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28일 [연중 제8주간 화요일]
마르 10,28-31
이 세상 모든 것을 100배 누리는 법
오늘 복음은 어제의 부자가 예수님의 뜻대로 가진 재산을 가난한 이를 위해 내어놓지 못하고 슬픈 표정으로 돌아간 다음 이야기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은 예수님을 위해 가진 것을 다 버렸다고 말하고 예수님은 그것이 무엇이든
당신과 당신 복음을 위해 내어놓는 것은 100배로 누리게 될 것이라고 하십니다.
사제나 수도자가 된 사람들은 이 말씀을 아주 쉽게 이해합니다.
예를 들면 저는 아버지께서 제가 사제가 되는 것을 반대하셨습니다.
만약 아버지의 뜻을 따랐다면 어땠을까요?
사제가 되어 만나는 수많은 아버님을 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는 집문서나 땅문서, 혹은 호적에 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누리는 삶을 의미합니다.
사제가 되면 세상에 있는 모든 사제관에서 잘 수 있게 됩니다.
수원교구의 황창연 신부는 잠비아에 엄청난 크기의 생태 마을을 조성 중입니다.
그런데 그 돈을 어떻게 조달할까요?
그분은 유튜브에 잠시만 필요한 액수만큼 모금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단숨에 20억이든, 30억이 모입니다.
그러면 바로 계좌를 닫아버립니다.
돈을 기부하고 싶었어도 기회를 놓친 이들은 다음 기회를 노려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신부님이 투명하다는 것이 드러납니다.
그러니 더 많은 이들이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이런 돈이 모이는 법칙은 단순히 종교적인 자선에서만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초밥 도시락을 팔아서 수천억대의 자산가가 된 김승호 회장은 이러한 원리를 ‘수각 이론’이라 하여 가르칩니다.
수각은 산 위에서 내려오는 물이 너무 빠르게 흐르지 않게 파 놓은 구덩이와 같은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 수각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이롭게 하도록 물을 잠시 모아두는 수각은 언제나 새롭고 풍부한 물을 가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어느 식당 요리사가 주인이 마음에 안 들어 주인을 망하게 하려고 양념을 팍팍 넣고 양도 많이 주었더니 장사가 더 잘 되어 주인이 더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타인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이에게 그 이로움이 더 모이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고 창조의 법칙입니다.
이것을 알면 무엇이든 부족함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선한 일을 하는 줄 알았으나 알고 보니 자기 이익을 챙기는 것이었다면 돈을 낸 사람의 마음은 어떨까요?
미국 에너지 기업 엔론(Enron)은 1990년대에 급성장하며 혁신적인 기업으로 주목받았습니다.
엔론은 재생 에너지와 같은 선한 일에 투자하는 기업으로 홍보되었으나, 실제로는 경영진이 회계 부정과 사기 행위를 통해 자신의 이익을 챙기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2001년 엔론의 부정행위가 폭로되면서 회사는 파산했고, 많은 투자자와 직원들이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저도 어떤 사람이 도와달라고 할 때 만약 그 사람의 통장에 많은 액수가 들어있고 고급 승용차나 운동을 즐기는 사람임을 안다면 도와주고 싶은 생각이 싹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왠지 모기에 피를 빨리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돈을 쓸 때 물건만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보화를 쌓듯이 좋은 일에 쓰이기를 원하지
다른 사람의 배를 불려주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모기에 피를 빨리는 느낌을 돈 주고 가질 필요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세상 것에 집착을 버리고 좋은 일을 향해 모든 것을 흘려버릴 마음은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요?
오늘 독서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가다듬고 정신을 차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받을 은총에 여러분의 모든 희망을 거십시오.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희망을 하늘에 두지 않으면 세상 것에 집착하게 되고 결국 가난하게 죽게 된다.
내 것은 아까워서 쓰지도 못하면서 더 모으려고만 합니다.
그러니 가져도 가난하게 삽니다.
그러나 가난하고 거룩한 이를 통해서는 주님께서 세상에 필요한 재물과 지식과 사랑이 충만히 지나가도록 배려하십니다.
그러니 내가 가지고 싶은 것을 아낌없이 이웃을 위해 내어주십시오.
내가 흘려보내는 것을 백 배로 가지게 될 것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5월28일 [연중 제8주간 화요일]
마르코 10장 28-31절
깊이 파묻힐 때
씨감자를 묻은 지 벌써 한 달 반 정도가 지났습니다.
번듯한 텃밭이 아니라 짜투리 땅에 남은 씨감자를 대충대충 심었습니다.
정말 볼 품 없는 씨감자를 묻으며 다들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몇 번 비가 오고, 쨍쨍 해가 뜨고를 반복하면서 다들 자신의 눈을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어떤 형제는 감탄사를 연발했습니다.
싹이 올라오고, 쑥쑥 자라나, 이제는 푸른 잎으로 무성한 제대로 된 감자밭이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뜻밖의 모습에 흐뭇해하며 머지않아 풍성한 결실을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눈에 비친 우리 역시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참으로 보잘 것 없고, 정말 부족해 보이는 ‘나’이지만 하느님께 ‘푹’ 잠길 때, 온전히 그분께 깊이 파묻힐 때 우리들의 상상을 초월할 축복과 은총이 뒤따를 것입니다.
