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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祖 高皇帝의 家系는 달단(韃靼)에서 유래(由來)? [제5편]
[서책(書冊)에서 말해주는 달단(韃靼)의 영역(領域)]
2024년 09월 14일
○ 「러시아연방[Russia, 聯邦)」의 한 나라인 「타타르스탄(Tatarstan)=타타르(Tatar) 공화국(共和國)=타타리아(Tataria)」이 있다. 이곳은 우랄산맥[Ural, 山脈]의 서(西)쪽이며, 카스피해[Caspian, 海]와 아랄해(Aral, 海]의 북(北)쪽 지방에 있으며, 볼가강[Volga River]【窩瓦河(俄語:Волга,羅馬化:Volga,發音:[ˈvoɫɡə]) 窩瓦河在韃靼語稱為İdel (Идел) = 伏尔加河(俄語:Волга,羅馬化:Volga,發音:[ˈvoɫɡə] 】이 이곳 땅을 적시고 있는데, 볼가강[Volga River]은 달단어【韃靼語 : 타타르어】로「Идел」라고 한다.
달단족(韃靼族)들이 오랜 세월(歲月) 볼가강[Volga River]을 중심(中心)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강(江)의 이름 또한 달단어(韃靼語)로 불리게 된 것이다.
21세기(世紀) 오늘날의 양심(良心)있는 학자(學者)들 역시(亦是) 볼가강[Volga River]과 달단[韃靼 : 타타르(Tatar)] 민족(民族)의 ‘생명(生命)의 젖줄이었다’하고 말한다. 또한 많은 종족(種族)과 부족(部族)들이 볼가강[Volga River] 유역(流域)에 있었으며, 그 땅을 차지하기 위해 많은 다툼이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타타르스탄(Tatarstan):타타르(Tatar)공화국(共和國):타타리아(Tataria)」는, 달단어【韃靼語 : 타타르어】를 사용(使用)하고 있다. 「중국어(中國語) ‘위키백과’에서는, 달단사탄공화국[鞑靼斯坦共和国]」이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이곳이 바로 옛 「“달단(韃靼)=몽고(蒙古)”족의 “고향(故鄕)이며, 터전이었으며, 본거지(本據地)였다”」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들은 볼가강[Volga River] 떠나 생각할 수 없다.
한때 흥성(興盛)할 시(時), “서(西) 시베리아(Siberia) 분지(盆地)”【西伯利亞 = 鮮卑利亞】에 진출(進出), 오랜 세월(歲月) 살아왔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이곳 지명(地名)에 타타르어(韃靼語)로 되어있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볼가강[Volga River] 유역(流域) [이미지 출처 : 위키백과] : 「볼가강[Volga River]은 달단어【韃靼語 : 타타르어】로「Идел」라고 한다. 달단몽고(韃靼蒙古)는, 볼가강[Volga River]을 떠나서 설명(說明)할 수 없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몽고(蒙古) 종족(種族)을 동아세아(東亞世亞)에 묶어두려는 사학자(史學者)들의 심뽀[마음보]가 못됐고, 싸가지[싹수]가 ‘십 원 한 장’도 없는 자(者)들이다.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韃靼斯坦共和國(俄語:Респу́блика Татарста́н,羅馬化:Respublika Tatarstan,韃靼語:Татарстан Республикасы),又譯塔塔爾斯坦共和國,又稱韃靼共和國,是俄羅斯境內的一個共和國,屬伏爾加聯邦管區。面積6.8萬平方公里,人口3,779,800(2002年數據),首府喀山。】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西伯利亞[Сибирь] : 鮮卑利亞 : 西伯利亞(俄語:Сибирь,羅馬化:Sibir)是烏拉山脈以東廣大地區之總稱. 中略. 西伯利亞此名稱可能來自西伯利亞韃靼語,意思就是「沉睡之地」(Sib Ir). 【필자(筆者) 주(注) : 서백리아(西伯利亞)는 달단어(韃靼語) 뜻으로 「침수(沉睡)의 땅(地)」이라는 뜻이다 : 곧 저지(低地)가 잠자고 있는 땅이라는 뜻이다. 「Sib Ir: 잠자는 땅」】西伯利亞韃靼人以此為國家名稱建立西伯利亞汗國【필자(筆者) 주(注) : 서백리아(西伯利亞)는, 달단인(韃靼人)들이 이곳에 서백리아한국(西伯利亞汗國)이라는 이름의 나라를 건립(建立)하였다.】, 後來被莫斯科大公國征服,西伯利亞此名詞進入了俄語。也有說法為「鮮卑利亞」,來自鮮卑。亦有一個解釋,西伯利亞被解作昔班的地方,因為他的封地位於西伯利亞。又有一說,俄羅斯沙皇國以錫伯族的族名創造北亞的新地名。而在中國古地圖上,西伯利亞被稱為羅荒野。】
(15) 연행록(燕行錄) 계산기정(薊山紀程) 5 / 附錄 山川 :
「醫巫閭山。堯封十二山之一也自我國長白山分脉而走。橫遮大漠。: 의무려산(醫巫閭山)은 요(堯) 임금이 봉한 12 산(山) 중의 하나이다. 아국(我國) 장백산(長白山)에서 산맥(山脈)이 갈라져 내달아, 큰 사막(沙漠)을 가로질러 막았다. 西北行七八百里。散漫扶輿。不見窮際。: 서북(西北)으로 7, 8백 리를 가도 산만하여 끝이 보이지 않는다. 山外則古凶奴地。明稱韃靼。今稱蒙古。此天所以限夷夏也。: 산(山)【醫巫閭山】밖(外)은 옛 흉노(凶奴)의 땅인데, 명(明)에서는 달단【韃靼 : Tatar(타타르)】이라 하였고, 지금은 몽고(蒙古)라고 일컫고 있다. 이것은 하늘이 이적(夷狄)과 중화(中華)를 경계(境界)로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➊ ‘계산기정(薊山紀程) 저자(著者)’의 말씀에 따르면 : 「반도(半島人)는 중화(中華)요, 중국(中國)」이며, 「중원대륙(中原大陸)은, ‘서토(西土)=서역(西域)’땅」이어야 한다.
‘계산기정(薊山紀程) 저자(著者)’는 말하기를 : 「아국(我國) 즉 우리나라의 장백산(長白山)에서 산맥(山脈)이 갈라져 내달아 큰 사막(沙漠)을 가로질러 막았다(橫遮)」라고 하였으니, “반도(半島)” 땅이 아님은 삼척동자(三尺童子)도 알 수 있는 설명(說明)이다.
