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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鄭夢周 ]
정몽주(鄭夢周)1)는 자가 달가(達可)이며 지주사(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이다. 그 모친 이씨(李氏)2)가 임신했을 때 꿈에 난초 화분을 안고 있다가 갑자기 떨어뜨리고 놀라서 깨어 난 뒤 낳았으므로 이름을 정몽란(鄭夢蘭)이라고 하였다. 태어나면서부터 특이하게 빼어났으며 어깨 위에 검은 점 일곱 개가 북두칠성처럼 벌여져 있었다. 아홉 살이 되었을 때 모친이 낮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검은 용이 뜰에 있는 배나무로 올라가기에 놀라서 깨어 나가 보니 바로 정몽란이었다. 그래서 정몽룡(鄭夢龍)으로 고쳤으며 관례(冠禮)를 하고 나서는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다.
공민왕 9년(1360), 과거에 응시하여 연달아 삼장(三場)3)에서 수석을 하고 마침내 장원으로 뽑혔다.4) 11년(1362), 예문검열(藝文檢閱)에 뽑혀 임명되었고 13년(1364)에는 우리 태조(이성계)를 따라 화주(和州 : 지금의 함경남도 금야군)에서 삼선(三善)·삼개(三介)를 격파했으며 이후 거듭 승진해 전농시승(典農寺丞)이 되었다. 당시 상제(喪制)가 문란하고5) 해이하여 사대부가 모두 백일이면 상복을 벗었으나 정몽주는 부모의 상을 당하자 홀로 묘에 여막을 짓고6) 제사를 극진히 모셨으므로 나라에서 마을에 정문(旌門)을 세워주었다.
16년(1367)에 예조정랑(禮曹正郞)으로서 성균박사(成均博士)를 겸직했는데, 당시 경서가 우리나라로 온 것은 오로지 『주자집주(朱子集註)』뿐이었다. 정몽주의 강론이 막힘이 없었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훨씬 뛰어 넘는 것이므로 듣는 사람들이 자못 의심스러워하였다. 뒤에 호병문(胡炳文)7)의 『사서통(四書通)』을 얻어 보자 죄다 정확히 일치하므로 유학자들이 더욱 탄복하였다. 이색은, 정몽주가 이학(理學)을 자유자재로 설명하되 이치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극찬하면서 그를 우리나라 이학(理學)의 조종으로 추켰다. 17년(1368)에 성균사예(成均司藝)로 옮겼다가 20년(1371)에 태상소경(太常少卿)으로 전임했고 얼마 뒤에 성균사성(成均司成)으로 승진했다.
21년(1372)에 사신 홍사범(洪師範)8)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가서 촉(蜀)지역을 평정한 것9)을 축하하였다. 귀국길에 바다 가운데에 있는 허산(許山)에 이르자 회오리바람으로 파선한 채 표류하다가 바위섬에 표착했다. 홍사범은 익사했고 겨우 열두 명이 살아남았는데 정몽주도 거의 죽다가 살아나 13일 동안 말다래를 베어 먹으며 버텼다. 보고를 들은 황제가 선박을 보내 맞아다가 후하게 대접한 후 귀국시켜 주었다.
우왕 원년(1374), 우사의대부(右司議大夫)로 있다가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으로 옮겼다. 명나라가 건국되자 정몽주가 그 조정에 극력 요청하여 맨 먼저 귀부했는데, 당시 공민왕이 시해를 당하고 김의(金義)가 명나라 사신을 살해하는10) 등 온 나라의 인심이 흉흉해 명나라에 사신을 보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에 정몽주가 거듭 대의에 입각해 이렇게 주장했다.
“최근 발생한 변고에 대해 신속하고 자세히 명나라에 보고해 의혹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의심해서 백성들에게 화를 끼쳐서야 되겠습니까?”
그제야 비로소 사신을 보내어 왕의 죽음을 알리는 한편 김의 사건의 진상을 설명11)했다. 이때 북원(北元)이 사신 편에 조서를 보내오자, 권신(權臣) 이인임(李仁任)과 지윤(池奫)이 다시 원나라를 섬기려고 그 사신을 맞아들이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이에 정몽주가 문신 10여 명과 함께 이런 글을 올렸다.12)
“천하의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원대한 계책을 정해야 합니다. 원대한 계책을 정해두지 못하면 사람들이 의심을 하게 되며 나라 사람들의 의심은 온갖 일의 화근이 되는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우리나라는 바다 바깥 한 귀퉁이에 있으면서 당나라 말기에 건국한 우리 태조 때부터 중국을 예로써 섬겨 왔는데, 천하에서 가장 의로운 군주가 누구인가를 살펴 섬겼던 것입니다. 근래 원나라가 쫓겨 스스로 도읍을 옮기고 명나라가 흥기하여 천하를 모두 차지하였습니다. 우리 돌아가신 선왕께서 이것이 천명임을 환히 알고 신하로 복속하겠다는 표문을 올리자 황제가 가상히 여겨 왕의 작위로 봉하였으며, 그 후 여섯 해 동안 공물과 하사품이 오갔습니다.
주상께서 즉위하신 초기에 역적 김의가 예대로 천자의 사신을 전송하다가 도중에 제멋대로 살해한 후 모반하여 북원으로 들어가서 원나라의 서손들과 함께 심왕(瀋王)을 즉위시키려는 음모를 꾸몄습니다. 천자의 사신을 살해하고 자기 군주를 배반한 것은 참으로 극악무도한 행위이니 그 죄상을 밝혀 위로는 천자에게 보고하고 아래로는 중국의 지방관들에게 알려 토벌을 요청해 반드시 그를 죽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나라에서는 김의의 죄를 묻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재상 김서(金湑)를 시켜 북원에 조공을 바치게 하였습니다. 또 오계남(吳季南)은 국경을 맡은 신하인데도 제멋대로 정요위(定遼衛)13)의 세 사람을 죽였습니다. 장자온(張子溫) 등은 김의와 동행한 자들로 정료위까지 가지도 않고 뻔뻔스럽게 귀국했으나 나라에서는 그냥 내버려두고 불문에 붙였습니다.
