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雞林歷史紀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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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역사기행 후기방 논산 반야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
浮雲 추천 0 조회 17 26.06.21 03:12 댓글 23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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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26.06.21 14:53

    첫댓글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국보)은 고려 초기를 대표하는 거대 석불로, 통일신라 불상의 완벽한 비례미에서 벗어나 고려 시대 특유의 독창적이고 파격적인 미감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성보이다.

  • 작성자 26.06.21 14:56

    전체 높이가 약 18m에 달하는 국내 최대 규모의 석조 불상으로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오는 거대한 크기로 민중을 압도하는 시각적 효과를 낸다.
    이상적인 신체 비례(8등신 등) 대신, 머리가 전체 몸길이의 3분의 1에 육박할 만큼 비정상적으로 크게 표현되었다. 가슴과 어깨 역시 넓고 평면적이어서 인체의 사실적 묘사보다는 거대한 돌기둥을 마주한 듯한 강렬한 토속성을 풍긴다.

  • 작성자 26.06.21 14:57

    길게 찢어진 눈, 두툼한 입술, 넓적한 코와 턱 등 토속적인 얼굴 형상을 하고 있다. 통일신라 불상의 온화하고 자비로운 미소와 달리, 다소 근엄하면서도 친근한 민중의 얼굴을 닮아 있다.
    눈썹 사이 이마에는 큼직한 백호가 또렷하게 박혀 있어 강한 영성(靈性)을 뿜어낸다.

  • 작성자 26.06.21 14:58

    머리 위에는 높다란 원통형의 보관을 쓰고 있으며, 그 위로 이중의 네모난 보개(덮개돌)를 얹었다.
    아래위 보개의 부드러운 곡선 모서리에는 청동으로 만든 풍경(바람방울)이 매달려 있어, 거대한 석조 구조물에 율동감과 장식적인 화려함을 더해준다.

  • 작성자 26.06.21 14:59

    몸 전체를 감싸는 천의(옷주름)는 깊고 사실적인 입체감 대신, 평면적인 선각(선으로 파낸 형태) 위주로 간결하게 처리되었다. 거대한 돌의 질감을 그대로 살리면서 조각적 장식을 최소화한 흔적이다.
    오른손은 가슴께로 올리고 왼손은 배 부분에서 연꽃 줄기를 쥐고 있는 수인(손 모양)을 취하고 있으나, 신체 크기에 비해 손이 가냘프고 도식화되어 있다.

  • 작성자 26.06.21 15:01

    이러한 파격적인 조형미는 고려 광종기(10세기 후반) 왕실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혜명 대사가 주도하여 조성한 것이다. 완벽한 중앙 귀족풍의 미감에서 벗어나, 고유의 지방 색채와 민중의 역동적인 에너지가 결합한 ‘고려적 대형 지방 불상’의 시초가 되었다.

  • 작성자 26.06.21 15:02

    18m에 달하는 거대한 돌부처, 논산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진미륵)을 어떻게 그 옛날에 기술적으로 세웠는지를 설명해 주는 아주 유명한 ‘모래 언덕(사제촌 동자) 설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거대한 바위를 깎아 만들기는 했으나 도저히 세울 방법을 찾지 못해 고민하던 혜명 대사가 아이들의 지혜를 빌려 문제를 해결했다는 이야기이다.

  • 작성자 26.06.21 15:03

    고려 광종 때, 한 여인이 반야산에서 고사리를 꺾고 있는데 어디선가 아기 울음소리가 들려 찾아갔다. 그곳에는 아기는 없고 커다란 바위가 땅 속에서 솟아오르고 있었다. 이 신비로운 소식을 들은 조정에서는 혜명 대사에게 명하여 100여 명의 장인과 함께 그 바위로 미륵불을 조성하게 했다.

  • 작성자 26.06.21 15:03

    혜명 대사는 바위를 크게 세 부분(다리허리, 허리가슴, 얼굴과 머리)으로 나누어 정교하게 조각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각각의 돌이 너무나 거대하고 무거워서, 이미 세워둔 아랫부분 위로 중간 몸통과 무거운 머리 돌을 들어 올려 연결할 방법이 없어 며칠 밤낮을 고민에 빠졌다.

