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04) 忠南 牙山 忠武公 李舜臣記念館
忠武公 李舜臣記念館
忠武公 李舜臣記念館은 壬辰倭亂때 나라를 구한 李舜臣將軍과 朝鮮水軍의 活躍相을 담은 곳으로,
2011년 竣工·開館했다. 기념관은 忠武公關聯遺物과 壬辰倭亂당시 海戰史料를 수집하고, 이를 展示·
敎育하기 위한 歷史테마館으로, 延面積 3,104㎡(939坪) 地下 1층, 地上 1층의 철근콘크리트 構造이다.
(01) 忠武公 李舜臣 記念館
잔디를 입힌 언덕모양의 두 建物(管理棟과 敎育館)속에 흙벽을 입힌 展示棟이 안겨 있는 形象이다.
(02) 天字銃筒
朝鮮의 火砲는 크기, 火藥의 重量과 射程距離에 따라 天·地·玄·黃順으로 명칭을 붙였으며, 天字銃筒은
地字·玄字·黃字銃筒보다 크며, 길이 약 1.5m, 砲口口徑 약 13㎝, 射程距離 약 1.6㎞ 또는 2.16㎞이다.
현재 天字銃筒은 2점이 남아있으며 明宗 10년(1555) 제작한 嘉靖乙卯銘天字銃筒(보물 제647호)은
國立晋州博物館, 1점은 顯忠祠에 所藏되어 있으며, 製作年代는 알 수 없으나 壬辰倭亂以後의 것으로
보고 있다. (*筒: 대통 통 *嘉: 아름다울 가 *靖: 편안할 정)
(03) 玄字銃筒(오른쪽) - 黃字銃筒(왼쪽)
*玄字銃筒: 길이 79cm, 口徑 7.5cm, 射距離 약 1,6km의 靑銅製이며 1984년 慶南 巨濟郡 新縣邑 古縣灣에서
水中浚渫作業中에 발견된 玄字銃筒(보물 제885호)은 國立晋州博物館이 소장하고 있다.
(*浚: 깊게 할 준 *渫: 파낼 설)
*黃字銃筒: 길이 50.4cm, 口徑 4cm, 射距離 약 1.1km이며 宣祖 20년(1587) 鑄造된 黃字銃筒(보물 제886호)은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04) 飛擊震天雷(複製)-勝字銃筒(오른쪽)
=飛擊震天雷는 宣祖때 軍器寺의 火砲匠 李長孫이 발명한 人馬殺傷用 爆彈으로 지름 21㎝, 둘레 68㎝로
壬辰倭亂때 慶州府尹 朴毅長이 사용해 慶州城을 탈환하기도 했다. 國立故宮博物館이 소장하고 있는
飛擊震天雷(보물 제860호)는 우리나라에 現存하는 遺物중에서 가장 保存狀態가 좋아 火砲硏究와
彈丸發展史資料로서 높은 가치가 있다. (*毅: 굳셀 의)
=勝字銃筒은 小形의 個人携帶用火器로 길이 56.8㎝, 口徑 4㎝, 무게 4.5㎏으로 宣祖 12년(1579) 全羅左水使
金遲가 만들었으며 1583년 尼湯介의 亂때 큰 몫을 했으나 壬辰倭亂때는 倭軍의 鳥銃때문에 그 威力을 잃었다.
勝字銃筒은 여러 점이 남아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勝字銃筒은 보물 제648호로 지정되었다.
(*携: 이끌 휴 *尼: 여승 이 *遲: 더딜 지)
(05) 各船圖本 戰船 -서울대학교 奎章閣 所藏本 複製
各船圖本은 朝鮮後期 戰船·兵船·漕運船의 彩色畵 6枚를 모아 만든 圖本으로 筆者와 著作時期는 알 수 없으며
上粧이 있는 戰船 1枚, 상장을 철거한 戰船 2매, 兵船 1매, 남부와 북부지방의 漕運船 각각 1매가 수록되었다.
