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절 보산 비유
1 그때 부처님은 여러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에게 만일 의심이 있거든 마음대로 물어라. 나는 잘 그 의심을 풀어 주리라."
회중에 사자후라는 보살이 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께 절하고 여쭈었다.
" 부처님이시여, 불성이란 것은 어떠한 것입니까?"
"불성은 제일의공이라고도 이름한다. 그것은 곧 지혜다. 공과 불공을 관찰하고 상과 무상을 관찰하고, 고와 락과 아와 무아를 관찰하는 것이다. 생사는 공한 것이요, 무상한 것이요, 괴로운 것이요, 무아인 것이다. 그러나 큰 열반은 불공이요, 떳떳하여 항상된 것이요, 즐거운 것이요, 나인 것이다. 만일 한 쪽만을 보고 다른 면을 보지 아니하면 중도라고 이를 수가 없는 것이다. 중도는 불성이요, 불성은 정진도의 종자다. 중생은 이것을 보지 못하는 까닭으로, 누에가 고치를 만들고 죽는 거와 같이, 스스로 업을 지어 손으로 놀리는 공처럼 생사 가운데 오르락내리락 하며 딩구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 곳에서 말했다. 만일 사람이 인연을 보면, 곧 법을 보는 것이요, 법을 보는 자는 곧 부처를 보는 것이니, 부처는 곧 불성이다. 그것은 모든 부처가 다 이것으로써 그 성품을 삼는 까닭이다.
사자후야, 일체 중생은 말세에 결정코 무상정진의 도를 얻을 것이다. 사자후야, 비유하건대, 어떤 집에 우유와 낙이 있는데, 사람이 와서 소가 있느냐고 물으면 있다고 대답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서, 젖과 낙은 소가 아니지마는, 반드시 거기서 소를 얻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중생도 또한 그러하여 다 불성이 있다고 항상 이르는 것이다.
이것이 중생의 얻는 바 일승으로서 모든 부처의 어머니인 것이다. 비유하건대, 새로 돋는 달은 볼 수가 없지만, 없다고는 이르지 못하는 거와 같아서, 일체의 범부는 불성을 볼 수는 없지마는 없다고는 이르지 못하는 거와 같아서, 일체의 범부는 불성을 볼 수는 없지마는 없다고는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또 비유하건대, 설산에는 인욕초라는 풀이 있는데, 소가 이것을 먹으면 제호를 낼 수가 있지만, 다른 풀을 먹으면 제호가 나지 않는다. 그때 설사 제호는 없다손 치더라도 설산에 인욕초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는 거와 같아서, 불성이 십이부경에는 없다고 할지라도 불성 자체가 없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또 비유하건대, 시꺼먼 무쇠를 불 속에 넣으면 빨갛게 되지마는, 불 밖에 내어놓으면 다시 검은 쇠 빛으로 돌아가듯이, 일체 중생은 번뇌의 불만 꺼지면 곧 불성 을 볼 수 있는 것이다.
2 사자후야,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곧 번뇌의 불이 꺼지는 것이다. 또 열반은 사람이 거처하는 방과 같아서, 능히 풍우를 막는 것이다. 사자후야, 범부의 눈으로 보면 밝지 못하지마는, 부처의 눈으로 보면 밝은 것이다. 보는 데에 두 가지가 있다. 눈으로 보는 것과 귀로 들어서 보는 것이다. 모든 부처가 눈으로 불성을 보는 것은 마치 손바닥 가운데 암라과를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중생은 듣고 보는 것이기 때문에 밝지 못하지만, 만일 마음에 믿음을 내면 듣고 보는 문견이라고 이름하지 못한다. 신에는 두 가지의 원인이 있다. 귀로 법을 듣는 것과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다. 믿은 법을 듣는 데 의지하고 법을 듣는 것은 신심을 의지한다.
