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 바울은 모든 바리새인들의 열정을 넘어서
"특심의 경지"였습니다.
사울의 열정은 가말리엘 문화에서 배운 바리새적인 전통을
그 만의 창조적 신앙으로 이어가는 것이었습니다.
학문과 신앙의 차이를 스스로 극복하고....
학문의 생명력을 역동적인 신앙으로 불어넣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구약의 인물이었다면 ....
아마도 이사야 선지자와 같은 위대한 예언가였을 것입니다.
사울의 유대교적 열심은
배운대로 실천하는 종교성을 가진 천재였습니다.
회심하기 전 사울의 유대교적 열심과 회심한 후 복음의 열정은
우위를 점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이처럼 사울은 바르게 아는 것을
마음을 다하여 헌신하고 충성하는 열정을 기본으로 가졌습니다.
회심하기 전 사울은
스데반을 죽이는데 분노의 돌을 던졌고, 믿는 사람을 죽이는데 앞장서서 가편투표를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은 물론 외국의 섬까지 믿는 사람들을 찾아 다니며 투옥시켰고....
교회와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잔해의 무서운 칼날을 유대교의 열심으로 가졌습니다.
어쩌면 사울 때문에
초대교회가 싹쓸이 당할 지경이었습니다.
당시에 믿는 사람들은 사울의 핍박을 피해
예루살렘을 떠나 멀리 구브로와 안디옥과 다메섹 등으로 가서 신앙 생활을 하였습니다.
다메섹에 믿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사울은
살기 등등하여 다메섹을 향하여 적극적이며 능동적으로 돌진하였습니다.
사울이 가진 박해와 잔해의 칼날은
유대교의 전사로서 위풍당당하였으며, 천하무적이었습니다.
다메섹 도상......
드디어 부활의 주님께서 움직였습니다.
부활의 광채로 나타나신 예수님은
핍박자의 눈을 멀게 하였고, 성령으로 복음의 눈을 뜨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핍박자 사울은 복음의 사도인 바울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충성된 일꾼이요, 좋은 군사요, 훌륭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변화와 회심은
부활의 예수님꼐서 주권적인 성령의 은혜로 말미암아 역사되었습니다.
사울의 변화와 그의 모든 삶은
예수 믿는 사람들의 모범적인 전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역동적인 믿음의 동력으로 가진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위해서 젼 재산과 전 생애로 헌신하고 충성할 것입니다.
바울은 그의 서신 곳곳에서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하며..........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로 사도가 되었으며,
성도 가운데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자로 은헤를 입었으며,
죄인의 괴수로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를 바라보았습니다.
핍박자 사울이 복음 전파의 사도가 되어
바울이라는 이름을 즐겨 쓰며, 이방인의 사도로 충성을 다하였습니다.
참고로 사울은 유대적 이름이며,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 이름입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유대인으로 유대교적 열심을 행하는 일에는 사울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고,
회심한 후 이방인의 사도로 복음 사역을 행할 때는 바울이라는 이름을 주로 사용하였습니다.
사울이라는 이름은 교회를 핍박하였던 유대적 이미지요,
바울이라는 이름은 복음을 전파하는 이방인의 사도적 이미지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유대인들에게는 핍박자 사울이라는 이름을 주로 사용하였고
복음을 받는 이방인들에게는 바울이라는 이름을 주로 사용하였습니다.
핍박자 바울, 복음 전도자 사도 사울이라는 말은 아주 어색하지만
핍박자 사울, 복음 전도자 사도 바울이라는 말은 자연스럽습니다.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의 광채로 예수님을 체험한 후
사울은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한 가운데 주의 제자 아나니야의 안수로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었고 세례를 받고는음식을 먹고 강건하여져서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며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켰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의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로 공모하여 성문까지 지키고 있는 가운데
제자들의 도움으로 광주리를 타고 다메섹 성을 빠져 나왔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첫 번째 복음 전도로 인한 고난이었습니다.
핍박자 사울이 복음 전도자 바울로 변하여 유대인의 핍박을 받게 된 것은
예수의 하나님 아들이심을 전파하며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증명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죽는 날까지 바울 복음의 중심이 되었고 복음 전파의 내용이었습니다.
다메섹을 빠져 나온 바울은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습니다.
☞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오직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갈1:15-19)
바울은 그 후 3 년 만에 바라바의 중재로 예루살렘의 수사도인 베드로와 주의 형제 야고보를 만났고.....
예루살렘을 출입하며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하여 예루살렘의 형제들에 의해서 다소로 보내졌습니다.