그림의 戰船인 板屋船은 거북선과 함께 朝鮮水軍의 主力船으로 갑판위에 있는 ‘板屋’이라는 구조물로 인해
‘板屋船’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明宗 10년(1555) 平船인 猛船을 대신해 지붕을 덮어 2층구조로, 노를 젓는
兵士들은 아래층에, 攻擊하는 병사들은 윗층에 배치했으며 乘船人員은 약 125~130명이었고, 배가 높은
2층구조로 倭寇들이 기어오를 수가 없었으며, 壬辰倭亂이 끝나고 ‘板屋船’은 ‘戰船’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漕: 배로 실어나를 조)
(06) 全羅左水營 거북선
正祖 19년(1795) 刊行한 <李忠武公全書>에 실려 있는 그림 중 全羅左水營 거북선모습을 그린 것으로,
이 책 제1권에 그림을 그려 설명한 곳에 統制營과 全羅左水營의 두 가지 거북선그림이 694字의 설명과 함께
수록되었으며 거북선에 대한 가장 충실한 기록이다.
(07) 거북선의 歷史
(08) 亂中日記 草稿本 -국보 제76호/유네스코世界記錄遺産(2013년 등재)(*複製)
李舜臣 亂中日記 및 書簡帖 壬辰狀草(국보 제76호)중 [亂中日記 草稿本]은 李舜臣이 壬辰倭亂中에 親筆로 쓴
7년간의 陣中日記로 宣祖 25년(1592) 壬辰倭亂이 일어난 다음 달인 5월 1일부터 戰死前인 宣祖 31년(1598)
10월 7일까지의 記錄으로, 본래는 어떤 이름이 붙어 있지 않았으나 正祖 19년(1495) <李忠武公全書>를
편찬하면서 편의상 ‘亂中日記’라는 이름을 붙였으며, 亂中日記 草稿本은 7권으로 구성되었다.
제1권<壬辰日記> 27매(1592.5.1∼1593.3.22), 제2권<癸巳日記> 30매(1593.5.1∼1593.9.15),
제3권 <甲午日記> 52매(1594.1.28∼1594.11.18), 제4권 <丙申日記>41매(1596.1.1∼1596.10.11),
제5권 <丁酉日記> 27매(1597.4.1∼1597.10.28), 제6권 <丁酉戊戌日記> 20매(1597.8.4∼1598.1.4),
제7권 <戊戌日記> 8매(1598.9.15∼1598.10.7)로 구성되었다. 그 밖에 狀啓·謄本, 別冊附錄끝에
1598년 11월 8일부터 17일까지 최후 10일간의 日記가 1장으로 되어 있다. 7년간의 戰爭동안 倭敵과
싸우면서 계속 쓴 것으로, 後孫들이 代代로 保存하며 390여년을 간직해 왔으며, 내용 중에는 水軍統制에
관한 軍事秘策과 戰況을 보고한 狀啓의 草案등이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어 史料와 당시 戰況은 물론
軍事制度에 대해서도 價値가 매우 높은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帖: 문서 첩 *啓: 영 계 *謄: 베낄 등)
(09) 續 丁酉日記 -국보 제76호/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2013년 등재) (복제)
宣祖 30년(1597) 8월 4일부터 1598년 1월 4일까지의 日記로, 丁酉日記와 66日間이 重複되나 記述이 일치하지 않아
서로 補完되고 각각 史料로 價値가 있으며 1597년 9월 鳴梁海戰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鳴: 울 명)
(10) 李忠武公全書 <亂中日記>
正祖 19년(1795) 忠武公과 관련된 자료를 總網羅해 8책 14권으로 刊行했으며 綸音, 狀啓, 亂中日記 등을 收錄했다.
本書에 수록된 일기를 草稿本과 구별해 ‘全書本’이라고 부르며 編名이었던 ‘亂中日記’로 오늘날까지 通稱되고 있다.
*綸音: 임금이 臣下나 百姓에게 내리는 말로 오늘날의 법령과 같은 威力을 지닌다. (*綸: 벼리 윤)
*狀啓: 王命을 받고 地方에 나가 있는 臣下가 自己管下의 중요한 일을 왕에게 보고하던 일 또는 그런 文書.
