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13
8월10일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연중 제19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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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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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AIdvL3YhbRE (김주신 멜키올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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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몸은 지상에 닿아있지만, 영혼과 정신은 이미 천상에 올라가 있는 사람!>
주님을 깊이 만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엄청난 선물이 하나 있으니, 그분만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분에 비할 바가 못 됩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들은 이 세상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몸은 지상에 닿아있지만, 영혼과 정신은 이미 천상에 올라가 있습니다. 그로 인해 그 어떤 혹독한 고통이나 박해 앞에서도 활짝 웃을 수 있습니다.
오늘 축일을 맞이하시는 라우렌시오 부제의 삶과 죽음이 그러했습니다. 혹독한 박해 앞에서 보여준 그의 모습이 얼마나 당당하고 거룩했는지 모릅니다. 죽어가면서도 유머 감각을 잃지 않았으며, 너무나 의연하고 당당한 얼굴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희미하게나마 교회 기록에 남겨진 자료를 통해 그의 영웅적인 모습을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 대한 박해가 점점 심해지던 시절 교황 식스토 2세는 지하 무덤에서 신자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다가 현장에서 체포되고 말았습니다. 로마 황제는 지체없이 교황에게 사형선고를 내렸으며 교수형에 처했습니다.
교황의 오른팔 격이었던 라우렌시오를 폭군이 그만둘 리 만무했습니다. 난폭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교활하기로 유명했던 발레리아누스는 라우렌시오 부제를 살살 설득하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황제는 교회의 재산들, 특히 금으로 된 성작, 성반들이 탐이 났던지 교회의 보물들을 모두 모아 자신에게 바치면 아무 일 없을 것이라고, 그리고 앞으로 이러저러하리라고 장밋빛 청사진을 보여주며 회유책을 제시했습니다.
라우렌시오는 그렇게 하겠으니 조금만 기다리라고 답변합니다. 그 답변 이후 라우렌시오 부제는 엄청 바빠졌습니다. 당시 관리하고 있던 교회 재산, 보물, 귀중품, 기타 등등 가치 있는 모든 것들을 박박 긁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모두 다 나누어주었습니다.
부모 없이 굶기를 밥 먹듯이 하고 있던 고아들에게 뭉칫돈을 하나씩 쥐어줬습니다. 남편을 여의고 한숨만 쉬며 살아가던 여인들에게는 금으로 된 성작을 건네며 팔아서 생활비에 보태라고 말했습니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폭군이 가만히 있을 리 만무합니다. 길길이 뛰면서 라우렌시오 부제를 당장 끌고 오라고 명합니다. 얼마나 화가 났던지 폭군은 사형도구로 고기 구울 때나 사용하는 석쇠를 달구라고 지시합니다.
모아오라는 보물들은 다 어디 갔냐고 묻는 황제의 질문에 라우렌시오 부제는 천사 같은 미소를 지으며 웃었습니다. 그리고 주변에 둘러서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우리 교회의 보물입니다.”
라우렌시오가 우리에게 남겨준 천상적 덕행의 목록은 다양했으나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영웅적인 증거, 교회 공동체를 위한 관대한 봉사,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극진한 사랑, 교황께 대한 충실과 헌신...
“활활 타오르는 불꽃조차도 라우렌시오의 그리스도를 향한 뜨거운 사랑을 이길 수 없었습니다. 라우렌시오의 육체를 불태우던 뜨거운 화염도 사랑으로 가득 찬 그의 영혼을 불태울 수는 없었습니다.”(성 대 리옹)
“라우렌시오는 영성체로써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셨습니다. 그 힘으로 그는 그토록 혹독한 고통도 웃으며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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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b5ZCF3Ap7P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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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고 하다 죽었던 기억은 가끔 되새겨도 좋을 듯….>
우영우 5화에서 권모술수 권민우와 우당탕탕 우영우의 대결이 펼쳐졌습니다. 권민우는 노력해서 이 회사의 인턴으로 들어왔고 아무래도 우영우는 인맥이 있었습니다. 피해의식을 느낀 권민우는 우영우와 같이 사건을 맡았지만 우영우에게 협조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점수를 높이기 위해서입니다.
이들이 맡은 재판은 현금 인출기에 들어가는 현금 넣는 카세트의 특허권에 관한 것입니다. 이화 ATM은 자신의 경쟁업체인 금강 ATM이 자신들의 기술을 모방했다며 카세트 판매 가처분 신청합니다. 여기에서 권민우는 누가 봐도 옳지 않은 일이지만 승리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씁니다.
뒤처지고 있다고 느낀 우영우도 어쩔 수 없이 거의 위증에 가까운 증언을 하도록 조언을 줍니다. 그 덕분으로 금강은 카세트를 더는 팔 수 없게 되었습니다. 리더스라고 하는 회사에서 똑같은 것을 이전에 만든 것이 있는데 그것을 지금은 찾을 수 없는 것이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이화 ATM은 권민우와 우영우에게 돈이 잘 벌린다는 해바라기꽃 그림을 선물합니다. 그들 사무실에 변호사 윤리강령을 떼어내고 그 자리에 돈을 상징하는 해바라기 그림을 걸어놓고 갑니다. 하지만 우영우는 마음이 찜찜합니다. 진실을 외면하고 성공에 눈이 멀었던 자신을 부끄러워합니다.
물론 리더스가 전에 만들었던 카세트를 고물상에서 간신히 찾아서 다시 판매하게는 되었지만 이미 이화가 대부분의 은행과 계약이 끝났기 때문에 재판의 결과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우영우는 부끄러운 마음에 해바라기를 다시 떼어내고 그 자리에 왜 진실을 외면하느냐는 금강 사장이 보내온 편지를 부쳐놓습니다.
