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 초가집 굴뚝 연기
신아문예대학 수필가 구연식
사람들은 자기 나름의 상징성 사물에 대하여는 타인의 공감대를 동의하기보다는 자기중심적 사고에 귀착해 버리는 경우가 있다. 시골집 초가집 굴뚝 연기의 의미는 나에게는 생명의 숨소리, 따스함의 정감, 오붓한 밥상의 화목한 가정, 부잣집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이렇게 굴뚝의 연기는 그 가정 의식주의 건강함을 나타내는 작은 봉수대의 표시다.
나의 유년 시절 부상천(扶桑川) 마을에는 기와집은 하나도 없었는데, 지금은 초가집이 하나도 없다. 이른 아침에 집집마다 굴뚝 연기가 고사리 순처럼 여기저기서 올라와 온 마을을 아침 연기로 살포시 덮으면, 살며시 젖히고 일어나는 초가지붕들이 동무들 얼굴처럼 잊히지 않는다. 어느 사물이 꿈틀거리며 약동하는 모습은 살아서 쿵쿵거리는 심장 박동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초가집 굴뚝 연기는 기차(汽車)의 화통처럼 힘차게 내뿜지는 않아도 쉽게 사그라지지 않으며, 인간의 숨소리처럼 느슨하고 지속적이어서 살아있는 맥박과 같았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것은 음식 조리는 물론 구들장을 데워 따뜻한 음식과 포근한 잠자리를 만들어 식구들의 건강을 돌보는 것이니, 굴뚝의 연기는 어머니의 따스한 입김이나 마찬가지다. 어머니는 장남인 나에게는 유독 먹거리에도 정성을 다하셨다. 봄철에는 햇쑥을 캐다가 쑥국을 끓여서 아궁이 잿불에 올려놓았다가 골목길 아들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행주치마로 받쳐 들고 밥상 위에 올려놓고 아들 먹는 모습을 보며 흐뭇해 하셨다. 여름에는 하지감자에 갈치조림을, 가을에는 찹쌀과 들깨를 맷돌에 갈아서 토란을 넣은 걸쭉한 토란탕을 그리고 겨울에는 시원한 동치밋국을 부엌의 부뚜막에서 챙겨주셨다. 그래서 그 제철 음식에 인이 박혀 오늘따라 굴뚝 연기처럼 김이 모락모락 나는 어머니의 햇쑥국이 먹고 싶다.
아침 굴뚝 연기는 대체로 같은 시각에 일정하게 피어오르지만, 특히 해질녘 동네 굴뚝 연기는 띄엄띄엄 나는데 그 연기로 부잣집과 가난한 집을 여러 가지로 가늠할 수 있었다. 부잣집의 저녁 짓는 굴뚝 연기는 차곡차곡 쌓아놓은 마른 장작으로 불을 서서히 집혀 뽀얀 색으로 서서히 올라오면서 누룽지 타는 냄새가 온 동네에 풍겨 침샘을 자극하고 뱃속까지 꼬르륵 소리를 나오게 한다. 가난한 집의 굴뚝 연기는 마르지 않은 청솔가지를 아궁이가 터지도록 몰아넣어 손에 닿으면 금방이라도 검댕이 묻을 것 같은 시커먼 연기가 눈을 못 뜨게 하며, 지겹게 먹기 싫었던 시래기 삶은 냄새가 코끝까지 밀치고 올라온다. 그 시절 춘궁기에는 대부분 저녁 지을 양식이 없어 저녁밥은 건너뛰고 남들 보기에는 저녁 짓는 연기처럼 보이기 위해서 시래기를 삶으면서 헛 군불만 때는 집이 허다했다. 삶의 궁색함을 모면하려는 방법만 달랐지 목적은 같아서 백결선생의 방아타령이 떠오른다.
신라의 백결선생(百結先生)은 근검절약, 청백리의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가세가 빈곤하여 백 번을 기운 누더기를 늘 입고 다녔다는 뜻에서 백결선생(百結先生)이라 했다. 그뿐만 아니라 백결선생(百結先生)은 거문고의 명인(名人)으로도 알려져 있다. 어느 해 세모를 맞아 이웃에서는 조(粟)를 찧어 별식을 마련하는데, 선생의 집안은 그것마저 여의치 않아 그의 아내가 이 같은 가난을 상심하자 그는 곧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무릇 죽고 사는 것은 명에 달렸고, 부귀는 하늘에 매인 일이어서 인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것인데 그대는 무엇 때문에 부질없이 상심하는가.”라고 하며, 이내 가야금으로 방아 찧는 소리를 연주하여 그의 아내를 위로해 준 곡이 방아타령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백결선생 댁에도 섣달그믐을 맞이하여 떡방아를 찧는 것으로 알았다는 이야기다.
초가집 굴뚝 연기는 집과 사람들의 마음마저 데워준다. 할아버지 담뱃대 연기처럼 몽글몽글 솟아올라 모든 이들에게 꿈을 부추기는 상상의 세계로 나르게 한다. 젊은이들에게는 희망찬 새벽하늘을, 나이 든 세대들에게는 추억의 저녁노을로 굴뚝에서 뿜어대는 동그란 연기 방석을 타고 나르기도 한다. 초가집 굴뚝 연기는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다가 일시에 가라앉더니 온 마을을 뒤덮는다. 마을의 지붕들은 할아버지의 삿갓처럼 뾰족이 내밀고 굴뚝들은 담뱃대처럼 세워져서 마지막 한 모금 내뿜는 담배 연기처럼 힘없이 올라와 마을을 하얀 연기로 나지막이 속세를 뒤덮으니 유유자적한 신선들의 몽유도원도의 세상을 떠올리게 한다.
장작더미와 청솔 개비는 널려 있는데 아궁이는 모두 다 입을 닫아버려 불 땔 곳이 없다. 그래서 굴뚝에서는 연기가 사라졌다. 그렇게 많던 동무들은 물론 처마 끝의 참새들도, 집 주변의 오소리도, 뒤뜰 산토끼도 솔가리 타는 굴뚝 연기 대신 석유 보일러 냄새가 싫어서인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오래간만에 빈 아궁이에 솔가리로 군불을 지펴 석유 냄새 몰아내고 솔가리 냄새로 바꿔 놓았다. '동무들아 오너라 오너라 오너라. 동무들아 모여서 같이 놀자.' 어린 시절에 자주 불렀던 동요가 흥얼거려진다.
새벽 굴뚝 연기 흩어질 때 식구들의 아침 식사를 지어 놓고 더 더워지기 전에 밭 한 고랑이라도 김을 매기 위해서 집을 나셨던 어머니! 지금은 굴뚝은 있어도 연기는 없어졌다. 어머니가 밭을 매던 호미와 걸쭉한 토란탕을 만들어 주셨던 맷돌은 굴뚝 언저리에서 끄름에 거슬린 채 있어도 어머니는 계시지 않는다. 꿈이 다시 한 번 주어진다면, 부엌 아궁이에서 나는 밥솥에 불을 때고 어머니는 부뚜막에서 반찬거리를 요리하시어 소박한 아침상을 차려 흩어진 식구들이 빙 둘러앉아서, 그간 어떻게 살았는지 물으면서 굴뚝 연기 스며든 안방에서 오붓한 아침 식사를 한 번 하고 싶다.
(202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