다소에 있는 바울을 바나바가 찾아와서 안디옥에서 함께 동역하며 1년 동안 큰 무리를 가르쳤는데
가르침 받은 제자들은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안디옥 교회의 큰 부흥으로 성령의 지시를 받아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세워 기도하고 안수하여 선교사로 파송하였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교회를 크게 성장 시켰던 바나바와 바울을 다른 지역의 복음 전도자로 파송하였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선교 시스템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교회 성장의 큰 영향을 끼친 담임 목사가 신임을 얻어
다른 지역의 복음 전도자와 산교사로 파송받는 것이 성경적인 원리입니다.
개척교회라도 성공한 경험이 없는 갓 신학교 졸업한 선교사를
단순한 훈련으로 이국만리 타국에 보내는 것은 선교 정책의 근본적인 부실입니다.
소위 말하는 목회에 성공한 담임 목사가 선교사로 파송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타지역에서도 능력있게 전하는 것이 이상적인 선교 정책으로 정립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성령의 지시요, 안디옥 교회의 모범적인 선교 전형입니다.
안디옥 교회가 부흥하자 곧바로 성령의 지시로
성령과 믿음으로 충만하였던 바나바와 바울을 타지역의 복음 잔도자로 파송하였습니다.
선교사로 파송받은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1차 전도 여행길에 올랐습니다.
바나바는 구브로섬의 레위인으로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고 밭을 팔아 헌납하고 복음의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바나바는 사울과 예루살렘의 사도들과 만남을 아름답게 주선하였으며
착한 사람이요, 성령이 충만한 사람으로 안디옥에서 큰 무리를 양육하였습니다.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1차 전도 여행을 시작하였습니다.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하였는데
당시 구브로 섬에 있었던 마가 요한을 수종자로 두었습니다.
온 섬을 두루 여행하다가 구브로 섬의 바보에 이르러 바예수라는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박수를 만나
"모든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 의의 원수여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겠느냐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고
성령이 충만하여 책망하였습니다.
바울의 전도 여행 가운데 성령이 역사하는 곳에
사탄의 거짓 역사가 물러나는 첫번째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선포되는 곳에
귀신의 거짓 역사가 쫓겨납니다.
바예수를 곁에 두고 귀신의 가르침을 받았던 총독 서기오는
바울과 바나바의 소문을 듣고 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였습니다.
총독 서기오를 중심에 두고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 거짓 선자자 바예수와 영적 전쟁을 치렀습니다.
유대인 거짓 선지자 바예수는
총독 서기오의 정치적 권력에 기생하여 살아가는 전형적인 거짓 선지자의 모습입니다.
어쩌면 조찬 기도회는
대통령의 권력을 숭배하는 정치적 거짓 선지자들의 복술일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한 역사는 바예수의 눈을 멀게 하였고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본 총독 서기오는 보는 것을 보고 믿었으며 듣고 경청한 사실을
경이롭게 받아들였습니다.
구브로 섬의 총독 서기오 바울을 믿게 한 것은
전도여행의 큰 성과요, 결실이었습니다.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렀으나
마가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마가 요한은 처음부터 선교 여행을 동역한 것이 아니라
구브로 섬에서 바울을 만나 수종자가 되었습니다.
구브로 태생의 바나바 생질인 마가는
예루살렘과 구브로를 자주 왕래하였던 것 같습니다.
밤빌리아 버가에서 전도 여행에서 여행을 떠나 간 것은
복음 전도의 열정으로 넘쳤던 바울에 큰 아픔을 남겼습니다.
선교를 후원하다가 한 사람이라도 중단하게 되면
선교사에게는 충격적 아픔이 됩니다.
그 만큼 전도와 선교는
헌신된 동역자가 절실히 필요한 것입니다.
특히 마가 요한은 삼촌 바나바와 함께
큰 부자였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성만찬을 마가 요한의 집에서 베풀었고
오순절 성령 강림의 역사가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가 마가 요한의 다락방이었던 것을 생각하면
어쩌면 사도 바울보다 마가 요한의 영향력이 당시에는 훨씬 더 컸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핍박자에서 회심하여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된지 알마 되지 않았지만
마가 요한은 예수님을 모셨던 유서깊은 집안이었습니다.
이러한 마가 요한의 동역을 받지 못한 사도 바울은
전도 여행이 더욱 험난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의 입장에서도
마가 요한의 행동이 잘 못 되었다고는 평가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과 함께 동역하였던 바나바 입장에서도
마가 요한이 예루살렘으로 돌아 간 것에 대해서 크게 잘 못 하였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당시에 마가 요한은 수사도 베드로를 등에 업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복음 사역의 주류를 형성하였습니다.
반면에 사도 바울은 아직까지는
복음 전도자라기보다 핍박자의 이미지가 더 강하였습니다.
