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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각박하고 쓸쓸한 길에서 방황하다 보면 어느덧 세월의 허무 속에서 활력보다는 갈등을 무기력하게 받아들입니다. 특히나 퇴직과 함께 시작되는 가정생활로의 동참은 집사람을 힘들게 합니다. 자기 고유의 생활이 침해받는 느낌을 여기저기서 받게 됩니다. 가정의 주인은 집사람이었고 자신은 나그네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남자는 가정의 머슴이고 더군다나 힘 떨어진 머슴은 조용하게 침묵으로 삶을 마감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어 해 합니다. 여태까지는 돈을 벌어다 준다는 것 때문에 주인처럼 대우해주고 봉사해주었을 뿐입니다. 현대는 상업적으로 구조화된 세계입니다. 돈과 그 소비의 상업적인 능력만이 우대받는 세상입니다. 그 외의 것들은 모두 다 대우받기를 포기하고 실천만 해야 할 일들입니다.
퇴직과 함께 모든 것들이 압수당하면서 남성의 구매력은 절벽으로 떨어집니다. 구매능력이 없는 세대는 어느 곳에서도 관심을 부여받을 수 없습니다. 그냥 잊혀갈 뿐입니다. 그러나 여성은 구매능력이 있는 소비자입니다. 절대적 필요성보다는 실용적 필요성만이 가득해 보이는 케이블 TV의 상업성은 그 구매능력이 여성에 있음으로써 살아남아 사회를 좀먹어 가고 있습니다. 거기에 나오는 모든 출연자들은 거짓 놀음의 야바위꾼이자 꼭두각시입니다. 가정의 평화로움을 역이용하는 상술과 여성의 구매력을 역이용하는 장사꾼들입니다. 페미니즘에 동조하는 남성 출연자를 통해 모든 여성 소비자들은 나약한 존재로서의 아름다움과 존경의 대상으로만 묘사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상업성의 대상은 여성이지 노년의 남성에게는 해당하지 않습니다.
영악한 상업성은 세상의 모든 여성들을 외모 지상주의로 만드는 것에 있습니다. 모든 상품의 판매는 거기에서 출발합니다. 거기에 자기주장이 강하고 신중한 남편들은 세상을 모르는 답답한 인종으로 퇴출 대상일 뿐이며 결국 우스개와 수다의 대상으로 전락해갑니다. 케이블방송은 땅이 넓은 미국의 전유물이었으나 이제는 우리도 거리낌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상업성은 무차별적이자 폭력적입니다. 옛날부터 남성들보다 억울하게 대우받았으니 더 우대받아야 한다는 느낌으로 평등을 주장하지만 과거의 억압이 과연 남성들 때문이었는지는 시대적 운명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얘기하지 않습니다. 사회적 여건이 성숙하지 못한 시대상에 대한 이야기는 거기에 불필요할 뿐입니다. 언론에서 요구되는 덕목은 오직 자극적이고 즉흥적인 즐거움만이 연출의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수다의 즐거움을 위해서 그 대상을 남성 그중에서도 남편으로 고정시켜 한풀이식 잔치를 벌이며 즐겁게 보내고 있는 시절입니다.
