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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중국의 역사다
왕페이린(王培霖)지음
애풀북스 刊
인류사회의 생존경쟁은 민족의 분화와 도태를 촉진하고, 이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 사라졌다. 지금까지 남은 인구 10만 이상의 민족은 전 세계에 300여개이다. 중화민족도 300개 중의 하나일 뿐이다. 현재중국 사회는 사람으로 치면 연령은 40대 학력은 겨우 중학을 졸업한 고등학교 1학년 정도이며 관념과 학식이 빠르게 성장하는 사람으로 볼 수 있다. 미국은 38세의 14년 교육을 받은 대학졸업생 수준이란다.
시대는 빠르게 변하는데 역사책은 그 뒤를 바라보지만 변화를 따르지 못한다. 보편적 지식과 가치관이 재결합하는 과정을 거친다. 역사책은 자신의 주관적인 생각으로 사실을 왜곡하기도 한다. 예로 공자의 춘추는 당시 노나라의 군주4명이 신하에 피살되고, 쫓겨난 왕이 1명이며 이복여동생을 근친상간한 일로 암살당한 임금이 있는데 공자는 이를 감추었다, 러시아에서의 역사는 차르의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재산정도로 표현된다.
수백 년간 이기적인 모리배와 위선자 의식이 대다수 중국인 심리를 지배했지만 진정한 중국의 선비는 천하의 흥망은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정신을 포기하지 않았다. 한 사람의 역량으로 중국의 통사를 쓰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중국의 역사는 사서의 기록과 유교경전의 묘사에 근거하여 삼황오제가 중국인의 조상이며 요, 순, 우로 이어지는 계보와 하, 상, 주로 이어지는 역사를 당연시했다. 하지만 이 관점이 100년 전부터 깨지기 시작했다. 서양처럼 고대 자료를 정리하는 방법으로 새롭게 분석을 시작한 것이다. 고대사는 쌓아서 만드는 것이지 발생순서대로 배열하는 것이 아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배열인 것이다. 그래서 삼황오재 전부를 부정하고 동주 이전의 역사는 신뢰할 것이 없다고 공언했다. 역사란 인류의 기억집단이다 그 기원을 잃어버리고 인류는 기억을 상실했다. 중국에서는 대대적인 고고학적 발굴이 시작된다. 은허의 발굴은 상왕조의 존재를 확인하고 중국초기 역사의 프레임을 다시 구성한다. 하나라 우왕 이전의 역사는 아직 증거를 찾지 못했다.
문자가 생기기 전의 역사는 구전으로 전했으며 전설보다 더 오랜 역사는 신화가 되었다. 신화와 전설의 시대인 삼황오제의 시설은 역사상 혼돈의 시기다. 신화는 한 민족의 자기 생명의 이전상태의 추억이고 자기 문명에 대한 추억이다. 신화는 민족정신의 진면목을 반영한 역사와 문화의 축소판이고 민족의 영혼의 깊은 곳에 존재 한다. 중국 신화의 반고, 신농, 대우, 과부는 희생된 영웅이다. 중국 역사의 기록은 BC 841년 西周시대 부터다. 중국인은 화하족이다. 염제와 황제 계열의 후손들이다. 화하족이 아닌 해대집단이 있다. 이 집단의 인물이 치우다. 해대집단은 동이족이다. 치우는 전쟁의 신으로 진나라에서 제사를 지냈다.
현실정치의 최종 뿌리는 무력 즉 폭력이다. 마지막 무력을 장악하는 사람이 정권을 장악하는 것이다. 정권을 쥔 자가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악이다. 악은 악을 부른다. 우가 아들에 왕위를 주면서 고대사회는 대동사회에서 소강시대로 진입하고 사회 환경이 나빠졌다고 여겼다.
사람의 신체구조는 각각 기관으로 구성된다. 사회도 수많은 기관으로 연결된다. 그 핵심기관이 국가기구로 국가라 부른다. BC770~221년 까지 550년 간 동주시기를 춘추전국시대라 부른다. 춘추는 공자의 노나라 역사서에 따오고, 전국은 전한의 역사서 유양의 전국책에서 따온 것이다. 이 기간 동안 660여 차례의 전쟁이 일어난다. 그리고 130여개의 나라가 10개로 줄어든다. 정치질서의 재조합은 대 전환시대의 특유의 현상이다. 사마천의 사기에 보면 이 때 살해당한 군주가 36명이고 망한 나라는 52개국이다. 쟁패는 강국이 무력으로 맹주가 되는 것으로 춘추 각국 쟁패 각축 중에 춘추오패가 출현한다. 제후사이에 이뤄지는 회합이 회맹이고 회맹의 맹주가 패자이다. 고대 하나라의 우임금이 주조한 九鼎이 국가권력의 신성함을 상징하여 주 왕실까지 존재한다. 전국시대 패자들은 이 구정을 신성이 여겨 서로 차지하려고 한다. 진시황도 사수에 빠졌다는 이 구정을 찾으려했다 포기한다. 춘추의 마지막 다툼이 BC515년 오월동주 이야기다. BC473년 오나라가 멸망하자 왕 부차는 자살한다.
