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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본 환단고기!
1st 글쓴이: 송원길(MARO)
2nd 하나로 옮긴이: 하창조(cjha)
3rd 모은것에서 문단정렬: 김수구
4rd 이것들 한류열풍 게시자: Untouchable -_-
[ 반론#1 ] 김형석님께. 진본(?) 규원사화
저는 80학번이며 현재 직장인입니다. 시간이 그리 많지는 않아서 Hitel에 자주 들르기는 곤란하지만 시간을 쪼개서 몇자 적고자 합니다. 이상욱님이 인용한 "조인성저 《규원사화》와 《환단고기》"에 대한 반론을 고평석님의 글을 빌어 쓰겠습니다. 글에 앞서 우선 몇마디 개인적인 의견을 적겠습니다.
그 시대에 직접 살아서 그 사건의 전말을 전부 목격했다면 모를까, 남의 손에 의해 기록된 글을 100% 믿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필자는 삼국사기, 삼국유사를 100% 믿지 못하며, 사기를 전부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환단고기, 규원사화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각각의 역사서에는 사실과 역사서를 서술한 사람의 사관, 그리고 여기에 어느정도의 가필이 섞여있다고 봅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우리역사의 본모습이지만 지금 눈앞에 과거가 있지 않기에 우리는 현재 확인할 수 있는 유물과 역사서에서 과거의 진면목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개인이 우리 역사에 관한 모든 유물과 역사서를 통독하고 파악한 상태에서 자기 의견을 말한다고 믿기는 어렵다고 봅니다. 각자 알고 있는 정보를 서로 공유하면서 협력한다면 우리 역사의 진면목은 아마 빠른 시일내에 우리에게 달려오리라 생각합니다.
조인성저 "《규원사화》와 《환단고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있습니다.
"... 그렇다면 《규원사화》는 1910년 이후에 쓰여진 것이 된다. 《규원사화》가 1928년에 나온 김광의 《대동사강》에 최초로 인용되고 있음을 보며, 그 저술연대는 1928년 이전 그리 멀지 않은 시기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내용의 곳곳에서 환웅과 단군에 대한 신앙이 드러나 있으므로, 그 저자는 단군신앙을 가진 근대 민족주의자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만약 1910년 이전에 발행된 《규원사화》가 있다면 조교수의 논리는 희박해지리라 봅니다. 하물며 원본 《규원사화》가 있다면...
참고로 조인성 교수의 글이 게제된 책은 "《한국사 시민강좌 제2집》(1988년) 71p-88p"이며, 동 잡지는 이병도 교수의 1회 제자인 이기백 교수가 책임편집을 맡고 있습니다.
인용 시작합니다. --------------------------------------------------
《규원사화》 북애노인 친필본
고평석(스님이면서 홍익사상, 고대사 연구가)
머리말
북애노인 저 《규원사화(揆園史話)》를 조작된 위서(僞書)라고 주장하는 기본 학계에서는 실증사학을 기본으로 하여주기 바란다. 실증사학의 단절된 역사논리는 쓸모없는 휴지조각과 다를 바 없다고 나는 단정한다.
1989년 10월 20일 10시 정각, 경상남도 마산시 경남대학교(전화연락:(0551)45-5000) 조인성 교수님 연구실에 전화를 걸어서 규원사화에 대해서 5분간 문의하였다. 문의내용은 "지금도 《규원사화》를 위서(僞書)로 보고 계십니까?" 라고 여쭈었더니 《규원사화》가 위서라는 생각에는 지금도 변함없으며 《규원사화》가 1920년 후반에 민족종교 내지 구국충정자에 의하여 이루어진 위서(僞書)가 분명하다고 밝혔다.
필자는 다시 문의하였다.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귀중분 629(고2105-1) 책자는 본신 적이 있습니까?" 문의하자 본적이 없다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말은 들은 순간 필자의 마음이 괴로웠다. "이럴수 있느냐" 하는 안타까운 심정과 서글픔 뿐이었다.
있는 자료도 확인 아니하고 속단하면서 몇년 동안이나 《규원사화》 위서론(僞書論)을 폈던가. 국사(國史)가 이처럼 엉터리 식으로 진행되어도 되는 것인지, 의혹과 분노 속에서 이해하는 것도 한계점에 이르러, 필자 자신 스스로 결심하고 다짐하였다. "붓을 들어 알려야겠다. 국민 전체가 알 수 있도록 하자. 국민 모두가 알게 하여 사대주의, 식민사관 뿌리를 뽑아 발붙이고 의지할 곳이 없게 하자." 굳게 다짐하면서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머리글을 장식한다.
