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물기행 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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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4.05.29. 02:00조회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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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에 희생된 진보적 문예운동가 임화(1908~1953)
“..순이야, 누이야!/ 근로하는 청년 용감한 사내의 연인아!/ 생각해 보아라. 오늘은 네 귀중한 청년인 용감한 사내가/ 젊은 날을 부지런히 일에 보내던 그 여윈 손가락으로/ 지금은 굳은 벽돌담에다 달력을 그리겠구나!/..../ / 자 좋다, 바로 종로 네거리가 예 아니야!/ 어서 너와 나는 번개처럼 두손을 잡고, / 내일을 위하여 저 골목으로 들어가자...”(임화의 ‘네거리의 순이’ 부분)
임화(1908~53)라는 이름 두자를 짓누르고 있는 것은 한국현대사의 무게이다. 시인으로서, 비평가로서, 문학운동가로서, 그리고 문학사가로서 임화에 필적하거나 그를 더 나아가 이 모든 장르와 분야를 임화보다 더 치열하고 성실하게 하나의 영육 속에서 용해시킨 개인을 문학 인명록에서 찾아내라 한다 해도 그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는 문학에서도, 운동에서도, 뒷날의 기록자들이 스쳐지나가서는 안될 탁월함을 보였지만, 그 탁월함은 당대의 어느 누구도 맞먹을 수 없는 제1인자로서의 탁월함은 아니었다. 그러나 문학가로서, 운동가로서 그가 살아낸 길지 않은 삶에 그의 비극적 죽음이 보태지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그 죽음으로 해서 임화는 당대의 역사와 문학, 집단과 개인, 의지와 운명이 서로 긴장하고 길항하고 분열하는 양태를 뜨겁게 상징하고 있다. 그 상징의 뜨거움에서 그는 명실공히 제1인자이다.
남북 모두 지워졌던 이름
50년대초 내전 직후부터 남쪽에서 제6공화국이 들어선 지 얼마 뒤까지 임화의 이름은 남북 양쪽의 문학사로부터 완전히 실종되었다. 남쪽의 친미반공정권이 보기에 그는 위험스럽기 짝이 없는 사회주의자였고, 북쪽의 사회주의정권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프롤레타리아와 민족을 배신하고 친일행각과 반공·반소 책동에 골몰한 미제의 스파이였다. 저널리즘이 냉전시기라고 불렀던 이 기간 동안 남북의 공식역사에 임화의 남로당 동료들과 임화가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먼저 빗장을 풀기 시작한 것은 어쨌거나 남쪽이다. 80년대 이래 괄목할 만하게 성장한 민족민주운동과 나란히 일제시기와 해방공간에서의 진보적 문학에 대한 연구가 남쪽의 학계에서 조금씩 쌓이게 되었고, 그것이 6공화국 정부의 잘 계산된 개방정책과 맞물려 임화의 이름은 다른 납·월북, 재북 문인들의 이름과 함께 공식 출판물에 등재되기 시작했다. 임화의시나 산문이 교과서에 실리는 일은 아직 요원하겠지만, 임화의 글들은 적어도 남쪽에서는 실제적으로 복권되었다.
오히려 일제시기와 해방 직후의 진보적 문예운동에 대한 남한의 진보적 문학계의 연구가 아직도 임화의 관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면서‘임화신화’의 해체론이 대두될 지경이다.
하이네에서 마르크스로
임화는 1908년 10월13일 서울 낙산 밑의 중류가정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임인식이고, 임화는 그가 27년 프로 시를 쓰기 시작하면서 사용하게 된 필명이다.‘임화’이외에 그는 성아·철부·김철우·임유·청로·쌍철대인·양남수 등의 필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동대문 근처의 사립 소학교에 다니다가 이 학교가 폐쇄되자 공립 보통학교 1학년에 편입학했는데, 임화는 뒷날 이 무렵을“아버지는 자상하시고, 어머니 슬하에 나는 행복된 소년이었다.”고 회상하고 있다.
그가 보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한 것은 21년이다. 그의 동기로는 이상·이헌구·이강국·유진산 등이 있었고, 고유섭·김환태·윤기정·김기림이 선후배였다.
그러나 그는 25년 보성고보 졸업을 코앞에 두고 이 학교를 중퇴함으로써, 자신의 공식적 교육을 끝마친다. 뒤이어 찾아온 가정의 파산과 어머니의 죽음은 임화에게 상당한 정신적 충격을 준다.
