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데반은 헬라파 유대인으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가운데
초대 예루살렘 교회 피택된 일곱 집사의 수장이었습니다.
바울은 나면서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길리기아 다소 사람으로
베냐민 지파의 유대인이었습니다.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각 처의 회당에서 유력한 사람들과 변론하며 왕성하게 전하였습니다.
바울도 성령이 충만하여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는 이적이 나타났습니다.
스데반과 바울 중 누가 더 많은 이적을 행하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두 사람 모두 성령의 충만을 힘입어 큰 능력을 행하며 주의 복음을 힘있게 전하였습니다.
심지어 공회 앞에서 변명하며 복음을 증거할 떄도
스데반은 "부형들이여", 바울은 "부형들아"부르며 겸손과 담대함으로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이러한 공통점은
스데반의 순교와 바울의 핍박 현장에도 나타났습니다.
스데반은 순교할 때....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붙잡혀서 변명하며....
스데반을 죽일 때 찬성하고 가편투표를 하였으며 믿는 사람들을 외국의 섬까지 가서 팝박하였으나
다메섹을 가는 길에서 빛의 광채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 부활의 광채를 복음으로 전하는
사도가 되었다고 하였을 때 저희가 듣다가 소리질러 가로되 이러한 놈은 세상에서 없이 하자
살려 둘 자가 아니라 하여 떠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티끌을 공중에 날렸다고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스데반과 바울은
순교자와 처형자로 만났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스데반과 바울을 묘한 대조로 동일한 관점을 가지고 기록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에 대하여 스데반의 순교 이후.....
스데반의 죽음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던 바울은 스데반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겼고
더 나아가 교회를 잔멸하며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겼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스데반의 죽음이 도화선이 되어 핍박이 극심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스데반의 죽음은 교회가 흩어져서 복음을 전하는 열정으로 넘쳤다는 사실을
또한 기록하였습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였던 일곱 집사의 수장 스데반의 죽음은
제2의 스데반으로 일곱 집사 가운데 한 사람인 빌립의 복음전도 사역으로 이어졌습니다.
스데반의 죽음 이후 각 처로 다니며 핍박을 주도하는 사울의 모습과
또한 각 처로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는 빌립과 사도들의 왕성한 복음전도 사역을
극명한 대조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 누가는
교회를 유대교의 이단으로 정죄하며 자원하여 극심하게 핍박하였던 사울이
나사렛 예수 이단의 괴수로 핍박을 받으며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어
복음 전도의 열정을 쏟는 모습을 또한 역동적으로 기록하였습니다.
바울의 회심은
교회의 팝박자에서 복음 전도자로 변화되었습니다.
바울의 역동적인 변화는
빛의 광채로 예수의 부활을 체험한 후 부활의 영광을 복음의 광채로 전하는 이방인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비롯하여 성도를 핍박하였던 사울은
회심한 자신을 죽일려고 하는 유대인의 살의적인 공모를 담담하게 받아내었습니다.
바울의 로마 시민권은 유대인의 살의적인 음모와 송사를 좀 더 지연시켰으며
비록 로마에서 매인 몸이었지만 자신이 우거하는 셋집에서 찾아오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며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께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사람이 없었더라고 누가는 기록하였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갈등은
사도행전에서 예수의 복음과 유대인의 율법의 극심한 갈등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는 지금보다도 훨씬 더
복음과 율법의 갈등 구조를 거칠게 가졌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과 사도들의 왕성한 역활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율법적인 틀을 깨뜨리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순교자와 핍박자를 동시에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 메세지로 삼은 누가의 사도행전은
복음 사역이 성령의 은혜로 긴장과 갈등의 구조를 가지면서 하나님의 나라로 아름답게 피어나는 사실을
살아있는 역사로 기록하였습니다.
복음 전파의 주권적인 성령의 사역은
핍박을 받아 순교를 당하고 흩어져서 삶의 터전을 잃어 버린 가운데서도 계속되었습니다.