북애노인 《규원사화(揆園史話)》 친필 원본
1. 소장 장소 : 국립중앙도서관
2. 도서열람번호 : 귀629(고2105-1) 1책
3. 제작년도 : 1675년 조선조 숙종1년 3월 상순
4. 크기 : 24.7*16.6cm
* 내용
1) 단군 47대 임금 기록
2) 당시 시대의 시국정세
3) 사대사관 타파 간절히 갈망
4) 불타는 충정 구국 애국정
5) 만주 옛 조국땅 회복 간절히 희망
6) 사료 수집을 위해 많은 고생
7) 민족주체사상 회복 운동
5. 1972년 11월 3일 이가원, 손보기, 임창순, 고서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조선조 숙종 1년(1675년 을묘)에 제작된 진본으로서의 가치성이 인정되어 국립중앙도서관 귀중본으로 지정함.
6. 구입날짜 : 1945년 말부터 1946년 1월 사이
7. 등록일자 : 1946년 5월 25일
8. 구입장소 및 가격 : 100원에 책방에서 구입(김수일이라는 사람으로부터)
* 국립중앙도서관 고서 별도 특별관리목록 대장에 기록되어 있음을 확인(1989년 11월 11일)
9. 귀629(고2105-1) 1책을 북애노인 저자가 직접 쓴 친필로 필자는 단정한다. 이에 대해 반론들이 함께 하기를 바란다.
《규원사화(揆園史話)》 중요 줄거리 내용
1. 단군(檀君) 47대 1195년 임검님의 재위(在位) 년수와 치적 기록
2. 사대주의 사상에 젖은 유학자들을 통박
3. 민족의 장래를 염려하고 유리 민족의 주체의식을 고취시키고 있다.
4. 임진왜란[1592년(선조25)~1598(선조31)], 병자호란[1636(인조14)~1637(인조15)]을 겪은 어려웠던 당시 사회상을 기록하고 있으며, 만주 옛 고토(古土)를 찾으려고 북별 출병계획에 민중 모두가 하나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5. 《규원사화》를 실증사학으로 정확히 기록하기 위해 엄청난 고생을 하였음을 쉽게 느낄 수 있다.
북애노인 《규원사화(揆園史話)》 필사본 현황
1.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 도서열람번호 : 2121.3 1책 2) 필사년대 미상
2.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1) 도서열람번호 : 2105.1 1책
3. 동국대학교 도서관 소장 1) 권상노 소장본을 필사
4. 서울대학교 도서관 소장 1) 방종현 소장본을 등사
5.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도서관 소장 1) 이선근 소장본을 등사
번역 주해된 《규원사화(揆園史話)》
1. 신학균
1) 단기 4301(1968) 10월 3일에 번역 주해 발행
2) 21년 전[4322년(1989년 10월 3일)],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귀629를 원본으로
3) 발행처 : 대동문화사
4)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열람번호 : 2105-81-0.2
5) 신학균 선생님의 본적은 충청북도 청원군 오창면 성산리 117번지
6) 1967년 4월 ~ 1973년 4월까지 국립중앙도서관 사서과장 역임
7) 신학균 선생님의 《규원사화》 역자서문(譯者序文)에서 북애자가 규원사화를 지으면서 피나는 노력이 역역히 엿보이고 있다고 하였으며, 《규원사화》 저자의 교훈을 거울삼아 국사 광복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단기고사(檀紀古史)》와 함께 《규원사화》는 우리의 상고사를 재정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고증하고 있다.
2. 고동영
1) 1986년 5월 20일 번역 발행
2) 발행처 : 도서출판 자유문고
3)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열람번호 : 911-021 북728 2
《규원사화(揆園史話)》에 대해 위서(僞書)라고 논리를 펴는 학자
1. 조인성(경남대학교 사학과 교수)
1) 논문 "현전 《규원사화》의 사료적 성격에 대한 검토"
2. 이병도(현재 고인)
1) 1986년 12월 "이병도 박사의 9순 기념 한국사논총"
-> "현전 《규원사화》의 사료적 성격에 대한 검토"
3. 송찬식(국민대학교 교수)
1) "월간중앙 1977년 9월호"에 "위서변"이란 논문 기고
《규원사화(揆園史話)》를 위서(僞書)라고 주장하는 공통된 의견 내용
1. 성서에 나오는 천주라는 용어가 효종, 숙종 시대에 없었다.