즉(卽) 「장백산(長白山)은 반도(半島) 땅의 백두산(白頭山)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은 ‘초딩’들도 이해(理解)할 수 있으며,
여기에 큰 사막지대(沙漠地帶)는 반도(半島)로부터 ‘7 천리(千里)’ 정도(程度) 떨어져 있는 ‘하란산(賀蘭山)=하란산맥(賀蘭山脈)’과 이곳을 흐르는 ‘하(河)=황하(黃河)’로부터 그 서(西)쪽으로 이어져 ‘1만(萬) 5 천리(千里)에 이른다’라는 것은 지도(地圖)를 보면 누구든지 알 수 있다.
➋ 「오늘날의 요녕성(遼寧省) ‘의무려산(醫巫閭山)’은, 장백산(長白山)에서 갈라져 나온 산맥(山脈)이 없으니, 의무려산(醫巫閭山) 또한 존재(存在)할 수 없는 산(山)이요, 그곳에 사막지대(沙漠地帶) 또한 존재(存在)하지 않으니, 의무려산(醫巫閭山)은 존재(存在)할 수 없다.」
곧 「백두산(白頭山)은 반도(半島) 땅에 있는 백두산(白頭山)이 아니요, 의무려산(醫巫閭山) 또한 요녕성(遼寧省)에 있는 산(山)이 아니다」라는 것을 확실(確實)하게 알려주고 있다.
➌ 「의무려산(醫巫閭山)은, 하늘이 내려준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의 땅을 경계(境界)해 준 것이다」라는 말씀은, 「반도(半島) 땅과 요녕성(遼寧省) 땅과는 관계(關係)없다」라는 것을 후세(後世)에 전(傳)해주고 있다.
바로 우리의 선대(先代) 조상(祖上)님들이 생생(生生)하게 전해주는 기행문(紀行文) 속에서 그곳의 지형지세(地形地勢)에 대해 세세(細細)하게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수백(數百) 년이 지난 뒤, 후인(後人)들이 이에 대해 시시비비(是是非非)를 논(論)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語不成說)이요, 언어도단(言語道斷)이다. 감히… …누가 지형지세(地形地勢)는, 반론(反論)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15-1) 연행록(燕行錄) : 연행기사(燕行記事) 문견잡기(聞見雜記) 잡기(雜記) 문견잡기(聞見雜記) 하(下) 【이갑(李坤) : 영조(英祖) 13(1,737)∼正祖19(1,795)】 : 「其爲人與淸人自別。兩顴高。眼碧髥紫。皆悍惡麤健。不思室居。: 몽고인(蒙古人)은 청인(淸人)과는 아주 다르게 생겼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이 푸르며, 수염이 붉다. 그리고 모두 사납고 거칠며 집에서 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 연행기사(燕行記事) 저자(著者)「이갑(李坤)【英祖13(1,737)∼正祖19(1,795)】」은, 연행(燕行) 당시(當時)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연행 부사로 임명(任命)”을 받은 것이다. 「진하사은 진주겸동지사(進賀謝恩陳奏兼冬至使)」로, 「정유년(丁酉年) AD 1,777, 正祖 1年, 7월(月) 하은군(河恩君) 이광(李垙) 정사로, 이조판서 이갑(李𡊠) 부사로, 겸집의 이재학(李在學)을 서장관(書狀官)」으로 한 것이다.
따라서 위의 기록(記錄)은, AD 1,777년의 것을 말하고 있는데, 「200여 년(餘年) 전(前)의 형편(形便)」을 세세(細細)하게 설명(說明)하고 있다.
➊ 『其爲人與淸人自別。兩顴高。眼碧髥紫。: 몽고인(蒙古人)은 청인(淸人)과는 아주 다르게 생겼다.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이 푸르며, 수염이 붉다.』라고 당시(當時)의 “몽고인(蒙古人)의 형상(形象) 곧 생김새(面貌)에 대해 말하고 있다”
「이들 몽고인(蒙古人)은 색목인(色目人)이었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筆者)는 늘 “옛 몽고인(蒙古人)”이라는 수식어(修飾語)를 사용(使用)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21세기(世紀) 몽골공화국의 국민(國民)들과는 전혀 다른 이민족(異民族)이기 때문이다』
➋ 『오늘날의 몽골공화국 몽골인들은 황인종(黃人種)으로 한민족(韓民族)과 똑같은 형상(形象 : 面貌)과 아주 비슷한 DNA와 몽고반점(蒙古斑點)을 가지고 태어나는 같은 종족(種族)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건 “옛 몽고인(蒙古人)이 아닌 21세기(世紀)의 몽고인(蒙古人)이다.”
그렇다면 『“옛 몽고인(蒙古人)”들은 어디로 사라져 버렸을까? 옛 몽고인(蒙古人)들의 본시(本是)의 영토(領土)는 ‘옛 소련(蘇聯)’에게 모조리 빼앗기고, 종족(種族)들은 주변(周邊)의 다른 종족(種族)들에게 동화(同化)되고, 흡수(吸收)되어, 몽고(蒙古)의 정체성(正體性)과 그 원형(原形)을 다 잃어버리고, 지금은 전혀 다른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는 “옛 소련(蘇聯)”에 의해 “조선(朝鮮)의 백성(百姓)들을 모아 ‘몽골공화국’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왜냐하면 “옛 소련(蘇聯)”은 “옛 몽고(蒙古)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 엉뚱한 곳에, 엉뚱한 조선(朝鮮) 백성(百姓)들을 모아 「니네들이 몽고인(蒙古人)이니, “몽고(蒙古)”라는 나라를 만들어 주겠다」라고 한 것이 바로 오늘날의 “몽골공화국의 실체(實體)”다.
