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연구실에서 밤샘을 하고, 대낮에 집에 들어와서 잠에 골아떨어졌죠.
그리고 잠에서 깬 건 저녁 6시쯤이었어요.
그런데 일어나보니 이상한거예요.
베개가 흥건게 젖어 있는 것 있죠.
땀은 아니고 제가 엄청난 양의 침을 흘리고 잔거예요.
저는 원래 바로 누워서 자기 때문에 침을 흘리는 일이 없어요.
그런데 베개의 3분의 1이상이 젖어있을 정도로 엄청나게 침을 흘린거예요.
기분이 이상했어요.
내가 내 자신이 아닌 듯한 기분이 드는 거예요.
그냥 누군가가 나와 같이 잠든 것 같다는 묘한 기분.......
그런데 결정적인 일은 그 날 밤에 일어났어요.
밤 9시가 조금 넘어갔을 때였어요.
피곤기가 가시지 않아서 저는 리포트 작성 대신에 영화 한 편을 다운받아 보려고 했죠.
그 때 불을끄지 말았어야 했는데, 저는 영화를 볼 때 습관적으로 불을 끄거든요.
한 참을 영화에 몰입하고 있는데 왼쪽 창가쪽이 자꾸 신경이 쓰이는거예요.
다 들 아시죠?
밖이 어두우면 실내가 비친다는거......
저는 무심코 창을 쳐다봤죠."
갑자기 남자는 준혁이 건낸 캔커피를 찌그러뜨릴 듯 움켜쥐었다.
"심장이 멎는 것 같았어요.
복층 다락방에 30센티 높이의 안전턱이 있잖아요.
거기에 웬 아이가 걸터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겁니다. 내 뒤에서....."
남자의 얘기를 듣자 나는 내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나의 혼미한 정신을 일깨우려는 듯 5월의 상큼한 바람이 내 코끝을 스쳐 지나갔다.
"모니터 빛 밖에 없는데도 밖이 칠흑같이 어두워서인지 그 아이는 너무나도 선명하게 잘 보였어요."
"그래서 조금 전에 어린아이냐고 물어보셨군요?"
남자는 말없이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진짜로 놀란 적 있어요?
뭐가 진짜로 놀라는 건지는 모르지만, 전 그 때 진짜로 놀랬어요.
목구멍에 손수건 한뭉치를 틀어막은 듯 전혀 숨을 쉴수가 없었고, 아무 소리도 낼 수가 없었어요.
비명 지른다는 말은 다 거짓말이예요.
정말 온 몸의 그 어떤 근육도 움직이지 못해요.
그리고 뻣뻣하게 굳은 몸이 갑자기 풀어지죠.
기절하는거예요.
기절해 봤어요?
전 그 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기절해봤어요.
갑자기 전방의 화면이 쫘악 멀어지더니 TV화면 꺼지듯이 밖에서 안쪽으로 모아지듯 시야가 좁아지면서
사라져요."
남자는 그 때의 기억이 생생하게 떠오르는지 캔커피를 쥔 두 손을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공포영화에서나 보던 일이 나에게 실제로 일어나다니 믿을 수가 없었어요.
저는 그 달의 입주기간이 20여일이나 남았는데도 방세를 모두 지불하고 이사했어요.
지금 생각해도 악몽같은 기억이었죠.
그 후로 주변 사람들에게 떠벌리면 돌아다녔어요.
그러지 않으면 저 혼자 미칠 것 같았거든요.
당신들도 거기서 버틸 자신이 없으면 빨리 떠나는게 좋을 거예요.
우습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무서우면 그냥 불을 켜요.
그리고....어둠속에서 창이나 거울을 보지 말아요"
우리를 겁먹이려는건지 아니면 진심으로 충고하려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의 말을 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무겁기만 했다.
"너 어떡할래?"
준혁이 나에게 물었다.
"미치겠네. 1년 계약해놓고 입주한 지 하룻만에 방을 내놔야 하는거야?
중개수수료는 어떡하고? 다른 입주자가 당장 들어올까?"
"그러면 당분간 내가 같이 있어줄까?
