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1225. 묵상글 ( 주님 성탄 대축일. - 교환에 참여. 등 )
----------------------------------------------------
221225. 주님 성탄 대축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교환에 참여
오늘 본기도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하느님, 저희를 하느님의 모습으로 오묘히 창조하시고
더욱 오묘히 구원하셨으니,
사람이 되신 성자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하게 하소서.”
이 성탄절에 교회는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을 노래합니다.
그런데 이 성탄절에 교회는 창조와 구원을 왜 같이 노래합니까?
그것은 창조 때의 신성을 상실한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것,
상실한 우리의 신성을 되찾아 주러 오신 것이 주님의 성탄이고,
이 성탄의 신비에 우리가 참여하는 뜻입니다.
그리고 어제, 밤 미사 예물 기도도 비슷하게 노래합니다.
“주님, 오늘 인간의 본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과 결합되었으니
이 축제의 제물을 기꺼이 받아들이시어
저희가 이 거룩한 교환의 신비로 그리스도의 모습을 닮게 하소서.”
이것으로 교회 전례는 성탄 축제가 교환의 신비를 기리는 축제,
곧 그리스도의 신성과 우리의 인성이 교환됨을 기리는 축제임을 거듭 얘기합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가 매일 미사를 봉헌하면서
사제가 포도주와 물을 섞을 때 하는 기도와도 같습니다.
“이 물과 술의 신비로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저희도 참여케 하소서.”
그러므로 이 성탄 축일에 교환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 성탄 축일에 아무런 교환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성탄 축일은 아무 의미가 없는 축일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교환입니까?
그것은 위치 교환입니다.
주님이 우리의 위치에 오시고 우리는 주님의 위치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위에서 내려오시고 우리는 위로 오르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시소와 같이 주님이 내려오시자 우리는 오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땅으로 내려오시고 우리는 하늘로 오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오시어 우리를 건져내신 것이요,
수렁으로 들어오시어 수렁에 빠진 우리를 구원하신 것입니다.
이 교환은 또한 신분 상승입니다.
주님은 인간이 되시고 우리는 신이 되는 것입니다.
인성을 취하신 그리스도의 신성에 우리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참여입니다.
신성에 대한 갈망도 없고,
신성에 참여할 의지가 없으면 그 교환은 물 건너갑니다.
여전히 땅에서 살고만 싶고,
여전히 인간적으로 살고 싶어 하면 우리는 주님의 손을 잡지 않을 것이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죄의 수렁에서 구출하지도 못하시고
우리를 인성에서 신성으로 끌어올리지도 못하실 겁니다.
그러므로 이 성탄절 교환의 신비에 참여함은
마치 구출하러 온 소방관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잡듯이
불구덩이 속에 있고 수렁에 빠진 우리가 구원자 주님의 손을 잡는 것입니다.
----------------------------------------------------
221225. 주님 성탄 대축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성탄대축일 낮 미사);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4)
축하합니다. 우리 주님의 탄생을!
오늘 <입당송>에서는 대체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왜 기쁜지를 <이사야 예언서>의 9장 5절을 통해 이렇게 들려줍니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네.”(이사 9,5)
그런데, “한 아기”, “한 아들”이 태어난 일, 그것은 대체 무엇을 말하는가?
<제1독서>와 <화담송>에서는 그 “한 아기”가 ‘구원자’임을, <제2독서>에서는 그 “한 아들”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그 “한 아기”, “한 아들”이 그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신 말씀’임을 밝혀줍니다.
오늘은 이 “한 아기”, “한 아들”의 탄생일 입니다. 곧 예수님의 출산일 입니다. 그러니 오늘의 주인공은 당연히 ‘아기 예수님’입니다. 그런데 또 한 분의 주인공이 있습니다. 다름 아닌 ‘아기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오늘은 특별히 ‘아기 예수님의 출산 속에 숨겨진 마리아의 신비’ 두 가지를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먼저 질문해 봅니다. “마리아는 ‘출산의 진통’을 겪었을까요? 겪지 안했을까요?”
이에 대해, 구약성경은 모순적인 두 가지 예언을 전해줍니다. 곧 ‘고통 없는 메시아 출산’(이사 66,7-8)과 ‘메시아 해산의 고통’(미카 5,1-2)을 동시에 전해줍니다. 곧 <이사야 예언자>는 메시아의 어머니가 해산의 고통을 겪지 않을 것이라고 다음과 같이 예언합니다.
