차크라 탄트라〉 등 중국이나 한국에는 전하지 않은 경전이 많다.
①은 7세기 이전, ②는 7세기 전반, ③은 7세기 후반, ④는 8세기 이후에 성립되었다.
중국과 한국, 일본 등지에서는 보다 단순하게 〈대일경〉과 〈금강정경〉의 성립을 기준으로 하여 이전의 대승불교에 혼입되어 있는 밀교를 잡밀(雜密)이라 하고, 대일경 이후에 계통적으로 설한 것을 순밀(純密)로 분류했다.
잡밀과 순밀의 분류법은 경전의 설법교주가 대일여래(大日如來)인가 아닌가를 기준으로 한다.
잡밀은 소작 탄트라에 해당하며, 순밀은 행 탄트라, 요가 탄트라, 무상요가 탄트라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러한 분류에 따른다 해도 밀교의 원류와 상한이 분명하지는 않다.
일반적으로 대승경전 속에 '다라니를 설하는 장'(陀羅尼品)을 설정하게 된 시기에 초기 밀교경전이 성립되었다고 보기도 하지만, 이것도 정확한 구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석가모니 자신도 세속의 주문을 금지하면서도 '치통(齒痛)의 주문', '복통의 주문', '뱀에게 물렸을 때의 주문' 등은 예외적으로 허용하고 있기 때문에 대승경전에 다라니가 등장한다는 이유만으로 대승불교시대를 초기 밀교의 출발점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원시경전에서의 밀주(密呪)는 오늘날의 남방 불교권에도 계승되어 방어주(防護呪:몸을 지키기 위한 주문)가 되는 한편, 북방에 전해진 소승경전에서도 그에 대한 고찰을 볼 수 있다.
또한 대승불교의 백과사전이라 일컫는 용수의 〈대지도론 大智度論〉과 유식사상의 연원인 미륵의 〈유가사지론 瑜伽師地論〉에서도 다라니의 정의와 분류가 행해지게 되었다.
체계
밀교는 중생에서 부처를 향해 깨달아가는 과정이라기보다는 이미 깨달음을 성취한 보리(菩提 bodhi)의 세계에서 모든 교리와 사상을 전개해나간다.
밀교의 교리가 독립된 체계로 완성된 것은 7세기 중엽과 후반에 걸쳐 〈대일경〉과 〈금강정경〉이 성립되면서부터였다.
〈대일경〉이 전개하는 세계를 태장계(胎藏界)라 하고 〈금강정경〉이 전개하는 세계를 금강계(金剛界)라 한다.
이 두 경전은 각기 대승불교에서의 중관과 유식 계통의 사상을 배경으로 하며, 양자를 종합하려는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대일경〉은 〈반야경〉·〈법화경〉 등의 경전과 직관적으로 파악되는 절대계, 불지(佛智)의 세계를 목표로 하는 중관학파의 흐름에 선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대일여래는 진리 그 자체의 이법신(理法身)이라고 한다.
이에 비해 〈금강정경〉은 〈화엄경〉·〈해심밀경 解深密經〉 등의 경전과 유가행유식학파의 인식론적·관념론적 교리를 받아들인다.
중생이 아직 깨닫지 못한 무명(無明)의 상태에서 자신의 본성인 보리심(菩提心)을 깨달아가는 수행과 지혜의 공덕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을 대일여래의 지법신(智法身)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법신과 지법신의 이지이신(理智二身)은 본래 별개의 것이 아니므로 '이지불이'(理智不二)라고 한다.
또 이것을 각각 도시한 것을 '만다라'(mandala:본질적인 것)라고 하고, 〈대일경〉의 만다라를 '태장계만다라', 〈금강정경〉의 만다라를 '금강계만다라'라고 한다.
〈대일경〉은 한역(漢譯)되어 전하는 것으로 7권 36품, 티베트 대장경 속에도 티베트역이 현존하는데 산스크리트본은 소실되어 현존하지 않는다.
〈대일경〉은 대비로자나불(大毘盧遮那佛 Maha-vairocana) 곧 대일여래라고 불리는 근본불이 여래 지혜의 빛으로 햇빛이 모든 어둠을 밝히는 것처럼 두루 세상을 비추는 자비와 지혜의 경전이다.
그러므로 대일여래는 모든 중생에게 상응(相應)하여 여러 형태의 불신(佛身)을 나타내며 여러 가지 설법을 한다.
비밀의 말로서 부처의 세계를 상징할 때도 있고, 신체, 손가짐으로 나타낼 때도 있다.
마음의 여러 가지 상태에 따라 부처의 지혜를 전개하고 그것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적응시킨다.
요컨대 이 대일여래 속에서는 부처 자신의 깨달음(自證)과 중생의 교화(化他)가 하나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일여래는 순수한 이념적 존재(法身)이며 동시에 극히 현실성을 가진 대상이기도 하다.
초기밀교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초기밀교(初期密敎)란 인도에서 4세기로 부터 6세기에 걸쳐 성립한, 다라니를 중심으로 하고 체계가 잡히지 않은 밀교이다.
예를 들면 병을 치료하는 것, 장수하는 것, 비를 멈추게 하는 것 등 현실적인 요구를 설하는 다라니 경전, 제존을 대상으로 하여 공양하고 관상하는 일군의 밀교경전은 이 시대 산물이다.
존격(尊格)의 도상상(圖上象)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는데 먼저 초기 불교미술에서는 석가여래가 중심이 된 데 반해 대승불교에서는 관음(觀音)․문수(文殊)․미륵(彌勒) 등의 새로운 보살 그룹이 등장하고 있다.
5세기경에는 변화관음(變化觀音). 중생의 근기에 맞게 여러가지 모습으로 변화하여 모습을 나타내는 것, 예를 들면 천수천안관자재보살, 여의륜보살, 백의관음, 준제보살 기타 등등이 성립하여 십일면․천수․불공견삭 등 특이한 양식을 가지기 시작했다.
중기밀교
다음 중기밀교란 7세기경 새롭게 인도에서 성립한 <대일경(大日經)>, <금강정경(金剛正經)> 등을 기반으로 하는 체계적인 밀교이다.
<대일경>에는 결인법, 진언의 염송법 및 존격, 상징, 범자에 의한 3종의 만다라 묘사법 등 밀교의 삼밀행(三密行)에 관한 중요한 내용이 망라되어 있다.
더욱이 밀교의 필요 불가결한 실천체계의 제요소인 호마법(護摩法 밀교의 수행법으로서 가장 보통으로 행하는 법), 이 호마는 인도에서 옛적부터 행하던 작법으로 천상의 신장에게 공양할 물건을 올릴 때에 이것을 불에 던져 태우면 연기가 되어 하늘에 올라가서 신에게 이르러 간다고 하는 원시적인 신앙에서 생긴 것.
, 공양법(供養法). 음식 옷 따위를 삼보․부모․스승․죽은 이 등에게 공급하는 의식.
, 관정법(灌頂法). 여러 부처님이 대자비의 물로써 보살의 정수리에 붓는 것. 등각 보살이 묘각위에 오를 때에 부처님이 그에게 권청 불과를 증득케 한다, 등이 설해져 있다.
금강승(金剛僧)의 금강은 금강석(金剛石)처럼 변화하지 않는 ‘아(我)’와 ‘법(法)’의 자성(自性)을 의미(意味)하고 이 금강의 성질(性質)을 실현시키는 방법을 금강성(金剛性)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금강성은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공성(空性)과도 동일시하여 공성승(空性僧)이라고도 하는데 특히 그 수행법(修行法)인 요가는 성적쾌락(性的快樂)과 결부(結付)되어 있다.
즉 진언승에서는 지혜(智慧)와 방편(方便)이 중심 교의(敎義) 이지만 금강승에서는 지혜는 정적인 성격이기 때문에 여성으로 방편은 동적인 고로 남성에 비유되어 이 남녀의 교합(交合)을 요가로서 나타내는 것이다.
이들 만다라, 무드라, 만트라는 이미 예배의 대상이 되고 있는 불, 보살, 명왕 등과 복잡하게 조합되어 세세하게 규정되고 있다.
그래서 밀교의 모습은 그 교의에 있어서나 의례 , 조사 존상에 있어서 종래의 대승불교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후기밀교
마지막으로 후기밀교란 8세기 인도에서 성립한 탄트리즘의 전개와 함께 성립한 밀교로서 속칭 탄트라불교라 불리고 있다.
이 단계의 밀교는 지금까지 거의 취급되지 않았던 성적행법과 생리적 행법을 대담하게 도입하여 때로는 좌도밀교라는 이름하에 심한 혐오감을 느끼게 한다.
이것은 힌두이즘의 탄트리즘에서 시바. Siva. 인도의 신화에 나오는 신으로써 원형적인 남성원리로써 순수한 존재이며 무시간적 완전한 존재
와 샤크티. Sakti. 인도의 신화에 나오는 신으로써 변화를 나타내는 여성원리이고 시간적 변화의 세력이고 창조의 에너지.
와의 관계를 불교적으로 지혜(般若)와 방편(방편)이라는 용어로 바꾸어 놓았을 뿐 그 바탕에 있어서 양자는 전혀 구별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를 구별하기 위해 지혜와 방편에 의해서 얻어진 궁극의 경지인 열반(涅槃)을 반야방편(般若方便)이라 하여 대락(大樂) 혹은 보현(普賢)이라 부르는데 곧 남녀 교합의 경지이다.
이렇게 성적행위와 일치하는 금강승의 요가를 타락한 불교로 보는 견해도 생겨나게 되었으므로 진언승과 구별하기 위하여 진언승을 우도밀교, 금강승을 좌도 밀교라 하였다.
전파
인도 밀교는 말기에 접어들어 파라 왕조 비호하에 명맥을 유지하다가 파라 왕조가 몰락해가면서 지방종교로 전락했다.
1199년 파라 왕조가 멸망하고 이어 1203년 이슬람교도의 장군 이크티야르 웃딘 무하마드가 대군을 이끌고 갠지스 강변의 밀교 최종 근거지 비트라마시라 사(寺)를 쳐부숨과 동시에 마지막 불교였던 밀교는 마침내 인도 역사에서 그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그러나 이전인 7세기에서 8세기에 걸쳐 선무외(善無畏)·금강지(金剛智)·불공(不空) 등의 많은 인도 밀교승들이 당(唐)의 장안(長安)으로 가 금강계와 태장계의 밀교를 전했다.
후기의 밀교는 8세기 이후의 티베트와 네팔에 전파되어 오늘날 라마교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한국의 밀교
한국에서의 밀교는 삼국시대에 전래된 불교가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수용되었다.
현존하는 자료가 없으므로 고구려와 백제의 밀교가 어떻게 전개되었는가는 알 수 없으나, 신라에서는 적어도 7세기초부터 밀교적인 요소가 보이기 시작하며 8세기에 들어와 〈대일경〉과 〈금강정경〉 등의 밀교경전에 기초한 순밀(純密) 사상이 전해지면서 널리 유포되기 시작했다.
밀본(密本) ·안홍(安弘 또는 安含) ·명랑(明朗) ·혜통(惠通) 등은 신라 밀교 초기의 대표적인 승려들이다.
안홍은 신라에 본격적인 밀교를 수용한 승려로서 611년(진평왕 2년) 혜숙(惠宿)과 함께 당에 건너가 서역(西域) 승려 3인과 중국 승려 2인을 대동하고 귀국하여 황룡사에서 〈전단향화성광묘녀경 栴檀香火星光妙女經〉을 번역했다고 한다.
명랑은 〈관정경 灌頂經〉에 근거하여 신인비법(神印秘法)으로서 당나라 군대의 침공을 물리쳤다고 한다.
또한 혜통은 처음으로 순밀사상을 전래한 승려로서 진언(眞言)을 외워 신문왕의 등창을 낫게 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전한다.
특히 명랑의 신인비법과 혜통의 진언지송(眞言持誦)은 고려시대 밀교종파인 신인종(神印宗)과 총지종(摠持宗)이 성립할 수 있었던 기초가 되었다.
이와 같이 신라시대의 밀교는 여타 불교의 신앙형태와 결합되었고 또한 무속신앙까지도 흡수하여 매우 성행하게 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에는 오대산신앙과 사리탑신앙 등이 있다.