지금 북원의 사신이 온다고 하자 나라에서는 대신을 보내어 국경에서 영접하자고 주장하면서, 북방을 다독거려 전쟁을 막으려는 배려라고 변명하고 있습니다. 패망한 원나라가 멀리까지 와서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은 한번 배불리 먹어 경각에 달린 목숨을 연장해보려는 것입니다. 명분은 심왕(瀋王)을 들여보내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실상은 자기 이익을 챙기려는 것입니다. 그들을 거절하면 우리가 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게 될 것이며 그들을 섬긴다면 도리어 그들의 마음을 교만하게 만들 것이니, 전쟁을 막아보려고 하는 것이 기실은 전쟁을 재촉하는 꼴이 될 것입니다. 듣건대 그 조서에는 우리에게 대역(大逆)의 죄를 덮어씌운 뒤 이어서 그것을 용서한다고 적었다는데, 우리에게는 본래 죄가 없으니 도대체 무엇을 용서한다는 것입니까? 나라에서 만약 북원의 사신을 예우해 보낸다면, 온 나라 신민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천하에 알릴 수 없는 대역의 오명을 뒤집어쓰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일을 신하된 자가 어찌 차마 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명나라 조정에서는 김의의 사건을 듣자마자 우리를 찍어 의심했을 것이 분명한데, 우리가 원나라와 서로 통교하고 김의의 죄를 불문에 붙였다는 말을 들으면 필시 우리가 적과 내통해 사신을 죽인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할 것입니다. 만약 죄를 묻는다고 군사를 일으켜 바다와 육지로 한꺼번에 쳐들어오면 나라에서는 장차 무슨 말로 변명하겠습니까? 하찮은 적과의 전쟁을 막으려다 기실은 천하의 군사와 전쟁을 벌이는 꼴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상황이 전개될 것은 너무 뻔해 쉽게 알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 조정에서는 마치 말을 꺼내기 어려운 양 하는데 그 까닭은 알기 어렵지 않습니다. 과거 소인배들이 변란을 일으켰을 때 당시의 재상이 명나라로부터 힐책을 당할까 우려해 김의와 공모하여 명나라와 국교를 끊으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안사기(安師琦)14)가 정황이 탄로나자 자살한 것이 그 실상을 증명합니다. 안사기가 이미 죽었으니 빨리 대응책을 마련해 여러 사람들의 분노를 명쾌하게 풀어야 할 터인데도 지금까지 들리는 것이 하나도 없으니 흉흉한 인심 때문에 다른 변란이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전하께서 단안을 내리셔서 원나라의 사신을 체포해 그 조서를 압수한 후 오계남·장자온 및 김의가 데리고 갔던 자들을 모두 체포해 명나라로 압송한다면 모호한 죄는 변명하지 않아도 저절로 밝혀질 것입니다. 그리한 후 정료위와 함께 군사를 양성해 변란에 대비한다는 조약을 맺고 북원 정벌을 선포한다면 원나라의 잔당들은 자취를 거둬 멀리 달아나고 우리나라는 무궁한 복록을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틀 후 지윤(池奫)과 이인임(李仁任)이 그를 크게 꺼린 나머지 언양(彦陽 : 지금의 울산광역시 언양군)으로 유배15) 보냈다가 2년 뒤에야 자의로 거주지를 선택하도록 풀어주었다. 당시 왜구가 창궐하여 바닷가 주(州)·군(郡)들이 모두 황폐하게 되자, 상황을 우려한 조정에서 나흥유(羅興儒)를 일본 하카다[覇家臺]에 파견해 화친을 설득했다. 그러나 그 주장(主將)이 구금시키는 바람에 나흥유는 거의 굶어 죽게 되었다가 겨우 살아 돌아왔다.
우왕 3년(1377), 권신들이 지난번 상소에 원한을 품고 정몽주를 보빙사(報聘使)로 천거하여16) 하카다로 가서 왜적의 침구를 금지시켜줄 것을 요구하게 하니, 사람들은 모두 위태롭게 여겼으나 정몽주는 전혀 난색을 나타내지 않았다. 하카다에 당도해 역사적으로 외교상의 이해관계를 상세히 들려주자 주장(主將)이 경복(敬服)해 매우 후하게 접대했다. 일본 승려들이 시를 얻으려고 찾아오면 그 자리에서 바로 지어주니, 승려들이 날마다 가마를 메고 모여들어 경치 좋은 곳을 구경하라고 청하였다.
귀국할 때 구주절도사(九州節度使)가 주맹인(週孟仁)을 보내 함께 왔으며, 또 포로가 되었던 윤명(尹明)·안우세(安遇世) 등 수백 명을 데리고 왔다. 또한 삼도(三島)의 침략을 금지시켰으므로 일본 사람들이 오랫동안 칭송하고 사모하여 마지않았다. 뒤에 정몽주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다들 탄식했으며 심지어 재승(齋僧)17)하여 명복을 비는 자까지 있었다. 정몽주는 왜적이 우리 양인의 자제들을 노예로 부리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나머지 속전(贖錢)을 주고서라도 귀환시키려고 극력 재상들을 설득해 각자 사재 얼마씩을 내게 하였다. 또한 글을 써서 윤명 편에 주어 보내니 적의 괴수가 그 간곡한 내용에 감복해 포로 1백여 명을 돌려보냈다. 이로부터 윤명이 갈 때마다 꼭 포로를 데리고 귀국했다.
4년(1378),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로 임명되었고 전공판서(典工判書)·예의판서(禮儀判書)·전법판서(典法判書)·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였다. 6년(1380)에 우리 태조를 따라 운봉(雲峯 : 지금의 전라남도 남원군 운봉면)에서 왜구를 격퇴하고 돌아와 밀직제학(密直提學)으로 임명되었으며 이듬해에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가 되었다.