(15-3) 靑莊館全書 卷 23 / 宋史筌 蒙古列傳 에서는 : 《子孫蕃衍. 各自爲部居. 于烏桓之北. 與畏羅, 乃蠻, 九姓, 回鶻, 故城, 和林接壤. 世修貢遼金. 役屬于韃靼. 中略. 兩顴高. 眼碧髥紫. 皆悍惡麤健. 不思室居. : 그 후 자손들이 번창하여, 저마다 부족을 이루어, 오환(烏桓) 이북, 외라(畏羅), 내만(乃蠻), 구성(九姓), 회골(回鶻)의 고성(故城) 화림(和林)과 접한 땅에서 흩어져 살며, 대대로 요(遼)ㆍ금(金)에게 조공(朝貢)하다가, 달단(韃靼)에게 붙었다. 중략.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이 푸르며 수염이 붉다. 그리고 모두 사납고 거칠며, 집에서 살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➊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은 : 〈몽고인【蒙古=몽골】은 반도인(半島人)과 똑같은 인종(人種)으로 “몽골리안[Mongolian]”이라고 부르며, 엉덩이에 파란 반점(斑點)이 있는 것이 공통적(共通的) 특색(特色)〉이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는데, 이는 역사서(歷史書)에 따르면 : 「명백(明白)한, 확실(確實)한 조작극(造作劇)이다.」
➋ 즉(卽) 「반도인(半島人) 10명 중에서 8~9명은 엉덩이 부근에 몽고반점(蒙古斑點)을 가지고 태어난다」라고 하였다.
➌ 그러나 우리 선대(先代)들이 기록(記錄)한 서책(書冊)에서는 이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설명하고 있다. 곧 「몽고인(蒙古人)의 특색(特色)」 : 「兩 顴 高。眼 碧 髥 紫。皆 悍 惡 麤 健。不 思 室 居。: 광대뼈가 튀어 나오고, 눈이 푸르며(靑眼), 수염 색깔이 붉고, 모두 사납고 거칠며, 집에서 살지 않는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으니, 이들은 전형적(典型的)인 색목인(色目人)들이다.
도대체 이게 뭔 해괴망측(駭怪罔測)하고, 괴이(怪異)한 역사해설(歷史解說)인가! 반도인(半島人)과 몽고인(蒙古人)이 같은 종족(種族)이라는 말은, 곧 똑같은 색목인(色目人)이어야 맞는 말이다. 반도인(半島人)들이 색목인(色目人)인가?
반도인(半島人)들은,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이 푸르며(靑眼), 수염 색깔이 붉은색으로 원숭이(獼猴)처럼 생겼는가?”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인 부역 매국 사학자(附逆賣國史學者)들에게 묻는다!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 이놈들에 한 번 물어보자. 반도인(半島人)들이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눈이 푸르며(靑眼), 수염 색깔이 붉은색으로 원숭이(獼猴)처럼 생겼는가?”한다면 “저놈, 저거 정신 나간 놈 아냐!” 할 것은 100%다.
그렇다!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 이놈들」이 바로 “정신 나간 놈들이다”
➨ 본시(本是) “몽고(蒙古)”는 우랄[Ural 산맥(山脈)]의 동서(東西) 지대(地帶)에 걸쳐 살고 있었던 색목인(色目人)들을 통칭(統稱)한 것으로, 옛 글란(契丹)의 한 부락(部落)으로 글란(契丹)에 붙어 공역(共役)을 담당(擔當)했던 무리를 말하는 것이다.
“몽고반점(蒙古斑點)을 가지고 태어난다”라는 오늘날의 “몽골인”들은 옛 몽고인(蒙古人)들이 아니다. 이들은 우리 선대(先代) 조선왕조(朝鮮王朝) 백성(百姓)들로 바로 조선인(朝鮮人)이다.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은, 참된 역사(歷史)를 모르는 한국인(韓國人)들을 철저(徹底)하게 이용(利用)해 자국(自國)의 이익(利益)을 극대화(極大化)하고 있다. 역사(歷史)에 무지(無知)한 국민(國民)들이 받을 수밖에 없는 고통(苦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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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단(韃靼)」에 대해, 근세(近世)의 기록(記錄)인「해국도지(海國圖志)」에서는 어떻게 설명(說明)하고 있을까? 흥미진진(興味津津)한 주제(主題)일 것이다.
(16) 海國圖志 卷022 「北印度各國」 편을 보면 이런 내용(內容)이 있다.
➨ 〈俄羅斯與印度構兵記曰 : 아라사(峨羅斯)와 인도(印度)의 구병기(構兵記)에서 왈(曰) : 【註釋 : 裏海, 即加士比唵海, 近於鹹海, 亦名北高海. 明史謂遊牧之蒙古曰韃靼, 西洋人謂遊牧之回部曰韃韃, 皆音近. : 주석(註釋) : 리해(裏海)는, 곧 가토비암해(加士比唵海)이며, 함해(鹹海)에 가깝다. 또 이름이 북고해(北高海)이다. 명사(明史)에서는 유목(遊牧)하는 몽고(蒙古)를 달단(韃靼)이라 하였는데, 서양(西洋)인들은 유목하는 회부(回部)를 이르길 달단(韃靼)이라 불렀는데, 모두 음(音)이 가깝다.】英吉利及俄羅斯二境中, 所隔數國, 則愛烏罕為大, 或稱阿付顏尼, 或曰甲布爾. : 영길리(英吉利)와 아라사(峨羅斯) 두 나라의 지경(地境) 가운데에, 몇 개의 나라가 그 사이에 있어, 애오한(愛烏罕)이 큰데, 혹은 아부안니(阿付顏尼) 혹은 갑포이(甲布爾)라고도 불렀다. 道光十九年, 愛烏罕與沙蘇野相攻, 沙蘇野酋請救於英夷. 英吉利遂起印度各部落之兵, 並力攻破愛烏罕. : 도광(道光) 19년【AD 1,839年】애오한(愛烏罕)과 사소야(沙蘇野)가 서로 공격하여, 사소야(沙蘇野) 우두머리가 영이(英夷)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영길리(英吉利)는 인도(印度) 각 부락(部落)의 병사들을 파견, 힘을 합쳐 애오한(愛烏罕)【아프가니스탄】을 공격(攻擊)하여 깨뜨렸다. 愛烏罕之酋亦走訴於俄羅斯, 俄羅斯複起駐防韃韃之兵, 南攻巴社, 取機窪, 取木哈臘, 欲恢複愛烏罕故地, 以直攻印度. : 애오한(愛烏罕)의 우두머리 역시 달아나 아라사에게 하소연하니, 아라사(鵝羅斯)는 방비(防備)차 주둔해 있던 달단(韃靼) 병(兵)을 파견, 남(南)쪽의 파사(巴社)를 공격하여, 기와(機漥)를 취하고, 목합랍(木哈臘)를 취해, 애오한(愛烏罕)의 옛 땅을 이전(以前)의 상태로 만들어 놓고는(恢復), 곧바로 인도(印度)를 공격(攻擊)하려 하였다〉라고 하였으며,
➊ 위의 글 “주석(註釋)”편을 보면 “달단(韃靼)”의 거점(據點)이 어디였는가를 확실(確實)하게 알려주고 있다. 카스피해[Caspian, 海]는 아랄해[Aral, 海]와 가까이에 있는데, 이 주변에서 유목(遊牧)하는 몽고(蒙古)를 “달단(韃靼)”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註釋 : 裏海, 即加士比唵海, 近於鹹海, 亦名北高海. 明史謂遊牧之蒙古曰韃靼, 西洋人謂遊牧之回部曰韃韃, 皆音近. : 주석(註釋) : 리해(裏海)는, 곧 가토비암해(加士比唵海)이며, 함해(鹹海)에 가깝다. 또 이름이 북고해(北高海)이다. 명사(明史)에서는 유목(遊牧)하는 몽고(蒙古)를 달단(韃靼)이라 하였는데, 서양(西洋)인들은 유목하는 회부(回部)를 이르길 달단(韃靼)이라 불렀는데, 모두 음(音)이 가깝다.】
달단족(韃靼族)은 어디에 근거지(根據地)를 두고 있었는가?
