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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서울은 만원이다.
왜 우리는 서울로만 향하는가. 이 말은 '우리의 인생행로는 어디로 향하는가?' 라는 말과도 부합된다. "사람은 태어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 새끼는 제주도로 보낸다"라는 말이 있듯이 말이다. 이젠 바뀌어 '말은 서울에 최순실에게로, 사람은 살기 좋은 제주로' 보낸다고 우기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조선 시대 이래 여전히 서울은 서울이다.
1908년-1910년 사이에 조선을 방문한 미국인들 중에 쌘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 기자로 일-로 전쟁을 취재차 조선 평양까지 방문했었던 잭크런던은 조선과 조선인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았었다. '조선인들은 야만인이고 음식도 생선 말린 것 외에는 먹을 게 없다' 고종황제의 외교고문이었던 스티븐스도 '조선인들은 글을 모르고 미개하여 자주정권을 가질 수 없다'라는 부정적인 시각이 었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스티븐스가 글도 모로는 무식한 층으로 우리를 일갈한 것은 정녕 우리를 모르는 잘못된 판단이라 생각한다. 조선 시대 이래 우리처럼 글에 매진한 사람들은 이 지구상에 없다.
하지만 같은 시기에 조선을 방문한 선교사들이나 W. Chapin 같은 분들은 객관적인 입장에서 보고 긍정적인 시각으로 해석했었다. 그는 조선의 지형과 기후를 자세히 설명했고 1910년 당시 조선 인구가 1천2 백 명이라고 적었다. 쌀농사가 주종을 이루고 있으나 목화 생산이 세계 6위라고도 소개를 했다. 각가지 과일도 많이 생산되고 그보다는 지하자원이 풍부한 나라인데 그중에 석탄생산이 두드러진다고 적었다. 그들은 내면을 도외시한 채 문물의 가치로서 보고 판단한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나는 그들의 촌평을 보고 의식의 잠재력이야 말로 정말 소중한 자산이라는 생각을 한다. 아니 그런가. 불과 100년 만에 분명 우리는 천지개벽한 사람들이다. 다들 놀라지만 실은 그 잠재력이 말을 해준다 싶다. 아무튼 1934년 일제 식민지 당시 수도 서울은 인구가 얼마나 될까. 서울역사박물관은 1934년 서울의 최하위 행정단위인 '정'과 '동'의 직업별, 민족별 인구 통계를 보여주는 '각정동 직업별 호구조서'를 소장 유물자료집으로 발간했는데 그 자료집에는 1934년 당시 서울 인구를 39만 4천여 명 으로 적고 있다.
그런데 놀랄 만한 사실이 있다. 그 중 주민의 28%는 일본인이었다. 그런 그들은 주로 남촌, 즉 을지로를 주변으로 남쪽에 많이 살았다. 조선인은 27만 9천여 명, 일본인은 10만 9천여 명으로 28%, 중국인 등 나머지 외국인도 5천여 명으로 1.5%를 차지해, 조선인 외 인구가 3분의 1에 육박했었다. 직업별로는 조선인의 경우 31%가 상업과 교통업에 종사했고, 무직자와 직업을 신고하지 않은 사람 등 기타 유업자가 22.8%, 공업 12.9% 순이었다.
다른 자료를 보면 1944년 도시인구는 1위 서울 98만 9천명, 2위 평양 34만 2천명, 3위 부산 32만 9천명, 4위 인천 21만 4천명, 5위 대구 20만 7천명, 6위 청진 18만 4천명, 7위 신의주 11만 8천명, 8위 원산 11만 3천명, 9위 함흥 11만 2천명, 10위 광주 8만 2천명, 11위 해주 8만 2천명, 12위 남포 8만 2천명, 13위 대전 7만 7천명, 14위 개성 7만 6천명, 15위 목포 6만 9천명, 16위 성진 6만 8천명, 17위 전주 6만 7천명 순으로 나와 있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의 한국 수출항 전초기지인 항만도시의 인구증가가 두드러졌고 후반으로 갈수록 대륙침략정책에 유리한 한반도 북부지역에 공업을 집중 발전시켜서 북부도시의 인구증가가 두드러졌다는 것이 표를 보면 대번 알수가 있다.