10년(1384),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임명되었다. 본국과 명나라와의 분쟁이 잦아지자18) 황제가 노해 전쟁을 벌이려 하면서 세공을 크게 늘려 정했다. 또 5년간 바친 세공이 약속과 다르다는 이유로 사신 홍상재(洪尙載)·김보생(金寶生)·이자용(李子庸) 등을 곤장으로 때리고 먼 곳으로 유배보냈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우리 조정에서 하성절사(賀聖節使)를 보내야 하는데도, 사람들이 모두 사신가기를 꺼려하며 회피했다. 결국 최종적으로 밀직부사(密直副使) 진평중(陳平仲)을 물망에 올렸는데, 그가 노비 수십 명을 임견미(林堅味)에게 뇌물로 주고서 병을 핑계로 거부했다. 임견미가 즉시 정몽주를 천거하자 우왕이 불러19) 대면하고서, 이렇게 설득했다.
“근래 우리나라가 명나라로부터 힐책을 당하는 것은 모두 대신들의 잘못이다. 경은 고금의 역사에 널리 통달하였고 게다가 나의 의중을 잘 안다. 지금 진평중이 병 때문에 갈 수 없어서 경으로 대신하려 하니 경의 뜻은 어떠한가?”
이에 정몽주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승낙했다.
“임금과 아비의 분부라면 물불이라도 피하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천자께 조회하는 일을 어찌 회피하겠습니까? 하오나 우리나라에서 남경(南京)까지 8천 리 남짓한데 발해(渤海)에서 순풍을 기다리는 날짜를 빼고도 90일의 일정입니다. 이제 성절까지의 날짜가 겨우 60일 남았는데 바람을 기다리는 열흘을 빼고 나면 남은 날이 겨우 50일뿐이니 이것이 제가 걱정하는 일입니다.”
우왕이 출발 일자를 묻자 즉시 떠나겠노라고 응답한 후 밤낮으로 길을 재촉해 황제의 생일에 맞춰 축하의 표문을 올렸다. 황제가 표문을 읽은 후 날을 꼽아보더니,
“그대 나라 신하들이 필시 변고를 핑계로 오지 않으려고 서로 미루다가 날이 임박하자 그대를 보낸 것이구나. 그대는 전날 촉(蜀)지방을 평정한 것을 축하하러 왔던20) 자가 아니냐?”
라고 힐문했다. 정몽주가 파선해 표류했던 상황을 자세히 들려주자 황제는, “그렇다면 응당 중국말을 알겠구나.”라고 하며 각별히 위로했다. 예부에 명해 그를 우대해 전송하도록 했으며 황상재 등도 석방해 귀국시켜 주었다.
우왕 11년(1385)에 정몽주는 동지공거(同知貢擧)가 되어 과거를 주관했다.21) 전례대로 각 장(場)의 시험이 끝날 때마다 심사하여 방을 내거는데 초장(初場)에 합격하지 못한 자는 중장(中場)에 들어갈 수 없었고 종장(終場)도 이와 같이 하였다. 의비(懿妃)22)의 동생 노구산(盧龜山)이 어리고 미욱한데다 학식이 없었으므로 종장에서 불합격하자 우왕이 대노해 그 해 과거를 무효로 하려 했다. 이성림(李成林)·염흥방(廉興邦) 등이 노구산의 아비인 노영수(盧英壽)23)의 집으로 찾아가 노구산을 종장에 응시시키라고 청했으나 노영수가 혼자만 들어갈 수 없다고 사양하였다. 그래서 불합격자 10여 명을 함께 종장에 올려 결국 노구산을 급제시켰다.
덕창부행수(悳昌府行首) 문윤경(文允慶)은 본디 환관 이광(李匡)24)의 종자로, 자기 친구의 책문(策文)을 표절했으므로 정몽주가 그를 내쫓았는데 지공거 염국보(廉國寶)25)는 그를 발탁했다. 이에 최영(崔瑩)이 사람들에게 농담으로 비꼬았다.
“전 달의 감시(監試)에서 학사(學士) 윤취(尹就)26)가 빈한한 선비를 버리고 어리석은 아이를 뽑자 하늘에서 큰 우박이 내려 내가 심은 삼[麻]을 다 죽이더니 이번의 동당시(東堂試)에서는 학사(學士)가 또 어떤 천재지변을 부를까?”
12년(1386)에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새 복식을 내려줄 것을 청하고27) 또한 세공의 감면을 건의했다. 정몽주의 요청과 응답이 상세하고 명확하였으므로 5년간의 세공 가운데 미납분 및 증액분의 상당수를 면제받았다. 귀국하자 우왕이 크게 기뻐하며 의대(衣帶)와 안마(鞍馬)를 내려주고 문하평리(門下評理)로 임명하였다. 이듬해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니 영원군(永原君)으로 봉하였다. 하륜(河崙)·염정수(廉廷秀)·강회백(姜淮伯)·이숭인(李崇仁)과 함께 원나라 복식을 혁파하고 명나라 제도를 따르자고 건의하였다. 14년(1388)에는 삼사좌사(三司左使)로 임명되었다.
창왕 원년(1388)에 정몽주는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으로 전임했다. 이 때 우리 태조(이성계)를 따라 공양왕을 옹립하기로 대책을 세워28)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동판도평의사사사(同判都評議使司事)·호조상서사사(戶曹尙瑞司事)·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지경연춘추관사(知經筵春秋館事) 겸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영서운관사(領書雲觀事)가 되었다. 또 익양군(益陽郡) 충의군(忠義君)으로 봉해졌으며 순충논도좌명공신(純忠論道佐命功臣)의 칭호를 하사받았는데 당시 교서는 이러하다.
