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우성 시 모음 4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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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4월 눈사태
임우성
오메오메에 저 이쁜 것들
짜안 해서 어쩌까이
제법 남도 말에 익숙해져 가는 여우
하지만 어째야 쓰까 까지는 터득하지 못한
어쩔 수 없는 북도여자
정말이지 날씨가 이상한 게 아니라 미쳤다
개나리 진달래도 뒷모습 보이는
4월도 중순
화사한 벚꽃 위로 눈보라가 친다
그것도 최남단 항구도시
목포에서
그럴 수 있다
날씨도 사람도
가끔은 이상할 수 있고
더러는 미칠 수도 있는 거지만
심하다
만개한 벚꽃 참혹하게 후려치는
사월 눈보라는
사태다, 어느 오월
사람이 저지르고
사람을 슬프게 한 그런 어처구니없음과 같이
꽃들을 슬프게 하는
사월의 눈이 저지르는 목포 꽃사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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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가난한 사랑
임우성
새해 첫 새벽부터
겨울연가란 드라마 보며 눈물 그렁인다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서로의 마음이 제일 좋은 집이잖아요, 그럴까
내 마음이 여우에게 제일 좋은 집이긴 한가
여우 마음이
나에게 제일 좋은 집이 되어
내가 그 집에 편안히 쉬고 있는가
그렇게 간단하면
그렇게 쉬우면 어디 사랑이겠는가
우리가 서로에게 집이 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겠거니와
제일 좋은 집은 아닌 듯하다
여우는 쓰러져 가는 초가집
나는 낡은 천막쯤이나 될까
지지리 궁핍하고 어설픈 우리 사랑
하거나 여우와 나 유일한 서로의 마음, 그렇다면
쓰러져 가는 초가집이건
낡은 천막이건
서로에게 제일 좋은 집인 것은 확실하다
다만
우리 사랑이 빈곤한 것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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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가을비
임우성
여름 내 열고 살았던 창문을
닫았다
바다도 뱃고동 소리도 멀어졌다
한결 아늑해진 방
오랜만에 가슴으로 파고드는 여우
팔베개 해 주고 잠든 밤
창 밖에 알만한 속살거림
자잘 자잘
싸시란 얘기로 지새는
구월 끝자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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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가족사진
임우성
동네 쓰레기 집하장에
단란한 가족사진
앞 줄 앉아있는 엄마, 아빠
뒷 줄 서있는 아들, 딸, 아들
그늘 없이 맑고 밝게 웃는 다섯 표정
한 가족으로 존재했던
저 행복의 순간 이후로 어떤 시간이 어떻게 흘러
어떤 이유로 사진이 틀째 버려졌을까
버린 사람이 다섯 명 중 하나라면
분명 사진을 챙기고 틀만 버렸을 것을
아닐 것이다
저들 중 한 명은 아닐 것이니
다른 누군가
애착 없는 다른 누군가가 버렸을 것이니
동네 쓰레기 집하장
허접 쓰레기와 같이 불행하게 버려진
되돌릴 수 없는
과거 한 순간의 행복 인증
밝은 웃음이 슬픈
가족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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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걸레
임우성
찌든 때 깨끗한 수건으로 싹싹 문질러
반짝반짝 윤이 나는 가구
가구가 윤이 나는 만큼 수건은
다시 빨아도 원래모습 찾을 수 없다
전이된 치명적인 오염으로
걸레가 된다
당신 가슴에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아픔 있는 거 안다
슬퍼하는 당신
멀거니 바라 볼 수 밖에 없을 때
나는 참으로 간절히 수건이 되고 싶다
깨끗한 수건이 되어
당신 가슴의 아픔 싹싹 문질러 또 문질러
아픔 없는 깔끔한 가슴 될 수만 있다면
내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은들 어떠랴
전이된 당신의 아픔으로 오염된
아픈 걸레가 된들 어떠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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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겨울 갑사에서
임우성
부리 하나로 삶을 버티어 가는 딱따구리
빠른 속도로 쪼아대는 소리만
해묵고 헐벗은 겨울 숲의 고요를
딱따그르 딱따그르
목탁 대신 두드리고 있었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춥다
겨울이니까
옷깃 여미어주려니
내 의지와는 관계없이
내가 당신의 아픔이 되어 있음을 생각했다
맞아야만 아픈 것이 아님을
다쳐야만 아픈 것이 아님을
너무 좋아서
너무 소중해서 아픔이 될 수도 있음을
생각했다
좋아할 것도 없으면
소중할 것도 없으면 넉넉하고 편안하려나
아무 것도 없어
허허롭고 외로운 것 보다는
지니고 아픈 것이 나으려나
딱따그르 딱따그르
맞아야만 아픈 것이 아니더라
다쳐야만 아픈 것이 아니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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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겨울 꽃눈(花目)
임우성
아가미와는 다를 것이다
혹한의 겨울을
얼어 죽지 않고 살아 낸다는 것은
물고기처럼 물속에서 숨을 쉬기 위해
아가미를 가지는 것과는
다른 무엇일 것이다
간직한다거나
꼬옥꼭 품는 어떤 것일 것 같은데
어떻게 버틴다거나
어떻게 견디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간직하거나
무엇을 품는 일일 것 같은데
그렇지 않고서야 이 추운 겨울에 얼어 죽지 않고
어쩌면 요렇게 작은 꽃눈으로
살아남아서
남풍에 부풀리고 부풀리어
더구나 분홍빛 고운 진달래로
피워낼 수 있다는 말인가
정 같은 무엇일까
그리움 같은 무엇일까
이렇게 혹독한 겨울을
꽃망울은 무얼 품고 살고 있을까
무얼 간직하고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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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겨울 동화
임우성
매일 아침 다섯 시부터 보여주는
오래 전 방영했었던 은서와 준서 이야기 가을동화
아침마다 이게 먼 짓이다냐, 보지 말자
여우가 눈물을 닦으며 번번이 한 말이었다.