사자후야, 일체의 법은 인연에 의해서 나고 이연에 의해서 멸한다. 그렇지마는, 중생의 불성은 깨지지도 않고 무너지지도 않으며, 끌려가지도 않고 얽매이지도 아니하여, 마치 허공과 같은 것이다. 일체 중생에게는 다 이러한 불성의 허공이 있다. 만일 이것이 없다면, 가고 오는 것도 없고 다니고 머무는 것도 없고, 나고 크는 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허공에는 걸림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 있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중생의 불성도 또한 그러한 것으로서, 보살이나 겨우 조금 볼 따름이다. 사자후야, 이것은 모든 부처의 경계로서 이승의 알 바는 아니다. 중생은 이것을 보지 못 하였기 때문에, 번뇌에 걸려서 생사에 괴로워하는 것이다. 만일 불성을 보면 생사를 해탈하고 열반을 얻을 것이다."
3 사자후는 또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만일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면 무슨 까닭으로 그것을 물리치는 마음이 있습니까?"
"사자후야, 중생에게도 실은 물리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만일 마음에 물리치는 일이 있다면 마침내 도를 얻지 못할 것이다. 다만 늦게 얻게 되는 것이므로 이것을 물리치는 것이라고 이르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인연이 화합하지 못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나는 정인과 연인의 두 가지 원인을 말한다. 정인이라는 것은 불성이요, 연인이라는 것은 보리 마음을 내는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원인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마치 돌 바위 속에서 황금이 나오듯이, 무상정진의 도를 얻는 것이다.
사자후야, 보살로서 보리 마음에서 물러나는 것에 열세 가지가 있다.
(1)믿지 않는 것 (2)짓지 않는 것 (3)의심하는 것 (4)몸과 재물을 아끼는 것 (5)열반을 두려워하는 것 (6)참지 못하는 것 (7)순실하지 못한 것 (8)근심하고 괴로워하여 즐겨하지 않는 것 (9)방일하여 도에 나아가기를 원하지 않는 것 들이다. 그리고 (10)악한 벗을 친하고 교만을 내며 (11)스승의 허물을 구하며 (12)생사를 즐거워하며 (13)삼보를 공경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들은 보리 마음을 깨뜨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뜻을 세워 도를 향하고, 항상 부처와 성자를 친하기를 원하며 설사 고난을 만날지라도 이 마음을 잃지 않기를 원하고, 설사 모든 중생이 나를 해하려고 하더라도 이 사람에게 대하여 자비심을 내되, '이와 같은 사람들은 나를 위하여 보리의 인연을 증장시켜 주는 것이니, 만일 이런 일이 없으면 나는 무엇을 의지하여 도를 이룰 것인가.' 하고 기뻐하며, 교만심을 내지 않고, 항상 경전을 들으며 이것을 설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이것을 믿도록 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많이 들어 아는 것보다 들은 것은 적더라도 충분히 진리를 알기를 원하라.
신ㆍ어ㆍ의의 삼업을 악에 섞이지 말고, 몸과 목숨과 재물을 아끼지 말며, 남에게 은혜를 받거든 그 작은 것이라도 크게 갚으려고 생각하고, 세상 상태를 잘 알고, 독경하기를 게을리 말며, 말을 항상 부드럽게 하여 악한 일을 말하지 말고, 마음이 부드럽지 못한 사람을 부드럽게 하며, 근심이 있는 자를 근심이 없게 하고, 세상에 기근이 있거든 풍성하게 펴 주며, 사람이 병이 들거든 고쳐 주고, 난리가 나서 병화가 일어나거든 중재하여 평화하게 하며, 부모와 스승을 공경하고, 원한이 있는 자에게 자비로써 대하라.
남을 위하여서는 무량겁에 지옥고를 대신 받더라도 마음에 뉘우치지 말고, 사람이 이익을 얻는 것을 볼지라도 질투심을 일으키지 말며, 과보를 얻기 위하여 과보의 인연을 모으지 말고, 현재의 쾌락에 탐착을 일으키지 말라. 이러한 선행에 의하여 보리 마음을 물리치지 아니하면, 능히 부처를 보고 불성을 맑게 깨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