“난을 평정해 정도(正道)를 회복시킨 사람은 진실로 국가의 충신이요, 덕이 있는 이를 존숭하고 공이 있는 이에게 보답하는 것은 국가의 법도다. 경은 빼어난 학문29)과 왕을 보필할 재능을 지니고 과거[射策]30)에서 연달아 장원급제 했으며 부모상 때는 여묘살이를 하며 효도를 다했다. 안에서 길러진 근본이 확고히 심어졌기에 밖으로 나타난 아름다움이 무늬를 이루어 빛나도다. 선왕께서는 그대를 임용하여 조칙을 쓰는 일[絲綸]31)을 맡기셨으며 후배들은 그대를 경모해 태산과 북두처럼 우러러 보았다. 염락(濂洛)의 도32)를 앞장서 부르짖으면서 불교와 도교의 말을 배척하였다. 경서의 강론은 정밀하여 성현의 오묘한 가르침을 깊이 체득했고, 생도의 훈육에 게으름이 없어 수많은 인재가 문하에서 흥기했다. 덕망은 이로 말미암아 더욱 높아졌고 명성은 이 때문에 크게 떨쳤다.
명나라의 건국 초기에 우리나라가 가장 먼저 귀부하면서 가장 적합한 신하를 선발하니 그대가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되었다. 넓은 바다를 배로 항해해 오다가 회오리바람을 만나 표류하다가 간신히 죽을 고비를 벗어나 다시 명나라로 돌아가 황제의 환대를 받았다. 현릉(玄陵 : 공민왕)이 돌아가시고 김의가 오랑캐 땅으로 달아났을 때 권신들은 여우처럼 잔뜩 의심을 품고서 관리들이 사신가는 것을 꺼린다는 핑계를 대면서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지 않으려 하니 장차 백성들이 재앙을 뒤집어쓰게 되었다. 그 때 경이 정도전(鄭道傳) 등과 함께 ‘근래에 변고가 계속되고 있으니 그 사정을 상세히 명나라에 보고해야 합니다. 천자로부터 죄를 받으면 나라의 복록은 잊기 힘듭니다.’라고 극력 주장했기에 사신을 보내어 신하로서의 직분을 밝혔다. 생각건대 우리나라가 편안한 것은 경들이 세운 계책 덕분인 것이다.
그 뒤 북원 사신이 불순한 내용의 글을 가지고 왔는데, 당시 교외에서 영접하자는 주장에 대소 신료들이 모두 찬동했으나, 경은 이첨(李詹)·전백영(全伯英) 등을 거느리고 불가함을 극언하다가 이인임(李仁任)과 지윤(池奫) 일당의 미움을 사 배척을 받게 되었다. 그 뒤 영남(嶺南)에 여러 해 유배되었으며 일년 넘게 일본을 갔다 오게 되었다.
우리가 명나라에 오래 사신을 보내지 않자 마침내 황제의 엄한 견책을 받게 되니 나라의 운명은 위태로워지고 인심은 흉흉해졌다. 경이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천자를 친히 면담한 후 비로소 명나라에 입조할 길을 열었고 또한 세공의 액수를 감면 받게 하였다. 예로부터 큰 나라를 섬기는 예에 실수가 없었기에 오늘날까지 백성들을 잘 보호할 수 있었다.
갑인년으로부터 기사년까지33) 불행하게도 신우와 신창이 왕위를 도둑질한 사건이 벌어졌다. 경은 항상 적인걸(狄仁傑)과 장간지(張柬之)가 당나라를 부흥시키던 것과 같은 충성심을 품고 있었기에, 하늘이 그대의 마음에 강림하여 마침내 모든 일이 끝내 뜻대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홍무(洪武 : 명 태조의 연호) 22년(1389) 10월에 문하평리(門下評理) 윤승순(尹承順) 등이 명나라에서 돌아오면서 황제의 조서를 가지고 왔는데 거기에는 ‘고려는 왕위를 이을 후손이 끊겼다. 왕씨를 가탁하면서 다른 성씨로 왕을 삼았지만 이는 삼한(三韓)이 대대로 지켜 갈 좋은 계책이 아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그 해 11월 15일에 경 등이 계책을 정한 후 천자의 명을 선포하고 태비(太妃)의 분부를 받들어 나를 추대하여 정통을 잇도록 하니, 16년이나 끊어졌던 제사를 잇게 되었고 천만 세나 계속될 무궁한 기쁨을 연장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국가의 기강을 바로잡고 예악을 만들어 선포했으며, 전제(田制)를 바로 잡아 분쟁을 그치게 하였다. 또 쓸모없는 관리는 도태시키고 훌륭한 인물들을 뽑아 썼다. 조정에서 경이 한 일은 요순시대 임금과 백성의 뜻과 부합했으며, 경연에서 경이 건의하는 말[啓沃]34)은 모두 「이훈(伊訓)」과 「열명(說命)」35)의 말과 같았다. 빼어난 재주는 참으로 나를 보좌하기에 적합하니 그 큰 공훈을 영원히 잊기 어렵다.
특별한 은덕으로 포상하고 높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후대 사람들을 북돋울 수 있겠는가? 이에 공신각을 세워 초상을 안치하고 비석에는 그 공적을 새길 것이며, 3대의 조상들을 추증하고 자손들은 영원히 죄를 용서할 것이며, 또한 토지를 내려주고 노비를 딸려 주노라. 그리고 백금(白金) 50량과 말 한 필을 주노라. 아아! 내가 중차대한 왕업을 이어받아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고 늘 생각하니, 경은 더욱 성심껏 나를 보좌하여 영원히 영예를 이어가도록 할지어다.”
왕이 경연에 참석하자 정몽주가 진언했다.
“유가의 도는 모두 일상의 평범한 일에 있으니, 먹는 것과 남녀관계는 모든 사람이 행하는 것으로 바로 거기에 지극한 이치가 존재합니다. 요임금과 순임금의 도라는 것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행동과 말이 올바르게 되면 그것이 바로 요순의 도이니, 애당초 너무 높아 실행하기 어려운 것이 전혀 아닙니다. 저 불교36)는 그렇지 않아서, 친척과 이별하고 남녀관계를 끊어 버린 채 혼자 바위굴에 앉아 풀로 짠 옷을 입고 나무 열매를 먹으며 공(空)이나 살피고 적멸(寂滅)을 종지로 삼으니 어찌 세상에 살아가면서 행할 도이겠습니까?”
