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회 김성용 과장님
[2021년 8월 8일
2021년 10월 13일(수)
생명의 삶 Q.T. 묵상 - [동정하고 경청하지만, 거기까지만]
●성경본문 : 욥기 7:1~10
순탄하기만 한 인생이 어디 있겠습니까?
살다보면 구부러진 길도 나오고, 힘겨운 오르막길이나 가파른 내리막길도 나옵니다.
인생이란 게 올라가면 의미 있고, 내려가면 허무한 겁니까?
“남의 염병이 내 고뿔만 못하다. 남의 고뿔이 내 손톱 밑의 가시보다 못하다.”는 표현이 있죠.
남의 고통보다 내 고통이 훨씬 우선이라는 말입니다.
고통을 당하는데 큰 고통과 작은 고통이 따로 있지 않습니다.
내가 겪으면 어떤 것이든 인생의 가장 큰 고통입니다.
중요한 것은 모든 순간 우리가 굳건히 서 있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붙들고 계시기 때문임을 알고, 인정하고, 감사하며, 이후의 모든 과정도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인생의 절벽을 경험한 사람은 길고 외롭고 고통스러운 밤을 지새우게 됩니다.
욥의 인생은 점점 더 깊은 허망함을 향해 빠져 들어갑니다.
쳐 박힌 게 문제가 아니라, 거기서 빠져 나올 생각은 안 하고 허우적거리고 있는 게 문제입니다.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뭔 넋두리에 시간을 허비합니까!
차라리 사람을 등지고, 벽을 향해야 합니다.
낙심과 절망의 소리를 지르느니, 찬송을 불러야 합니다.
욥의 고난과 고통을 동정합니다.
곁에서 그의 목소리에 진심을 담아 경청합니다.
함께 아픔을 느끼며 눈물 흘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까지입니다.
반박하거나, 주제넘게 해석하거나, 뭐라도 아는 듯 대안이라고 떠들 것도 없지만 절대로 동의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탄식과 한숨을 온전히 들으십니다.
그리고 끝까지 버틸 수 있게 하십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인생은 결코 죽음과 함께 사라지지도 지워지지도 않습니다.
시편 84:8~12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 (셀라)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2021년 10월 11일(월)
생명의 삶 Q.T. 묵상 - [고난 앞에서]
●성경본문 : 욥기 6:1~13
‘절망’은 모든 희망을 포기한 정서 상태를 말합니다.
사람이 극심한 고난 때문에 절망 상태에 빠지면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합리적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엘리바스의 말을 들은 욥은 자신의 마음을 담아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차라리 죽는 게 훨씬 낫겠다고 말하는 이것이 욥이 맞닥뜨린 상태입니다.
42장이나 되는 욥기를 단지 몇 개의 구절로 밖에 기억하지 못하는 데는 바로 이런 이유가 있는 거겠죠!
오늘 말씀을 읽고 묵상글을 쓰는 것은, 쓰레기통에서 그래도 뭔가 쓸만한 게 있지 않을까 싶어서 뒤적거리는 것과 같은 참담한 심정입니다.
욥은 자신이 얼마나 깊은 상처와 슬픔을 당했는지 친구들이 알아주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나 엘리바스의 말은 전혀 욥의 비통과 재앙을 이해해 주지 않습니다. 아니, 엘리바스의 말은 말잔치에 불과할 뿐 전혀 문제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집에나 가버리지 도대체 왜 여기 남아서 저러고 있나 싶습니다. 배려 없는 충고는 무익할 뿐입니다.
사람에게 위로를 구하면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공감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입니다.
히브리서 4:15~16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욥은 차라리 죽는 게 자신의 소원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이 극심한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얼마나 나약해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난이 지속되면 견디기 어렵습니다.
더구나 견디기 힘든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외면하신 것 같다고 느낄 때입니다.
아마도 욥은 엘리바스에게 설득당한 것 같습니다.
지금의 고난이 자신의 죄의 산물이고,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징계라고 여기는 모양입니다.
물론 우리는 날마다 예수님의 보혈을 의지해서 회개해야 합니다.
그러나 훈련과 연단으로 하나님의 기대하심을 이뤄가기 위한 과정으로서의 고난 앞에서 흔들릴 이유가 없습니다. 의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8:29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나는 항상 그가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이사야 49:14~16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예수님은 ‘나를 보내신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 하신다, 나를 혼자 두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믿음 없는 자들이 ‘하나님이 너를 잊어버렸냐’며 조롱할 때, ‘어찌 여인이 젖 먹는 자식을 잊겠냐’며 하나님은 절대로 나를 잊지 않으시며 나를 그분의 손바닥에 새기셨다고 고백합니다.
고난은 결코 쉬운 상대가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고난당하는 지체들을 돌아보고 공감해 주며 그들이 회복되기까지 믿음을 잃지 않도록 격려하고 돕는 일은 너무나 중요한 일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내민 손을 단 한 번도 뿌리치지 않으십니다.
지금까지 함께 하신 하나님, 지금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장래에도 함께 하실 하나님이십니다.
고난 앞에서 나 자신은 물론이고 모두가 넘어지지 않기를 기도해야겠습니다.
2021년 10월 10일 성령강림절 후 제20주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배합니다.
한량없는 자비와 사랑에 힘입어 한 주간의 첫날로 거룩한 주일을 지키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험난한 인생 여정 가운데 고통과 슬픔만 가득한 것 같지만 하나님의 시선이 우리의 삶을 떠나지 않고 보호하시며 인도하시고 새 길을 여심을 믿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않으면 담대할 수 없고, 주의 말씀이 아니면 원수마귀가 틈타며, 깨어있지 않으면 분별하지 못함을 깨닫습니다.
오직 말씀의 전신갑주를 입게 하시고, 좌우에 날선 성령의 검으로 무장하게 하셔서 주님으로 말미암아 강하고 담대하게 하옵소서.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과 낙심이 몰려와도, 주님께 기도하며 연약한 무릎을 세워 주와 동행하게 하옵소서.
세상 권좌에 앉은 자들의 이는 창과 화살이요, 그들의 혀는 예리한 칼이며, 온갖 장애물로 우리의 걸음을 막고, 우리가 웅덩이에 빠지도록 유혹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의 마음은 이미 확정되었고 확정되었습니다.
오직 주의 자비하심을 의지하며, 주님만 찬송하며, 하나님의 이름만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모든 재앙이 지나가기까지 피난처 되신 주의 날개 아래 거하게 하옵소서.
변치 않는 하나님의 신실한 약속 가운데 거하는 성도가 되게 하옵소서.
새 일을 이루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년 10월 8일(금)
생명의 삶 Q.T. 묵상 - [착각이 확신이 되지 않도록]
●성경본문 : 욥기 4:12~21
엘리바스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진다면, 당신 자신에게 더욱 주의하여야 합니다.
그런 당신은 긍정적(!)이며 순종적(!)이고 꽤 믿음이 좋은(!) 편에 속할 것 같습니다.
당신은 다른 사람들에게 착한 사람으로 인정되고, 드러나지 않게 누군가를 돕는 일에 익숙한 사람일 것 같습니다.
그럴수록 당신은 당신에게 조언 할 사람을 많이 두십시오.
당신의 판단을 실행하기 전에 의견을 나눌 멘토가 있어야 합니다.
함께 삶을 나누며 기도할 수 있는 동역자를 더욱 두텁게 만드십시오.
왜냐하면 당신은 타인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반면에 별로 실속(!)이 없을 가능성이 많을 것 같아요.
심지어 누군가의 꼬임에 넘어가서 큰 낭패를 볼 수도 있거든요.
하하~~, 아닐 수도 있지만요!
엘리바스는 인과응보의 법칙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압니다. 그럼에도 인과응보에 대한 기대심리에 가치관이나 더 나아가 종교성을 결부시키려는 노력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물음표(?)를 하나 붙여둘 필요가 있습니다. 인과응보가 당연해 보이지만 막연한 기대는 결국 삶에 더 큰 회의를 가져올 뿐입니다.
본문은 엘리바스가 자신이 경험한 신비한 일에 대해서 말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자기 경험이나 체험을 바탕으로 하는 말에 힘을 주는 사람이 있다면 더 큰 물음표(?)를 붙여둘 필요가 있습니다.
특정성을 일반화하려고 하는 것이 단순한 제안 정도여야지, 과도한 몰입을 요구하거나 동의나 동조가 강요될 때에는 각별히 주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확증 편향(Confirmation bias, myside bias)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이 사실임을 확인시켜 주는 정보를 찾고, 자신의 생각에 반하는 정보는 무시하는 경향을 말합니다.
쉽게 말해서,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것입니다.
컴퓨터나 핸드폰 속의 포털 사이트, 유튜브, 쇼핑사이트 등에서 사용되는 ‘알고리즘’을 경계해야 합니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충족시켜준다는 편리함 뒤에는 편향적 사고와 무분별한 동조로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출처’와, ‘사실 여부’를 확인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엘리바스는 형체를 식별할 수 없는 영이 지나가자 온 몸의 털이 주뼛 섰다고 말합니다.
그 영이 눈앞에 있었지만 그는 형상을 알아보지는 못했는데, 그때 영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고 합니다.
엘리바스는 자신의 경험이 사실임을 강조하기 위해 자신의 시각과 청각으로 신비한 형상의 존재를 확실히 느꼈음을 묘사합니다.
누군가의 신비한 경험을 부인할 방법은 없습니다. 봤다는데, 들었다는데요! 그런데 이런 신비한 일의 ‘사실 여부’보다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누구에 의한, 왜, 무엇을 위한 신비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념이나 지나친 강박에 의해 만들어진 신비 체험을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고 우기고 싶겠죠!
귀신과 마귀에게 사로잡힌 자들도 신비를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을 들먹이곤 합니다.
엘리바스는 두 개의 수사의문문을 사용합니다.
문장 형식은 물음을 나타내지만, 답변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강한 긍정을 나타내는 의문문 형태를 말합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 사람이 어찌 창조하신 이보다 성결하겠느냐”라는 음성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의미는, ‘사람은 절대로 하나님보다 의로울 수 없어. 사람은 하나님보다 더 깨끗할 수 없어. 욥, 너는 반드시 네 죄에 대해 책임지기를 배워야 해. 어떤 사람도 하나님 앞에서 완벽할 수 없으니까 말이야.’라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별로 틀린 말 같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이 일반론을 욥과 직접 연결시키는 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죄 없이 고난을 당해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람에게 일반 법칙을 강요해서는 안 됩니다.
상처 받은 사람의 친구가 되려면, 먼저 그 아픔에 공감해야 합니다.
엘리바스는 18~19절에서 ‘흙집’ 즉 영혼이 기거하는 육체를 일컬으며, 인간은 약한 존재이기에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설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역시 원론적인 면에서 맞는 말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그의 적용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욥의 신앙을 인정하셨습니다. 반면에 사탄은 욥의 진심을 왜곡합니다.
엘리바스는 지금 하나님 편에 있나요, 아니면 사탄의 편에 서 있나요?
심지어 엘리바스는 완곡한 어조로 하나님을 냉담한 분으로 묘사합니다(20절).
하나님에 대한 편견, 착각입니다.
게다가 사람이 육신의 죽음을 맞을 때 구부려 접는 장막처럼 일시적임을 묘사하며, 삶을 자기중심적으로만 이해해서 불평하고 탄식하는 인간은 지혜가 없는 상태로 죽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는 욥이 그렇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는 욥을 위로하기 위해 찾아왔고 지금까지 옆에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욥을 위로하려는 원래 목표를 잃어버리고, 악담마저 서슴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경험에 의존해서 욥을 비난하고 정죄하며 욥이 심판 당한 것임을 증명하려고 합니다.
욥을 비참한 상태에서 일으켜 세우기보다 오히려 더 주저앉게 만드는 데에 시간과 정성을 소비합니다.
위로하기는커녕 오히려 괴로움만 가중하고 있습니다.
착각이 확신이 되지 않도록 겸손해야 합니다.
사람마다 처한 환경과 여건이 다르다는 것을 알고, 얄팍한 경험과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언행을 경계해야 합니다.
어떤 영적 체험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가장 영적이고 믿을 만한 것임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에서 얻은 통찰력과 지혜로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021년 10월 7일(목)
생명의 삶 Q.T. 묵상 - [고난이 유익이라]
●성경본문 : 욥기 4:1~11
“참고 기다려라. 이 힘든 고난은 땅에서 솟아오른 저주가 아니라, 어둡게 변장한 모습으로 하늘에서 내려온 축복이다.” - 헨리 워즈워스 롱펠로 Henry Wadsworth Longfellow
러시아 과학자들이 특별한 실험을 했습니다.
동물을 두 그룹으로 나눠, 한 그룹은 생명의 위협을 가하며 약간의 음식만 주었고, 다른 그룹은 좋은 환경에서 충분한 먹이를 주었답니다. 그런데 좋은 환경을 제공한 동물들이 더 빨리 죽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고난과 긴장이 반드시 해가 되는 것만은 아니라, 때로는 유익한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축복이라는 보화를 고난이라는 검은 보자기에 싸서 보내 주실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검은 보자기만 보고 괴로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난의 보자기에 감춰어져 있는 하나님의 축복과 보화를 볼 줄 아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고난을 하나님을 모르는 죄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나 당해야 하고, 하나님을 잘 믿고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은 겪지 말아야 할 것으로 잘못 인식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의 믿음을 더욱 온전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죄’에 대한 우리의 면역력은 참으로 형편없습니다.
조금만 넉넉해도 교만해집니다. 그래서 믿음의 성장도 멈춥니다.
어떤 사람은 죄의 습성이 좀처럼 없어지지 않아 덕이 되지 못합니다.
그러나 고난을 겪음으로 교만이나 죄의 습성이 사라질 수 있을 때, 고난은 경건에 큰 유익이 됩니다.
욥의 고난 앞에 세 명의 친구들은 할 말을 잃고 7일 동안 침묵 속에 슬픔을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욥이 입을 열어 말하기 시작하는데, 그의 말은 모두에게 충격적이었습니다.
자기가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부인하는 듯한 분노에 가까운 탄식을 쏟아 놓았습니다.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이 일을 그냥 넘길 수는 없다고 생각한 듯, 엘리바스가 입을 열었습니다.
엘리바스는 욥의 문제를 지적하기 전에 욥이 과거에 다른 사람들을 도왔던 일을 상기시킵니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부자요, 지혜자로서 그가 속한 공동체에서 많은 일을 해왔습니다.
교육적 차원에서 여러 사람에게 조언하기도 했고, 때로는 매서운 말로 훈계하기도 했습니다.
동시에 삶의 무게로 절망하고 지친 자들에게 위로와 도움을 주기도 했습니다.
손이 늘어진 자를 강하게 했고, 넘어진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했습니다.
욥은 도움과 위로가 필요한 누군가에게 ‘위로하는 사람’이었으며, ‘희망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엘리바스는 욥이 일관성이 없는 사람이라고 지적합니다.
고통 없이 일상을 살던 욥이 고통을 당하자 태도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어디 욥 뿐 이겠습니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당하는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탄식합니다.
고통 속에서 자신의 연약함과 마주할 때 평상시 보지 못했던 자신의 어두운 면을 발견합니다.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 이것밖에 안 되는 존재였나’ 싶은, 그래서 스스로에게 좌절하고 절망합니다.
주변에 그런 상황에 있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나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까요?
이때 우리도 엘리바스처럼 상대방을 우리의 잣대로 판단하고 평가하려는 유혹을 받습니다.
믿음이 굳센 사람인 줄 알았는데 믿음이 없다고 판단하거나, 사랑이 많고 베푸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기적인 사람인 걸 이제 알았다고 말합니다.
상대방에 대한 이런 평가와 판단이야말로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더 큰 짐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엘리바스는 어떤 일의 결과로부터 그 원인을 추정하는 사고에 익숙합니다.
욥의 고난은 곧 욥이 죄를 지었음을 확증하는 표시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향해 탄식하기보다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뉘우치는 것이 급선무라는 것이 엘리바스의 조언입니다.
그러나 이런 그의 주장에는 무죄한 자가 망했을 때 결국 세상이 불공정하기 때문이라는 핑계와 변명과 탓으로 돌리는 비난의 마음이 준비되어 있다는 반증입니다.
만약 엘리바스가 욥의 처지가 된다면, 과연 그가 욥에게 한 조언을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아니면 그도 욥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을 향해 탄식할 수밖에 없을까요?
심은 대로 거둔다는 원리가 우리의 사고방식에 깊이 뿌리박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원리가 늘 적용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현재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을 이런 인과응보의 법칙으로 판단하거나 정죄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판단과 헤아림으로 우리 자신도 평가받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야고보서 1:2~3)
고난이 없었다면 나는 얼마나 방종한 인생이 되었을까요!
고난이 유익이었습니다.
지금도 고난이 유익입니다.
2021년 10월 6일(수)
생명의 삶 Q.T. 묵상 - [고난 받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성경본문 : 욥기 3:11~26
누구나 자신이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을 마주하면 혼란스러운 심리 상태를 보이기 마련입니다.
욥의 모습은 사람들의 연약한 심리를 대변해 줍니다.
욥이 겪는 심리적 혼란을 이해하면,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배울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종종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불안과 슬픔을 이해하고 공감하기도 전에, 자신이 아는 지식, 경험 또는 성경 말씀이나 자신이 받은 은혜를 가지고 그들의 말을 판단하고 가르치려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죽은 나사로를 애도하는 사람들과 함께 눈을 흘리셨던 것처럼, 우리도 먼저는 우는 자들과 함께 울 수 있는 긍휼과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시련 속에서 슬픔을 토로하고 마음의 혼란을 털어놓는 사람들의 혼돈과 두려움을 깊이 공감해 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작은 지식으로 조급하게 그들을 도우려 하기보다 따뜻한 공감을 표현하는 것이 고통을 이기는 힘이 될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원망하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자신으로 하여금 길을 잃게 하시고 사방으로 나갈 길을 막으셨다고 한탄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자신을 너무도 가혹하게 대하고 계신다는 생각으로 낙심한 상황에 있습니다.
욥이 고난당하기 전에 경험했던 하나님은 모든 상황 속에서 지혜를 주시고 언제나 해결책을 제시해 주시는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떤 문제든 어려움 없이 헤쳐 나갔으며 그 결과 엄청난 풍요를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도우심이 가장 절실한 상황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이 길을 막고 계신 듯한 답답함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런 욥의 한탄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그를 성급하게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의지하도록 돕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고통당하는 사람이 하나님에 관한 지식이 짧아서 한탄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단지 고통 속에서 느끼는 감정을 솔직히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시련에 아파하는 사람들의 혼돈과 불안한 생각들을 함부로 판단하지 마십시오.
때로는 옳고 그름에 대한 판단보다 따뜻한 침묵이 위로가 됩니다.
시련과 고통은 영적 침체를 불러옵니다.
그래서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은 삶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하나님이 가혹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 나약해진 사람들을 자기 기준이나 일반적인 잣대로 판단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고난 중에 낙심한 사람들을 위해 조용히 기도합시다.
과연 무엇이, 어떻게 하는 것이 따뜻한 마음을 전하는 길이 될지 생각합시다.
성급한 말과 행동을 삼가십시오!
하나님의 참된 위로가 함께하기를 바라며, 옆자리에 가만히 앉아보세요.
힘내라고 말하지 않을게요! 괜찮아 질 거라고도 말하지 않을게요!
다만 당신을 위해 조용히 기도할게요!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과 함께하십니다.
2021년 10월 5일(화)
생명의 삶 Q.T. 묵상 - [시련의 한복판에서]
●성경본문 : 욥기 3:1~10
예수 믿는 사람은 삶의 고통과 아픔을 느끼지 않는가?
어떤 일을 당하든 괜찮은 척이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아프다고 소리치는 게 믿음이 부족한 탓일까?
욥의 친구들이 찾아왔을 때 욥은 지금까지 견뎌왔던 고통과는 또 다른 고통을 느꼈을 것입니다.
친구들에게 자신의 비참한 상황을 보이는 것이 결코 견디기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마침내 침묵이 깨집니다.
한꺼번에 닥친 시련 앞에서도 믿음을 보이며 굳건한 모습을 보였던 것과는 달리, 욥은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합니다.
욥은 ‘인내하는 사람’에서 하나님께 대항하고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항의하는 사람’으로 변했습니다.
우리는 시련의 한복판에서 고통을 어떻게 대하고 다뤄야 할까요?
▶고통을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욥은 자신이 겪고 있는 상황이 너무도 고통스러운 나머지 자기 생일을 저주합니다.
자신이 태어난 날과 모태에서 잉태되던 날이 멸망했더라면 좋았겠다고 합니다.
욥이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 것은 결코 그의 부모를 저주한 것도, 하나님을 저주한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시련 중에도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았던 그의 모습과는 사뭇 다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를 정죄할 수는 없습니다.