고려시대에 들어와 밀교적인 수행의식은 호국불교의 형태를 띠면서 왕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게 되었다.
특히 연등회와 팔관회는 고려의 왕실행사로 수용되면서 밀교적인 요소가 두드러진 불교의식으로 변모했다.
밀교신앙이 더욱 성행하던 후기에는 왕의 즉위식도 밀교적인 작법(作法)에 의거하여 거행되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는 80여 종의 각종 법회가 정기적으로 열렸다고 하는데, 이 가운데 순수한 밀교의식에는 문두루도량(文豆婁道場) ·인왕백고좌도량(仁王百高座道場) ·공작명왕도량(孔雀明王道場) ·무능승도량(無能勝道場) ·금광명도량(金光明道場) ·소재도량(消災道場) ·대일왕도량(大日王道場) ·공덕천도량(功德天道場) ·관정도량(灌頂道場) ·만다라도량(曼茶羅道場) ·진언법석(眞言法席) 등이 있었으며, 이외에도 밀교적인 성격이 강한 불교의식이 많았다고 한다.
또한 2차례에 걸친 고려대장경의 조판사업에서도 밀교 계통의 경전들이 많이 포함되었는데, 몽골군에 의해 불타버린 초조대장경(初雕大藏經)은 알 수 없으나, 현재 남아 있는 재조대장경(再雕大藏經)에는 〈대비로자나경 大毘盧遮那經〉(7권)·〈금강정경 金剛頂經〉(3권) 등을 비롯한 191종 356권의 밀교경전과 〈금강정유가호마의 金剛頂瑜伽護摩儀〉(1권)·〈불정존승다라니염송의궤 佛頂尊勝陀羅尼念誦儀軌〉(1권) 등의 밀교의식의 작법을 기록한 20종 21권의 의궤(儀軌)가 들어 있다.
또한 1328년(충숙왕 15)에는 왕실의 발원에 의해 밀교대장경 130권을 금서(金書)로 간행했다.
조선시대에는 숭유억불 정책으로 말미암아 불교가 탄압을 받았고 이 과정에서 밀교의 세력도 많이 약화되었다.
태종대에는 고려시대에 성립된 11개의 종파를 통폐합하면서 총지종과 신인종은 그 명맥이 끊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억불정책에도 불구하고 왕실과 민간의 신앙으로 이미 널리 유포된 밀교는 계속 유지되었다.
태조는 재위기간 동안 14회에 걸친 소재도량을 열었으며, 1395년에는 총지종과 신인종의 본사 총지사(摠持寺)와 현성사(現聖寺)에서 대규모의 불사(佛事)를 개최하기도 했다.
그 자신 불교탄압을 강행했던 태종도 태조가 죽자 진언법석 등의 각종 법회를 열었고, 세종은 1450년 〈공작명왕경〉에 근거한 공작재(孔雀齋)를 개설하는 등 이후에도 왕실이 주최한 밀교법회는 끊이지 않았다.
또한 조선시대에는 오히려 이전 시대보다도 더 많은 밀교서적이 간행되었는데, 그 대부분은 진언과 다라니에 관한 것으로 대표적인 것에는, 〈진언집 眞言集〉·〈오대진언 五大眞言〉·〈천수경 千手經〉·〈제진언집 諸眞言集〉·〈성관자재구수육자선정 聖觀自在求修六字禪定〉·〈비밀교 秘密敎〉 등이 있다.
한국의 밀교는 사상이나 교리적인 측면보다는 진언, 다라니의 염송과 의식을 통한 개인적, 국가적인 소망의 성취라는 세속적 성격이 강했다.
또한 종파적 불교보다는 통불교적(通佛敎的) 입장을 견지해왔던 우리의 전통에서는 뚜렷하게 정립된 '밀교'의 개념이 없으면서도 밀교적 요소는 사상과 의례 전반에 걸쳐 스며들어 있으므로 그것을 여타 종파의 교리나 신앙체계와 뚜렷하게 구분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 밀교는 대승불교의 한 분야로 7세기 경 인도에서 성립되었다.
밀교가 성립될 당시의 인도불교는 부파불교시대(소승불교시대)로서 실천보다는 전문적 이론과 승려중심의 경향이 매우 짙었다.
이러한 불교계의 흐름은 교학(敎學)의 찬란한 발전을 가져오는 장점도 있었지만, 많은 신도를 잃게 되고 교단의 위축을 스스로 가져오는 단점도 있었다.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고 실천을 위주로 한 대중불교운동이 밀교이다.
당시까지 발전되었던 불교사상의 두 주류인 중관학파(中觀學派)의 공사상(空思想)과 유가유식학파(瑜伽唯識學派)의 유사상(有思想)을 동시에 계승, 발전시키면서, 바라문교와 힌두교 및 민간신앙까지 폭넓게 받아들여, 그것을 다시 불교적으로 정립한 것이 밀교의 사상적 바탕이 되었다.
밀교사상의 이론적 원리[敎相]를 밝힌 ≪대일경 大日經≫과 실천법의 체계를 세운 ≪금강정경 金剛頂經≫은 밀교의 근본경전들이다.
이에 의하면 밀교는 법신불(法身佛)인 대일여래(大日如來)를 중심으로 한 태장계(胎藏界)와 금강계(金剛界)의 수행법을 닦아 익히면 이 육신 자체가 바로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즉신성불(卽身成佛)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밀교의 수행자는 누구나 입으로 진언(眞言)을 염송하고 손으로 결인(結印)을 하며 마음으로 대일여래를 생각하는, 신구의(身口意)의 삼밀가지(三密加持)를 행하여 중생의 삼밀과 부처님의 삼밀이 서로 감응일치하여 현생에서 성불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이와 같이 근본경전을 중심으로 조직된 밀교가 성립되기까지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그리하여 일반적으로 ≪대일경≫과 ≪금강정경≫이 성립되기 이전의 밀교사상을 ‘잡밀(雜密)’이라고 하고, 그 이후의 것을 ‘순밀(純密)’이라고 하여 구별하였다.
이러한 인도밀교의 두 형태 가운데서 중국에 먼저 전래된 것은 잡밀계통이다.
동진의 원제(元帝) 5년(322) 최초로 전래된 뒤 잡밀계통의 경전인 ≪대공작왕신주경 大孔雀王神呪經≫·≪관정경 灌頂經≫ 등이 번역되면서 차차 전파되었다.
725년 선무외(善無畏)가 ≪대일경≫을 번역하고, 753년 불공(不空)이 ≪금강정경≫을 번역하여 밀교의 정통사상인 순밀이 중국에 전래되었다.
그 뒤, 밀교는 송나라 때까지 크게 발전하여 깊은 신앙의 의지처가 되었다.
우리 나라에서는 잡밀계통의 중국밀교를 삼국시대부터 수용하게 되었다.
백제와 고구려의 밀교에 대해서는 그 자료의 절대적인 부족으로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신라에서는 7세기 초부터 잡밀계통이 전래되었고, 8세기에 접어들면서 순밀계통이 전해지면서 본격적인 발전을 보게 되었다.
그리하여 밀교는 고려나 조선시대까지 민중신앙의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우리 나라의 밀교는 이론이나 교학적인 발전보다는 실천적 수행면에 치중되었으며, 독자적인 발전보다는 선(禪)이나 정토신앙 또는 천태종(天台宗) 등과 밀접한 관계성 속에서의 발전을 보았다.
특히, 고려 이후부터는 여러 가지 의식이나 진언염송을 통한 밀교신앙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우리 나라에서의 밀교는 신라 이후 근대에 이르기까지, 출세간적(出世間的)인 성취를 위한 목적보다는 세간적 성취를 위하여, 전쟁방지 및 병의 치료와 같은 목적이 주류를 이루어 왔다.
신라에 최초로 밀교를 전한 승려는 안홍(安弘)이다. 그는 600년(진평왕 22) 혜숙(惠宿)과 함께 중국으로 가서 서역승(西域僧) 세 사람, 중국승려 두 사람을 데리고 귀국하여 황룡사(皇龍寺)에서 ≪전단향화성광묘녀경 栴檀香火星光妙女經≫을 번역하고, 640년(선덕여왕 9) 만선도량(萬善道場)을 회향하였다.
안홍과 거의 같은 시기의 밀교승으로는 명랑(明朗)이 있다. 명랑은 632년 당나라로 가서 3년 동안 밀교를 공부하고 귀국하였다.
그는 귀국한 뒤 자신의 집을 금광사(金光寺)로 고쳐 짓고 이곳을 중심으로 밀교신앙운동을 전개하였다. 안홍과 명랑을 기점으로 하여 명효(明曉) 등은 잡밀계통을 받아들였고 혜통(惠通)은 처음으로 순밀사상을 전래시켰다.
혜통에 이어 현초(玄超)·의림(義林)·혜일(惠日)과 같은 밀교승려들의 활약으로 신라밀교는 많은 발전을 보게 되었다. 그 결과 신라의 밀교사상도 신인비법(神印祕法)·사리탑(舍利塔)·오대산신앙(五臺山信仰)·소재활동(消災活動:재앙을 없앰) 등을 통하여 활발히 전개되었다.
신라 신인비법은 명랑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명랑이 금광사를 중심으로 밀교신앙을 활발히 전개시키고 있었던 668년(문무왕 8) 당나라가 신라를 침공하자, 문무왕은 명랑에게 이를 물리쳐줄 것을 부탁했다.
명랑은 낭산(狼山) 남쪽 신유림(神遊林)에다 임시로 절을 짓고 풀로 오방신상(五方神像)을 만들어서 비법에 밝은 12명의 승려와 더불어 신인비법을 행하여 당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이러한 명랑의 신인비법은 그 수용 초기부터 호국이념과 연결되면서 대단한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고, 그 법맥은 안혜(安惠)·낭융(狼融)·광학(廣學)·대연(大緣) 등으로 계승되어 고려시대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신인비법은 원래 문두루법(文豆婁法, Mudra)으로서 그 사상은 ≪관정경≫ 제7권에 의한 것이다.
이 경은 주로 제석천(帝釋天)과 사천왕(四天王)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아 불법(佛法)을 믿는 사람과 그 나라가 어려울 때 신인비법으로써 구제될 수 있는 방법과 내용이 제시되어 있다.
부처님의 제자들 중 사악한 귀신 때문에 공포에 떠는 사람이 있거나, 병에 걸려 생명의 위협을 받거나, 다른 나라가 침략을 할 때는 마땅히 오방신상을 만들어 문두루법을 행하면 모든 재난을 극복하여 물리칠 수 있다고 하였다.
개인과 국가적 재난이 문두루법을 행함으로써 해결될 수 있는 근거는 이들 5방의 신장이 각각 7만의 부하신을 거느리고 문두루법을 행하는 목적에 부응하여 보호해주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신인비법은 ≪관정경≫에서 사상적·의례적인 연원을 찾을 수 있지만, 신라의 신인비법은 ≪관정경≫ 사상을 주축으로 하면서, 그 위에 ≪관불삼매해경 觀佛三昧海經≫과 ≪금광명경 金光明經≫의 사상까지도 폭넓게 수용하였다.
따라서, 신라 신인비법의 사상은 독자성을 가지고 발전하면서도 용이나 사천왕, 제석천 등의 사상을 무리 없이 포섭하게 되었고, 그러한 현상은 소재활동과 짝하여 신라밀교가 무속신앙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는 길을 열어놓는 결과가 되었다.
이와 같은 명랑의 신인비법을 중심으로 한 밀교의식은 고려시대에 가서 신인종(神印宗)이 성립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또한 혜통이 진언을 외워 신문왕의 등창을 낫게 함으로써 성립된 일맥은 고려시대에 와서 총지종(摠持宗)으로 성립되었다.
그러므로 명랑을 신인종의 초조(初祖)로, 혜통을 총지종의 초조로 삼고 있다. 이 밖에도 의림은 805년(애장왕 6) 103세의 나이로 밀교의 전교에 힘을 기울였는데, 그는 주로 순밀계통의 태장계법과 금강계법을 위주로 하였다.
오대산을 중심으로 한 불교신앙운동은 선덕여왕 때 자장(慈藏)에 의하여 시작되었고, 그것은 당나라의 오대산신앙에서 유래되었다. 그러나 자장 당시는 오대산신앙이 크게 발전하였거나 체계화되지는 못하였다.