어떤 사람은 행복을 돈과 성공으로 여기고 어떤 사람은 행복을 사랑받는 것으로 여깁니다. 돈과 성공을 추구하는 사람은 사랑받지 못합니다. 주위에 사람이 많아도 그런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할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25)
미워한다는 말은 흘려버린다는 뜻입니다. 똥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흘려보냅니다. 그래야 삽니다. 모든 법칙이 그렇습니다. 내어 보내야 또 들어옵니다. 나무가 살려면 물을 흡수하기도 하지만 흘려보내기도 해야 합니다. 왜 가뭄에도 산에서는 물이 계속 흘러내릴까요? 아무가 저장하던 물을 흘려보내 주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그렇지 않으면 인간이 나무를 계속 두어야 할 이유가 줄어들 것입니다. 수많은 나무가 잘려 나갈 것입니다. 하지만 나무가 물을 흘려주는 바람에 인간은 나무를 보존하고 더 심습니다. 흘려보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40일 굶어도 살지만 4일 사랑받지 못하면 죽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합니다. 현재 코로나로 돌아가시는 분들보다 자살로 돌아가시는 분들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도 외적으로 보이는 바이러스에만 신경 쓰고 정작 우리 마음이 우울해져서 죽고 싶은 마음이 들어도 그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다. 하지만 이것이 훨씬 더 치명률이 높은 바이러스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 줄어들면 죽고 싶어집니다.
‘금쪽같은 내 새끼’에서 죽고 싶은 아이가 친구와 말하는 내용은 이랬습니다. 위험한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냐고 묻자 친구는 “내가 죽으면 아파할 사람이 많아서 난 그런 생각을 못 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죽고 싶은 친구는 “내가 죽어도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거야.”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많이 만들어야 생명력이 향상됩니다. 그러려면 생명을 흘려보내 주어야 합니다.
제가 전에 중고등부 여름 신앙학교 때 살려고 했던 적이 있습니다. 중고등부 건장한 남자아이들이 저를 들고 물에 빠뜨리려 했습니다. 고이 빠져주면 되는 것을 저는 괜히 힘자랑하고 싶어서 그들을 빠뜨렸습니다. 그중에 덩치 큰 학생 하나가 기분이 나빴는지 그런 표현을 했습니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졌습니다.
‘살려고 하면 죽을 것이고, 죽으려 하면 살 것이다’라는 말씀이 이루어진 순간이었습니다. 저는 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랑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죽었습니다. 이것은 법칙입니다. 예외가 없습니다. 살려고 하는 사람을 사랑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는 그때 왜 그냥 빠져주지 못했는지 항상 후회스럽습니다. 이렇게 찜찜한 기분이 바로 죽음의 전조입니다.
이런 예는 아주 많습니다. 축구를 하다가 잘 보이려다 보니 나 때문에 넘어진 사람을 바라만 보고 일으켜주지 않았던 적이 있고, 주임 신부님에게 불순종했던 기억도 있습니다. 내가 살려다 결국엔 찜찜한 후회로 오랜 시간 고생해야 했습니다.
우리에겐 분명 이런 기억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 한두 개는 우영우가 자신이 외면한 진실이 담긴 편지를 자기 사무실에 붙여놓듯 우리 마음 안에 붙여놓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면서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살려고 하면 기분이 좋을 수 없다는 것을.
그러면 자신과 자녀들에게 절대 경쟁해서 다른 이의 피를 흘리게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내 피를 흘려 이웃을 살릴 때 더 행복하다는 것을 잊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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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오는 9월 24일 뉴저지의 메이플우드 성당에서는 뜻깊은 행사가 있습니다. 본당 설립 50주년 감사미사가 있습니다. 50년 전에 작은 공동체를 시작한 사제가 있습니다. 7년 전에 선종하신 박창득 아우구스티노 몬시뇰입니다. 신부님은 교우들과 함께 3가지를 중점적으로 하였습니다. 첫 번째는 공동체의 분가입니다. 신부님의 땀과 노력으로 50년이 지난 지금 뉴저지에는 많은 한인 공동체가 있습니다. 제가 기억하는 공동체는 ‘성 마이클, 103위, 마돈나, 데마리스트, 메이플우드’입니다. 두 번째는 문화의 복음화입니다. 신부님께서는 한국의 평화신문을 미국에서도 발간하도록 하였습니다.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님께서는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의 창간호에 ‘축사’를 보내 주셨습니다. 미주가톨릭평화신문은 미주 한인 공동체를 위한 선교지가 되고 있습니다. 신부님께서 발행하였던 ‘미주가톨릭평화신문’에서 저도 일하고 있습니다.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한국에서 발행되는 ‘매일미사’의 미주판을 만들도록 하였습니다. 미주판 매일미사는 영어와 한국어가 같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영어가 편한 2세들에게도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미주판 ‘매일미사’의 수익은 ‘북미주한인사제협의회’의 운영에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한인 공동체를 위해서 ‘가톨릭회관’을 마련하였습니다. 가톨릭 회관에서 한인 공동체는 꾸르실료, ME, 성서공부 등의 모임을 하고 있습니다. 가톨릭 회관에는 ‘가톨릭 방송’ 있습니다. 가톨릭 회관은 한인 공동체의 ‘오아시스’가 되고 있습니다. 세 번째는 ‘사제양성’입니다. 신부님은 젊은이들이 사제의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고,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신부님의 따뜻한 사랑과 도움으로 젊은이들이 사제가 되었고, 지금 한인 공동체에서 사목하고 있습니다. 박창득 몬시뇰을 기리며 사제들은 가톨릭회관에 ‘박창득 아우구스티노 몬시뇰 기념관’을 만들었습니다. 9월 17일에는 축성식이 있습니다. 이 또한 감사할 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밀알 하나가 뉴저지에 떨어져 밀알 하나로 남지 않고 많은 열매를 맺었습니다. 신부님의 열정과 헌신 그리고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5월에 동북부 ME주말이 있었습니다. 팬데믹 때문에 3년 만에 열리는 주말이었습니다. 준비하면서 걱정이 많았습니다. 엠이 물품을 준비하는 것, 주말 대요를 준비하는 것, 장소를 섭외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큰 걱정은 주말에 참석하는 부부였습니다. 팬데믹 전에도 주말에 참석하는 부부가 적었다고 들었습니다. 팬데믹 이후 처음 하는 주말이라서 걱정이 컸습니다. 발표 부부를 비롯한 많은 엠이 부부들이 동북부 ME주말을 위하여 홍보를 다녔습니다. 동북부에 있는 한인 성당은 모두 가서 홍보하였습니다. 하느님의 크신 사랑으로 20부부가 신청하였고, 주말이 잘 마무리 되었습니다. 열정과 헌신이 있으니 팬데믹의 터널도 잘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엠이 부부들의 땀과 노력이 20부부의 ME 체험으로 결실을 보았습니다. 뜨거운 태양을 온몸으로 받으며 결실을 맺는 들판의 곡식들이 있습니다. 가을이면 들판에서 흘린 농부의 땀과 눈물은 기쁨이 될 것입니다.