위에서 설명(說明)하고 있는 것처럼 :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우랄산맥(山脈)의 남(南)쪽 이야기인데, 정확(正確)하게 말하면, 「명사(明史)에서 일컫기를 : 카스피해(海)를 중심으로 그 주변에서 유목생활(遊牧生活)을 하고 있던 ‘몽고(蒙古)’들을 통칭(統稱)하여 달단(韃靼)이라 했다」라는 뜻이다.
➨➨ “명사(明史)”를 인용(引用)하여 말하는 것이다. 이런 곳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우랄산맥(Ural, 山脈) 남부(南部) 볼가강[Volga River] 연안(沿岸)에 근거지(根據地)였던「“달단(韃靼)”이 한반도(韓半島) 북방(北方)에 쳐들어왔다』라는 이야기는, 역사왜곡(歷史歪曲)과 조작(造作)이 아니면 불가능(不可能)한 이야기다.
더불어 이성계(李成桂)와 그의 고조부(高祖父) 이안사(李安社)가 활동(活動)했던 땅 역시(亦是)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 북방지대(北方地帶)」에서 찾아야 함은 너무도 당연(當然)한 이야기다.
➋ 「이러한 땅에서 유목(遊牧)하던 170 여호(餘戶)가 이안사(李安社)를 따라 훌쩍 떠나도, 또 훌쩍 떠나는 유랑생활(流浪生活)을 했다면 가능(可能)한 일이며, 이런 땅에서 몽고(蒙古)에 도망을 가, 또는 몽고(蒙古)에 투항(投降)하니 「남경(南京) 천호(千戶) 달로화적(達魯花赤)」으로 임명(任命)되어, 4대(代)를 내려오며 호족(豪族) 군벌(軍閥) 가문(家門)이 되었다면 : “의심(疑心)할 수 없는 역사(歷史)”라고 자신(自信)있는 역사해설(歷史解說)이 되는 것이며, 이럴 때 그곳 땅 ‘달단동(韃靼洞)’에 고조부(高祖父) 이안사(李安社)의 묘지(墓地)가 있을 것은 너무도 당연(當然)한 이야기다.
(16-1) 附澳門月報(即所謂新聞紙):《附澳門月報(即所謂新聞紙):
〈道光二十年七月,中略.鄂羅斯近日直攻至韃韃裏之機窪 : 부(附) 오문월보(澳門月報)【즉 소위(所謂) 신문지(新聞紙)다】 : 도광(道光) 20년【AD 1840年】7월, 중략. 악라사(鄂羅斯)가 근일(近日)에 곧바로 달달리(韃韃裏)의 기와(機窪)를 공격하였다.【➊ 註釋 : 韃韃裏, 謂遊牧回部, 如哈薩克, 布魯特之類, 東起蔥嶺, 西至裏海, 南界印度, 北界鄂羅斯, 皆是也. 機窪乃韃韃裏南方部落. : 달달리(韃韃裏)는, 소위 유목 회부(回部)인데, 합살극과 같고, 포노특(布魯特) 종류이다. 동쪽으로 총령(蔥嶺)으로 내닫고, 서(西)쪽으로는 리해(裏海)에 이르며, 남(南)쪽 지경은 인도(印度), 북(北)쪽 지경은 악라사(鄂羅斯)인데, 모두다. 기와(機窪)는 달달리(韃韃裏)의 남방부락이다.】,皆因我等攻取阿付顏尼部 : 이로 인하여 아(我)는 아부안니부(阿付顏尼部)를 공취(攻取)하였는데,【此部原屬巴社,今為英吉利所據,在印皮之西,巴社之東北,韃韃裏之南 : 이 부(部)는 원래 파사(巴社)에 속했는데, 지금 영길리가 의거하였는바, 인도(印度)의 서(西)쪽에 있으며, 파사(巴社)의 동북(東北)에, 달달리(韃韃裏)의 남(南)쪽에 있다.】,故鄂羅人亦攻至荷薩士河 : 악라사(鄂羅斯)인들은 또한 공격하여 하살토하(荷薩士河)에 이르렀다.【韃韃裏,地近機窪 : 달달리(韃韃裏)의 기와(機窪) 땅 가까이에 있다.】,已約木哈臘 : 이미 목합납(木哈臘)를 묶어,【亦韃韃裏南方部落, 近阿付顏尼 : 역시 달달리(韃韃裏)의 남방(南方) 부락인데, 아부안니(阿付顏尼)에 가깝다.】,同取阿付顏尼部,以攻打印度,為我英國兵頭沙阿力山及馬約裏治堵禦,故計不行。: 함께 아부안니부(阿付顏尼部)를 취하고, 인도(印度)를 쳐 공격하니, 우리 영국군(英國軍)은 사아력산과 마약리의 성을 지키려 하였으나, 계책은 이행되지 않았다. 鄂羅斯前在希臘 : 악라사는 전에 희납(希臘)과【巴社國東方部落,近阿付顏尼 : 파사국의 동방 부락이다. : 가까이에 아부안니가 있다.】,與巴社人立約,欲收服阿付顏尼,以攻取印度,亦因我兵頭律屋蘭所拒. : 함께 파사(巴社) 인과 서로 약속이 있는바, 아부안니(阿付顏尼)를 되찾으려는 생각에, 인도(印度)를 공취(攻取)하였으나, 역시 이로인해 아병(我兵)은 율옥란(律屋蘭)에 주둔하여 방어하였다.【➋ 註釋 : 巴社, 即白頭回國, 南抵海, 西界都魯機, 北界韃韃裏 : 파사(巴社)는 곧 백두회국인데, 남쪽으로는 바다에 막히고, 서쪽 경계는 도노기(都魯機), 북쪽 경계는 달달리(韃韃裏)이다.】中略.」이라고 하였다.
