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충청도 은진의 서쪽 강경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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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jy9713
2023.12.30. 22:08조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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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진의 서쪽 강경포구
‘강경장에 조기배가 들어왔나?’라는 말은 강경장에 조기배가 들어왔을 때 소란하듯이 시끄럽다는 뜻인데, 이중환은 『택리지』에 그 강경을 두고 다음과 같이 적었다.
강경은 은진의 서쪽에 있으며 들 가운데 작은 산 하나가 불끈 솟아나서 동쪽을 향해 있고, 두 줄기 큰 강(금강과 논산천)을 좌우로 마주하였다. 뒤로 큰 강이 바다와 통하지만 물맛이 그리 짜지 않다. 마을에는 우물이 없어서 온 마을에 집마다 큰 독을 땅에 묻은 뒤 강물을 길어 독에 부어둔다. 며칠 후 탁한 찌꺼기는 밑에 가라앉고 윗물은 맑고 서늘하여 오래 두어도 물맛이 변하지 않는다. 오래될수록 더욱 차가워지며 10년 동안 장질(藏疾)을 앓던 사람이라도 1년만 이 물을 마시면 병의 뿌리가 없어진다 한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강물과 바닷물이 서로 섞이는 곳에 반쯤 싱겁고 짠물이 토질(土疾)을 고치는 데 가장 좋은데, 이 강물이 첫째다”라고 하였다.
대구, 평양과 함께 조선의 3대 시장으로 불릴 만큼 세력이 컸던 강경은 금강 하구에 발달한 하항(河港) 도시로 내륙 교통이 불편하던 때 물자가 유통되던 요충지였다. 이중환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육지와 바다 사이에 위치하여 금강 남쪽 가운데에 하나의 큰 도회지가 되었다”라고 강경을 평하면서 “바닷가 사람과 산골 사람이 모두 여기서 물건을 내어 교역한다.
강경포구 © 유철상
조선 말기 강경장을 배경으로 크게 번성했던 포구다. 지금은 지방의 소시장과 젓갈시장으로만 남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매양 봄여름 동안 생선을 잡고 해초를 뜯는 때에는 비린내가 마을에 넘치고 작은 배들이 밤낮으로 두 갈래진 항구에 담처럼 늘어서 있다. 한 달에 여섯 번 열리는 큰 장에는 먼 곳과 가까운 곳의 화물이 모여 쌓인다”라고 기록하였다. 가깝게는 금강 상류의 공주, 부여, 연기, 청양 지방과 멀리는 청주, 전주 지방까지 포함하는 넓은 배후지를 지녔을 뿐만 아니라 편리한 수운에 힘입어 큰 교역 장소로 발달하였던 강경포는 크고 작은 어선과 상선의 출입이 많았다.
당시의 이름은 강경포였고 ‘은진(지금의 논산)은 강경 덕에 산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번창했던 곳이다. 그 무렵의 충청도는 물론이고 전라도, 경기도 일부까지 강경포를 중심으로 상권이 형성되어 있었다. 조선 말기까지 금강 연안 일대의 가장 큰 포구였고 원산, 마산과 함께 대표적인 어물 집산지였으며 충청도와 전라북도 그리고 경기도 남부까지 큰 상권을 형성하였으나, 1905년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급속히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육로나 수로를 이어주던 강경이 한적한 읍내로 전락하게 된 가장 큰 이유를 1982년 강경읍에서 발행한 『읍세일람(邑勢一覽)』은 이렇게 적고 있다.
해방 후부터는 군산 국제항이 황폐화되고 설상가상으로 6ㆍ25동란 시 시가 중심지의 7할 이상이 파괴되다 보니 황량한 돌바람이 더욱 장연한 바 있었으니······.
김주영의 대하소설 『객주』는 문경새재와 강경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충청도와 전라도 사이에 끼여 있는 바닷사람과 내륙의 사람들이 여기에 모여 교역이 활발하였다. 봄과 여름 동안은 생선을 잡고 해초를 뜯느라고 비린내가 넘치고 5월의 황새기젓과 7월의 새우젓이 풀릴 때는 오륙십 척의 배가 몰려들어 화장들이 내뿜는 연기로 포구와 하늘은 암회색의 바다였다.
오늘날 강경포구에는 젓갈만 남아 있다. 김주영이 『객주』에서 묘사했던 강경포구는 몇 척의 배와 낚시꾼들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이중환과 동시대를 살았던 안석경은 강상과 객주의 애환을 담은 이야기를 여러 편 지었는데, 『삽교만록(霅橋漫錄)』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선대로부터 재산을 물려받은 서울의 한 부자가 많은 돈을 가지고 더욱 재산을 불리다가 직접 장사에 투자해 돈을 벌어볼 생각을 가지고 강경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그는 장사 경험이 없어 재산을 투자할 방법도 몰랐지만 강경포구의 그 번성함에 정신을 못 차리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때 마침 다리를 저는 거간꾼(객주)을 만나게 되었다. 그는 처음 만난 그 객주에게 가지고 온 10만 전을 주어버리고 서울로 돌아갔다. 느닷없이 큰돈을 건네받은 객주는 그 돈으로 엽연초를 대량으로 구입하여 담배가 품귀일 때 한꺼번에 처분하여 열 배의 이익을 남겼다. 객주는 서울의 부자를 찾아가 원금과 함께 많은 이자를 주고자 하였다. 그러나 서울 부자는 “본전을 잃지 않고 일가족의 명을 구제했으니, 나의 소득 또한 적은 것이 아닙니다. 하물며 분수 밖의 이익을 얻어서야 되겠습니까?” 하면서 본전만 받았다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돈 앞에 성인군자 없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 속 부자는 보기 드물게 맑은 정신을 가진 사람인 듯하다.
