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하대학 홍정선교수와 중국류학생 그리고 조선족아이들과의 이야기
북경에서의 홍정선교수
홍정선교수(좌)가 본사 남영전사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고있다.
중국제자의 결혼잔치에 참가하고저 온 한국교수
지난 여름의 어느 하루, 한 외국인 학생과의 약속을 어길수 없다면서 모처럼 날자를 맞추어 장춘행을 한 한국교수 한분이 계신다. 3년전에 《너 결혼할 때 내 꼭 온다. 좋은건 못해주지만 텔레비죤 한대는 사주마》고 한 약속, 그 약속을 지키고저 국경너머 찾아온 분, 이분이 바로 한국 인하대학교 홍정선, 한국학연구소 소장이며 한국어문학전공 교수이다.
홍정선교수는 2002년 안식년(한국에서는 대학교 교수들이 6년을 근무하면 1년을 휴식하도록 되여있다) 1년을 유효하게 보내고저 한국학술진흥재단의 한국학강의 파견지원교수로 자원하여 길림대학 외국어학원 한국어학과에 와서 1년간 근무했다.
그때 가르치던 학급에 후우라는 만족학생이 있었다. 상과시간이면 제일 앞자리에 앉아 엎드려 자다보니 홍교수가 그를 보고 《후우학생, 기상시간입니다.》며 우스개도 곧잘. 홍교수가 이 학생을 자신의 중국어 교원으로 《모셨다》. 이통현의 한 농촌에 집을 둔 학생으로서 어렵게 공부하니 《뭔가 도와줄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주고저》였다. 그래서 점차 친해지고 가까워지고... 그 학생은 졸업후 현재는 길림대학 동영학원 직원으로 근무하고있다. 홍교수가 지원교수를 마치고 귀국한 후에도 늘 전화로 련락, 어떤 때는 《선생님, 보구싶어요!》 하면서 울기도 한다는 후우, 그가 결혼식을 올리게 된것이다.
당시 한학급의 우수한 한족학생 2명도 그의 알선으로 현재 한국 인하대학교에서 특별장학금을 받으면서 석사 박사 공부를 하고있는중, 《상당히 잘하고있다》는 홍교수의 평이다.
파견지원교수로 있는 기간 홍교수는 길림대학으로부터 《객원교수》로 임명받는 영예를 지니기도 했다. 《객원교수》영예는 인문사회학 분야에서는 그 혼자뿐으로서 한국인으로서도 그가 처음이기도 했다.
길림대학에서의 지원교수 생활을 돌이키면서 홍교수는 《원래는 문학쪽을 가르치려 했는데 한국문학을 리해하기 어려운 한글을 배우는 한족학생을 대상하다 보니 가르쳤다기보다는 학생들과 같이 <읽었다>고 하는 편이 더 적절하다》며 웃기도 한다.
《어진 선비》―조선족 석박사 20여명 양성
홍정선교수는 1953년 경상북도 예천군 출신으로서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현재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에서 석사, 박사까지 다 마치고 29세부터 대학교수를 시작해 지금까지 주욱 해오고있다.
산골서 태여나 어린시절을 보냈다는 홍교수, 《굶주리며 살았다고는 할수 없지만 배가 고파서 아카시아꽃 따먹으며 학교로 걸어다니던 기억도 있고 도시락을 제대로 못싸가지고 다니던 기억도 있다》면서 그런 시골 환경에서 자란 연유때문인지 중국에 오면 훨씬 마음이 편하고 따뜻하면서 중국학생들과도 웬지 《내 과거로 돌아가서 훨씬 가깝고 나와 경험을 공유하고있다》는 생각이 든다는것이다.
그래서 홍교수는 현재 인하대학교 대학원 국문과에 와 석박사 공부를 하고있는 20여명 외국인 학생(중국, 윁남, 몽골, 우크라이나, 일본 등 나라의 학생 포함, 이중의 80~90%가 조선족)들에게 엄격한 스승이면서 기댈수 있는 부형, 따스한 친지이기도 하다.
전통명절때면 큰 뻐스를 내서는 류학생들을 싣고 지방으로 다니며 한국의 전통문화를 체험시키고 봄이면 철쭉꽃 만발한 자연에로 학생들을 이끈다.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학생들을 불러다는 밤참도 같이 하고...그래서 카드 청구서가 엄청 많을 때도 있지만 모두가 《즐거운 기분으로 하는 일》로서 《걔들이 졸업하여 잘 되고 돌아가서 한국을 회억하고 생각하면 만족》이라는 소망뿐이다.
이렇게 중국의 조선족 학자들을 포함하여 주위 사람들로부터 《어진 선비》라고 불리는 홍교수, 제자들은 그를 《일단 인정이 되며는 사재를 다 털어서 도와주는 분》이라고 한다.