욥의 탄식은 고통을 정직하게 대면한 반응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는 자기 안에 있는 슬픔이나 절망 같은 감정들을 나약한 사람들이나 느끼는 것으로 여기며 정직하게 대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마음의 상태를 외면하다가 결국 더 깊은 낙심과 절망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욥은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면서까지 자신이 현재 당하는 시련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지를 그대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고난과 고통을 경험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갑자기 잃거나 평생 모은 재산을 잃기도 합니다.
때로는 건강했던 육체에 질병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이런 여러 가지 고난이 닥쳤을 때 우리 안에 생기는 두려움과 슬픔을 정직하게 대면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 감정들 앞에서 우리는 인간이 얼마나 무력하고 연약한 존재인가를 발견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겸손의 자리에서 우리를 당신의 긍휼로 만나 주십니다.
▶고통을 솔직히 표현해야 합니다.
욥은 내면에 존재하는 고통을 정직하게 대면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탄식하며 표현할 수 있었습니다.
내면에 일어나는 괴로움을 억누르며 참기보다 하나님과 친구들 앞에서 입을 열어 토로했습니다.
아마도 욥은 타는 듯한 답답함 가운데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괴로움을 하나님을 향한 탄식으로 이어갑니다.
우리 중에는 참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하는 좀처럼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려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는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지나치게 의식한 나머지 표현하기를 어려워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고난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여겨, 다른 사람들에게 정죄당할 것을 염려해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숨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조국에 임할 하나님의 심판 소식을 접하고 절망과 낙심, 엄청난 고통에 빠졌습니다.
그 역시 자신이 태어난 날을 저주하면서, 자신이 태어났기 때문에 고생과 슬픔을 보며 인생을 부끄럽게 보내고 있다고 한탄했습니다(렘20:18).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도 인생에서 절망과 낙심을 예외 없이 경험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상실한 마음을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표현하십시오.
다만 그 마음이 원망과 분노로 이어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탄식에 귀를 기울이시며 피난처가 되어 주실 것입니다.
센 척, 괜찮은 척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욥이 고난 속에서 한탄하며 자신의 심정을 토로했듯이 하나님께 나아가 마음의 고통을 쏟아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의 슬픔과 낙심, 깊은 괴로움의 감정들을 다 아시며 이해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환난 가운데서 우리를 위로해 주시고, 다른 환난 중에 있는 이들을 도울 수 있는 힘도 주십니다.
탄식과 절망이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2021년 10월 4일(월)
생명의 삶 Q.T. 묵상 - [사탄은 포기하지 않는다]
●성경본문 : 욥기 2:1~13
이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전쟁이 있습니다.
사탄은 사람을 공격해서 영혼을 정복하고자 기회를 노리며 지속적으로 공세를 퍼붓습니다.
이 영적 전쟁을 경계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두 번째 천상회의가 시작됩니다.
사탄의 등장은 아마도 첫 번째 회의에서 하나님이 사탄에게 욥의 소유물을 칠 수 있도록 허락하신 일 때문에,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사탄이 까닭 없이 욥을 쳤음에도, 욥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를 저버리지 않고 자신의 온전함을 지켰습니다.
이것으로 욥의 경건은 사탄의 주장대로 하나님이 복을 주셨기 때문이 아님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비록 욥의 소유물을 거두어 가고, 그의 자녀들을 죽게 했지만, 정작 욥 자신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았기에 경건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손을 펴서 욥의 몸(뼈와 살)을 치신다면 욥은 틀림없이 주님을 향해 욕을 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욥이 자기만 안전하면 자식들이 희생당한 상황도 얼마든지 감내하는 매우 이기적인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사람은 지극히 이기적인 존재이기에 자기가 살기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하는 게 인간이라는 생각이 깔려있는 주장입니다.
하나님은 다시 욥을 사탄에게 맡기십니다. 그러나 욥의 생명만큼은 건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에 사탄은 욥을 쳐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종기가 나게 했습니다.
증상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질그릇 조각으로 온몸을 긁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욥은 정신적, 물질적, 신체적으로 고통 당했으며, 사회적으로도 격리되어 철저히 소외되었습니다.
이제 욥에게 남은 것은 아내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가장 가까운 욥의 아내마저 욥을 향해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고 말합니다.
* 여기서 ‘욕하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사실 ‘축복하다’를 의미하는 히브리어 ‘바라크’입니다.
히브리어를 그대로 번역하면 ‘하나님을 축복하고 죽으라’ 입니다.
욥의 아내는 괴로워하는 남편을 향해 그렇게 고통스럽게 살 바에는 하나님을 ‘축복하고’ 죽는 편이 더 낫지 않겠냐는 한탄 섞인 조언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럼에도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녀를 ‘악마의 보조자’라고, 크리소스톰은 ‘가장 악랄하게 욥에게 채찍을 주는 자’라고, 칼뱅은 ‘사탄의 도구’라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욥을 버린 사람으로 그녀를 몰아붙였습니다.
그러나 최초의 번역서로 알려진 칠십인역은 욥의 아내에 관해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리고 오랜 기간이 지난 뒤 욥의 아내가 그에게 말했다. “당신은 언제까지 참고만 계실 겁니까? 당신은 ‘보시오. 내가 구원받을 희망을 안고 조금만 더 기다리자.’고 말합니다. 보십시오. 세상 사람들은 더 이상 당신을 기억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식들을 기억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해산의 고통도, 애써서 기른 수고도 다 헛것이었습니다. 이제 당신은 구더기가 득실거리는 썩은 곳에 앉아 밤이 지나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지긋지긋한 일거리를 찾아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떠돌아다녔습니다. 애써 일거리를 얻어놓고도, 너무나 괴롭고 억울해서, 잠시라도 쉬기 위해, 빨리 해 지기만 기다리곤 했습니다. 자 이제는 주님을 향해 무어라고 말이라도 하고 나서 죽어버리십시오.”(2:9)
욥기 전체가 욥과 그의 고난에 초점을 맞추고 있더라도 우리는 그의 아내를 잊지 않았으면 합니다. 죽임을 당한 종들은 그녀의 종들이었고, 사라져버린 재물도 그녀가 관리하던 재산이었으며, 갑자기 죽임을 당한 자식들은 그녀가 해산의 고통을 겪으며 낳은 자식들이었습니다. 그것들은 욥에게 속한 것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욥의 아내의 소유이기도 했습니다. 갑작스러운 질환에 걸려 괴로워하는 사람은 그녀와 ‘한 몸’(창 2:24)이 된 남편이었습니다. 그녀도 욥이 겪은 고통을 같이 느꼈으며, 어쩌면 더 가슴 저리게 아파했을지도 모릅니다. 성서에 표현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비참한 현실을 그녀는 몸으로 막아내며 감당해야 했을 것입니다.
그녀는 남편 욥이 처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고, 어떤 위로나 도움의 말을 할 수도 없을 만큼 그녀 자신이 거대한 불행의 물결 앞에 속수무책인 상태였습니다.
욥은 그런 아내에게 거칠게 반응합니다. 욥은 그녀에게 ‘당신은 이런 자 곧 어리석은 여인’(아타트 한느발로트)이라고 말합니다. ‘어리석다’는 말은 미련하다는 뜻뿐만 아니라, 믿음이 부족하여 하나님의 목적을 신뢰하지 못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욥의 아내나, 이에 반응하는 욥의 말은 큰 아쉬움을 남깁니다.
만일 욥의 아내가 이렇게 말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여보, 나는 많은 것을 잃었어도 육신만은 멀쩡한데, 당신은 몸마저 그러니 얼마나 힘이 드세요.’
그 반대로 만일 욥이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여보, 당신은 그 많은 것을 잃고 특히 아들딸들을 잃어 가슴이 미어질 텐데 병든 나까지 돌보아야 하니 얼마나 힘이 드세요.’
재난을 겪는 사람에게 이런 말을 기대하는 것은 지나친 요구겠죠!
욥의 아내는 많은 오해를 받게 되지만, 실제로 욥을 떠나지 않았고 끝까지 그와 함께 했으며 그를 지켜 주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어쨌든 아내의 제안을 욥은 단호히 거절합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께 복을 받았기 때문에 화를 받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욥은 결코 입으로 범죄하지 않았습니다.
고난당할 때 입으로 죄 짓지 않는 것이 참된 신앙인의 면모일 것입니다.
욥의 세 친구가 그를 위로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욥의 상한 모습을 보고 일제히 울며 겉옷을 찢고 하늘을 향하여 티끌을 날려 자기 머리에 뿌립니다. 이는 극도의 슬픔의 표현입니다.
그들은 7일 동안 그와 함께 땅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침묵은 그들이 한 행동 가운데 가장 현명한 행동이었습니다.
진정한 위로는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욥의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나 사탄은 집요하게 욥의 순전한 믿음을 공격합니다.
육체의 건강마저 빼앗고 그의 영혼을 파괴시키려고 합니다.
하지만 욥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끝까지 유지했습니다.
우리도 이런 믿음의 소유자가 되기를 바라며,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위해 말씀과 기도에 힘쓰기를 바랍니다.
2021년 10월 3일 성령강림절 후 제19주
10월 달을 시작하게 하신 하나님께 찬양과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날마다 높아지는 하늘을 바라볼 때 시원한 바람으로 우리의 영혼을 정결하게 하옵소서.
푸르름을 뒤로하고 붉게 물들어가는 나무들이 겨울을 준비하는 것처럼, 가을의 풍성함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도 영혼의 겨울을 준비하는 지혜와 능력을 주옵소서.
꽃이 필 때가 있으면 꽃을 떨궈야 열매를 맺을 수 있고, 열매를 맺을 때가 있으면 열매를 떨궈야 번성하는 축복이 찾아올 줄로 믿습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23:6)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선한 싸움을 싸우며, 나의 달려갈 길을 모두 마칠 때까지 복음의 증인으로 살게 하옵소서.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본이 되게 하시고, 전심전력하여 성숙한 신앙의 삶을 드러내며, 나의 입술로 예수 복음을 전할 때 듣는 이들을 구원하게 하옵소서.
주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춰주셔서 온갖 세상의 멍에가 벗어지게 하시고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누리게 하옵소서.
주의 성도들에게 믿음을 충만하게 하시고, 믿음의 경주를 마치고 의의 면류관을 얻게 하옵소서.
영원한 소망이 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년 10월 1일(금)
생명의 삶 Q.T. 묵상 -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찾아가는 여정의 시작]
●성경본문 : 욥기 1:1~5
욥기는 욥을 소개하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욥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욥이 어느 민족, 어느 지파에 속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욥이 살고 있던 곳을 “우스 땅”이라고 언급하는데,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예레미야애가 4:21에 따르면 우스는 이스라엘의 동쪽 에돔 땅에 위치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정도입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가나안 땅에 살았던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욥기는 이스라엘 민족을 넘어 모든 인류의 생사화복을 주장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기록인 것입니다.
또한 욥의 배경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욥이라는 인물 자체에만 집중하게 하고자 함입니다. 특정 지역이나, 특정 사람들의 문제가 아닌 「보편적 인간의 문제」임을 강조하려는 것으로 보입니다.
욥을 거의 완벽에 가까운 사람으로 소개합니다.
이것은 이후에 그가 겪게 되는 고난과 불행이 더욱 비참한 이유가 됩니다.
또한 앞으로 그가 당하는 고난이 그의 죄 때문에 생긴 결과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욥은 온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여 악에서 떠난 사람입니다.
‘온전하다’는 말은 흠이 없고, 참되며,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그가 사는 공동체 안에서 바르게 살았기에 누군가로부터 비난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
‘정직하다’는 말은 잘못된 길로 가지 않고, 행위가 올바른 상태를 뜻합니다. 올곧음이 곧 그의 성품인 것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으로서 악을 멀리했고, 온전하고, 정직하게 살았습니다.
욥은 가정을 평화롭게 다스리고, 가정 경제도 훌륭하게 경영했습니다.
고대 근동지역에서 ‘완전함을 상징하는 숫자’가 연속적으로 등장합니다.
아들이 7명, 딸이 3명, 자녀가 모두 10명입니다.
양이 7천 마리, 낙타가 3천 마리로, 모두 10,000마리입니다.
소도 5백 쌍, 암나귀는 5백 마리로, 1,000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런 사실을 통해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이상적인 복을 받은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이 모든 복은 욥의 온전함과 경건함의 결과입니다.
최소한 여기까지는 ‘인과율의 법칙’즉 행위에 따른 화 또는 복의 원칙이 잘 작동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욥의 경건한 삶은 자녀들의 모습에서도 확인됩니다.
욥의 아들들은 자기 생일이 돌아오면 형제자매들을 초대하여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이는 분가하여 살고 있던 형제간의 우애가 매우 돈독했음을 시사합니다.
성경은 “채소를 먹으며 서로 사랑하는 것이 살진 소를 먹으며 서로 미워하는 것보다 나으니라”(잠 15:17)고 말합니다. 많은 재물이 있으면 화목하기가 쉽지 않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욥의 가족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많은 재물에도 불구하고 가족은 매우 화목했습니다.
하지만 욥은 이 잔치를 근심 어린 눈으로 살폈습니다.
왜냐하면 잔치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음식과 포도주였기 때문입니다.
욥은 자녀들을 지극히 사랑했기에 자신의 경건뿐만 아니라 자녀들 모두의 경건을 위해 관심과 노력을 쏟았습니다.
생일이 끝나면 욥은 자녀들을 차례대로 불러 그들을 성결케 하고,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자녀들이 혹시 술을 마시고, 취한 상태에서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말을 했을 수도 있기에 취한 선제적 조치였습니다.
욥은 자기뿐만 아니라 자녀들에게까지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고, 경건을 유지하게 했습니다.
이런 모습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일임이 틀림없습니다.
경건의 생활화로, 신앙은 인격이 되고 체질이 되고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5절까지의 서론에 해당하는 본문을 읽으면서 어떤 느낌이었나요?
조용하고, 차분하면서도 왠지 조심스러움이 지나쳐 불안하기까지 합니다.
신앙인이 경건하게 살아야 함에는 이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욥의 모습에서 우리는 평안과 자유를 발견하기 어렵습니다.
바로 욥의 삶에서 빠져 있는 부분은 삶의 ‘기쁨과 자유’입니다.
욥기는 욥이 자신의 경건한 삶에 채워져야 할 《아름다움과 즐거움을 찾아가는 여정》을 보여줍니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지만, 경건은 범사에 유익합니다.
따라서 Q.T. 즉 ‘경건의 시간’을 아침마다 갖는 우리는 모두 경건에 한 발자국 가까이 가게 될 것입니다.
또한 말씀을 읽고 듣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녹아든 삶이 우리의 참 경건을 증명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곧 사탄의 공격이 시작될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은혜 아니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인간의 온전함, 정직함, 하나님을 경외함이 사탄의 공격 앞에서 얼마나 무기력해질 수 있는지를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와 그리고 여러분과 함께 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은혜만이...
2021년 9월 29일(수)
생명의 삶 Q.T. 묵상 - [감사하고 자족하는 경건한 성도들]
●성경본문 : 디모데전서 6장 1~10절
▶섬김과 사랑으로
본문은 노예제도가 있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도, 누군가에게는 아랫사람이지만 한편 누군가에게는 윗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가정, 직장 등 조직 안에서의 바람직한 태도에 대한 교훈으로 삼을 수 있습니다.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이란 자유롭지 못한 종의 신분의 위치에 있는 이들을 말합니다.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주인에게 합당한 존경을 보이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종들이 스스로 자유자로 생각해서 규율을 지키지 않고 주인을 존경함으로 대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이름과 복음의 가르침이 비난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신앙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위에 있는 사람들을 마땅히 존경함으로 대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악한 행동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믿는 상전을 가진 종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요?
주인이 교회 공동체 내의 믿는 성도로서 믿음의 형제라고 해서 낮게 여기지 말라고 말합니다.
오히려 더욱 잘 섬길 것을 명령합니다.
왜냐하면 믿음을 함께 나눈 ‘신실한 자들이요’ 또한 ‘사랑하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종들이 믿음을 이유로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섬기고 희생하며 살 것을 요청합니다.
▶바른 말씀을 따르지 않는 자들에게
다른 교훈을 주장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차원이 높고 깊이 있는 교훈이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과 다르다면 그것은 헛된 변론과 언쟁일 뿐입니다.
그들은 교만하고 다툼을 좋아하는 자들입니다. 겉으로는 경건해보이기까지 하지만, 그들의 마음속 동기는 ‘자기 이익’에 있습니다.
아무리 학문적이고, 논리적이고, 실리적인 주장이라고 하더라도 예수님의 삶과 가르침에 어긋난다면 그런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헛소리’입니다.
참된 경건에 힘쓰는 성도들이 이런 교만한 자들과 갈등할 때 할 수 있는 선택 중 하나는 인내하며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들의 본 모습이 나오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을 위해 살지 않고, 영원한 것을 소망하며 살 뿐입니다.
▶자족하는 마음과 돈(물질)
돈을 사랑하는 것이 일만 악의 뿌리입니다.
돈에 대한 과도한 욕망을 자제해야 합니다.
물론 우리는 모두 돈 없이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필요와 갈망은 분명히 다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필요한 것 이상으로 돈 자체를 목적으로 삼고 갈망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돈은 삶에 필요한 도구로써 사람이 다스려야 할 대상이지 사랑과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탐심은 우상숭배입니다(골 3:5).
오늘날 많은 사람이 돈을 우상으로 섬기며 돈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돈을 탐내는 자는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 자기를 찌른다고 경고합니다.
사람들은 부자가 되기 위해 힘씁니다. 그러나 성경은 부하려 하는 자의 결국은 파멸과 멸망이라고 경고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성도는 돈에 대한 탐심과 미혹을 경계하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야 합니다.
자족하는 마음은 일만 악의 뿌리인 욕심에 끌려 다니지 않기에 말씀에 따라 경건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게 없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에 주목하십시오.
감사하고 자족하는 경건한 성도의 삶이되기를 바랍니다.
2021년 9월 28일(화)
생명의 삶 Q.T. 묵상 - [장로에 대하여]
●성경본문 : 디모데전서 5장 17~25절
바울은 감독과 집사, 과부들과 관련된 가르침에 이어, 장로들에 관한 매우 민감한 문제를 언급합니다.
장로로 번역된 ‘프레스뷔테로스’는 원래 ‘노인’이라는 뜻인데, 이후 공동체의 ‘지도자’라는 의미로 확장된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장로는 존경의 대상이자 재정적으로 지원해야 하는 대상으로 여겨졌습니다(17~18절).
그들은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위해 헌신한 자들로서,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장로에 대한 고소’ 문제를 언급합니다.
아마도 거짓 교사들에 의해 촉발된 교회의 혼란과 관련해서 장로들의 책임에 대한 논란이 있음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교회의 문제를 이유로 장로들에게 함부로 책임추궁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러나 장로들의 범죄에 대해서는 분명히 대처하라는 가르침도 함께 제시합니다.
장로들을 존경하고 함부로 의심하지 않아야하지만 범죄 사실이 분명하다면 모든 사람 앞에서 공적인 징계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를 다스리며 치리하는 자들로 세워졌다고 해서 치외법권과 무소불위의 자리에 있는 것은 아니며, 중요한 직분을 맡았으면 그 책임도 크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죄를 다루는 일은 상당히 민감한 문제로, 이에 디모데가 경계해야 할 두 가지 태도를 말합니다.
편견과 불공평한 태도입니다.
선입견이 없어야 하며, 편파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선입견과 편파적인 태도를 가지면 사람들을 부당하게 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교회 지도자가 누군가를 부당하게 대한다면, 그의 영혼과 신앙은 흔들릴 수밖에 없고, 이는 천하보다 귀한 영혼을 망하게 하는 악한 일입니다.
그밖에도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라” 즉 성급하게 안수하지 말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하지 말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죄에 참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오히려 “자신을 정결하게 지키라”고 권합니다.
장로들의 잘잘못을 가리기 위해서는 그들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만한 도덕적 정결함을 교회로부터 인정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악행도 선행도 드러나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어떤 것도 숨겨지지 않고, 밝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교회의 문제는 수학 문제처럼 답이 정확하게 나오기 어렵습니다.
많은 경우에 범죄 행위, 인간적인 관계, 현실적 상황 등이 얽혀 있습니다. 그래서 옳고 그름을 밝히기 어려운 경우가 많은데 굳이 잘잘못을 가리려다가는 오히려 더 큰 문제가 생기거나 억울한 사람이 생길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는 에베소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로 피곤함을 넘어 큰 부담을 지고 건강마저 좋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는 바울의 권면은 매우 이례적입니다.
“술에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다”라고도 했고, 감독직과 집사직의 조건으로 술에 중독되지 않을 것을 요구하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치유의 은혜를 경험했던 바울조차 실제적인 처방전을 낼만큼 디모데는 참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목회자나 교회 지도자가 존경받는 이유는 감당해야 할 일이 그만큼 고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의 신앙과 삶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죄를 대적하고 선함을 격려하며 믿음으로 살기에 힘써야 합니다.
어렵고 고될수록 말씀으로 돌아가고, 경건의 길로 가며, 오히려 정결에 힘써 모두에게 본이 되어야 합니다.