전국시대는 약육강식의 시대다. 목표는 상대방 나라를 전멸시키는 것이다. 성을 점령하면 성안의 주민을 모두 죽이는 학살을 하는데 이를 屠城이라 한다. 전쟁이 나면 이판사판이 된다, 모든 백성이 죽던지 살던 지이니 모두 전력투쟁으로 싸워야 한다. 여기서 법률이 나오게 된다. BC390년경부터다. 초 悼왕이 오기를 재상에 임명하여 법률을 집행하고, 점령지 구 귀족은 인적이 드문 곳으로 이주시키고, 대신의 봉지는 3대에 봉지와 작록을 회수하고 분봉을 거둬들인다. BC247년 진 장양왕이 죽자 13살 아들 영정이 즉위하니 그가 진시황이다. 여기서 전국시대는 끝이 난다. 진시황은 조나라가 소장한 화씨지벽을 획득한다. 영정은 그 옥에 “하늘의 명을 받으니, 그 수명이 길이 창성하리라 受命御天 旣壽永昌”8자를 새겨 옥새를 제작한다. 이 옥새는 천하가 공인하는 정권의 상징이자 후대의 역사 속에서 국운의 기복을 증명하는 역할을 한다.
선비집단이 사회를 이끄는 특색은 후세까지 이어져 중국인은 문화인을 좋아한다. 문화인이 시를 쓰기 때문이 아니라 문화인과 선비정신이 거의 일치하기 때문이다. 고대 중국의 건국정신은 천하위공의 건국이념, 선비집단의 지도자 尙武重敎 같은 기둥이 있다. 중국역사의 난세와 치세는 모두 이 건국 핵심이념과 관련이 있다. 漢唐의 성쇠가 이 이념의 발전된 산물이고, 晉宋明의 쇠약은 이 이념을 소홀히 한 결과다. 사회가 비상시국에 처하면 사람은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해 사색하고, 자연 극가 사회 인생에 대해 사고하며 전쟁 평화 질서 인성을 생각하고 자신의 이해와 해결방안을 제시한다.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의 평화와 전쟁이 교차하던 시기에 색다른 학파가 나타났으며 개인이 제자를 받아 강연하는 풍토가 성행했다.
진시황은 봉건의 제후제도의 토지를 중앙으로 귀속시켜 군과 현으로 재편하고 임기를 두어 세습하지 못하게 했다. 중국은 전체 봉건사회에서 제국주위로 전환된다. 진시황은 전서에서 편리한 예서를 글자로 통일하고 도로와 교통체제를 정비한다. 분서는 있었지만 진나라가 모든 책을 태운 것은 아니다. 이들 책은 궁에 보관되어 있다. 갱유는 사실은 함양에서 400여명의 方士가 매장당해 죽었을 뿐이다. 진시황은 분서갱유의 오명을 쓴 것은 후세의 역사책이다. 진시황은 사실은 억울하다. 그가 두 세대 만에 망해서 그런 것이다. 제국의 최상 층부는 폭력적인 권력에 의탁하고 중간은 이익을 나누어 사리사욕을 채우는 문관집단이고 바닥은 흩어진 모래알 같은 백성 잡단이다. 진시황의 2세 황제 호해는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조고와 다른 자식을 처참하게 살해한다. 2대 권력은 중요하다. 진나라와 수나라가 모두 2대에서 망한다. 한 당 명에서도 2대가 뒤를 이을 때 피 비린내 나는 무장투쟁이 발생한다. 한 무제와 동중서가 손을 잡은 후 2000년간 ‘백가를 배척하고 유가만을 중시하는 정책이 된다. 전한이 200년 계속되다 왕이 어리고 어머니가 섭정을 하면서 쇄약 해진다. 한 원제의 왕후는 왕정군이다. 왕 씨가 점차 요직을 차지하고 상서 자사 군수가 모두 왕 씨로 도배를 한다. 원재가 죽자 아들 성재가 등극하자 외삼촌들이 대사마가 된다. 왕 씨들이 모두 교만하고 방자하지만 왕망은 겸손하고 소박하여 집안 재물은 없는 백성과 나눈다. 성제가 죽자 애제가 즉위하는데 애제는 동성연애자로 남자인 동현을 사랑하여 그에 모든 것을 다 준다. 그리고 병사하자 새로운 외척들이 득세하니 태황후의 명으로 왕망이 대사마에 오른다. 왕망은 동현을 파면하고 9살의 한평제를 등극시킨다. 그리고 새로운 외척을 근절시킨다. 평제는 왕망에 구석의 지위를 내린다. 유 씨 왕조를 폐하고 왕망을 왕으로 세우자는 운동이 벌어진다. 하늘의 뜻과 전국에서 왕망을 황제로 추전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민의에 따라 왕망이 황위에 오른다. 백성들이 선거를 한 것이나 다름없다. 왕망이 사회 갈등을 해결하려는 시도가 실패한다. 왕망의 화폐제도도 백성들의 신뢰를 얻지 못한다. 이것이 전한 후한 사이의 왕망의 역사이다. 결국 전한 종실의 유연 유수 형제가 왕망을 내리고 고조의 후손을 황제로 세우니 후한 12대 196년의 역사가 시작된다. 왕망의 실패는 중국이 경험한 총체적 실패다. 유가학설은 왕망의 문제를 해석하며 난처한 지경에 처한다. 후대 사가는 왕망이 가짜 군자로 고상한 품격은 모두 거짓으로 꾸며낸 것이라 말하지만 사실 왕망은 진실 되고 성실한 호인이었다. 그의 잘못은 지나치게 유가 이념을 의지한데 있다. 유가 이념은 수신이나 치국의 철학으로는 쓰이나 경제정책으로 나라를 통치하기에 적합지 않음을 증명한 것이 왕망이다.