임화는 뒷날 보성고보 시절을‘어떤 청년의 참회’라는 글에서 회상하고 있는데, 그 회상에 따르면 그의 독서는 하이네의 시, 위고의 <레 미제라블>, 고리키, 톨스토이, 투르게네프, 세익스피어, 이광수의 <무정>, 베를렌 등으로 시작해, 가정이 어려워지고 학교를 중퇴하면서부터는 크로포트킨의 <청년에게 고함>, 슈티르너의 <유일자와 그 소유> 등 아나키스트와 청년헤겔파로 이어지고 <개조><중앙공론> 등의 일본잡지를 통해서 리카도, 마르크스, 엥겔스 등 진보적 사상가의 이름을 접하게 된다.
그는 어머니를 여읜 1926년 <매일신보>에 ‘무엇 찾니’‘서정소시’ 등의 시를 발표해 문단에 나오지만, 이 해가 그의 삶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그의 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카프) 가입 때문이다.
그는 카프 가입 전부터 이상화·윤기정 등 25년에 결성된 카프맹원들의 영향을 받으며 마르크스주의에 기울고 있었는데, 그해 12월에 윤기정의 추천으로 여러 예술장르를 망라한 이 진보적 문화단체에 가입한다.
임화는 카프 가입을 전후해 ‘무산계급을 주제로 한 세계적 작가’‘무산계급 문화의 장래와 문예작가의 행정’‘분화와 전개-목적의식문예론에 서론적 도입’등의 평론을 발표하며 자신의 좌익적 입장을 분명히 하는 한편,‘착각적 문예이론-김화산씨의 우론 검토’같은 글에서는 아나키즘에 대해서도 비판의 화살을 겨눈다.28년에 카프의 중앙위원이 된 그는 프로문학운동에 더욱 깊숙이 발을 들여놓으며, 연극·영화쪽으로도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는데, 그 결과로 김유영이 만든 프로영화 <유랑>에 출연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임화는 뒷날 자신의 대표작으로서만이 아니라 카프 시문학의 대표작으로 꼽힐 ‘네거리의 순이’‘우리오빠와 화로’‘우산쓴 요코하마의 부두’ 등, 김기진이 단형서사시라고 명명한 작품들을 잇달아 발표한다.
노동운동을 하던 젊은 애인을 감옥에 보낸‘근로하는 여자’순이를 부르며 운동에 대한 다짐을 보여주는‘네거리의 순이’, 인쇄노동자로 짐작되는 오빠가 감옥에 갇힌 뒤 제사공장 노동자로 짐작되는 여동생이 오빠에게 쓰는 편지 형식을 취한‘우리 오빠와 화로’, 추방명령을 받은 사내가 그의 일본인 여성동료인‘항구의 계집애’에게 하는 이야기 형식의‘우산 받은 요코하마의 부두’ 등 임화가 이 시기에 발표한 일련의 단형서사시들은, 뒷날 그 자신이 이 작품들에 대해 “네거리의 순이를 부르고 꽃구경을 다니며 동지를 생각했다. 이러한 프롤레타리아가 사실로 있을 수 있는가 라며‘소시민적 흥분’에 지나지 않았다고 자아비판했음에도 불구하고, 안용만·이용악 등의 매개를 통해 신경림·김지하 등 우리시대의 거대시인의 이야기시에까지 영향을 흘려보내고 있다.
단형서사시 영향 지대
그는 이 해 영화를 공부하기 위해 도쿄로 건너가 이북만이 주재하는 무산자사에서 활동하는 한편, 김남천·안막·이북만·김두용 등의 무산자사 동료들과 함께 카프의 옛간부들에 맞서 이 단체의 볼셰비키화를 주도한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북만의 누이동생 이귀례와 가까워져 동거에 들어갔고 31년에 귀국해서 정식으로 결혼해 이 해에 딸 혜란을 낳았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 윤기정의 후임으로 카프의 서기장이 된다.
그는 카프의 제2차 검거사건 이후인 35년 경기도 경찰부에 그 스스로 해산계를 낼 때까지 카프를 이끌며 볼셰비키 노선을 견지했다.
그러나 그가 김남천·김기진 등과 함께 해산계를 냈을 때 카프의 다른 중앙위원들은 전주형무소에서 복역중이었고, 비록 그가 투옥을 면한 것이 그의 지병인 폐결핵 때문이라 할지라도, 이러저러한 사정은 그로 대표되는 이른바 해소파와 비해소파 사이를 크게 갈라놓았다. 카프 해산을 전후해 그는 이귀례와 이혼하고 마산에서 요양중에 만난 이현욱과 재혼한다. 이현욱은 뒤에 지하연이란 이름으로 창작집 <도정>을 낸 소설가이기도 한다.
