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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아들 솔로몬아
역대상 28:5-10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부활절 다섯 번째 주일이다. 그리스도교회 전통인 부활절 인사를 나누자.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주님은 ‘정말’ 부활하셨습니다.”
오늘은 어린이주일이다. 이춘기라는 분이 쓴 일기에 1960년대 어린이주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린이날이면 온 교회들이 교파를 초월해 아이들을 함께 데리고 나와 꽃주일 행사를 했어요.” 교회별로 행사를 하는 지금과는 다른, 온 동네 교회가 함께하는 참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어린이는 저마다 가정의 몫이지만, 우리 사회 공동의 몫이기도 하다. 그래서 사회복지가 발달한 스웨덴은 이미 40년 전부터 “모든 아이는 모두의 아이”라고 하였다. 그런 국민적 공감대가 보편복지의 틀을 만든 것이다. 아프리카라고 남다르지 않다. “온 마을이 나서서 아이 하나 키운다”는 유명한 아프리카 속담이다. 얼마나 소중한 사랑인가.
어린이주일에는 특별한 영적 의미가 있다. 예수님은 어린이를 하나님 나라의 주인으로 부르신다. 어린이들의 영적 어드밴티지를 인정하신 것이다. 무슨 의미일까? 어른인 우리를 향해 내 마음 속에 억눌려 있거나, 자의식 안에 부끄러워 숨어있는 어린이 마음을 불러내 주시려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 사람의 존재로서 사랑스럽고 소중한 내 삶을 만져주시려고 하신다.
그런 어린이 마음을 어떻게 불러낼 수 있을까? 내가 내 부모에게 특별한 존재이듯, 하나님의 은총의 자녀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1)
본문은 다윗이란 아버지가 자신의 대를 이을 자랑스러운 한 아들을 소개한다. 그 아들의 이름은 솔로몬이다.
“여호와께서 내게 여러 아들을 주시고 그 모든 아들 중에서 내 아들 솔로몬을 택하사 여호와의 나라 왕위에 앉혀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하려 하실새”(5).
아들 솔로몬은 다윗의 왕위를 이어 받을 임금으로 부름 받았다. 그는 아버지가 보기에 신출내기이다. 불안불안 할 것이다. 그래서 신신당부한다.
아버지 다윗과 아들 솔로몬을 비교해 보자. 아버지 다윗은 어려서 목동으로 자랐고, 전쟁터에서 잔뼈가 굵었으며,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이다. 그런데 솔로몬은 왕궁에서 태어나 왕자로 성장하였다. 흙수저와 금강석수저의 차이다.
다윗은 왕이 되었어도 왕궁보다는 전쟁터와 정복지에서 더 많이 지내면서 세상의 온갖 험한 꼴을 본 사람이다. 게다가 범죄한 다윗은 하나님께 흠씬 두드려 맞았다. 그러니 정신 바짝 차렸을 것이다.
그리고 회개하고 얻은 아들이 바로 솔로몬이다. 다윗은 그 아들의 이름을 “여디디야”(삼하 12:25)라고 지었다. 여디디야는 ‘여호와께 사랑을 입음’이란 뜻이다. 솔로몬은 참 반듯하게 자랐다. 아버지 다윗을 쏙 빼어 닮았다. 무엇보다 다윗 왕권 계승자로서 솔로몬은 자신의 본분을 잘 알고 있었다.
다윗이 경험한 바에 따르면 하나님과 관계가 흔들리면 임금의 지위도 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호된 시련을 겪으면서 하나님과 관계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명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들 솔로몬에게 당부하고, 또 당부한다.
“내 아들 솔로몬아 너는 네 아버지의 하나님을 알고 온전한 마음과 기쁜 뜻으로 섬길지어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마음을 감찰하사 모든 의도를 아시나니 네가 만일 그를 찾으면 만날 것이요 만일 네가 그를 버리면 그가 너를 영원히 버리시리라”(9).
왕 위에 오른 솔로몬은 겸손히 여호와의 법도대로 행하였다. 그의 롤 모델은 아버지 다윗이었다.
우리는 솔로몬에 대해 잘 안다. 사실 성경을 읽지 않은 사람이라도 솔로몬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없을 정도다. ‘솔로몬’이란 이름의 뜻은 평화다. 유대인의 인사말인 ‘샬롬’과 어원이 같다. 수도 예루살렘의 ‘살렘’도 같은 어원으로, 평화를 뜻한다. 이를 헬라어로 번역하여 솔로몬으로 불리게 되었다.
솔로몬에 대한 평판은 당시 이스라엘과 세계는 물론, 심지어 중세시대의 이슬람에도 좋았다. 아랍어로 솔로몬은 술라이만이다. ‘십자군 이야기’에 따르면 아랍 사람들은 솔로몬을 가리켜 “새와 벌레의 말까지 알아듣는 예언자 왕 술라이만”으로 언급한다. 아랍인의 인사말 ‘샬라마리쿰’에도 솔로몬의 의미가 담겨 있다. ‘주님의 평화’를 비는 것이다.