신라에서 오대산을 중심으로 한 신앙이 본격화된 것은 8세기 초 정신대왕(淨神大王)과 그의 태자인 보천(寶川)과 효명(孝明)에 의해서였다.
이들 세 부자가 오대산신앙을 전개한 사실은 ≪삼국유사≫ 대산오만진신조(臺山五萬眞身條)와 명주오대산보질도태자전기(溟州五臺山寶叱徒太子傳記)에 전해지고 있다. 이에 의하면 보천과 효명은 오대산에 들어가 수양을 하였다.
하루는 산의 다섯 봉우리를 보려고 산에 올랐더니 동쪽 봉우리에서는 1만의 관음보살이, 남쪽 봉우리에서는 1만의 지장보살이, 서쪽 봉우리에서는 아미타불을 수위(首位)로 1만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북쪽 봉우리에서는 석가모니불을 수위로 500의 아라한(阿羅漢)이, 중앙에서는 비로자나(毘盧遮那)를 수위로 1만의 문수보살이 각각 나타났으므로 예배를 올렸다.
그 뒤, 보천태자만이 오대산에 계속 남아 ≪수구즉득다라니경 隨求卽得陀羅尼經≫을 매일 염송하면서 50년을 수양하였다. 이러한 보천이 말년 나라를 지키고 이익하게 할 비법을 남겼는데 다음과 같다.
동쪽 봉우리에는 관음방(觀音房)을 두어 관음상과 푸른 바탕에 1만의 관음상을 그려 모시고, 다섯 명의 복전(福田)을 두어 낮에는 ≪금광명경≫과 ≪인왕반야경 仁王般若經≫ 및 천수주(千手呪)를 외우게 하며, 밤에는 관음예참(觀音禮懺)을 염송하게 하고, 원통사(圓通社)라고 이름하게 하였다.
남쪽 봉우리에는 지장방(地藏房)을 두고, 지장보살상과 붉은 바탕에 팔대보살(八大菩薩)을 수위로 1만의 지장보살상을 그려 모시고, 다섯 명의 복전을 두어 낮에는 ≪지장경≫과 ≪금강반야경≫을 읽게 하고 밤에는 점찰예참(占察禮懺)을 행하게 하고, 금강사(金剛社)라고 이름하게 하였다.
서대(西臺)에는 미타방(彌陀房)을 두어, 무량수불상(無量壽佛像)과 흰 바탕에 무량수불을 수위로 1만의 대세지보살을 그려 모시고, 다섯 명의 복전을 두어 낮에는 ≪법화경≫을 읽고 밤에는 미타예참(彌陀禮懺)을 행하게 하고, 수정사(水精社)라고 이름하게 하였다.
북대(北臺)에는 나한당(羅漢堂)을 두어 석가상을 모시고, 검은 바탕에 500나한상을 그려 모시고, 다섯 명의 복전을 두어 낮에는 ≪불보은경 佛報恩經≫과 ≪열반경≫을 읽고, 밤에는 열반예참(涅槃禮懺)을 행하게 하고, 백련사(白蓮社)라 이름하게 하였다.
중앙은 진여원(眞如院)으로 문수상을 진흙으로 만들어 모시고 그 뒷벽에는 황색 바탕에 비로자나를 수위로 하여 36화형을 그려 모시고, 다섯 명의 복전을 두어 낮에는 ≪화엄경≫과 600권 ≪반야경≫을 읽게 하고 밤에는 문수예참(文殊禮懺)을 행하게 하여, 화엄사(華嚴社)라 이름하게 하였다.
이러한 오대산이라는 지역을 상징하여 5색·5방·5불로 체계화한 구조와 사상의 내용은 밀교의 본지수적(本地垂適)과 만다라(曼茶羅)에 근원을 두고 있다. 신라의 오대산신앙은 자장에 의하여 당나라 신앙 형태에 영향을 입어 시작된 것이다.
중국의 오대산신앙이 시작된 교리적 근거는 60권 ≪화엄경≫의 보살주처품(菩薩住處品) 제27과 ≪문수사리법보장다라니경 文殊舍利法寶藏陀羅尼經≫의 교설에서부터 출발되었다.
그러므로 신라 오대산신앙의 중앙에는 비로자나불과 문수보살이 위치하게 되는데 이것은 중국이나 신라의 오대산신앙이 그 출발부터가 현교(顯敎)와 밀교의 융합에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8세기 초 중국에서는 선무외·금강지(金剛智) 등이 중심이 되어 천수관음조상법(千手觀音造像法)·지장화상법 등을 정립하여 밀교적인 관음과 지장신앙을 전개하였고, 또한 불공(不空)은 함광(含光)과 더불어 오대산을 중심으로 한 밀교적 문수신앙을 전국적으로 확대시켜 나갔다.
이러한 시기에 신라에서는 명효와 의림 등의 훌륭한 밀교승들이 있어서 당나라의 그러한 교법을 곧바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때이다.
보천이 신라 오대산신앙을 체계화한 것도 8세기 중엽이었다. 그는 철저한 밀교의 진언승(眞言僧)이어서 수구다라니를 매일 염송하였고, 토속신(土俗神)이 와서 보천에게 수계까지 받았다. 이러한 사실은 물론 민속신앙이 밀교에 포섭되는 한 실례이기도 하지만, 보천은 문수보살로부터 관수까지 받을 정도로 밀교신앙에 철저하였다.
따라서, 보천에 의해서 체계화된 신라 오대산신앙이 밀교적으로 전개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십일면관음이나 천수천비(千手千臂)의 관음은 모두가 밀교적인 것이다.
이러한 관음을 염송하는 천수주가 ≪인왕경≫과 함께 관음방에서 독송된 것이나, 5방에 5불을 배치하고 다섯가지 색을 배대하여 5원(員)의 복전을 둔 것은 모두가 순연한 밀교적 수행법의 하나요, 신라 특유의 만다라적 체계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방불(五方佛)의 배치법은 현교나 밀교의 전통적 만다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신라 특유의 것이다. 따라서 오대산을 중심으로 전개된 신앙운동은 신라밀교만이 발전시킬 수 있었던 새로운 만다라라고 할 수 있다.
신라시대 사리탑에 대한 신앙이 처음으로 밀교사상과 만나게 되는 것은 706년(성덕왕 5)이다. 이 해 신문왕과 효소왕의 명복을 빌고 나라의 안녕을 기원할 목적으로 경주 황복사(皇福寺)에 삼층석탑을 세웠는데, 탑의 이층에다 부처의 사리와 함께 ≪무구정광다라니경≫을 봉안하였다.
≪무구정광다라니경≫은 작은 탑 99개 또는 77개를 조성할 것과 이 다라니의 공덕을 교설한 잡밀계통의 경이다. 이 경은 중국에서 695∼704년 사이에 미타산(彌陀山)이 번역하였고, 이 시기에 당나라에서 총지법(摠持法)을 공부하고 귀국한 명효가 ≪불공견색다라니경≫과 함께 신라로 가지고 왔다.
그 뒤부터 신라에서는 ≪무구정광다라니경≫을 조탑경(造塔經)으로 널리 받들어서 중요한 탑 속에는 반드시 이 경이 봉안되었다. 751년(경덕왕 10) 불국사의 석가탑을 보수하면서 이 경을 넣었고, 855년(문성왕 17) 경주창림사(昌林寺) 삼층석탑에도 이 경이 봉안되었다.
828년(흥덕왕 3)에 세워진 경상북도 영일군법광사(法光寺)의 삼층석탑에서 불정존승다라니(佛頂尊勝陀羅尼)가 새겨진 사리병이 봉안되었는데, 이는 신라 사리탑신앙이 다른 밀교경전과도 연결을 맺은 좋은 예이며, 9세기로 접어들면서 그러한 현상은 더욱 구체화되었다.
863년(경문왕 3)에 건립된 동화사 비로암(毘盧庵)의 석탑에는 사리장치와 함께 금동사방불함(金銅四方佛函)이 봉안되었는데, 이것은 태장계와 금강계, 잡밀과 순밀, 현교와 밀교가 융합된 삼종실지(三種悉地)의 만다라사상을 사리탑신앙으로 응용, 발전시킨 것이다.
이와 같은 비로암의 석탑을 계기로 신라 사리탑신앙은 점차 풍부한 밀교적 사상을 띠게 되었다. 그리하여 동화사 금당암(金堂庵) 삼층석탑과 봉화군 서동리 동쪽의 삼층석탑, 봉화군 취서사(鷲棲寺)의 석탑 등은 모두가 ≪무구정광다라니경≫과 삼종실지의 만다라사상에 근거하여 건립하였다.
특히, 취서사 석탑의 경우 무구정광단(無垢淨光壇)을 건립하고 밀교적 의식까지 거행하였으며, 871년에 중수한 황룡사구층탑에는 99기의 작은 탑과 함께 사리·다라니경 등을 봉안하였다.
또한, 895년(진성여왕 9) 백성산사(百城山寺)에서는 길상탑(吉祥塔)을 세우면서, ≪법화경≫·≪금강반야경≫·≪금광명경≫·≪진언집 眞言集≫·≪무구정광다라니경≫과 함께 77기, 99기의 작은 탑도 봉안하였다. 이 때 특히 77기, 99기의 작은 탑을 봉안하면서 그 각각의 탑 속에 진언을 또 봉안하였다.
이러한 백성산사의 길상탑을 통하여 신라의 현교와 밀교는 자연스럽게 융합됨은 물론, 그 사상면에 있어서도 더욱 깊고 넓은 관계성을 유지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고려는 나라를 세울 당시부터 밀교에 대한 신앙과 관심이 매우 깊었다.
밀교를 포함한 불교사상을 고려에서는 건국이념으로 하였고, 밀교적 수행의식을 진호국가(鎭護國家)의 한 법용(法用:정례화된 의식)으로 수용하였다.
그러므로 고려에서의 밀교는 왕실을 중심으로 그 초기적 신앙의 전통이 확립되었고, 역대 왕들은 그러한 전통을 계승하여 밀교신앙을 더욱 발전시켜 나갔다.
후삼국을 통일하여 고려를 건국한 태조는 철저한 호불왕(護佛王)으로서, 특히 밀교신앙과 밀교계통의 승려들로부터 정신적·현실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
렇기 때문에 그는 밀교신앙의 전개와 보호에도 대단한 힘을 기울였다.
태조의 불교에 대한 신앙의 경향은 <훈요십조 訓要十條>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 제2조와 제6조에서 유일하게 도선(道詵)을 거론하였고,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를 매우 중요시하였다.
이처럼 태조가 팔관회, 연등회와 도선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특별히 후대 왕들에게까지 유촉함으로서 원래의 연등회와 팔관회는 고려에 이르러 밀교성이 짙게 가미된 불교의식으로 탈바꿈되었다.
도선의 사상에 대해서도 음양오행(陰陽五行)이나 도참으로 이해되어 왔으나, 실제로 도선의 사상적 연원과 근저는 밀교에 있었다.
따라서, 태조가 훈요 중에서 도선을 내세우고 연등회와 팔관회를 중요시하였던 것은 그의 밀교에 대한 신앙심이 돈독하였던 것이 큰 이유 중의 하나였다.
그리하여 태조는 즉위한 이듬해 개경에다 10개의 사찰을 세우면서 그 수사찰(首寺刹)인 법왕사(法王寺)의 주불로 비로자나불을 모셨다.
또 태조가 개인적으로 신앙이나 나라를 세움에 있어서 밀교적 감화력을 크게 입은 고승으로서는 광학과 대연이 있다.
광학과 대연은 신라 명랑의 법을 이어받은 밀교의 대덕들로서, 문두루법으로 태조의 건국을 도왔다.
태조는 광학·대연과의 이러한 인연을 계기로 하여 936년(태조 19) 현성사(現聖寺)를 창건하여 신인종의 근본도량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938년에는 인도의 승려인 홍범실리박일라(弘梵室哩縛日羅)가 ≪갈마단경 羯磨壇經≫을 가지고 왔을 때 왕이 양가(兩街:불교 업무를 관장하던 僧錄司의 2개 부서)로 하여금 위의를 갖추고 맞이하게 한 것도 밀교에 대한 깊은 신앙심에서 연유된 것이다.