당시에 왕이 승려 찬영(粲英)37)을 스승으로 맞아들이려 했기 때문에 정몽주가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그러나 왕은 한창 불교에 현혹되어 있던 차라 받아들이지 않았다.
윤이(尹彛)·이초(李初)의 옥사38)가 일어나자 대간(臺諫)이 그 일당을 극력 논죄했으나 정몽주는 그들이 공신으로 4대를 추봉받았다는 이유를 들어 전부 사면하라고 건의했다. 대간이 그래도 주장을 굽히지 않자 왕은 도당(都堂)에 그 상소를 내려주며 의논하도록 하였다.39) 정몽주가, “죄상이 명백하지 않으며 또한 이미 사면이 내린 터에 다시 논죄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자 형조(刑曹)에서는 정몽주가 윤이·이초의 일당을 편든다고 탄핵했다.40) 이에 정몽주가 두 번이나 글을 올려 사의를 표했으나 모두 허락하지 않고 도리어 그를 잔치에 초대해 위로한 후 곧이어 벽상삼한삼중대광(壁上三韓三重大匡)·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판도평의사사(判都評議使司)·병조상서시사(兵曹尙瑞寺事)·영경령전사(領景靈殿事)·우문관대제학(右文館大提學)·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경연사(經筵事)·익양군(益陽郡) 충의백(忠義伯)으로 임명하였다.
공양왕 3년(1391)에 왕이 경연관(經筵官)더러 “지금 사람들이 중국의 역사는 알면서 우리나라의 일은 알지 못하니 옳은 것인가?”라고 개탄하자 정몽주가,
“근래의 역사도 모두 편수하지 못하였으며 선대의 실록도 상세하지 못한 실정입니다. 바라옵건대 편수관을 두어 『통감강목(通鑑綱目)』41)의 체제를 따라 편찬하게42) 한 후 늘 읽어보시도록 하소서.”
라고 건의했다. 왕이 건의를 받아들여 바로 이색(李穡)과 이숭인(李崇仁) 등에게 실록(實錄)43)을 편찬하도록 지시했으나 결국 실행되지 못하였다.
성균박사(成均博士) 김초(金貂)가 글을 올려 불교를 비방하자 왕이 노해 그를 사형에 처하려고 했다. 이에 병조좌랑(兵曹佐郞) 정탁(鄭擢)44)이 소를 올렸다.
“듣건대 김초가 이단을 배척하느라 극언을 불사한 것인데도, 주상께서는 선왕이 만드신 법을 훼손했다는 이유로 그를 극형에 처하려 하신다니 저는 전하를 위하여 안타깝게 여깁니다. 『서경』에는 ‘선왕이 만든 법을 거울삼아 영원히 허물이 없도록 한다.’고 했는데45) 여기에서 선왕이 만든 법이란 삼강오상(三綱五常)인 것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이것을 모두 위배하니, 김초가 선왕께서 만드신 법을 훼손한 것이 아니라 바로 전하께서 스스로 훼손한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김초가 융통성없이 직언한 죄를 용서해주시옵소서.”
대언(代言) 등이 왕의 노여움을 겁내 감히 간언하지 못하자 정몽주가 동료들과 함께 상소했다.
“신뢰야말로 임금이 지녀야 할 큰 보배이니 나라는 백성에 의해 보존되고 백성은 신뢰에 의해 보존됩니다. 최근 전하께서 간언을 구한다고 하시면서 간언하는 자에게는 어떤 죄도 묻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에 따라 사람들이 모두 상소하여 정치의 잘잘못과 민생의 애환을 다 털어놓았으니 정말 말 그대로 숨김이 없는 조정이라고 하겠습니다. 국자박사(國子博士)와 생원(生員) 등이 이단을 배척한다는 이유로 글을 올려 견해를 폈는데 그 어투가 공손하지 못해 임금의 권위를 침해했으므로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모두 황공해 마지 않습니다. 저희들의 생각으로는 불교를 배척하는 것은 유학자가 해야 할 당연한 일이므로 예로부터 군왕들께서는 그냥 내버려두고 논죄하지 않았습니다. 하물며 전하의 도량은 보잘 것 없고 버릇없는 유생들을 너그러이 용서하여 줄만큼 넓으시니 부디 큰 은혜를 베풀어 모두 용서함으로써 나라 사람들에게 신뢰를 보이소서.”
왕이 그 말에 따라 김초 등을 용서했다. 또 정몽주는 다음과 같이 상소했다.
“상벌은 나라를 다스리는 중요한 규범으로, 한 사람에게 상을 주는 데 따라 천만 명이 그 사람의 행동을 따라하게 되고 한 사람을 벌하는데 따라 천만 명이 두려워하게 마련입니다. 지극히 공명정대하지 않을 경우 상벌이 적절성을 잃게 되고 따라서 한 나라의 인심을 복종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즉위한 이래로 성헌(省憲)과 법사(法司)에서 번갈아 글을 올려, ‘아무개는 왕씨를 세우려는 의견을 막고 신우의 아들 신창을 왕위에 올린 자46)다. 아무개는 역적 김종연(金宗衍)의 음모47)에 가담하여 행재소(行在所)에서 내응한 자다. 아무개는 장수들이 천자의 명을 받들어 신우 부자가 왕씨가 아니니 왕씨를 다시 세우자고 의논할 때 신우를 복위시켜 왕씨의 대를 영원히 단절하려 한 자다. 아무개는 윤이·이초를 명나라에 보내어 친왕(親王)의 지휘로 명나라의 군사를 동원하라고 청한 자다. 아무개는 선왕의 서손48)을 몰래 길러서 반역 음모를 꾸민 자다.’라고 탄핵하는 등 여러 차례 소를 올렸으나 전하의 마음만 번거롭게 했을 뿐 지금까지 명백히 밝혀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 간에 필시 죄가 있는 자가 부당하게 사면을 받거나 죄가 없는 자가 아직까지 누명을 씻지 못한 일이 있을 것인바, 두 경우는 모두 공정성을 잃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온갖 말들이 끊이지 않고 난무하고 있습니다. 저희들 의견으로는, 성헌과 법사에 분부하시어 합동으로 논의한 후 용의자들의 진술을 기록한 문서를 상세히 재검토해 아무개의 죄는 용서할 수 없으니 마땅히 법으로 처리해야 하며, 아무개는 정황이 확실치 않으니 가벼운 법을 적용해야 하며, 아무개는 죄가 없이 무고를 당하였으니 명백히 밝혀서 풀어주도록 하는 등의 조치를 취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진술을 기록한 문서가 올라오면 조정에 재상과 신료들을 부른 후 직접 문서를 심사하셔서 원통하고 억울한 일이 없도록 하소서. 그런 뒤에 벌을 내려 축출하거나 관용을 베푼다면 인심이 승복하고 공평한 법치가 행해질 것입니다.”