그래도 다음날 같은 시간이 되면
우리는 첨부터 끝까지 보며 같이 울었다.
그렇게 가을동화 최종회를 다 보고
마주 보고 웃으며 눈물을 닦아주고
아직 첫눈도 내리지 않았지만
겨울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2월은 중순을 넘기고 있었다.
너의 죄를 사하노라.
그 말을 자주 떠올리게 되었다.
너희 중 죄 없는 자 돌로 치라.
어린이 예배시간 그 성경 구절을 처음 들었을 때
가슴 덜컥 내려앉을 만큼 잊고 있었던
만득이 구슬 세 개
소리 나지 않게 주머니에 따로따로 넣어 와
고향집 뒤뜰에 묻어 두고
탐이 나 훔쳐 오긴 했지만
언제 만득이가 나타날지 몰라 갖고 놀지도 못했던
묻어 둔 채로 시간이 흘러 잊어버렸었던
그 절도죄 뒤로
얼마나 많은 허물을 쌓으며 지금에 이르렀는가.
너의 죄를 사하노라.
사함을 받기엔 내 죄가 너무 크고 많지 않나
죄에 비하면
내게 부여된 삶이 훨씬 과분하고 고맙지 않나
그런 생각 자주 하며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겨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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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국립해양유물전시관에서
임우성
특히 제2전시실
증도 해저에서 발굴했다는 중국 무역선 신안선
700년 전 지키지 못한
엄청난 규모의 막중했을 약속
당사자들의 흔적조차 찾기 어려운 긴 세월 뒤에
예기치 않은 곳에서
보물이 되어
측정할 수 없는 가치의 값으로 전시 되었거니
저 배
얼마나 많은 목숨의 기다림
얼마나 많은 기대의 절망이 되었으랴
지키지 않는 약속은 나쁘다
지킬 수 없는 약속은 슬프다
지켜진 약속이 아름답고 빛나는 것은
지키지 못한 약속들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다음에 만나
그 약속을 죽음으로 지키지 못한 옛 사랑 때문에
퇴근 후 만나는 여우와의 약속이
고맙고 즐거운 거다, 하지만
오늘 나는 지키지 못한 약속의 또 다른 면을 보았다
중국 무역선 신안선
그때 약속이 지켜졌더라면
무사히 일본에 닿아 목적지에 전해졌더라면
규모 큰 무역행위로 거래되는
잡다한 살림살이에 지나지 않았을 물건들이
신안 증도 앞바다에 침몰
지키지 못한 약속 칠백년 후에
보물이 되어 전시될 수 있었지 않았겠나
드물게는 지켜지지 못한 약속이
보물이 되기도 한다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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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금강산 일출
임우성
*천출명장김정일장군 초병의 머리 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구월 동산에
해가 뜬다
하늘빛 물빛
구름도 바람도 다름없는 산하
붉은 깃발 빗겨 들고
남측 사람들의 한정된 자유를 감시하는
초병과 나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다
위대한 수령동지의 적자 영명한 지도자 동지와
실업고등학교 출신 탄핵 대통령 노무현이 뭐
대충 그 정도의 거리가 아니겠나, 참으로
까마득한 거리가 아니겠나
올 수 없다고 생각했을 땐 그리운 금강산
갈라진 내 조국 애정의 금강산이었는데
와서 보니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
다시 오고 싶지 않은
연민의 금강산이 되어
인접한 공화국 북조선 금강산 구월 동산에
차가운 해가 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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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금계국
임우성
님께서 자연의 일부 되시던 날
청계농공단지 퇴근 길 대로변에는
코스모스 닮은 금계국이
샛노란 눈시울로 흔들리며 울었습니다
상고출신 못생긴 외모
왕주름 뻔데기 초지일관 바보가
법학 행정학 최고학벌
뻔지르르한 낯짝의 기회주의자들에게
처음부터 발목 잡히고
시달리시더니
자존심의 극단
몰랐을 리가 없다는 말은
몰랐을 수도 있다는 말이며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자유롭고 정의로운 대한민국
위장퇴거와 이중소득공제는
높으신 양반들의 상식이 되었고
논두렁 한 번 밟아 보지 않은 도시의 관리님들이
논농업직불금을 받아 챙기시며
인터넷 자유토론자를 기소하고
촛불로 호소하는 사람들을 시위대라 구속합니다
너무 아깝습니다
정말정말 애쓰셨습니다
사랑합니다