“진통을 겪기 전에 해산하고 산고가 오기 전에 사내아이를 출산한다.
누가 이런 것을 들어 본 적이 있느냐? 누가 이런 일을 본 적이 있느냐?”(이사 66,7)
그런데, <미카 예언자>는 메시아의 어머니가 ‘해산의 고통’을 겪을 것이라고 이렇게 예언합니다.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 서 보잘 것 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 해산할 여인이 아기를 낳을 때까지 주님은 그들을 내버려 두리라.”(미카 5,1-2)
여기서, <이사야 예언서>는 ‘메시아 탄생에 대한 예언’으로, 새로운 창조의 때가 오면 여인이 아이를 낳을 것인데, 새 창조에 속하는 ‘해산의 고통 없이’ 아이를 낳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반면에, <미카 예언서>는 ‘메시아의 어머니에 관해 예언’하면서 ‘해산의 고통’을 겪으리라고 전하는데, 이는 구원의 시기가 도래하기 전에 겪어야 하는 ‘고통의 시간’을 가리키는 ‘메시아 해산의 진통’에 대한 예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전자는 ‘예수님 탄생의 신비’를, 후자는 ‘예수님 죽음의 신비’를 가리킵니다.
결국, 마리아는 베들레헴에서 ‘출산의 고통’을 겪지 않았으며, 대신 갈바리아에서 그 고통을 겪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기적적인 ‘출생’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사실, 구약성경의 눈으로 보면, ‘해산의 진통’은 원죄의 결과입니다(창세 3,16). 그러니, ‘원죄 없으신 마리아’께서 ‘해산의 진통이 없는 출산’을 하시는 것은 당연한 결과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동정 잉태하신 마리아’께서 그리스도를 ‘동정인 채 출산’하시는 것은 당연한 결과인 것입니다. 곧 출산하셨지만 여전히 동정이신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신비입니다.
이에 대해, 2세기의 리옹의 이레네우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의 출생과 관련하여, 같은 예언자(이사야)는 다른 곳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진통이 오기 전에, 산고가 오기 전에, 그녀가 사내아이를 낳았다.’(이사 66,7).
이렇게 예언자는 동정녀로부터 예상치 못한 기적적인 출생을 예고했다.”([사도적 가르침의 논증] 54)
또 8세기의 다마스커스의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 잉태되신 분께서 잉태한 분을 동정으로 머물도록 지켜주셨듯이, 태어나신 분께서 단지 지나가셨을 뿐 닫아두어
그녀의 동정이 손상되지 않게 하셨다.”([정통신앙] 4.14)
그러니, 예수님의 ‘잉태’와 ‘출산’은 둘 다 기적이었습니다. 곧 ‘원죄 없으신 잉태’와 ‘동정 잉태’와 ‘진통 없는 출산’과 ‘동정을 잃지 않는 출산’이라는 기적입니다. 이는 단지 기적일 뿐만 아니라, 예언의 성취이며, 둘 다 예수님의 신성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 그 자체가 ‘새로운 창조’의 시작입니다. 그리하여 사도 바오로가 말했듯이 예수님은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로마 8,29)가 되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맏이’라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어머니일 뿐 아니라 예수님의 동생인 우리들의 어머니가 되십니다. 하니, 이 얼마나 복된 날인지요!!
오, 멋진 형인 나의 아기 예수님!
오늘 인간이 되어 오셨으니, 당신 사랑으로 온 세상을 가득 채우소서!
이 세상에 평화와 구원을 이루어 기쁨이 차오르게 하시고 당신 영광의 광채를 뒤덮으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이 세상에 왔다.”(요한 1,9)
주님!
오늘 제가 빛을 입었으니 일어나 빛을 비추게 하소서.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풀게 하소서.
생명을 얻었으니 생명을 꽃피게 하소서.
당신께서 내려오시니 저도 따라 내려가게 하소서.
당신께서 비우시니 저도 비우게 하소서.
당신께서 가난해지셨으니, 저도 가난해지게 하소서.
참 생명을 받았으니 새 인간이 되게 하소서. 아멘.
----------------------------------------------------
221225. 주님 성탄 대축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루카2,1-14) 22
우리의 구원자 예수님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성탄을 함께 기뻐하며 주님께서 베푸시는 사랑과 평화가 온 세상과 여러분 안에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서로 인사하시겠습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드립니다. 축하의 인사를!
