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직자들에게 부족한 것
b)
a) 성직자들은 왜 yes와 No를 못하는가?
성직자들은 신도들과 토론을 하지 않는 문화에 아주 익숙하게 길들여져 있다. 그만큼 성직자들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관료주의(官僚主義)와 교만한 권위의식에 길들여져 있다. 21세기에
들어와서 더욱 두드러진 것은 자기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목자인, 성직자들을 찾아보기
어려운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강론도 일방통행이고 사순시기와 대림시기의
특강도 대부분이 일방통행이어서 토론은 거의 없다.
성직자들을 대상으로 예배(전례) 활성화를 위해 성직자들이 해야 할 것을 조사한 결과, 성직자들은
전례 활성화를 위해 가장 먼저 “경건하고 정성스러운 전례 거행 노력을 보여야 한다(25%),
예배(전례) 활성화를 위해 성직자들이 다양한 노력을 해야 한다(19.7%)의 순으로 응답했다.
신자들은 예배(전례) 활성화를 위해 사제들이 펼쳐야 할 노력으로 신자들의 마음에 와 닿는
설교(강론 24%), 경건하고 정성스런 예배(전례) 주례(22%) 순으로 꼽았다.”
물론 성직자들에게도 설교(강론)를 잘하기란 아주 어렵고 많은 고충이 있다. 대부분의 성직자들이
설교(강론) 준비를 열심히 하고는 있지만 갈수록 높아가는 신도들의 지적 눈높이에 맞추는 것도
어렵고, 토론 문화가 없다 보니 신도들로부터 피드백을 제대로 받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성직자들의 설교(강론)준비의 어려움으로는 소재의 고갈, 판에 박힌 형식적인 내용과 반복의 우려,
바쁜 일정, 다양한 매체 사용의 부담감, 신도들의 상황과 눈높이에 맞는 준비 등을 꼽았다.
이에 따라 별도로 성직자들의 연구 모임을 통한 연대성 강화, 교구 혹은 지구 차원에서 각종 참고
자료가 적극 지원돼야 할 필요성도 드러났다.
그러나보니 성직자들이 성사와 사무집행에 있어서 갈수록 어려움을 겪는다. 이런 어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하루 빨리 양방의 토론 문화를 정착시켜야 한다. 50년 전 또는 100년 전부터
사용해온 성무집행 매너리즘에 젖거나 답습하다 보면 신도들이 하나 둘 교회를 떠날 것이다.
우리는 어떤가? 모 교회 방송에서 스타강사로 알려진 C성직자가 운영하는 M사목연구소에
궁금한 교리가 있어 연구소에 전화를 했더니 연구소의 직원이 전화를 받고 이메일을 보내라고
했다. 이메일을 세 번이나 보냈는데도 답변은 없었다.
“잘 모르겠는데요. 연구해서 답변해 줄게요”를 할 줄 모르는 성직자들, 전화 답변도 해줄 수
없는 성직자들이 어떻게 토론 문화에 나오겠는가? 성직자들이 신도들과 토론을 활발히 하고
토론 문화를 통해 신도들과 진정한 의미에서 형제자매가 되기 위해서는 우선 겸손해야 한다.
권위주의나 관료주의 문화에 젖어서는 토론 문화가 정착될 수 없다. 겸손은 상대방의 종이 되는
비천함에서 나오는 것이다. 성직자도 토론에서 평신도에게 배워야겠다는 겸손이 토론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도 우리 비천한 인간을 위하여 종이 되시지 않으셨는가? 바오로 사도의 말을
들어 보자 “나는 단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께서 진실하심을 드러내시려고 할례 받은
이들의 종이 되셨습니다(로마서 15:8). 성직자들이 신도들과의 토론 문화에 적극 참여해야 교회가
활성화 될 수 있다. 성직자들이여! 토론을 두려워하지 마라. 신학교에서의 공부만으로 성직이 철
밥통이라고 생각하던 시절은 지났다. 패러다임을 바꿔 시대정신을 올바로 인식하고 시대 변화에
적응해 주기 바란다. 어른은 어린이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는 사실과 평생 학습의 중요성을
명심해 주기 바란다.
b) 성직자들은 설교(강론)를 준비하기 위해 얼마나 열정을 다하는가?
성직자의 첫째 직무인 말씀 봉사 중에서 설교(강론)는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신도들은
성직자의 설교(강론)에서 영적 힘을 많이 얻으려고 한다. 신도들은 영적으로 그리고 육적으로
피곤한 심신에 많은 힘을 얻고 재충전하려고 한다. 전임 베네딕토 16세 교황도 “강론은 성경에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메시지를 현재화하여 신도들이 현재의 자신의 삶에서 하느님 말씀의 현존과
그 활동을 발견하게 해주는 것이다.”라고 정의하였다. 그러므로 설교자에게 중요한 것은 모든
설교(강론)의 중심이 되셔야 하는 그리스도를 신자들에게 극명히 분명하게 보여주어야 한다.