(*啓: 열 계)
(11) 書簡帖 -국보 제76호(복제)
李舜臣이 親戚들에게 보낸 便紙 6편을 모아 엮은 私私로운 便紙글로 李舜臣의 따뜻한 人間味를 느낄 수
있으면서도, 편지마다 戰亂을 걱정하는 애타는 心情이 잘 드러나 있다.
(12) 壬辰狀草 -국보 제76호(복제)
李舜臣 亂中日記 및 書簡帖 壬辰狀草(국보 제76호)중 壬辰狀草는 忠武公이 宣祖 25년(1592) 4월 1일 全羅左道
水軍節度使로 在任할 때부터 宣祖 27년(1594) 正月 10일 三道水軍統制使를 兼職할 당시까지 軍務에 관한 사항을
보고한 狀啓草案으로 모두 184장 1권으로 당시의 戰況과 軍事支援體制에 관한 사항이 소상하게 表現∙記錄했다.
(13) 李忠武公 全書
正祖 19년(1795) 王命으로 柳得恭이 감독·편집하여 校書館에 局을 설치해 活字本 14권 8책으로 간행했다.
책 머리에 正祖의 綸音을 비롯하여 敎諭·賜祭文·圖說·世譜·年表를 싣고, 卷1에 詩·雜著, 卷2∼4에 狀啓,
卷5∼8에 亂中日記, 卷9∼14에 附錄을 수록했다. 卷首圖說에는 거북선그림이 統制營龜船圖와 全羅左水營
龜船圖가 漢字 694字의 설명과 함께 收錄했는데 이 그림은 가장 오래된 거북선 그림으로 거북선의 實體를
밝히는 가장 權威있는 史料로 평가된다. 이 책은 朝鮮時代 出版文化의 標本典籍과 李舜臣傳記 資料 및
壬辰倭亂史硏究에 귀중한 자료이다. (*恭: 공손할 공 *綸: 벼리 윤 *諭: 타이를 유 *龜: 거북 귀)
(14) 忠武公 長劍 -보물 326호 (*문화재청 사진)
李舜臣 遺物一括 -보물 제326호
李舜臣 遺物一括은 壬辰倭亂중에 李舜臣將軍이 사용하던 것으로,
그의 崇高한 精神이 서려 있는 유물이며 長劍 2점, 玉鷺 1점, 腰帶,
桃盃俱臺(복숭아모양 술잔) 1쌍이다. (*鷺: 백로 로 *腰: 허리 요
*桃: 복숭아 도 *俱: 갖출 구)
長劍 2점은 길이가 각각 197.5cm로 宣祖 27년(1594) 4월 閑山島 陣中에서
‘甲午年 四月 太貴連과 李茂生이 만들었다’고 새겨 있다.
칼날에 ‘三尺誓天 山河動色(삼척서천 산하동색)’과 ‘一揮掃蕩 血染山
(일휘소탕 혈염산하)’ 즉 ‘석자 되는 칼로 하늘에 맹세하니 산과 물이 떨고,
한 번 휘둘러버리니 피가 江山을 물들인다’라고 새겼다. (*誓: 맹세할 서)
*長劍은 길이 197.5cm, 무게 4㎏으로 볼 때 實戰用보다는 儀仗用으로 보고
있으며, 專門家들은 裝飾, 入絲文樣등 朝鮮의 뛰어난 工藝文化와 製鐵技術,
그리고 刀劍文化가 발달한 日本刀樣式까지 받아들인 朝鮮最高의
名品刀劍으로 꼽고 있다.
(15) 玉鷺 –보물 제326호
李舜臣의 遺品으로 玉鷺는 높은 벼슬아치나 外國에 가는 使臣이 갓머리에 단 裝飾品으로 白玉으로 만들었으며,
둥근 金銅받침위에 연꽃 잎에 싸여 있는 해오라기[鷺] 3마리를 透刻했다. (*鷺: 백로 로 *透: 사무칠 투)
(16) 腰帶 -보물 제326호
亂中日記에 적은 明나라 장수 王元周가 膳物한 金帶로 보고 있으며 무소 뿔로 만든 허리띠 장식 띳돈은
구름위에 師子를 조각한 위에 金漆했다. (*漆: 옻 칠)
*띳돈: 朝服의 띠에 붙이던 납작한 裝飾으로, 品階에 따라 犀角, 金, 銀을 썼다.