성탄을 정성껏 준비하신 모든 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동안에 노력했던 정성과 수고와 땀에 대해서 하느님께서 넘치도록 갚아주시길 빕니다. 고해성사를 통해 맑은 영혼을 간직하게 되었고, 특별강론에 귀 기울이면서 영적양식을 충만히 채웠습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을 찬미하고 서로의 친교와 일치, 실천하는 사랑을 위해 노력한 순간들이 주님을 잘 낳아드리고자 애쓴 모습이고, 주님께서 기뻐하셨으리라 확신합니다. 변함없는 사랑으로 세상에 예수님을 낳아드리고, 날마다 순간마다 거듭 태어나는 성탄의 삶이 이어지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보다 빛으로 오셨습니다. 맑고 밝은 빛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죄악의 어둠을 몰아내고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뻐하십시오. 맑고 거룩한 마음을 지닌 사람들은 기뻐하십시오. 그분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둠에 사로잡힌 사람도 기뻐하십시오. 주님께서 당신의 빛으로 환히 비추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신 나머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의 외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요한3,16). 성탄은 바로 우리를 위해 인간으로 오신 하느님의 사랑을 일깨우는 날입니다. 이 세상에 오신 아기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볼 수 있도록 해주는 빛이십니다. 예수님의 성탄은 아낌없이 내어주는 ‘사랑과 나눔’의 부르심이며 요청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이 메마른 곳에 사랑을 전하고, 위로가 필요한 곳에는 위로를 주며, 용기를 잃은 이에게는 격려를 해주는 성탄절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그분 말고는 다른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에서 우리가 구원받는 데에 필요한 이름은 이 이름밖에 없습니다.”(사도4,12) 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2독서를 보면 “우리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어, 우리를 불의에서 해방시키시고 또 깨끗이 하시어, 선행에 열성을 기울이는 당신 소유의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는 바로 인간을 죄와 죽음에서 구원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가슴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나를 위해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 한번 불러볼까요? 예수님! 예수님! 이 이름에는 무슨 뜻을 담고 있지요? “하느님께서는 구원이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이름은 우리를 구원하는 이름입니다. 따라서 많이, 자주 부르십시오. 예수님을 부르는 자체가 기도입니다.
그런데 그 구원자 예수님께서는 어디서 태어나셨느냐? 복음을 보면,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였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방이 없었다’는 것에 관심을 둔다면 그분께 내어드릴 방이 없었던 것이지 방은 얼마든지 있었다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여전히 가난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지만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외면할 때가 많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분이 구세주요, 나를 구원하실 왕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렇게 문전 박대하였을까요?
결국, 우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의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그분의 생애를 말없이 일러주고 있습니다. 구유는 밥통입니다. 그 안에 들어있어야 하는 것은 밥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바로 밥으로 오셨습니다. 밥은 자기를 완전히 내어주어서 다른 이의 영양이 됩니다. 자기는 죽고 남을 살립니다. 그리고 우리는 밥을 먹지 않으면 살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밥이 되셨고, 오늘도 미사 안에서 성체 성사를 통해서 그 밥을 끊임없이 주십니다. 공짜로 주십니다. 그러나 밥상이 차려져도 매일같이 그 밥을 먹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이사야서 1장 3절에 보면 “소도 제 임자를 알고 나귀도 제 주인이 놓아준 구유를 알건만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구나.”(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철없이 구는구나)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느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구유에 뉘여졌다’는 것은 이 말씀을 상기시켜줍니다. 구세주로 오신 그리스도, 빛으로 오신 왕이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구나! 안타까운 마음을 일깨워줍니다. 요한복음에는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세상에 왔다. 그분께서 세상에 계셨고 세상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지만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분께서 당신 땅에 오셨지만, 그분의 백성은 그분을 맞아들이지 않았다”(요한 1,9-11).
어느 성당에서 성탄 축제가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는 데 마음을 썼습니다. 그런데 다솜이라는 학생은 선천적으로 말도 더듬고 생각도 민첩하지 못한 장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다솜이에게 용기를 주고 싶어서 어떤 역할을 줄까 고민을 했습니다. 마침내 액션도 대사도 아주 적은 배역을 찾았습니다.