  • 작성자 26.06.21 15:05

    어느 날, 혜명 대사는 관촉사 아래에 있는 사제촌(沙堤村)이라는 마을을 지나다가 아이(또는 동자승)들이 개울가 모래밭에서 놀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게 되었다.
    아이들은 모래로 삼층짜리 불상 세우기 놀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먼저 아랫단 돌을 세운 뒤, 그 주변에 모래를 두껍게 쌓아 완만한 언덕(경사로)을 만들었다.

  • 작성자 26.06.21 15:05

    그러고는 비탈진 모래 언덕 위로 다음 단의 돌을 데굴데굴 굴려서 아랫단 위에 정확히 얹었다. 그 다음엔 모래를 더 높이 쌓아 마지막 머리 돌을 올렸다.
    세 단이 모두 조립되자 아이들은 불상 주변의 모래를 싹 쓸어내어 멋진 불상을 완성해 냈다.

  • 작성자 26.06.21 15:06

    이 모습을 본 혜명 대사는 무릎을 탁 치며 "바로 저 방법이구나!" 하고 깨달음을 얻었다.
    ​절로 돌아온 대사는 석불 주변에 엄청난 양의 흙과 모래를 쌓아 완만한 비탈길을 만들었다. 그리고 장정들을 동원하여 통나무를 굴림대로 삼아 거대한 몸통 돌과 머리 돌을 차례로 밀어 올려 조립했다. 조립이 끝난 뒤 쌓아두었던 모래와 흙을 모두 치워내니, 오늘날 우리가 보는 18m의 웅장한 관촉사 미륵불이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 작성자 26.06.21 15:08

    이 전설은 단순한 동화가 아니라, 당시 거대 석조 구조물을 건립할 때 실제로 사용했던 ‘토경(土傾) 공법’(흙으로 경사로를 만들어 무거운 돌을 옮기는 방식)을 민담의 형태로 생생하게 기록해 둔 것이다. 마을 이름인 사제촌(沙堤村) 역시 '모래로 둑을 쌓은 마을'이라는 뜻을 담고 있어 이 설화와 깊은 연관성을 보여준다.

  • 작성자 26.06.21 15:58

    ​放光明 照耀世界, 時 中國名僧智明, 遙見瑞光 尋來禮拜, 曰 猶如觀燭, 因名 觀燭寺.
    (미륵불이 완공되자 미간에서) 광명을 발하여 온 세계를 조요(照耀, 밝게 비춤)하니, 당시 중국의 명승인 지명(智明) 대사가 멀리서 이 상서로운 빛을 보고 찾아와 예배하며 말하기를 "마치 촛불을 보는 것(觀燭)과 같다"라고 하였으므로, 이로 인해 이름을 '관촉사'라 하였다.

    〈관촉사사적비명(灌燭寺事蹟碑銘)(조선 영조 19년(1743년))

  • 작성자 26.06.21 16:02

    ​灌燭寺 在般若山. 有石彌勒 高五十四尺.
    諺傳, 高麗光宗時, 般若山麓, 有大石湧出, 僧慧明 鑿而成佛.
    관촉사는 반야산에 있다. 높이가 54척이나 되는 돌미륵이 있다.
    세간에 전하기를, 고려 광종 때에 반야산 기슭에서 큰 돌이 솟아오르니, 승려 혜명(慧明)이 쪼아서 불상을 완성하였다고 한다.

    《新增東國輿地勝覽》 恩津縣 佛宇條

  • 작성자 26.06.21 16:06

    ​馬邑之東百餘里, 市津縣中灌足寺.
    有大石像彌勒尊, 謂我箂兮土중出. (箂=來)
    雪膚獨立臨大野, 農夫割稻能布施.
    石像時能汗流漓, 驚動君臣豈口傳, 載在國史無可疑.
    마읍(馬邑) 동쪽 백여 리, 시진 고을 관촉사라네.
    거대한 석상 미륵존불은 "내가 온다" 하며 땅속에서 솟아났다네.
    눈같이 흰 살결로 우뚝 서서 큰 들판을 굽어보니, 농부들이 벼를 베어 기꺼이 보시하네.
    석상이 때때로 땀을 흘려 임금과 신하들을 놀라게 했다 하니, 어찌 입으로만 전해오는 말이겠는가. 나라의 역사(국사)에 실려 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도다.