베드로와 사도의 전도, 특히 야고보의 순교 이후
뒤를 이은 스데반의 전도, 그리고 스데반의 순교 이후 빌립의 전도,
그리고 아볼로와 바나바와 회심한 바울의 이방 사역은 복음의 동력이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임을
누가는 기록하였습니다.
성령의 주권적인 복음 사역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처럼 핍박과 박해의 환경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
부활하신 예수님 처럼 고난받고 죽는 것으로 끝내지 않고
진리의 말씀을 왕성하게 하여 하나님 나라를 세워 나갑니다.
복음 전파의 역동성은
성령 충만한 개인의 영성과 역량이 아니었습니다.
사도와 복음의 사역자들은 성령의 주권적 복음 사역의 디딤돌이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 그리고 스데반과 사도 바울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여 복음을 능력있게 증거하였지만
로마의 권력과 유대인의 핍박을 받고 고난을 받는 작은 존재에 불과하였습니다.
박해의 칼날에 목 베이고 분노의 돌에 맞아 죽고 쇠사슬에 묶일 수 밖에 었었던 성령 충만한 사역자들은
성령 충만한 능력으로 지상의 파라다이스를 비전으로 꿈꾸지 않았고
성공과 번영의 허황된 비전으로 오염되지 않았으며
오직 영생의 부활 신앙으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영광만을 바라보며 순교자적인 삶을 누렸습니다.
성령의 주권적인 사역은
세속적인 번영과 성공의 부귀영화를 안겨다 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순교와 핍박으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영광으로 받았습니다.
오늘날 자본주의 논리로 경영하는 유사 기독교의 시스템화된 복음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며 다른 차원이었습니다.
사도 행전의 저자 누가는
성령으로 충만한 사도들을 슈퍼맨으로 그려내지 않았습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건강 복음으로 담아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열어 놓으신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정체성을 분명하게 가졌습니다.
순교와 핍박으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하였던 초대 교회 복음의 사역자들은
삶과 죽음의 문제를 초월하여 오직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역동적으로 전파하였습니다.
전도를 훈련하는 세미나와 시스템과는 너무나 다릅니다.
누가의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성령의 주권적인 복음 사역으로 이어가는 모습을 역동적으로 기록하였습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가진 자는
누구든 십자가 고난의 길을 사도행전의 역사로 가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복음은 온실의 관상용 꽃이 아니라
야성의 생명을 가진 역동적인 능력, 그 자체입니다.
복음은 세상과 갈등 구조를 가지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진리의 말씀입니다.
순교자와 전도자는
영생의 꽃으로 피어나는 복음의 향기를 예수의 하나님 나라로 가졌습니다.
사도행전의 역동적인 복음 사역은
역사적인 순환을 되풀이 하며 종말의 때까지 계속 이어질 것입니다.
2000여년의 기독교 역사는
사도행전의 거친 갈등 구조로 얼룩졌습니다.
로만 카톨릭의 종교 재판소에서 희생된 사람만도 600만명이 넘었고.....
사도행전을 이어가는 순수한 믿음의 역사는 순례하는 교회사릉 남겼습니다.
순교사화로 얼룩진 순례하는 교회사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백성을 영생의 부활 신앙으로 알곡의 성도로 모아내었습니다.
순교자와 전도자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복음으로 세우는 진리의 디딤돌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부귀 영화를 신앙의 비전으로 삼지 않았으며
오직 영생의 부활 신앙을 아름다운 영성의 향기로 남겼습니다.
사도적 전통을 가진 교회란
지상의 파라다이스를 신앙의 비전으로 갖는 것이 아니라
영생의 부활 신앙을 순교자적 삶의 향기로 남기며 누리는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하나님 나라의 본향을 사모하였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는 영생의 복을
하나님의 긍휼로 본향의 삶을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