요셉과 예수님을 잉태하고 있는 마리아를 맞이하는 여관 주인의 역할이었습니다. 마리아와 그 일행이 여관 문을 두드리면 “방이 없어요!” 하고 한마디 말만 하면 끝나는 것이었습니다. 다솜이도 또박또박 발음 연습을 했습니다. 연극의 내용상 요셉과 마리아가 여관 주인과 몇 마디 더 주고받는 상황이기 때문에 “제 아내가 아이를 낳을 것 같애요, 어떻게 좀 봐 주세요?” 라고 하면 “방이 없어요!” 라고 같은 말을 3번 반복하기로 정했습니다.
마침내 고통스러워하는 마리아를 부축하며 요셉은 다급히 여관 문을 두드렸습니다. 드디어 주인이 나왔습니다. 다솜이는 연습한 대로 또박또박 말을 했습니다. “방이 없어요!”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가지 않고 여관 주인에게 매달렸습니다. “제 아내가 곧 아이를 낳을 것 같습니다. 어떻게 방을 줄 수 없나요?”
“방이 없어요!”
다솜이는 또박또박 맡은 배역을 잘 해나갔습니다. 이제 한 번만 더 하면 대 성공입니다. 요셉이 마지막으로 사정합니다. “이렇게 사정하겠습니다. 이 추운데 어디로 가란 말입니까? 곧 아기가 나올 것 같습니다. 제발 저희에게 방을 좀 주십시오!”
이 말을 듣자 갑자기 다솜이의 눈에 눈물이 글썽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러면요, 제 방으로 오세요!”
정말 예상치 못한 말이었습니다. “제 방으로 오세요!” 연극의 대사는 아니었지만, 다솜이의 그 순수한 마음은 도움을 청하는 그들의 간절한 원의를 외면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단순한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가난하게 오신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다양한 모습으로 지금도 오시고 계십니다. 따뜻한 가슴으로 모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실 구세주이심을 알았더라면 사람들은 서로 자기의 집을 내드리려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혀 예기치 않은 모습으로 오셨으니 그를 문전박대했습니다. 세상에 방은 많았지만, 그분이 태어나실 방은 없었습니다. 그 방은 오늘도 여전히 없을 수 있습니다. 그분은 여전히 겸손과 낮아지심으로 마구간을 선택하시고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이들 안에 오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기대하고 생각하는 분으로, 그리고 내가 원하는 때에 오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주님은 오늘도 방을 내어드리지 못한 어두움, 우리의 이 어둠을 벗겨 주시러 오십니다. 그리고 빛으로 오신 주님은 우리의 어둠이 깊을수록 더 밝게 비추실 것입니다. 따라서 그분을 볼 수 있는 눈, 그분의 마음으로 사랑할 수 있는 은총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음이 곧 그분이 태어나실 안락한 방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시길 희망합니다.
주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되었습니다”(필리2,6-12). 그러므로 귀한 아기 예수님께서 가장 낮고 천한 마구간 구유에 누우신 이유를 새롭게 일깨우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밥이 되어주신 예수님을 기억하며 모든 이에게 모든 것,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필요가 되어주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나도 누군가의 밥이 되어줍시다.
구세주 탄생의 기쁨을 함께하며 다시 한번 축하드리고 매일 매순간 우리의 마음 안에 구세주 예수님을 모셔 드리고 또 낳아드리기를 기도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221225. 주님 성탄 대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10월 부르클린 한인성당 교우들과 미네와스카 주립공원엘 다녀왔습니다. 오는 길에 버스 안에서 퀴즈를 내고 맞히면 상품을 주었습니다.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고 재미있는 문제였습니다. “허수아비의 아들 이름은? 허수, 계절에 관계없이 사시사철 피는 꽃은? 웃음꽃, 아이 추워의 반대말은? 어른 더워, 사람이 몸무게가 가장 많이 나갈 때는? 철들 때, 라면은 라면인데 가장 달콤한 라면은? 그대와 함께라면” 돌아오는 길이 자칫 지루했을 텐데 웃으면서 오니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조재형’이라는 이름으로 삼행시를 만들었습니다. 이런 삼행시도 있었습니다. ‘조재형 신부님은 재미있는 강론으로 형광등처럼 밝게 한다.’ 오늘은 주님 성탄 대축일입니다. 하늘 높은 곳에는 하느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마음이 착한 이에게 평화가 가득한 날입니다. 오늘 ‘예수님’이라는 이름으로 삼행시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요?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특히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임하셨습니다. 오늘 하루, 나를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탄생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하는 것은 그분께서 우리의 마음에 진리의 빛으로, 구원의 빛으로 오셨기 때문입니다. 어둠이 깊고 길어도 빛을 이기지 못한다는 믿음과 희망이 담겨있는 성탄입니다. 그분께서 내 마음에 진리의 빛으로 머물러 계신다면, 그분께서 내 마음에 구원의 빛으로 오신다면 매일 매일이 바로 성탄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어둠 속에 있다면, 내가 희망을 버리고 절망을 가슴에 품고 산다면 1년 내내 12월 25일이라 해도 성탄은 그냥 지나가는 하루일뿐입니다. 예수님의 성탄을 축하하며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제자들의 체험입니다. 제자들의 고백입니다.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는 그분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하였고, 그들이 체험한 것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셨음을 말과 행동으로 증언하는 분들을 보곤 합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 친구가 오리를 가자고 하는데 십리를 가주는 사람, 이웃을 위해서 자신의 것을 기꺼이 나누는 사람, 현실의 고통과 시련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밝게 웃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분들은 주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그분께서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음을 말없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분들이 이 땅에 다시금 찾아오는 동방박사들이고, 주님의 탄생을 기뻐하였던 목동들입니다.