(*犀角: 코뿔소의 뿔 *犀: 물소 서)
(17) 복숭아모양 술잔[桃盃俱臺] 1쌍 -보물 제326호
亂中日記에 明나라 將帥 陳把總(陳國敬)에게서 받은 ‘花酒盃一對(한 쌍)’로 보고 있으며 桃盃는 그 형태가
복숭아와 같아서 생긴 이름으로, 얇은 구리판에 金을 입혔으며 꼭지 쪽에 둥근 손잡이가 달리고 표면에는
복숭아 잎 3개가 붙어 있다. (*俱: 갖출 구 *把: 잡을 파)
(18) 武科及第 敎旨 -보물 1564-7호(복제)
宣祖 9년(1597) 李舜臣이 式年武科에 丙科 第四人으로 及第하고 받은 敎旨로 文∙武科의 최종합격자에게 내리는
合格證書인 이 敎旨는 붉은 바탕의 종이에 썼다고 ‘紅牌’라고도 한다.
*式年武科(武科式年): 式年 즉 子∙午∙卯∙酉年에 거행하는 初試∙覆試∙殿試 등의 武科試驗.
(*覆試: 科擧應試者가 거쳐야 할 2단계 시험.)
*敎旨: 朝鮮時代 國王이 官員에게 내리는 各種 文書.
(19) 壬辰倭亂 主要海戰
=閑山海戰 (1592,.07.08)
70餘隻의 日本水軍의 大艦隊를 閑山島앞바다로 誘引해 鶴翼陣으로 包圍攻擊해 殲滅한 壬辰倭亂 三大捷中의
하나이다. 이 海戰으로 日本軍은 바다로 兵站線을 옮기려던 계획이 무너지고, 陸地에서도 더 이상 進擊하지
못하게 되었다. (*捷: 이길 첩)
=鳴梁海戰 (1597.09.16)
珍島앞 울돌목(鳴梁海峽)에서 불과 13隻의 艦隊로 130餘隻이 넘는 日本水軍을 무찔러 世界에 類例가 없는
勝利를 얻어낸 海戰이다. 이 海戰의 勝利로 朝鮮水軍은 漆川梁海戰 이후 氣勢가 오른 日本軍의 再侵略意志를
꺾고 다시 危機에 빠졌던 朝鮮을 살려내게 되었다.
=露梁海戰 (1598.11.19)
뱃길을 열어 退却하기 위해 朝明聯合水軍을 包圍攻擊하려는 日本水軍을 南海 露梁앞바다에서 막아 擊退한
壬辰倭亂 마지막 海戰이다. 이 海戰에서 李舜臣은 敵의 流彈에 맞아 숨을 거두고 7年戰爭이 막을 내리게 되었다.
(20) 李舜臣 死後 贈職∙贈諡와 祠堂建立
=右議政 -宣祖 31년(1598)
증(贈)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 겸 영경연사
-忠愍嗣 (全南 麗水) -宣祖 34년(1601) (*愍: 근심할 민)
*大匡輔國崇祿大夫: 朝鮮의 散職中 最上位 品階로, 正一品의 上階에 해당한다. 아래로 正一品 下階 輔國崇祿大夫가
있다. (*散職: 일정한 職務가 없는 벼슬)
* 議政府 右議政: 朝鮮時代 百官의 統率과 庶政을 총괄하던 최고의 行政機關*右議政: 正一品 官職
*領經筵事: 朝鮮時代 三議政이 兼職한 文班官職으로, 經筵官中에서 가장 높은 官職. 대개 領議政·左議政·右議政 3人이
兼했다. (*經筵官: 임금에게 儒學의 經書를 講論하는 經筵에 참여한 관직) (*筵: 대자리 연)
=宣武 一等功臣 左議政 -宣祖 37년(1604) -忠烈祠 (慶南 統營)
증(贈)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사 덕흥부원군
*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 (*迪: 나아갈 적)
宣武功臣은 倭軍征伐에 功을 세운 將帥들과 明나라 군대에 軍糧供給을 담당한 使臣들을 대상으로 했는데,
扈聖功臣, 淸難功臣과 마찬가지로 그 功에 따라 1등, 2등, 3등으로 나누어 錄勳했다.