「➊ 주석(註釋)」을 보면 : ‘달단(韃靼)=달달리(韃韃裏)’의 영역(領域)을 설명(說明)하고 있다. 「註釋 : 韃韃裏, 謂遊牧回部, 如哈薩克, 布魯特之類, 東起蔥嶺, 西至裏海, 南界印度, 北界鄂羅斯, 皆是也. 機窪乃韃韃裏南方部落. : 달달리(韃韃裏)는, 소위 유목 회부(回部)인데, 합살극과 같고, 포노특(布魯特)종류이다. 동쪽으로 총령(蔥嶺)으로 내닫고, 서(西)쪽으로는 리해(裏海)에 이르며, 남쪽지경은 인도(印度), 북쪽지경은 악라사(鄂羅斯)인데, 모두다. 기와(機窪)는 달달리(韃韃裏)의 남방(南方) 부락(部落)이다」라고 하였다.
즉(卽), 「달달리(韃韃裏) : 유목(遊牧) 회족(回族)으로, 동(東)쪽으로 총령(葱嶺)에 닿고, 서(西)쪽으로는 리해(裏海)【Caspian, 海】, 남(南)쪽은 인도(印度) 경계, 북(北)쪽은 악라사(鄂羅斯)까지」라고 하였으니, 오늘날의 「서(西) ∼ 흑해 : 동(東) ∼ 총령(葱嶺) : 남(南) ∼ 인도(印度) : 북(北) : 악라사(鄂羅斯)까지」, 「‘달단(韃靼)=달달리(韃韃裏)’의 영역(領域)이었다」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➋ 주석(註釋)」을 보면 : 역시 ‘달단(韃靼)=달달리(韃韃裏)’의 위치를 찾을 수 있다.「巴社, 即白頭回國, 南抵海, 西界都魯機, 北界韃韃裏 : 파사(巴社)는 곧 백두회국(白頭回國)인데, 남(南)쪽으로는 바다(海)에 막히고, 서(西)쪽 경계는 도노기(都魯機), 북(北)쪽 경계는 달달리(韃韃裏)이다」라고 하였다.
파사(巴社)는 곧 파사(波斯)이며, 페르시아(Persia)의 음역어(音譯語)이다. 곧 오늘날의 이란(Iran)땅을 말한다. 도노기(都魯機)는 오늘날의 ‘터키(Terkey)=튀르키예(Türkiye)’이다. 달달리(韃韃裏)는 바로 달단(韃靼)을 말하는 것인데, 오늘날의 지도(地圖)를 보면 :
➨ 중앙아세아(中央亞細亞) 바로 그 땅이다. 곧 카스피해(裏海)와 아랄해(鹹海)와 우랄산맥(Ural, 山脈) 남(南)쪽을 지칭(指稱)하고 있다.
➨➨➨ 위의 해국도지(海國圖志)에서 보았듯이 ‘달단(韃靼)=달달리(韃韃裏)’의 터전은 똑같은 곳을 지칭(指稱)하고 있다.
즉(卽), 이란(Iran)의 북(北)쪽, 총령(葱嶺)의 서(西)쪽, 악라사(鄂羅斯) 지경(地境)까지가 달단(韃靼) 몽고(蒙古)들의 활동(活動) 영역(領域)이었다는 것이다. 이곳이 어딘가?
바로 「볼가강[Volga River] 중, 하류(中, 下流) 연안(沿岸), 카스피해(Caspian, 海) 연안(沿岸), 우랄산맥(Ural, 山脈), 총령(葱嶺 : Pamir)의 서(西) 땅」을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곳에서 달단(韃靼) 몽고(蒙古)들이 터전을 이루고 살았는데, 1,800년대(年代)에 이들은 악라사(鄂羅斯)에 이용(利用)당하며 용병(傭兵) 노릇을 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이러한 이들이 “1만(萬) 몇 천리(千里)”를 뛰어넘어 한반도 북방지대(北方地帶)에 둥지를 틀고 고려(高麗) 또는 조선(朝鮮)을 침략(侵略)하고 약탈(掠奪)했다는 역사해설(歷史解說)은 어이없는 짓으로, 비난(非難)받아 마땅하며, 이들에게 ‘부역(附逆) 매국노(賣國奴)’라는 ‘매국(賣國) 사학자(史學者)’라고 매도(罵倒)당해도 할 말이 없는 것이다.
능지처참(陵遲處斬) 효시(梟示) 당하지 않은 것을 감사(感謝)하게 여기고,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지 않는 것을 감사(感謝)해야 하며, 삼족(三族), 구족(九族)이 멸각(滅却) 당하지 않은 것을 감사(感謝)히 여겨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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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朝鮮)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의 선대(先代) 가계(家系)
달단계(韃靼系) 몽고족(蒙古族)
○ 조선(朝鮮)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의 가계(家系)를 보면 : 주요(主要) 선대(先代) 인물(人物)인 〈용부(勇夫)가, 내시집주(內侍執奏) 인(璘)을 낳았고〉고 전해지는 “이용부(李勇夫)”인데, 이 분이 「이준의(李俊儀), 이의방(李義方), 이린(李璘), 이거(李琚)」를 낳았다고 하는데, “이준의(李俊儀)와 이의방(李義方)”은 아예 사라져 버려 없던 인물(人物)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역신(逆臣)이었다고 하더라도 없었던 인물(人物)이 될 수 있을까? 그런다고 전주이씨(全州李氏) 직계(直系)가 역신(逆臣)이었다는 사실(事實)이 없어질까?
이러한 예(例)는, 후대인(後代人)을 속이는 가장 파렴치(破廉恥)한 행위(行爲)다.
여기서 어떻게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이린(李璘)”이 이양무(李陽武)를 낳았고, 이양무(李陽武)가 문제(問題)의 이안사(李安社)를 낳았으니, “이분이 바로 목조(穆祖)이니, 이성계(李成桂)의 고조부(高祖父)다”〉라고 한 것이다.