성탄 선물로, 새해를 시작하는 선물로 제가 아는 시를 하나 나누고 싶습니다.
“때때로 병들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인간의 나약함을 깨닫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가끔 고독의 수렁에 내던져 주심도 감사합니다.
그것은 주님과 가까워지는 기회입니다.
일이 계획대로 안 되게 해 주심도 감사합니다.
그래서 나의 교만이 반성될 수 있습니다.
아들, 딸이 걱정거리가 되게 하시고
남편이 미워질 때도 있게 하시고
부모와 동기가 짐으로 느껴질 때도 있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그래서 인간된 보람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먹고 사는데 힘겹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눈물로써 빵을 먹는 심정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허탈하고 허무하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영원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니까요.
불의와 허위가 득세하는 시대에 태어난 것도 감사합니다.
하느님의 의가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성탄입니다. 지금 내가 고통 중에 있다면 그것을 주님께 봉헌 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내가 기쁨 중에 있다면 그것도 주님께 봉헌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오신 성탄입니다. 올 한해를 돌아보면 아쉬움도 있고, 부끄러움도 있고, 또 가슴 뿌듯한 일도 많을 겁니다. 주님의 성탄을 맞이해서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이제부터라도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탄생을 마음모아 축하하고, 그분의 삶을 본받도록 합시다. 주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Merry Christmas Happy New Year!
----------------------------------------------------
221225. 주님 성탄 대축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Merry Christmas~~ 예수님의 성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기쁘고 행복한 오늘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기쁜 오늘, 생각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버드 경영대학원 에이미 커디 교수는 여러 실험을 통해 첫인상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요소를 발표했습니다.
사람은 누군가를 만났을 때 그 사람의 모든 부분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단지 첫인상을 통해 좋고, 나쁨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첫인상을 좌우하는 두 가지 요소는 사람들에게 큰 관심을 끌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따뜻함과 유능함이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따뜻함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따듯함으로 먼저 신뢰를 얻어야 유능함에 대한 평가도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첫인상이 좋다, 나쁘다는 ‘따뜻함’을 가지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는가를 결정합니다. ‘따뜻함’이란 무엇일까요? 배려하고, 인정하고, 지지해주는, 바로 사랑의 말과 행동이었습니다. 이 첫인상이 영원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꽤 오랜 시간을 첫인상이 결정하는 것을 볼 때 ‘따뜻함’을 간직하고 표현하는 삶은 자신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 됩니다.
이렇게 누구나 원하는 ‘따뜻함’입니다. 그러나 나 자신은 그 중요한 ‘따뜻함’을 간직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었을까요? 나를 낮추지 못하고 높이려고만 할 때, 남을 이해하기보다 나만 이해받으려 할 때, 남과 나누기보다 나의 것을 더하는 데에만 온 힘을 쏟고 있을 때, 내 안에서 ‘따뜻함’이 과연 보일까요?
오늘 주님께서 이 땅에 강생하셨습니다. 난방이 제대로 되어 있는 화려한 궁전이 아닌, 가장 초라한 마구간에서 초라한 모습으로 탄생하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말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며 똥오줌도 가리지 못하는 너무나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탄생에서 ‘따뜻함’을 간직하게 됩니다. 우리를 지배하러 온 힘 있는 군주가 아닌,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리와 똑같은 육신을 취하신 사랑 그 자체이심을 보기 때문입니다. 두려움에서 당신을 맞이하는 것이 아닌, 사랑으로 당신과 함께할 수 있음을 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 따뜻한 사랑을 우리 마음에 간직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 모범을 따라 따뜻한 사랑으로 이웃과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 예언자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구원을 보게 될 것입니다.