오늘 베드로 사도가 아주 자신 있게, 무척이나 당당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보시다시피’란 어떤 말입니까? 아마도 이런 의미가 아닐까요?
‘스승님께서 잘 파악하고 계시는 것처럼’,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인정하는 것처럼’
그만큼 베드로 사도의 자기 버림과 예수님 추종은 철저한 것이었습니다.
적당 선에서가 아니라 온전히, 미지근한 것이 아니라 열렬히, 7-80%가 아니라 120% 투신하는 적극적 버림이요, 적극적 추종이었던 것입니다.
그 결과로 주어진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전적인 버림이 가져다준 충만한 자유였습니다.
전적인 투신이 가져다준 원초적이며 근원적 행복이었습니다.
비록 베드로 사도의 주머니 속에는 땡전 한 푼 없었지만, 그의 마음은 세상 온 천지를 다 얻은 충만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비록 베드로 사도의 현세적 삶은 가난과 굶주림과 박해의 순간들로 점철되었지만, 그의 얼굴은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비록 베드로 사도의 일상은 고통과 십자가의 연속이었지만 그의 눈은 벌써 이 세상 그 너머에 자리한 피안의 세계를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도 잘 버림으로, 그분께 푹 잠김으로, 120% 투신함으로 인해 행복한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8주간 화요일 강론>
(2024. 5. 28. 화)(마르 10,28-31)
<예수님 때문에 모든 것을 버리고>
“그때에 베드로가 나서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어머니나 아버지,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녀와 토지를 백배나 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마르 10,28-31)”
1) 여기서 베드로 사도의 말 가운데에 있는 ‘버리고’ 라는 말은, “버려두다. 그대로 놓아둔 채 떠나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 사도들의 ‘마음’이
‘세속의 일과 자신의 삶의 모든 것’에서 떠났음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라는 말은, 세속의 모든 것에서 벗어나서, 또 세속의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되어서,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따라나섰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말은 ‘완전한 비움, 완전한 이탈과 자유’를 나타냅니다.>
필리피서에 있는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은 그 ‘버림’과 ‘비움’이 어떤 것인지를 잘 나타냅니다.
“나에게 이롭던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두 해로운 것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나의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아는 지식의 지고한 가치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을 해로운 것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지만 그것들을 쓰레기로 여깁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분 안에 있으려는 것입니다.
율법에서 오는 나의 의로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로움, 곧 믿음을 바탕으로 하느님에게서 오는 의로움을 지니고 있으려는 것입니다.
나는 죽음을 겪으시는 그분을 닮아, 그분과 그분 부활의 힘을 알고 그분 고난에 동참하는 법을 알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어떻게든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살아나는 부활에 이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필리 3,7-11).”
사도들이 예수님을 따라나설 때 ‘모든 것’을 버린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 외에는 모든 것이 다 무의미하고 가치가 없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것’을 얻으려고 ‘허무한 것들’을 모두 버린 것입니다.>
2) 예수님께서는 ‘영원한 것’을 얻기 위해서 ‘허무한 것’을 모두 버리는 일에 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마르 8,34ㄴ-38).”
이 말씀에서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온 세상을 얻는다고 해도 그것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데에 아무 소용이 없다.”입니다.
아무 소용이 없으니까 모두 버리는 것입니다.
3)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라는 말씀은,
‘버림’ 자체보다 ‘버리는 이유와 목적’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유도 목적도 없이 그냥 버리는 것은 ‘의미 없는 일’, 또는 ‘아무것도 아닌 일’입니다.
<맹목적인 무소유는, 가치도 의미도 없는 일입니다.>
신앙인이 예수님을 따르면서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오직 그 하나의 목적과 이유 때문입니다.
<종교와 신앙은 인간 세상의 복잡한 현실을 외면하고 혼자서만 편안하게 지내려고 하는 ‘현실도피처’가 아닙니다.>
4) 30절의 “현세에서 박해도 받겠지만”은, “반드시 박해를 받는다.”가 아니라, “박해를 받을 수도 있다.”입니다.
<이 말씀의 바로 뒤에 “내세에서는...”이라는 말씀을 붙여서 읽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현세에서는 박해를 받을 수도 있지만, 내세에서는 모든 것을 백배나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이다.”>
여기서 ‘백배’ 라는 말은, 풍성함, 충만함을 상징합니다.
31절의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라는 말씀은, 현세에서의 처지와 하느님 나라에서의 처지가 역전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루카복음 16장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나오는 부자와 라자로처럼 처지가 바뀌게 된다는 뜻입니다.
“부자가 저승에서 고통을 받으며 눈을 드니,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곁에 있는 라자로가 보였다. 그래서 그가 소리를 질러 말하였다.
‘아브라함 할아버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자로를 보내시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제 혀를 식히게 해 주십시오.
제가 이 불길 속에서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말하였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와 너희 사이에는 큰 구렁이 가로놓여 있어, 여기에서 너희 쪽으로 건너가려 해도 갈 수 없고 거기에서 우리 쪽으로 건너오려 해도 올 수 없다.’(루카 16,23-26)”
그처럼 이쪽 세상에서 돈과 권력으로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심판, 구원, 영원한 생명 등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이 그저 혼자서만 잘 먹고 잘 살았던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그 나라의 밖에서’ 그 나라의 안을 바라보기만 하면서, 후회만 하게 될 것입니다(루카 6,24-25).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