이안사(李安社)는 무려 세 번에 걸쳐 도주(逃走)한다. 여기서부터 이해불가(理解不可)한 사건(事件)이 연속(連續)되는데… …
➊ 첫 번째로 : 사실(事實) 여부(與否)를 떠나, 어찌 어찌하여 목숨을 부지(扶持)하여 고향(故鄕)으로 돌아와 쥐 죽은 듯하며 살았어야 함에도 갑자기 그곳 전주(全州) 땅의 호족(豪族)이 되었다는 것은 불가(不可)한 것이다.
역신(逆臣) 직계(直系) 가족(家族)이 무슨 재주로… … 관(官)의 밀착(密着) 감시(監視) 대상(對象) ‘제1 순위(順位)’다. 하물며 무슨 재주로 전주(全州)라면 당시 목사(牧使)가 주재(駐在)하고 있던 대도회(大都會)에서 호족(豪族)이 되어 군림(君臨)할 수 있었겠는가? 이는 이해불가(異解不可)한 이야기다. 소설(小說)이라도 허구(虛構)라고 말할 것임에 틀림없다.
더더구나 그곳「전주(全州)에서 기생(妓生) 수청(守廳) 사건(事件)으로 관리(官吏)와 맞서다가 죽게 생기니, 자신(自身)을 따르던 170 여가(餘家)【1,000구(口) 정도 되는 많은 인원(人員)이다】를 데리고 강원도(江原道) 삼척(三陟)으로 도망(逃亡)을 갔다」라고 하였는데,
이게 또 이해불가(理解不可)한 사건이다. 호족(豪族)이, 양반(兩班) 사대부(士大夫)가 기생(妓生)을 놓고 관리(官吏)와 다툼이 생겨 죽게 생겼다는 이야기는 공맹(孔孟)을 하늘처럼 떠받들고 살던 그 시절(時節)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양반(兩班) 또는 호족(豪族) 사대부(士大夫)로써 가장 파렴치(破廉恥)한 짓이다.
여기서 관리(官吏)와 다퉈 죽게 생기니… …「자신을 따르던 170 여호(餘戶)들을 인솔(引率), ‘야반도주(夜半逃走)한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왕권(王權)을 무시(無視)한 어마어마한 대역죄(大逆罪)가 되는 것이다.」 또 ‘삼척(三陟)으로 도주(逃走), 정착(定着)하였다’라고 하였는데, 170 여호(餘戶)라는 말은, 곧 1,000구(口) 가까이 되는 엄청난 숫자라는 것에 있다.
170 여호(餘戶)의 ‘일천(一千) 명(名)’ 가까운 식솔(食率)들과 양식(糧食), 의복(衣服), ‘생활도구(生活道具)=가재도구(家財道具)’ 및 수레(車), 가축(家畜) 등을 이끌고… …
도보(徒步)로 도주(逃走)했을까? 말을 타고(騎馬) 도주(逃走)했을까?
전주(全州)에서 육로(陸路)로, 서해(西海) 포구(浦口)에서 배(船舶)를 타고 남해(南海)를 거쳐 동해(東海)로 간 다음, 다시 북상(北上)하여 삼척(三陟)의 포구(浦口)로 상륙(上陸), 삼척(三陟)의 어느 고을로 도주(逃走), 정착(定着)했을까?
➨ 어떤 방법(方法)으로 야반도주(夜半逃走)했을까? 도무지 알 수 없다.
전주(全州) 감영(監營)과 그 관리(官吏)는 왜 이들이 야반도주(夜半逃走)하는 것을 그대로 두었을까? 아니면 몰랐다는 걸까? 1,000구(口)가 하룻밤 사이에 없어졌는데… …이건 말 그대로 조작(造作)이다.
또 삼척(三陟) 또한 마찬가지다. 1,000구(口) 가까운 백성(百姓)들이 어느 날 갑자기 삼척(三陟)으로 들이닥쳤다면 : 삼척(三陟)은 ‘난리(亂離) 법석’이 벌어졌을 것이며, 수차례에 걸쳐 파발마(擺撥馬)가 도성(都城)을 향해 떠나고 전쟁(戰爭)이 난 것처럼 어수선했을 것은 뻔한 사실(事實)이며, 먹을 것, 잠자리 등 한, 두 가지를 해결(解決)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➋ 두 번째로는 : 「삼척(三陟)에서 터전을 잡고 사는데, 갑자기 전주(全州)에서 기생(妓生) 수청(守廳)로 다툼을 벌였던 그 관리(官吏)가 다시 삼척(三陟)의 관리(官吏)로 부임(赴任)해오자, 죽음을 두려워한 이안사(李安社)는 다시 170 여가(餘家)【1,000구(口) 정도 되는 많은 인원(人員)이다】를 이끌고, 함경도(咸鏡道) 땅으로 도주(逃走)했다」라고 하며,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위의 글 “➊”에서 말하는 것과 똑같은 현상(現狀)이 다시 벌어지는 것이다.
➌ 세 번째로는 : 「이번에는 고려(高麗)의 관리(官吏)로 몽고군(蒙古軍)이 침입(侵入)하자 싸우기도 전에 투항권고(投降勸告)에 1,000 여호(餘戶)를 인솔(引率)하여 몽고(蒙古)에 투항(投降), 의탁(依託)했다」라는 것이고,
또 기록(記錄)에서는 : 「고려(高麗)의 관리(官吏)가 된 적이 없으며, 삼척(三陟)에서 문제(問題)의 관리(官吏)가 부임(赴任)하자, 이번에는 아예 170 여호(餘戶)를 인솔하여 몽고(蒙古) 땅으로 도망(逃亡)을 갔다」라고 역사서(歷史書)는 적고 있다는 점이다.
혼자 몸뚱이라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곳저곳으로 도주(逃走)하고, 도망(逃亡)을 갈 수 있을 것이나, 가족(家族)과 함께 따르는 170 여호(餘戶)【1,000구(口) 정도 되는 많은 인원(人員)이다】와 함께라면 상황(狀況)은 전혀 다르게 전개(展開)될 수밖에 없다.
➍ 신라(新羅) 말엽(末葉)의 “사공(司空) 이한(李翰)”을 시조(始祖)로 한다는 것을 보면 : 「신라(新羅) 관제(官制)에 “사공(司空)”은 없다. 이 또한 불가능(不可能)한 이야기다.」
또 다른 이야기로 「당(唐) 말엽(末葉)의 사공(司空) 이한(李翰)이다」라는 말 또한 조선인(朝鮮人)이 아닌 당인(唐人)이었다는 것으로 “전주(全州)가 관향(貫鄕)”이란 말 역시 허구(虛構)가 될 수밖에 없다.