이렇게 1990년부터 중국에 50여차 다녀가면서 홍교수는 선후로 20여명 조선족 젊은이들을 한국학 석박사로 양성했는데 이들이 현재 북경, 남경, 장춘, 연길 등지에 있다며 자랑겨워 한다.
《중국을 너무 잘 아는 사람》―《신열하일기》 펴내
어려서 학교가기 전 할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우며 중국과 특수한 감정이 있었던 홍교수, 1992년에는 중국대륙을 본격적으로 체험할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한국 대륙연구소의 파견으로 당시 흑룡강성 삼강평원 개발을 추진하고저 중국려행을 시작한것이다. 당시만도 중국은 미개방지로서 《신비한 대륙》, 외국인 홀로의 려행이 허용되지 않았고 민영려행사도 미비, 그래서 별도로 중국정부에서 배치한 가이드와 동행했다는 그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코스로 려행계획을 세우고 압록강 단동에서 차를 출발하여 료양, 심양, 북신, 금주, 영원, 산해관, 당산, 북경에 이르고 다시 밀운에로 나와 고북구 장성을 거쳐 승덕까지 갔다. 이렇게 려로에서 보고 들은것을 글로 써 한국 《경향신문》에 한겨울동안 련재하고 후에 《신열하일기》책으로 펴냈다.
문학가로서의 홍교수는 이어 90년대 중기는 해당 문학작품들을 찾아 연변대학도서관, 연변주도서관 등을 전전하며 조선의 문학을 포함한 문학연구에 정진하기도 했다. 와중에 조선족 대학생들을 사귀고 그들을 한국 석사, 박사 공부에 주선해주는 등 좋은 일들을 수없이 하게 된것이다.
《말과 행동이 일치한 사람》
홍정선교수는 2002년 길림대학 외국어학원에 와서 파견지원교수로 있는 사이 본사에서 개최하는 조선족 학생 글짓기 응모 평심위원으로 초청받고 아이들 작품을 접촉할 기회가 있었다. 이때 아이들 글을 읽으면서 《그 글들에 담겨져있는 심정과 사연들이 너무 절실하게 느껴져서 내가 뭔가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는 그다. 그도 그럴것이 당시 아이들 글에는 부모들을 한국에 보내고 겪는 때이른 설음과 애탄이 그토록 가슴맞히게 서술되여 있었던것이다. 홍교수는 《한국에 가서 부모들이 바르지 못한데 물들면 오히려 돈은 벌어왔을지라도 생활자체가 더 어려워지고 가족관계가 더 힘들어지고, 이런 모습들이 글속에 나타나있었다.》면서 《어떤 속죄하는 심정》으로 그런 아이들을 도와주고싶었다는것이다.
그래서 백일장이든 응모든 아이들이 글을 써서 힘들었던 마음을 털어놓을수 있는 기회를 주고싶었고 쓴 글에 상이라든가 등으로 조금이라도 보상을 주고싶었으며 애들이 옳바르게 성장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을 주고싶었다는것. 하여 주동적으로 본사의 응모활동을 도울 생각을 터놓았고 한국 인천문화재단(대표리사 최원식)과 연줄을 달아 만딸라를 《길림신문》 인성교육 인천컵 응모 자금으로 락착해주었던것이다.
홍교수는 또 우리 학생들의 글이 《자기 자신의 심정들을 다른 방식으로 위장하거나 변형시키거나 하지 않기에 훨씬 더 솔직하고 가깝게 느껴진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문학평론가의 한사람》
홍정선교수는 또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문학평론가의 한사람이다. 한국에는 《창작과 비평사》, 《문학과 지성사》라고 하는, 한국문학계를 이끄는 대표적인 두 출판사가 있다. 이 한국 2대 출판사의 하나인 《문학과 지성사》의 주간으로 소설과 시를 집필하고있는 홍정선교수이다.
그의 인문학리론 주장은 아주 분명하다.
《문학이란 인문학의 한 분야로서 문학, 력사, 철학 이 세가지가 인문학을 이루는 주축》이라는것, 따라서 인문학이란 인간의 근본적인 성품, 다른 말로 하면 인성에 대한것들이기에 《길림신문》의 인성교육은 일종의 인문학적인것으로 볼수 있다는 그의 견해이다.