2021년 9월 26일 성령강림절 후 제18주
하나님의 은혜로 가을의 풍성함에 이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들판의 잘 익은 곡식들이 고개를 숙인 것처럼 주님 앞에 겸손하게 하시고, 온갖 과일들이 뜨거운 햇볕과 비바람을 견뎌 탐스러운 열매가 된 것처럼 우리도 주님께 드릴 열매가 익어가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추석 명절이 끝나 모였던 가족들이 자신들의 삶의 자리로 흩어졌습니다.
조심스러운 만남에도 불구하고 코로나의 확산은 멈출 기세를 보이지 않는데, 오늘도 거룩한 주일을 맞아 있는 곳곳에서 하나님께 예배드릴 사랑하는 가족들의 건강과 안전을 지켜주옵소서.
주의 ‘명령과 규례와 법도’를 마음에 새기게 하시고,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옵소서.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길 수 없음을 알게 하시고, 오직 순종의 마음을 주셔서 주의 말씀을 따라 사는 믿음으로 여호와의 복을 누리게 하옵소서.
상황과 환경에 끌려 다니지 않게 하시고, 썩어 없어질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하옵소서.
결코 쇠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며, 이 땅에서 천국의 소망을 이뤄가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기도하는 것보다 더욱 응답하시고, 생각하는 것보다 더욱 이루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년 9월 23일(목)
생명의 삶 Q.T. 묵상 - [오직 기도와 감사 외에 다른 방법은 없다]
●성경본문 : 디모데전서 2장 1~15절
추석 명절은 잘 보내셨나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2021년 남은 시간동안 하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잘 감당할 줄로 믿습니다.
지난 월요일에 사사기 21장으로 8월 3일부터 시작한 말씀을 마쳤습니다.
“왕이 없으므로 사람이 각기 자기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였더라”는 반복되는 후렴구는, 사사시대가 원망과 불평 그리고 불신앙의 시대였음을 보여줍니다.
마치 우리 자신을 보는 듯해서 더욱 불편했지만, 그런 우리의 탐욕과 죄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놓지 않으셨음을 생각하게 하는 은혜의 시간이었습니다.
지난 화요일부터 디모데전서를 시작했습니다.
사도 바울의 디모데와 에베소교회 지도자들 그리고 성도들을 향한 권면의 시작은, 다른 교훈 즉 율법주의에 대해서 경계하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무시하라는 것이 아니라, 율법 즉 ‘법대로’ 해야 하지만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은혜’라는 것입니다.
은혜는 곧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율법은 우리의 죄를 드러나게 하지만, 은혜는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거듭나게 합니다.
바울은 비방(신성모독)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던 자신에게 조차 직분을 맡기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를 드리며,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고 권면합니다.
오늘 본문 2장은, 이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권면합니다.
믿음의 선한 싸움, 푯대 향한 달리기에 지름길은 없습니다.
기도로 내 앞에 놓은 것들을 하나씩 건너가야 할 뿐입니다.
‘모든 것에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하여’를 문장 앞뒤에 배치해 모든 사람을 위한 간구가 다른 일보다 먼저임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사람을 놓고 기도해야 합니다.
네 종류의 기도가 언급되는데, ‘간구’는 간청, 요구, 요청의 의미입니다. ‘기도’는 ‘만나다’라는 뜻의 동사에서 파생되어 만남, 대화를 의미합니다. ‘도고’는 중보기도나 합심기도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감사’의 기도를 말합니다.
특히 우리는 세상의 정치 지도자들을 위해 기도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단지 세상이나 우리의 평안한 삶을 위함이 아닙니다.
세상 지도자의 지혜와 선정 그리고 세상의 평안함이 신자들의 경건에 유익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전할 수 있는 발판이 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누리며 구원의 감격으로 복음을 전할 뿐 아니라, 모든 이가 평안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어서 남성과 여성을 구분해 경건을 어떻게 추구해야 할지를 알려줍니다.
이것은 분명 남녀의 위치와 역할을 구분하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권고입니다.
남자들에게는 분노와 다툼을 없애고 하나님께 나아가라고 권합니다.
사실 경제적, 사회적 압박을 느끼며 가정을 부양해야 하는 남자들에게 경쟁과 갈등은 필연적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세상의 방법이 아닌 주님의 방법으로 살아야 합니다.
경쟁과 갈등의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하지만, 그것이 삶에서 우선하는 방법과 선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성들을 향해서 바울은 단정하게 행하고 선을 행하라고 권면합니다.
사회적 역할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던 당시 여성들에게 겉모습은 그들의 내면과 신앙을 드러내는 통로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여자 성도들은 온전하고 겸손하게 말하며 행동하고, 당시의 성적 방종과 뚜렷이 대비되는 순결하고 거룩한 모습을 보이고, 적극적으로 선을 행함으로 믿음을 나타내야 했습니다.
여성에 대한 차별처럼 보이는 바울의 권면은 초대 교회의 모든 여성에게 적용된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당시 여성들의 참여와 역할로 교회는 크게 성장했습니다.
그만큼 초대 교회에서 여성 지도자들의 역할이 중요했고 영향력이 있었다고 할 때, 아마도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킨 여성들에 대해서는 어떤 형태로든 치리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누구든 자신의 행동이 교회에 덕이 되지 않는다면 절제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것 그리고 우리가 믿음으로 행해야 할 것들은 생각보다 훨씬 많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기도하고 있는 것보다 우리에게는 훨씬 더 많은 기도의 제목이 있음을 의미입니다.
더 많이, 더 넓게, 더 깊게 기도합시다.
은혜에 감사하는 하루하루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직 기도 그리고 감사 외에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2021년 9월 19일 성령강림절 후 제17주 / 21일 추석]
나의 피난처, 나의 요새, 오직 내가 의뢰할 하나님만 찬양합니다.
신랑이 오심에 신부들이 등불을 들고 깨어있어야 했던 것처럼, 주님의 날이 가까울수록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착한 양심의 사람이 되게 하시고, 말씀과 기도와 찬양이 넘치는 예배로 모이기에 힘쓰게 하옵소서.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부흥을 갈망합니다.
상황과 환경에 끌려 다니지 않게 하시고, 썩어 없어질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게 하옵소서.
죄의 유혹에 무너졌던 실패와 좌절의 시간, 내 뜻과 고집대로 살면서 주님의 말씀을 망각한 삶을 살았음을 회개합니다.
마지막 때에 추수할 부름 받은 일꾼이 되게 하시고,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거룩한 교회로 삼아 주옵소서.
믿음의 고백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생명이 부어지게 하시고, 구원해야 할 영혼들을 주께로 이끌 수 있는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추석 명절에 예배하는 가정마다 하나님의 축복이 차고 넘치게 하옵소서.
가족 모두에게 감사와 즐거움이 넘치게 하시고, 만족과 기쁨이 충만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정의 주인이심을 믿습니다.
식사 때마다 보이지 않는 손님이시며, 모든 대화에 말없이 들으시는 주님이십니다.
언제나 우리의 위로와 격려가 되시고 축복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년 9월 17일(금)
생명의 삶 Q.T. 묵상 -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성경본문 : 사시기 20장 17~28절
기브아의 불량배들을 감싼 것은 베냐민 지파의 분명한 허물입니다.
그러나 이에 대응하는 열한 지파는 베냐민 지파의 죄만 볼 뿐 자신들의 죄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연합군은 베냐민 지파와 전투를 벌였으나 두 번이나 패하고 맙니다.
분명히 하나님께 허락을 받고 전투에 임했는데 베냐민 지파에게 패배한 것입니다.
이는 전혀 예상치 못했던 충격적 결과입니다.
베냐민 지파가 행악자들을 내어주기를 거부해 일어난 전쟁이었기에 이스라엘 연합군에게는 분명한 명분이 있었습니다.
군사적으로도 이스라엘 열한 지파가 우세했기에 그들은 패배를 상상치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제일 중요한 것을 간과했습니다.
베냐민 지파에서 일어난 죄는 이스라엘 전체의 영적 혼탁함과 타락의 한 단면이었습니다.
따라서 베냐민 지파를 심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용서를 구해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남의 눈에 있는 티는 잘 보면서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한다고 책망하셨습니다.
영적 싸움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자신 안에 숨어 있는 죄를 찾아 철저히 제거하고 성결해지는 것이 우선입니다.
성령의 검인 말씀은 외부의 적을 공격하는 무기이기 이전에 우리 안의 죄를 제거하는 수술 칼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진단하고 회개함으로 잘못을 고쳐야 합니다.
두 번이나 베냐민 지파에게 패배한 이스라엘은 비로소 정신을 차립니다.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번제와 화목제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언약궤와 대제사장 비느하스가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두 번의 전투에서 심판자의 자세로 베냐민 지파를 징벌하려 했다면, 이번에는 베냐민 지파에서 일어난 죄를 자신들의 죄로 여기고 철저히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의 질문에 “내일은 내가 베냐민 지파를 이스라엘의 손에 넘겨주리라”는 약속은 앞서 두 번의 말씀과 내용이 크게 다르지 않지만, 이번에는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대제사장을 통해 받은 권위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성도는 자신의 구원과 승리에 대해 스스로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할 수 있다는 교만한 마음을 철저히 배격할 때, 겸손히 하나님의 정의를 집행할 수 있습니다.
실패의 아픔을 겪는다면 낙담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울며 금식하고, 제사를 드리며, 언약궤를 가져오고, 제사장을 대동했습니다.
어리석은 자들은 너무나 쉽게 하나님은 내 편이시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판단과 자기 욕심에서 비롯된 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포장합니다.
그러다가 결과가 좋지 않으면 신앙적 혼란에 빠져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다른 지체들을 정죄합니다.
교만한 자는 패망하고, 겸비한 자는 구원과 승리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이 실패를 거듭하게 하실 때, 형제의 죄를 내 일처럼 받아들여 회개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진정한 연합의 방도를 찾고자 해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승패가 중요했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다른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회개와 회복을 원하십니다.
2021년 9월 16일(목)
생명의 삶 Q.T. 묵상 - [악은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
●성경본문 : 사시기 20장 1~16절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전 하나님이 계속 경고하셨던 부분은,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방 민족의 악을 따르지 말라는 명령입니다.
죄악을 방치하면 풀이 자라듯 무성해지고, 정작 자라야 할 것이 자라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기브아 사건은 마치 소돔과 고모라 사건을 보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왜 이렇게 변했을까요?
이스라엘 모든 자손이 총회로 하나님 앞에 모였습니다.
그들이 모인 이유는 그들 안에 있는 악 때문입니다.
소돔이 만연한 성적 타락의 죄 때문에 멸망했는데, 하나님이 혐오하시는 그 죄악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들이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처참한 일을 당했던 레위 사람이 기브아 사람들의 범죄에 대해 소상히 설명합니다.
피해자와 증언과 증거가 명백한 범죄임을 보여줍니다.
기브아 사람들은 그들이 보기 좋은 대로 악을 행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뜻과 법에서 멀어져 있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범죄를 행했고, 어떤 죄의식도 없었습니다.
그들을 제지하거나 간섭할 어떤 장치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행동과 내면에서 하나님 백성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경건을 잃은 사람은 추악합니다.
미스바에 모인 사람들은 흩어지지 않고, 전체 백성의 10퍼센트를 군대로 차출하여 기브아를 치기로 결의합니다.
그리고 그 결의대로 ‘모든 사람이 합심하여’ 기브아로 진격했습니다.
이처럼 원래 이스라엘 사람들은 왕이나 정규군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체계적으로 의사결정을 할 수 있고, 군대를 조직해서 맞서 싸울 능력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사기의 지난 이야기들을 보면, 이방 민족이 침공해 들어왔을 때 그들은 전혀 대처하지 못했습니다.
죄악으로 인해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었고, 그로 인해 분열되어 있었기에 뜻을 모아 의사결정을 할 수도, 힘을 모아 이방인의 침략을 막아 낼 수도 없는 상태에 있었습니다.
결국 사사 시대가 끝나며 이스라엘은 왕이신 하나님보다 이방인들처럼 눈에 보이는 인간 왕을 요구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은 베냐민 사람들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기회를 거부하고 싸움을 준비합니다.
베냐민 사람들은 악을 악으로 보지 않고, 악인을 자기가 보호할 형제와 이웃으로 생각했습니다.
연합해야 할 사람들과는 전쟁을 하고, 징계해야 할 범죄자들은 보호하는 모순을 보였습니다.
그들은 선과 악에 대한 분별력을 상실했으며, 오히려 악을 더 선호하고 있습니다.
베냐민이라는 이름의 뜻은 ‘오른손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베냐민 지파는 왼손잡이들에게 특별한 임무(투척병)를 부여했습니다.
오른손잡이가 왼손잡이로 바뀐 것처럼, 그들은 사랑받는 막내 지파에서 포악한 행악자로 변해 있었습니다.
악은 사람을 변질시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을 아프게 하고 괴롭게 합니다.
이스라엘도, 베냐민도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온전치 못했습니다.
베냐민은 악했고, 다른 지파들 역시 안이한 태도로 대처했습니다.
악이 자랄 때 방치하지 말고 뿌리까지 뽑아야 합니다.
가족을 비롯해서 가까운 이들이 죄악으로 변해가는 모습 앞에서 침상을 적시는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죄가 만연한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 우리 모두 왕이신 하나님과 가까워 질 수 있도록 힘써야겠습니다.
2021년 9월 15일(수)
생명의 삶 Q.T. 묵상 - [타락의 참상]
●성경본문 : 사시기 19장 16~30절
도대체 사람은 얼마나 악할 수 있을까?
뉴스에서 보도되는 사건 사고는 이미 영화의 상상력을 뛰어넘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패륜과 비인도적 타락의 참상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닙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충격을 넘어 ‘이스라엘에게 소망은 있는가’를 묻게 됩니다.
과연 ‘교회’가, ‘크리스천’이 이 시대의 희망이 될 수 있을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저녁때에 한 사람이 성읍 넓은 거리에 나타났는데, 그는 에브라임 산간 지방 출신으로 이곳에 와서 타향살이를 하는 노인이었습니다.
그는 유숙할 곳을 찾는 레위 사람 일행을 영접한 것입니다.
이렇듯 이스라엘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배려와 사랑이 메말라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결코 이웃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레위 사람 일행이 노인의 집에서 편히 쉬고 있을 때 성읍의 불량배들이 노인의 집을 에워싸고 나그네를 내놓으라고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습니다.
집단으로 동성 강간을 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소돔에서 일어났던 가장 흉악한 범죄가 이스라엘 성읍 기브아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신앙이 부패하자 윤리적 타락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이 없으면 반드시 부도덕을 생산해 냅니다.
노인은 그들에게 망령된 일을 행하지 말라고 간청했습니다.
이어서 충격적 제안을 했습니다.
레위인의 첩과 함께 자신의 처녀 딸까지 내어줄테니 ‘너희 눈에 좋은 대로’ 그들을 욕보이든지 마음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불량배들이 노인이 말을 듣지 않자 레위 사람은 자기 첩을 무리에게 밀어내 버렸습니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습니다. 삶의 기준과 가치관이 완전히 무너진 모습입니다.
레위 사람의 첩은 밤새 끔찍한 일을 겪었습니다.
“그들이 그 여자와 관계하였고 밤새도록 그 여자를 능욕하다가 새벽 미명에 놓은지라”(25절).
기진맥진한 여인은 겨우 노인의 집으로 돌아왔지만, 결국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 시간에 레위 사람은 노인의 집에서 편안히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함’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기억해야 합니다.
자녀들과 다음 세대를 향한 신앙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자기 뜻’대로 행하도록 방임하는 것이 얼마나 큰 죄의 결과를 가져올지 두렵게 여겨야 합니다.
레위 사람은 불량배들에게 아내를 밀어내고 나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잠을 자고 일어나 아침에 길을 떠나려 했습니다.
그는 밤새 험한 일을 당했을 첩에게 무정하게 “일어나라 우리가 떠나가자”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첩은 이미 죽어 있었습니다.
그는 시체를 나귀에 싣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고사하고 가족에 대한 사랑조차 찾아보기 힘든 시대가 사사시대였습니다.
집에 돌아온 레위 사람은 첩의 시체를 열두 덩이로 나누어 이스라엘 사방에 보냈습니다.
소름 끼치는 일입니다.
시신의 일부를 받아든 이들은 하나같이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날까지 이런 일은 행하지도 않았고 보지도 못했다”고 탄식했습니다.
아무리 분노가 치밀어도 시신을 토막 내 복수의 칼을 들어 올리게 하는 도구로 사용한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죄악입니다.
하나님을 버린 인간의 잔혹함에는 끝이 없습니다.
경악을 금하지 못할 사건을 접하면 우리는 불안에 떨기도 하고 회의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그 모든 원인이 인간의 죄악임을 생각해야 합니다.
가나안 사람보다 더 악한 기브아 사람의 타락한 모습은,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 사람들보다 더 타락한 자들이 되지 말라는 훈계이며 경고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자들입니다.
타락한 시대와 사람들을 향해 비난함으로, 죄를 짓지 않으려는 다짐이나 결심을 한다고 결코 달라질 게 없습니다.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 세상을 바꿀 힘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 뿐입니다.
죄악 된 삶에서 벗어나 거룩하고 정결한 행실을 회복하기 원한다면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십시오.
2021년 9월 14일(화)
생명의 삶 Q.T. 묵상 - [최악의 타락으로]
●성경본문 : 사시기 19장 1~15절
사사 시대 이스라엘의 타락은 총체적이었습니다.
한 사람 미가의 우상 숭배와, 한 레위인 제사장의 부패, 그리고 한 지파의 만행으로 그 범위가 확대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한 타락과 몰락은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정체성까지 위협했습니다.
그 사건의 발단이 오늘 이야기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이름이 없습니다.
어떤 레위 사람, 그의 첩, 그 여자의 아버지, 그리고 뒤에 나오는 에브라임 노인 등 모두 이름이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그때에’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한 모습을 나타내줍니다.
어떤 레위 사람은 모든 레위 사람을, 그 첩은 모든 여인을, 장인은 객을 대접하는 모든 사람을 상징합니다.
그 시대와 사회 모두 타락하고 비인간적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는 또한 전 인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따라서 사사기를 불편한 마음으로 읽는데 그치지 말고, 오늘 나와 이 시대의 죄악을 회개하는 심정으로 읽어가기를 바랍니다.
에브라임 산악 지방에 사는 어떤 레위 사람이 베들레헴으로 내려가 첩을 맞이했습니다.
레위인에게는 이미 부인이 있었으나 다른 여인을 첩으로 얻어 쾌락과 세속적 자부심을 얻으려 했습니다.
그런데 그 첩은 레위인과 함께 사는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다른 남자와 간음을 저지른 후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리고 4개월이 지나 레위인은 첩을 다시 찾아오기 위해 길을 떠났습니다.
간음하고 떠난 여인을 왜 데려오려고 했을까요?
그것은 그가 처음 그녀를 데려올 때와 마찬가지로 첩에 대한 애정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그녀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레위인은 성막 봉사를 위해 하나님께 구별된 자들이기에 특별히 성결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레위인에게는 첩이 등장하고, 그 첩은 음행을 저지르는 등 성적으로 타락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성도가 거룩하게 살지 않으면, 세상은 더 악한 길로 치닫게 됩니다.
세상이 교회와 성도들의 부도덕함을 비난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더 타락하지 않도록 지켜달라는 아우성임을 알아야 합니다.
‘어떻게 교회마저, 교인들마저 그럴 수 있는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라는 탄식의 소리로 들어야 합니다.
신앙의 호주가 무너지면 믿음의 가정은 없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타락하면 예수님 없는 교회가 되고 맙니다.
무자비한 세상에 대해서 성도는 책임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레위 사람이 첩을 데리러 장인의 집을 찾아가자 장인은 기뻐하며 그를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이렇게 후한 대접은 이후에 등장하는 기브아 사람들의 행위와 극한 대조를 이룹니다.
레위 사람은 장인의 만류로 다섯째 날 오후에야 겨우 떠날 수 있었습니다.
날이 저물 때쯤 종은 근처 여부스에서 유숙하자고 제안했지만, 레위인은 이방 사람의 성읍인 여부스를 거부하고 약 8킬로미터 더 떨어진 기브아나 라마로 가기로 결정했습니다.
이방들과 별다를 것 없이 살아가면서 이방인의 성읍을 꺼리는 모습은, 오늘날에도 전형적으로 위선적인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과 다를 바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정체성을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정말 심각한 일입니다.
레위 사람 일행은 해가 질 무렵 기브아에 이르러 유숙할 곳을 찾았습니다.
그는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에서 관대한 대접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영접하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장인의 극진한 환대와 대조적으로 기브아 사람들은 그들을 집으로 영접하기는커녕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에서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은 율법에 명시된 의무이자 중요한 미덕입니다.
이방인 마을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일들이 이스라엘 땅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신앙이 타락했다는 당황스럽고 충격적인 증거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외면하는 삶은 곧 타락의 증거입니다.