2. 1920~1930년대에 단군 교도들에 의해 제작 편집되었다고 뜻을 같이하고 있다.
《규원사화(揆園史話)》를 위서(僞書)라고 하는 논리에 답하는 글
답변자 : 고평석(홍익인간사상, 고대사연구가)
1. 천주라는 문자는 임진왜란 때 왜놈들과 같이 들어온 서양 신부들에 의해 선조[1586(인조1637)] 당시 이미 천주(天主)라는 용어는 선비학자들 사이에는 보편화되어 있었으며, 《규원사화》에 기록된 용어가 지금 것과 비슷한 것이 몇 가지 있다고 지적하였는데 이러한 견해는 고어를 참고하지 않은 상태에서 문제가 잘못 제기되고 있다.
음이라는 것은 변해 전해진 것도 있고, 지금이나 옛이나 고유명사로 그대로 원형을 위하는 것들이 많이 확인되고 있다. 예) 경주, 쌍놈, 종, 상감, 산 등등 - 고어(古語)사전 참고 바람
2.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귀629(고2105-1) 도서가 이가원, 손보기, 임창순 고서전문위원의 심의과정으로 숙종2년에 제작된 것으로 판명된 이상 1920~1930년도에 제작 발행되었다는 논리는 다양한 자료를 폭넓게 참고하지 않은 결과라 단정하며 연대미상의 필사본만 접하고 국립중앙도서관 소장 귀629(고2105-1)본을 직접 접해보지 못한 결과로 단정한다.
3. 1675년에 지은 《규원사화(揆園史話)》을 위서(僞書)라는 선입감을 전제하고 대강 검토하다 보니 《규원사화》에 담긴 금쪽같은 옛 문헌을 한 부분도 확인못하고 있다. 때놈(중국인) 사마천이 지은 《규원사화》가 있었더라면 아무 군소리 아니하고 문제 제기도 없었을 거라고 단정한다. 문제를 제기한 학자들 스스로가 사대주의, 식민사관, 왜놈사관임을 자청하여 고증하여 주고있다. 이에 대한 실증학적 근거를 제시하겠다.
《규원사화》 서문(序文) 저자의 말 가운데 "다시 평양으로 돌아오니 마침 조정에서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의 사당을 세운다고 하였다. 장군은 수나라 군사 백여만을 무지른 고구려 대신(大臣)이다." 운운하고 있다. 만에 하나 후래에 어느 누구에 의해 조작된 위서(僞書)라 한다면 평양에 을지문덕 사당을 세운다는 기록은 〈숙종실록〉 6권(숙종3년 정사11년 을유)에 기록된 내용을 무슨 재주로 1920년이 지나서 조작하면서 서문에 기록할 수 있었느냐가 의문시 된다. 《조선왕조실록》이 어느 때에 공개되었는지 아는지 모르는지 단순들 하다. 왕들도 보지 못한 실록을 무슨 재주로 일반 서민이 찾아내어 숙종 시대에 맞추어 놓느냐 하는 문제이다.
8.15 광복 이전에 《조선왕조실록》이 일반에게 공개되지 아니하였으며 국사편찬위원 및 고서전문연구자들 모두가 하나같이 뜻을 같이 하고 있다. 1920~1930년도에는 《조선왕조실록》은 전문연구가 몇 사람 이외는 어느 누구도 볼 수 없었다고 고증하고 있다.
맞추려고 계획하였으면 맞추기 쉬운 문헌을 골라 철저히 쉽게 맞출 일이지, 한마디로 돌머리들이다. 왜놈들이 조작해 놓은 왜놈 조선사에 의해 민족사가 왜곡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천하가 아는 사실이다. 왜곡의 근원이 분명한 지금 왜놈들이 조작해 놓은 왜놈 조선사를 비판한 글은 한 글자도 보지 못했다.