1등에게는 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 2등에게는 效忠仗義協力宣武功臣, 3등에게는 效忠仗義宣武功臣이라는
封號를 주고, 모두 君으로 封했다.
*大匡輔國崇祿大夫: 朝鮮時代 正一品 東西班 文武官에게 주던 最高品階.
=忠武公 -仁祖 21년(1643)
증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贈 孝忠杖義迪毅協力宣武功臣 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좌의정 겸 영경연사 덕풍부원군 증시 충무공(議政府左議政 兼 領經筵事 德豐府院君 贈諡 忠武公)
-顯忠祠 (忠南 牙山) -肅宗 32년(1706)
*孝忠杖義迪毅協力宣武功臣
*宣武功臣: 壬辰倭亂에서 倭軍征伐에 功을 세운 將帥와 明軍의 接伴使로 활약한 관리들에게 지급된 勳功.
(*接伴使: 外國使臣을 접대하는 일을 맡은 임시 벼슬)
=領議政 -正祖 17년(1793)
증 효충장의적의협력선무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덕풍부원군 증시 충무공
(21) 宣武功臣 敎書 -보물 1564-1호(複製)
*李舜臣 戰死 6年後인 宣祖 37년(1604) 壬辰倭亂에 빛나는 戰功을 세운 忠武公 李舜臣에게 내린 宣武功臣 敎書로
정식명칭은 <效忠仗義迪毅協力宣武功臣>이다. 宣武功臣은 壬辰倭亂에서 큰 功을 세운 將軍 18명에게 내린
功臣稱號로 李舜臣은 一等功臣 3명 중에서도 으뜸인 元勳이다. (*勳: 공 훈)
(22) 宣武功臣 敎書 -보물 1564-1호(複製)
宣武功臣 1등은 ‘孝忠仗義迪毅協力 宣武功臣’이라는 號가 부여되고 李舜臣∙權慄∙元均등 3명,
2등은 ‘效忠仗義協力 宣武功臣’으로 申點∙權應銖∙金時敏∙李廷馣∙李億祺 등 5명, 3등 ‘效忠仗宣武功臣’은
鄭期遠∙權悏∙柳思瑗∙高彦伯∙李光岳∙趙儆∙權俊∙李純信∙奇孝謹∙李雲龍등 10명으로 모두 18명이다.
(*銖: 저울눈 수 *馣: 향내 암 *祺: 길할 기 *悏: 쾌할 협 *儆: 경계할 경)
*1등은 官爵과 品階가 3段階 오르고, 賞으로 兵卒 10명, 奴婢 13명, 馬夫 7명, 田地 1백 50結, 銀子 10냥,
말 1필을 받았으며, 2등은 官爵과 品階가 2단계 오르고 상으로 병졸 6명, 노비 9명, 마부 4명, 전지 80결,
은자 7냥, 말 1필을, 3등은 官爵과 品階가 1단계 오르고 賞으로 병졸 4명, 노비 7명, 마부 2명, 전지 60결,
은자 5냥, 말 1필을 받았다. (*結: 農土의 面積 單位로 時代에 따라 변했으며, 世宗때는 9,859㎡, 仁祖 때는
10,809㎡로 변경되었다.)
(23) 起復授職敎書 -보물 1564-3호(複製)
宣祖 30년(1597) 7월 16일 元均의 水軍이 巨濟島 漆川梁海戰에서 大敗해 危機에 처하자 그로부터 7일만에
宣祖는 母親喪을 당 한지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白衣從軍하고 있던 李舜臣을 다시 三道水軍統制使로
任命하면서 내린 敎書이다.
*起復: 父母喪中에는 벼슬을 하지 않는다는 慣例를 깨고 벼슬자리에 나아가는 것.
*多急했던 宣祖는 李舜臣에게 敎書를 내리면서 “지난 번에 그대의 地位를 바꿔 오늘 같은 敗戰의 치욕을
당했으니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라고 말했다고 한다.