------------------------
자극과 반응 사이에는 공간이 있다. 그 안에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 선택은 나의 성장과 행복에 직접 관련돼 있다(빅터 프랭클).
------------------------
----------------------------------------------------
221225. 주님 성탄 대축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오늘 우리 구원자 주 그리스도 태어나셨다!
-하느님께 영광, 사람들에게 평화-
오늘 밤 우리 구원자 주 그리스도 태어나셨습니다. 화답송 시편이 그대로 우리 기쁜 마음을 대변합니다.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주님께 노래하여라,
온 세상아, 주님께 노래하여라, 그 이름 찬미하여라.
하늘은 기뻐하고 땅은 즐거워하여라.
바다와 그 안에 가득찬 것들은 소리쳐라.
들과 그 안에 있는 것도 모두 기뻐뛰고,
숲속의 나무들로 모두 환호하여라.”
온 우주만물이 기뻐하고 즐거워합니다. 마침내 오매불망 고대하던 우리 구원자 주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셨습니다. 마침내 독서기도 성경독서 이사야서 11,1-10절 까지의 유토피아 이상향이 평화의 메시아 예수님 탄생으로 실현되었습니다. 제1독서 이사야 예언 역시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당신께서는 즐거움을 많게 하시고, 기쁨을 크게 하십니다. 사람들이 당신 앞에서 기뻐합니다. 수확할 때 기뻐하듯, 전리품을 나눌 때 즐거워하듯.”
마침내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께서 어둠속에 빛으로, 절망속에 희망으로, 죽음속에 생명으로 탄생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의 구유 안에 빛으로 생명으로 희망으로 탄생하셨습니다. 예수님 탄생하심으로 이제 살맛나는 광야 인생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이런 구원자 계시지 않으면 이 춥고 어두운, 험하고 거친 광야 세상 어떻게 살아낼 수 있을런지요? 무심코 입당송을 읽는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꼭 저를 두고 하시는 말씀으로 들렸습니다.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여자라 섭섭해하지 마세요. 바꿔 읽어도 무방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나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딸. 내가 오늘 너를 낳았다.” 그러니 주님 성탄은 그대로 우리 하나하나의 탄일이기도 합니다. 구원자 예수님과 함께 새롭게 탄생한 우리들입니다. 사실 주님을 믿는 이들에게는 매일이 탄생 축일입니다.
우리 구원자 어디서 탄생하셨습니까?
하늘 높은 곳에서 탄생하지 않으셨습니다. 구중궁궐 고대광실에서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곳, 예상할 수 없는 곳에서 탄생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디서 탄생하셨습니까?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 불리는 다윗 고을 여관도 아닌 마구간 구유에서 탄생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의 실감나는 묘사를 소개합니다.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 날이 되어, 첫 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굿간 구유하니 골고타 언덕의 십자가가 연상됩니다. 참으로 지금처럼 강추위 속에 궁색하기 이를데 없는 마구간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러니 탄생하신 주님을 만나고 싶으면 외롭고 쓸쓸한 곳, 춥고 어두운 소외된 이들의 삶터를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 낮고 응달진 구석진 곳에서 빛으로, 생명으로, 희망으로 태어나신 주님이십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자 탄생을 체험했습니까?
밤새 침묵과 고독중에 깨어 양 떼를 지키던 가난한 목자들이 구원자 탄생을 체험했습니다. 참 신기한 것이 주님의 천사들의 주님 탄생을 알린 이들은 고위 성직자들도, 고매한 신학자들도, 고승들같은 수도자도 아니었습니다.
어둡고 추운 밤, 내내 깨어 양떼를 지키며 주님을 기다리던 가난한 목자들에게 나타났습니다. 주님의 영광중에 나타난 주님의 천사들이 가난한 목자들에게 또 목자들과 깨어 성탄 밤미사를 봉헌하는 우리들에게 주님 탄생의 기쁜 소식을 알립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목자들은 참으로 놀랐고 이어 기쁨으로 가득했을 것입니다. 참으로 주님 탄생을 체험한 목자들이야말로 내적으로 부요하고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참행복을 그대로 체험한 목자들입니다.
그렇다면 탄생하신 구원자는 어떤 분이십니까?