민족사를 망치는 일은 한두가지에 끝나지 않고 있다. 그대들의 마음 다시 한번 살피노라, 왜놈들 손자인가, 때놈들 아들인가. 사마천 《사기》를 번역 주해하면서 〈공자세가조〉에 기록된 안씨 여인과 야합불륜에 의해 낳은 자식이 공자라는 사실을 번역 주해한 학자는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국조이신 단제 천자님께서 세째 여인 첩의 불륜야합 자식이었다면 지금쯤 국조님(시조할아버지) 이름도 사용 못하게 온갖 잡소리를 늘어놓았을 것이다.
맺는말
국사 광복 및 국정교과서 개편 과정에 있어서 자료가 없어서 못한다고 하는 분들께 알려드린다.
(1) 국립중앙도서관
(2) 서울대학교 도서관 규장각
(3) 정신문화원 도서관
(4)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5) 고려대학교 도서관
(6) 연세대학교 도서관 등
전국 각 대학 도서관 자료만 착실히 조사하면 자료가 무궁무진하다는 것을 쉽게 알게 될 것이다. 민족 고대사를 복원하는데 있어서 자료가 절대 부족하다고 느끼신 분께서는 도서관을 찾아주기 바란다. 《규원사화》 고증부터 하여주기 바란다. 국립중앙도서관을 직접 찾아가서 귀629(고2105-1) 1책자를 확인하고 1946년 5월 25일 등록일자가 찍혀있는 2쪽을 확인하면서 《규원사화》 고서가 과연 얼마나 오래된 고서인가 스스로 스스로 감정하고 고증하면 되는 것이다. 조작이 되었더라도 300년 전에 된것임이 분명하다고 필자는 단정하며 확신하면서 끝을 맺노라.
(이하 P195-P206 까지는 《규원사화》 원문 복사 게재됨)
* "한배달 6호 1989년 겨울호, 사단법인 한배달(02-738-6198), P190-194에서 전제
인용끝입니다. --------------------------------------------------
물론 저도 고평석님이 주장하는 《규원사화》의 원본을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저의 집에 100년이 넘은 책이 몇 권 있기 때문에 고서를 찾아본 사람은 책의 나이(?)를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고평석님이 주장하는 책은 고평석 개인이 감정한 것이 아니라 이가원, 손보기, 임창순 고서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친 책이니 쓰인 연대의 근거가 확실하다고 봅니다.
이상욱님의 글 중에서 "... 만약 그 지명이 장춘이라 불리기 이전에 상춘이란 이름으로 불리었다면 조인성님께서 절대 그러한 논거를 제시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역사학자들이 그 정도도 생각하지 않고 연구한다고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 라고 한 대목에 대한 생각에 변화가 없는지 궁금하군요.
[ 반론#2 ] 김형석님께. 문화의 고증
"문화(文化)"에 대한 고증
이상욱님은 ""문화(文化)"라는 단어가 20세기 초에 우리나라에 전해졌다."는 조인성 교수의 글을 인용하여 《규원사화》가 위서라고 했습니다. 《규원사화》가 위서라고 주장한 박관용 교수(역사비평 90년 2월호)는 "웅비(雄飛)"라는 말이 최근에 쓰여진 것이라 했습니다. 물론 제가 올린 글(#1)에서 고서심의위원회에서 조선조 숙종 1년(1675년, 《규원사화》가 쓰여진 시기)에 제작된 《규원사화》를 확인한 이상 "문화", "웅비", "해동역사", ... 또한 송찬식 교수(국민대)의 "위서변" 등등에 대한 반론의 필요성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내용에 대한 반론을 어느정도 준비하고 있지만, 지면 관계상 이상욱님의 글에서 많이 나온 "문화"라는 단어에 대해서만 이야기할까 합니다.
"이상시 저, 《단군실사에 관한 고증연구》, 고려원, 1990년 판, p255-266" 에서
--------------------< 인용시작 >----------------------------------------
... 중략...