➎ ‘반역(叛逆)의 역신(逆臣)’으로, 형제(兄弟) 모두【이준의(李俊儀)와 이의방(李義方)】능지처참(凌遲處斬) 후(後), 효시(梟示)를 당하고, 그 가족(家族)은 몰살(沒殺)되었는데, 그들의 동생 ‘이린(李璘)과 이거(李琚)’가 살아남아 고향(故鄕)인 전주(全州)로 귀향(歸鄕)했다는 말 또한 이해불가(理解不可)한 이야기고, 또 그곳의 호족(豪族)이 되었다는 말은 더더욱 불가능(不可能)한 이야기다.
➏ 「그러고도 기생수청(妓生守廳) 문제(問題)와 같은 파렴치(破廉恥)한 행위(行爲)로 관리(官吏)와 다퉈 죽게 생기자 170 여호(餘戶)를 인솔(引率), 하루아침에 ‘1 천리(千里)’ 이상(以上) 먼 땅 ‘삼척(三陟)’으로 도주(逃走)하였는데, 또 이곳에서 문제(問題)의 관리(官吏)가 삼척(三陟)으로 부임하자 또 170 여호(餘戶)와 함께 함경도(咸鏡道)로 도주(逃走)했다」함은, 도대체 당시(當時)에 고려왕조(高麗王朝)가 있었음을 부정(否定)하는 것과 같고,
➐ 또는 아예 「170 여호(餘戶)를 인솔(引率)하여 몽고(蒙古) 땅으로 도망을 갔다」라는 이야기는 반도(半島) 땅의 조선왕조【총칭(總稱)】의 행정체계(行政體系)를 생각할 때 불가능(不可能)한 일이다.
➡ “1 천여” 인원(人員)들을 데리고 전라도(全羅道) 전주(全州)에서 무슨 재주로 강원도(江原道) 삼척(三陟)으로 도주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인데, 육로(陸路)로 아니면 해상(海上)으로… …어느 것으로 도주(逃走)를 하던 간에 불가능(不可能)한 이야기다.
「또 “1천여” 인원(人員)들과 함께 삼척(三陟)에서 함경도(咸鏡道)로 다시 도주(逃走)를 할 수 있을 정도(程度)로 능력이 있었다」라면 : 차라리 전주(全州)에서 당시(當時)의 권력가문(權力家門)이던 남평문씨(南平文氏)의 권세(權勢)를 빌어, 그 관리(官吏)와 담판(談判)을 지었다는 편이 이해(理解)가 빠른 것이고, 또 이해(理解)할 만한 이야기가 된다.
➑ 「이러한 여러 가지 이해불가(理解不可)한, 불가능(不可能)한 이야기를 만들어 놓은 것은, 이보다 더 중요(重要)한 것을 숨기기 위한 술책(術策)이었다」라고 보는 타당(妥當)하다는 점이고 현실성(現實性)있는 이야기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 위에서 말하는 것처럼 : 170 여호(餘戶)의 1,000구(口)를 이끌고 이곳저곳으로 도주(逃走)할 수 있었던 배경(背景)에는, “이성계(李成桂) 가문(家門)은 달단(韃靼) 유목족(遊牧族) 출신(出身)이다”라는 합리적(合理的)인 의심(疑心)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 위에서 반복적(反復的)으로 설명(說明)하고 있는 것은, 신라왕조(新羅王朝)든, 고려왕조(高麗王朝)든 봉건왕조(封建王朝)의 체계(體系)를 갖추고 있으며 왕권(王權)이 절대적(絶對的) 힘을 발휘(發揮)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한반도(韓半島) 신라(新羅), 고려(高麗) 땅에서는 불가능(不可能)한 이야기다.
「농경(農耕)을 주축(主軸)으로 하던 한반도(韓半島)에서 170 여호(餘戶) 곧 1,000명 가까운 백성(百姓)들이 가축(家畜)을 이끌고, 양식(糧食)과 가재도구(家財道具)를 싣고 수레(車)를 몰며, 왕권(王權)의 눈을 속이고, 왕권(王權)을 피해, 왕권(王權)이 지배(支配)하고 있던 곳으로 몰래 야반도주(夜半逃走)한다는 것은 불가능(不可能)한 일미며, 꿈(夢)속에서도 불가능(不可能)한 일이다.」
➡➡➡ 〈이렇게 여러 차례에 걸쳐 도주(逃走) 또는 이동(移動)을 감행(敢行)한 것이 역사적(歷史的) 사실(事實)이었다고 한다면 : 가능(可能)한 것은, 이성계(李成桂) 선대(先代) 가계(家系)는 유목(遊牧), 이목(移牧)에 종사(從事)한 유목민(遊牧民) 출신(出身)으로, 함께하는 170 여호(餘戶)와 함께 가축(家畜)과 가재도구(家財道具)를 수레(車)에 싣고 수초(水草)를 따라 이동(移動)했던 것을 미화(美化)한 것이다.〉
존재(存在)하지도 않았던 사공(司空) 또는 대역신(大逆臣)의 자손(子孫), 명문가(名門家) 남평문씨(南平文氏)와의 겹 사돈(査頓) 이야기, 호족(豪族)으로 기생수청(妓生守廳) 문제로 관리(官吏)와의 다툼 파렴치(破廉恥)한 행위(行爲), 도주(逃走)에 또 도주(逃走), 몽고(蒙古) 땅에 들어가 투항(投降) 등의 모든 기록(記錄)은 한반도(韓半島) 땅에 있었다는 것을 증거(證據) 하려 만든 시나리오일 뿐이다.