현재의 강경은 금강 하굿둑이 생기면서 막혀 뱃길이 끊어진 채 온갖 젓갈의 주산지로만 남아 있다.
강경 미내다리
채운면의 제방 밑에는 조선시대에 세워진 무지개 모양 돌다리인 미내다리가 있다. 강경천을 미내라고 부른 데서 연유한 명칭이다.
1930년대에 강경을 다녀갔던 시인이자 국문학자인 이병기는 “강경은 수(水)의 도회(都會)다. 백마강 1) 이 있고 조수가 드나듦은 물론이거니와 고산 한쪽 물과 연산, 노성, 석성, 은진, 여산 여러 방면의 물이 모두 이리 모여들어 흐른다. 그리고 비단 쪽 같은 평야를 끼고 교통도 편리하여 수륙 산물이 모여들고 모여 나며 예전부터 일(一) 원산, 이(二) 강경이라 일컫던 이름난 도회였다”라고 강경을 묘사하였다.
그러나 “부드러운 기풍을 지니고 있으며, 검소함을 높이 여기는 풍습이다”라고 실려 있는 석성고을은 부여에 딸린 하나의 면이 되었다. 조선 전기의 문신인 최숙생은 석성현 객관에서 나그네의 쓸쓸함을 한 폭의 풍경화처럼 그려냈다.
황혼에 날리는 비 다시 하늘에 자욱한데
뚝뚝 떨어지는 처마 물소리 나그네 베개 가에 들려오네.
반짝거리는 파란 등불 때로 어두우려 하고
짙고 얕은 나그네 시름이 꼬리 물고 찾아든다.
동풍 방초(芳草) 천 리에 아득한데
흰 머리 타향에서 한 해를 보냈네.
만 번 죽을 몸 돌아와서 성군을 만났으니
이 몸 어찌 편안히 구름 연기 속에 늙으랴.
강경포를 내려다보고 있는 옥녀봉 위에는 ‘용영대(龍影臺)’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강경포를 드나들던 뱃사람들이 이곳에서 용신에게 제사를 지내며 뱃길의 안전과 만선을 빌었다고 한다. 용영대 밑에는 포영대라는 바위가 있고 그 바위에서 내려다보면 발아래로 보이는 금강이 익산 쪽으로 흘러가는 경관이 더없이 아름답다. 그런 연유로 ‘강경 사람 벼락바위 쳐다보듯 한다’라는 말이 생겨났다. 이는 강경 지방은 들판이라 높은 바위를 보면 그 바위가 떨어질까 봐 자꾸 쳐다보듯이, 낯선 것을 보면 자꾸 쳐다보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한편, 포영대와 나란히 서 있는 조수바위에는 조수가 드나드는 시간을 알리는 시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근현대로 접어들면서 강을 따라 번성했던 고을들은 급속도로 쇠퇴하기에 이르렀다. 장삿배들이 외상 거래를 하던 강가에 인접한 고을들은 이제 도시의 한 부분이 되거나 이름 없는 쓸쓸한 시골 마을이 되고 말았다.
밑천이 많은 큰 장사를 말한다면, 한 곳에 있으면서 재물을 부려 남쪽으로 왜국과 물자를 교역하고 북쪽으로 중국의 연경과 통한다. 여러 해 동안 천하의 물자를 실어 와서 혹 수백만 금의 재물을 모은 사람들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한양에 많이 있고 다음은 개성, 또 다음은 평양과 안주에 많다. 모두 중국의 연경과 통하는 길에 있는 곳의 사람들이 큰 부자가 되었는데, 이것은 배를 통하여 얻는 이익과 비교할 바가 아니며, 삼남에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대부는 이런 일을 할 수 없고, 다만 생선과 소금이 서로 통하는 곳을 살펴서 배를 두고 그것으로써 생기는 이득을 받아서 관혼상제에 드는 비용에 보태는 것은 그렇게 해로운 일은 아닐 것이다.
- 『택리지』 「복거총론」
강경읍내 전경 © 유철상
육로나 수로를 이어주던 강경은 1905년 경부선 개통 이후로 급속히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지금은 한적한 읍내의 모습이다.
『택리지』에서 교역의 중요성을 들었던 이중환이지만 사대부로서 장사를 하기란 어렵다고 하여 근대적 인식에는 한계를 보여주고 있다. 특히 조선은 농업을 국가 경제의 근본으로 삼았기 때문에 어업과 공업, 해운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천시하였다. 조선 후기의 학자로 『임원경제지』를 지은 서유구도 그와 같은 의견을 피력하였다.
재물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도 땅에서 솟아나는 것도 아니다. 교역을 하면 반드시 재물을 얻는 법이다. 남으로는 일본, 북으로는 중국과 무역을 해서 수백만 금을 벌어들인 자들이 있다. 그들은 한양에 가장 많고, 다음이 개성이며, 그다음은 동래와 밀양 그리고 관서지방의 의주와 안주, 평양에 많다. 그 모두가 남북을 연결하는 통로에 있어 국내의 상업에서보다 배 이상의 이익을 얻고 있다.
그처럼 국제 무역으로 부를 축적했던 상인들의 후예가 세계를 무대로 무역 활동을 벌여서 대한민국을 세계 10위권의 부강한 나라로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은진의 서쪽 강경포구 (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5 : 충청도, 2012. 10. 5., 신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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