그런데 동양에 있어서 "문화(文化)"라는 어원은 원래
聖人之治 天下也, 先文德而後武力, 凡武之興爲 不服也, 文化不改然後 加誅
라는 "한(漢) 유향(劉向) 저(著), 《설원(說苑)》, BC77~BC6"의 〈지무편(指武篇)〉의 구절에서 유래된 것인데, 그 뜻은 "형벌이나 위력(무력)에 의하지 아니하고 문치를 통하여 인지를 깨닫게 하여 교화시킨다."는 즉, 문치교화(文治敎化) 또는 문덕교화(文德敎化)의 준말로 널리 사용하여 왔다. 그러다 조인성의 주장처럼 20세기 초에 이르러 서양에서 이 용어가 정치, 경제, 예술 등 신생용어와 함께 일본을 통하여 우리나라에 들어와 Kulture 혹은 Cultrue 즉, "자연현상을 이용하여 인류의 이상을 실현해 나아가는 정신활동"의 뜻으로 전용되어 주로 사용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규원사화》〈단군기〉에 기록된 이 "문화(文化)"라는 용어는 Kulture 혹은 Culture 라는 근대적인 의미로 씌어진 것이 아니고 동양(東洋)에서 재래부터 사용하여 오던 "문치교화(文治敎化)"의 뜻으로 사용된 것이 분명하다. 그 이유는
今若以諺書 倂用則 必無是弊而草野 愚夫 亦可易曉 <文化>之啓發 更可速矣
"만약 한자와 언문을 병용하였더라면 이러한 폐단이 없어지고 초야에 묻힌 우부라도 쉽게 깨달을 수가 있어 문화의 계발이 더욱 빨랐을 것이다."
라는 《규원사화》의 원문에 비추어 보거나 저술 당시의 사정을 놓고 볼 때에도 《규원사화》의 저자인 북애자가 단군이라는 용어를 "만약 한문으로 쓰지 않고 국문(그 당시 언문)도 같이 사용하였더라면 어리석은 필부도 단군이 박달임금의 뜻이라는 것을 쉽게 깨달아서 세상이 더 빨리 계발되었을 것"이라는 의도로 기술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원문의 뜻과 이치에도 합치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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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에 대한 또다른 예도 있지만 생략하겠습니다. 그런데...
만약, 《설원》이나 《문선(文選)》 같은 책에 "문화"라는 단어가 실리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과연 《규원사화》에서 쓴 "문화"라는 단어가 일본 사람보다 먼저 썼다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었을까요?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모든 단어가 반드시 중국 사람이 쓴 후에야 연대적 평가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나라 고서의 내용 중에는 외국 사람보다 먼저 멋진 단어(?)를 쓸 수도 있을텐데요...
[ 반론#3 ] 김형석님께. 천남생묘지에 대해...
이상욱님은 다음과 같은 조인성 교수의 글을 들어 《환단고기》가 위서라고 주장했읍니다.
인용시작 --------------------------------------------------
... 중략 ...
"연개소문은 개금이라고도 하는데 성은 연씨이다. 그 선조는 봉성인이다. 아버지는 태조라고 하고 할아버지는 자유라고 하며 증조는 광이라고 한다. 모두 막리지였다." (《환단고기》中《태백일사》-〈고구려국본기〉)
이것은 《조대기》로부터 인용된 것이다. 하지만 《태백일사》에 인용된 《조대기》는 다음에 보게 될 바와 같이 근대에서 조작된 것이다. 그런데 연개소문의 조부의 이름이 자유와 태조라는 것은 1923년 중국 낙양에서 연개소문의 아들인 천남생묘지가 발견됨으로써 비로서 알려졌다. 그러므로 《태백일사》는 1923년 이후에 작성된 것이 된다.
... 이하 생략 ...
인용 끝 --------------------------------------------------
다음은 비슷한 내용에 관한 이도학 교수의 글입니다. (민족지성 1986년 11월)
인용시작 --------------------------------------------------
... 중략 ...