(24) 賜符諭書 -보물 1564-4호(복제)
宣祖 24년(1591) 李舜臣이 全羅左道 水軍節度使로 任命되면서 받은 諭書이다. 全羅左水營은 지금의 麗水에
本營을 두고 그 소속으로 防畓, 呂島, 沙島, 鹿島, 鉢浦 등 5개 水軍鎭營과 順天, 樂安, 寶城, 光陽, 興陽등
5개 고을을 거느렸다. (* 諭: 타이를 유)
*諭書: 觀察使, 節度使, 防禦使들이 부임할 때 임금이 내리던 命令書.
(25) 賜符諭書 -보물 1564-5호(복제)
宣祖 27년(1594) 李舜臣이 全羅左水使 兼 三道水軍統制使로 있을 때 받은 諭書로 諭書를 내릴 때는
發兵符를 함께 내려 주었다. 한面에 ‘發兵’이란 두 글자를 쓰고. 다른 面에 길이로 觀察使∙節度使들의 이름을
記錄한 다음, 가운데를 쪼개 오른쪽은 그 責任者에게 주고, 왼쪽은 임금이 가지고 있다가 軍隊를 動員할 필요가
있을 때 임금이 敎書(王이 내리는 文書)와 함께 그 한 쪽을 내리면 地方官은 두 쪽을 맞추어 보고 틀림없다고
認定되면 군대를 動員했다. (*發兵符: 朝鮮時代 軍隊를 動員하는 標識로 쓰이던 동글납작한 나무 패.)
(26) 賜符諭書 -보물 제1564-6호(복제)
宣祖 30년(1597) 7월 23일 三道水軍統制使로 다시 任命되면서 받은 諭書로, 李舜臣은 漆川梁海戰으로 흩어진
朝鮮水軍을 收拾하려고 南海沿岸을 가던 중 8월 3일 晋州 水谷에서 이 諭書와 起復授職敎書를 함께 받았다.
(27) 尙州 方氏 貞敬夫人 敎旨 -보물1564-9호(복제)
露梁海戰에서 戰死한 李舜臣을 右議政으로 贈職後 宣祖 36년(1603) 夫人 尙州 方氏를 貞敬夫人에 封하면서
내린 敎旨이다. 貞敬夫人은 經國大典의 규정에 따라 正∙從一品 文武官의 嫡妻에게 내리는 名號로
外命婦 夫人으로서는 最上級의 品階이다. (*嫡妻: 정식으로 예를 갖추어 맞은 아내.) (*嫡: 정실 적)
*外命婦: 조선시대 王族·宗親의 딸과 아내 및 文武官의 아내로서 男便의 職品에 따라 封爵을 받은 夫人을
통틀어 이르던 말.
*內命婦: 宮中의 女官들을 品階에 따라 嬪·貴人·昭儀·淑儀 등으로 구분한 것
(28) 忠武公 贈諡敎旨 -보물 1564-12호(복제)
李舜臣이 戰死하고 45년이 지나 仁祖 21년(1643) 生前의 功德을 기리고자
‘忠武公’이라는 諡號를 내린 교지이다. 諡號는 正二品 이상의 文武官과 功이
많은 臣下나 德이 높은 선비가 죽은 후에 내리는 이름이다. (*諡: 시호 시)
(29) 領議政 贈職敎旨 -보물1564-16호(복제)
正祖 17년(1793) 7월 正祖가 “忠武公이 忠誠과 威武로 나라를 위해 죽은 뒤에 아직까지 領議政으로 높이지
못한 것은 실로 잘못된 일”이라고 하면서 李舜臣을 領議政으로 높이면서 내린 교지이다.
*사진에 올린 것 이외 보물 제1564호로 지정된 문서들은 아래와 같다.
-李舜臣 等 宣諭犒賞敎書(보물 제1564-2호)
-李舜臣 妻 方氏 告身敎旨(보물 제1564-8호)
-李舜臣 贈職敎旨(보물 제1564-10호)
-李舜臣 賜牌敎旨(보물 제1564-11호)
-李舜臣 有旨(보물 제1564-13호)
-李舜臣 別給文記(보물 제1564-14호)
-李舜臣 關聯 古文書-賜牌敎旨(보물 제1564-15호)
(30) 朝鮮의 火砲
(31) 朝鮮과 日本의 軍船모습.
- 끝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