바로 주님의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찬미할 때의 환호가 그 비밀을 알려 줍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바로 하늘의 하느님께는 영광이 되고 땅에서는 사람들에게 평화가 되는 분입니다. 그리스도 우리의 평화! 바로 여기에서 유래합니다. 그대로 이사야 예언의 실현입니다. 하느님의 평생 소원이자 꿈이 마침내 구원자 탄생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이사야를 통한 하느님의 원대한 꿈을 들어보세요.
“정녕 당신께서는 그들이 짊어진 멍에와, 어깨에 멘 장대와, 부역 감독관의 몽둥이를, 미디안을 치신 그날처럼 부수십니다. 우리에게 한 아기가 태어났고, 우리에게 한 아들이 주어졌습니다. 왕권이 그의 어깨에 놓이고, 그의 이름은 놀라운 경륜가, 용맹한 하느님, 영원한 아버지, 평화의 군왕이라 불리리이다. 다윗의 왕좌와, 그의 왕국 위에 놓인, 그 왕권은 강대하고, 그 평화는 끝이 없으리이다.”
바로 이 모두를 한 몸에 안고 오늘 우리 구원자로 탄생하신 주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느님 평화의 꿈이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현실화된 것입니다. 그러니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하느님의 은총이 오늘 밤 우리에게 나타났습니다. 이 은총이 우리를 교육하여, 불경함과 속된 욕망을 버리고 현세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해 줍니다.
복된 희망이 이루어지기를, 우리의 위대하신 하느님이시며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려온 여러분 모두에게 주님의 성탄 축복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아멘.
----------------------------------------------------
221225. 주님 성탄 대축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아기 밥님 오시네>
2022. 12. 25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루카 2.1-14 (예수님의 탄생, 천사가 목자들에게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다)
그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서 칙령이 내려, 온 세상이 호적 등록을 하게 되었다. 이 첫 번째 호적 등록은 퀴리니우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있을 때에 실시되었다. 그래서 모두 호적 등록을 하러 저마다 자기 본향으로 갔다.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올라갔다. 그가 다윗 집안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갔는데,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마리아는 해산 날이 되어, 첫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 고장에는 들에 살면서 밤에도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이 있었다. 그런데 주님의 천사가 다가오고 주님의 영광이 그 목자들의 둘레를 비추었다. 그들은 몹시 두려워하였다. 그러자 천사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나는 온 백성에게 큰 기쁨이 될 소식을 너희에게 전한다. 오늘 너희를 위하여 다윗 고을에서 구원자가 태어나셨으니, 주 그리스도이시다. 너희는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누워 있는 아기를 보게 될 터인데, 그것이 너희를 위한 표징이다.” 그때에 갑자기 그 천사 곁에 수많은 하늘의 군대가 나타나 하느님을 이렇게 찬미하였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
<아기 밥님 오시네>
하늘에서 땅으로
밥그릇에 담기시려
아기 밥님 오시네
아기 밥님이시니
오로지 밥그릇에만
모실 수 있네
밥그릇에
오롯이 담기시니
아기 밥님이시네
주린 이들
든든히 배불리시는
아기 밥님이시네
추운 이들
따뜻하게 데우시는
아기 밥님이시네
흩어진 이들
오순도순 모으시는
아기 밥님이시네
서로 밥이 되라고
기꺼이 먹히시는
아기 밥님이시네
아기 밥님께서
밥그릇에 담기신
영광과 평화의 오늘밤
아기 밥님
모실 수 있도록
깨끗한 빈 밥그릇이 되네
아기 밥님 닮은
맛깔난 밥이 되어
벗들에게 기꺼이 내어놓네
----------------------------------------------------
221225. 주님 성탄 대축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주님 성탄 대축일입니다. 우리는 해마다 예수님의 성탄을 맞이합니다. 이 성탄의 의미를 깊이 체험하고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 묵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제 2의 그리스도’라고 일컬어지는 성 프란치스코의 생애는 바로 성탄의 참된 의미를 우리에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성탄은 축일 중의 축일이요, 이날에 하느님이 주먹만한 아기가 되어 인간의 젖꼭지에 매달리셨다고 말하며, 프란치스코는 아기 예수의 탄생일을 어느 축일보다도 이루 말할 수 없는 기쁨 중에 보냈습니다. 아기 예수를 그린 그림을 만나면, 그는 그리운 마음에 거기 손과 발에 입을 맞추었고, 아기 예수에 대한 측은함에 가슴이 뭉클해서 마치 아기들에게 하듯이 예쁜 말들을 더듬거렸습니다. 아기 예수의 이름은 프란치스코의 입에 꿀맛이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의 성탄에 대한 다음의 일화는 주님의 성탄이 모든 것을 위해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마침 성탄일이 금요일이 된 적이 있었는데 단식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을 때 프란치스코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아기 예수께서 태어나신 이날을 단식일 이라고 하면 그것은 죄악입니다. 이 날은 담벼락까지도 고기를 먹여야 합니다. 그런데 먹일 수가 없으니, 그 겉에다가 고기를 문지르기라도 해야 합니다.”주님의 성탄날에 프란치스코는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굶주린 사람들의 배를 채워 주기를 바랐고, 소나 당나귀에서도 평상시보다 더 많은 양의 여물을 주게 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는 주님의 성탄일에 하고 싶은 진실된 마음을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내가 황제께 말만 할 수 있다면, 그에게 이야기해서 포고를 이렇게 내리라고 하겠소. 모든 사람이 밀과 곡식을 길에다 뿌려서 새들도 이렇게 성대한 날은 실컷 먹게 하고 특히 나의 자매들인 종달새들이 실컷 먹들 수 있도록 하라고 말입니다.”