기술적 분석 또한 자본의 무한증식성과 함께 고도화됨에 의해 인간의 소비적 행위의 미세한 변화까지도 감지해 종합하고 분석한 자료를 바탕으로 유혹하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편리성과 합리성을 찾아내려는 과학적 도움들이 어느덧 인간을 분석의 대상으로 여김으로써 인간의 고귀함이나 신성함을 물화시켜버리고 있습니다. 머리카락의 숫자까지도 알고 계신 신과 같은 능력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자본의 횡포이자 권력의 길이겠으나 그것을 견제할 논리는 아직 나타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감시당하고 그것으로 역 이용당함으로써 고통에 빠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으려 애를 씁니다. 애써 외면함으로서도 세상의 진리를 찾아 방황합니다. 기술 우위의 사회는 인간을 주인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라 머슴으로 부리는 사회입니다. 도구로써 취급합니다. 사람과 사람의 마주함에 자신들의 무한한 능력을 동원해 개입함으로써 신성한 삶의 질서를 교란시키고 있습니다. 외면과 무감각만이 살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정신세계의 활동 영역에도 예외나 변수가 사라졌습니다. 바둑에서의 인공지능(AI) 알파고의 등장은 천변만화하는 바둑의 수에 인간만이 다가갈 수 있다고 자신해왔던 그 많고 많은 변수들로 가득한 바둑판까지 평정해버렸습니다. 프로기사들조차 자신들의 전통적이고 권위적인 시각이 모두 옳았던 것이 아니라는 반성적 회고를 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도 천재로 인정받아왔던 남성성은 연전연패 앞에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으나 본인 자신은 그 눈물의 실재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갑니다. 알파고의 퇴장이 의미하는 바를 모두는 무관심으로 바라볼 만큼 우리의 생각들은 노예화되어 시키는 대로만 할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되어버렸습니다. 가장 우수하다는 바둑 세계에서의 인간의 두뇌를 하찮게 여기는 알파고의 알고리즘을 세상에 널리 보급할 때에 일어날 인간 파괴의 파급력을 그들 서양인들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는 아직 인본주의적이고 신에 대한 신앙의 신성함이 남아있다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아무도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예속의 운명이 되었습니다. 자연의 예속에서 벗어나 도시화를 이룩했으나 결국은 또 다른 알파고에 의해 우리의 삶은 노예화되었을 뿐입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원시적인 삶만도 못한 현대사회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원시인에게는 자연의 변화를 감지하는 본능이라도 있었겠으나 현대의 살아가는 인간들에게는 그것은 물론이요 세상을 바라볼 안목조차도 메말라버린 저수지의 물고기 신세가 되었을 뿐입니다. 언제 말라죽을지 모르는 불안의 공포에 떨면서도 그것을 잊으려 애써 소비에 몰두하고 돈벌이에 나서는 착취 인생에 스스로가 자원함으로써 자신의 어리석은 우월을 내보이기에 정신이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언론은 그 시청자들을 강압하고 억지 쓰며 더욱더 바보로 만들어가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국민이라는 말조차 사라진 현대에서 시민들은 자신의 선험적인 조건이 바뀐 것도 모르고 그저 하루하루 즐겁게 소비하며 살아갈 따름입니다.
정신세계에서 우월성을 과시해오던 남성들의 영역이 허물어지면서 즉흥적인 개그와 허구에서 즐거움을 가지는 것이 삶의 여유와 행복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농담을 못하면 사회성이 떨어지며 답답한 인간이 된 사회를 식은땀을 흘리며 살아갑니다. 즉 남성성(男性性)은 이성적이고 수학적인 논리를 바탕으로 자신의 과학적 영역을 지속시켜왔다고 한다면 현대에 그 역할은 돈에 기반을 둔 기술적인 디지털로 대변되는 포털 사이트에 모두 다 내주었습니다. 과거 남자들만이 할 수 있었던 일들이 지금은 모두 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상품의 개발을 통해 누구나가 할 수 있도록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하다못해 무선 청소기의 충전용 배터리조차도 여성들이 손쉽게 교체할 수 있도록 완성품을 인터넷으로 구매할 수 있으며 포털 사이트에서 사진이나 동영상으로 교체 방법까지 누구나가 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습니다. 질량 불변의 법칙은 황금 불변의 법칙으로 바뀌었습니다. 모두 다 자연이 사라진 세상에서 돈이 주인으로 등극함에 따른 노예화 현상일 뿐입니다. 인간이 주인이 아니라 돈이 주인입니다.
그처럼 사회적 여건이 바뀌고 있으며 구매력을 갖춘 여성을 대상으로 상품들이 제작되고 있음을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과거 일일이 남자에게 부탁하고 애원하고 의존해왔던 힘들고 어려웠던 모든 상황들이 상품화를 통해 바뀌었습니다. 현대는 남성성이 발붙일 터전을 모두 다 자본에 의한 합리적 기술에 내준 시절입니다. 남성들의 우월적 고유영역이 사라졌으며 거기에 더해 돈 없는 노후의 삶은 그 처참함을 겪어보고야 후회하는 어리석음만이 남성의 운명이 되어가고 있는 시절입니다. 마치 가을비가 그치고 논두렁에 갇힌 미꾸라지들이 흙탕물로 옹기종기 모여들듯이 도시에도 웅덩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도시의 지하철은 그들을 공짜로 실어 나르면서 복지를 강조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남자들의 역량이 상품으로 대체됨에 의해 그 능력이 불필요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보아도 알파고를 이길 수는 없게 되었습니다. 어른들은 모르고 청소년들은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알파고가 우리 사회에 재등장할 때에 벌어질 일들을. 그들의 최우선 순위는 건물 임대업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모르는 어른들은 열심히 공부하라고 말로서만 강요하고 있으니 당연히 놀림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이 순리입니다. 재능만이 살 길입니다.