이와 같이, 고려에서의 밀교는 위정자들의 돈독한 신앙심과 보호정책에 힘입어 초기부터 굳건한 전통의 기반이 확립되어 뒷날 역대 왕들에게 계승되어 발전적인 밀교신앙의 전통을 세우게 되었다.
목종은 1007년(목종 10) 총지사(摠持寺)의 주지 홍철(弘哲)로 하여금 ≪일체여래심비밀전신사리보협인다라니경 一切如來心祕密全身舍利寶篋印陀羅尼經≫을 총지사에서 개판하여 널리 보급하게 하였다.
목종이 이 경을 개판한 것은 “만약 이 경을 개판하여 탑 속에 봉안하게 되면 모든 재난이 소멸하게 된다.”는 사상에 근거하여, 나라의 태평과 국민의 안녕을 도모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또한 모든 국력을 기울여 이루어진 초조(初彫)와 재조 고려대장경에도 밀교의 경전들이 많이 들어 있었다.
현종 때 착수하여 문종 때 완성된 첫번째 대장경은 몽고병란 때 불타버렸으므로 그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없지만, 현재 초조장경의 것으로 확인된 몇 권의 남은 책 속에는 ≪무량문파마다라니경 無量門破魔陀羅尼經≫·≪성지세다라니경 聖持世陀羅尼經≫ 등 24권의 밀교경전이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초조장경에도 밀교에 관한 전적들이 많이 들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수기(守其)가 찬술한 고려 재조대장경의 ≪대장목록 大藏目錄≫에 의하면, ≪대비로자나경≫ 7권, ≪금강정경≫ 3권 등 순밀교에만 해당되는 경전이 191종 356권이 들어 있고, ≪금강정유가호마의 金剛頂瑜伽護摩儀≫ 1권, ≪불정존승다라니염송의궤 佛頂尊勝陀羅尼念誦儀軌≫ 1권 등을 비롯한 밀교의식의 작법(作法)에 관한 것도 20종 21권이나 들어 있다.
그
리고 충렬왕은 1275년(충렬왕 1) 왕실의 발원으로 ≪불공견색신변진언경≫ 30권을 은자(銀字)로 각판하여 현재 그 제13권이 가장 오래된 은자경(銀字經)으로 남아 있다.
1328년(충숙왕 15) 5월 충숙왕은 밀교대장경(密敎大藏經) 130권을 금서(金書)로 간행하여 세상에 펴내기도 하였다.
충숙왕은 호불왕으로서 특히 밀교에 대한 신앙이 매우 철저하였던 왕이다.
그러므로 그는 앞서 이루어진 밀교대장경 90권과 아직 정리되지 못한 40권을 다시 구하여 130권이나 되는 밀교대장경을 금서로 펴내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고려 왕실이 국력을 기울여 밀교신앙의 기초가 되는 전적들을 수집, 정리, 간행한 것은 모두가 밀교에 대한 깊은 관심과 돈독한 신앙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고려 역대왕실과 위정자들의 밀교에 대한 신앙의 실천적 모습은 여러 종류의 도량과 의식을 통하여 잘 나타나 있다.
고려시대는 80여 종류의 법회(法會)·설재(設齋)·도량 등의 불교의식이 거행되었는데, 이들 중 문두루도량·인왕도량·공작명왕도량(孔雀明王道場)·무능승도량(無能勝道場)·금광명도량(金光明道場)·소재도량(消災道場)·대일왕도량(大日王道場)·공덕천도량(功德天道場)·관정도량(灌頂道場)·만다라도량(曼茶羅道場)·제석천도량(帝釋天道場)·진언법석(眞言法席) 등과 같이 순수한 밀교의식이 매우 많았다.
또한 전적 자체는 밀교의 것이 아니지만 장경도량(藏經道場)·능엄도량(楞嚴道場) 등과 같이 밀교성이 매우 강한 의식들도 아주 많았다.
그리고 이러한 행사와 의식들이 역대왕실을 중심으로 매년 매월 거행되지 않은 때가 거의 없었다.
특히, 밀교에 대한 신앙이 더욱 극진하였던 후대의 왕들 중 그 즉위식까지도 밀교의식의 전통적 방법에 따라 거행한 경우도 있었다.
강종·원종·충렬왕·충선왕은 모두가 관정의식(灌頂儀式)에 따라 왕위에 올랐던 왕들이다.
이 관정의식은 밀교의 독특한 것으로서, 원래 인도에서 국왕이 즉위할 때 보병(寶甁)에 네 바닷물을 넣어 그것을 왕의 정수리에다 뿌리는 의식에서 채용, 표방된 것이다.
밀교에서는 보병에 오지법수(五智法水)를 넣어 스승인 아사리(阿闍梨)가 제자의 머리에 그것을 뿌려줌으로써 오랜 옛날부터 지어온 무명(無明)의 때를 씻고 자기의 성품(自性淸淨心)을 깨달아 진리의 왕이 되게 하는 의식이다.
따라서 고려 후기의 왕들이 관정법에 따라 왕위에 오름으로써 그들은 세속적인 왕의 지위를 넘어 출세간적인 진리의 왕이 되고자 하였던 강렬한 신앙과 염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 나라의 밀교사상이나 그 신앙의 형태로는 두 가지의 큰 조류가 있었다.
명랑을 효시로 한 신인(神印)의 작법계통(作法系統)과, 혜통으로부터 시작된 진언지송(眞言持誦)의 총지법이 그것인데 이들이 하나의 종파로 각각 성립된 것은 고려시대의 일이다.
원래 총지라는 말은 다라니를 뜻으로 번역한 데서 유래한다.
우리 나라에 총지법이 최초로 전래, 수용된 것은 신라 혜통이 처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총지종의 성립을 신라시대로 보고, 그 개종조를 혜통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에는 총지종이 성립되었다는 결정적 기사가 없을 뿐만 아니라, 그가 행한 백두항룡(白豆降龍)이나 병고치는 법(愈疾法)이 순밀의 총지법보다는 잡밀적 성격이 매우 짙다.
따라서 혜통은 우리 나라에 총지법의 최초 전래자로 총지종의 원조(遠祖)는 될지언정, 그 개종조는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신라시대의 총지암(摠持嵒)은 신문왕과 효소왕 때에 창건된 절인데, 고려에 와서 총지사가 되었다.
이 절에서는 1007년 ≪보협인다라니경≫이 개판되었고, 1186년(명종 16) 불정소재도량(佛頂消災道場)의 밀교의식이 거행되었다.
또한 1275년 왕실의 발원으로 ≪불공견색신변진언경 不空羂索神變眞言經≫ 30권을 은자로 찍어낸 것은 모두가 고려왕실이 다라니의 수행을 존중하였던 좋은 예들이다.
또 1157년(의종 11) 총지사의 주지가 된 회정(懷正)은 주금사(呪噤師)로서 왕의 절대적인 총애를 받았다.
그리하여 당시에 승직(僧職)과 상(賞)을 구하려는 모든 승려들은 그를 통하지 않을 수 없는 높은 권좌에 있었다. ≪고려사≫에 의하면, 그가 의종의 총애를 받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유일한 주금사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주금사라는 말은 경전에서 주력승(呪力僧)을 대력주사(大力呪師)라고 한 데서 유래한 것이지만 이러한 대력주사가 의업(醫業)에 종사하면 이를 고려에서는 주금사라고 하였다.
고려에서는 이외에도 충숙왕 때의 복산(福山), 충혜왕 때의 학선(翯仙)·천기(天其) 등을 비롯하여, 문종 때 전의시(典醫侍)에 종사한 종9품의 주금박사(呪噤博士)·주금사·주금공(呪噤工) 등 많은 밀교 계통의 주사들이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136년(인종 14) 고시의 방법도 의업식과 주금식으로 나누어 실시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주금업에 종사한 총지주사는 물론, 밀교승려들의 사회적 지위도 교단 안팎에서 점점 확고한 위치를 가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조류에 짝하여 13세기경 조유(祖猷)·혜영(慧永)과 같은 대아사리가 배출되었으며, 이때부터 강종을 시작으로 하여 모든 왕의 즉위식 때는 반드시 관정의식을 행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고종은 혈구산(穴口山)이 대일왕(大日王)의 상주처라는 백승현(白勝賢)의 말에 따라 이곳에다 혈구사를 지었으며, 꿈에 늙은 비구로부터 ≪대일경≫을 권념(勸念)하라는 지시를 받을 정도로 총지법에 대한 신앙이 철저하였던 왕이다.
이와 같은 상황과 여건으로 총지종은 고려 의종에서 고종 21년(1234) 사이에 개종된 것으로 보고 있다.
신인종의 신인이란 ‘문두루’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결인(結印)을 가리키는 것인데, 그것은 신라 문무왕 때의 명랑이 이 법으로써 당나라 병사를 물리친 것이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이 된다.
그러므로 총지종과 마찬가지로, 신라시대에 신인종이 성립되었고 그 개종조 역시 명랑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신라시대는 아직 어떠한 종파도 성립된 일이 없다.
뿐만 아니라, 이 기사를 전하고 있는 ≪삼국유사≫의 내용을 보면, “고려 태조가 나라를 세울 당시 해적이 침략해오자 신인조사(神印祖師) 명랑의 후예인 광학과 대연 두 대덕을 청하여 이를 물리쳤다.
그리하여 태조는 태조 19년(936) 현성사를 세워 신인종의 근저가 되게 하였다.”라고 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신인종은 936년 그 중심사찰인 현성사가 창건되는 것을 계기로 하여 개종되었다고 하겠다.
이 종파는 국난타개라는 신라적 전통을 유지, 계승하면서 그 신앙은 고려일대를 통하여 계속 발전하였다.
1047년(문종 1) 7월 동경(東京 : 경주)의 사천왕사에서 적병을 물리치기 위하여 27일 동안 개설한 문두루도량을 위시하여, 숙종 6년(1101) 4월과 예종 3년(1108) 7월 진정사(鎭靜寺)에서, 예종 4년 4월 흥복사(興福寺)·영명사(永明寺)·장경사(長慶寺)·금강사(金剛寺)에서, 고종 4년(1217) 4월과 12월 현성사에서 각각 문두루도량을 개설한 사실이 ≪고려사≫에 보이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고려의 신인종과 그에 대한 신앙이 계속 유지, 발전되어왔음을 입증하는 좋은 자료가 되거니와, 역대의 많은 왕들이 신인종의 근본도량인 현성사를 많이 찾았음도 이러한 사실과 결코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1130년(인종 8) 4월 나라의 대신들이 경비를 모아 현성사와 영통사(靈通寺)에서 의식을 베풀고 나라를 위하여 복을 빌었다.
이 뒤를 이어 명종·고종·원종·충렬왕·충숙왕·공민왕 등이 현성사를 찾아 의식을 거행하였던 것은 모두가 문두루도량과 간접·직접으로 많은 관련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이처럼 고려에서는 왕실을 중심으로 신인비법에 깊은 신앙과 많은 관심이 있었고, 그것을 국난타개의 최고비법으로 믿고 있었다.
고려시대에 행하여진 밀교의 행사로는 상당히 많은 종류가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인왕도량은 제일 많이 행하여졌으며 깊은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인왕도량은 백고좌도량(百高座道場), 백좌도량 등 여러 가지로 불리우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모두가 ≪인왕호국반야바라밀다경 仁王護國般若波羅蜜多經≫의 사상을 근본으로 하는 점에서는 같은 것이다.
현재 전하고 있는 ≪인왕경≫에는 구마라습(鳩摩羅什)이 번역한 구역본과 불공이 번역한 신역본이 있는데, 고려에서 주로 사용한 것은 불공이 번역한 신역본이다.
이 ≪인왕경≫을 고려에서는 나라를 보호하고 국민을 편안하게 하는 최승의 법으로 신앙하였다.
특히 ≪인왕경≫ 제5 호국품(護國品)의 교설을 근거로 하여 역대 왕들은 많은 인왕도량을 개설하여 나라와 국민의 안녕을 부처님께 빌었다.
≪고려사≫ 세가편(世家篇)만 보아도 1012년(현종 3) 5월 내전에서 ≪인왕경≫을 강설한 것을 비롯하여 1373년(공민왕 22) 4월까지 무려 122회나 인왕경의식이 거행되었는데 그 대부분이 인왕도량이었다.