스스로 크리스찬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하나님께 인정을 받는 성도는 아닙니다.
본문의 레위인과 같이 형식만 갖추고 하나님을 두려워함도, 때를 분별함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도 없으면, 누구나 최악의 타락으로 떨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왕으로 삼고, 그분의 말씀과 뜻을 내 삶의 기준으로 삼고 따름으로서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의 삶을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2021년 9월 13일(월)
생명의 삶 Q.T. 묵상 - [끝없는 타락의 길]
●성경본문 : 사시기 18장 14~31절
삼손의 일대기를 통한 여러 가지 사건들은, 삼손이라는 인물에 대한 막연한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립니다.
단지 삼손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꺼리로만 기억하던 것들, 단편적인 이야기로 어떻게든 교훈을 찾아보고자 했던 노력들이 얼마나 허망한 짓인가를 생각한다면, 앞으로 이런 설교를 듣게 될 때 불편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영적 어둠의 시대를 살았던 삼손이야기를 끝냄으로 다행이다 싶었지만, 사사기는 끝없는 타락의 길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마치 내 삶의 치부를 보는듯하기도 하고, 크레바스에라도 빠져 끝없이 추락하는 꿈을 꾸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이번 한 주간도 사사기를 읽어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를 생각하며, 요셉의 구덩이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인생의 시작된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나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전에 정탐을 갔던 다섯 사람이 단 지파 군사들에게 미가의 집에 목상과 에봇과 드라빔과 은으로 도금한 신상이 있으니 그것을 빼앗자고 제안했습니다.
미가가 집에 없는 상황에서 젊은 레위인은 신당이 약탈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무장한 6백 명의 군인이 문 입구에 서 있었기 때문입니다.
단 지파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이 만든 우상의 힘으로 성공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성공을 위해서라면 어떤 수단과 방법조차 가리지 않습니다.
영적 무지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임하는 과정과 절차를 무시합니다.
믿음으로 씨앗을 심지 않는다면, 추수 때에 누군가의 것을 강탈할 기회만 엿볼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깨끗해야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면, 죄를 두려워하는 마음도 없고, 자기 소견대로 행하는 짐승의 수준으로 전락하게 됩니다.
단 자손은 신상을 약탈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젊은 레위인에게 자신들의 아버지와 제사장이 되라고 권했습니다.
한 집안의 제사장보다는 한 지파의 제사장이 되는 것이 더 낫지 않겠느냐는 제안에 귀가 솔깃합니다.
그러자 젊은 레위인은 기뻐하면서 미가의 우상들을 가지고 그들을 따라갔습니다.
사역자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따라 사역해야 합니다.
성도 역시 사명을 따라 신실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조건에 의해 움직인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릴 뿐입니다.
미가는 이웃들을 불러 모아 추격에 나섰습니다.
단 사람들은 어린아이들과 가축을 앞세우고 갔기에 금방 따라잡혔습니다.
단 지파 사람들은 ‘왜 쫓아왔느냐?’라며 뻔뻔하게 반응했습니다.
미가는 “내가 만든 신들을 다 훔쳐 가 놓고 무슨 일이냐고 묻는 것이냐?”라고 항의했습니다.
우상숭배의 어리석음이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가 만든 신상들은 자신을 보호해 줄 수도, 지켜줄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우상이 자신을 구해 주리라고 기대하지만 우상은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단 지파 사람들은 “조용히 돌아가라! 그렇지 않으면 다 죽일 것이다”라고 협박합니다.
미가는 그들을 이길 수 없음을 깨닫고 말없이 돌아갔습니다.
미가는 우상들도 빼앗기고 제사장에게도 배신을 당했습니다.
미가는 레위 사람을 제사장으로 모셨으니 복을 받을 것이라 기대했지만 그에게 임한 것은 재산 몰수와 배신이라는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기준을 무시하고 사람의 기준대로 살게 되면 이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단 자손은 라이스에 이르러 주저하지 않고 칼날로 치고 성읍을 불살랐습니다.
그러고 나서 성읍을 재건하고 거기에 정착해 그곳을 ‘단’으로 개명했습니다.
그들이 신상을 만들었다는 것과 함께 더 충격적인 것은 제사장이 된 그 젊은 레위인이 모세의 손자이자 게르솜의 아들인 ‘요나단’이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전해준 모세의 후손이 제1계명을 어기고 있음은, 신앙의 유산을 남긴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단 지파의 만행과 폭력 그리고 요나단의 배신과 제사장 직무는 끝없는 이스라엘의 타락상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집이 실로에 있는 동안 미가가 만든 우상을 그대로 두고 섬겼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떠나 자기 이익을 위해 배신과 폭력을 일삼는 기회주의자들로 가득합니다.
잘못된 길로 들어섰을 때 빨리 깨닫고 바른 길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탐욕이 우리를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뜨릴 것입니다.
2021년 9월 12일 성령강림절 후 제16주
우리를 도우시고 인도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요셉의 구덩이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 되었듯이, 바이러스로 가득찬 오늘이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믿습니다.
위험한 전쟁터에 있는 형들에게 심부름을 보내는 아버지의 명령이 불합리하게 여겨졌을지라도 순종했던 다윗에게, 위험한 곳에서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음을 믿습니다.
죄악으로 타락한 시대를 멸하실 때 방주 안에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 노아처럼, 우리로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믿음을 충만하게 하옵소서.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계22:11)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무엇을 경고하는 것인지를 깨닫기를 원합니다.
십자가의 도를 어리석게 여기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성도들조차 보혈의 핏기가 사라진 채, 열정이 식어진 영적 어둠의 적막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믿음으로 인내하며 주의 명령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불타는 사명을 회복하게 하시고, 복음의 진리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하옵소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년 9월 10일(금)
생명의 삶 Q.T. 묵상 - [반전]
●성경본문 : 사시기 16장 23~31절
삼손은 하나님의 사사로 부르심을 받았지만, 사명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보기에 좋은 대로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무시하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자신의 능력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아무리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우선시하지 않으면 사명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삼손의 실패는 하나님의 주신 복과 권능에 적절하게 반응하지 못한 한 인물의 실제 사례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블레셋 지도자들과 백성은 삼손을 생포한 것을 기념하는 종교 축제를 열기 위해 신당에 모였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땅을 망치고 많은 동족을 죽인 원수 삼손을 그들의 신 다곤이 넘겨주었다고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삼손을 그들에게 넘겨준 것은 다곤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이었습니다.
다곤은 아무 능력이 없는 우상에 불과합니다.
다곤처럼 사람이 만들어낸 우상에 불과한 것을 섬기는 자들의 최후는 잠시 후 밝혀집니다.
헛된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이켜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만 섬겨야 합니다.
잔치의 분위기가 한창 무르익어 갈 때 블레셋 사람들이 삼손을 불러다가 재주를 부리게 했습니다.
삼손은 한 소년의 안내를 받아 다곤 신전을 버티고 있는 기둥을 찾아갔습니다.
당나귀 턱뼈로 천 명을 죽였던 영웅이 이제는 두 눈을 잃고 감옥에 갇혀 짐승이 하는 일을 하고 심지어 조롱까지 받으며 소년의 손을 붙잡아야 겨우 움직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으로 처량한 모습입니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는 말씀을 기억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삼손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기둥에 기댄 삼손은 여호와께 ‘하나님, 이번만 강하게 하여 블레셋 사람에게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소서!’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이전에 목말라 죽게 되었을 때 물을 달라고 기도한 후 처음이자 마지막 기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다음으로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 기도를 미루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매 순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기도 응답을 위해 일하십니다.
여호와께 간절히 기도를 드린 삼손은 신전의 상층과 지붕을 받들고 있는 두 기둥 사이에 서서 두 기둥을 힘껏 밀며 소리쳤습니다.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그러자 기둥이 무너져 삼손과 블레셋 사람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이때 죽은 사람들이 삼손이 평생 죽인 사람보다 더 많았다고 했습니다.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모욕하던 자들의 최후가, 자신의 욕망을 따라 천방지축 날뛰던 삼손의 죽음과 함께 반전되었습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섭리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사람은 죽었지만, 하나님의 역사는 기필코 이루어집니다.
삼손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친인척들이 찾아와 그의 주검을 소라와 에스다올 사이에 있는 그의 아버지 마노아의 무덤에 묻어 주었습니다.
이곳은 그가 어려서 자란 고향이며 처음으로 여호와의 영을 경험한 장소입니다.
그의 이야기가 처음 시작한 곳으로 돌아와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삼손의 이야기는 끝이 나지만 당신의 백성을 구원코자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는 계속 이어집니다.
기도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세상을 이길 힘이 생깁니다.
우리의 작은 신음까지도 들으시는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라도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세상이 주는 안락함과 일시적인 즐거움에 빠져 살면 영적 소경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고, 기회의 문이 닫히기 전에 속히 사명의 길로 돌이켜야 합니다.
어떤 고난에도 하나님은 맡기신 사역을 감당할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만 의지하십시오.
역전의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아멘.
2021년 9월 9일(목)
생명의 삶 Q.T. 묵상 - [정체성과 삶의 일치]
●성경본문 : 사시기 16장 15~22절
삼손은 나실인으로 태어났기에 하나님이 요구하신 나실인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정체성과 사명, 나실인 규례를 가볍게 여겼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주신 힘을 자신의 능력으로 여겨, 힘을 과시하고 죄를 짓는 데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를 사사로 세워 이스라엘을 블레셋의 손에서 구원하려 하셨던 하나님의 계획은 실패한 걸까요?
하나님은 그런 삼손의 삶마저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사용하셨습니다.
당신의 인생은 당신이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탓하지도, 어디론가 변명을 둘러대지도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과 함께 있기를 원하시고 성공하는 인생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당신이 당신의 인생을 망칠 때 하나님은 단지 하나님의 일을 하실 뿐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들릴라는 삼손에게 집요하게 힘의 근원과 그를 무력화시킬 방법을 물었습니다.
그녀는 삼손에게 여러 번 속자, 이제는 그의 사랑을 의심하며 그를 강하게 압박했습니다.
처음에는 장난처럼 거짓말을 둘러 댔던 삼손은 이제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평안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이방 여인을 사랑한 그에게 행복과 평안이란 없었습니다.
그 사랑마저 자기 욕심에서 비롯된 비뚤어진 마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평안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습니다.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마음에는 번뇌가 그치지 않습니다.
모든 문제의 답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삼손은 어리석게도 들릴라에게 진실을 털어놓았습니다.
자신이 모태에서부터 나실인이 되었고, 머리털을 밀면 힘을 잃어 다른 사람들처럼 된다고 했습니다.
이런 고백은 그의 실제 삶과 매우 괴리가 있습니다.
그가 자기 정체성을 기억하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가 놀라울 정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백과 삶은 일치해야 합니다.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비그리스도인들과 똑같이 사는 것은 삼손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삼손의 비밀을 알게 된 들릴라는 그를 자기 무릎에 뉘여 잠들게 한 후에 그의 머리털을 밀었습니다.
그리고 블레셋 방백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잠에서 깬 삼손은 이전처럼 그 위기를 넘길 수 있을 거라 자신만만하게 말했지만, 이미 여호와의 영이 떠났음을 알지 못했습니다.
모든 능력을 잃은 삼손은 손쉽게 블레셋 사람들에게 붙잡혔습니다.
삼손은 두 눈이 뽑힌 채로 감옥에서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하루아침에 몰락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전부터 그 조짐들이 있어왔습니다.
이방 여인과 결혼하고 기생을 찾으며, 사체를 수도 없이 만진 일들이 쌓이고 쌓여 결국 여호와의 여이 떠난 지경까지 이른 것입니다.
그의 전락은 오랜 기간에 걸쳐 누적된 죄의 결과였습니다.
비록 삼손의 삶은 추락했으나,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실인의 규정을 어기면 일곱째 날에 머리카락을 밀고, 새롭게 서약해야 했습니다.
삼손은 어쩌면 지금 새롭게 나실인 서약을 해야 하는지도 모릅니다.
그의 머리카락이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는 것이 아직 일말의 희망이 남았음을 암시해 줍니다.
하나님은 그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예고했습니다.
그가 ‘죽는 날까지’ 나실인임을 말입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상관없이 마음대로 살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거룩함을 추구하며 그분의 영광에 동참하는 삶이 복된 인생입니다.
성도가 거룩함을 잃어버리면 세상이 조롱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빛과 소금으로 부르셨습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리면 길에 버려져 밟힐 뿐입니다.
우리의 정체성과 삶의 내용은 일치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답게 성령님께 붙들려 이 땅에서 사명을 다하기를 바랍니다.
2021년 9월 8일(수)
생명의 삶 Q.T. 묵상 - [사명을 잊는다면]
●성경본문 : 사시기 16장 1~14절
삼손은 이스라엘의 사사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사사로서 책임 있는 행동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나 직분에 대해서 책임 있게 행동하고 있는지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본문은 이스라엘의 사사로 20년을 보낸, 삼손의 생애 마지막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세월이 흘렀다고, 나이를 먹고 연륜이 깊어졌다고 해도 ‘죄’에 대해서 방심하지 않아야 합니다.
삼손은 블레셋의 주요 도시 가운데 하나인 가사에 내려갔습니다.
그곳에 내려간 이유는 블레셋과 싸우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자신의 감정에 이끌려 자신의 눈에 좋은 대로 행동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블레셋에서 한 기생을 보고 자신을 욕망을 채웠던 것입니다.
삼손의 이런 행동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을 죽이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삼손의 엄청난 힘 앞에서 그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갑니다.
삼손은 자신의 욕망 때문에 곤경에 처했고, 그 곤경을 해결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힘을 사용했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겪는 어려움들을 잘못 이해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이 시험을 주셨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가 전하는 말씀처럼, 우리가 당하는 시험은 스스로의 욕심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약 1:13~14).
삼손은 자신의 욕심에 미혹되어 죽을 수도 있는 곤란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삼손이 그런 모습으로 생애를 마치도록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에게 힘을 허락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계획이 있기 때문입니다.
받은 은혜로 기뻐하고 만족할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하심대로 쓰임 받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성경 본문을 읽어보면 알 수 있으니까 굳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이 일 이후에 삼손은 들릴라 라는 여인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여인들에 대해서는 사용되지 않았던 ‘사랑’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습니다.
삼손이라는 이름은 ‘작은 태양’이라는 뜻입니다.
들릴라라는 이름은 ‘밤’을 의미합니다.
빛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자가 지금 어둠에 이끌리고 있습니다.
들릴라는 블레셋 사람들의 회유에 넘어가 삼손이 가진 힘의 근원을 알아내고자 했습니다.
삼손은 들릴라로부터 힘의 근원과 그 힘을 무력화시킬 방법에 대한 질문을 받았고, 세 번이나 거짓말을 했습니다.
삼손은 지속적으로 힘의 비밀을 묻고 있는 들릴라를 의심할 만도 했습니다.
결박되고 난 후에 그에게 닥쳤던 위험들을 생각하면 들릴라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할 정도입니다.
삼손은 힘의 근원을 묻는 들릴라의 질문에, 하나님을 생각했어야 합니다.
자신의 힘이 누구로부터 나오는지 돌아보고, 사사라는 정체성에 맞게 살았어야 합니다.
삼손은 들릴라에게 장난처럼 대답하다가 결국 자신의 힘이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이며 자신이 나실인임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삼손을 그냥 블레셋의 손에 넘기지 않으셨습니다.
귀찮을 정도로 그에게 사명과 정체성을 상기시키셨습니다.
우리에게 어둠과 유혹이 찾아온다면 하나님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라는 정체성을 떠올리고, 죄의 길에 더욱 깊이 빠지기 전에 돌이켜야 합니다.
삼손은 자신의 힘이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한 적이 없습니다.
그저 장난처럼 가볍게 언급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 능력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도 않았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을 고백해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의 사명을 잊는다면, 우리는 세상 욕심으로 인해 시험에 들 수밖에 없습니다.
2021년 9월 7일(화)
생명의 삶 Q.T. 묵상 - [기도와 친교]
●성경본문 : 사시기 15장 14~20절
삼손이 밧줄에 묶인 채 블레셋에 넘겨졌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소리치며 삼손에게 나아오자, 갑자기 여호와의 영이 삼손에 임했고 그를 결박하고 있던 밧줄이 마치 불에 탄 삼 오라기처럼 끊어져 버렸습니다.
삼손은 싱싱한 당나귀 턱뼈를 휘둘러 단순에 블레셋 사람 1천명을 죽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체력을 많이 소모한 삼손은 심한 갈증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는 필요할 때마다 자신을 도우시는 성령의 역사를 의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를 도우신 하나님을 향한 삼손의 기도는 투정에 가깝습니다.
그의 기도에는 자신을 선택하신 하나님을 향한 감사도 없으며, 블레셋에게 승리하게 하신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도 없습니다.
그는 목마름을 해결하고자 하나님께 도우심을 구했지만 그전까지 그는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한 적이 없었습니다.
삼손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하나님께 쓰임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미숙한 영성 때문에 그의 인격과 삶은 전혀 선한 본보기가 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들은 사역에 앞서 하나님과 친밀하게 교제하는 것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하루의 일과 중에 기도 시간을 정하고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 시간을 통해 사역에 필요한 힘을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난 인격을 고치시고 주님을 닮아 가게 하십니다.
기도 시간을 확보하지 못한 하나님의 일꾼은 봉사도 사역도 오로지 부담과 짐으로 느낄 것입니다.
삶에서 여러 결함을 보여 준 삼손은 하나님의 일꾼들에게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역설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삼손은 이스라엘의 사사로 지내면서도 블레셋 사람들과 친밀하게 지냈습니다.
그는 블레셋 여인과 결혼하려 했으며 블레셋 친구들을 가까이 두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백성과의 관계는 소홀히 한 채 불신자들과 어울리며 그들과 가까이 지냈습니다.
그는 사사로서 이스라엘 백성을 돌보고 동족을 하나로 연합시키는 역할을 감당해야 했지만 이런 일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을 천 명이나 죽이는 상황에서 그를 도와 블레셋과 싸운 유다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삼손을 묶어 블레셋 사람들에게 넘겼습니다.
그를 따르는 이스라엘 사람이 한 명도 없었던 것은 삼손의 자업자득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들이 경건하고 거룩한 교제로 연합하길 원하십니다.
그 교제 안에서 우리는 세상의 유혹과 죄로부터 보호받습니다.
또 하나님을 참되게 믿는 사람들과 교제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본받고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다른 지체들과 나누는 교제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세상에서 만나는 다른 관계들보다 믿는 지체들과의 관계에 헌신하고 사랑과 선행을 격려해야 합니다.
그런 관계 안에서 섬김을 실천하며 연약한 자를 돕는 일을 훈련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과 사랑으로 지체들을 섬기며 연합을 위해 헌신하는 일꾼들을 사용하셔서 교회 공동체를 건강하고 굳건하게 세워 가십니다.
하나님은 준비되어 있는 사람을 반드시 쓰십니다.
특히 하나님의 일꾼으로 쓰임 받기 위해서는 기도와 친교의 훈련이 중요합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는 훈려이며,
친교는 사람들을 잘 돕기 위한 필수 요소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이 두 가지가 겸비된 사람을 찾읫고, 그를 통해 당신의 일을 행하시며 영광을 받으십니다.
오늘도 말씀과 기도로 함께한 지저스 선교회원님들의 가정과 삶에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은혜가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2021년 9월 6일(월)
생명의 삶 Q.T. 묵상 - [영적 어둠의 시대]
●성경본문 : 사시기 15장 1~13절
삼손 이야기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조차 알 정도로 유명합니다.
왜 그럴까요?
삼손의 일탈적인 행위에 대한 동경 때문은 아닐까 싶습니다.
인기 드라마의 단골 주제 중에 단연 관심과 흥미를 일으키는 것은 ‘복수극’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악한 자를 응징하는 통쾌한 복수극을 보면서 사이다 같은 청량감을 느낍니다.
실제 현실에서는 그런 복수를 할 수 없기 때문에 대리 만족을 얻는 것입니다.
이런 삼손 이야기를 블레셋에 대한 응징, 이스라엘의 구원과 같은 이유로 하나님은 당신의 목적을 이루어 가고 있고, 개인감정에서 나온 복수 같지만 하나님이 개입하신 일이라고 설명 또는 설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 같은데...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과연 하나님이 삼손 뒤에 숨어 계시기라도 한단 말일까요?
영적 해석 운운하고 싶겠지만, 삼손 뿐만 아니라 사사기 대부분의 내용은 ‘영적 어둠의 시대’를 보여줄 뿐이라고 생각하고, 그 이상의 어떤 해석도 하고 싶지 않은 게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아내를 빼앗긴 삼손은 여우를 몰아 블레셋의 농작물을 다 태워 버렸습니다.
블레셋은 자신들이 당한 손실의 원인을 삼손의 아내와 그의 아버지에게 물어 그들을 불태워 죽였습니다.
이 소식에 삼손은 더욱 분노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당한 일을 되갚아 주기 위해 블레셋 사람들의 정강이와 넓적다리를 닥치는 대로 쳐서 죽였습니다.