후한이후 400년간 드리운 그림자가 위진 남북조 시대다
태자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면 젊은 태후가 섭정하고 대신과 상면이 어려우니 친정 부친이나 오빠가 정무를 돕는다. 외척이 대신의 자리를 점령하고 교만하고 난폭해진다. 왕이 성장하면 외척의 대권을 되찾기 위해 심복 환관과 결탁을 한다. 황제 친정 후 공은 자연히 환관이 장악한다. 황제가 죽으면 환관이 보좌할 수 없으니 또다시 외척이 등정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결국 삼국지의 위 촉 오의 싸움은 조조의 북위가 승리한다, 여기서부터 400년이 암흑기다. 589년 수양제 양건이 동진을 멸망시킬 때까지의 역사다. 삼국 과 동진 서진과 십육국 그리고 위진 남북조 4단계로 구분한다. 조조의 북위를 사마의 부자는 아무 제약 없이 曹魏를 선양 받아 정권을 잡아 서진을 건국한다. 위와 진 두 왕조는 잘못된 정치로 사회를 부패시킨 왕조다. 왕조의 합법성은 모든 왕조의 사회 정의의 근원인데 참주가 법통을 왜곡하니 자연이 근본이 훼손된 것이다. 서진의 개국 황제는 사마의 손자 사마염인데 미녀와 후궁과 황음으로 죽는다. 다음 왕 사마충은 어리석어 백성이 굶어 죽는다하자 어째서 고기를 먹지, 먹지 않아서 죽느냐 묻는다. 서진은 4대왕 52년에 망한다. 서진의 혼란기에 흉노가 봉기하여 자칭 漢 왕으로 등극 낙양에 도읍을 정한다. 북방지역은 정권이 수없이 교체되면서 23개정권이 들어선다. 서진이 망하자 일부가 동으로 도망가 동진을 세운다. 동진은 103년 송 50년 제 24년 양 56년 진 33년 총 170년의 시기를 남조라 한다. 동진 영화 9년에 왕희지의 난정서가 써진다. 남방의 작은 조정은 큰 변화가 있었지만 북위 정권은 100년을 유지한다.
종교와 신은 본래 한 민족의 핵심문화이다 북위 시조 선비족 탁발부는 원굉이라는 이름으로 바꾸고 원 씨가 되면서 전면적인 한인화를 하여 개척을 한다. 선비족의 언어와 문자사용을 금지하고 복장도 한족의 옷을 입는다. 멸망과 동화되는 이민족의 결말은 흉노는 한족에 소멸되고 동화된다. 선비는 흉노에 멸망하고 남은 세력은 한족에 동화된다. 유연은 돌궐에 패한 뒤 몽골과 거란으로 나뉜다. 저는 오호시대 멸망하고 남은 일부는 한족화 된다. 돌궐은 남북조 말기 융성하다 유언을 멸망시킨다. 터어키로 넘어간다.
국가의 두 가지 중요한 요소는 제도와 민족의 유전자 자질이다. 명나라 300년의 고난과 영예는 이 두 가지 작용으로 이뤄졌다. 문화에는 경로 의존성이 있다. 송나라 성리학은 명나라 운명을 결정했다. 자본주의는 일종의 체제로 법치와 제도는 이 체계의 토양에서 나고 자란다. 명나라 말기에 나타난 자본주의의 싹은 자본주의로 성장하지 못했다. 유가는 고심해서 도덕으로 권력을 길들이려 했지만,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권력은 폭력에서 기원되며 도덕 설교는 운명적으로 무기력하다 도덕으로 권력을 상자 안에 가두는 것은 역부족이다.
청나라 사대부 가운데 앞선 세계관을 가지고 변화를 일으킨 혁흔 임칙서 같은 자들이 시대의 지도자가 되었다. 보수적인 세계관을 가진 강의, 서동 같은 자들은 시대의 순장품이 되었다. 임칙서 증국번 두 사람은 소아의 측면에서 성현이었으나 대아 측면에서는 나라를 망쳤다. 화하는 상고시대부터 진한까지 2000년간 상승 주기였으며, 진 한 부터 청나라 말까지 2000년은 하강 주기였다가 청나라 말기부터 다시 상승시기로 들어섰다. 중국은 대전환의 과정에 있으며 아직 목표점에 다다르지 못했다.
2018.08 05
이것이 중국의 역사다
홍이 지음 (이름 왕패이린)
애불북스 刊
첫댓글 중국의 고대역사를 잘 살펴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