솔로몬은 태어나면서부터 샬롬, 곧 평화라는 소망을 품은 아기였다. 평생 전쟁터에서 살았던 아버지 다윗에게 평화는 얼마나 간절한 염원이었을까? 그래서 아들 이름을 하나님의 이름인 샬롬, 곧 솔로몬으로 지었을 것이다.
“보라 한 아들이 네게서 나리니 그는 온순한 사람이라 내가 그로 주변 모든 대적에게서 평온을 얻게 하리라 그의 이름을 솔로몬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그의 생전에 평안과 안일함을 이스라엘에게 줄 것임이니라”(대상 22:9).
이렇듯 출생부터 평화와 연관된 인물이 솔로몬이다. 평화와 안정은 그에게 주어진 운명이었던 셈이다.
2)
이제 다윗은 “내 아들 솔로몬아”(9)라고 부르며 당부한다. 아버지의 말은 마치 유언과 같다. 다윗은 자기 아들 솔로몬을 자신의 뒤를 이를 새 임금으로 소개한다. 이전에 하나님이 다윗을 택하셨듯이, 하나님은 솔로몬을 선택하셨다고 한다. 새 임금은 여호와의 나라 왕위에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런 다음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시킨다.
“그가 만일 나의 계명과 법도를 힘써 준행하기를 오늘과 같이 하면 내가 그의 나라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7).
다윗은 아들에게 간곡히 당부한다. 네가 하나님의 계명과 법도를 지금처럼만 지킨다면 이스라엘에는 영원히 합법적인 하나의 왕국만이 존재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바로 다윗 왕조이다.
여기에서 강조한 하나의 왕조는 바로 다윗의 집이다. 조선의 500년 이씨 왕조처럼, 다윗 왕조를 의미한다. 하나님은 다윗의 집에서 친히 아버지가 되시고, 다윗을 아들 삼으셨듯, 대대로 솔로몬과도 다윗의 집을 이어가겠다고 하신다. 다만 “그가 만일 나의 계명과 법도를 힘써 준행하기를 오늘과 같이 하면”이란 전제조건이 있다.
다윗 왕은 아들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주며 ‘하나님의 계명과 법도를 지키라’고 당부한다. 이것은 후계자로서 가장 유념하고, 명심해야할 일이었다. 다윗 왕 자신의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어린 유언이었다. 한마디로 ‘하나님 우선의 삶’이야말로 왕권을 견고히 할 수 있는 최선의 비결이고, 방책이었다.
다윗 왕이 자신이 끝내 이루지 못한 성전건축을 아들 솔로몬에게 부탁한 것도 아들에 대한 절대적 신뢰의 표시였다. 그리고 솔로몬은 아버지의 뜻을 받아 마침내 성전을 건축하고 봉헌하였다. 그것은 다윗이 고백하였듯이,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내게 이르시기를 네 아들 솔로몬 그가 내 성전을 건축하고 내 여러 뜰을 만들리니 이는 내가 그를 택하여 내 아들로 삼고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될 것임이라”(6).
하나님은 왜 다윗을 선택하시고, 그에게 기름을 부으셨을까? 무슨 이유로 다윗의 집과 그의 왕조를 축복하셨을까? 어찌하여 다윗을 장차 메시야의 조상으로 삼으셨을까?
예나 지금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이라는 인물에 대한 존경심이 가득하다. 지금도 예루살렘에는 ‘다윗 왕의 무덤’이 가묘로 꾸며져 있는데 거기에는 “다윗 왕께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신다”란 문구가 새겨있다. 다윗의 별은 지금도 이스라엘의 국기의 한 복판에서 펄럭이고 있다.
다윗이 “내 아들 솔로몬아”라고 부르는 심정에는 다윗 왕조를 약속하시고 그 후계자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려는 것이다. 우리도 내 자녀를 “아들” 혹은 “딸”이라고 부른다. 부모로서 넉넉한 자부심이 배어있다. 세상에! 얼마나 소중한가? 그런데 나는 내 자녀에게 ‘나를 닮아라’, ‘나를 따르라’고 말할 자신도 있는가?
우리 시대와 교회를 돌아보면 비유하건대 다윗 세대와 솔로몬 세대의 경험이 모두 존재한다. 부모 세대는 다윗의 신앙을, 우리 세대는 솔로몬의 신앙을 갖고 있다. 6.25 전쟁을 겪은 부모님들은 전후 고도성장세대인 우리를 향해 그 시절의 가난과 고난을 몰라준다고 아쉬워하신다. 너희는 감사를 모르는 세대라고 안타까워하신다.
우리 주변을 보면 부모가 출세했다고 자녀가 꼭 잘되는 것은 아니더라. 부모세대의 경험이 항상 옳은 것도 아니었다. 당장 베이비붐 세대의 부모와 에코 세대 자녀의 갈등이 자주 부각된다.
요즘 가장 흉한 단어가 ‘라떼’이다. “나 때는 말이야”이런 자부심으로 내 경험을 말하고 싶은데, 그럴 기회조차 얻지 못하는 것은 참 슬픈 일이다. 그나마 아직 희망은 남아있다. ‘송곳’이란 만화에 나온 말이다. “사람들은 옳은 사람 말 안 들어. 좋은 사람 말 듣지.” 그러니 먼저 좋은 사람, 좋은 부모가 되면 ‘라떼’가 가능하다.