본당에 있을 때입니다. 마당에는 대추나무가 있었습니다. 작고, 부실한 열매들은 스스로 떨구어 내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야만 알찬 열매들을 맺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추나무조차도 자신의 아픔을 감수하면서 알찬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들 역시 하느님 앞에 알찬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우리에게 필요 없는 것들을 버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 축일로 지내는 라우렌시오 부제도 바로 그런 봉사자였습니다. 더운 여름을 식혀주는 소나기처럼, 우리는 모두 주님을 위한 봉사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서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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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요한 12,24-26: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높이실 것이다
로마의 일곱 부제 중의 한 분이신 성 라우렌시오(+258)는 교황 식스또 2세의 부제였다. 성인이 모시던 교황께서 사형선고를 받았을 때, 성인은 매우 슬퍼하였다. 이 모습을 본 교황은 라우렌시오 역시 삼일 안으로 당신의 뒤를 따를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라우렌시오는 사형을 당할 때 석쇠 위에서 불에 태워져 순교하셨다. 이 성인의 순교를 통하여 로마가 회개하는 계기가 되었다. 성인의 문장은 석쇠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24절) 밀알이 땅에 떨어져 싹이 트고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자신이 없어져야 한다. 여기는 죽는 것으로 표현했지만, 사실은 자신이 모두 없어지고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죽는다는 표현은 지금까지의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습을 모두 버린다는 의미이다.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는 거기에서 풍성한 결실을 기대할 수 있다. 자신을 없이 하는 것은 새로운 모습의 내가 아닌가!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며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25절) 라고 하신다.
복음에서 죽는다는 표현이 많이 나오는데 그것은 우리의 육체적인 생명을 죽이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신앙인이기 때문에 세상의 소금과 누룩의 역할을 하기 위하여, 그리고 나의 이웃을 진정으로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기 위하여 많은 경우에 나 자신을, 나의 의지를, 나의 고집을 죽이는 것이다. 이러한 사도 바오로의 표현대로 묵은 나를,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여 세상의 뜻을 따라가는 나를 죽이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조류를 역행하는, 거슬러 사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어렵고 되지 않는 것은 내가 세상을 거슬러 살고 또 거기에 죽는 것을 견뎌낼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항상 우리는 첫발을 내딛기를 망설이고, 과감히 내딛지를 못하기 때문에 항상 제자리에 서 있는 경우가 많다. 신앙인은 자신이 여기에 멈추어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있겠으나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뒤처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어쩌면 공동체의 일치 대열에서 자신을 이탈시키는 결과를 낳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26절) 라고 하신다. 나를 죽이는 삶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고 영광을 하느님 안에 있음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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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밀알 하나가>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 12,23ㄴ-26)
‘영광스럽게 될 때’라는 말은,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 승천을 모두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럽게 될 때가 왔다.”라는 말씀은, 수난과 죽음과 부활과 승천을 통해서 당신이 메시아라는 것이 드러날 때가 왔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라는 것이 드러나는 일은,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되는 일이고, 메시아를 보내신 하느님도 영광스럽게 되는 일입니다.(요한 17,1-5)> 그러나 믿음 없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만 보고, 부활과 승천은 믿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눈에는 그 사건들이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는 사건’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믿는 사람들과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눈에만 그 영광이 보입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는 말씀은, “안 믿는 사람들의 눈에는 나의 죽음이 죽음으로만 보이겠지만, 나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 많은 열매를 맺기 위해서 밀알 하나를 땅에 심는 일이고,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땅에 심은 씨가 땅 속에서 죽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땅 속에서도 밀알은 살아 있고, 밀알 속에 있는 생명력도 살아 있습니다. 그 생명력에서 많은 열매가 생겨납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은 죽음이 아니었음을’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의 눈에만 죽음으로 보일 뿐입니다. 여기서 ‘한 알 그대로 남고’라는 말은, “안 믿는 사람들의 눈에는 한 알 그대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이겠지만,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뜻입니다.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은 ‘씨’의 존재 이유와 목적입니다. 따라서 땅에 심어지지 않는 씨와 열매를 맺지 않는 씨는 ‘아무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아무 쓸모가 없는 것은 밖에 버려집니다.(마태 5,13) 그러니 땅에 심어지지 않은 씨는 한 알 그대로 남는 것이 아니라 소멸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맺으신 ‘많은 열매’는 ‘인류 구원’입니다. 우리가 맺는 열매는 각자 자기 자신의 구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당신 자신을 하나의 밀알로 내주셨습니다. 우리는 각자 자기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의 밀알로 살아갑니다. ‘밀알’이라는 말에서 희생만 생각하고, 희생이라는 말에서 ‘남을 위한 일’만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우리가 하나의 밀알로서 살아가는 것은, 즉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일차적으로 자기 자신을 위한 일입니다. (나의 ‘신앙의 증언’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구원의 길로 인도되지만, 그래도 내가 구원받는 것이 먼저입니다. 나부터 구원의 길을 걸어야 다른 사람들을 그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또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는 예수님 말씀 때문에, ‘밀알’이라는 말에서 죽음만 연상하는 일이 많은데, 우리는 표현이 아니라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죽는 일’이 아니라 ‘사는 일’입니다. 우리는 죽으려고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살려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신앙인은 언제나 항상 주님과 함께 살아 있어야 합니다. <순교는 신앙생활의 목적이 아니라, 신앙을 증언하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물론 최고의 증언 방법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썩어 없어지는 씨앗이 아니라 썩어 없어지지 않는 씨앗, 곧 살아 계시며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로 태어났습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 계신다.’ 