    《新增東國輿地勝》목은 李穡의 詩

  • 작성자 26.06.21 16:09

    국가의 공식 지리지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덤덤하게 "돌이 솟아나 불상을 만들었다"고 적혀 있지만,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 불상이 땀을 흘려 조정(군신)을 놀라게 했다는 기록이 역사서에 실려있음을 이색의 시를 통해 증명하고 있다. 백성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꽃비와 상서로운 빛의 이야기는 훗날 사적비에 더해지며 은진미륵의 영험함을 천년 동안 증명해 온 귀중한 텍스트들이다.

  • 작성자 26.06.21 16:13

    관촉사 미륵불(1006년 완공) 이후에 도미노처럼 등장한 충청 지역의 거구의 불상들, 예를 들어 부여 대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나 홍성 상하리 미륵불(상하리 마애여래입상) 같은 불상들이 과연 순수하게 지방 민중들만의 솜씨일까?

    이 불상들은 '아무 기술 없는 시골 석공들이 투박하게 만든 순수 지방 작'이라기보다는, 관촉사를 만들었던 중앙 장인들의 기술과 화풍이 충청 지역에 정착하면서 현지화된 결과물(학습된 지방 석공들의 작품)로 보아야 한다.

  • 작성자 26.06.21 16:15

    ​관촉사 미륵불을 만드는 데 자그마치 37년이 걸렸다. 한 세대가 넘는 긴 시간이다.
    ​이 기간 동안 중앙에서 내려온 일류 석공들은 충청도 지역에 살면서 현지 석공들을 가르치고 함께 작업했을 것이다.
    ​공사가 끝난 후, 중앙의 기술을 전수받은 현지 석공들과 일부 그 지역에 정착한 장인들이 팀을 이루어 인근 지역(부여, 홍성 등)의 거불 조성사업에 투입되었고, 충청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 작성자 26.06.21 16:16

    관촉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부여 대조사의 미륵불을 보면, 관촉사 불상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거대한 스케일, 머리가 큰 비례, 위아래 이중으로 얹은 네모난 모자(보개)와 그 모서리에 달린 청동 풍경까지 관촉사의 조형식을 그대로 판에 박은 듯 따라 했다.

  • 작성자 26.06.21 16:17

    ​다만 관촉사보다 크기가 조금 작아지고(약 10m), 표현이 다소 간략해졌다. 이는 관촉사를 만들었던 장인 집단이나 그들에게 직접 배운 일류 제자들이 부여 호족의 요청을 받아 만들었음을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이다. 완전한 '아마추어 지방민'의 솜씨라면 이렇게 정교한 중앙 스타일의 보개 장식과 형식을 똑같이 재현해 내기 어렵다.

  • 작성자 26.06.21 16:19

    반면, 시간이 더 흐른 뒤 용봉산 자락에 새겨진 홍성 상하리 마애여래입상으로 가면 결이 조금 달라진다.
    ​여기서는 관촉사나 대조사처럼 돌을 3단으로 짜 맞추는 복잡한 건축적 기술 대신, 자연 암벽을 그대로 깎는 마애 기법을 썼다.
    ​얼굴은 여전히 대두(大頭) 스타일이지만, 몸체의 옷주름이나 신체 표현이 훨씬 평면적이고 도식적으로 변했다.

    이는 관촉사 스타일이 충청도 깊숙한 지방으로 전파되면서, 세련된 중앙의 기술적 디테일은 점차 생략되고 지역 석공들의 투박하고 소박한 감각(민중 정서)이 훨씬 더 짙게 반영되었음을 뜻한다.

  • 작성자 26.06.21 16:21

    후대의 충청도 거불들은 기술 없는 시골 사람들이 무턱대고 만든 것이 아니다. 중앙의 일류 기술(관촉사)을 성공적으로 이식받은 지역 장인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었다.
    ​다만, 시간이 흐를수록 중앙 왕실의 깐깐한 간섭이 줄어들고 지방 호족과 민중들의 요구가 더 강하게 반영되면서, 형태는 점점 더 단순해지고 정서는 더욱 토속적으로 변해간 ‘성공적인 현지화 과정의 산물’인 것이다. 호족들의 마음을 표현하는 법을 배운 장인들이, 이제는 완전히 지방의 대변인이 되어 작품을 남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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