카프 해산 직후에 임화는‘조선신문학사론서설’이라는 글을 통해 자신의 문학의 방향전환을 시도한다. 그는 아직 사회적 토대가 성숙하지 않은 상태에서 프로문학을 주장한 것은 모험이었고 그래서 도식성이 발생했다며,‘경향문학과 경향문학 이전의 신문학을 지양해 시민문학으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안함광 등의 비해소파로부터 문학의 계급성을 희석시킨다는 비판을 받았다.
임화는 이후 도서출판 학예사를 주관하며 시와 비평을 통해 낭만주의·휴머니즘·사회주의리얼리즘을 넘나들지만, 극소수의 인사들만이 피할 수 있었던 일제말기의 친일을 그 역시 피할 수 없었다. 그는 사상전향자의 감시단체인 시국대응전조선사상보국연맹에 참가했고, 황국작가위문단의 실행위원이 되었으며 문인보국회에 가입했다. 그리고‘생산소설론’‘동경문단과 조선문학’등 친일본적으로 해석될 수 있는 글을 여럿 발표했다.
그의 친일활동이나 친일적인 글쓰기는 이광수를 비롯한 다른 여러 지식인들에 견주어 그 노골성이 훨씬 옅은 것이었지만, 넓은 의미의 프로문학에 자신의 전 생애를 걸었던 이 진보적 문학자에게는 지울 수 없는 오점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뒷날 그에게 비극적인 죽음을 선고할 북의 권력자들에게 하나의 좋은 구실을 마련해주었다.
임화는 그래도 이 시기에 첫 시집 <현해탄>(1938)과 평론집<비평의 논리>(1940)를 상재했다. 국문학사에서 지금까지도 임화의 상표가 되고 있는‘이식문학론’의 발원지는 <비평의논리>의 마지막 글인‘신문학사의방법’이다.
해방이 되었다. 해방 이튿날인 8월 16일 임화는 인민문학론을 내걸고 조선문학건설본부를 조직한다. 이 단체는 카프 비해소파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과 통합돼, 민주주의 민족문학론을 내건 조선문학가동맹으로 발전한다. 임화는 이 단체와 민주주의 민족전선에서 중심적인 활동을 하다 미군정청의 검거선풍을 피해 47년 월북했다.
남로당 대남공작 간여
월북 뒤 그는 잠시 해주에서 남로당의 대남공작에 간여하다 남·북로당의 합당 후 평양으로 거처를 옮겨 조소문화협회 부위원장으로 일했다.
50년의 내전시기에 그는 조선문화예술총동맹 부위원장 자격으로 낙동강전선까지 내려가 여러편의 전선시를 쓰기도 했다.
그리고 유엔군의 반격으로 한만국경까지 내쫓긴 어느 추운 겨울날, 남쪽 어디엔가 살아있을지도 모를 딸 혜란에게 애틋한 부정을 노래한다.
“이마를 가려/ 귀밑머리를 땋기/ 수집어 얼굴을 붉히던/너는 지금 이 / 바람찬 눈보라 속에 / 무엇을 생각하며/ 어느 곳에 있느냐// 머리가 절반 흰/ 아버지를 생각하며/ 바람부는 산정에 있느냐/ 가슴이 종이처럼 얇아/ 항상 마음아프던/ 엄마를 생각하여/해 저므는 들길에 섰느냐//...”(‘너 어느 곳에 있느냐’부분)
그러나 그는 52년말의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 직후 박헌영·이승엽 등과 함께 체포 구속됐고 이듬해 7월 30일‘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전복 음모와 반국가적 간첩테러 및 선전, 선동행위에 대한 사건’으로 기소됐다. 그의 죄상은 1)미제국주의를 위해 감행한 간첩행위 2)남반부 민주역량 파괴·약화 음모와 테러·학살행위 3)공화국정권 전복을 위한 무장폭동행위 등 세가지였다.
그가 이승엽 등과 함께 처형된 것은 이해 8월 6일, 그의 나이 45살 때였다.
기소장과 판결문에 적혀 있고 또 그가 시인한‘죄상’과 그의 실제행위 사이의 거리가 얼마나 되는지 판단하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불가능하다. 일본의 작가 마쓰모토세이초가 쓴 추리소설 <북의 시인 임화>는 임화가 비록 소극적인 방식으로라도 미국과 선이 닿았을 가능성을 상상하고 있다.
어쨌거나 임화의 죽음을 통해 우리가 언뜻 감지하고 그려볼 수 있는 것은 혁명의 열기 위에 세워진 정권 내부의 한 풍경, 윤리의 베일 속에 숨어 있는 그 복잡한 욕망과 권력의지의 풍경이다.
[출처] 임화|작성자 바람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