바로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1베드 1,23-25) 신앙인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영원히 살아 있는 말씀’이라는 씨앗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씨앗에서 구원이라는 열매를 맺는 것은 각자 스스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세례를 받는 것은 자기 인생이라는 밭에 말씀의 씨앗을 심는 일이고, 신앙생활은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그 씨앗을 잘 가꾸고 보살피는 일이고,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을 받는 것은 열매를 맺는 일입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라는 말씀은, “현세적이고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것에 대해서만 집착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고”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이 세상 것들에 대한 욕심과 집착을 버리고 영원한 생명만을 추구하는 사람은 그 생명을 얻을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라는 말씀은, “내가 주는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나의 가르침대로 살아라.”라는 뜻입니다. ‘누구든지’라는 말은, 한 사람도 예외가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영원한 생명은, 단순히 안 죽고 영원히 사는 것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하느님, 예수님과 함께 살면서, 참된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올바르게 따르고 섬겨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 사람들을 하느님께서 영예롭게 해 주실 것이라는 말씀인데, “영원한 생명을 얻는 사람은 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된다.”, 또는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는 영원한 행복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 행복은 완전하고, 영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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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정용진 요셉 신부님]
오늘날 많은 이가 농촌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많은 경우 농부의 기다림이나 인내하는 자세에 익숙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어떻게 뿌리내리고 싹을 틔워 많은 열매를 맺게 되는지 눈에 다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생명과 죽음 그리고 다시 생명으로 이어지는 자연의 이치인 것은 분명합니다. 이를 우리 자신에게 비추어 보면,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기가 절대 쉽지 않을 것입니다. 더욱이 철저한 고독 속에 완전히 버림받은 죽음을 선택하기란 불가능해 보입니다. 오직 믿음만이 답일 것 같습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라우렌시오 성인을 생각해 봅니다. 광포한 탐욕자인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에게 교회의 재산을 넘겨주는 대신 성인은 불 속에서 극한의 고통을 겪으며 죽어 가는 순교를 선택하였습니다. 우리도 날마다 생명을 위하여 죽음을 선택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습관의 노예가 되는 삶에서 벗어나 죽어야 합니다. 수난을 외면하는 삶에서 벗어나 죽어야 합니다.
땅에 떨어진 밀알이 죽어서 많은 열매를 맺는 비유는 무엇보다 예수님의 삶을 드러냅니다. 어두운 땅속에서 점점 숨이 막혀 죽어 가는 밀알을 두고 교회의 교부들은 예수님의 강생을 떠올렸습니다. 예수님의 삶에서 사랑은 섬김이었고, 그분의 섬김은 다른 이들의 삶 속에서 자신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나 자신만을 위한 삶은 다른 이를 위한 선물의 삶이 되지 못하고 밀알 한 알 그대로인 채로 남아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미약하나마 이웃을 섬기고 사랑하는 작은 실천으로 일상 안에서 생명을 위한 위대한 죽음을 선택할 용기를 가져 봅시다. 바오로 사도는 날마다 죽음을 마주한다고 고백하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로마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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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오늘 예수님의 이 말씀을 통해 몇 가지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먼저, 생명은 죽음을 통해서만 온다는 점이지요. 새싹이 나오려면 씨앗이 죽어야만 합니다. 씨앗이 죽는다고 해서 씨앗의 형태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지요. 씨앗의 형태가 새싹의 형태로 변화되는 것뿐입니다.
만일 씨앗이 말라 뒤틀어졌다면 싹이 나오기나 하겠습니까? 새롭고 건실한 싹으로 다시 태어나고자 내 안에 깃든 악의 경향들을 죽여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생명의 힘, 선한 마음이 충만해질 것이 아닙니까?
개인적인 야심과 욕망을 묻을 때만 비로소 하느님께서 쓰실 만한 재목이 될 것입니다. 그러기에 생명을 버림으로써 오히려 생명을 얻는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주목해야만 합니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만일 개인의 욕망을 버리고 이웃과 사회를 위해 온 생애를 헌신한 분들이 없었더라면 세상은 지금보다 더욱 어두웠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눈에 보이는 박해가 없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따르려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지 않습니까? 오늘 이 점에 대해 묵상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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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라우렌시오 성인과 생명의 역설>
오늘은 258년 8월 10일에 순교한 로마교회의 부제 라우렌시오 성인의 천국 입성을 경축하는 날이다. 라우렌시오 성인만큼 복잡한 명함(名銜)을 가진 성인도 드물 것이다.
그것은 라우렌시오 성인이 스페인을 비롯하여 로마, 뉘른베르크, 부퍼탈 등 수많은 도시들과 가난한 사람, 과부, 청소부, 세탁인, 요리사, 유리세공업자, 양조주, 소방수, 도서사서, 문헌 수집가, 학생, 대학생, 화상환자, 눈병환자, 좌골신경통 환자, 피부병 환자, 페스트, 열병환자, 연옥불로 고통 받는 영혼 등의 수호성인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330년경 로마에 라우렌시오 성당이 세워진 이래로 수많은 성당이 성인의 이름으로 불리거나 그를 수호성인으로 모신다.
스페인에서 태어난 성 라우렌시오는 성 식스토 2세 교황(257-258) 시절에 로마교회의 재정과 사회복지를 담당하던 일곱 부제 중 한 사람이었다.
258년 발레리아누스 황제(253-260)의 박해가 시작되면서 일차적으로 교황이 감옥에 갇혔다. 그때 라우렌시오 부제는 자신이 교황과 함께 잡혀가지 않은 사실을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고 한다.
그러나 교황은 3일 후에 그도 자기를 따라 오게 될 것임을 예언하고는 교회의 모든 재산을 가난하고 불쌍한 이들에게 나누어 줄 것을 명하였다. 동시에 황제는 라우렌시오 부제에게 교회의 모든 재산을 제국에 헌납할 것을 강요하였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당시 황제는 교회가 엄청난 재물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황제는 라우렌시오 부제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너희 사제들이 성혈을 은잔에 담으며, 저녁 예식에 금촛대를 사용할 정도로 금을 펑펑 쓰고 있다고 들었다. 또 너희의 스승인 예수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려야 한다’고 했고, 너희의 신(神)은 돈을 만들어내지 않았으며 말씀 이외에는 아무것도 이 세상에 가지고 오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러니 너희가 소유한 모든 재산을 나의 제국에 바쳐라.”