왕이 그 말을 좇았다. 이에 성헌과 형조에서 다섯 가지 죄목을 들어 논죄했다.
“왕씨를 왕위에 올리자는 의견을 저지하고 신우의 아들 신창을 왕위에 올린 자는 조민수(曹敏脩)·이색(李穡)입니다. 김종연(金宗衍)의 음모에 가담하여 내응한 자는 박가흥(朴可興)·지용기(池湧奇)·이무(李茂)·정희계(鄭熙啓)·이빈(李彬)49)·윤사덕(尹師德)·진을서(陳乙瑞)·박위(朴葳)·이옥(李沃)·이중화(李仲華)·진원서(陳元瑞)·김식(金軾)·이구철(李龜喆)입니다. 다만 지용기·박위·이무·정희계·이빈·윤사덕·진을서·진원서·이옥·이중화 등은 모두 문초하지도 않고 유배보냈으며 또한 공술도 없어 혐의가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나 지용기와 박위는 이름이 공신의 반열에 있고 지위가 장상(將相)에 이르렀으니 성심을 다해 보좌해야 마땅한데도 군관(軍官)을 많이 모아 김종연에게 의지할 곳을 만들어줌으로써 음모를 수행하려고 했으니 그 혐의가 매우 깊습니다. 김식과 이구철 등은 공술이 있긴 하나 진술이 불분명하여 그 혐의가 또한 의심스럽습니다.
신우를 복위시켜 왕씨의 대를 단절하려는 음모를 꾸민 자는 변안열(邊安烈)·이을진(李乙珍)·이경도(李庚道)·원상(元庠)·이귀생(李貴生)·정지(鄭地)·우현보(禹玄寶)·우홍수(禹洪壽)·왕안덕(王安德)·우인열(禹仁烈) 및 이색·정희계입니다. 대역 죄인 변안열은 공술이 남아 있지 않고 이미 처형당했으나 가산을 몰수하지 않아 온 나라 사람들이 실망하고 있습니다. 이을진이 변안열과 공모해 나라를 어지럽게 만든 죄상은 공술에 명백히 나와 있으며 또 지금 이을진의 진술에 의하면 이경도가 모의에 가담했다는 것도 의심할 바가 없습니다. 게다가 그는 변안열의 심복 부하로서 도진무(都鎭撫)에 있었으니 어찌 변안열의 음모를 몰랐겠습니까? 마땅히 이을진과 한 자리에서 대질 심문해야 할 것입니다.
원상과 이귀생은 정황을 알고도 자수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이림(李琳) 부자의 공술에 의하면 우홍수는 신우를 복위시키려는 음모에 가담했다고는 하나 공술이 없으므로 그 혐의에 의심이 갑니다. 정지의 공술을 보면 그가 죄도 없이 무고를 당한 것이 명백합니다.
박의룡(朴義龍)의 공술을 보면 이색이 신우를 복위시키려는 음모를 꾸몄음이 확실하니 마땅히 죄를 주어야 합니다. 우현보·왕안덕·우인열·정희계 등은 이미 모두 면직시키고 외지에 나누어 유배보냈으나 공술이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문초했던 순군관(巡軍官)에게 물었더니, 다들 우현보 등이 모의에 가담했던 사실은 김저(金佇)가 벌써 명백히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시 김저와 대질 심문시키지 않았고 공술도 없으니 혐의에 의심이 갑니다. 우인열은 국문을 위임받아 순군에 있으면서도 김저로부터 명료한 진술을 받지 않았습니다. 왕안덕은 도둔곶(都屯串)에서 패전한 후 여흥(驪興 : 지금의 경기도 여주군)으로 가서 우왕을 며칠 걸려 만났는데 그 간의 혐의는 매우 깊습니다. 또 이림 부자가 공술한 것을 보면 변안열이 우인열과 왕안덕을 시켜 우왕을 복위시키려 한 사실이 명백합니다.
윤이·이초의 글에 나온 자들 가운데 변안열과 김종연은 이미 처형당했고 이림과 조민수는 병사했으며, 우인열·정지·이숭인·권근(權近)·이귀생·우현보·권중화(權仲和)·장하(張夏)·이종학(李種學)·경보(慶補)는 이미 승복하였습니다. 이색·진을서·이인민(李仁敏)·한준(韓儁)·정룡(鄭龍)·구천부(仇天富)·이대경(李大卿)은 모두 공술이 없습니다.