잔인한 복수를 서슴지 않은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찾거나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복수심이 이끄는 대로 마음껏 폭력을 행사했을 뿐입니다.
이스라엘의 사사인 삼손이 이처럼 복수심과 폭력이 일상이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면서 그들이 가진 삶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자들은 자기가 당한 억울한 일을 하나님이 해결해 주시리라는 믿음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폭력과 보복이라는 자기 방식대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소한 갈등이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이웃에 대해 폭력을 서슴지 않고 죽이기까지 하는 일이 왕왕 발생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감정대로 살아갑니다.
이런 사회 풍토 속에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은 거룩한 행실이 더욱 절실히 요구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어둠은 빛이 들어오는 순간 물러가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며 그분의 교훈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랑의 빛으로 세상을 밝히는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블레셋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인 후에 삼손은 에담 바위 동굴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삼손의 행위에 격분한 블레셋은 유다 땅에 올라와 레히 지방에 진을 쳤습니다.
유다 사람들은 블레셋과 전쟁을 피하기 위해 삼손을 그들에게 내어주기로 결정하고 삼손을 바위 동굴에서 데리고 나왔습니다.
유다 사람들 역시 삼손을 사사로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합니다.
삼손을 내어주고라도 블레셋 사이에 거하며 익숙하게 지내 온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고수하려 할 뿐입니다.
하나님을 떠나 세상과 가까워진 하나님 백성들의 모습은 이러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깨어 있지 않다면 마땅히 싸워야 할 순간조차 피하고 타협하는 삶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탄은 영적으로 연약해진 하나님의 백성에게 영적 전쟁을 피하는 삶이 편안하고 안락하다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세상의 악한 방식과 가치관, 그리고 하나님께 순복하지 않는 고집스런 자아와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싸움을 위해 하나님은 전신갑주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과 타협하고 죄에 안주하는 순간, 하나님이 주신 참된 평안은 깨지고 오히려 혼돈과 고통이 찾아온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그분의 뜻에 순복함으로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만이 참되고 영원한 평강을 누리는 비결입니다.
삼손과 유다 지파가 보여 준 일련의 사건들은 그들이 하나님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드러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은 세상이 가르치는 방식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세상을 이길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승리할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일어서십시오.
미친 세상 속에서 정상인 것처럼 살아간다면 그도 미친 게 분명합니다.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회복해야 합니다.
세상을 이기고 죄를 이기는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로 인해 어긋나고 빗나간 세상 속에서,
미친 사람 취급을 당하더라도,
주님의 길을 꿋꿋하게 가는,
광인(狂人)을 찾으십니다.
2021년 9월 3일(금)
생명의 삶 Q.T. 묵상 - [하나님께 예배하라]
●성경본문 : 사사기 13장 15~25절
축복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영혼을 구원합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마노아를 찾아와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축복의 말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에게 축복의 말씀을 주는 존재가 누구인지 전혀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마노아의 영적 상태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무감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바친 제물에 하나님의 불이 임하고 여호와의 사자가 그 불을 타고 올라가는 것을 눈으로 보고 나서야 자신이 만난 이가 여호와의 사자였음을 깨닫고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기 전에, 마노아가 영적 눈을 뜰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바로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라고 한 것입니다.
즉 마노아가 감사해야 할 대상은 자신이 아닌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이 아니었다면, 마노아는 하나님의 사자를 경배해야 할 대상으로 착각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 한 분입니다.
예배의 대상을 명확히 하지 않으면 신앙의 본질에서 멀어집니다.
호세아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을 바르게 알지 못하면, 주변을 맴돌 뿐 착각에 지나지 않는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는 하나님을 깊이 알아가는 만큼 온전해집니다.
피조물이 우상이 되고, 세상이 우상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신념이나 가치관이 우상이 되어버린, 하나님과 무관한 기독교인이 되지 않아야 합니다.
무지는 죄입니다.
마노아가 염소와 곡식 예물을 하나님께 드리자 불꽃이 일어나 하늘로 올라가는 동시에 여호와의 사자가 불꽃에 휩싸여 올라갔습니다.
마노아는 그제야 천사를 알아보았지만, 하나님을 보았으니 죽게 되었다며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려 하셨다면 제물을 받지 않았을 것이며 이 모든 일을 보이거나 말씀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그를 달랩니다.
믿음이 부족하면 두려워 떨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일들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약속대로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아이의 이름을 삼손이라고 지었습니다.
삼손은 ‘작은 태양’이라는 의미입니다.
태양을 섬기는 이방 종교가 반영된 이름인 것입니다.
들릴라는 ‘밤’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이름의 뜻은, 삼손이 눈을 잃게 되는 사건과 연관해서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삼손을 나실인으로 부르셨고, 사사로 세우시기 위해서 그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영안이 어두우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삼손의 부모는 하나님의 기묘한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삼손은 나실인으로서 지켜야 할 하나님의 명령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내 생각대로 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뤄지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부족하고 어리석은 우리를 위해 여전히 신실하게 일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아가며 그분을 신뢰하는 태도로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크게 기뻐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올바르게 하나님을 예배하고 감사를 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하심에 순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2021년 9월 2일(목)
생명의 삶 Q.T. 묵상 - [은혜]
●성경본문 : 사시기 13장 1~14절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이 계속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블레셋의 괴롭힘 속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을 당할 때마다 그들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사사를 세우셨습니다.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을 위해 한 사람을 예비하셨는데, 바로 삼손입니다.
하나님은 단 지파에 속한 마노아의 가정을 택하셔서 그들에게 아들을 허락하셨습니다.
오랫동안 자녀를 낳지 못해서 희망을 잃은 한 가정을 찾아가셔서 그 가정을 건지셨을 뿐 아니라 그 아들 삼손을 사사로 세우심으로 범죄한 민족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하나님의 눈에 거슬리는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죄의 고통 속에서 아무런 죄책감도 없었고 범죄한 상태에서 벗어날 수도 없는 철저히 무력한 존재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처럼 아무런 자격이 없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적극적인 호의요 은혜입니다.
죄에 대해서 무력한 존재는 과거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닙니다.
우리 역시 그들과 다를 바가 없는 죄인입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이스라엘을 위해 삼손을 보내주신 것처럼,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예수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의 운명에서 벗어날 길이 없던 죄인들을 위해 보배로운 피를 흘려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확실한 구원의 길을 허락하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분의 은혜를 날마다 기억함으로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의 괴롭힘에 고통당한 세월은 결코 짧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40년이라는 긴 세월을 고통 속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고통으로부터 구원해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았습니다.
구원을 위해 기도하던 믿음마저 잃어버리고 영적 어둠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블레셋이 섬기는 우상을 숭배하면서 이방 민족에게 동화되어 버렸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구원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당신의 백성을 향한 넘치는 사랑 때문에 주권적으로 그들을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이런 주권적 선택은 하나님의 사자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나타난 일을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습니다.
마노아의 아내 역시 자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그 문제에 대해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자는 그녀에게 자녀가 없다는 사실을 먼저 지적하며 아들을 주겠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하고 기대하지 않은 순간에도 항상 당신의 백성을 살펴보고 계시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시고 구원을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이 자신의 공로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선행이나 봉사나 헌금은 절대로 구원의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며, 우리를 안전하게 보호하시고, 가장 선한 길로 인도해 주십니다.
은혜의 하나님이 범죄한 이스라엘을 위해 삼손을 예비하셨습니다.
죄인 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죄의 용서와 영생이라는 놀라운 구원의 선물을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죄가 주는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영혼들을 찾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손을 붙들고 회복하는 인생이 되기를 바랍니다.
2021년 9월 1일(수)
생명의 삶 Q.T. 묵상 - [겸손함과 경건함을 잃지 말아야]
●성경본문 : 사시기 12장 1~15절
사사 입다는 딸을 잃고 슬픈 승리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슬픈 사건이 이어집니다.
자신을 비난한 에브라임 사람들을 대량 학살한 것입니다.
사사 시대는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가 깨졌을 뿐만 아니라, 지파 간의 관계도 깨졌음을 보여줍니다.
에브라임 지파는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승전 후에 받는 혜택에서 배제되었습니다.
이것을 만회하기 위해 에브라임 지파는 전쟁에 자신들을 부르지 않은 입다를 비난하고 원망했습니다.
그러고는 입다의 집을 불사르겠다며 협박했습니다.
에브라임 지파의 위협에 입다는 크게 분노하여 그들의 주장을 반박했습니다.
그들에게 참전을 요청했음에도 그들이 외면했기에 자신이 목숨을 걸고 싸워야 했다는 것입니다.
입다는 자신의 요청을 거부한 그들을 질책했습니다.
에브라임 지파가 목숨을 걸고 싸운 입다에게 감사하기는커녕, 그를 원망하고 협박한 것은 분명한 잘못입니다.
그러나 입다도 들끓는 분노를 다스리지 않아 큰 비극을 불러왔습니다.
그는 스스로 분노를 정당화하며 그 감정에 매몰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분노에 매몰되고 나면, 돌이키기 힘든 죄를 짓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성경은 분노의 감정을 하루가 지나도록 품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입다는 이스라엘의 사사로서 자신의 분노를 하나님께로 가지고 나가 해결했어야 합니다.
그가 억울함을 호소하며 도우심을 구했다면 하나님은 선한 방법으로 입다를 위로하시고 문제를 해결해 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의 내면에 일어나는 모든 감정을 이해하고 공감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분노가 끓어오를 때는 만사를 제쳐두고 하나님부터 찾으십시오.
모든 감정을 하나님께 의뢰하십시오.
입다는 에브라임 지파와 대항해 싸울 길르앗 사람들을 모았습니다.
작은 갈등이 커다란 전투로 번져, 에브라임 사람 4만 2천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입다는 에브라임 지파를 용서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을 비난하고 협박한 이들에게 철저히 보복했습니다.
그는 에브라임 지파와의 내전 직전에 암몬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를 얻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했음에도 개인에게 닥친 억울한 일 앞에서 그 은혜를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입다가 동족과 싸우는 현장에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다툼과 분열에 함께하시지 않습니다.
신앙 공동체 안에서 우리도 다른 지체의 실수나 잘못으로 마음이 상하고 때때로 분노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입다처럼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으려면 하나님이 베푸신 용서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던 자들이며 진노의 대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죄인들을 예수님을 통해 온전히 용서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받은 우리가 다른 지체를 용서하는 일에 주저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가족이 된 지체들을 온전히 용서하고 연합을 이루어 간다면,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을 향한 최선의 순종이 될 것입니다.
입다의 뒤를 이어 베들레헴 사람 입산이 사사가 되었습니다.
입산은 아들 30명과 딸 30명이 있었는데, 딸들은 모두 타국으로 시집보냈고 아들들은 타국에서 데려온 여자들과 결혼을 시켰습니다.
이후 엘론에 이어 압돈 역시 비슷한 권세를 누립니다.
압돈의 아들과 손자 70명은 모두 어린 나귀를 타고 다녔습니다.
믿음의 유산을 남겨 신앙의 가문을 지키고 세우는 일이 인생에 중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얻은 평화의 번영인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열방 가운데 드러냈어야 했습니다.
사사 시대의 비극은 지파 간에 발생한 주도권 다툼 때문이었습니다.
자신만 높아지려는 교만함과 상대방의 인격을 모욕하는 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영적 지도자라면서도 자녀들이 신앙의 유산을 중요하게 여기도록 양육하지 못했으며, 사적 평안만 추구했습니다.
우리는 분열을 막고, 참 평화이신 하나님을 의지해서 겸손함과 경건함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2021년 8월 30일(월)
생명의 삶 Q.T. 묵상 - [하나님의 선한 능력으로]
●성경본문 : 사사기 11장 12~28절
사탄은 ‘거짓말쟁이’이며 ‘거짓의 아비’입니다(요8:44).
거짓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 즉 진리 위에 굳게 서야 합니다.
입다가 암몬 족속을 물리친 것처럼 거짓 세력을 물리치는 원리를 배워 사탄과의 영적 싸움에서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암몬 족속이 이스라엘을 치러 오자 입다는 암몬 왕에게 사자를 보내 그들의 침략 명분을 물었습니다.
암몬 왕은 자신들의 소유였던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과 요단까지의 땅을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 점령했으므로 다시 찾으러 왔다고 대답합니다.
암몬 왕은 자신의 말이 역사적 사실이므로 돌려주면 전쟁을 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좋게 말할 때 돌려주면 살려는 주겠다는 협박과 회유입니다.
그러나 암몬 왕의 주장은 거짓입니다. 역사 왜곡입니다.
하나님이 암몬 족속의 땅을 이스라엘에게 기업으로 주지 않으셨기에 이스라엘은 암몬 족속의 땅을 점령하지 않았습니다(신2:19,37).
그런데도 암몬 족속의 이런 주장은 이스라엘 땅을 빼앗겠다는 욕심에서 나온 거짓 주장입니다.
지금도 역사 왜곡으로 남의 영토를 자신들의 소유로 주장하는 일들이 국제사회에서 비일비재합니다.
이스라엘의 영토를 탐하는 암몬 족속의 시도는 영토 분쟁을 넘어 사탄의 세력이 하나님의 나라를 공격하는 영적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성도는 진리 위에 굳게 서서 거짓으로 하나님 나라를 공격하는 악한 세력을 물리쳐야 합니다.
입다는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 역사를 언급하면서 이스라엘이 암몬 땅은 점령하지 않았고 아모리 족속의 땅만 점령했음을 분명히 말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땅을 이스라엘이 차지하는 것이 정당하며 암몬 족속이 그 땅을 빼앗으려는 것은 잘못된 것임을 주장한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그 땅에 거주한지 300년이나 되었는데, 그동안 그 땅을 찾으려는 시도가 없었음을 말하며 암몬 왕이 억지 주장을 하고 있다고 압박했습니다.
또한 입다는 모압 왕 발락이 이스라엘을 대적하다가 멸망당한 일을 언급하면서 암몬도 이스라엘을 대적하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을 경고합니다.
입다는 이스라엘을 위해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그 말씀을 근거로 거짓된 주장을 반박했습니다.
입다와 같이 성도들도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해 사탄의 거짓 주장을 막아 내야 합니다.
암몬 왕이 거짓 주장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한 것은 사탄의 세력이 거짓으로 하나님 나라를 공격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탄은 에덴동산에서부터 거짓을 무기로 아담과 하와를 유혹해 타락시킴으로 하나님 나라를 대적했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이단과의 영적 싸움을 해왔습니다.
지금도 적그리스도 세력은 진리의 말씀을 왜곡해 사람들을 미혹함으로 하나님 나라와 교회를 공격합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므로 성도와 교회는 진리의 말씀으로 무장해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지 말고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해야 합니다.
사탄은 지금도 거짓된 교훈으로 교회와 성도들을 무너뜨리려고 끊임없이 도전합니다.
교회와 성도들이 사탄의 공격에 무너지는 이유는 진리 위에 굳게 서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성령의 검을 가지고 사탄과 죄와 피흘리기까지 싸워 승리해야 합니다.
과연 승리의 비결은 어디에 있을까요?
입다는 외교적으로 상당히 탁월한 논리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협상은 결렬되었습니다(28절).
입다의 장황한 말들은 이스라엘의 자존심을 내세운 것 이상의 의미는 갖지 못했습니다.
큰 용사인 입다가 싸움을 잘 하니까 군대 지도자로 세우자는 길르앗 장로들의 생각이나, 뛰어난 언변으로 상대방을 말로 굴복시킬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입다의 시도나 모두 큰 의미를 갖지 못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가 없으면 인간의 능력은 그리 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전신갑주를 입고 힘껏 싸워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속한 것이 아니며 악한 영을 상대하는 것인 만큼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나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선한 능력으로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2021년 8월 29일 주일기도문]
죄와 허물의 어둠에서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 소망을 두고 살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코로나로 인해서 하나님과 세상 사이에서 머뭇거리던 저희의 몸과 마음을 위로하듯 무더위를 지나 시원한 바람으로 생기를 더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가을의 정취가 깊어져 가는 때에,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더해가며 영적으로 부요한 자가 되게 하옵소서.
그릇된 종교적 지성에 대해서 분별의 능력을 주시고, 막연한 번영과 축복을 외치며 넓은 길로 인도하는 사망의 유혹을 뿌리치게 하옵소서.
고난이 유익임을 믿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는 담대한 성도가 되기를 원합니다.
빛과 어둠이 공존할 수 없듯이 정의와 불의가 함께 할 수 없으며, 마침내 천국과 지옥으로 나눠지는 심판이 있음을 알게 하옵소서.
오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기쁨으로 찬송하며 주님만 따라가게 하옵소서.
사망의 권세로 가득한 아프가니스탄을 긍휼히 여겨 주옵소서.
난민이 되어 이 땅을 찾은 이들에게 위로와 은총을 내려주시고, 억압의 수단이 된 이슬람 종교의 허상을 깨닫게 하셔서 자유와 해방을 주신 하나님을 만나게 하옵소서.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물으시던 예수님을 기억함으로, 섬김의 기회를 선용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년 8월 27일(금)
생명의 삶 Q.T. 묵상 - [조용히 잠식해 오는 죄]
●성경본문 : 사사기 10장 1~9절
아비멜렉 이후 이스라엘은 거의 50년 가까이 평화를 누립니다.
하지만 비극의 씨앗들은 조용히 뿌려지고 있었고, 결정적인 전환점에 도달하자 이스라엘은 악을 향해 질주합니다.
겉으로는 별 문제가 없어보였지만, 죄악의 파도 밑에서는 엄청난 일들이 준비되고 있었습니다.
아비멜렉의 뒤를 이어 ‘돌라’가 사사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의 삶은 매우 단순했습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했고, 23년 동안 사사로 있다가 죽었습니다.
돌라의 삶에는 아비멜렉과 같은 극적인 드라마는 없습니다.
돌라가 이스라엘을 구원했고, 아무 문제없이 이스라엘은 23년이라는 긴 평화의 시기를 보냅니다.
돌라의 뒤를 이어 ‘야일’이 사사가 되어 22년간 평화가 이어집니다.
그런데 그는 기드온과 비슷하게 30명이나 되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모두에게 공급할 적당한 소유가 필요했습니다(30마리의 나귀와 30개의 성읍 등).
하나님이 주신 평화가 계속되는 듯 했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들이 조금씩 더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겉모습은 변함없이 괜찮아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조금씩 물질과 이기심에 타협한다면 아마도 다른 문제의 싹이 우리 안에서 계속 자랄 것입니다.
결국 야일이 죽은 후에 문제가 터집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버리고 온갖 이방의 신들을 섬겼습니다.
순식간에 천지개벽이라도 일어난 것 같지만, 조금씩 이방의 문화와 가치관이 이스라엘을 파고들었고 그들의 여호와 신앙을 잠식해 버린 것입니다.
결국 억눌려 왔던 죄와 탐욕이 뿜어져 나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연히 이스라엘의 악에 진노하셔서 이방 민족의 손에 그들을 넘기셨습니다.
그들이 닮아 갔던 이방 민족에게 고통을 받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죄와 욕망을 쫓아가다가 마침내 그것에 잡혀 먹히는 사람들을 봅니다.
당장은 인생에 만족과 기쁨을 주는 것 같지만, 욕망과 탐욕은 우리보다 우월한 힘을 가졌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방 민족들에 의해 이스라엘은 심각한 고통을 받습니다.
그 고통은 블레셋과 암몬과 아모리 족속 때문이라고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히 그 이유를 ‘여호와께서 진노하사’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범하는 가장 치명적인 실수는 하나님과 세상을 분리하려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만물 가운데 계시고, 모든 것을 주관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시간, 장소, 행동 혹은 감정을 하나님과 상관없이 독단적으로 생각하고 결정한다면, 하나님은 곧 우리에게 진노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을 따라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하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볼 수 없는, 우리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조금씩 하나님 이외의 것에 자리를 내어준다면,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던 것들은 결국 우리 인생을 잠식하게 되고, 마침내 우리를 지배할 것입니다.
2021년 8월 26일(목)
생명의 삶 Q.T. 묵상 - [절제되지 않은 권력의 결말]
●성경본문 : 사사기 9장 46~57절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고 계시며 모든 것을 주장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때에 개입하셔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우리는 종종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신 것 같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절망하고 탄식하고 심지어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항상 함께하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때에 당신의 방법으로 우리 삶에 개입하십니다.
누가복음 21:19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아비멜렉은 왕이 되기 위해 70명이나 되는 이복형제들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과연 왕이라는 자리는 이런 악행을 저지를 가치가 있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은 죄인들이 의지하고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무가치한지, 절제되지 않은 권력의 결말이 어떠한지를 잘 보여줍니다.
아비멜렉이 세겜을 쳐서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이자, 세겜 망대에 있던 사람들이 엘브릿 신전의 보루, 곧 요새로 피했습니다.
그들은 엘브릿(언약의 신)이라는 우상이 자기들을 지켜 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아비멜렉이 신전까지는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기대는 모두 헛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비멜렉은 나무를 찍어 신전 보루에 놓고 불을 놓았습니다.