특히 1020년(현종 11) 5월의 기사에서 “내정(內庭)에 100개의 사자좌를 마련하고 3일 동안 인왕경을 강설하였으며, 그것을 매년 상례로 하였다.”라는 기록이 있음을 볼 때, 고려 인왕경 의식의 시행횟수는 122회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많은 ≪인왕경≫ 의식이 국가적 행사로 개설되었던 것은 인왕경을 “세상을 구제하는 좋은 약이며, 나라를 지키는 최고의 법(求世之良藥 護國之勝門)”으로 믿고, 그러한 신앙을 바탕으로 인왕도량을 개설함으로써 국가 사회의 여러가지 환란을 극복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왕경신앙이 왕실을 중심으로 한 궁중이나 사원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장안에서는 경행(經行)이라 하여 국민들의 이익과 복을 기원하는 행사로 ≪인왕경≫을 받들어 모시고 보행독송(步行讀誦)하는 의식이 1046년(정종 12)부터 매년 정기적으로 행하여졌다.
이 경행은 고려 인왕경신앙의 특유한 모습으로서, 그것이 일반농민들과 같은 서민층에서는 행독(行讀)이라는 의식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즉, 시골의 농민들은 천재지변이나 기타 우환이 있으면, 마을 사람들이 모여 ≪인왕경≫을 받들어 모시고 거리를 행진하면서 이 경을 독송하여 모든 재난이 물러가고 복이 오기를 기원하였다.
이와 같은 행독이나 경행의식은 모두 인왕도량과 그 사상적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다.
이처럼 고려에서는 승려와 속인은 물론, 왕실과 촌민(村民)에 이르기까지 ≪인왕경≫에 대한 신앙이 가장 열렬하였다.
더욱이, 그러한 신앙이 불공의 번역본을 근본으로 하였으며, 밀교적 의식법에 따라 전개되었던 점에서 인왕도량을 통하여 고려 밀교의 발전적 모습의 일단을 찾아볼 수가 있다.
고려에서 인왕도량 다음으로 널리 행하여졌던 밀교의식은 금광명도량이다.
금광명도량이 주로 나라 안의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하여 널리 행하였던 의식이라고 한다면, 인왕도량은 주로 군사적인 목적에서 나라 밖의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이러한 목적을 띠고 개설된 금광명도량은 ≪금광명최승왕경 金光明最勝王經≫을 근본으로 삼아 개설한 도량으로, 고려에서는 금광명경도량(金光明經道場)·금광경도량(金光經道場)·금경도량(金經道場) 등으로 불렸다.
그리하여 1041년(정종 7) 5월부터 1389년(공양왕 즉위년) 9월까지 금광경의 도량의식이 모두 37회나 개설되었다.
≪금광명경≫의 사상에서 유래된 밀교의식으로는 금광명도량 외에도 공덕천도량과 사천왕도량(四天王道場)이 있다.
공덕천도량은 ≪금광명경≫ 권6 공덕천품(功德天品) 제13에 사상적 근거를 둔 것으로, 인간사회에 복과 재물을 키워준다는 데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고려에서는 이러한 도량들이 많이 개설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고려에서는 밀교도량으로 소재도량이 있었다.
물론, 고려시대에 행하여진 80여 종류의 의식들이 모두가 소재(消災)의 뜻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좁은 의미에서의 소재도량은 ≪불설치성광대위덕소재길상다라니경 佛說熾盛光大威德消災吉祥陀羅尼經≫과 ≪불설대위덕금륜불정치성광여래소제일체재난다라니경 佛說大威德金輪佛頂熾盛光如來消除一切災難陀羅尼經≫에 의거하고 있다.
이 밖에도 밀교관계 도량으로는 1367년 6월에 개설된 진언법석과 1264년(원종 5) 6월의 대일왕도량, 1110년 4월의 공작명왕도량 등이 개설됨으로써 고려에서의 밀교에 대한 신앙의 내용이 더욱 풍부하고 발전을 보게 되었다.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李成桂)와 그 후대 왕들은 정책적 이념으로 숭유배불정책(崇儒排佛政策)을 표방하여, 불교를 탄압, 종단을 통폐합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시대의 신인종과 총지종도 1407년(태종 7) 11종을 7종으로 폐합하면서 총지종과 남산종(南山宗)을 합하여 총남종(摠南宗)이 되게 하고, 중도종(中道宗)과 신인종을 합하여 중신종(中神宗)이 되게 하였다.
또 1424년(세종 6) 태종 이후 7종이던 것을 다시 선교양종으로 폐합하게 되면서, 총남종은 조계종(曹溪宗)·천태종(天台宗)과 함께 선종(禪宗)으로 되고, 중신종은 화엄종(華嚴宗)·자은종(慈恩宗)과 함께 교종(敎宗)으로 폐합되었다.
그리하여 밀교의 신인·총지의 양종은 그 명맥마저 없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태종은 1401년 궁중의 송주승(誦呪僧)을 파하였고, 1417년 ≪진언밀주경 眞言密呪經≫이나 ≪다라니집 陀羅尼集≫ 등 밀교관계 서적을 불살라버리게 하고 청우(請雨)나 시식수법(施食修法)에 관한 것들만 남겨 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탄압을 가하던 태종은 태조가 죽자 진언법석·화엄법석 등을 빈전(殯殿)과 각 사찰에서 개설하게 하였으며, 칠칠재(七七齋) 및 소상재(小祥齋)와 대상재(大祥齋)를 개설하게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부왕의 대사를 당하여 마음에 시비를 계교할 겨를이 없다.”는 정책적 명분론을 내세웠다.
따라서 태종이 밀교의 각종 서적을 불살랐던 것은 유교적 풍토에 따른 정책적인 조처에 불과하였으며, 그 내면의 신앙에는 밀교가 깊게 자리잡고 있었다고 하겠다.
태조는 1393년 2월 숙위사졸(宿衛士卒)들에게 명하여 궁궐의 뜰에서 ≪신중경 神衆經≫ 소재주(消災呪)를 염송하게 하였으며, 그 재위연간 동안 밀교의 소재도량을 14회나 개설하였으며, 1395년 4월 총지사와 현성사에서 불사를 크게 일으키기도 하였다.
1400년(정종 2) 3월 정종은 현성사에서 문두루도량을 개설하였고, 세종은 1450년 1월 공작재(孔雀齋)를 개설하게 하고 ≪불정심다라니경≫을 개판하여 널리 보급시켰다.
또 1451년(문종 1) 5월과 1457년(세조 3) 7월 공작재를 개설하였는데, 그것은 밀교계통의 ≪공작명왕경≫의 신앙에서 유래된 것이다.
이 밖에도 조선시대 일대를 통하여 많은 밀교관계 전적들이 개판되어 널리 신앙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개간된 밀교의 전적으로는 제일 먼저 ≪진언집≫을 들 수 있다.
≪오대진언 五大眞言≫은 42수진언(四十二手眞言)·신묘장구대다라니, 수구즉득다라니, 대불정다라니(大佛頂陀羅尼), 불정존승다라니 등을 한데 모은 것인데, 이것은 1458년(세조 4)과 1531년(중종 26), 1535년, 1634년(인조 12)에, 또 ≪천수경 千手經≫은 1476년(성종 7)과 1496년(연산군 2) 등 모두 8차에 걸쳐서 개판되었다.
≪제진언집 諸眞言集≫은 1569년(선조 2) 전라남도안심사(安心寺)에서 개간된 것을 비롯하여, 1658년(효종 9) 강원도신흥사(神興寺)에서, 1688년(숙종 14) 묘향산 불영대에서 개판되었으며, 1777년(정조 1)과 1800년에도 각각 개간되었다.
이 밖에도 1560년(명종 15) 장우사(藏于寺)에서 개판된 ≪성관자재구수육자선정 聖觀自在求修六字禪定≫ 1권, 1784년 불영산 수도암(修道庵)에서 개판된 ≪비밀교 祕密敎≫ 등 많은 밀교관계 전적들이 조선시대 초기부터 말기에 이르기까지 개판되어 널리 사용되고 지송되었다.
이와 같이 많은 종류의 진언집이나 밀교관계의 전적들이 종단폐합의 이전보다 그 이후에 더욱 많이 개판되고 있다.
그것은 결국 조선시대에 있어서 밀교는 종단폐합이나 숭유배불이라는 정책과는 관계없이 왕실에서부터 일반 서민에 이르기까지 열렬한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밀교는 그 발전된 내용면에서 몇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즉, 교리적인 측면에서의 발전보다는 실천면이 강조된 점이나, 실천에 있어서도 밀교 본래의 출세간적인 즉신성불의 목적보다는 병을 고치고 전쟁을 막는 등의 세간적 목적달성을 위하여 신앙되었던 점이 그것이다.
또 그러한 목적달성을 위하여 채용된 수행법이 신인비법이나 삼밀수행(三密修行)에서도 특히 진언지송(眞言持誦)만을 존중하여 신인종과 총지종이라는 종파를 형성하게 된 것도 그 특성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 밀교의 더욱 두드러진 점은 밀교가 타종의 교학과 서로 밀접한 융합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제 그러한 모습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밀교와 정토신앙
밀교와 미타정토(彌陀淨土)는 인도에서 대승불교운동의 양대소산으로서, 그 성립 당시부터 서로 무리없이 교섭될 수 있는 역사적 배경과 사상적인 조건 속에서 출발되었다.
그러므로 고려시대 법화신앙과 미타신앙을 주축으로 하여 백련사(白蓮社)를 결사하고 천태종풍(天台宗風)을 크게 떨쳤던 요세(了世)는 매일의 일과로서 준제주송(准提呪誦) 1,000편과 미타염불 1만 번을 하여 수행을 하였다.
이러한 요세의 수행을 통하여 천태사상과 밀교와 정토신앙이 서로 무리없이 접근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이러한 경우 밀교의 진언과 정토의 염불이 외형적으로는 무리없는 접근으로 파악되지만, 그것이 개인적 깨달음의 내용에서는 접근이 아닌 원융성(圓融性)으로 승화되는 것이다.
따라서, 요세가 진언염송과 미타염불을 통하여 수행일과를 하였다는 것은 밀교와 정토의 조화로운 융섭적 신앙(融攝的信仰)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고려 밀교의 조류는 요세의 경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고, 요세와 거의 같은 시대에 팔공산 거조사(居祖社)에 있었던 원참(元旵)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원참은 1298년 ≪현행서방경 現行西方經≫을 집록하여 미타정토의 왕생(往生)을 아미타본심미묘진언(阿彌陀本心微妙眞言)의 염송만으로 충분히 가능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
그리하여 고려나 조선에서는 밀교가 진언을 매체로 하여 정토신앙과의 상호교섭관계를 밀접하게 맺게 되었다.
≪현행서방경≫은 1448년 김천 직지사(直指寺)에서 개간된 것을 비롯하여, 1531년 하동 쌍계사(雙磎寺), 1556년 황해도 신광사(神光寺), 1710년 하동 칠불암(七佛庵)에서 각각 개판되었다.
그리고 선사였던 석실(石室)은 실제로 이러한 신앙을 널리 펴는 데 힘을 기울였던 고승이다.
그리고 1668년(현종 9) 보현사(普賢寺)에서 개판된 ≪진언집≫을 비롯하여, 조선시대에 개판되어 널리 사용되었던 ≪염불작법 念佛作法≫·≪일용작관법 日用作觀法≫·≪비밀교≫ 등에는 무량수불설왕생정토주(無量壽佛說往生淨土呪)를 비롯하여 결정왕생정토진언(決定往生淨土眞言)·아미타불심주(阿彌陀佛心呪)·무량수여래근본다라니(無量壽如來根本陀羅尼)·무량수여래심주(無量壽如來心呪) 등 많은 정토관계의 진언이 있어 실제 의식상에 응용되고 있었다.