마가 요한이 바울을 중심으로 사역을 동역하지 않았고
예루살렘 사도들을 중심으로 사역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선교의 중심 축이 예루살렘에서 이방으로 가는 것을 알았고
그 중심 역활을 할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사실을 사도의 사명으로 받았습니다.
2차 전도여행 때 마가 요한의 일로 바나바와 바울은 크게 다투었고
동역의 결별을 고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바나바의 생각에도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사도들이 복음 전도의 주류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성령 충만하여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받았지만
아직까지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의 사도들에 비해서 존재감이 미약하였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의 충돌은
복음 사역의 중심 축에 대한 정체성의 갈등이었습니다.
마가 요한은 단순히 바나바의 생질로서의 의미뿐 아니라
예루살렘 사도들과 연결된 끈이었습니다.
바나바는 복음 사역의 중심 축이
아직까지는 예루살렘의 사도들이라는 생각을 하였니다.
그래서 바울과 사역을 영원히 결별하고
예루살렘 사도들을 중심한 독자적인 사역을 감행하였습니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들의 갈등......
오늘날 교단 분열이라는 현실로 적용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밤빌리아 버가에서 마가를 떠나 보내고 실망한 사도 바울은
버가의 화당에서 스데반과 같은 해박한 구약의 이해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아 들으라며 말씀을 강론하는 사도 바울은
구약 성경에 대한 해박한 이해로 아브라함과 모세와 선지자의 글을 아우러며
특히 시편의 메시야 예언에 관한 글을 인용하여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증거하였습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증거하는 바울의 메세지는
다음,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는
놀라운 말씀의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모인 사람들을 향하여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는 놀라운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리하여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습니다.
그러나 진리의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
고난과 핍박의 역사는 등식이 되어 그 뒤를 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유대인과,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인
유대인들의 계보를 이은 밤빌리아 버가의 유대인들은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며,
그 성의 경건한 귀부인들과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었습니다.
어떤 곳에서든 핍박하면 핍박받고, 고난과 어려움을 당할 수 밖에 없는
바울과 바나바였습니다.
핍박을 반전시키는 권력은 주어지지 않았으며,
전도의 결과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닌 세상의 부귀와 영화도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교회가 재산을 축적하여 큰 교회당과 물질의 힘을 의지하는 것은
오직 성령의 능력을 의지하여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의 전도 여행과는 아주 거리가 먼 것입니다.
교회의 사이비성은
대형 교회당과 큰 물질을 성공과 번영의 복으로 신앙의 목적과 비전으로 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진리의 복음과 혼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의 바알 신앙이었습니다.
참된 하나님 나라의 복음 신앙은
물질과 권력을 믿음의 복으로 추구하지 않습니다.
진리의 말씀, 구원의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 구원의 열매와 함꼐 고난과 핍박을 겸하여 받았지만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하였습니다.
어려움과 시련을 받을 때 원망과 불평을 하는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으로 받는 고난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겪는 인생역경입니다.
그러나 고난과 핍박을 받을 때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는
하나님 나라 의를 위하여 고난과 핍박을 받은 영광의 증표입니다.
밤빌리아 버가에서 마가 요한을 떠나 보내고
유대인의 고난과 핍박을 받은 바울과 바나바는 이고니온에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주로 유대인의 회당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였는데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었지만 순종하지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였고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리들이
두 사도를 모욕하여 돌로 치려고 달려들어 이고니온에서 피하여 도망하였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은 이고니온에서 오래 동안 머물면서 주를 힘입어 복음을 담대히 전하였는데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게 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이고니온의 놀라운 복음 전도의 실적을
바나바와 바울의 믿음이나 열정으로 되었다고 기록하지 아니하고
주를 힘입어....말하였고,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자신을 한 번도 드러내지 아니하고
오직 사도들을 통하여 일하시는 성령의 주권적인 은혜의 역사를 기록으로 전하였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누가의 복음 신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고니온에서 핍박을 피해 도망한 바나바와 바울은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발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 앉아서 바울의 말씀을 경청하여 구원의 믿음을 가졌는데
바울이 다가가서 주목하여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일어나 걸었습니다.
무리가 바울이 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 질러 이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제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헤르메스라 하였습니다.
시외 제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환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여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 질러......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함이라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민족으로 자기들의 길들을 가게 방임하셨으나
그러나 자기를 증언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여러분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셨느니라" 고 외쳤습니다.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였습니다.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이 걷는 기적을 목격한 무리들은
바울과 바나바를 제우스와 헤르메스의 헬라신이 사람의 형상으로 내려왔다며
신의 제사를 드릴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나바와 바울은
주의 능력으로 행한 일의 영광을 복음의 말씀으로 담아내었습니다.
제우스 신을 섬겼던 헬라 사람들에게
하늘로부터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여러분의 마음에 만족하게 하시는 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라고 하나님의 증언을 하였습니다.