나도 무섭긴 하지만 그 오피스텔에 대해서 알고 싶은 것도 있고...."
어젯밤만 해도 미칠듯이 두들겨 패주고 싶은 녀석이었는데, 지금은 준혁이가 구세주처럼 보였다.
"니 부모님한테 뭐라하고?"
"그냥 사실대로 얘기하지 뭐..."
"믿어줄까?"
"부모님은 나를 믿으신다. 걱정 말아라."
"괜히 나 때문에....고맙다. 준혁아..."
"친구 사이에 무슨 고맙기는......대신 오늘은 너 혼자 있어야겠다. 내일 짐 챙겨서 올게."
준혁은 걸음을 멈추고 내 어깨에 손을 얹더니, 씽긋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표정과 맞지 않는 재수없는 말을 내뱉았다.
"오늘 밤 잘 버텨봐라. 죽지 말고..."
그의 공포스런 장난이 오히려 나에게 미소를 짓게 만들었다.
"그래..."
"찬기운 조심하고......후우~~~"
준혁은 입을 모아 나에게 휘파람 부는 시늉을 하더니 앞서 걸어가 멀어져 갔다.
나는 그의 뒷모습을 한 참 동안 서서 바라보았다.
멀어지는 준혁의 모습 위로 서쪽하늘 멀리서 몰려오는 불길한 구름떼가 눈에 들어왔다.
"아....진짜 어떡하지?"
텅 빈 방에 들어온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였다.
어서 시간이 지나 준혁이를 빨리 보고 싶을 뿐이다.
'오늘 밤 잘 버텨봐라. 죽지 말고..'
준혁이의 장난스런 말이 자꾸 떠올랐다.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 걸까?
그냥 컴퓨터로 게임이나 할까?
PC방에서 밤샐까?
그냥 학과룸으로 가서 시간이나 죽칠까?
그냥 돌아다닐까?
그러나 그 어느 것도 나를 해방시켜주는 것은 없었다.
멀쩡한 집을 놔두고 이게 무슨 짓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출혈이 있더라도 그냥 방을 다시 내놓을까?
그런데 그건 너무나도 바보스러운 행동 같았다.
나는 아무것도 본 것이 없다.
단지 전의 입주자와 준혁이의 말 뿐이었다.
나한테 보이지 않는데 나는 왜 이러 겁을 먹고 있는 걸까?
이런 생각이 들자 나는 뭔지 모를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그래.....한 번 버텨보자.
어차피 살 집 아닌가?
1시간 밖에 잠을 자지 못해서인지 조금씩 피로감이 몰려왔다.
저녁 6시 밖에 안되었는데도 밖은 점점 어둠속에 묻히고 있었다.
기분 나쁜 구름떼가 하늘을 뒤덮기 시작했다.
나는 전면의 유리창이 모두 보이지 않도록 커튼을 드리우고, 화장실로 달려가 거울에
신문지를 덮고 테이핑하였다.
그리고 화장실부터 복층 다락방까지 불이란 불은 모두 켰다.
대낮같이 밝은 밀폐된 공간에 우두커니 나는 서있었다.
거실방 한 가운데 서서 나는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정말 나에게도 그들이 보일까?
나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컴퓨터를 켰다.
음악을 들을까? 메신저를 할까? 게임을 할까? 아니면 영화를 볼까?
수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고 있었지만 어느 한 가지를 꼭집어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만큼
마음이 여유롭지 못했다.
멍하니 부팅이 완료된 모니터의 바탕화면을 바라보면서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결정을 내리고 음악플레이어를 켰다.
평소 즐겨듣던 발라드 모음곡이 작은 스피커에서 울려 퍼졌다.
나느 의자를 뒤로 눕히고 책상위에 발을 뻗어 최대한 편안한 자세로 노래를 즐겼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어느 것도 나를 힘들게 만들지 않는 것 같았다.
수분이 지났을 무렵....
창밖에서 작은 진동음이 들려왔다.
비가 오는 것 같았다.
첫댓글 잘봤어요 ^^*
잘보았습니다~*
잘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