결국 ‘우상의 언약’같은 것은 지켜지지 않았고, 그 안에 도피했던 남녀 천명이 모두 죽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형제 70명을 무참히 죽인 악인을 왕으로 세운 자들이 죗값을 치르게 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의 우상 신전마저 함께 제거하셨습니다.
인간은 이처럼 헛된 것을 의지하지만, 하나님은 그 헛된 것들을 철저히 멸하심으로 당신의 위엄을 드러내십니다.
아비멜렉은 세겜을 진멸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데베스라는 곳으로 진격해 그 성을 점령했습니다.
데베스 사람들이 세겜 사람들과 함께 아비멜렉에게 맞섰다 하더라도, 아비멜렉의 행동은 지나치게 잔인했습니다.
성을 이미 점령했고 그 성 사람들이 망대로 도망한 상황에서 무차별 살육을 자행했습니다.
아비멜렉은 복수와 살인을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십니다.
한 여인이 던진 맷돌 위짝으로 아비멜렉의 머리를 깨뜨려 버리셨습니다.
아비멜렉은 여인에게 죽었다는 소리를 듣기 싫다며 부하에게 자기를 찔러 죽여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결국 세상의 헛된 야망을 쫓으며 헛된 인생을 살다가 무가치한 죽음으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아비멜렉이 죽자, 그의 권세는 바람처럼 사라집니다.
그를 따르던 군대는 모두 흩어져 버렸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의 악행에 보응하신 것입니다.
요담의 저주대로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불이 서로를 태워 버리는 것으로 끝났습니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아비멜렉은 강한 힘을 가진 자요, 요담은 산꼭대기에서 저주를 퍼붓기만 하고 도망간 나약한 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아비멜렉이 아니라 요담의 편이 되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의 눈으로는 약하고 평범해 보이나 그 누구보다 강력한 하나님의 권세를 가진, 가장 가치 있는 인생을 사는 사람들임을 확신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높은 지위와 큰 영향력을 가졌다 해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선하고 가치 있는 일에 쓰임 받지 못한다면 결국 헛된 인생일 뿐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22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악을 버리지 않으면 망합니다. 잠깐의 유익 때문에 우리의 영혼을 죽여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휩쓸리지 말고 오직 주님 안에 거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2021년 8월 25일(수)
생명의 삶 Q.T. 묵상 - [공멸 共滅]
●성경본문 : 사사기 9장 26~45절
악인들의 연합을 두려워할 것도, 부러워할 것도 없습니다.
악인들의 연합은 공멸의 길일뿐입니다.
그들은 이익과 권력을 탐할 뿐 언제나 자신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마음에 정함이 없는 자들입니다.
디모데전서 6:17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아비멜렉과 비슷한 ‘가알’이라는 인물이 등장과 함께, 이번에는 세겜 사람들이 가알을 따르기로 합니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에 대해 품고 있던 불만을 시원하게 해소해 줄듯이 큰소리를 쳤기 때문입니다.
가알은 아비멜렉과 동일한 선동가였으며, 세겜 사람들은 가알의 선동에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그런데 세겜의 방백 스불은 아비멜렉에게 충성스러운 자였습니다.
그는 성읍 상황과 해결책을 아비멜렉에게 알렸습니다.
그의 계책 덕분에 아비멜렉은 가알을 물리칠 수 있었습니다.
스불은 충성스러웠고, 냉철했으며, 기민했습니다.
그러나 그 역시 하나님의 공의나 거룩이나 선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익을 따라 아비멜렉을 도왔을 뿐입니다.
결국 이 모든 과정은 각자 자신의 이익을 위한 진흙탕 싸움에 불과합니다.
세상은 자신에게 충성스러운, 스불과 같은 자를 원합니다.
자기에게, 자기 조직과 공동체에 충성된 사람을 만들려고 합니다.
세상은 그렇게, 자기에게 절하고 충성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경배하면 원하는 모든 것을 채워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우리 위에 군림하려는 것뿐 어떤 약속도 거짓입니다.
거기에는 소망도 구원도 없습니다.
스불의 보고 덕분에 아비멜렉은 반역의 무리를 손쉽게 제압합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변하지 않는 원리 중 하나는 ‘약육강식’입니다.
아비멜렉이나 스불이나 모두 똑같이 탐욕스러운 자들입니다.
다만 아비멜렉이 좀 더 힘이 있고 기민했기에 승리했을 뿐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더 힘 있고, 똑똑하고, 부유하고, 기민한 자들이 이기는 곳입니다.
이런 세상의 원리로만 보면 예수 복음을 의지한 우리는 세상에서 별로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서 그 관계를 뒤집는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가알의 입은 그의 올무가 되었습니다.
정치적 야욕을 위해 아비멜렉과 그 백성을 조롱했던 탓에 그는 전투에 앞장서야 했습니다.
가알은 자신이 했던 말을 실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그의 야망은 그가 가진 힘으로는 실현할 수 없었고, 그의 힘을 넘어서는 모든 말은 거짓이 되었습니다.
성도 된 우리 역시 한 인간으로서의 힘은 더없이 나약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주의 성도들을 기꺼이 도우십니다.
세상의 모든 것에는 끝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토록 목을 매고 힘썼던 세상에서 성취한 어떤 것도 인생의 끝에 서게 되었을 때 소망이 없고, 영광이 없는 것에 불과합니다.
오늘 나는 무엇에 진력하고 있습니까?
내 삶의 사이클은 무엇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습니까?
현실과 악의 세력과 타협해서 공멸共滅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 선한 일을 위해 연합하며, 주님 오실 날을 고대하며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2021년 8월 24일(화)
생명의 삶 Q.T. 묵상 - [세상이 변하는 이유는]
●성경본문 : 사사기 9장 16~25절
자신의 욕구와 감정이 채워지는 것으로 기뻐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사랑과 함께하심으로 만족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져 서로를 죽이기를 서슴지 않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당신은 지금 하나님과 얼마나 깊이 동행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만으로도 기뻐할 수 있습니까?
아래 찬송과 찬양을 알고 있을 겁니다. 단지 부르는 것으로만 말고, 진심어린 신앙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545장. 이 눈에 아무증거 아니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이 귀에 아무소리 아니들려도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리라
걸어가세 믿음위에 서서 나가세 나가세 의심 버리고 걸어가세 믿음위에 서서 눈과귀에 아무증거 없어도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나의 소망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오직 주만이 나의 반석 나의 구원이시니 오직 주만이 나의 산성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
요담은 세겜 사람들의 행위가 진실하고 의로운 것이냐고 따져 묻습니다.
그들이 그들을 위해 싸운 기드온을 잊어버리고 선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선대하기는커녕 오히려 기드온의 아들들을 몰살하는 행악자를 지지했습니다.
세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애’에 따라 행동하지 않고 눈에 보이는 선동가의 말을 더 신뢰했습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들의 마음에 하나님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죄와 탐욕과 욕망이 가득한 그들의 마음은 선동가의 거짓 유혹에 가장 좋은 먹잇감이었습니다.
요담은 그들의 행위가 진실하고 의로운 것이라면 그 결과가 기쁨일 것이고, 진실과 의에 기반하지 않았다면 그 결과는 멸망일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성경이 말하는 기쁨과 일반적인 기쁨은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성경은 주의 백성이 기뻐하는 것은 그들을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분의 약속 그리고 신실하게 말씀을 성취하는 그분의 역사를 향한 기쁨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없는 자들의 기쁨은 죄와 악에 기반한 감정과 탐욕이 채워지는 만족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 자들의 마지막은 고통과 소멸과 형벌입니다.
인간은 반드시 하나님을 만나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 아닌 것에 소망을 두는 자들의 삶은 허탄해질 것입니다.
지금은 부유하고 화려하고 기쁨이 가득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모든 것은 불 가운데 사그라 질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약속을 아는 주의 백성입니다.
결국 사라져 버릴 허망한 것에 소망을 두지 마십시오.
아비멜렉의 몰락은 그를 세워 주었던 곳에서 시작됩니다.
그를 왕으로 만들었던 사람들이 배반한 것입니다.
그들은 왜 돌아선 것일까요?
그들이 아비멜렉을 배신한 이유는 아비멜렉을 왕으로 세운 이유와 동일합니다.
전적으로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이유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그를 왕으로 세웠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그를 배신한 것입니다.
세상과 믿음 없는 사람들에게 소망을 두지 마십시오.
세겜과 아비멜렉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는 명확합니다.
그들이 행한 악이 그들 머리 위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한 분 만으로 만족하는 이들을 사랑하시고, 오래 참으시고, 좋은 것을 주시는 분입니다.
반면에 죄와 악에 대해서는 벌주시고, 심판하시고, 반드시 바로잡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과 인애를 떠나 죄를 선택한다면 우리는 이제와는 다른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쉽게 변합니다.
사람들의 감정과 태도와 행동을 시시각각 예측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삶에는 기초가 없기 때문입니다.
온전하고 거룩하며 영원한 것에 삶의 기반을 두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을 허무하게 사라질 것 위에 세우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 위에 굳게 서서 그 능력으로 세워지는 삶이되시기를 소망합니다.
2021년 8월 23일(월)
생명의 삶 Q.T. 묵상 - [그의 아버지는 신앙적으로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성경본문 : 사사기 9장 1~15절
기드온과 그의 아들 아비멜렉 이야기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은 이스라엘이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모든 이의 목자이시며 우리는 양입니다.
목사님은 성도에 대하여 목자이며, 아버지는 자녀에 대하여 목자입니다.
세상에는 선한 목자와 어린 양이 있는가하면, 삯꾼 목자와 악한 양도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목사인 저로서는 성도들에 대해서 참 목자의 사명이 무엇일지 생각하게 한다면,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성도님들은 부모로서 자녀에 대한 목자의 사명을 잘 감당해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여러 분야에서 다스림에 능력 있는 지도자를 배출하는 귀한 가정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으로 갔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기드온의 첩으로서, 세겜 출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세겜은 애매한 지역이었습니다.
분명 이스라엘에게 우호적인 지역이었지만, 엄밀히 이스라엘에 속한 곳은 아니었습니다.
첩 역시 비슷한 의미를 가집니다. 온전한 가족이라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가족이 아닌 것도 아닙니다.
결국 이 애매한 지점에서 비극은 시작됩니다.
신앙의 삶이란, 우리에게 들어와 있는 애매한 지점을 줄이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죄와 탐욕이 파고드는 부분, 세상과 타협하고 있는 부분을 줄여 나가는 것이 신앙입니다.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지원한 이유는 그가 세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의 언변과 결단력과 실행력과 리더십도 영향이 있었겠지만, 세겜 사람들은 동향이라는 이유로 그를 지지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역시 어떤 대상을 선택하고 지지하고 추구하는 근거에 있어서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삶의 중요한 결정을 세속적 가치나 관계에 우선순위를 두고 결정을 내립니다.
그러나 분명히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하나님 없이 내린 결정과 행동은 크나큰 상처와 실패로 되돌아온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비멜렉이 가장 먼저 한 행동은 경쟁자인 형제들을 학살한 것입니다.
모든 장애물을 제거한 후 그는 스스로 왕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을 선동하고, 형제들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는 일련의 과정을 볼 때, 아비멜렉은 하나님을 전혀 개의치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과 가까웠던 아버지에게서 태어났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신앙적으로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했습니다.
요담은 그리심산 꼭대기에 올라 세겜 사람들의 잘못을 질책했습니다.
요담은 분명 아비멜렉과 대척점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외치는 메시지의 핵심은 ‘하나님’ 그리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의’였습니다.
세겜 사람들의 결정과 행동에 대해서 하나님이 어떻게 판단하실지 생각해 보라고 도전했습니다.
분명 그는 아비멜렉을 증오하는 동시에 두려워하고 있었지만, 그의 궁극적 목표는 개인의 복수가 아니었습니다.
요담은 사사 기드온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로서 세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기준에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길 촉구한 것입니다.
세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을 과시하고, 위세를 떨치며,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세상의 권력자를 선택했습니다.
그 결과는 정확히 그들의 선택과 일치했습니다.
그들이 가시나무를 선택했기에 가시가 계속 그들을 찌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아름답고 풍성하고 영광스러운 것을 보지 않고, 세상의 기준으로 선택한 결과는 고통뿐입니다.
우리는 자유의지로 어떤 것이든 선택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과 일치하는 가시나무를 선택할 수도 있고, 고귀하고 아름다우며 영화로운 감람나무를 선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분별해서 선택해야 합니다.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불행이 대물림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With God I am everything, Without God I am nothing.
[2021년 8월 22일 주일기도문]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딤후1:9~11)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매일 변함없이 새날을 주시고, 주님과 동행함으로 복된 하루하루를 열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무더운 여름을 어찌 보낼까 깊은 한숨뿐이었던 시간도 흘러 어느덧 가을을 준비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가을에는 곡식들이 고개를 숙이듯이 더욱 겸손하게 하옵소서.
하늘이 높음같이 믿음이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게 하옵소서.
말이 살찌듯이 영혼이 살찌게 하옵소서.
모든 곡식과 나무들이 열매를 맺듯이 주의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시고, 건강과 지혜와 능력을 충만하게 하옵소서.
거룩한 예배자, 쉬지 않는 기도자가 되게 하시고, 복음의 능력에 사로잡힌 사명자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년 8월 20일(금)
생명의 삶 Q.T. 묵상 - [더 이상 하나님이 나타나지 않으셨다]
●성경본문 : 사사기 8장 1~9절
가나안 지역에 흩어진 이스라엘 각 지파는 신명기에 기록된 모세의 유언도, 가나안 정복을 위해서 목숨을 다해 충성한 여호수아의 이야기도 전설처럼 여기게 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을 향해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기드온의 ‘양털 기적’과 ‘300 용사’ 이야기는 성경을 읽으며 지친 마음에 위로와 용기를 주는 말씀으로, 교회 좀 다녀봤거나 성경 좀 안다는 이들에겐 익숙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어떤 이야기가 계속되는지는 잘 모르거나, 본질은 비켜가면서 부분적인 주제(연합)로 설교하거나 알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은 항상 성공했을 때, 이뤘다고 할 때 조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성공과 성취는 잠깐일 뿐, 영원을 위한 성공과 성취를 위한 시작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일 뿐입니다.
개인이든 가정이나 직장 등 어떤 공동체든, 세상이든 교회이든 ‘이만하면, 이 정도면 됐다’고 할 때가 인생 최대의 위기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쟁에서 승리한 기드온 이야기의, 오늘 본문의 시점부터 하나님은 더 이상 기드온에게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주말을 앞둔 금요일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시작합니다.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은 미디안 족속과의 전투에 처음부터 참여하지는 않았습니다.
에브라임 지파의 특징은, 항상 ‘리더’의 역할을 하고 싶어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나안 정복전쟁을 주도한 여호수아가 에브라임 지파 사람이었다는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나안 땅을 분배할 때, 에브라임은 중앙 지역을 차지했습니다.
이는 이방 민족과 국경을 맞대고 있지 않다는 것이고, 이방 민족의 침입으로부터 보호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입니다.
또한 사사 시대의 중요한 성소였던 벧엘과 실로가 모두 에브라임 접경 지역에 위치해 있었고, 이것은 에브라임의 상당한 자부심이 되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이,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 자신들을 소집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빌미로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을 시기한 배경이 되었고, 다툼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다행이라고 할까요?
말 한마디에 천 냥 빚을 갚는다는 말처럼 기드온은 말 한마디로 에브라임 사람들의 마음을 풀어 줍니다.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2절).
또한 미디안의 방백인 오렙과 스엡을 에브라임이 처단한 일을 언급하며, 자신이 한 일은 에브라임의 공적에 비해 미미하다고까지 말합니다.
이런 말에 에브라임 사람들은 화가 가라앉습니다.
기드온이 에브라임 사람들을 달래며 그들의 공로를 크게 치하한 것은 갈등 상황을 중재하기 위한 지혜로운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숙곳과 브누엘에 대한 기드온의 태도는 전혀 다릅니다.
에브라임 지파처럼 강자에게는 온건하고 부드럽게 대하면서,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처럼 약자에게는 과하게 행동합니다.
물론 이것이 이스라엘 지파의 연합에 균열이 생겼음을 보여주며, 이스라엘 다른 지파들은 미디안을 반드시 물리쳐야 할 위협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측면이 있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보여준 군사행동이 미디안의 압제에 대항하는 것이었다면 이제부터는 기드온 개인을 위한 군사 행동처럼 보여 진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군대가 이제 기드온의 개인 군대가 된 것입니다.
기드온이 미디안을 계속 추격하는 것은 과도한 군사행동이었습니다.
이미 미디안과의 전쟁은 승리로 끝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미디안을 추격하라고 하신 것도 아닙니다.
이제부터는 여호와의 전쟁이 아닌 기드온 자신의 싸움을 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그 동안 미디안에게 설움을 당해 온 것에 대한 개인적 보복을 위해서 미디안 왕들을 추격했습니다.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자, 기드온은 하나님을 잊은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 제단을 쌓지도 않았고 감사를 표하지도 않았습니다.
두려움에 떨던 자가 통치자의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하나님의 사자가 선언했던 큰 용사가 이제는 자신의 힘으로 미디안 두 왕을 추격하며 보복에 나선 것입니다.
미디안과의 전쟁은 하나님이 이기신 싸움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힘으로 승리했다고 말하지 않도록 군사의 수를 줄이시고 기적적인 방법으로 승리하게 하셨습니다.
오늘날 교회에나 그리스도인들 중에도 기드온 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약한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실 때는 겸손히 하나님을 잘 따르고 섬기다가도, 부유해지고 힘과 능력이 생기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나님을 잊고 자신의 부와 힘을 자랑하는 일도 많습니다.
숙곳과 브누엘의 거절에 대한 기드온의 반응이 놀랍습니다.
기드온은 미디안의 왕들을 포로로 잡아 돌아오는 길에 그들을 징벌하겠다고 위협하기까지 합니다.
300용사가 ‘지치고 피곤했다’는 묘사는 기드온이 미디안의 왕들을 추격하기 위해서 용사들을 얼마나 채근했는지를 암시해 줍니다.
지도자가 변질되면 그 파급력은 어마어마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지도자는 항상 첫 마음을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성도 개개인도 승리하고 성취하게 하신 하나님에 대한 처음 마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임마누엘” 하나님이 언제나 당신과 함께 하기를 기도합니다.
* 숙곳 :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이 라반의 집에서 돌아오다가 형 에서와 만나 화해한 후 정착한 장소로서(창33:17), 그들이 동족임을 기억하게 하는 곳입니다.
* 브누엘(브니엘) : 야곱이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 씨름하다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은 곳으로(창32:30), 그들은 한 조상의 후손이었습니다.
2021년 8월 19일(목)
생명의 삶 Q.T. 묵상 -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
●성경본문 : 사사기 7장 9~25절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해서, 사탄과의 영적 싸움에서 날마다 승리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승리를 약속하시면서 전투를 위해 진영으로 내려가라고 명령하셨을 때, 기드온은 두려움으로 주저했습니다.
상식적으로 볼 때 미디안과 자신들의 군사력 차이가 너무 커서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믿음을 주시기 위해 미디안 병사들의 꿈 이야기를 듣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미디안 병사가 꿈을 꾸게 하셨고, 다른 병사의 해몽은 기드온이 미디안을 쳐서 승리한다는 내용이었으며, 이것을 기드온이 듣도록 해서 승리를 확신케 했습니다.
하나님이 싸우시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철저히 순종하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적국의 병사들의 입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확신하게 되었고, 하나님의 명령을 그대로 따라 행했습니다.
기드온의 300용사가 전투를 위해 준비한 무기는 나팔과 항아리와 횃불이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이는 도저히 순종할 수 없는 행위입니다.
무기로 무장한 적에게 비무장으로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기드온과 300용사는 믿음으로 순종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그들이 준비한 것은 ‘오직 믿음’ 뿐이었습니다.
사탄의 세력과 영적 싸움을 하는 성도에게 승리를 위한 유일한 무기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뿐임을 알아야 합니다.
기드온과 이스라엘 병사들은 나팔을 불면서 항아리를 깨뜨림으로 항아리에 감추었던 횃불을 밝혔습니다.
갑작스런 상황에서 미디안 병사들은 매우 혼란스러워하며 자기들끼리 칼로 치며 싸웠습니다.
미디안 병사들은 이미 싸울 의지를 상실했고 혼란 중에 패배를 인지하고 도망쳤습니다.
전쟁의 주체는 하나님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하나님이 이기신 싸움에 동참한 것뿐입니다. 그들은 단지 전리품을 거두는 정도의 역할을 할 뿐입니다.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는 조건은 믿음뿐입니다.
성도는 승리의 조건인 믿음도 주시고 사탄과 싸워 승리를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며 전해야 합니다.
2021년 8월 18일(수)
생명의 삶 Q.T. 묵상 - [온전한 300]
●성경본문 : 사사기 7장 1~8절
기드온이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가 미디안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무엇보다 미디안의 침공에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힘을 합쳐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기드온이 대단히 용맹한 장군도 아닙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잘 훈련된 정예병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이들의 두려움이 극대화되고 패배가 확실할 것 같은 명령을 내립니다.