또 하나는 이성계(李成桂) 선대(先代) 가계(家系)의 유목(遊牧), 이목(移牧) 족(族)임을 철저(徹底)하게 숨기려 하는 과정(過程)으로 만들어진 역사왜곡(歷史歪曲), 조작(造作)이며, 태조(太祖) 고황제(高皇帝)를 포함(包含) 선대(先代) 가계(家系)는 달단(韃靼) 몽고족(蒙古族)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사실(史實)이 실제(實際)로 전개(展開)되었던 땅은 : 중원대륙(中原大陸)의 서북방(西北方) ‘달단(韃靼) 몽고(蒙古)’들이 살았던 곳이며, 이성계(李成桂) 가계(家系)는 그곳의 남경(南京) 천호(千戶)로 수대(數代)에 걸쳐 달로화적(達魯花赤)을 역임(歷任)하면서 그곳의 호족(豪族), 군벌(軍閥)이 되어 한 지방을 지배(支配)하고 있었으나 몽고(蒙古)의 급박(急迫)스러운 쇠퇴(衰退)는 이성계(李成桂) 가문(家門)의 쇠퇴(衰退)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절박(切迫)한 때… …강력(强力)하게 다시 일어나고 있던 ‘천자국(天子國) 고려(高麗)’ 조정(朝廷)을 찾을 수밖에 없었으며, 당시(當時) 고려(高麗)는, 북방지대(北方地帶)를 안정(安定)시키려는 정책(政策)을 펴면서, 시기적절(時期適切)하게 그곳의 달로화적(達魯花赤) 출신(出身) 이자춘(李子春)이 그의 아들 이성계(李成桂)와 함께 래조(來朝)하여 귀화(歸化)를 요청(要請)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事實)을 정사(正史)에서 말할 수 없으니, 신라(新羅), 고려인(高麗人)으로 둔갑(遁甲)시켜, 여러 이해(理解) 불가능(不可能)한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이건 「달단(韃靼) 몽고계(蒙古系)라는 것을 감추고, 숨기려 한 것이다」〉라고 밖에 설명(說明)할 수 없다.
○ 위에서 설명(說明)한 결론(結論)은, 「물론(勿論) 이 글을 쓴 “필자(筆者)”의 사견(私見)이지만 : 역사서(歷史書) 또는 문집(文集) 등에 기록(記錄)된 것을 보면 : 한반도(韓半島) 땅에 고대(古代)의 신라(新羅), 고려(高麗)는 없었다」라는 것이고,
‘고황제(高皇帝) 이성계(李成桂) 선대(先代) 가계(家系)’는 당연(當然)히 한반도(韓半島)와는 전혀 관계(關係)가 없다.
〈그는 ‘조선족(朝鮮族)=한민족(韓民族)’이 아닌 이민족(異民族)으로 고려(高麗)에 귀화(歸化), 칼과 화살을 거꾸로 들고 역성혁명(易姓革命)을 일으켜 나라 이름을 “조선(朝鮮)”으로 개칭(改稱)하고, 천명(天命)을 받았다는 미사려구(美辭麗句)로 미화(美化)한 것이다〉
【천자국(天子國) 고려(高麗) : 민족(民族)이란 개념(槪念)은 없다. 천자(天子)는 모든 이민족(異民族)을 교화(交火), 사해(四海)는 모두 천자(天子)의 것이요, 그곳 백성(百姓)들은 천자의 백성(百姓)이었기 때문이다. 삼한통일(三韓統一)은, 통일환영(統一寰瀛)이며, 곧 천하통일(天下統一)로 태평만세(太平萬歲)를 외친 고려(高麗)는 천자국(天子國)이었음을 확인(確認)시켜주고 있다. 】
➨ 더 좋은 자료(資料)가 발굴(發掘)되어 그 실체(實體)에 사견(私見)이 아닌 고증(考證)이 되는 주장(主張)이 나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1편∼5편 / 끝]
2024년 09월 14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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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장문(長文)의 글이 되어 줄이고 또 줄이다 보니 좀 어색한 글이 되어버린 것 같네요.
다음 편은 전회에 예고해드린 대로 "조선의 장수 김응하(金應河)가 절사했다는 "심하(深河)"를 찾아, 과연 그 심하가 어디에 있었는가에 대해 알아보기로 합니다.
전회에도 몇 차레에 걸쳐 게재한 바 있는데, 이번에 이것들을 재정리, 추가 고증자료등과 함께 설명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사실 필자가 충격을 받은 것은 :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역사인식이 없는지를 새삼스럽게 느꼈기 대문입니다.
* 오늘날의 요녕성 심양 주변에 있는 하천가에서 막걸리를 따라 놓고 조선왕조 때 "조선의 장수와 사졸이 순국한 장소"라면서 제를 올린다는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 오늘날의 요녕성과 길림성 및 흑룡강성의 모든 지명과 산 이름, 강이름 등 모두는 1900년 이후에 손문과 그 추종자들에 의해 만들어지기 시작해 1950년 이후까지 계속 만들어져 정착된 것입니다.
* 1900년 이후의 이 정도 역사 정보도 모른다? 이건 참 ... ... 할 말을 잃게 합니다.
* 1900년 이후 "일제제국"은,
오늘날의 한반도 북방지대를 만주(滿洲)라고 지칭해 놓고, 이곳을 지배(차지)해 보고자 참모본부의 여러 기관등을 동원해 군장교와 민간인등을 철저하게 교육시켜 극비밀리에 파견하여 그곳의 모든 것들을 철저하게 조사, 보고서를 올리도록 긴급면령을 내립니다.
* 이때의 유출된 보고서에서 말하기를 :
[만주(滿洲 : 일제가 지칭했다) 땅은, 무주공산(無主空山)이며, 허허벌판이다. 그 넓고 넓은 땅에 산재해 살고 있는 자들은 토착민과 산적(도적?)들이 있는데, 인구는 수백만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그 넓고 넓은 땅에 산재해 살고 있기 때문에 사람은 보이지 않고 모든 것은 주인이 없는 無主空山(무주공산)이다.]라고 하면서 "광물자원은 어마어마해 말 할 수 없을 정도다"]라는 이야기까지 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 오늘날의 만주에 대해서 일제가 왜 눈독을 들였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주인없는 곳이었다는 이야기며, 지명조차 없었다는 이야깁니다.
본래 조선왕조의 땅이었으나. 조선이 쇠퇴하면서 지배권을 잃은 것과 같아, 누구도 황량한 그 넓고 넓은 땅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金應河(김응하)와 士卒(사졸)들이 후금병사들과 치열하게 싸우다가 절사(節死 : 절개를 지키다 죽은 일)했다는 "심하(深河)"는 '산해관=천하제일관'의 서(西) 1 리 또는 6리 지점에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문제는 "산해관=천하제일관' 역시 오늘날의 '산해관'이 아니라는 것이 핵심이 됩니다.
오늘날에는 "산해관"은 없습니다. '진황도'만이 존재할 뿐입니다.
후금(後金)은 동아세아에서 발흥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심하(深河)"와 함께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