윤이·이초의 글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홍인계(洪仁桂)의 공술에서 드러난 자 가운데 최공철(崔公喆)은 이미 곤장을 맞아 죽었고 최칠석(崔七夕)·안주(安柱)·공의(公義)·곽선(郭宣)·정단봉(鄭丹鳳)·조언(曹彦)·왕승귀(王承貴)·장충립(張忠立)은 이미 승복하였으며 조경(趙卿)은 병사했습니다. 선왕의 서손을 몰래 기른 자는 지용기인데 그가 왕익부(王益富)를 몰래 길렀던 일의 정황이 명백하니 그 죄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
왕이 정전(正殿)에 나가 정몽주 및 판삼사사(判三司事) 배극렴(裵剋廉), 겸 대사헌(大司憲) 김주(金湊), 문하평리(門下評理) 유만수(柳曼殊), 좌상시(左常侍) 허응(許應)50), 우상시(右常侍) 전오륜(全五倫)51), 간의(諫議) 박자문(朴子文)·전백영(全伯英)52), 헌납(獻納) 권진(權軫), 정언(正言) 유기(柳沂)·김여지(金汝知), 장령(掌令) 최함(崔咸)·김무(金畝), 지평(持平) 이원집(李元緝)·이작(李作)53), 형조판서(刑曹判書) 구성우(具成祐)54), 총랑(摠郞) 성보(成溥), 정랑(正郞) 하계종(河係宗), 좌랑(佐郞) 박의(朴猗) 등을 불러 다섯 가지 죄를 평결하면서 말했다.
“내가 즉위한 후 대간이 늘 다섯 가지 죄를 가지고 번갈아 상소했지만 죄상이 명백하지 않았으므로 죄를 주기가 어려웠다. 나의 골칫거리일 뿐 아니라 대간들도 이 때문에 혹은 관직에서 밀려나고 혹은 좌천되는 등 어지러운 일이 그치질 않았다. 이제 모든 것을 명백히 분변한 후 죄가 있는 자는 사사로이 용서하지 말아야 할 것이고 무고를 당한 자는 사면하지 않을 수 없다. 경들은 면전에서는 복종하는 척하고 물러가서 뒷말을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왕이 창왕을 옹립한 과정과 우왕을 복위시키려 한 일의 전말에 대해 물은 후, 이색에게 관용을 베풀려고, 다음과 같이 동정론을 폈다.
“무진년(1388) 장군들이 회군한 후 왕씨를 옹립하려고 이색에게 계책을 물었다. 조민수(曹敏脩)가 창왕의 외척으로서 당시 대장이었기에, 이색이 겁을 집어먹고 아버지를 폐하고 그 아들을 왕위에 올리는 것은 국가의 상례라고 대답해 준 결과 신창이 왕위를 잇게 되었으니 그 죄는 용서할 만하다.”
정몽주가 그 말에 수긍하며, 이색은 절조가 없었을 뿐 죄는 없다고 맞장구를 치자 김주가 논박했다.
“전하께서 왕위에 오르시기 전에 가짜 임금 신우가 현릉(玄陵 : 공민왕)의 후예라고 자칭했습니다. 이색은 그가 왕씨가 아닌 것을 뻔히 알면서도 아들 신창을 세우라고 앞장서 주장하면서 아비가 폐위되면 아들을 왕위에 올리는 법이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신씨가 왕이 되는 것을 정당화한 것입니다. 신씨가 왕이 되는 것이 정당하다면 전하께서는 신씨의 신하로서 신씨의 왕위를 찬탈한 꼴이 됩니다. 이색은 당대의 큰 유학자이면서도 국론을 결단하는 마당에 생사에만 매달려 의로움을 잊어버렸으니 그 죄가 용서될 수 있겠습니까? 왜 당시의 대장이었던 제군사(諸軍事)55) 같은 이는 믿지 못하고 굳이 조민수만 두려워했겠습니까?”
낭관들은 그저 머리만 조아리는데, 김여지(金汝知)가 유독 왕의 비위를 맞추느라 “저도 이색 등에게는 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 왕이 또 우현보(禹玄寶)와 박가흥(朴可興)을 용서하려고 하니 김주가 다시 “전하께서는 사사로운 마음이 있는 듯합니다.”라고 반대했으며 이에 왕은 벌컥 성을 내며 “경은 나를 사사로운 존재로 여기는가?”라고 하였다. 마침내 공술이 없고 김저(金佇)와 정득후(鄭得厚)의 진술만 있다는 이유로 이색과 우현보 등을 석방시켰다. 또 왕은 조민수와 변안열의 집을 몰수하고 지용기와 박가흥은 그전대로 부처(付處)시켰으며 우인열·왕안덕·박위는 외지에서 거주지를 마음대로 선택하고 하고 나머지는 모두 수도든 외지이든 거주지를 자유롭게 선택하게 하라고 명했다. 처음에 왕안덕도 수도든 외지이든 거주의 자유를 부여받았는데, 김주가,
“왕안덕은 남포(藍浦) 전투에서 휘하의 부대가 대패하고 귀환할 때 여흥(驪興 : 지금의 경기도 여주군)으로 우회하여 우왕을 알현하고 다시 옹립할 것을 의논하였을 것이니 어찌 죄상이 명백하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외지에서 거주를 자유로 선택하는 것만도 큰 은혜입니다.”
라고 하니 왕이 그 말을 따랐다. 정몽주가 왕에게 건의해, “지금 이후로 위에 든 사람들의 죄를 논하는 자가 있으면 무고로 논죄할 것이다.”라는 명령을 문서로 만들게 했다. 곧이어 정몽주에게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호를 내려주었다. 4년(1392)에 정몽주가 「대명률(大明律)」과 「지정조격(至正條格)」56) 및 본조의 법령을 참작하고 취사선택해 새로운 법률을 만들어 올렸다.