그런데 표는 해방직전 1944년 도시인구 규모 순이 지금과 거의 동일하게 유지되어 온 것을 볼 수 있으며 당시 도시인구의 10배정도하면 대충 지금의 도시인구가 된다는 것이 참으로 묘하다싶다. 그중 일제 전후로 해서 광주와 대전은 발전이 두드러졌으며 개성과 목포 청진은 오히려 상대적으로 퇴보하였음을 또 보여주고도 있다. 그런 서울 인구수는 6 25전쟁이 발발한지 5년 후인 1955년( 인구 국세조사 결과) 150만 명을 넘어서더니 그 후부터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되더니만 1988년 올림픽 개최시기 쯤 인구 1천만 명을 드디어 돌파했다. ( 1960년 2백4십만/1970년 5백4십만/1980년 8백4십만)
서울 일극주의라고 할까. 서울은 지난 42년간에 실로 850만 명이 넘는 거대한 인구집중이 이루어진 셈이다. 이것은 동서고금을 통한 도시화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놀라운 기록이다. 이렇게 42년간에 서울인구가 850만 명이 증가했다 할지라도 1950년대 후반기로부터 이어오는 각 연대별 집중된 요인은 각각 약간씩의 차이가 있었다. 1950년대 후반기의 인구집중은 아래와 같은 요인들을 들 수가 있다. 한국동란은 많은 시골사람들이 피난을 가고 피난민을 맞이한 과정에서 자기 고장을 떠나서도 살 수 있다는 체험, 도시에 가면 보다 잘 살수도 있다는 체험을 한 것이 무엇보다도 컸다. 이에는 자영농이 한정되었던 것과도 연관이 있다. 우리는 도련님과 머슴이 혼돈되는 사회의 모순을 한꺼번에 겪었다.
그리고 전쟁 당시 압록강 변까지 전진했던 국군이 후퇴할 때 함께 월남한 150~200만명의 북한동포들 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서울에 정착을 했으며 군대생활을 통하여 도시생활을 체험한 젊은이들이 제대 후에 서울로 몰려들었으며 광복 후에 크게 늘어난 고등학교·대학교 졸업생들이 지연(地緣)과 혈연(血緣) 또는 막연한 가능성을 찾아 서울로 향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울로 몰려온 젊은이들에게 경제개발이 제대로 되지 않아 충분한 취업의 기회를 제공해 주지 못한 당시의 서울은 적지 않게 혼란한 사회상을 노정하고 있었다. 「고용기회를 상회하는 인구의 도시집중」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아시아·아프리카의 저개발·개발도상국 공통의 현상이었으나 1950년대 후반기에서 1960년대 초에 걸친 서울의 인구집중현상은 바로 이 당시 아시아·아프리카지역 대도시 인구집중의 대표적인 예로 꼽히고 있었다.
1960년대는 「개발의 연대」 「급격한 도시화의 연대」였다. 1962년에 시작한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1967년부터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으로 이어진다. 1960년에서 1964년까지 매년 5.5%씩을 기록한 GNP성장률은 1965년부터 1969년까지의 5개년간은 연평균 11.7%를 기록하고 특히 제조업분야에서의 성장률은 전반기의 연평균 9.4%에서 후반기에는 22.6%라는 놀라운 신장률을 기록하였다. 산업구조를 살펴보면 1차 산업 2차 산업 3차 산업으로 구분하여 1959년과 1969년을 대비하면 1959년에 각각 42.3:14.1:43.6이던 것이 1969년에는 28.4:25.9:45.7로 변하여 1차 산업의 급격한 비율 저하만큼 2차 산업이 신장하였다. 1959년에 2천 만 달러에도 못 미쳤던 수출고가 1969년에는 7억 달러를 넘어섰다. 이와 같은 경제성장은 세계 모든 사람들에게 놀라운 사실로 비추어졌고 그들은 이를 불러 「한강변의 기적」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기적의 중심에 수도 서울이 존재한 것이다.