곡창 지대인 이스르엘 평야(골짜기) 가운데를 흐르는 요단강 지류를 사이에 두고, 이스라엘은 남쪽 하롯샘 곁에. 미디안은 북쪽 모레산 앞 골짜기에 진을 쳤습니다.
두 진영 사이에는 시야를 가리는 것이 없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미디안 진영을 볼 수 있었고, 자기들의 수가 훨씬 적음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기드온을 따르는 이스라엘 군사의 숫자가 너무 많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는 전쟁의 승패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전쟁을 무조건 이스라엘의 승리로 이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들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힘으로 이겼음을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했습니다.
전쟁의 승패가 군대의 규모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던 자들은 모두 두려웠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이 두려운 자는 돌아가라고 말하자 3분의 2가 넘는 사람들이 떠났습니다.
그 정도로 이스라엘 군대의 사기는 형편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전쟁의 승리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전쟁의 승리는 인간의 용맹함이나 군사의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오직 믿는 자들이 승리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사람의 손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가 너무 작아서, 교인들이 적어서, 교인들 중에 유력한 사람이 없어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불신앙입니다.
삼상 14:6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삼상 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하나님은 아직도 이스라엘 군대가 너무 많다고 하시며, 기드온에게 하나님이 지정한 사람과만 함께 가고, 함께 가지 말라는 자와는 동행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이 능력을 발휘하시는 데에는 소수의 사람만 있으면 충분합니다.
이스라엘이 진을 친 하롯샘에는 맑고 깨끗한 물이 흘렀습니다.
이들에게 샘물에서 물을 마시게 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직접 입을 흐르는 물에 대고 마셨습니다.
단 300명의 사람들만 손으로 물을 떠서 핥아 마셨습니다.
이것이 기드온과 함께 싸우러 갈 자격을 결정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사실 손으로 물을 떠서 마시는 것이 무릎을 꿇고 엎드려 마시는 것보다 더 신중하고 진지한 행동으로 보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무릎을 꿇고 물을 입에 대고 마셨다고 해서 믿음이 없다거나 용맹하지 않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보다 적은 수의 사람을 남겨 두기 위해 300명의 사람들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는 최정예 군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기드온의 300용사면 충분했습니다.
이제 기드온과 남은 300명은 하나님의 말씀만 의지하여 목숨을 건 상황이 되었습니다.
사람을 의지하는 자는 패배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자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들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싸우는 자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얼마나 잘 순종하고 따르는가에 달려 있을 뿐, 우리의 수나 능력이나 유명세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눈과 마음에서 세속적인 시각과 가치관을 제거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크신 영광만 나타나기를 소망합니다.
2021년 8월 17일(화)
생명의 삶 Q.T. 묵상 - [약한 자를 강하게]
●성경본문 : 사사기 6장 33~40절
하나님은 믿음도 약하고 용기도 없었던 기드온을 강한 용사로 만들어 가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에 확실한 믿음을 갖고 쓰임 받는 거룩한 일꾼이 됩시다.
‘미디안, 아말렉, 동방 사람들’은 특정한 나라가 아니라 매우 넓은 지역에 분포한 여러 족속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한꺼번에 이스라엘의 추수 때를 노려 요단강을 건너 이스라엘 북부, 갈릴리 호수가 가까운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쳤습니다.
이 지역은 잇사갈 지파가 분배받은 곡창 지대로, 므낫세, 스불론, 납달리 지파와 인접해 있으며, 아셀 지파의 땅과도 비교적 가깝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셔서 그로 하여금 나팔을 불어 이스라엘 지파를 전쟁에 소집하게 하십니다.
하지만 여기에 응답한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 중 일부였습니다.
먼저 기드온이 속한 집안인 므낫세지파와 아셀, 스불론, 납달리 지파가 응답합니다.
사실상 침공 당한 지역의 지파들만 모이고 다른 지파들은 강 건너 불구경하는 상황입니다.
전혀 연합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전쟁은 많은 사람이 모여야만 승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사람들의 호응이 없더라도 한 뜻을 품은 소수의 사람들이 그 일을 시작하면, 하나님은 그 가운데 임하사 능력을 나타내시고 결국 좋은 결과를 내게 하시며, 영적 전투에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기드온은 ‘큰 용사’라고 불리기에는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이전에 이미 주님의 사자로부터 그의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상당히 주술적 방법을 사용해 확신을 얻고자 합니다.
사실 그가 여호와의 사자를 만나 말씀을 들은 것보다 드 크고 강력한 증거는 없음에도, 기드온은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한 방법으로 ‘양털 한 뭉치’를 사용했습니다.
게다가 이 일을 두 번이나 합니다.
타작마당은 상당히 넓은 평지인데, 그 가운데 오직 양털 뭉치만 젖게 되는 이적은 사실상 하나님의 권능이 아니고서는 도무지 일어날 수 없는 큰 기적입니다.
게다가 그 양털에서 짜낸 물이 그릇에 가득할 정도였다는 것은 자연현상으로는 절대 설명할 수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있고, 이런 이적까지 보았으니 이보다 더 하나님의 뜻이 확실할 수 없는데, 기드온은 다시 한 번 그 현상을 거꾸로 일으켜 달라고 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으시고, 그가 구하는 대로 행하며 용기를 북돋워 주십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보이신 인내의 이유는 무엇입니까?
기드온이 지도자로서 좋은 자질이 있었기 때문인가요?
기드온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찾고자 하시면 언제든 다른 지도자를 세우실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드온에게 인내를 보이신 이유는, 하나님은 부족하고 연약한 기드온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한계가 없는 사랑과 인내로 당신의 자녀들을 대하시며 그 걸음을 친절하게 인도하시는 은혜로우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이라는 작고 연약한 존재를 통해 커다란 구원과 승리를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셨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이런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배반하며 우상을 섬긴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부족한 기드온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그를 훈련시키셨습니다.
하나님이 그 나라를 확장하시는 일에 우리도 붙들려 쓰임 받기를 소망합니다.
2021년 8월 16일(월)
생명의 삶 Q.T. 묵상 - [하나님께 쓰임 받으려면]
●성경본문 : 사사기 6장 25~32절
여호와의 사자는 기드온을 ‘큰 용사’라 칭합니다(12절).
하지만 그가 큰 용사로서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만족시켜야 할 조건이 있습니다.
1. 하나님만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께 예배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용사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기드온에게 7년 된 수소로 제사를 드리라고 명령하신 이유가 이것입니다.
레위기의 제사 규례를 보면, 수소로 드리는 제사는 가장 큰 헌신을 표현하는 제사입니다(레1:3~9).
그런데 기드온에게 요구되는 제사에는 한 가지 명령이 더 추가됩니다.
아버지에게 있는 바알의 제단과 아세라상을 찍어 그 나무로 번제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이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영적 상태를 고스란히 드러내 줍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사임에도, 아버지의 집에는 바알과 아세라 우상이 버젖이 놓여 있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과 바알, 아세라를 동시에 섬기려는 혼합 신앙을 갖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에 양다리를 걸친 자는 결코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절대로 진정한 인생의 가치를 찾을 수 없습니다.
2. 옳은 일을 행하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기드온이 우상을 파괴하는 데 종을 열 명이나 동원한 것을 보면, 그가 상당한 재력과 사회적 지위를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성읍 사람들이 두려워 밤에 우상을 찍은 것을 보면 그만큼 그 사회가 우상 숭배에 찌들어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우상은 분명 기드온의 아버지인 요아스의 집에 있었음에도, 성읍 사람들은 이 일을 누가 했는지 적발해 내고, 결국 요아스에게 아들을 죽이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는 이들이 하나님이 아니라 바알을 절대적으로 섬기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이런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상 숭배가 만연한 사회에서 오직 하나님만 섬기는 거룩함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상당히 큰 용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명백한 잘못을 잘못이라 말하는 데에도 큰 용기가 필요할 때가 있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손에 들려 쓰임 받으려면, 어떤 위협이 있더라도 옳은 일을 고수하는 용기를 발휘해야 합니다.
3. 죄악에 대해서 단호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바알을 섬기는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입니다.
지금껏 유야무야 바알 숭배를 용납했기에 바알 제단을 훼파한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는 상태까지 흘러온 것입니다.
그러나 기드온의 아버지 요아스는 기드온을 변호합니다.
바알이 만약 신이라면 그의 제단이 허물어졌으니 직적 자신을 변호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나서서 바알을 구해 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일로 인해 기드온은 ‘바알과 맞서 다툰다’, ‘바알이 변호할 것이다’라는 의미의 ‘여룹바알’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서로를 용납하며 살아야 하지만, 진리와 비진리를 구분해야 할 때만큼은 예외적으로 단호한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죄를 묵인하고, 용납하고, 겁 없이 죄악의 선을 넘나들어서는 하나님께 쓰임 받을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는 자들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세상이 섬기는 우상을 섬기고, 세상을 두려워할 뿐 아니라 무엇이 옳고 그른지조차 말하지도 못한다면 어떻게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예배에 힘쓰며 하나님만 섬기십시오. 용기 있게 진리를 행하십시오. 죄악에 대해서 단호한 태도를 고수하십시오.
그래서 주님께 쓰임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
[2021년 8월 15일 주일기도문]
대한민국을 사랑하시고 지키시며 보호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76년 전 국권을 빼앗겨 어둠에 갇혔던 이 땅에 빛을 비춰주셨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린 고통을 통해서 자유의 소중함과, 올바른 정치와 경제 부흥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왕족과 양반들의 나라에서 민주공화국이 되게 하셨고, 유교와 우상의 지배에서 벗어나 주권이 국민에게 있고 권력이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새로운 나라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기독교 신앙에서부터 시작되었고 복음을 위해서 피 흘린 순교자들이 있었기 때문인 줄로 믿습니다.
신사참배를 거절했고 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쳤으며 교회를 지키고 예배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온갖 핍박과 박해를 견딘 용기 있는 믿음의 성도들을 세워 주셨습니다.
말씀과 기도로 성령 충만을 사모했고, 가난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예물을 봉헌하는 헌신의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가계에 흐르는 마귀의 저주를 끊기 위해 자녀들을 교회로 인도했고 주일학교, 성경학교가 어린이들로 차고 넘치게 하셨습니다.
자비하신 여호와 하나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대한민국을 평화와 번영으로 축복하시고 저희들 역시 부끄럽지 않은 신앙의 전통을 세워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년 8월 13일(금)
생명의 삶 Q.T. 묵상 - [저주와 축복의 갈림길]
●성경본문 : 사사기 5장 19~31절
하나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은 참자유와 기쁨을 누리고 평안의 복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지 않고 대적하는 자는 죄의 횡포에 눌려 고통과 신음 속에 결국 패망할 것입니다.
드보라의 찬양은 이렇게 엇갈린 인생의 결과를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가나안 왕들이 므깃도의 물가 다아낙에서 싸웠지만 은을 얻지 못합니다(19절).
그들은 이스라엘을 쉽게 이기고 전리품을 약탈할 것을 기대했지만 전리품을 하나도 얻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별들을 움직여 기손강에 때 아닌 비가 내려 병거들을 휩쓸어 가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시스라 군대의 말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발버둥을 쳤습니다.
출애굽 때 애굽의 병거들이 홍해에 휩쓸려 잠긴 장면이 떠오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어떤 세력도 우리를 이길 수 없고 패주해 도망갈 것입니다.
악한 사탄을 그 발 아래 두신 하나님의 능력을 찬양하기를 바랍니다.
바락은 승리의 상황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시스라의 병거와 그의 무리를 바락의 손에 붙이겠다는 말씀을 신뢰하지 못했던 자신의 불신앙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말씀을 붙잡고 전쟁에 임했다면 승리의 약속은 바락의 것이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말씀을 믿지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승리의 영광을 한 여인에게 넘기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분명하지 않으면 그분이 명하신 일을 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면 스스로 다른 방법을 찾을 수밖에 없습니다.
바락이 드보라에 동행을 요청한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바락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부족함을 드러낸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보다 오히려 드보라를 의지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복을 걷어차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지 못하면 그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승리를 노래하던 드보라는 갑자기 메로스를 저주합니다(23절).
‘메로스’는 가나안 북쪽 다볼산과 기손강 근처에 있는 이스라엘 성읍으로 추정됩니다.
이곳 사람들은 드보라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저주를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친히 전쟁에 나서셨는데 그들은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의 역할을 피한다면 책망 받아 마땅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일이 최선의 공격입니다.
반면에 이방인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면 무한한 복을 누리게 됩니다.
메로스를 향한 저주에 이어 전쟁에 혁혁한 공을 세운 겐 사람 헤벨의 아내 야엘에게 칭찬과 축복이 선언됩니다.
그녀는 지혜롭고 용기 있는 행동으로 군대장관 시스라를 꾸부러지면 엎드러지고 쓰러지게 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사는 인생은 칭찬과 영광을 얻습니다.
시스라의 어머니는 900대의 철 병거를 거느린 군대 장관 아들이 그녀의 자랑이자 기쁨이었습니다.
하지만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않는 아들로 인해 근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들의 병거가 늦어 극도로 불안해하던 그녀는 많은 노획물을 가지고 오느라 늦어졌으리라는 시녀들의 말을 믿고 스스로를 안심시키려 했습니다.
그러나 헛된 위로이며 허망한 생각일 뿐입니다.
사람들의 자랑은 언제 근심으로 바뀔지 아무도 모릅니다.
스스로를 아무리 위로해 보아도 그 위로는 헛될 뿐입니다.
두 여인의 엇갈린 운명은 우리에게 믿음의 결단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을 위하면 야엘처럼 복을 받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면 시스라의 어머니처럼 비극을 맞습니다.
“주의 원수들은 이처럼 다 망하고, 주를 사랑하는 자들은 힘차게 떠오르는 해처럼 되게 해 주십시오”(31절).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시스라처럼 비참한 종말을 맞게 하시고, 주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야엘, 드보라, 바락처럼 높임 받는 존재가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두운 세상에 빛을 주고 소망을 주고 생명을 전하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런 역할을 감당할 때 하나님이 우리 삶을 평안하게 하실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거둔 승리는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백성의 승리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힘 있는 자에게 지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를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 편에 서서 살아가십시오.
오늘,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순종함으로 어두운 세상을 힘 있게 비추는 해처럼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2021년 8월 12일(목)
생명의 삶 Q.T. 묵상 - [구원받은 성도라면]
●성경본문 : 사사기 5장 1~18절
이스라엘 백성은 오랜 세월 야빈의 압제를 받으며 큰 고통 가운데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처한 상황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친히 개입하셔서 구원을 이루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어떠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드보라를 세워 이스라엘에게 구원의 승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셔서 이루신 놀라운 구원의 역사 이후에 드보라는 하나님의 능력을 마음껏 소리 높여 찬양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야빈의 군대와 전쟁하기 위해 전쟁터에 나갔으나 승리의 근원은 하나님이심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런 드보라의 찬양을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드보라뿐만 아니라 당신의 모든 백성이 당신의 구원 역사를 찬양하도록 부르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누구든지 삶에서 경험한 구원과 축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나타내며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높이는 것을 부끄러워합니다.
사람들의 반응을 의식해 위축되기도 하고, 사람들과의 관계가 어색해질까 두려워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기를 주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이런 연약함을 아시면서도 우리에게 전도의 책임을 맡기셨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드보라는 흰 나귀를 탄 자들이나 양탄자에 앉은 자나 길에 행하는 자들에게 다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권면합니다.
삶의 모든 현장에서 하나님을 노래하고 드러내라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비록 코로나19로 사람들과 접촉하기 어려워진 상황이지만 우리의 선행과 이웃을 향한 섬김으로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의 은혜는 계속 전해져야 합니다.
야빈과의 전쟁에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동참해야 했으나 실상은 그러치 못했습니다.
스불론과 납달리 지파는 자신들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참전했으나 에브라임과 베냐민 그리고 잇사갈 지파는 일부만 참여했습니다.
길르앗이나 단 지파는 집에 머물렀고, 르우벤 지파는 양 치는 일에만 열중했습니다.
아마도 르우벤, 길르앗 지파는 야빈으로 인한 직접적 피해가 적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하나로 연합해야 할 이스라엘 백성이 공동체 의식을 잃어버렸음을 보여 줍니다.
만약 이스라엘 백성이 함께 힘을 모았다면 가나안 족속들의 억압도 막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르우벤 지파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목격한 후 동족의 어려움에 참여하지 않고 자신의 이익에 집착했던 잘못을 크게 반성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부르심보다 자신의 이익이나 세속의 욕심에 마음을 빼앗겼던 것을 후회한 것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구원 역사를 이 땅에 이루시기 위해 일꾼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는 이 부르심에 응답해 사역에 최선을 다해 애쓰고 수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되는 그날 그들의 수고에 대해 하나님께 칭찬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 맡기신 사명에 한마음으로 동참해야 합니다.
교회 공동체에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겸손함과 간절함으로 협력하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두 전도나 봉사의 의무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분주한 삶을 핑계 삼아 마땅히 감당해야 할 성도의 의무를 저버릴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높이고 전하는 일에 우리 시간을 기꺼이 드린다면 하나님은 이 세상에 당신의 이름을 드러내시는 일에 우리를 즐거이 사용하실 것입니다.
2021년 8월 11일(수)
생명의 삶 Q.T. 묵상 - [하나님 편에 서 있는가]
●성경본문 : 사사기 4장 11~24절
우연 같아 보이는 일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우연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능력으로 천지 만물을 다스리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때로 평범한 일도, 작은 일도, 하찮은 도구도 하나님의 손에서 오는 소중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모세의 장인 호밥의 자손 겐 사람 헤벨이 게데스 인근 사아난님 상수리나무 곁에 정착했습니다.
헤벨은 원래 정착지인 유다 황무지를 떠나 납달리 지경까지 이주했는데, 후에 가나안 왕 야빈과 평화조약을 맺었습니다.
그의 이주는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는 방편이 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일에 헤벨의 아내 야엘을 사용하십니다.
사람의 앉고 일어섬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임을 믿어야 합니다.
바락의 군대가 다볼산에 오르자 시스라가 철 병거 900대와 모든 병사를 기손강으로 소집합니다.
이때 드보라는 바락에게 “일어나라 이는 여호와께서 시스라를 네 손에 넘겨주신 날이라 여호와께서 너에 앞서 나가지 아니하시느냐”라고 말합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시스라의 군대에 비해 바락의 군대는 초라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함께하시기 때문에 반드시 승리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심을 믿고 어떤 상황에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믿음은 능히 세상을 이깁니다.
하나님은 시스라와 그의 모든 병거와 군대를 혼란에 빠뜨리십니다.
시스라는 병거에서 내려 걸어서 도망쳤고, 바락은 그의 군대로 하로셋학고임까지 추격해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전멸하는 승리를 거둡니다.
시스라의 자랑거리였던 900대 병거는 그의 수치스러운 과거의 자랑이 되고 맙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상의 영광과 자랑은 오히려 수치가 되고 맙니다.
허리 정도 깊이의 물에서는 움직이기기 힘듭니다.
그러나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가 몸에 힘을 빼면 몸이 물에 뜨고, 물에 의지해 자유롭게 헤엄질 수 있습니다.
어중간한 신앙생활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하게 경험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신앙생활이 힘들게 여겨집니다.
바락은 드보라를 통해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가나안 왕 야빈의 군대 장관 시스라와 싸워야 했지만, 주저하고 머뭇거렸기 때문에 한 여인 야엘에게 승리의 영광을 넘기고 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확실하게 주어졌는데도 믿지 못하는 마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시스라는 평화조약을 맺은 헤벨의 장막으로 피신합니다.
헤벨의 아내 야엘은 시스라를 장막에 영접하고 우유 부대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시스라가 깊이 잠들자 야엘은 장막 말뚝을 그의 관자놀이에 박아 죽입니다.
900대나 되는 철 병거를 지휘하던 시스라가 여인의 손에 죽임을 당합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은 여인과 말뚝으로 적군의 장수를 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왕 야빈을 이스라엘 자손 앞에 굴복시키셨고, 이스라엘을 점점 강하게 하셔서 가나안 왕 야빈을 마침내 진멸하고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하셨습니다.
모든 전쟁의 승리가 하나님의 손에 달렸습니다.
이는 개인, 가정, 국가의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어떤 정책과 구조 개선보다 중요한 것은 먼저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과연 우리가 하나님 편에 있는가, 그분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다면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어 이스라엘을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나약한 이스라엘 군대로 강력한 시스라의 군대를 격파하셨고, 연약한 여인의 손으로 군대 장관 시스라를 죽이셨습니다.
초라하고 작아 보여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결코 작거나 부족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손길이 함께하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습니다.
우연 같지만 모든 일에 하나님의 준비 역사하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의 백성 된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도구로 사용되기를 기도합니다.