황제의 말을 듣고 라우렌시오는 이렇게 말했다. “주님의 교회는 참으로 부유합니다. 당신에게 정말 가치 있는 것을 다 갖다 보여주겠습니다. 그러니 3일간의 말미를 주시오.”
이에 3일간의 말미를 받은 부제는 곧바로 달려가 교황의 명대로 로마교회의 모든 재산을 고통 받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3일후 수많은 장님, 절름발이, 불구자, 나병환자, 고아와 과부를 모아서 황제 앞에 한 줄로 세워놓고 “이들이 교회의 보물입니다.” 하고 간단히 말했다.
화가 치민 황제는 당장 라우렌시오를 쇠몽둥이로 때리고 석쇠 위에 쇠줄로 묶어놓고 불을 지피게 하였다.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정신을 잃지 않은 성인은 순교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온 것을 알고 황제와 형리들에게 놀랍게도 “모든 것이 잘 구워졌으니, 뒤집어서 잡수시오!”라는 유명한 말을 던지고는 하늘을 향하여 로마제국의 회개를 빌며 숨을 거두었다.
형리들 중 하나가 성인의 믿음과 인내심에 감동을 받고 회개하여 성인의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12,12-20)과 최후의 만찬(13-17장) 사이에 위치한 내용으로서 생명의 역설(逆說)에 관한 가르침이다. 이는 예루살렘에서의 모든 일이 끝났을 때 예수께서 받으실 영광을 예언하고 있다.
생명의 역설이란 죽어야 산다는 것이다.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우리 인간에겐 아주 생소한 이론이다. 살기 위해서는 자기 삶에 집착해야 하고, 사랑하기 위해서는 미워하지 말아야 하며, 목숨과 건강을 부지하기 위해 온갖 좋은 것은 다 취해야 하는데 말이다.
죽어야 산다는 역설의 가장 좋은 예는 바로 밀알의 모범이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비로소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24절) 밀알 하나가 죽는 것이 바로 예수님 자신의 죽음이다.
그렇다고 죽음이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다. 밀알이 죽는 이유가 많은 열매를 위한 것이듯이 예수님의 죽음 또한 세상의 생명을 위한 것이다. 십자가와 죽음의 시간이 곧 예수께는 영광과 새 생명의 시간이 될 것이라는 말이다.
이 생명의 역설은 곧 예수를 따르려는 모든 제자들의 추종법칙이다. 누구든지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을 각오와 준비를 하였을 때 진정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있을 것이며, 심지어는 죽음으로써 새 생명에 얻을 것이고, 영원히 아버지 곁에 있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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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김영철 라우렌시오 신부님]
사람은 누구나 그 무엇을 위하여 삽니다. 그 무엇을 위하여 노력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투자합니다. 그 무엇의 가치가 크면 클수록 많이 또 오래 노력하고 투자합니다. 때로는 자신의 전 생애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투자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오늘 그 무엇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한 분을 만납니다. 258년 로마시대에 순교하신 성 라우렌시오 부제입니다. 그분의 평소 삶이 어떠했는지에 관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에 관한 일화는 전설처럼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라우렌시오는 빈한한 가정 출신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선량한 모습이 교황에게 인정을 받아 학업을 마친 후에 로마의 일곱부제 중 수석 부제로 임명되었습니다. 그의 임무는 교회의 재산관리, 가난한 이들의 구호품 분배를 비롯하여 교회 내의 잡무를 모조리 보살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세속적인 박해자들의 입장에서는 구미가 당기는 직책인 거지요.
잡혀온 라우렌시오에게 로마 총독이 “나는 당신네 사제들이 성혈을 은잔에 담으며 당신들의 저녁 예식에 금촛대를 사용할 정도로 금을 펑펑 쓰고 있다고 들었소”라고 말하며 관리하고 있던 돈을 내놓기를 명령했습니다.
이에 라우렌시오는 “교회는 참으로 부유합니다” 하고 대답한 후 “당신에게 가치있는 것을 보여 주겠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모든 것을 순서있게 정돈할 시간과 물품 명세서를 만들 시간을 주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라우렌시오는 이미 교황과 함께 체포되리란 것을 알고, 로마의 가난한 이들, 과부, 고아들을 찾아서 있는 돈을 모두 주어버린 상태였습니다. 심지어 성합조차도 팔아서 주어버렸습니다.
3일 후 라우렌시오는 수많은 장님, 절름발이, 불구자, 나병환자, 고아와 과부를 모아서 한 줄로 세워놓았습니다. 총독이 도착했을 때, 라우렌시오는 “이들이 교회의 보물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재산을 정리할 3일의 기간, 금은 보화와 재물을 잔뜩 기대했을 총독의 표정은 보지 않아도 눈앞에 그대로 그려집니다. 장님, 절름발이, 불구자, 나병환자, 고아와 과부들이 분명 라우렌시오에게는 교회의 보물이었을 것입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각도가 이렇게 다릅니다.
사기를 당하고 놀림을 받았다고 생각했을 총독의 노기가 라우렌시오를 가만 두지 않았겠지요. 총독은 불타고 있는 장작 더미위에 석쇠를 얹고, 그 위에 라우렌시오를 올려놓으라고 합니다.
그 불타고 있는 석쇠에 눕혀진 라우렌시오는, “자! 한 쪽은 다 익었으니 좀 뒤집어 주시오”라고 하였고, 잠시 후 “이제 다 익은 것 같으니 뜯어 잡수시오” 하고 숨을 거두었다 합니다.
얼핏 들으면, 뜨거운 여름 날, 선들 바람이 부는 정자 나무 그늘아래서 돗자리 펴놓고 그 위에 빈 듯이 드러누워 한가롭게 주고 받는 농담 같습니다.
장님, 절름발이, 불구자, 나병환자, 고아 과부를 그 무엇보다 귀중한 보물로 생각한 라우렌시오. 석쇠 위에 구워 죽임을 당하는 엄청난 고통을, 마치 해가 뜨고 지는 일상사처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라우렌시오. 과연 그것을 무엇으로 설명하겠습니까.
