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느티나무」
강신재 단편소설
[등장인물]
* 숙희(나): 18세의 여고생. 후처가 데리고 온 딸. 이복오빠인 현규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낌.
* 현규: 대학생. 전처 소생의 아들. 이복 여동생의 사랑을 냉정하고 지혜롭게 헤쳐 나간다.
* 어머니: 남편과 사별하고 결혼 전부터 혼담이 있었던 무슈리와 재혼함.
* 무슈리: 숙희의 새아버지. 성격이 부드럽고 과묵한 경제학 교수
* 지수: 현규의 친구이며 장관의 아들. 숙희를 좋아하여 연애 편지를 보낸다.
[줄거리]
그에게서는 언제나 비누 냄새가 난다.
아니, 그렇지는 않다. 언제나라고는 할 수 없다.
그가 학교에서 돌아와 욕실로 뛰어가서 물을 뒤집어쓰고 나오는 때면 비누 냄새가 난다. 나는 책상 앞에 돌아
앉아서 꼼짝도 하지 않고 있더라도 그가 가까이 오는 것을―그의 표정이나 기분까지라도 넉넉히 미리 알아차릴
수 있다.
티셔츠로 갈아입은 그는 성큼성큼 내 방으로 걸어 들어와 아무렇게나 안락의자에 주저앉든가, 창가에 팔꿈치
를 짚고 서면서 나에게 빙긋 웃어 보인다.
“무얼 해?”
대개 이런 소리를 던진다.
그런 때에 그에게서 비누 냄새가 난다. 그리고 나는 나에게 가장 슬프고 괴로운 시간이 다가온 것을 깨닫는다.
엷은 비누의 향료와 함께 가슴속으로 저릿한 것이 퍼져 나간다―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
그가 이삼 미터의 거리까지 와서 멈추었을 때 나는 내 몸이 저절로 그편으로 내달은 것 같은 착각을 느꼈다.
사실은 그와 반대로 젊은 느티나무 둥치를 붙든 것이었다.
“그래, 숙희, 그 나무를 놓지 말어. 놓지 말고 내 말을 들어.”
그는 자기도 한두 걸음 뒤로 물러서면서 말하였다. 그 얼굴에는 무언지 참담한 것이 있었다. (…)
그는 부르쥔 손등으로 얼굴을 닦았다.
“내 말 알아 주겠어, 숙희?”
나는 눈물을 그득 담고 끄덕여 보였다. 내 삶은 끝나 버린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를 더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
었다.
“이제는 집에 돌아오겠다고 약속해 주겠지? 내일이건 모레건 되도록 속히…….”
나는 또 끄덕여 보였다.
“고마워, 그럼.”
그는 억지로처럼 조금 미소하였다.
그리고 빙글 몸을 돌려 산비탈을 달려 내려갔다.
바람이 마주 불었다.
나는 젊은 느티나무를 안고 웃고 있었다. 펑펑 울면서 온 하늘로 퍼져 가는 웃음을 웃고 있었다. 아아, 나는 그
를 더 사랑하여도 되는 것이었다……
강신재 : 1924년 서울에서 태어나 1949년『문예』에 소설을 발표하며 등단.
소설『임진강의 민들레』『오늘과 내일』『파도』등이 있으며,
한국문학가 협회상, 여류문학상, 중앙문화대상, 예술원상 등을 수상하였으며,
2001년 5월 작고함.
첫댓글 느티나무는 순수한 사랑,
젊음의 열정,
굽히지 않는 의지 등 청춘이 지닌 특권이라 할 수 있는 이미지를 아우르면서
숙희와 현규의 사랑을 말없이 지켜보며 아름다운 사랑의 증인이 되어 주고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 숙희가 느티나무 둥지를 붙들면서 자신의 감정을 다스리는 것은
느티나무가 상징적 의미 차원에만 머무르지 않고 두 주인공을 잇는
중요한 매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