1644년 동래범어사(梵魚寺)에서 개판된 ≪불정심관세음보살대다라니경 佛頂心觀世音菩薩大陀羅尼經≫의 간기에서 ‘이 다라니법문은 수양의 미묘한 문이요, 정토왕생의 첩경’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우리 나라에서의 밀교는 고려 말기부터 정토신앙과 깊은 관계를 맺게 되었고, 그것은 점점 시대가 흐름에 따라 개인의 신앙에서는 물론이요, 교학과 사상면에서도 서로가 깊은 융합적인 관계로까지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정토신앙이 밀교화된 ≪현행서방경≫ 등이 저술되어 조선시대에 널리 신앙되었으며, 많은 밀교의식에서뿐만 아니라 일반 불교의식에서도 밀교화된 정토관계 진언이 사용되었다.
이러한 밀교계의 현상은 한국의 밀교와 정토가 신앙, 교학, 사상, 역사의 측면에서 원융한 습합을 이루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밀교와 선 또한 정토와 마찬가지로 신라 말기부터 깊은 교섭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신라말 도선은 구산선문(九山禪門) 중의 동리산(桐裏山) 제2세로서 밀교의 여러가지 작법의식(作法儀式)을 선의 수행법에 응용하여 불교의 일반화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전통 속에서 고려의 요세는 매일의 일과에서 선을 하고 남은 시간에 진언지송과 미타염불을 하였거니와, 고려 말에는 선수행의 방편인 1,700공안(公案)이 모두 아자(阿字)에서 나온 것으로 보았다.
선과 밀교의 융섭은 조선시대에 와서 더욱 발전된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다.
≪능엄경 楞嚴經≫은 ≪금강경≫과 더불어 선종의 소의(所依:한 종파의 근본을 이룸.)가 되는 경으로서, 이 경전에는 능엄주가 수록되어 있다.
1668년 묘향산 보현사에서 계정(戒淨)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모든 진언들을 모아 ≪진언집≫을 간행하였는데, 여기에 정본능엄주(正本楞嚴呪)가 들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능엄주는 선승들도 아침 저녁의 의식 때 염송하였으며, 밀교에서도 이 능엄주를 많이 지송하였다.
이처럼 선과 밀교가 서로 융섭된 관계로 발전하자, 휴정(休靜)은 선가의 의식집인 ≪운수단 雲水壇≫을 편찬하였다.
그리고 선을 교설할 때의 의식집인 ≪설선의 說禪儀≫를 저술하여 밀교의 각종 의식법과 함께 필요한 진언까지도 적절히 도입하여 선을 수행하는 데 큰 도움이 되게 하였다.
이와 같이 선과 밀교는 신라 말기부터 서로 깊은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으며, 고려와 조선시대에 와서는 그러한 관계가 교학적이나 의식면은 물론, 신앙 속으로까지 융섭되어 어느 일면에서는 서로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티베트 불교
티베트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7세기초 손챈감포 왕 때였다.
그러나 새로운 종교를 반대하는 세력도 만만하지 않아 많은 우여곡절을 겪다가 파드마삼바바(蓮華生)가 인도로부터 밀교의 교의와 의례를 가지고 온 뒤 많은 이적을 행하여 티베트 승가를 형성하면서 불교는 자리를 잡게 되었다.
그는 티베트 불교의 가장 오래된 종파인 닝마파의 원조로 추앙받고 있다.
8세기말에는 인도 승려뿐만 아니라 중국 승려도 티베트에서 포교 활동을 했다.
794년경에는 왕 앞에서 마하연(摩訶衍)이라는 사람에 의해 주도되는 선불교 계통의 중국 승려들과, 파드마삼바바를 초청한 적호(寂護 Śāntaraksita)에 의해 대표되는 인도 불교파 사이에 논쟁이 벌어져 후자가 승리했으며, 그로부터 티베트 불교는 인도 불교의 지배적 영향 아래 놓이게 되었다.
티베트에는 불교 이전부터 '본'이라는 샤머니즘적 토착 신앙이 있었으며 밀교의 신비적 주술 의례는 점복, 예언, 주술, 등을 신봉하는 토착신앙과 잘 조화되어 티베트 불교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밀교와 본 신앙이 합쳐진 티베트 특유의 불교를 라마교라 부르기도 한다.
'라마'라는 말은 스승이라는 뜻이다.
9세기 렐파첸 왕 때에는 대대적인 체계적 역경사업이 추진되어 산스크리트 원어에 비교적 충실한 표준화된 티베트어 번역이 이루어졌다.
11세기에는 인도의 고승이나 혹은 인도 유학 티베트 승들에 의해 새로운 종파들이 성립되었다.
인도 벵골 지방으로부터 전통적 불교 사상과 밀교에 모두 정통한 승려 아티샤(982~1054)가 와서 티베트 불교를 중흥시켰으며, 그의 제자 돔은 카담파라는 종파를 창시했다.
티베트 승려 독미는 인도에서 밀교를 공부하고 돌아와 사캬 사원을 창건했으며 사캬파의 주지들은 12, 13세기에 걸쳐 몽골의 지원하에 세속적 권력까지 행사하게 되었다.
주지들은 결혼을 했으며 주지직은 세습되었다.
인도 날란다사의 나로파 밑에서 밀교를 공부하고 돌아온 말파(1012~97)는 카귀파를 창시했다. 그의 후계자 밀라레파(1040~1123)는 티베트 최고의 시인이요 성자로서 널리 추앙받고 있다.
티베트 대장경은 14세기 부퇸(1290~1364)에 의해 수집·편찬되었으며 카귤과 텐귤 2부분으로 되어 있다.
카귤에는 율·경·탄트라가 들어 있으며, 텐귤에는 논서·주석서와 문법·의학·점성술 등에 관한 서적들이 포함되어 있다.
14세기의 티베트 불교는 매우 세속화되고 도덕적인 타락을 보임에 따라 총 카 파(1357~1419)에 의해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총 카 파는 당시 밀교의 극단적인 퇴폐적 측면을 개혁하고 승가에 엄격한 계율준수를 요구했다.
그는 밀교와 전통적인 대승과 소승을 균형 있게 취하도록 했다.
총 카 파에 의해 게룩파라는 새로운 종파가 창시되었으며 그후 게룩파는 티베트 불교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특히 그의 조카이자 게룩파의 제3대 지도자인 게뒨 둡파(1391~1475)는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간주되었으며 첫번째 달라이 라마('큰 라마'라는 뜻)가 되었다.
그후로부터 달라이 라마가 죽으면 49일 후에 태어난 아이들 가운데서 그의 후계자 물색이 시작된다.
다음 달라이 라마는 그 전 달라이 라마가 환생한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제3대 달라이 라마(1543~88)는 몽골을 불교로 개종시켰으며, 제5대 달라이 라마(1617~82)는 몽골군의 도움으로 전 티베트를 정치적으로까지 통치하게 되었다.
현재 티베트 불교의 최고 지도자는 제14대 달라이 라마로서 티베트가 중국 공산화되기 1년 전인 1950년에 즉위했으나, 1959년 반(反) 중국 항거 때 인도로 망명하여 북인도에서 수만 명의 티베트 불교 신자들의 지도자로서, 그리고 동시에 세계의 정신적 지도자 중의 한 사람으로서 추앙받고 있다.
라마교는 티베트 이외에도 몽골·시킴·부탄 등에도 퍼져 있다.
비밀불교(密佛敎) 또는 밀의(密儀)종교의 약칭. 진언(眞言)밀교라고도 하는데, 일반의 불교를 현교(顯敎)라 하는 것에 대한 대칭어이다.
밀교는 7세기에 대승불교의 화엄(華嚴)사상 ·중관파(中觀派) ·유가행파(瑜伽行派)사상 등을 기축으로 하여 인도교의 영향을 받아 성립하였다.
보통 밀교는 미신적인 주술(呪術) 체계로서, 성력(性力:sakti)을 숭배하는 타락된 불교로 인식되고 있으나, 그것은 힌두교의 탄트라(tantra) 신앙과 결합되어 말기에 나타난 좌도밀교(左道密敎)를 가리킬 따름이다.
정통적인 밀교사상은 개체와 전체의 신비적 합일(合一)을 목표로 하며, 그 통찰을 전신적(全身的)으로 파악하는 실천과 의례(儀禮)의 체계를 갖는다.
밀교에 해당하는 인도의 호칭은 바지라야나(vajra-yāna:金剛乘)인데, 이것은 후기 대승불교를 대표한다.
바지라야나, 즉 금강승은 실재(實在)와 현상(現象)을 자기의 한몸에 융합하는 즉신성불(卽身性佛)을 목표로 한다.
이는 ‘다양한 것의 통일’이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그 통일원리는 공(空)과 자비(慈悲)의 일치[空悲無二], 즉 반야(般若:지혜)와 방편(方便)의 일치로 나타난다.
이러한 금강승에는 사크티적(的) 경향, 즉 성력적 성격은 없다.
그러나 이슬람[回敎] 침입(약 1027∼1087) 이후 성립된 구생승(俱生乘:Sahaja-yāna)과 시륜승(時輪乘:kālacakra-yāna), 그리고 금강승에서 갈라져 나온 탄트라승(Tantra-yāna), 길상승(吉祥乘:Bhadra-yāna) 등은 정적인 요소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밀교를 성력적인 뉘앙스를 갖는 탄트라 불교로 부르는 것은 정확한 호칭은 아니라고 하겠다.
인도에서 티베트 ·네팔 등으로 전파되어 오늘날도 행해지고 있는 것은 구생승 계통이다.
그러나 중국 ·한국 ·일본 등의 밀교는 토착신앙과 결합된 요소가 많아도 성력적 요소는 없다.
일반적으로 밀교에 대한 관점은 현세적 욕망을 처리하는 주술조직(呪術組織), 또는 극단적인 신비주의 속에서 발달한 상징철학으로 구분된다.
전자를 잡밀(雜密, 또는 呪密)이라 하여, 금기(禁忌) ·부적(符籍) ·주법(呪法) 등으로 표현하는 데 반해, 후자는 순밀(純密, 또는 通密)이라 부르는데, 7세기 후반에 차례로 성립된 것으로 여겨지는 《대일경(大日經)》과 《금강정경(金剛頂經)》이 기본경전이다.
밀교의 두 가지 세계관인 태장계(胎藏界)와 금강계(金剛界)는 이 두 경에 의해 설명된다.
1. 밀교.진언종의 의미
흔히 [밀교 密敎]란 어떤 특수한 종교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 속의 한 흐름으로서, 즉 대승불교의 철저한 후계자로서 오히려 대승불교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밀교입니다.
뒤에 다시 언급하겠지만, 밀교가 힌두교 등 인도의 제종교와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은 물론이지만, 불교의 흐름 속에서 특수한 발전을 보아온 하나의 [비밀불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밀 密]이란 비밀을 의미합니다.
[비밀]이라는 말의 산스크리트어(梵語)는 구햐 guhya라는 말이 흔히 쓰이는데 그것을 번역하여 비밀, 또는 밀이라고 하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밀교] 또는 [비밀불교]는 그 의미하는 바가 종교적 체험의 깊이를 강조하는 것이기 때문에 비밀교라든가 비밀불교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깊고 오묘한 가르침]이라고 하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한 밀교라고 할 때는 곧 현교(顯敎)라고 하는 말이 대조적으로 말해집니다.
사실, 홍법대사(弘法大師) 쿠카이(空海) 이후의 일본의 진언밀교에서는 상대적인 의미로 현교와 밀교라고 하는 말이 쓰여지고, 현교에 대하여 밀교가 어떠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가를 강조하려고 한 것입니다.
여기에 관계된 것으로 쿠카이가 저술한 것, 또는 그 이후의 천태종의 학자들이 쓴 것, 그리고 헤이안(平安) 말기에 가꾸반(覺종;興敎大師)이 현밀차별을 논한 것 등 대단히 많이 있는데 그러한 것을 통하여, 현교에 대한 밀교의 특색이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 상당히 폭넓게 연구되고 있습니다.
이점은 밀교사상편에 들어가서 좀더 구체적으로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인도에 있어서의 유파의 명칭
밀교는 인도에서 발달하여 중국과 한국, 일본에 전해지고, 또한 티벳(西藏)에도 전해져서 각자 독자적인 전개를 보이고 있습니다.
먼저 인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호칭은 [바즈라.야나 vajrayana]라고 하고 금강승(金剛乘)으로 번역합니다.