하느님의 대한 사랑이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참으로 사랑할 때 목숨을 바칩니다. 그것도 억지로가 아니라 기쁘게 바칩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감명을 느꼈던, “타이타닉”이란 영화에서, 배가 가라앉고, 배 안에 물이 차오지만,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고 서로를 살리려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이 안타까움을 자아내지만, 많은 분들이 그런 사랑을 부러워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남자가 여자를 살리고 자기는 차가운 물 속에서 얼어죽었지요. 비교가 조금 그렇습니다만, 바로 그런 애틋하고 열렬한 사랑이 하느님과도 가능하다고 알려 주시는 분이 바로 라우렌시오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내어주고도 기쁜 것입니다. 아니 내어줄수록 기쁜 것이 사랑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내어주는 만큼 기쁨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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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살림과 죽임>
요한 12,24-26 (그리스인들이 예수님을 찾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살림과 죽임>
너 살리고자
나 죽고
나 살리고자
너 죽으니
나와 너
서로 살림
나와 너
모두 삶
나 살고자
너 죽이고
너 살고자
나 죽이니
나와 너
서로 죽임
나와 너
모두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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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사람>
“봄에 씨 뿌리지 않으면 가을에 거둘 것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적게 뿌리는 사람은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사람은 많이 거둡니다.”(2고린 9,6)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 소유한 것이 무엇이든지 하느님 앞에 씨를 뿌려야 하겠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탈랜트, 시간을, 능력, 재능을, 물질을, 믿음을 심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것을 몇 배로 늘려 주셔서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해 주실 것입니다. 주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는데 어찌 열매가 풍성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의 밀알을 심는 것은 열매를 희망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풍성한 열매를 맺기 원하면 그만한 정성과 사랑으로 씨앗을 심어야 합니다. 그리고 밀알이 땅속에 묻히면 죽어서 싹을 틔우게 됩니다.
만약에 씨앗이 땅속에 묻히길 거절한다면 아마도 새한테 먹히거나 짐승한테 밟혀 으깨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묻혀야 합니다. 밀알이 땅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없어짐을 뜻하지 않고 생명을 낳기 위하여 뿌리를 내림을 뜻합니다.
사실 죽는다는 것은 곧 새롭게 사는 것입니다. 따라서 얻기를 원하는 만큼 심어야 합니다. 얻기를 원하는 만큼 죽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 12,24)
예수님의 죽음은 생명을 위한 죽음이었습니다. 진정한 생명을 위하여 감당한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그리고 더 높은 가치 때문에 지상의 생명을 거부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주님과 그분의 나라 때문에 지상의 매력에 집착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일상의 삶 안에서 이웃을 위하여 나 자신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 생명의 기쁨이 더해집니다.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 12,2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는 예수님의 모범을 따라야 하고 결국 그리하면 아버지 하느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함께해 주시고 또 영광스럽게 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감당하고 있는 모든 일상의 삶을 기왕이면 밀알의 삶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순명으로 하면 주님의 일이 되고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내일일 뿐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사랑하면 ‘내 나라’가 만들어지고, 예수님처럼 사랑하면 ‘예수님의 나라’가 만들어집니다. 사실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며,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오늘 기억하는 라우렌시오 성인은 “로마 교회의 부제직을 수행하고 거기에서 거룩한 피의 봉사자로 일하다가 마침내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해 피를 흘렸습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는 모진 박해를 예상하고 교회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었으며 총독에게“나는 주 하느님을 경배하며 그분만을 섬기니, 네 잔인한 고초를 두려워하지 않는도다.”하며 믿음을 증거 하였습니다.
결정적으로 총독이 라우렌시오를 불타고 있는 장작더미 위에 눕혔는데 오랫동안 고통을 겪은 후 "모든 것이 잘 구워졌으니, 뒤집어서 잡수시오!" 하고 말했답니다. 바로 그 믿음의 씨앗이 오늘 우리에게 신앙의 열매로 주어진 것입니다. 과연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입니다.”(성 예로니모)
일상 안에서의 삶을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상대를 위한 배려를 하다가 그만 지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젠 당신도 바뀔 때가 되었지 않느냐! 이제는 철이 들 때가 되지 않느냐! 왜 나만 양보해야 하느냐! 이제는 당신차례야!”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한 알의 밀알이 된다는 것은 남에게 미뤄야 할 것이 아닙니다. 내가 묻혀 썩어야지 남이 대신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습니다.”(요한 12,24) 그렇다면 열매를 맺고 안 맺고는 나의 죽음에 달려 있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한 알의 밀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할 만큼 했다고 생색을 내지 말고 끝까지 항구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해 주시는 그날까지 결코 좌절하거나 실망하지 말고 최선에 최선을 다하는 기쁨을 차지해야 합니다.
지금은 미약하게 보일지라도 풍성하게 해 주시는 주님을 믿고 밀알의 두려움을 극복하십시오. “하느님은 당신의 호의에 따라 여러분 안에서 활동하시어, 의지를 일으키시고 그것을 실천하게도 하시는 분이십니다.”(필리 2,13) 그러므로“하느님의 은총을 헛되이 받는 일이 없게 하십시오.”(2코린 6,1)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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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대한민국 직장인들이 가장 힘들고 불행하다고 여기는 요일은 언제일까요? 월요병을 생각하며 ‘월요일’을 선택하는 사람이 많겠지만, 실제로 가장 힘들고 불행하다고 여기는 날은 ‘목요일’이었습니다.
가장 행복한 날은 토요일이었고, 주일은 월요일보다도 행복감이 낮게 나왔습니다. 주일은 행복이 다하는 시점이니 불행하고, 월요일은 이미 불행을 예감하고 준비하니 차라리 주일보다 더 나은 것입니다. 결국 행복은 어디와 연관이 있는 것일까요? 바로 희망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곳으로 여행 가는 사람이 많고, 맛집을 찾아 나서는 사람도 그 수가 대단한 것입니다. 희망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인들의 행복도 희망에서 찾게 됩니다. 하느님 나라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리라는 희망, 그 희망을 바라보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가 분명해집니다.