그는 이런 인문학적이라는것은 어떤 절대적인 기준 이를테면 《나만이 옳다》는 등 생각들로부터 탈피하게 만들어주는것이라고 한다. 즉 《문학교수로서 한편의 시를 감상하는 방법을 학생들에게 가르친다고 할 때 나는 이 작품을 이렇게 읽었지만 다른 사람은 다르게 읽었고 내가 읽은것과 다른 사람이 읽은것들이 듣는 사람들한테 합리적으로 설명될수 있는것이라면 내가 읽은것과 다른 사람이 읽은것들이 마찬가지로 옳은것도 존재할수 있다는것을 리해하는, 그렇게 살아가는 자세들을 가르치는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단순하게 법률적인것이 아니라 감정적이고 정서적인 리해, 자세, 모든것들이 인문학에 포함되여있는것이기에 인문학은 살벌한 세상과 따뜻하고 행복한 세상에 대한 바탕이고 근본적인 정신이다.》
《다른 사람과 내가 함께 어울려서 살아갈수 있는 이 세상에 대한 인간들의 정신과 자세 이런것들이 인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루적되고 정화된 사상과 리론이 터진 물고처럼, 얼음우에 표주박 밀듯 너무 자연스레 거침없이 쏟아져나온다.
문학가로서 인문학가로서의 홍교수는 바로 이렇게 주장해오고 실천해온것이다.
중국류학생 한족 급증 뛰여난 학생 많아
현재 한국에서 공부하고있는 중국류학생들을 두고 홍교수는 초기에는 조선족이 압도적이였는데 현재는 한족이 빠른 속도로 늘어나고있다고 소개한다. 류학생 래원지 역시 초기에는 연변대학출신 학생들이 많던데로부터 현재는 길림대학, 대외경제무역대학, 산동대학 등으로 다양해졌다는것.
《학습하면서 성취해나가는 정도를 보면 한족학생들중 확실히 빠른 학생들이》 많은바 《조선족 학생들보다 훨씬 뛰여난 학생들이 갈수록 많아지고있다》는것이 그의 곁들임.
이에 《어쩐지 걱정》이기도 하지만 또 《좋은 일일수도 있다》면서 중국에서 근 60개 소에 달하는 한국어 관련학과들을 조선족 출신의 교원들로만 채운다는것은 한계가 있고 또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그는 생각하고있었다.
때문에 한족학생들이 한국을 제대로 리해하고 좋은 감정을 갖고 사랑하도록 목표를 잡고 추진해나가야 하는것이 교수로서의 그네들의 자세라고 말하기도 한다.
《BK21》프로젝트―한국학 우수연구인력 양성
홍정선교수는 지난해 《BK21》이라는 프로젝트를 신청하여 올 4월에 확정받고 이를 추진, 지난 여름 중국 여러 지역에서 상황설명을 하는 등 과정을 거치고 11월 22일-25일에는 북경에서 《인하대학교 BK21 동아세아 한국학 교육촵연구 및 네트워크 사업단 제1차국제학술회의》를 성공적으로 치렀다. 중국, 일본, 윁남, 몽골의 한국학과 교수, 학자들이 참가한 가운데 《동아세아 한국학의 현황과 과제》, 《동아세아 한국학의 방법과 실천》 등 테마로 워크숍이 진지했다.
《BK21》이란 《두뇌코리아》, 우수한 연구인력을 양성한다는 뜻으로서 사업목적자체가 대학원에 다니는 외국학생 지원이다. 《동아세아 한국학 교육연구 및 네트워크 사업단》이라는 명칭으로 중국을 중심으로 한국학을 하고있는 동아세아 나라 학교들을 대상으로 당지 학교들과 네트워크를 구성하고 학생들을 받아서 공부시키고 당지에 필요한 인력들을 다시 보내주고 대학원생들을 서로 교환하고 교원들을 초빙하고 하는 사업들을 한다.
한국정부는 이 프로젝트에 년간 7억 5000만원(한화) 정도를 내놓는다. 따라서 《자국에서 지원을 받는 학생으로 선발이 되며는 석사과정은 한달에 한화로 50만원, 박사과정은 90만원으로 지원받을수 있다. 다른 아르바이트랑은 하지 말고 공부에만 전력할수 있는 조건으로 주는것으로서 나이 제한은 없고 민족도 가리지 않는다》고 홍교수는 소개한다. 따라서 《지금 인하대학에로 대학원 류학을 오는 외국학생들은 그전 학생들보다 환경이 훨씬 더 좋아질것》이라며 홍교수는 즐거이 말한다.
《BK21》프로젝트는 7년동안 하게 되는데 총 50억원 한화 정도의 자금을 투입하게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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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로 심심하고 답답할 땐 바둑을 둔다》는 홍교수, 제자들의 말대로라면 수준급의 바둑선수로서 홍교수가 지는 게임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
가정에서는 자랑겨운 부친이고 만족하는 남편으로서 《마누라는 서울대학에서 만나 결혼》했다며 역시 한국어 전공을 한, 일심으로 남편과 아이만을 위해 바쳐온 전형적인 현처량모. 외동아들은 서울대학에서 중국문학을 공부, 과외도 안하고 인천에서 집근처의 학교에 다니다가 아무 어려움 없이 직접 서울대학에 진학했다며 중국어보다는 영어를 더 잘한다고 마지 못해 짜내듯 《자랑》을 내비친다.
본사기자 김정함: jinth@jlcxwb.com.c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