공업화가 인구의 도시집중을 유발하는가, 인구의 도시집중이 경제성장-공업화를 유발하는가라는 과제는 흡사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를 따지는 것과 같은 이야기가 되겠지만, 도시에 누적된 인구가 거대한 소비력의 집단을 이룩함으로써 1960년대의 공업화에 커다란 촉진효과가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고, 또 이와 같은 급격한 공업화가 더욱 더 인구의 집중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1960년 인구센서스 당시 전국 도시(市와 邑) 인구 총수는 약 926만 명이었고 그것은 전국 인구의 37%에 불과하였다. 그런데 1970년 인구센서스 결과 도시인구 총수는 1,578 만 명에 달하여 전국 인구(3,088만명)의 51%가 되어 마침내 도시인구율 50%의 선을 넘는다.
개발도상국의 도시화 과정이 모두 그러하듯이 한국의 도시인구 집중도 주로 대도시에서 일어났으며 한국의 경우 이와 같은 현상은 1960년대에 가장 현저하게 나타났다.이 기간 서울에 이렇게 급격한 인구증가가 있었으니 종전의 시설규모, 도시규모로서는 도저히 새로운 수요를 흡수·수용할 수는 없었다. 새로운 택지의 조성과 도로의 신설·확장 등 특히 1960년대 후반기에 두드러져 수백만평에 달하는 구획정리사업이 전개되는 한편으로 불광동 방면· 수유리 방면의 도로가 종전의 8m에서 35m로 확장되었고 3 1고가도로가 건설되었으며 남산 1호터널도 뚫리기 시작하였다.
이상과 같은 공공개발사업은 동시에 민간의 개발붐도 불러일으켜 1966년 당시만 하더라도 서울에는 6~9층 건물이 110개 정도, 10층 이상 건물은 불과 18개 밖에 되지 않았는데, 1970년에는 6~9층 건물이 487개로, 10층 이상 건물이 122개로 늘어났다. 지상 31층의 삼일빌딩, 25층의 도큐호텔이 착공된 것이 모두 1960년대 말이었으니 이때부터 건물 고층화시대가 개막된 것이다. 이처럼 도시가 고층화되어 가는 한편으로 1950년대, 1960년대로 이어온 인구의 과잉집중은 심각한 주택부족현상을 초래하였다. 서울에는 1966년에 이미 무허가건물이 13만동 이상 기록되었는데 그 수는 해마다 늘어나서 1970년 말에 가서는 20만동에 가까운 숫자가 집계되었다. 청계천변, 중랑 천변 그리고 각 산허리마다 판자 집이 밀집되었는데 이들 주요 하천변과 철로변, 도심부에 밀집·산재한 판자 집은 강제 철거되기 시작했다.
서울로! 서울로! 돈벌이를 찾아 친척들도 우리 집으로 몰려들었다. 첫 기착지로 안양을 택한 것이다. 내게 새총을 만들어주고 공기총을 쏴볼 기회를 준 이웃집 형들도 영등포 양평동으로 떠났다. 당시 이웃집 큰 형은 운전기술을 배워 롯데제과 사장집 차를 끌었다. 어느 날 형은 지프에 사장집 아들들을 태우고 포도를 먹는다고 나타났다. 곱게 생긴 얼굴에 하얀 와이셔츠 차림에 구두를 신은 한 아이가 내게 선뜻 악수를 청했다. 사장집 아들이었다. 그들이 훗날 롯데 그룹의 총수가 될 줄 누가 알았던가. 세월은 수십 년 사이 사람 위치의 크기를 한 뼘만큼에서 천 길 만길의 차이로 나누고 만 셈이다.