여행 가기 위해 미리 준비하는 것처럼, 하느님 나라에 가기 위한 준비가 꼭 필요합니다. 사랑의 실천이라는 주님 뜻에 맞게 사는 삶이 가장 필요한 준비가 될 것입니다. 희망의 완성이 바로 행복입니다. 희망의 완성을 위해 우리는 노력을 멈추지 않고 살고 있나요? 특히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코로나19 팬데믹 때에는 의료진들의 활약이 대단했습니다. 산불이 났을 때는 소방관들의 활약으로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습니다.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있었기에 희망의 완성인 행복에 모두 함께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현세에서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것을 쏟다 보면 결국은 목숨마저 잃게 될 것이니, 현세의 목숨은 내세의 영원한 생명을 겨냥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영원한 생명을 믿고 이를 위하여 모든 것을 희생하다 보면, 그 희생의 보상은 노력의 대가로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요한복음에서만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미워하다’라는 표현은 복음적인 용법으로, 제 목숨을 부차적인 것으로, 더 정확하게는 영원한 생명을 일차적으로 생각하고 현세의 삶을 그 수단 또는 방법을 생각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세의 삶 자체가 희망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희망은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가장 첫 번째에 둘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하늘만 바라보며 사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기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을 하느님께서는 특별히 더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 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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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예닮의 여정>
-섬김, 나눔, 따름-
“행복하여라, 주님을 경외하고,
그분 계명을 큰 즐거움으로 삼는 이!
잘되리라, 후하게 꾸어주고,
자기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이!
그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으리니,
영원히 의인으로 기억되리라.”
오늘 화답송 시편 112장이 참 좋습니다. 자연재해 앞에 인간이 얼마나 무력한지 깨닫습니다. 더구나 혼자는 너무 미약합니다. 그래서 더불어의 삶과 여정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개인의 회개에 이어 공동체의 회개가 절실한 시대입니다. 사상 유례없는 폭우가 기후위기의 심각성을 보여줍니다. “폭우 하루 381.5mm, 102년만의 기록, ‘기후변화, 국지성 폭우 불러’”란 기사와 “역대 최악의 물폭탄에 수도권 마비상태, 피해 속출”이란 기사가 한눈에 들어 왔습니다. 이 또한 회개의 표징입니다.
새삼 그리스도 에수님께 관심이 집중되는 요즈음입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여전히 우리에게 참 가까이 느껴지는 그리스도 예수님이요, 우리의 현재와 그리고 미래의 희망은 그리스도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우리를 부단히 회개에로 이끄는 영원한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인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제 행복기도를 예닮기도(예수님 닮기)로 바꿨고, 오늘 강론 제목도 예닮의 여정으로 정했습니다. 섬김과 나눔의 사랑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따라가는 예닮의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이미 3년전 나온 교황님의 사도적 권고, “CHRISTUS VIVIT(그리스도는 살아계시다)”라는 글을 대략 읽으며 감탄했습니다. 현시대의 모든 문제점과 처방이 망라되고 있으며, 결국은 그리스도께 우리의 관심을 집중토록 하는 글이었습니다. “예수님, 영원한 젊음(Jesus, ever young)”이라는 제2권의 제목도 좋았습니다. 세월 흘러 나이는 들어도 정신은, 마음은, 영혼은 주님처럼 언제나 푸르른, 늘 새로운 청춘이면 좋겠습니다.
특히 제4권의 제목이 좋았습니다. 평생 잊지 못할 “너희는 하느님의 ‘지금’이다(You are the ‘now’ of God)”라는 제목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는 이들 모두가 하느님의 ‘지금’임을 깨달아 언제나 하느님의 현존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바로 그 전형적인 모범이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한평생을 하느님의 지금으로 투명한 하느님의 현존으로 하느님 나라를 사셨던 그리스도 예수님이셨고 이런 예수님을 뒤이은 교회의 참 보물인 성인들이었습니다.
오늘은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 축일입니다. 길이 기억될 감동적인 성인입니다. 매일미사책의 소개가 간명하고 좋아 그대로 인용합니다. 성인은 스페인 태생으로 로마교회의 일곱부제중 수석부제였으며 그의 임무는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고 빈민들을 구제하는 일이었습니다. 258년 발레리아누스 황제의 박해때, 이들이 교회의 보물을 바치라 하자 부제는 남몰래 교회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뒤 그들을 박해자들 앞에 데려갑니다.
“이들이 교회의 재산입니다.”
분노한 박해자들은 성인을 처형했지만 만고불변의 진리를 선포한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이야말로 교회의 참보물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용감하고 의로운 성 라우렌시오 부제 역시 하느님의 지금을 살았던 성인입니다.
오늘 복음의 배치도 이런 라우렌시오 순교성인에 잘 드러맞습니다. 순교는 성체와의 결합입니다. 즉 사랑의 순교자 그리스도 예수님과의 일치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대로 그리스도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그리고 예수님 뒤를 잇는 무수한 성인들, 순교자들을 지칭합니다. 얼마전 단체 피정신청한 분의 부탁도 잊지 못합니다. “희생과 봉사”에 대한 주제로 강의해달라는 것입니다. 모두가 책임을 맡으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바로 하느님의 지금을 잘 드러내는 일이 사랑의 희생과 섬김이겠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일 것입니다. 어떻게 하느님의 지금을 살 수 있는지 다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라야 한다. 내가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사람도 함께 있을 것이다.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
섬김의 겸손, 섬김의 순종, 섬김의 추종, 섬김의 사랑입니다. 수도공동체는 주님을 섬기는 법을 배우는 학원이라 정의한 베네딕도 성인입니다. 예수님 또한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섬김으로 당신의 사명을 요약합니다.
믿는 이들에게는 섬김의 직무, 섬김의 권위, 섬김과 종의 영성만 있을 뿐입니다. 이렇게 하루하루 섬김의 삶을 통해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삶입니다. 섬김에 이어 나눔의 삶이, 하느님의 지금을 잘 반영합니다. 자발적으로 기쁘게 선행의 나눔을, 자선을 강조하는 바오로 사도입니다.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는 이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모든 은총을 넘치게 주실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여러분은 언제나 모든 면에서 모든 것을 넉넉히 가져 온갖 선행을 넘치도록 할 수 있게 됩니다.”