삼식이가 아직도 있냐고 말하는 세상입니다. 그런 한계에서 영리한 남성들은 달리 말하자면 거기에 적응력이 탁월한 남성들은 여성성으로 진화해나가며 새로운 세계에 적합한 남성상을 창조하기도 합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여성화되지 못한즉 여성에게 비호감인 남성들조차 자신의 기질을 파괴시켜가면서까지 본능적 즐거움을 선사하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즉 바보연기를 넘어 자신을 얼간이처럼 스스로의 연기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해 시청자들에게 봉사함으로써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신의 재능을 한없이 뽐내기도 합니다. 그래도 그런 세상을 감지하는 부인은 어디 가서 제발 입 다물라고 남편에게 조언하는 애정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남편이 그 뜻이 무슨 뜻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보수진영이라는 정치집단이 어느 순간 사회에서 갑자기 사라진 이유는 거기에서 시작합니다. 남성을 희화화하는 세상에서 건강하고 신념이 강한 전통적 집단이 처신할 수 있는 길은 모두 다 상업성에 빼앗겨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표절과 모방에서 시작한 우리 사회는 지금 오마주(Hommage) 가 아니라 패러디(parody)로 또 다른 세상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자신의 원통함과 원망을 사회적 공분으로 몰아가며 광풍을 예고하고 있는 시절에 전통은 파괴를 전제할 따름입니다. 거기에 인간의 진정한 모습은 이념에 가려 보이지도 않습니다. 그처럼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전통의 부스러기들을 쓸어 모아 새로 개조하려 시도합니다. 그들에게 자극을 주고 복지로 끌어들이기 위해 누군가 희생양이 필요합니다. 희생양은 누구나가 아는 인간이 적격이며 그것을 밟고 새롭게 부흥하기를 사회는 원합니다. 중국의 문화혁명처럼 계몽주의가 가져온 이념의 낭만성이 결국 프랑스 혁명에서 서로를 단두대에 세우기 위한 이념으로 동원되었듯이 또 다른 낭만의 광풍이 새로운 의미를 찾아 진리를 갈망하는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그 연역되는 기초에는 의미로서의 가치라는 표절과 모방의 개념들만이 가득 차 있음 또한 사실입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오뒷세이아에서 지옥과 현실에 발을 걸치고 있는 헤르메스 사자(使者)처럼 인간의 능력이 현실과 제정신이 아닌 허구의 세계를 거리낌 없이 왕래합니다. 마치 로마시대 노예들의 사투 장면을 내려다보며 인간의 모든 두려움을 털어 내버리는 귀족이라도 된 듯 시청자들에게 우월감을 만끽할 수 있도록 사력(死力)을 다합니다. 그리스 비극의 정신적 카타르시스가 아닌 인간의 모든 고통을 털어 내버리는 로마의 육감적 카타르시스 놀이가 현대인의 어지러움 증을 잊게 해주는 고마운 대상이 되었습니다. 원형 경기장 콜로세움에서 죽어나간 수십만의 동물과 인간은 그저 그런 놀잇감이었을 뿐입니다. 지금은 오직 그 경기장의 존재만이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고 있으나 그 영광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언론의 보도에서 시청자들은 로마의 검투사의 운명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자기가 자신의 신체를 때리고 남성이 남성의 신체를 모욕 주며 즐거워합니다. 그런 눈물겨운 아니 어쩌면 시청자를 인식해 자신의 정신세계를 지워버리는 살신성인의 사명으로 실제인 것처럼 재현해내는 높은 연기력을 보여주며 앞으로의 남성성의 현실 적응의 규준을 앞서서 펼쳐내고 있습니다. 나이 먹어가며 경륜이 늘어가는 것이 아니라 어리석음만이 가득해지는 소비세상이 되었습니다. 노인의 말은 무조건 옹고집에서 출발합니다.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 그 사람은 두 번의 실수를 저지르는 것이 될 뿐입니다. 그런 소격효과를 재현해내며 유감없이 보여주는 그들의 연기력이야말로 남성의 선구자이자 진정한 삶의 예술가라 할 만합니다. 적응력이 인간의 척도이지 전통으로서의 존재의 이유는 사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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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긴 글 수고하셨습니다
좋은 하루되세요^^
감사~
고은 봄날 멋과 맛 향기로
즐거운 삶 행복 하시고 늘 건강 조심 하세요~
인생 회상 / 4
감사합니다.
좋은 시간 되세요.
녜
관심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날들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