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재 韻壽齋 / 임보
풋고추 날된장에 매실주 말술
수석壽石 송죽松竹에 문방사보文房四寶 짊어지고
삼각산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한평생
어느 제 가락 얻어 인수봉을 오르리
*
운수재는 내 서재의 이름이다.
말이 서재지 작은 마루다.
몇 개의 수석과 뜰에 있는 송죽 거느리고 매일 매실주나
홀짝이면서 살아간다. 그러니 어느 때 멋진 시신詩神이
찾아와도 취생몽사醉生夢死 모른 채 그냥 지나치고
마는 것이나 아닌지….
신헌화가 新獻花歌 / 임보
깊은 골 바위틈에 나는 못 살아
소먹이는 일도 다 던져 버리고
나 같은 늙다리도 괜찮다면
꽃 꺾어 그대 뒤 좇아가리
* 향가 <헌화가>는 소를 몰고 가던 한 노인이
벼랑 위의 진달래꽃을 꺾어 수로부인에게 바치며
부른 노래라고 전한다. 이를 패러디한 것이다.
이산移山 / 임보
구십九十 우공愚公이
삽을 잡고
아홉 살 손자가
발대를 지고……
* 우공은 중국의 옛 고사 속에 등장한 신화적인 노인이다.
앞산이 시야를 가린다고 그 산을 옮기려 발대에 흙을 져 날랐다고 한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이를 보고 언제 그 일을 다 하겠느냐고 하면,
내 손자가 있지 않느냐고 대꾸했다.
공명空鳴 / 임보
공선달孔先達이라 하던가?
천하를 울리던 희대의 통소꾼,
그의 끼니를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속이 빈 피리가 소리를 내지 않더냐!
* 공선달이라는 피리의 명인名人이 있다.
가난하여 늘 끼니를 굶고 지내는 그를 보고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대답하는 말이다
‘속이 빈 피리가 잘 울리지 않더냐!’
난사蘭史 / 임보
팔대八大*는 허심虛深하고 판교板橋*는 중후重厚하다
석파石坡*는 첨예尖銳하고 운미芸楣*는 온유溫柔하다
누가 있어 저 주저앉은 난蘭을
이제 다시 푸르고 곧게 세우리
* 팔대八大는 명明 종실宗室의 후예로 괴벽했던 문인화가,
판교板橋는 청淸의 문인화가 정섭鄭燮,
석파石坡는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운미芸楣는 조선조 말의 문인화가 민영익閔泳翊이다.
다 난화蘭畵 속에 개성적인 기氣를 피우고 있다.
맥빠진 이 세상에 그런 기氣를 다시 불어넣어 줄 이
지금 어디 있단 말인가?
불상 / 임보
법주사 큰 불상은
몸집이 너무 커서
수만금數萬金 삼키고도
배가 차지 않나 보네
* 절마다 큰 불상들을 빚어놓고 사람들을 불러들인다.
부처님을 생각고 불상을 빚는다고? 천만의 말씀,
불상은 중들의 말[馬]이다.
등산객登山客 / 임보
노고단 오르는 길에 뱀사골 지나는데
아흔 아홉 구비마다 산적山賊들 천지로세
배낭 지고 고깔 쓰고 각반에 단장 들고
온 산천 울긋불긋 스멀스멀 근질근질
* 산의 능선마다 골짜기마다 사람들로 북적대고 있다.
산적들이 따로 없다. 산의 수난이다.
산이 얼마나 가려울 것인가.
운주천불 雲舟千佛 / 임보
그 옛날 백제百濟 고을 멍텅구리 숙맥들
개똥이 쇠똥이놈 떼로들 부처 되어
이목구비耳目口鼻 수족手足 불알 다 뭉개버리고
온 산천에 널부러져 흘러가고들 있네
* 운주는 전라남도 화순에 자리한 작은 절 이름이다.
한자로 '雲住' 혹은 '運舟'라고 쓴다.
그러나 나는 왜 그런지 '運舟'라고 쓰고 싶다.
거기 가면 만신창이가 된 석불들이 온 산천에 널려 있다.
어느 석공이 하룻밤에 천불을 새겼다는 전설이 있는데,
어쩌면 세상의 필부필부들을 끌어다 돌로 굳혀 부처를
빚은 것도 같다.
모란시인牡丹詩人 / 임보
강진康津 고을 영랑가永郞家를 찾았더니만
모란꽃 유자꽃은 흔적도 없고
임자없는 빈터에 바람만 가득
동백씨만 우두둑 떨어집니다
* 강진의 김영랑 생가가 복원되어 찾아 갔지만
쓸쓸한 감회를 떨쳐버릴 수 없었다
낙화암 落花巖 / 임보
낙화암 절벽 보러 찾아갔더니
떨어진 궁녀들은 흔적도 없고
백화정百花亭 마루바닥 다 무너지게
팔도 여편네들 니나노판이네
* 삼천 궁녀가 백마강에 꽃처럼 떨어져 산화해 갔다는
낙화암 위에는 백화정이라는 정자가 세워져 있다.
이 서글픈 역사와는 어울리지 않게
니나노판을 벌이고 있는 여인들이 참 아이러니컬하다.
마곡사 麻谷寺 골짝 / 임보
나무 위엔 다람쥐
개울 속엔 피래미
뱀딸기, 개망초도 신이 납니다
댕댕이, 머루넝쿨 어우러져서
염주, 목탁 없이도 잘도 놉니다
염소 / 임보
섬에 배가 닿자
맨 먼저 달려와 반기는 이는
한평생 수평선만 이고 살던
수염이 긴 흑발의 노인
* 섬에 사는 짐승들은 선하다.
사람에게 엉금엉금 다가온다.
수염이 긴 염소는 노인 같다.
시수헌 詩壽軒 / 임보
시수헌은 둬 평의 다락방이지만
억만 년 인수仁壽가 지켜보고 있고
천만의 성군星群들이 빛을 쏟고 있는
청정무구淸淨無垢한 시詩들의 성지聖地로세
* 어느 분이 <우이동 시인들> 모여 차나 마시라고
그의 옥탑에 자리한 다락방을 우리에게 내 주었다.
방은 초라하지만 인수, 백운, 만경의 삼각산이
바로 건너다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다.
- 임보 시집 <운주천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