바로 이 날에 가난한 동정녀께서는 그 궁색함이 얼마나 컸을까 싶어 프란치스코는 눈물을 지으며 회상에 잠기곤 하였습니다. 그가 점심 식사를 하고 있을 때, 한 형제가 복되신 동정녀의 가난과 그 아들 그리스도의 빈곤에 대하여 이야기한 적이 있었습니다. 곧 프란치스코는 식탁에서 일어나 맨바닥에 주저 않아 한숨과 눈물로 범벅이 되어 나머지 빵을 먹었을 정도로 주님의 성탄을 온 존재로 느꼈던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가난은 구원에 이르는 특별한 길이며 열매는 가지가지이지만 이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얼마되지 않는다고 안타까워 합니다.
프란치스코가 주님의 성탄을 생생하게 사람들에게 전해 줄 수 있었던 것은 복음을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을 통하여 실행하였고, 조금도 한눈을 팔지 않고, 열의를 다하여 애타게 갈망하는 온전한 정신과 뜨겁게 타오르는 온전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가르침과 발자취를 따랐기 때문입니다.
성 프란치스코를 본받아 주님의 성탄을 더 깊이 체험하시길 바랍니다.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하느님에 대한 증오를 벌하시다
중국 -1962년
통킹(Tonking) 부이쿠이(Bui -Chui) 에 있는 중국 가르멜회 수녀원의 수녀원장이 1962년에 다음과 같은 체험을 보고했다.
어느 날 공산주의자인 어떤 군인이 우리 수녀원으로 들어와서 즉시 모든 방들을 수색하겠다고 거칠게 요구했다. 그의 명령에 복종하여 우리는 수녀원 전체를 그에게 보여 주었다. 우리가 성당에 도달했을 때, 한 수녀가 그에게 설명했다.
“이 곳은 하느님이 계시는 곳입니다. 그러니 경외심을 가지셔야만 합니다! "
그는 비웃는 듯이 명령했다. “하느님이 어디 계신지 내게 보여봐! "
그러자 자매들 중의 한 명이 순진하게 감실을 가리켰다. 얼굴이 빨건 중국 군인은 미움에 가득찬 시선으로 그의 총을 붙잡고 감실을 향해 겨누었다. 총알이 감실을 뚫고 지나갔다. 성합이 두 조각으로 쪼개졌고 거룩한 성체가 떨어졌다.
이러한 신성모독적인 행위를 보고 수녀들은 놀라움의 소리를 외쳤다.
그러자 그 공산주의자는 총을 쏘고 난 후에 갑자기 전신이 마비되어 얼마 동안 돌이 되어버린 것처럼 조용히 서 있었다. 그런 다음 그는 소리없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가르멜 수녀회의 수녀들이 그를 도우려고 했으나 허사였다. 그는 죽어 있었다.
하느님께서 지극히 거룩한 성체께 대한 광포한 신성모독 행위를 보시고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벌하신 것이었다. 그리고 그 죽음을 통해서, 그러한 막을 수 없는 살인적인 손으로부터 착실한 수녀원의 수녀들을 보호하셨던 것이다.(172)
----------------------------------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