복음의 결실과 영광을 오직 하나님께 돌리는 바나바와 바울은
성령의 믿음과 진리의 말씀으로 충만한 참된 사도였습니다.
오늘날 거짓 영의 미혹으로 방언과 입신, 신유와 기적을 일으켜....
그 모든 영광을 풍성한 물질과 신령한 주의 종이라는 영예를 독식하는 사이비 교주들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복음의 결실과 표적과 기적의 역사는 "
하나님의 자기 증언"을 사도들로 이루신 것입니다.
주께서 하신 것이라는 것을 사도들도 알았고,
이 모든 것을 기록한 누가도 알고 그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목회 성공의 영광을 담임 목사나 사이비 교주들이 받는 타락한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복음 사역의 청정한 모습은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을 교훈으로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거품이었던 제우스와 헤르메스로 추앙받는 영광은 잠시였고.....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 와서 무리를 충동하여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여서
성문 밖으로 내쳤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바울은 제자들이 도착하였을 때
툴툴 털고 일어났습니다.
복음 사역자....사도들에게 안전한 보호 장치가 없었고
목숨을 담보한 전도 여행은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으로 계속되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 일행은 유대인을 피해 밀행하였으며
루스드라를 떠나 더베로 가서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
여기서 잠시..... 오늘날 올림픽 경기는
희랍의 신 제우스를 추앙하며 스포츠의 축제로 드리는 제전의식이라는 사실입니다.
국제적인 스포츠 경기로 굳어졌지만 올림픽의 정신은
제우신을 섬기는 고대로부터 이어진 종교적인 제전의식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이 올림픽 경기에 큰 관심을 갖는 것은
구원의 은혜를 주신 성령의 거룩한 기쁨을 모욕하는 것입니다.
운동으로 스포츠를 좋아하는 것은 상관없지만 .....
올림픽 경기를 스포츠의 축제로 기뻐하는 것은 제우스 신을 열광하는 것입니다.
올림피아제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절대신인 제우스 주신(主神)에게 바치는 일종의 종교행사였습니다.
특히 개막식의 성화 봉송과 성화의 긴 항해는
아테네의 주신 제우스를 향한 종교적 염원과 의미를 담아내는 것입니다.
올림픽의 창조적 철학 정신은
헬레니즘의 대표적인 문화로 역사의 큰 뿌리요, 긴 줄기가 되었습니다.
올림픽의 배경을 안다면.....참된 그리스도인들은
아테네의 주신 제우스를 향한 성화 봉송을 그렇게도 찬란하게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
더베에서 성공적인 전도사역을 이루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였습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위로하고.....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여 사역자로 세우고는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말씀을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거기서 배 타고 수리아 안디옥에 이르렀습니다.
수리아 안디옥은 두 사도가 1차 전도여행을 통하여 이룬 그 모든 일을 위하여
처음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었습니다.
그들이 안디옥에서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하고 그 모든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었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의 1치 전도 여행은 안디옥 교회를 성장시킨 여력으로
다른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성령의 지시로 되었습니다.
구브로 섬에서 마가 요한을 동역자로 만났으며,
거짓 선지자 바예수를 물리치고 총독 서기오를 믿음으로 구원하였습니다.
밤빌리아 버가로 가서 구브로 섬에서 얻은 동역자 마가를 예루살렘으로 떠나 보냈지만
버가의 회당에서 스데반의 설교와 같은 말씀을 강론하여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는 말씀의 열매로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두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게 되는 결실을 이루었으며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져 제자들의 수가 많아지고 기쁨과 성령이 충만한
은혜의 역사를 경험하였으나 유대인의 박해를 받았습니다.
이고니온에서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복음을 담대히 전하였는데
주께서 그들의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언하여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따르고 믿는 놀라운 역사를 경험하였습니다.
이고니온에서 유대인의 핍박으로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였는데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는 기적으로 모인 많은 무리들에게 담대해게
하나님의 증언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루스드라에서 유대인의 핍박으로 돌아 맞아 죽을 뻔한 경험을 하고는
더베로 가서 복음을 전하여 많은 제자를 얻었습니다.
고난과 핍박을 피하여 잠행과 밀행으로 갔던 길을 되돌아 말씀으로 든든히 하고 장로를 세우고
사역자를 세워 놓고 처음 파송받은 안디옥으로 안전하게 돌아와서
성공적인 전도 여행을 아름답게 보고 하였습니다.
1차 전도여행을 마친 바나바와 바울은 안디옥에서 오래 유하며
수다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였습니다.
2차와 3차, 그리고 4차 전도여행을 통한 바울의 하나님 나라 이해는
새로운 제목의 글로 계속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