《태백일사》〈고구려본기〉에는 장수왕의 연호를 건흥이라 기록한 대목이 보인다. 이 "건흥"이라는 연호는 1915년 충북 중원군 노은면에서 발견된 불상의 광배명에 "건흥5년 병진"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었다. ... 중략 ... 장수왕 즉위 5년은 병진이 된다. 따라서 동 병진년 불상 광배와 《태백일사》를 통해 건흥이 장수왕의 년호다. 라는 새로운 지견을 추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 《태백일사》에는 연개소문의 아버지이름을 대조, 할아버지는 자유(子游)라 하고 증조할아버지는 "광"이라며 연개소문의 가계를 《조대기》에서 인용하고 있다. 이 가운데 연개소문의 조부 및 증조부의 이름은 《태백일사》를 제외하고는 어떤 문헌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그런데 1923년 중국 남양에서 발견된 연개소문의 아들 천남생묘지(泉男生墓誌)에는 천남생(泉男生)의 증조부의 이름을 자유(子游)로 명기하고 있어서 《태백일사》의 진가가 드러나게 되었다. (민족지성 p.208)
인용 끝 --------------------------------------------------
똑같은 사건이나 사실을 접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은 자기의 지식과 사상 또는 종교에 따라 그 해석을 달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문제가 자신의 생활철학이나 생존권에 관련이 있다면 그에 대한 해석 역시 심각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천남생묘지에 대해 조인성 교수는 위서의 증거라고 단정했고, 이도학 교수는 《태백일사》의 진가를 높이는 것이라 했습니다. 바로 이 차이에 "우리역사"에 대한 논란의 이유가 있다고 봅니다. 물론 단순한 "학자의 의견"이기 때문에 의견 자체로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에 관한 문제는 음악이나 미술같은 예술과는 달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기 때문에 이를 다루는 분들의 경각심이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김형석님은 #480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실었습니다.
"한 분이 《환단고기》의 위서성을 주장하자 많은 분들("자신을 민족주의자라고 생각하는 국수주의자들")이 그 분을 식민사관에 찌든 문외한으로 몰아 세웠습니다. ..."
김형석님이 말한 "국수주의자"란 무엇을 뜻하는 것입니까? 2차 대전 때의 독일인이나 일본인 혹은 지금 독일의 네오-나치즘을 표방하는 사람들과 같이 취급하는 것입니까? "자기 민족의 우월성을 극단적으로 강조하여 반문화적이고 반인류적인 행동으로 사회에(또는 주변국가에) 해악을 끼치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가 왜 조선왕조 때 중국과 굴욕적인 외교를 했으며, 왜 일본에 의해 나라가 빼앗기고 국가의 운명이 단절될 뻔한 절대절명의 위기와 치욕을 당했습니까? 일제 시대의 《조선사 편수회 사업개요》를 본 사람은 여러가지 생각이 있을 줄로 압니다. "조선사 편수회"에 대한 이야기는 시간 관계상 다음 기회로 미루고 1922년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교육시책을 설명한 글을 싣겠습니다.
인용시작 --------------------------------------------------
"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 역사,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하라. 그럼으로써 민족혼, 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그들의 조상과 선인(先人)들의 무위(無爲), 무능(無能), 악행(惡行)을 들추어내, 그것을 과장하여 조선인 후손에게 가르쳐라.
조선인 청소년들이 그들의 부조(父祖)들을 경시하고 멸시하는 감정을 일으키게 하여,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게 하라. 그러면 조선인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될 것이며 반드시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때 일본의 사적, 일본의 문화, 일본의 위대한 인물들을 소개하면 동화(同化)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일본이 조선인을 "반(半) 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
인용 끝 --------------------------------------------------
역사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가능한 한 자신의 감정을 억제해야 합니다. 필자 역시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조선사 편수회에 관한 글을 보면 감정의 변화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참고로, 우리나라 사학계에서 학문적으로 일본이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타민족의 역사를 기술하는 행위(일본의 조선사 편수회에서 책을 조선사를 만든 행위)"에 대한 비평이나 비판은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이 만든 조선사35권의 내용과 "우리나라 국정교과서"와 비교한 논문 역시 없는 것으로 알고 있읍니다.
[ 반론#4 ] 임승국 교수의 "반론인용"
이상욱님은 자신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규원사화》와 《환단고기》를 운운하시는 재야사학자들이 엄밀한 문헌비판의 수준으로 《규원사화》와 《환단고기》를 분석하여 그것이 고대에 만들어졌음을 고증하신 분이 없다는 것이다. 기껏해야 우리의 얼이 어떻고 우리의 혼이 어떻고 하신 글을 쓰셨을 뿐이다. 나는 고대 문헌 자체를 엄밀히 비판할 능력은 없지만 그런 문헌을 분석한 글을 보면 그 문헌을 분석한 분이 어떠한 연구로 그런 글을 쓰셨는지를 분별할 수 있는 눈은 조금있다. 《한단고기》(정신세계사본, 임승국저)는 이것 역시 엄밀한 역사학적 방법론에 기초한 글이 아님을 분명히 말할 수 있다. ..." 라고 했습니다.