정몽주는 우리 태조의 위세와 덕망이 나날이 커져 온 나라 사람들이 귀복하는 것을 꺼림칙하게 여겼다. 또한 조준(趙浚)·남은(南誾)·정도전(鄭道傳) 등이 우리 태조를 추대하려고 모의하는 것을 알고서 일찍부터 틈을 타 그 모의를 분쇄하려 하였다. 세자 왕석(王奭)이 명나라 황제를 알현하고 귀국할 당시 태조가 황주(黃州 : 지금의 황해북도 황주군)까지 출영한 후 해주(海州 : 지금의 황해남도 해주시)로 사냥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져 몸을 크게 다쳤다. 정몽주가 그 말을 듣고 기뻐하며 사람을 보내어 대간에게 “이성계가 지금 말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으니 먼저 그의 심복인 조준 등을 제거한 뒤에 그를 처치해야 한다.”고 부추긴 후 조준·정도전·남은 및 평소 태조를 따르던 자 대여섯 명을 탄핵하여57) 처형시키고 태조마저 살해하려 했다.
태조가 귀경길에 벽란도(碧瀾渡 : 지금의 개성직할시 개풍군)58)에 이르러 묵으려 했는데, 태종(太宗 : 이방원)이 급히 달려가, “정몽주가 필시 우리 집안을 몰락시키려 할 것입니다.”라고 알렸지만 태조는 대답하지 않았다. 벽란도에 유숙해서는 안 된다고 말렸지만 태조가 말을 듣지 않다가 여러 번 강권하자 아픈 몸을 이끌고 가마에 탄 채 밤에 집으로 돌아왔다. 정몽주는 일이 성사되지 못할까 우려해 사흘이나 식음을 전폐했다. 태종이 다시, “형세가 매우 위급하니 어찌해야 하겠습니까?”라고 의논했으나 태조는 “죽고 사는 것은 운명에 달렸으니 다만 순순히 받아들여야 할 뿐이다.”라고 대답했다. 태종과 태조의 동생 이화(李和) 및 사위 이제(李濟) 등은 휘하의 책사들과,
“이씨가 왕실에 충성을 바친 것은 나라 사람들이 아는 바이다. 지금 정몽주에게 모함을 받아 악명을 뒤집어쓰게 되었으니 후세에 누가 이것을 변명하겠는가?”
라고 의논한 후 정몽주를 제거하려고 모의했다. 태조의 형 이원계(李元桂)의 사위인 변중량(卞仲良)이 그 모의를 정몽주에게 알리자 정몽주가 태조의 집을 찾아가 낌새를 살피려 했으나 태조는 평소처럼 그를 대했다. 태종이, 때를 놓칠 수 없다고 하며 정몽주가 돌아갈 때 조영규(趙英珪) 등 너덧 명을 보내어 길에서 그를 격살하게 하니 나이 쉰여섯이었다. 태종이 사실을 알리자 태조가 진노하며 병든 몸을 일으키더니,
“너희들이 대신을 함부로 죽인 판에 나라 사람들이 어찌 내가 그 사실을 미리 알지 못했다고 하겠느냐? 우리 집안은 본래 충효로 소문이 났는데 너희들이 이런 식으로 불효를 저지르는구나!”
라고 꾸짖었다. 태종이,
“정몽주 등이 우리 집안을 몰락시키려 하는데 어찌 앉아서 당할 수야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효도이니 이제 휘하의 군사를 소집해 불시의 변란에 대비해야 합니다.”
라고 건의했다. 태조가 어쩔 수 없이 황희석(黃希碩)을 시켜 왕에게,
“정몽주 일당이 죄인을 비호하면서 은밀히 대간을 꾀어 충량한 신하들을 모함하다가 이제 죄를 자복하였습니다. 조준과 남은 등을 불러 대간과 함께 사실을 조사해 밝히게 하소서.”
라고 알렸다. 이에 따라 대간을 국문하여 유배보냈으며 아울러 잔당들도 유배보낸 후 정몽주의 머리를 큰 거리에 매달고 “허위를 꾸몄으며 대간을 꾀어 대신을 해치려 했고 나라를 어지럽혔다.”는 죄명을 써붙였다. 태조 휘하의 책사들도 상소해 그 가산을 몰수하였다.
정몽주는 천분이 지극히 빼어났고 지혜와 용기가 절륜했다. 또 충효와 큰 절조를 지녔으며 젊어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부지런히 공부했으며 성리(性理)를 탐구해 깊은 학식을 쌓았다. 태조가 평소 신임하여59) 전쟁터로 나갈 때마다 반드시 그를 데리고 갔으며 여러 번 천거하여 함께 재상까지 올랐다.
당시 국가에 변고가 많아 중요한 기밀사항이 매우 많았는데, 정몽주는 의혹스러운 큰 사건을 처결하면서도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모든 일을 조리 있고 합당하게 처리했다. 당시의 상례와 제례는 오로지 불교 의식을 따랐는데 정몽주가 처음으로 사족과 서민들로 하여금 「주자가례(朱子家禮)」60)에 따라 가묘(家廟)를 세워61) 조상의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또 당시 수령을 임명할 때 참관(參官) 외의 이서(吏胥)까지 뒤섞어 뽑았기 때문에 수령의 위계가 낮고 인물도 용렬했는데, 그가 처음으로 참관 가운데 청렴하고 명망 있는 이를 뽑아서 기용하고 그 인사도 엄격히 시행했다.62) 또 도평의사(都評議司) 녹사(錄事)가 왕의 승인을 받지 않은 채 백첩(白牒)으로 금전과 곡식을 출납해 업무가 제멋대로였는데, 그가 처음으로 경력(經歷)과 도사(都事)를 두어 그 출납을 기록하게 했다. 도성 내에는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세우고 외지에는 향교(鄕校)를 설치하여 유학을 흥성하게 했다. 그밖에 의창(義倉)을 세워 궁핍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수참(水站)을 설치하여 조운(漕運)을 편리하게 한 것도 모두 그의 계획이었다.
시문은 호방하고 고결했으며 『포은집(圃隱集)』63)이 세상에 전한다. 본조에서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수문전대제학(修文殿大提學) 겸 예문춘추관사(藝文春鞦館事)·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을 추증하고 시호를 문충(文忠)이라고 하였다. 아들은 정종성(鄭宗誠)·정종본(鄭宗本)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정몽주 [鄭夢周] (국역 고려사: 열전, 2006.11.20, 경인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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