또한 자신들이 대승의 발전 속에 더욱 깊고 크게 발전한 것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바즈라.마하야나 vajra-mahayana], 즉 금강대승(金剛大乘)이라고 과칭하기도 합니다.
밀교의 근본경전인 {대일경}에도 대승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의 대승은 {대일경}이전의 대승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그보다 발전한 형태로서의 [우리 대승]이라는 의미의 대승입니다.
또한 진언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강조하여 [만트라야나 mantrayana], 진언승(眞言乘)이라는 호칭도 있습니다.
그리고 밀교를 서양에서는 [탄트릭 부디즘Tantric Buddhism], [에소테릭 부디즘 Esoteric Buddhism]이라고 하는데, 7세기 이후부터 밀교 최후의 무렵(12세기경)까지의 밀교문헌을 탄트라Tantra라고 하는 것에 근거하여 밀교를 탄트라의 불교, 탄트릭 부디즘이라고 한 것 입니다.
인도에서 성전을 나타내는 언어 수트라 sutra(팔리어;sutta)를 불교에서는 경(經) 또는 계경(契經)이라고 번역합니다.
본래 그것은 [날실(縱絲)]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탄트라도 본래는 [씨실(橫絲)]이라는 의미입니다.
탄트라란 <넓게 한다>는 의미의 탄tan으로 부터 나온 말이라 하여 [그것에 의하여 지혜가 넓혀지는 것] 또는 [모든 것을 한데 모은 것], [한 번 만들어진 것이 많은 사람에게 이익을 주는 것, 이것이 탄트라]라고 확대 해석하기도 합니다.
불교성전에서 수트라라고 하면 불설(佛說)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논사(論師)가 설한 것은 논서(論書)라고 합니다.
그것에 대하여 탄트라는 역시 수트라와 같이 경전이지만 [불설]이라고 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르침에는 다름이 없지만 수트라는 사상적(思想的)인 내용이 풍부한 데 비하여 탄트라는 실천적인 면에 보다 중점을 두고 있다는 것으로 특징 짓기도 합니다.
아무튼 수트라든 탄트라든 진리를 문자로 기록하여 남기는 것을 기계로 옷감을 짜는 것에 비유하여, 씨실과 날실의 교차에 의하여 우주의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고 하는 발상이 깔려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좀더 부연한다면 밀교는 독특하고 복잡한 수법(修法)과 관법(觀法)을 하고 있는 것이 현교(顯敎)의 수트라와 다른 점이라 하겠습니다.
그에 관한 의례(儀禮;修法의 規則과 方法)을 설한 문헌을 [의궤(儀軌)]라고 하는데, 그러한 여러 가지 종교적인 실천을 내용으로 하는 불교문헌이라는 의미로 탄트라라고 하는 말이 사용되게 된 것 입니다.
이와 같이 탄트라는 본래 사상이나 철학을 설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대우주 즉 절대 세계와 소우주 즉 인간 세계가 본래 일체 (一體)라는 생각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지향하는 실천의 도(道), 즉 수도의 방법(修法)을 분명히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읽거나 듣거나 하더라도 혹은 내용을 안다든가 이해한다고 해도 전혀 의미를 지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탄트라는 오로지 그것에 따라 행동하고 실천함으로써 비로소 본래의 의의를 완성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같은 불설(佛說), 즉 경전이면서도 수트라라고 하지 않고 탄트라라고 하게 된 것입니다.
1. 밀교의 원류 ---- 인도 고대의 베다종교
밀교경전의 성립을 고찰할 경우, 맨 먼저 밀교의 기원이라고 하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밀교는 석존이 설한 것이 아니다 라든가 석존시대에 있었는가 없었는가 하는 논의가 최초에 대두되게 되는데, 이 단원에서 말하고자 하는 밀교의 원류라는 것은 실은 인도의 고대 베다(Veda) 종교 속에 나타나고 있는 밀교의 한 요소를 지적하고자 합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 하나의 특징은 만트라(mantra;呪文)를 외우고, 신들에게 양재초복(攘災招福), 즉 재앙을 없애고 행복을 가져올 수 있도록 기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베다가 후에 네 가지 베다로 발전한 것 가운데 특히 아타르바베다(Atharva-veda)에 식재(息災).주저(呪詛) 등의 주법(呪法)으로 신들에게 기도하는 것이 설해져 있습니다.
더우기 바라문교의 성립시대가 되면 그런 신들에 대한 기원이 한층더 왕성하게 행해지고 있습니다.
이른바 다신교(多神敎) 시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들에게 기원할 때에 만트라를 외우는 것은 나중에 불교 속의 밀교에서도 형식상으로는 그와 같이 행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베다종교나 바라문교에서 신앙의 대상으로 되는 신과, 불교의 흐름 가운데 있는 밀교에서 신앙되고 있는 제존(諸尊)과는 당연히 차이가 있지만, 자신의 생활 속에서 원망(願望)을 이루고 싶어하는 인간의 심정은 시간을 초월하여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 입니다.
특히 인도인들은, 불교 이외의 사람들도 당연히 현세이익적인 소망이라고 하는 것은 있었던 것이고, 그러한 의미에서 공통적인 원류를 갖습니다.
다른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화천공양(火天供養)의 호마법(護摩法)도 그 기원은 바라문교에 있습니다.
그것이 밀교 속에 받아들여져서 마침내 진언종에서도 호마법이 성하게 수행되고 있는 것입니다.
2. 불교 속에서의 밀교의 발전과정
원시불교
다음에 밀교가 발전하는 과정을 간단히 살펴보면, 밀교는 석존시대부터 손제자의 시대(근본불교시대)에 그 싹이 있었다고 지적할 수가 있습니다.
근본불교경전 속에 이미 석존은 세속적인 주술이나 주법. 주문을 외우거나 해서는 안된다고 금지한 부분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자들 속에서는 재난을 없애고 행복을 구하는 현세이익적인 마음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독을 없애거나 아픔을 치료하는 것, 예를 들면 이빨이 아플 때 치통을 낫게하는 주문을 외운다든지 또는 독사나 독충을 쫓기 위해서 방호주(防護呪;parita)라고 하는 주문을 외워서 재해를 면하는 것은 허용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어느 시대이든 무언가에 의존해서 몸의 위험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무언가에 의존하고 싶어하는 것이 있으면, 그것이 정도를 넘지 않도록 한다든가 또는 그러한 형태를 견지하면서 정신적으로 안정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이 원시불교의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밀교의 기원을 원시불교에서의 주법이라든가 방호주(파리타)의 존재 등 다만 이와같은 주술의 개재(介在)에서만 찾고 후에 발달된 고도로 정신적인 밀교를 다만 [순화]의 한마디로서만 설명한다면 그것은 자가당착이라고 학계에서 지적하고 있으며, 따라서 밀교의 기원을 주술적인 요소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밀교가(密敎家) 자신이 대승불교도로서 자인하고 있듯이, 역사적으로든 교리사상적으로든 철저하게 대승불교를 후계하고 발전시킨 것이 곧 밀교이다고 하는 것이 최근의 학계에 정설로 되어 있음을 밝혀 둡니다.
부파불교에서 대승불교, 밀교에로
부파불교에서 대승불교의 중기까지는 제법 긴 시간이지만 그 시대에 밀교경전은 점점 많이 성립되었습니다.
경전이 성립했다는 것은 그것이 널리 보급되어졌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들어지기만 한 것이 아니고 만들고 보급되어 밀교를 믿는 사람, 실천하는 사람이 많아지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대승불교의 후기가 되면 더욱더 급속히 밀교경전이 많이 성립되어 인도불교사에 있어서 이른바 밀교시대에 돌입하게 되는 것입니다.
밀교경전의 성립과정
밀교경전의 성립과정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경전의 수, 번역연대를 기준으로 하여 도표를 만들어 보는 것이 이해하기 쉬우리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인도의 밀교이지만 인도의 자료든지 인도의 문헌에서는 대단히 파악하기 어렵기 때문에 부득이 중국에서 번역된 한역불전(漢譯佛典) 속에 있는 밀교경전을 분류하여 역으로 인도밀교의 성립과정을 추측하는 방법입니다.
재 {대정신수대장경}(100권)이라고 하는 방대한 대장경에서는 4권(제18,19,20,21권) 속에 밀교부로 수록되어 있고, 그밖에 반야부 보적부 대집부 등에도 밀교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는 경전들이 편집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는 아주 많은 부수를 밀교경전이라 하고 그 경전과 번역자, 년대를 분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경전의 번역년대와 경전의 수를 기준으로 하여 인도불교사를 추정해 보면 위와 같은 표가 되는 것입니다.
중국에서 삼국시대의 오吳 시대에 네 가지 정도의 밀교경전이 역출되고 있습니다.
결국 중국에 소개되고 있다는 것은 이미 그들의 밀교경전이 성립되어 있다는 것이 됩니다.
그로부터 서진 시대에 두 가지, 동진 시대에 18, 남북조 시대에 27, 수 시대에 10, 당의 초기부터 중기 무렵이 되면 밀교경전의 수는 급격히 많아지게 됩니다.
현장(玄 ?)도 의정(義淨)도 밀교경전을 역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초당 시대에 많은 번역자에 의해서 역출된 밀교경전의 수를 세어보면 63종류 정도 됩니다.
당의 중기 무렵(中唐時代), 700년대가 되면 선무외(善無畏)삼장에 의해서 {대일경}이 번역되고, 금강지(金剛智)삼장에 의해서 {금강정경}이 번역됩니다.
그리고 조금 늦게 불공(不空)삼장이 거듭 금강정계의 밀교경전을 많이 번역했습니다.
이렇게 하여 이들에 의해서 비로소 중국밀교가 중국불교의 한 종파로써 성립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시대의 역경은 거의 200가지에 달합니다.
더군다나 당의 말기(後唐) 무렵에도 아직 밀교경전의 역경이 계속되어 37종류 정도의 경전이 더 역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대시대(五代時代)라고 하는 혼란의 시대가 있고 뒤이어 송나라가 됩니다.
그 송대의 초기에 밀교경전이 120종류나 번역되고 있습니다.
한역(漢譯)은 1030년 쯤에 끝나버리지만 인도밀교는 그 후에도 계속됩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인도밀교는 이슬람교도에 의해서 무참하게 전부 파괴됩니다. 비크라마시라사(Vikramasira寺)라고 하는 밀교의 가장 큰 사원이 그때 철저히 파괴되어, 밀교가 완전히 인도에서 소멸되어 버리는 때가 1203년쯤이고, 이것을 인도밀교의 종말이라고 합니다.
한역경전을 통해서 본 인도밀교라는 것은 대략 이런 과정으로 발달.변천해 왔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강물의 흐름에 비유하면 좁은 개울이 흘러흘러서 점점 크고 넓은 강물이 되듯이 인도불교의 최후는 밀교시대로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대승불교는 점점 쇠퇴해져서 마침내 밀교 속에 흡수되어져 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밀교는 대승불교의 철저한 후계자로서 불교의 오랜 흐름과 함께 하는 이러한 긴 역사를 가지고 있고, 이들 많은 밀교문헌을 총칭하여 특히 [밀교경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밀교경전에 설해진 밀교적인 것
밀교경전에 설해져 있는 내용의 특징으로는 우선 [진언(眞言)] 또는 [다라니]가 많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진언은 산스크리트어 [만트라 mantra]의 번역으로 진실하여 거짓이 없는 말이란 뜻입니다.
어원적으로는 <사념한다>는 뜻의 [만man]과 <그릇(器)>의 뜻을 지닌 [트라tra]로 이루어졌습니다.
이것에 의해 신神의 덕을 사념할 수 있다든가 사념을 표현하기 위한 그릇, 즉 신성한 문자 또는 언어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라니는 산스크리트어 [다라니dharani]의 음역으로 총지總持, 또는 능지能持라고 번역합니다.
정신을 통일하고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지니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언과 다라니는 엄밀히 말하면 서로 구별이 되는 것이지만 흔히 [0 0 의 진언], [0 0 의 다라니]라고 하고, 명(明;vidya 學問.知識의 뜻)이라든가 명주(明呪)라고 하기도 합니다.