사실 유대인이라고 다 가정교육에 성공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는 유대인 집안의 가족풍경을 엿볼 수 있다. 주인공으로 평소 교양 있고 믿음 좋으며 젠체하는 어머니가 성탄절에 아들집을 방문한다. 그 어머니는 유대교인으로 “나는 크리스마스에 축하도 안하고 선물도 안한다”며 유대인다운 고집을 부린다. 그런데 아들과 며느리가 마당과 집 안팎에 요란하게 크리스마스장식을 한 것을 보면서 놀란다. 다윗 세대답게 “죽은 (며느리)할아버지가 보면 손녀 머리채를 잡을 것”이라고 심술을 부린다. 유대인들도 평생 자녀교육에 공을 들이지만 그들 역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지금 우리 세대와 우리 집의 불안은 바로 기초공사가 부실한 탓이다. 신앙, 도덕, 인격, 관계, 삶의 지혜 두루 부실하다. 과연 우리는 신앙의 집인 내 가정과 신앙공동체 안에 무엇을 채울까? 어머니와 아버지로서 어떤 믿음의 본보기를 보이고, 어떤 고백의 기초위에 우리 집을 세워나갈 것인가? 기회 있을 때마다 결심을 다지고,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3)
솔로몬 왕은 숱한 경쟁 끝에 다윗의 후계자가 되었다. 이제부터 진정한 다윗의 후계자가 되려면 여호와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 무엇보다 다윗이 걸려 넘어진 돌부리를 주의해야 한다. 다윗의 실패를 교훈 삼아야 할 것이다.
가장 중요한 당부는 성전 건축이다. 이미 부자간에 역할이 나뉘어 졌다. 아버지 다윗이 성전 건축을 준비하였다면, 아들 솔로몬은 본격적으로 성전 건축을 해야 한다. 건축을 위한 재물, 재료, 인력은 아버지 다윗이 모두 준비하였다. 이제부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이다. 솔로몬에게 중요한 것은 물질의 유업 이전에 믿음의 유산이었다.
오늘은 어린이주일이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어떻게 어린이다움을 품을 수 있을까? 사실 어린이에게 어린이다움을 가르칠 필요는 없다. 그들은 이미 어린이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른들이나 부모는 어린이다움이란 기계적 틀을 만들어 놓고 아이도 괴롭히고, 또 자신도 괴롭힌다. 너무 속상한 일이다.
이런 말이 있다. “어린아이 너무 나무라지 마라. 네가 걸어온 길이다. 노인 너무 무시하지 마라. 네가 갈 길이다.”
토스토예프스키의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행복한 가정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가정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불행한 가정은 저 마다 다른 이유의 아픔이 있다. 그런데 행복한 가정은 분명한 공통분모가 있다.
그러니 가정이 행복하려면 간단하다. 그 공통분모를 잘 따라하면 된다. 그 공통분모 속에 이런 부모의 기도가 담겨 있을 것이다. “주님, 모든 것에 우선하여 믿음의 유산을 물려주는 부모가 되게 하소서.”
아버지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한다.
“나 때는 말이야. 하나님은 내게 약속하신 것은 그 언약을 모두 지키신 분이셨어. 만사에 부족한 것 없이 채워 주시고, 흔들릴 때 마다 견고히 붙잡아 주셨다구. 아! 모든 소원을 들어 주셨지. 너도 그런 은총의 힘을 믿고 살면 좋겠구나.”
만약 다윗이 핑계나 대고, 변명만 일삼았다면, 아무리 임금이라고 해도 아무 일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다윗 왕은 자부심을 갖고 솔로몬과 그의 후손을 향해 하나님의 계명과 법도를 지켜야한다고 당부할 수 있는 것이다.
내 경험에 따르면 젊었을 때는 내가 어리다는 생각에 주눅이 들었고, 이제 나이가 조금 들고나니 점점 몸도 생각도 늙는다는 사실을 의식하게 되더라.
그런데 젊거나, 나이가 들거나 두 세대 모두 공통적인 면이 있다. 젊든, 나이가 들든 모두 그 안에 두려움과 호기심이 있다는 사실이다. 차이는 호기심이 더 크면 젊은이이고, 두려움이 더 많으면 노인세대이다. 그러니 젊어지려면 두려움을 극복하고 더 많은 인생의 호기심을 품어라.
젊은이는 저기를 바라보는 사람이고, 늙은이는 늘 그 자리에 머무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던가?
바라기는 하나님 안에서 늘 어린이 마음이길 소망한다. 호기심이 푸른 하늘만큼 큰 어린이 마음, 그러면 하늘도 품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아버지의 신신당부를 경청하고, 믿음의 유산을 이어가는 가정이 되길 바란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신의 말에 대해 신실하게 책임을 지며 살고, 자녀는 자녀대로 금강석 수저라도 된 양 당당함과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았으면 한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색동가정마다 은혜를 베푸시길, 집집마다 서로 닮은 행복을 이어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