2021년 8월 10일(화)
생명의 삶 Q.T. 묵상 - [죄에 대한 방심]
●성경본문 : 사사기 4장 1~10절
에훗이 죽은 후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께 악을 행했습니다.
이는 새로운 시대가 시작될 때마다 나오는 전형적 서론입니다.
그들은 이미 두 번이나 죄악으로 인한 재앙을 확실하게 경험했지만 태평성대를 보내면서 이를 완전히 망각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복을 방종과 타락의 기회로 삼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여호와께서 하솔에 가나안 왕 야빈과 하로셋 학고임에 거주하는 그의 군대 장관 시스라를 통해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습니다.
야빈 왕은 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이스라엘을 심하게 학대했습니다.
야빈 왕이 이끄는 북부 가나안 연합군은 이전에 여호수아에게 정복당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 산과 주변 땅으로 도망해 남은 자들이 다시 하솔을 건설하고 등장한 것입니다.
죄에 대한 방심이 실패의 원인입니다.
죄악의 뿌리를 완전히 뽑지 않으면 결국 그 죄에 지배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야빈 왕의 학대로 인해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이전에 메소포타미아 왕을 8년, 모압 왕을 18년 섬겼으나, 이번에는 20년이나 걸려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께 부르짖기까지의 기간이 점점 늘어났다는 것은 그들의 마음이 점점 강퍅해졌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 징계를 받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결국 영원한 멸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잠언 29:1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
하나님이 아나돗의 여선지자 드보라를 사사로 세우셨습니다.
드보라는 율법에 따라 재판을 하는 일까지 감당했습니다.
여자 선지자가 철 병거 900대를 가진 최강의 왕을 상대하기에는 약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하나님이 주시는 믿음의 도전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눈에 보이는 대로 판단하지 말고 믿음으로 바라보십시오.
드보라는 바락을 동역자로 초대하면서 그에게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바로 이스라엘 자손 10,000명을 거느리고 다볼산으로 가면 시스라의 군대를 그들의 손에 붙여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바락은 철 병거 앞에서 주저앉을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해서 담대하게 싸울 것인지 결정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 손을 내밀어 그 손을 잡으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에 바락은 드보라가 동행해 줄 것을 요구합니다.
한편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못하고 조건부로 받아들인 모습입니다.
드보라는 함께 갈 것을 약속하지만 이 전쟁에서 시스라를 물리치는 영광을 얻을 자는 다른 여인이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결국 그에게 준비된 영광이 다른 여인(야엘)에게 옮겨지고 맙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믿음과 순종으로 응답할 때 얻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능히 이루실 줄을 믿고 끝까지 붙드십시오.
이스라엘의 실패 원인은 죄에 대한 방심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징계를 받았음에도 마음이 둔하여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나 신실하신 하나님은 그들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여 구원을 허락하시고 믿음의 도전을 주셨습니다.
현실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십시오.
그러면 영광의 기회를 얻을 것입니다.
예레미야 33:2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
2021년 8월 9일(월)
생명의 삶 Q.T. 묵상 - [나의 연약함을 있는 그대로]
●성경본문 : 사사기 3장 12~31절
옷니엘이 사사로 있던 40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평안히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자 그들은 또다시 하나님의 은혜에서 떠나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모압의 압제를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고통스런 상황에서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에훗을 사사로 세우십니다.
에훗에게는 사사가 되기에 부적합한 치명적 약점이 있었습니다.
바로 왼손잡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표현은 히브리어 본문상, 오른손을 쓸 수 없는 장애를 가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처럼 큰 약점을 가진 사람을 사사로 세우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양손을 사용하여 무기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용사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왼손잡이 에훗을 선택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람의 능력이나 장점이 승리의 요인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이 전쟁을 이기게 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종종 우리는 우리가 가진 능력으로 승리했다는 착각으로 교만해질 수 있습ㄴ디ㅏ.
하나님은 에훗을 통해 이런 착각을 교정해 주셨습니다.
아름다운 찬송가를 많이 작사한 페니 크로스비는 태어난지 6주 만에 시력을 잃고 평생 맹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역사상 가장 많은 찬송가를 작사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그중에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예수께로 가면’과 같은 찬송가들이 있습니다.
그녀는 평생 세상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살면서 하나님을 향해서는 누구보다 눈을 크게 뜨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녀의 신체적 약점을 통해 당신의 놀라운 은혜를 사모하게 하시고, 그 은혜를 전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당신을 위한 영광의 도구로 사용하시도록 기도하십시오.
에훗은 칼을 오른쪽 허벅지에 숨기고 에글론을 찾아갔습니다.
왼손잡이인 에훗을 위험하게 보는 적군은 없었습니다.
그는 에글론 앞에서 오른쪽 허벅지에 있던 칼을 빼내어 왕을 찔렀습니다.
에글론은 몸집이 비둔했기에 칼을 피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죽었습니다.
만약 에훗이 장애를 가진 왼손잡이가 아니었다면 왕을 혼자 만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는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기에 그가 나라를 구하리라고 기대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약점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자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귀한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은 자기가 가진 약점 때문에 하나님께 쓰임 받기 어렵다고 단정 짓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약점 때문에 우리를 사용하십니다.
신체적 장애, 정신적 질병, 불우한 환경 때문에 스스로 제약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선택과 무한한 권능을 제한하는 불신앙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선택 기준은 우리가 이해할 수도, 설명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고 하나님의 권능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실 것입니다.
그 약점을 강점으로 바꾸셔서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역사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여러분의 연약함을 기꺼이 맡기십시오.
우리는 우리가 가진 부족함과 약점 때문에 위축되거나 낙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자신도 외면하고 싶은 연약한 부분들을 사용하셔서 당신의 놀라운 역사를 이루어 내십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온전히 드린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한 도구로 우리를 사용하실 것입니다.
오병이어로 5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를 남기신 그 능력의 손에 여러분을 맡기시기를 바랍니다.
주일기도문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심을 고백합니다.
공중의 새를 돌보심 같이, 들의 백합화를 향기롭게 하심 같이 우리의 생명을 지키시고 아름답게 하셨습니다.
주의 말씀이 우리가 가야할 길의 등불이 됨을 믿습니다.
어둠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헛되이 수고하지 않게 하시고 주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게 하옵소서.
밤 사경에 풍랑이 일어나는 바다 위를 잠시지만 오직 주의 말씀만 믿고 걸었던 베드로처럼 고난의 풍랑 속에 있는 저희에게 두려움보다 주를 믿는 큰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전 세계에 코로나 바이러스의 공포가 가득할수록, 경제가 파탄에 이르고, 타락으로 이끄는 죄악이 창궐할수록 온 교회는 일어나서 거룩한 선포와 외침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전하게 하옵소서.
세상 권세에 짓눌려 조용히 침묵하지 말게 하시고, 주의 손에 다림줄이 있는 것을 알게 하셔서 진실과 거짓,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하옵소서.
마지막 때에 짐승의 표를 받게 하려는 바벨론의 정치적 야욕을 구분할 수 있도록 영의 눈을 밝혀주시고, 마침내 승리함으로 생명의 면류관을 쓰는 신실한 성도들이 되게 하옵소서.
주의 성산에 올라 예배하는 성도들에게 은혜와 복을 내려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1년 8월 6일(금)
생명의 삶 Q.T. 묵상 - [죄는 저절로 소멸되지 않는다]
●성경본문 : 사사기 2장 1~10절
언약에 언제나 신실하신 하나님과 달리,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정착하면서 출애굽의 역사를 잊어버렸습니다.
광야 세대는 신앙 교육에 실패했고, 가나안 세대는 여호와 신앙에 무관심했습니다.
새로운 세대는 가나안 문화에 매료되었고, 하나님과 단절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보여 주는 책이 사사기입니다.
모든 문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데서 생깁니다.
그러므로 호세아 선지자가 말씀했던 것처럼 우리는 ‘여호와를 힘써 알아야’ 합니다(호6:3).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은 더 이상 전쟁을 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가나안 땅 주민들과 화평을 이루며 살 수 있으리라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눈앞에 보이는 이익을 버리는 일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울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믿음은 다음 세대에게 어떤 영향력도 줄 수 없었습니다.
다음 세대는 오히려 가나안 문화에 익숙했으며, 하나님을 경험하기보다는 가나안의 우상을 받아들였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부모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온전한 믿음을 가르치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세대는 우상 숭배라는 지독한 악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말이 아니라 뒷모습을 보고 배웁니다.
자녀들은 부모의 믿음이 참되고 진실한지를 누구보다 가장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함으로 말과 행동이 일치하도록 애써야 합니다.
부모를 통해서 참된 믿음을 배운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축복을 누릴 것입니다.
죄는 저절로 소멸되지 않습니다.
점점 더 중대하고 심각한 상태로 발전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세상과 타협하는 작고 사소한 죄들이 결국은 삶을 집어삼키는 커다란 죄로 발전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이 자녀들의 앞날에 장애가 됨을 기억하십시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있는 크고 작은 죄를 지적하십니다.
성령님의 음성에 민감해서 죄를 처리하기를 미루지 않고 지체 없이 버리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을 거룩하게 유지하는 참된 비결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허락하실 축복의 문을 여는, 자녀를 향한 진짜 사랑입니다.
2021년 8월 5일(목)
생명의 삶 Q.T. 묵상 - [사탄은 쉬지 않는다]
●성경본문 : 사사기 1장 22~36절
유다 자손은 분배받은 지경 내에 남은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는 데 비교적 성공했지만, 다른 지파들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요셉 가문도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경험하며 벧엘(루스)을 정복했지만, 한 사람과 그의 가족을 살려 줌으로써 가나안 문화가 재생될 가능성을 남겨두었습니다.
또한 나머지 지파들에 관한 기록에서는 ‘그들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못하였다’는 구절이 후렴구처럼 반복되고 있습니다.
왜 이스라엘 각 지파는 자신들이 분배받은 땅에 남아 있는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지 않고 강제 노역을 시켰을까요?
아마도 가나안 문화가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사람들을 쫓아내지 않고 그들에게 강제 노역을 시킴으로써, 그들의 문화도 배우고 풍요로운 삶도 누리려 했던 것입니다.
유목을 하던 민족이 정착민으로 살기 위해서는 농사를 지어야 했습니다.
실제로 그들이 가나안 땅에 입성했을 때,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던 만나와 메추라기가 모두 그쳤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의지하는 삶의 방식을 유지하며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던 것입니다.
이에 그들이 선택한 방법은 가나안의 방식을 취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고 그들의 신들을 섬기지 말라고 명령하셨지만, 그들은 이 명령을 무시했습니다.
신앙은 한 번 타협하게 되면 더 많은 양보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것을 하나둘씩 인정하고 받아들이면, 말씀에 위배된 삶을 일상적으로 살게 됩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잊어버리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거룩하지 못한 삶을 살게 됩니다.
더 무서운 것은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신은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큰 문제입니다.
이스라엘 지파들이 가나안 족속을 쫓아내는 싸움은 우리의 영적 싸움의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각 지파의 실패를 영적 싸움에 주의하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는 행동은 인간의 눈에 합리적으로 보일지라도 결국에는 자신을 영적으로 약화시키는 행동입니다.
사탄은 쉬지 않습니다.
경계를 늦추면 영적 싸움에서 밀리게 됩니다.
2021년 8월 4일(수)
생명의 삶 Q.T. 묵상 - [믿음은 선택입니다]
●성경본문 : 사사기 1장 11~21절
※ 성경본문을 읽고, 묵상 글을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인격과 능력을 신뢰하며 하나님을 믿기로 선택한 사람들입니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그 어떤 존재와 권세보다 하나님을 더 신뢰하고 의지하겠다는 결정입니다.
헤브론 지역은 이스라엘이 점령하기에 결코 쉽지 않은 지역이었습니다.
갈렙은 그 지역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지만 여호수아에게 그 땅을 달라고 요구했습니다(수 14:6~15).
그리고 마침내 갈렙은 헤브론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이후 유다 지파는 기럇 세벨을 점령합니다.
이곳 역시 점령하기에 쉽지 않은 지역이었습니다.
그래서 갈렙은 이곳을 쳐서 점령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딸 악사를 아내로 주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딸을 보상으로 주겠다는 약속이 좀처럼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갈렙은 자신의 가문을 믿음의 집안으로 세우기를 원했습니다.
자신이 한평생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용감히 싸웠던 것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사람을 사위로 삼기 원했습니다.
믿음은 한 세대에만 머무를 수 없습니다.
자녀의 신앙 교육을 책임져야 하는 부모들은 세속적이고 성공 지향적 사고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사는 믿음의 본을 보이며, 자녀들이 갈렙과 악사와 옷니엘같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하는 믿음을 갖도록 해야 합니다.
유다 지파는 시므온 지파와 함께 가나안의 남서부 지역을 점령했습니다.
스밧, 가사, 아스글론, 에그론 지역이 이에 해당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오직 스밧 지역에 대해서만 ‘진멸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의 모든 지역을 진멸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직 스밧 지역만을 진멸했고, 그곳을 ‘호르마’라고 불렀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하나님이 함께해 주심으로 모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호르마 즉 ‘진멸하다’ 라는 뜻의 이름을 붙여 마치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한 것으로 위안을 삼으려는 듯합니다.
하지만 골짜기의 주민들은 철 병거가 있다는 이유로 쫓아내지 못했습니다.
이는 자신들이 보기에 두렵고 무서운 무기 앞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신뢰했으며 순종했던 갈렙과는 너무나 대조적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은 반드시 순종이라는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철 병거 앞에서도, 강한 군대 앞에서도, 어떤 환경적 장애가 있어도 온전히 순종하는 믿음이 성도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성도는 실력과 능력으로 살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살 뿐입니다.
참된 성공은 하나님과 맺은 올바른 믿음의 관계 안에서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믿음의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세상의 권세에 휘둘려 욕망의 이끌린 불순종의 길을 갈 것인가,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2021년 8월 3일(화)
생명의 삶 Q.T. 묵상 - [불완전한 순종은 실패한다]
●성경본문 : 사사기 1장 1~10절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 리더십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완수해야 할 임무가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땅을 점령해서 약속의 성취를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그들은 철저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고 그분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요청합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이 아닌 유다 지파 전체를 지목하셨습니다.
그런데 유다 지파는 그들의 지경 안에 함께 거하는 시므온 지파를 끌어들여 함께 싸움에 나가자고 요청합니다.
사실 유다 지파와 시므온 지파는 혈통적으로 같은 어머니, 즉 레아의 후손이었기에 더욱 가까웠습니다.
그리고 서로 힘을 합치는 것이 유리해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유다를 단독으로 지명하셨기 때문에 이것은 불완전한 순종에 지나지 않습니다.
불완전한 순종은 반드시 실패합니다.
이스라엘은 사람이 다스리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들의 인도자는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유다 지파는 베섹에서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을 만 명이나 죽이는 승리를 얻습니다.
그들이 거둔 승리의 원천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신 은총이었습니다.
유다는 아도니 베섹을 사로잡아 그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잘라 불구로 만들었고, 그를 예루살렘까지 끌고 와서 죽였습니다.
적장의 수족을 잘라 수모를 주는 행위는 원래 가나안 사람들의 풍습입니다.
그들은 가나안의 풍습을 그대로 답습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적을 진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방인의 문화에 동화되었습니다.
온전히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는 길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유다 지파는 가까이에 위치한 예루살렘도 정복합니다.
그러나 이 정복 역시 불완전했습니다.
앞서 여부스 족속을 상대로 승리했지만, 그 때도 완전히 그 땅을 점령하지는 못했습니다.
훗날 다윗이 이 성을 다시 정복할 때까지 말입니다.
불완전한 정복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계속 산지와 남방과 평지에 거주하는 가나안 족속과 싸웠고, 기럇 아르바라 불렸던 헤브론에서 승리했습니다.
하나님은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의 손에 온전히 넘겨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온전히 순종하지 않으면 그 약속은 성취되지 않습니다.
유다 지파는 하나님의 지명을 받아, 온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먼저 전쟁을 치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들은 순종보다 승리에 치중했습니다.
전쟁에서 이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일이라는 진리를 간과했습니다.
결과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온전히 순종하는 태도입니다.
순종하지 않고 얻는 어떤 결과도 결코 우리에게 참된 만족을 줄 수 없습니다.
유다는 두 번 굽은 길로 가며 사사기의 불안한 출발을 보여줍니다.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워 산다고 하면서도 우리 역시 이런 굽은 길로 가고 있지는 않은지 살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승리가 아니라 순종입니다.
순종하면 어떤 위기에도 넉넉히 이기고, 한층 성숙한 믿음을 갖게 됩니다.
반석 위에 세운 집은 폭풍이 불어 닥쳐도 굳건하다는 사실은 명백합니다.
순종만이 참된 승리입니다.
2021년 8월 2일(월)
생명의 삶 Q.T. 묵상 - [그리스도인의 교제는]
●성경본문 : 빌레몬서 1장 15~25절
성도는 서로 용서하고 용납하며 거룩한 교제를 이어가야 합니다.
내 맘에 들고, 나와 뜻이 같은 사람에게라면 ‘용서’, ‘용납’ 이런 단어는 불필요하겠죠!
신앙 공동체 안에서 성도 간에 어떤 교제가 필요한지 배우게 하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의 종이었던 오네시모를 감옥에서 만났습니다.
오네시모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회심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기로 결정하면서 그를 종으로 대하지 말고 형제에 대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먼저 오네시모를 ‘사랑하는 형제’라고 호칭합니다.
그리고 빌레몬도 자신과 동일하게 오네시모를 받아 줄 것을 기대했습니다.
이것은 계급과 신분이 뚜렷하게 구별되었던 당시 사회 분위로서는 혁명적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의 경우를 통해,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가족 공동체라는 사실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모든 성도가 서로를 형제요 자매로 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울과 오네시모의 관계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성도들 간에 어떤 차별도 허용하지 않으십니다.
반면 세상에서는 피부색이나 성별, 학력, 출신 지역에 따라 서로를 차별하고 나누려는 경향을 보이곤 합니다.
그래서 이런 차별 때문에 절망한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습니다.
신앙 공동체는 차별 없는 평등한 교제, 형제애로 따뜻한 교제를 경험할 수 있도록 열려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낮은 신분 출신인 오네시모를 형제로 인정했듯이, 우리는 만나는 지체들을 세상의 편견이나 잣대로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성도 된 형제자매들을 차별 없이 사랑할 때, 우리 모두를 자녀 삼아 주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입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로 인해서 금전적으로 손해를 보았다면 자신이 변상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만큼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향한 용서와 관용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다양한 형태의 모임을 경험합니다.
동일한 취미나 관심 때문에 모이기도 하고, 같은 목표를 추구하는 단체에 가입하기도 합니다. 물론 선택의 여지가 없는 직장에서의 만남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서로에 대한 사랑과 관심으로 물질을 나누거나 서로의 아픔에 공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용납하고 참되게 용서하는 일은 오직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한 사람들만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런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 조차 오랫동안 용서하지 못하고 마음에 담아둔 지체는 없나요?
형제자매라고 말만 할 뿐, 일터나 취미를 위한 모임만도 못하지는 않았나요?
하나님의 용서로 말미암아 신앙생활의 새로운 가능성의 기회를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다른 성도들에 대해서 인색하고 엄격하고 무자비하지는 않았나요?
예수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흘리신 보혈을 묵상하며 용서의 마음을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지체들을 사랑으로 용서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서로를 차별 없이 대하며 잘못을 용서하는 교제입니다.
재력이나 학력, 살아온 환경이나 조건,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이견 때문에 차별과 구분에만 힘쓴다면 우리는 세상에 어떤 선한 영향력도 줄 수 없습니다.
세상과 구별된 참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의 교제를 위해 힘쓰십시오.
주님이 그러셨듯이, 용서하고 용납하십시오.
[2021년 8월 1일 주일기도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하고 강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소리 높여 경배하며 찬양 드립니다.
저희의 기도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열매를 맺게 하시는 줄로 믿습니다.
영혼의 구원을 위한 전도의 사명을 위해서, 가정과 일터에 주어진 사명을 위해서, 허락하신 달란트로 충성하는 일꾼이 되기 위해서 기도할 때마다 응답하시는 주님을 체험하게 하옵소서.
예배하는 시간마다 말씀의 계시로 충만하게 하시고, 깨닫는 지혜가 삶의 용기가 되게 하셔서 어두운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게 하옵소서.
더위와 코로나로 인해서 지쳐있는 우리의 영혼과 육체 위에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생수를 부어주시고, 경제와 질병과 관계 등의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서 고통 받는 지체들 위에 회복의 은총이 임하게 하옵소서.
대한민국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지금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믿음을 지켜내고 있는 북녘에 있는 믿음의 형제자매들을 기억해 주옵소서.
기근과 억압에 신음하는 북한 땅에 자유와 평화를 허락해 주옵소서.
하루 속히 복음 안에서 통일이 이루어지게 하시고, 통일 된 한국이 세계 복음화의 중심이 되게 하옵소서.
우리 기도에 응답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첫댓글 삼남연회 김종복감독님께서 찍으신 사진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