필자는 임승국 교수를 본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얼마전에 KBS 제1라디오에서 밤 11시 30분부터 25분간 씩 수십회를 방송한 육성은 들어 보았습니다. 제 집에는 그 당시 녹음했던 Tape가 어느정도 있습니다. 필자가 임승국 교수의 강연을 듣고나서 느낀 점과 이상욱님의 글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아래에 인용하는 글과 함께 이상욱님이 "분명히 말할 수 있다"는 임승국 교수의 저서에 대한 평을 실어주셨으면 합니다.
다음은 임승국 교수의 글입니다.(월간 "자유" 1990년 11월) 이글은 1990년 2월 "역사비평" 2월호에 쓰인 ""《환단고기》, 《규원사화》에 위작 많다."에 반박한다."는 글의 일부입니다. 전부를 인용하기에는 양이 너무 많아서 시간관계상 일부만 인용하여 죄송합니다.
인용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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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물귀신 박광용(교수)은 들으라! 이도학 교수의 말처럼 "《태백일사》의 진가가 들어나게 되었다."는 이 고백이 어째서 거꾸로 《환단고기》를 1923년 천남생(泉男生) 묘지의 발견 이후의 저술이라고 단정하였다."고 이 교수를 물고 늘어지는가? 그렇다면 이교수의 말처럼 "건흥5년 병진"이라는 불상의 광배명이 발견된 1915년 이후에 쓰여졌다고 이도학 교수의 글을 악날하게 역으로 물귀신 마냥 물고 늘어질 참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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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사를 전공하는 학자 주제에 《환단고기》, 《규원사화》가 어떻다고 회자거릴 자격이 있느냐? 박교수는 이글에서 1940년 전후 시기에 이유립에 의해서 저술되었고 1940년대 후반에 《환단고기》는 완성되었을 것이라고 사뭇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다. 묻노니 박교수는 이유립 옹을 만나 본적이나 있는가? 만약 이용(이유립)이 작고하지 않고 살아계셨다면 박교수의 글을 읽고 어찌 나오셨을까. 생각해 보면 관운장의 전사통지를 받은 의제 장비의 진노를 연상케하여 저절로 홍소를 금할길 없다. 그리고 위의 단정처럼 1940년대 이후의 저술 운운하는 넋두리는 이옹(이유립)을 가까이 지내봐서 잘 아는 사람이면 아무도 《환단고기》가 그의 장난에 의해서 생겨난 작품이라고 망언을 농하진 않을 것인데 박광용 교수가 이따위 글을 쓴 것을 보니 이옹을 만나본 적이 없다고 단정지을 수 밖에 없다.
학자에겐 풍기는 학풍이란 것이 있고 문사에겐 내어뿜는 문채라는 것이 각기 다르기 마련이다. 세익스피어의 글과 볼테를의 문체가 다르듯이 같은 상고사 학자라도 신채호의 글과 위당 정인보의 글이 다르다. 이유립 옹이 《환단고기》를 위작할 만한 학인이었다면 아마도 그의 학문은 지금쯤 더욱 빛을 발했으리라. 이유립 옹이 쓴 글은 한문으로 된 것은 물론 국한문병용의 서찬도 일반이 잘 이해할 수 없는 글이었다. 따라서 고대사학의 기관지 구실을 해온 본 자유지에 다른 학자의 글은 자주 실렸으나 옹의 글은 거의 실리지 않았던게 현실이었다. 그런데 《환단고기》의 저술이라니 이는 그의 학풍을 아는 사람이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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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teo Ricci의 에서 비롯된 "삼위일체"를 본따서 《환단고기》, 《규원사화》의 저자가 "삼위일체"를 만들었다고 한 박교수는 ...중략... "삼신일체론"이 기독교의 삼위일체론에서 비롯된다고 사뭇 단정적으로 말하지 말고 사기봉선서(약 BC100년 전에 저술된 책)나 한서 율력지에 나오는 글을 박교수는 사학교수라면 먼저 생각했어야 한다. 삼일이란 말도 대종교의 경전에 삼일신고가 있고, 여기서 "삼일"은 천신, 지신, 태신을 말한다고 하는 사기봉선서의 기록에 의당 주목해야 학자다운 연상작용이 아닌가.
古者天子三年一用太牢詞 禪三一天一地一太一 (《史記封禪書》)
인용 끝 --------------------------------------------------
첫댓글 좋은 글 잘 봤습니다.^^
1136글 없어졌네 -_-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