그 무렵을 배경으로 한 소설 '서울은 만원이다.' 1966년 신문연재 당시 폭발적인 인기와 관심을 불러일으켰던 이호철의 장편소설은 세계 어느 곳에서도 그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였던 우리나라 수도 서울의 도시화(都市化) 과정에서 빚어지는 마이너리티들의 삶을 아주 질박하게 풀어냈다. 도시공간속의 기만과 거짓 그리고 위선과 부패의 와중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피폐되고 있는가를 신산하게 그려낸 소설이다.
인구 380만이던 시절에 이미 ‘서울은 만원이다’라는 사실을 설파한 작가의 예지력 뿐만 아니라 그 곳에서 마치 현재형처럼 그려지는 도시 위선자들의 모습이나 그들의 주변에서 질박함 그대로 삶을 영위하는 한계요소들(marginal elements)의 살림살이는 결코 40년 전의 모습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현실적이고 여전히 지금도 진행형이기에 이 소설은 ‘풍속소설’ 혹은 ‘세태소설’이라는 문단에서의 폄훼와는 달리 여전히 현재성을 갖는다.
가난 때문에 서울로 와 레지를 하다가 쿡에게 몸을 뺏기고 이리저리 거치다가 비록 몸파는 직업으로 떨어졌지만 천진한고 다정한 길녀. 허황하고 사기성도 농후하며 넉살좋고 악의 없고 물렁한 남동표. 서울토박이 노인답게 소심하고 줏대 없고 젊은 여자에게 속절없이 빠지는 서린동 영감, 간교하고 욕심많은 복실엄마. 피부비뇨기과 의사.목사..... 모두 마주칠 수 있는 바로 우리 옆 동네 사람들의 모습이다.
글 대목 중 하나
<가는 곳마다, 이르는 곳마다 꽉꽉 차 있다. 집은 교외에 자꾸 늘어서지만 연년이 자꾸 모자란다. 일자리는 없고, 사람들은 입만 까지고 약아지고, 당국은 욕사발이나 먹으며 낑낑어리고, 신문들은 고래고래 헛소리만 지른다.- 이호철, <서울은 만원이다>, 1972 ->
굳이 이를 1970년대 초라고만 단정할 수 있을까.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것은 없다. 정말 서울은 만원이다. 굳이 세월 따라 달라진 것이라 한다면 그가 말하는 뜨내기 동네도 서울 서민 냄새가 물씬 풍긴다는 동네(도원동, 도화동, 만리동, 공덕동)도 이제는 한 통속으로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나 몰라라 하며 거친 세상 속을 TV를 보며 관음증에 걸린 양 숨 죽이며 자득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사실 서울에 동(洞)도 많고 사람도 많지만, 사람 사는 고장다운 젖은 정감을 느낄 수 있는 동이 얼마나 될까. 중심가 쪽은 날고뛰는 신식도깨비들이나 돌아가는 곳일 터이고, 한다한 고급주택들이 늘어선 그렇고 그런 동(洞)은 썰렁하게 ‘맹견주의’라는 패말이나 대문에 붙여놓고, 높은 담벼락 위에도 쇠꼬챙이에 삐죽삐죽한 사금파리나 해 박았을 터이고 아래 웃집에 삼 사 년을 살아도 피차 인사도 없고 냉랭하게 지내기 일쑤이다. 이에 비하면 서민 촌이 훨씬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같은 서민촌 하고도 금호동 해방촌 같은 곳은 요 근래에 급하게 부풀어 놀라서 그런 뜨내기다운 냄새가 풍기지만, 도원동, 도화동, 만리동, 공덕동, 근처는 서울 본래의 서민 냄새가 물씬물씬 난다.">
첫댓글 요즘 무척 바쁘네요...... 그래도 다음 주 수요일(25일) 오후 4시.... 안양 석수도서관에서 명과 청 그리고 조선에 대한 강의는 합니다. 물론 수필가 답게 역사수필인 열하일기와 최부 표해록 내용을 중점해서 ...가까운 곳에 계신 분들은 와서 들어셔도 될 것 같습니다.... 저로서는 오랜 만에 외출이네요....잘들 지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