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사도행전 20 : 31 – 35
사도 바울이 3차에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서 밀레도에서 한 주간 머무는 동안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불러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했습니다(35).
사람들은 받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자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사랑에 굶주린 사람처럼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고 축복하면 다들 좋아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병든 남편을 버리고 도망가지만, 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병든 남편을 돌보며 끝까지 삽니다.
‘주는 것’이란 궁핍한 자와 병들고 신체상의 약점을 가진 가난한 사람에게 사랑하는 마음과 함께 물질을 주며 돌보는 것입니다.
부모로부터 재산을 많이 물려받은 사람을 복 많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복권에 일등 당첨된 사람을 보고 복 받았다고 합니다.
‘낮엔 해처럼 밤에 달처럼 그렇게 살순 없을까 ... 나는 주는 것보다 받는 것 더욱 좋아하니’란 복음송은 자신의 자아가 연약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담긴 고백입니다.
‘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자기만을 위하는 ‘탐욕’이지만, ‘주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베푸는 사랑입니다. ‘탐욕’은 재물에 지나치게 탐하는 욕심이지만, 주는 것은 ‘긍휼과 자비’로서 성령의 열매입니다.
바울은 3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며 가르친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에게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복이 있다’고 유언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31,35).
바울은 먼저 자신이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다고 했습니다. 자신이 스스로 일하면서 자신뿐 아니라 동료들의 필요를 채워주기도 하였다고 말했습니다(33,34).
자신이 그들에게 범사에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그들에게도 수고하여 약한 사람을 도우며 주는 자가 복이 있는 자라고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에게도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주는 것’을 ‘공궤’와 ‘공양’ 두 가지로 말씀합니다. ‘공궤’와 ‘공양(供養)’은 사람들에게 먹을 주는 것이지만 그 의미는 다릅니다.
‘공양’은 받기를 바라고 주는 것이지만 ‘공궤’는 받기를 바라지 않고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 받기를 바라고 ‘공양한 것’은 복을 받지 못하지만, 복 받기를 바라지 않고 베푼 ‘공궤’는 많은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을 성경은 말씀합니다.
‘공궤하는 것’이 복이 있다는 사실을 사르밧 과부의 이야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왕상17:1-17).
아합과 이세벨이 온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을 버리고 이방 신들인 바알의 제단을 쌓고 예배드리게 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는 아합에게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했습니다(왕상17:1).
그후 이스라엘은 가뭄으로 마실 물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그릿 시냇가로 가게 하시고 까마귀들에게 아침저녁으로 떡과 고기를 가져다주고 시냇가 물을 마시게 하셨습니다.
그릿 시내가 말라서 마실 물이 없을 때 여호와께서 엘리야에게 사르밧 과부에게 네게 음식을 주게(개역:공궤) 하였으니 가서 머물라고 하셨습니다.
엘리야는 사르밧으로 가서 나뭇가지를 줍는 여인에게 물을 조금과 떡 한 조각을 가져오라고 했습니다. 그 여인은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뿐이라 내가 나무가지를 주어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고 말했습니다.
엘리야는 그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그리하면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느니라’고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르밧 과부에게 음식을 주어 먹게 한 것은 엘리야를 위해서라기보다는 그 과부와 그 아들에게 복 주시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개역개정판은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다’(9)는 말씀을 개역판 ‘공계(供饋)’라고 했습니다. ‘공궤’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행위로서 ‘주린 자에게 식물을 나눠 주는’ 것입니다(사58:7).
기독교의 신앙 중심은 ‘공궤’입니다. ‘공궤’는 굶주린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입니다. 불교의 신앙 중심은 ‘공양’입니다. 많은 것은 받기 원하며 베푸는 것을 ‘공양’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돈 한 푼과 쌀 한 움큼도 베풀면 복을 받는다고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아서 모든 민족을 모으고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같이 의인과 악인을 구분하는 최후의 심판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주님께서 의인들에게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 내가 주릴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헐벗을 때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보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의인들은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공궤)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공궤’는 곧 주님께 한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악인들에게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 가라’고 하시며 ‘내가 주릴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악인들은 ‘주여 우리가 어느 때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라고 말했습니다.
악인들은 자기들은 ‘공양’을 했다고 말하며 ‘우리가 공양한 것을 모르시냐’고 반문했습니다.
의인들은 ‘우리가 언제 공궤하였나이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너희가 공궤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악인들이 ‘공양’한 것은 ‘나를 위해서 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부자의 대문 앞에 버려진 거지 나사로는 부자에게 공궤 할 수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자는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도 거지에게 주지 않았습니다.
부자는 공궤 할 수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공궤하지 않았음으로 죽어 음부에서 고통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공궤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를 공궤하지 않는 기회를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공궤 할 수있는 기회를 주셨을 때 공궤하지 않으면 복을 놓칠 뿐 아니라 음부에 던져져 불꽃 가운데서 고통당하는 부자와 같은 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때 부자가 거지 나사로에게 음식을 주어(공궤) 배부르게 해 주었다면 그것은 곧 예수님께 한 것이 되었을 것이며 음부에 들어가지 않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 작은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결단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마10:42)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은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줍니다.
교회 안에도 ‘공양’하는 믿음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작은 것을 베풀고 큰 것을 받을 것을 믿는 것은 ‘공양’ 신앙입니다. ‘공양’은 불교를 중심으로 우상을 섬기는 자들의 신앙입니다.
분명한 것은 ‘공양’은 아무것도 받지 못하지만, ‘공궤’는 많은 복을 받을 뿐 아니라 영생을 얻게 됩니다.
사르밧 과부는 자기와 아들이 한 번 구워 먹고 죽으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공궤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는 엘리야가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것으로 떡을 구워 엘리야에게 음식을 주어 먹게(공궤) 했습니다.
그렇게 한 그에게 여호와가 지면에 비를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였습니다(왕상17:14,16). 그리고 병들어 죽은 그의 아들을 엘리야가 기도하여 살려 주었습니다(왕상16:23).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는 사실을 오늘날에도 실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많이 있지만, 안의고등학교에서 볼 수 있습니다.
깊은 산중에서 가족도 없이 혼자 염소를 키우는 염소 할머니가 평생 모은 1억 원을 지역사회를 위한 훌륭한 사람을 양성하라고 안의고등학교에 장학금으로 기부한 것을 방송에서 보았습니다(2012년). 12년이 지난 그 할머니가 어떻게 되었을까를 알아보려고 (유트브; 안의고등학교 염소 할머니)에서 찾아보았습니다.
염소 할머니(정갑연 80세)가 12년 전보다 더 건강하고 성숙한 모습으로 교복을 입은 학생들과 함께 이야기하는 사진과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 할머니의 장학금으로 공부하는 학생들이 자주 찾아와서 청소도 하고 말벗이 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어려워서 공부할 수 없었던 많은 학생들이 그 할머니의 장학금으로 공부해서 훌륭한 사회인이 되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받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합니다. 그래서 남을 속여서라도 더 많은 것을 가집니다.
그러나 주는 것을 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가 가진 작은 것으로도 만족하고 감사하며 베풀며(공궤)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공궤한 사르밧 과부가 받은 복을 성경은 말씀하셨습니다. 가뭄이 지날 때까지 가루 통에 가루가 떨어지지 않았고 병에 기름이 떨어지지 않았던 것처럼 물질적인 복을 받게 됩니다(왕상17:16).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최후의 심판 날에 의인들에게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는 말씀처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영생하는 복을 받게 됩니다(마25:34).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습니다. 주는 자가 됩시다. 세상을 사는 동안에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고 복 있는 자로 살다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서 영생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