다음은 [인계(印契)]를 들 수 있습니다. 인(印)은 산스크리트어 [무드라 mudra]의 번역인데, 표시.증거.상징 등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불.보살 등 제존의 깨달은 내용을 손이나 손가락으로 나타내는 것을 수인(手印)이라 하고, 칼.지팡이 연꽃 등 제존이 지물(持物)로 나타내는 것을 계인(契印) 또는 상인(相印)이라 합니다. 그
리고 불.보살이 깨달은 내용을 나타내기 위하여 인을 맺는 것이지만, 밀교의 수행자가 수법과 수행을 행할 때에도 반드시 인을 맺게됩니다.
수행자가 인을 맺는 것은, 사실 부처님에 대한 단순한 외형적인 모방이나 흉내의 영역을 뛰어넘어, 진리의 어느 한 면 바로 그 자체로 되어 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인계가 매우 다양하고 많은 것도 밀교경전의 특징입니다.
또한 [만다라(曼茶羅)]가 있습니다.
만다라는 범어 [만달라(mandala)]의 음역으로 단(壇), 단장(壇場), 윤원구족(輪圓具足) 등으로 번역합니다.
원래는 비법을 닦을 때 마중(魔衆)의 침입을 막기 위해 그려놓은 원형(圓形)이나 방형(方形) 으로 구획한 지역을 [만다라]라고 합니다.
그러나 밀교에서는 주로 [취집(聚集)]의 뜻을 취하여, 제불.보살 등의 성중이 모이는 곳을 말합니다.
인도에서는 토단土壇을 쌓고 그 위에다 제존을 그려 놓고 행사가 끝나면 부수어 버리는데, 중국. 일본 등지에서는 주로 종이나 천(帛)에 그려 놓기 때문에 그런면에서 조금의 차이가 있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단을 쌓아서 그 위에 제불을 그려 모시고 만다라의 제불을 예배하는 방법이 상세하게 쓰여져 있는 것이 밀교경전의 한 특징이라고 할 것입니다.
신앙의 대상
밀교의 특징적인 신앙의 대상에 [태장계의 만다라]와 [금강계의 만다라]가 있습니다.
이들 만다라에는 대일여래를 중심으로 하여, 제불.제보살, 제명왕, 제천 등 지극히 복잡하고 다채로운 신앙의 대상이 있습니다.
그러나 밀교에서는 불타관(佛陀觀)의 통일적인 견해가 진행되어, 대일여래는 [보문(普門:samantamukha無量門이라고도 하며, 모두에 골고루 미치는 보편적인 門戶라는 뜻)의 부처님]이고, 그밖의 제불.제보살.명왕.천 등은 일지(一智).일덕(一德)을 나타내는 [일문(一門)의 부처님]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밀교경전을 보면 신앙의 대상이 전체적인 것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와 개개의 것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있어서 그 수가 매우 많습니다.
이것은 밀교에 있어서 불타관의 문제입니다.
밀교에서는 불타관이 이처럼 복잡하게 되어있으나 그 복잡함 속에 매우 교묘하고 정교한 통일성이 있습니다.
그것도 밀교경전 속에 설해져 있는 특징 가운데 하나입니다
인도, 티베트 등 모든 불교권에 걸친 밀교를 포함 시킬 수 있는 방법으로서 최근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은 초기, 중기, 후기의 세 시기로 나누어 설명하는 밀교의 역사적인 분류법이다.
이것은 밀교의 발생국인 인도의 밀교전개를 기본으로 한 것이지만 모든 밀교권에도 적용할 수 있고, 현대에는 가장 표준이 되는 분류법으로 되어 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초기밀교란 인도에서 4세기로부터 6세기에 걸쳐 성립한, 다라니를 중심으로 하고 체계가 잡히지 않은 밀교로서, 일본에서 분류하는 잡밀에 해당한다.
다음 중기밀교란 7세기 경 새롭게 인도에서 성립한 <대일경>·<금강정경>등을 기반으로 하는 체계적인 밀교로서 당나라 시기의 중국을 통해서 일본에 전해진 것은 이 단계의 밀교이며 순밀이 여기에 해당한다.
마지막으로 후기밀교란 8세기 인도에서 성립한 탄트리즘의 전개와 함께 성립한 밀교로서칭 탄트라불교라 불리고 있다.
이 단계의 밀교는 지금까지 거의 취급되지 않았던 성적 행법과 생리적 행법을 대담하게 도입하여 때로는 좌도밀교라는 이름하에 심한 혐오감을 느끼게 한다.
이 계통의 밀교는 중국 宋代에 한역되었지만 유교적 윤리관에 지배되어 있는 사대부의 나라에 수용될 리가 없었다.
또한 일본에도 송나라에 갔던 성심(成尋)등에 의해 일부의 한역본이 소개되었으나 끝내 빛을 보지는 못했다.
일본에서는 역사적·질적인 차이를 포함시킨 가치관으로 밀교를 분류할 경우 흔히 순밀(順密)·잡밀(雜密)이라는 분류법을 사용한다.
잡밀은 정식으로 잡부밀교라 부르며 명칭에서 알수 있듯이 어수선하고 정비되지 않은 밀교를 의미한다.
구체적으로는 最澄·空海가 唐에 들어가기 이전 즉 나라 및 헤이나시대에 행해지고 있던, 충분히 체계화되지 않은 밀교를 말한다. 그것은 순밀과 비교할 때 다음 네가지 점에서 다르다.
우선 첫째는 本尊이 되는 尊格이 순밀처럼 만다라의 중심이 되는 大日如來가 아니고 석가여래·약사여래 등의 전통적인 여래, 혹은 十日面·千手·不空 索 등의 특수한 형태를 가진 觀音인 변화관음 등이라는 점이다.
둘째는 나라시대의 밀교를 보면 명확하듯이 諸尊의 다라니를 외는 것이 중심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신밀(印相을 겸하는 것), 구밀(진언,다라니를 외우는 것), 의밀(마음으로 명상하는 것)의 三密行 중에서 구밀만이 확립되어 있을 뿐이다.
셋째 이 단계의 밀교에서는 治病, 求兒, 延命등 현세적인 이익이 목적으로 되어 있고, 자기에게 비장되어 있는 불성을 개오하는 소위 성불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되어 있지 않다.
넷째 밀교적 세계의 축도라 할 수 있는 만다라가 완성되어 있지 않다.
이상의 특징을 가진 밀교를 잡밀이라 부르는 것이다.
이에 반해 순밀이라는 것은 구체적으로는 홍법대사 공해, 전교대사 최증 등이 확립한 진언, 천태의 양 밀교를 말한다.
우선 첫째 본존이 대일여래라는 새로운 성질을 가진 우주적 佛格으로 되어 있다.
둘째 신구의라는 삼종의 표현 형태(三密)를 총합적으로 구사하는 全身的 행법이 완성되어 있다.
셋째 종래의 현실적 목적과 함께 자신들이 불을 체현하는 즉신성불의 사상이 구극목표로 되어 있다.
넷째 대일여래를 중심에 실은 만다라가 완성되어 큰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는 점 등을 열거할 수 있다.
이상의 두가지 분류법 외에 인도와 티베트에서는 다양한 밀교의 분류법이 시도되었다.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것은 티베트의 대학장 푸톤(티베트의 유명한 불교학자)등이 사용한 다음의 4종분류법이다.
①所作탄트라 ②行탄트라 ③瑜伽탄트라 ④無上瑜伽탄트라 이들은 밀교의 경전을 네 가지 계통으로 분류한 것이다.
우선 첫째 소작탄타라는 수법에 사용하는 제단 등의 조영법, 공물의 조달법 등 기초적인 작법을 설한다.
다음 수행탄트라는 특정한 尊格과 만다라의 諸尊에 대한 구체적인 예배법을 설하고 있다.
셋째 유가탄트라는 삼밀행이 완전히 갖추어지고 진언과 印相과 만다라를 사용해서 자기 자신이 성스러운 大日如來와 다름이 없다고 실감하는 것이다.
이들을 앞의 역사적인 분류법에 적용시키면 소작탄트라와 수행탄트라의 일부가 초기밀교에, 수행탄트라의 나머지와 유가탄트라가 중기밀교에 해당한다.
무상유가탄트라는 최고의 탄트라라는 의미로 8세기 이후 인도·티베트에서 크게 유행한 후기밀교를 말한다.
밀교 (密敎, vajrayana)
비밀승(秘密乘 Guhya-yana), 탄트라 불교(Tantric Buddhism), 금강승(金剛乘 vaijra-yana), 구생승(俱生乘 sahaja-yana), 시륜승(時輪乘 kalacakara-yana) 등의 여러 가지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중국불교에서는 밀종(密宗)이라고 한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진언종이라고도 한다.
밀교는 불법승 삼보 중에서 법의 화신인 대일여래를 본존으로 하는 종파이다.
티베트에서 가장 흥하였고, 아직도 티베트의 지배적인 종교 또는 종파이며, 힌두교의 영향이 깊게 들어온 불교이다.
밀교에서는 경전을 '탄트라'라고 한다.
대일여래(大日如來 Maha Vairocana Buddha)
수인(手印)은 태장계(胎藏界)의 경우는 석가의 선정인(禪定印)과 같은 형의 「법계정인(法界定印)」이고 금강계(金剛界)의 경우는「지권인(智券印)」으로 결한다.
Maha 는 '큰' , Vairocana 는 '태양'의 산스크리트어 이다, 그래서 大日여래 이다.
비로자나불의 개념이 탄생하고 , 인도 고유의 밀교(密敎, Tantrism)와 결합하여 새로운 불교적 세계를 구축하려는 시도에서 대일여래가 탄생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은 일본 과 달리 비로자나불을 모시나 대일여래는 모시지 않았다
비로자나불은 정적인 침묵형이고, 대일여래는 동적인 설법형이다.
티벳 불교
7 세기경 손센 캄포왕이 사신을 인도로 보내 .. 정식으로 불교를 수입하였다
그후 100여년 동안 꾸준히 불교를 수입, 번창시켰다
이무렵 .. 파드마삼바바, 샨타라크시타 등의 좌도밀교 수행자들이 티벳불교 중흥에 이바지 하였다
그리하여 .. 인도의 성력숭배(性力崇拜) 경향이 강한 좌도밀교가 고유신앙인 본교의 지반 위에서 발달하여 형성되었다.
티베트에는 불교 이전부터 '본'이라는 샤머니즘적 토착 신앙이 있었으며 밀교의 신비적 주술 의례는 점복·예언·주술 등을 신봉하는 토착신앙과 잘 조화되어 티베트 불교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밀교(좌도불교)와 본 신앙이 합쳐진 티베트 특유의 불교를 라마교라 부르기도 한다.
10세기에 들어와서는, 티베트 불교가 받아들인 밀교의 성적(性的) 요소를 배제한 까담빠(카담파 · Kadampa)가 성립되었고, 이들로부터 분리된 사키야빠(사캬파 · Sakyapa)의 파스파(1239~1280)는 티베트 불교(라마교)의 종교적 수장이 됨과 동시에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여 법왕국가를 건설하였고 세력을 신장하였다.
이 무렵에 티베트 불교(라마교)는 티베트인과 동일한 유목 민족인 몽고인 사회에도 퍼지게 되었다.
티벳 불교에는 오방승불을 모신다
바이로챠나(Vairocana, 대일여래), 악쇼비아(Aksobhya, 아촉여래), 라트나삼바바(Ratnasambhava, 보생여래), 아미타바(Amitabha, 아미타여래), 아모가시디(Amoghasiddhi, 불공성취여래) 이다.
그외 .. 브라흐마 사상에서 등장하는 각종 神 들이 티벳에 수입되어 불교화 되었다
Chakra Samvara, Mahakala, Vajrapani, Yamantaka, Palden Lhamo, Tara, Vajrasattva, 등 등
네팔에서도 거의 힌두교 수준의 신들이 불교의 범주 안에서 모셔지고 있다
바즈라요기니 Vajrayogini
금강승 불교에서 깨달음에 이르게 하는 인식능력의 여성적 형상화, 금강유가모라고도 함.
차크라삼바라 Chakra Samvara
승낙금강(勝樂金剛), 승낙불로 불리는 카규파의 주요 수호본존과 성교를 하는 환희불, 부모불, 쌍신수행상에 나오는 배우자가 도르제 팍모(Dorje Pagmo)라고 하는 금강해모(金剛亥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