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보는 전쟁사]
<26>에너미 앳 더 게이트 (Enemy at the Gates), 2001
 
242명 사살한 저격수,
2차 대전 판세를 흔들다
 
감독: 장 자크 아노 출연: 주드 로, 조셉 파인즈
1942년 8월부터 시작된 6개월간의 스탈린그라드 전투
독일과 소련의 저격전으로 유명, 이 전투에서만 200만 명 사상자
독일의 소련 정복 계획 무산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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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세를 바꾼 전투였다. 1942년 8월 21일부터 1943년 2월 2일까지 6개월여간 소련의 스탈린그라드(현 러시아 볼고그라드) 일대에서 벌어진 소련군과 독일군 간의 전투는 2차 대전 전투들 중에서 가장 치열한 공방전이었다. 사상자만 200만 명. 2차 대전 중 단일 전투로는 가장 많은 희생자를 낸 전투였다.
소련, 통치자 이름 붙인 ‘스탈린그라드’ 사수
바르바로사 작전 이후 우세를 점하고 있던 독일군의 소련 정복 계획, 더 나아가 나치의 세계 정복 야망을 무산시킨 전투이기도 했다. 소련군은 최고 통치자 스탈린의 이름을 붙인 도시라는 상징성 때문에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스탈린그라드를 사수해야 했다. 스탈린그라드는 소련군과 나치 독일군 스나이퍼 간의 저격전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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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격수 간 심리대결·러브스토리가 큰 축
영화 ‘에너미 앳 더 게이트’는 2차 대전의 변곡점이 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소련과 독일군, 두 저격수 간의 심리 대결을 그린 영화다. 국가의 운명과 군 사기를 좌우하는 두 나라의 저격수 간의 대결이 큰 축이요, 3명의 남녀 소련군의 러브 스토리가 또 다른 축이다. 전자는 역사적 사실이고 후자는 픽션이다. 잿빛 하늘 아래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폐허가 된 회색의 공장들, 폭격으로 무너진 건물, 광장에 나뒹구는 시체 등이 전쟁의 암울한 분위기를 표현해 내며 전쟁의 참혹함을 잘 드러내고 있다.
영화는 저격수를 다루고 있어 전반부 대규모 전투 장면 빼고는 고막이 찢어질 듯한 총성과 포성은 거의 없다. 대신 물속 같은 침묵 속에서 단 한 번의 사격으로 적군의 목숨을 앗아가는 스나이퍼 간의 비정한 세계를 보여 준다.
영화는 6개월간의 전투를 날짜로 명시해 가며 보여주는데, 1942년 9월 20일, 독일군이 유전(油田)을 확보하기 위해 볼가강 유역의 스탈린그라드로 진격하면서 시작된다. 소련군 선전장교 다닐로프(조셉 파인즈)는 선전전단을 뿌리러 간 스탈린그라드에서 바실리(주드 로)의 백발백중의 사격 솜씨를 보고 그를 심리전에 이용할 계획을 세운다. 연일 신문 1면에 장식되면서 바실리는 독일 장교를 사살하는 최고의 저격수로 변신, 붉은 군대의 영웅으로 탄생한다.
바실리는 영화 도입 부분, 호송 기차 안에서 우연히 본 타냐(레이철 와이즈)를 다시 만나 가까운 사이가 된다. 타냐를 만나게 된 다닐로프 역시 호감을 느끼면서 그들은 삼각관계에 놓인다. 바실리가 많은 독일군 장교들을 제거하자 나치도 바실리를 없애기 위해 독일군 최고의 저격수 코닉 대령(에드 해리스)을 급파한다. 이후 두 저격수 간의 양보할 수 없는 두뇌 싸움이 계속된다. 결국 우여곡절 끝에 다닐로프의 희생으로 결정적인 기회를 잡은 바실리가 코닉을 제거한다. 바실리는 수소문 끝에 죽은 줄만 알았던 타냐를 만나면서 이야기는 끝난다.
실존했던 소련군 저격수를 주인공으로
영화는 단 한 번의 사격으로 상대방을 절명하게 하는, 경제적인 전술인 저격수의 위력을 보여준다. 영화 초반, 소년 바실리는 눈 덮인 시베리아 벌판에서 늑대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면서 주문처럼 되뇐다. “나는 돌이다. 나는 정지해 있다. 아주 천천히 나는 입속으로 눈(雪)을 집어넣는다. 그렇게 하면 놈이 내 입김을 볼 수 없다. 나는 놈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린다. 내게는 단 한 발의 총알이 있을 뿐이다.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놈의 눈(眼)을 겨냥한다.” 이처럼 바실리는 저격수가 갖춰야 할 평정심과 집중 요령을 어린 나이에 일찍이 터득한 것이다.
주드 로가 연기한 바실리 자이체프는 실제로 2차 대전 때 활약했던 실존 인물로 당시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242명의 적군을 사살한 최고의 스나이퍼 중 하나였다. 많은 소련군 저격수를 사살한 독일군의 스나이퍼 코닉 대령도 실제 인물로 나치 SS저격병학교의 교관이었던 에르빈 쾨니히로 알려져 있다(자이체프 회고록).
소련 입장서 그렸지만 공산주의 비판
영화는 드물게 2차 대전 당시 소련이 연합군에 편입됐다는 이유로 소련군을 우호적인 시선으로 보게 한다.
영화는 소련군의 입장에서 그리고 있지만 공산주의를 비판한다. 영화의 유일한 대규모 전투 장면인 프롤로그, 주인공 바실리가 전선에 나가며 무기를 지급받는 과정에서 앞사람에겐 총을 주고 뒷사람에겐 총알 5개만 줘서 앞사람이 죽으면 그 총을 뺏어 쓰라는 장면들은 인민을 위한다는 공산주의자의 허구와 전쟁의 참상을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게르만 민족과 슬라브 민족 간 전쟁의 축소판이었다. 1차 대전 역시 동유럽을 놓고 게르만족과 슬라브족이 벌인 전쟁이나 마찬가지였다. 국익을 담보하는 식민지 쟁탈이 목적이지만 그 바탕엔 해묵은 민족 간의 대립이 작동했다는 것이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아리안 순수 혈통을 자랑하는 히틀러와 공산주의와 슬라브 민족의 확장을 꾀하려는 스탈린의 자존심 대결이었다.
<김병재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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