분명하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성직자들이 추상적인 설교(강론)를 피하여야 한다. 피하기 위해서는,
성직자들 스스로 복음적인 삶을 먼저 살아내야 한다. 삶의 현장에서 살아낸 복음적인 삶을
신도들에게 간증하여 신도들이 감동을 받고 재충전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물론 어렵고 힘든
일이다. 그래서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한두 시간 투자해서 대충 준비하는 설교(강론)만으로는
21세기 신도들의 영적인 눈높이를 맞출 수 없다. 따라서 설교자들은 21세기의 정보화시대, 글로벌
시대에 맞게, 그리고 갈수록 높아지는 신도들의 지적 눈높이에 맞게 설교(강론)를 하여야 한다.
수학을 잘하는 학생들이 수학 시간을 고대하고, 수학 선생을 보고 싶어 학수고대 하듯이 성직자들은
설교(강론)를 잘 하여야 한다. 그래서 신도들이 다음 주일의 성직자들의 설교(강론)를 학수고대
하도록 만들어 주어야 한다. 해답은 있다. 설교(강론)가 성경 본문과 친밀해야 하고 꾸준히 성경을
읽고 묵상하여야 하며, 무엇보다도 성직자들이 복음적인 삶을 삶의 현장에서 살아내야 한다.
설교(강론)가 참된 영적 양식이 되고 신도들이 새로운 한 주간을 활력 있게 복음적인 삶을 살도록
성직자들이 도와주기 위해서는 "정통성을 갖고 있는 교회의 살아 있는 전통"으로 교회를 활성화
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성직자들도 이제는 설교(강론)를 능동적으로 마켓팅 하여야 한다.
성직자들이 마켓팅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신도들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서 교회의 예배에
참례해서 마치 돈을 주고 구입할 정도의 설교(강론)를 신도들에게 하여야 한다. 신도들이 영적으로
또는 물적으로 구입하지(purchase) 않는 설교(강론)는 더 이상 설교(강론)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것을 성직자들은 통찰하고 배수진을 치고 설교(강론) 해야 한다. 신도들도 설교(강론) 내용을 귀담아
듣고 간직하고 실생활에서 복음대로 살아야 한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본질적
자세이기 때문이다.
c) 성직자들은 왜 울지 못하는가?
21세기는 정보의 홍수화 시대이다. 정보의 홍수화 시대에 살고 있는 성직자들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하였다. 재미있는 결과가 나왔다. 성직자들도 바쁘다는 대답이 가장 많이 나왔다. 사목
목적으로 가정방문을 하는 것도 전혀 아닌데 바쁘다. 본업을 팽개치고 바쁘다 보니 감정이
메말라 있다. 감정은 없고 사무적이고 관료적이고 권위적이다. 형제자매가 선종을 해서 연도에
가서 기도해 봐도, 장례미사에 참례해도 성직자들이 선종한 형제자매를 위해 우는 것을 보기란
아주 어려운 현실이다. 심지어 사목회의 분과 위원장으로 봉사를 하고 성직자와 많은 친교를 가진
분이 선종하였는데도 성직자들이 심각한 얼굴 표정은 짓는데 슬퍼 우는 성직자는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거의 없었다.
교회에서 위원장 급 직위를 가지고 봉사한 자매가 있었다. 그 자매의 모친이 서울이 아니고 멀지
않은 가까운 지방 도시에서 거주하다 선종하였다. 교회에 성직자가 세 명인데도 지방도시라는
이유로 어느 누구도 문상 가는 일 조차 없었다. 성직자들 그들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바쁨”이라는 물신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는 것이 21세기의 성직자의 하나의 단면이다. 이 모든
상황을 바쁘다는 것으로 치부하는 성직자들 스스로는 모른다. 그러다 보니까, 성직자들 스스로도
세계화의 급류에 말려 이미 세속인들과 함께 떠밀려 하류(더 바쁜 세속)로 하염없이 이정표도 없이
떠내려가고 있다. 그러니 교회에 소속되어 능동적으로 활발히 활동하는 형제자매가 선종해도
어떻게 울어야 하는지?, 어떻게 연민해야 하는지? 어떻게 형제자매의 죽음에 슬퍼하고 애통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성직자들은 이미 상실하였다. 잃어버렸기 때문에 울 줄을 모른다. 감정이 메말라
있다. 예배(전례) 규정에 따라 장례예배를 집전하면 임무를 다 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더구나 장지에 가서 기도해 주고 같이 울어주는 성직자를 찾아보기는 더더욱 어려운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그만큼 21세기를 살아가는 성직자들도 청개구리 같이 위선에 아주 능수능란하다. 감정이 없기
때문에 빚어진 부산물이며 “바쁨”이라는 물신의 지배를 받고 살아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