나눔이 예닮의 삶에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게 되는 작금의 상황입니다. 사랑의 선행과 자선의 나눔이야말로 하늘에 보물을 쌓는, 마음을 깨끗이 하는 제일의 수행임을 깨닫습니다. 교황님의 문헌에서 마음에 와닿은 “난민들은 우리 시대의 전형(Migrants as an epitome of our time)”이란 제목이었습니다.
곳곳에 보금자리 품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 넘치고 있는 시대입니다. 디지털 시대, 고립과 단절, 소외로 인해 날로 늘어나는 영적 난민들도 심각한 문제입니다. 함께 살아도 그리스도 예수님께 정주의 뿌리를 내리지 못하면 영적난민들입니다.
오늘은 우리 수도원의 정 라우렌시오 수련수사의 영명축일이고 엊저녁식사때는 조촐한 축하식도 가졌습니다. 열두명의 수도가족 전부와 묵고 있는 손님 4분이 함께 하니 4명 식탁의 넷이 가득하니 말그대로 이 시대 보기드문 축제의 분위기였습니다. 정주定住 수도원의 환대歡待가 ‘하느님의 지금’을 잘 표현하며 섬김과 나눔에 얼마나 결정적 도움이 되는지 깨닫습니다. 혼란한 세상 한복판 “사랑의 난민수용소(?)”같다고 생각하며 속으로 웃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지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은 평생 하느님의 지금으로 사셨고 그 뒤를 이어 무수한 성인들이 이렇게 살았고 우리에게 주어진 평생 과제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닮아가는 예닮의 여정에 항구한 것이겠습니다. 이 거룩한 미사중, 섬김과 나눔의 정신으로 항구히 한결같이 주님을 따를 수 있도록 주님의 도움을 청합시다.
“가난한 이에게 넉넉히 나누어 주니, 그의 의로움은 영원히 길이 이어지고, 그의 뿔은 영광 속에 높이 들리리라.”(시편112, 9),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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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요한12,24)
<사랑의 밀알이 되자!>
오늘은 '가난한 이들이 바로 교회의 보물'임을 일깨워 준 '성 라우렌시오 부제 순교자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먼저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한 분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립니다.
라우렌시오 성인은 초대 교회 때 로마 교회의 일곱 부제 중 수석 부제로서, 교회의 재산을 관리하고 가난한 이들을 구호하는 봉사를 하다가 '화형(火刑)으로' 순교하심으로써, '죽는 밀알'이 되신 분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적게 뿌리는 이는 적게 거두어들이고 많이 뿌리는 이는 많이 거두어들입니다. 저마다 마음에 작정한 대로 해야지, 마지못해 하거나 억지로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주시는 이를 사랑하십니다."(2코린9,6-7)
'사랑의 큰 밀알이 되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야 말로 당신의 전부를 우리를 위해 기쁘게 내어 놓으신 '사랑의 큰 밀알'이십니다.
그리고 성령의 힘으로 예수님의 길을 그대로 따라간 '수많은 순교자들'과 교회의 보물(재산)을 모두 바치라는 박해자들의 말을 자랑스럽게 어기고, 그것을 가난한 이들에게 다 나누어 주고, "이 가난한 이들이 바로 교회의 재산입니다." 라고 말함으로써, 뜨거운 불 속에 던져진 '라우렌시오 성인'은 '사랑의 큰 밀알'이십니다.
요즘 저는 기쁘게 그리고 기꺼운 마음으로 자신을 내어 놓은 사랑의 큰 밀알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한 분 한 분의 마음을 만나면서 크게 감동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큰 힘이 되고 있고, '보다 더'(radical)를 향해 나아가게 하고 있습니다. 깊은 감사를 드리면서, 여러분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다음의 화답송 말씀으로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잘되리라. 후하게 꾸어 주고, 자기 일을 바르게 처리하는 이! 그는 언제나 흔들리지 않으리니, 영원한 의인으로 기억되리라."(화답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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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bxbCIwo7ga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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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1)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 12, 26)
지구 온난화의
여파가 참으로
무섭다.
온전한 것들을
황폐화 시키며
물바다로 만들고
있다.
가치가 무너지면
이와같이
욕심만 남고
이 욕심은 끝내
우리모두를 깡그리
무너뜨릴 것이다.
가치를
지켜내는 것이
참된 복음이다.
복음은 삶의
의미를 채우는
것이다.
삶의 의미는
올바른 방향을
바로잡는 것이다.
섬김의 방향이
존중의 방향이다.
섬김의 가치
존중의 가치이다.
섬김의 가치가
바뀌면 삶도
실천도 달라진다.
섬김이 있는 곳에
사랑이 있고
사랑이 있는 곳에
존중이 있다.
방향을 바르게
잡아주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욕심은 늘
우리를
배반하지만
복음의 가치는
우리 모두를
살린다.
연일 쏟아지는
이 빗줄기가
욕심지상주의를
경계하고
새로워지는
가치의 표징이길
기도드린다.
자연도 사람도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처럼
섬김과 존중으로
회복되고
치유되는 것이다.
욕심은 수 많은
쓰레기를 낳지만
올바른 존중은
언제나
영혼을 다시
살리는 기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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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누구든지 나를 섬기면 아버지께서는 그를 존중해 주실 것이다."(요한 12, 26)
가장 아름다운
단어는 존중이라는
단어입니다.
참된 존중을
배우고 주님께로
돌아가는
짧은 우리의
여정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삶은
섬기는 밀알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밀알은 십자가를
선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섬기는 존중으로
우리를
모으십니다.
존중으로
돌아가야 할
우리의 시간입니다.
우리를 섬기고
존중하시는 예수님의
삶앞에 머리를
숙입니다.
섬김과 존중이
우리를 살리는
구원입니다.
언제나 우리를
존중으로
감싸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존중의 열매가
가장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존중안에
삶의 해답이
있습니다.
존중하고
존중받아야 할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들입니다.
하느님의 존중이
성 라우렌시오를
더욱 빛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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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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