이제 편히 쉬십시오
몇날 며칠 출퇴근 버스에서
아침저녁 차창너머 금계국을 보면
슬프고 암울하던 목포역 광장 분향소와
못생겨서 더 정겨운 영정사진과
바람에 가벼이 흔들리던
노란 리본 애틋한 인사들이
흐드러지게 울먹울먹 떠오르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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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나쁜 말(語)
임우성
그래도 많이 건져 올렸네
열 두 명밖에 안 남았다니
삼백에서 열 둘이라
‘밖에’란 표현을 수긍하지 못하는 건 아니지만
건져 올린 것이 조약돌 아니고
생떼 같은 목숨이라
우리에게 있어 목숨 ‘하나’가
때로는 몇 천, 몇 만보다
훨씬 더 애틋하고 소중할 수 있거니
하나
때문에 죽을 만큼 애간장 태우고
하나
때문에 생의 나락에서도 삶의 끈을 이어가듯
하나가 세상과 다름없는 가치를 지니고
하나가 온전한 삶의 의미일 수도 있는 것을
열 두 생명
열 두 개의 세상이
열 두 개의 삶의 의미가 물 속에 잠겨
두 달이 넘도록 주검조차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을
아직도
열 두 명 ‘이나’ 그러고 있는 것을
열 두 명 ‘밖에’라니
그건 아니지
욕설보다 더 나쁜 말
그렇게 말하는 건 정말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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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낙서 강산
임우성
견고하게 새겨
오래 남기고 싶은 마음 누구에겐들 없으랴
그 많은 탑과 기록으로도
성이 차지 않았던가 보다
헛똑똑이 따로 있겠나
백년정권 기약하기도 어려운 상황인데
그렇다 한들 예측되는 어느 시기가 지나
저렇게 크고 깊게 새긴 이름과 구호들을 본다면
후세만대 욕 해댈 것을
눈총 비난 다 퍼부을 것을
그러고도 그 집안
잘 될라는가 모르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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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날개
임우성
농기구 수리하는 곳엘 가면
한켠에 폐기처분되는 발(足)들이
버려져 쌓이고 쌓이다가
홀연히 다른 고물들과 더불어
사라지곤 하는 것이었다
경작기 회전쟁기 날(刀)이라고도 하고
트랙터 로터리 발(足)이라고도 하는
이 발들은 처음
각지고 튼튼한 모습으로 쟁기에 부착되어
자갈 밭 진흙 논 갈아 엎는 동안
더러는 부러져 교체되기도 하지만
온몸 부딪쳐 닳고 닳아
나약한 곡선으로 능력을 상실하여
결국은 고물이 되는 것이었다
어느 날, 진안군 용담면 와룡리를 지나다
"청산에 살어리랏다"는 심상치 않은 간판에 끌렸더라
헌데 이게 웬 일이다냐
값없이 버려지던 그 발들이 글쌔
수 십마리 새들의 날개가 되어 있는 거라
사슴벌레 잠자리 허수아비와 어우러져
갖가지 날개짓을 준비하고 있는 거라
후로는 농기구 수리하는 곳엘 가면
한켠에 아직 날개가 되지 못한 발(足)들이
버려져 쌓이고 쌓이다가
홀연히 다른 고물들과 더불어
사라지곤 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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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내시경
임우성
술을 진탕 마시고도 속이 편하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겠지만
술을 진탕 마시고 속이 지랄 같은 건
당연하다
당연 때문에 챙기게 되는 꿀물
콩나물, 북어는 마누라 있을 때 얘기이고
대게는 냉수 한 사발로 거뜬하더니
과음 후 깊은 잠에서 깨인 아침, 가벼운 기침에
명치가 멍든데 맞은 듯 아픈 것은?
병이다
병은 예사로운 일이다
병원에서 처방 받고 약 지어 먹으면 나을 수 있는 것
그러나 일주일 약을 먹었는데도 통증만 가셨을 뿐
내내 더부룩하고 뭔가가 걸려 있는 듯한 느낌
예사롭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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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내시경 예약
임우성
세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아무렇지 않은 경우, 그건 가능성이 희박하다
염증이나 궤양, 그래도 나은 편이다
심각한 건 또 다른 경우인데
요즘은 초기에 발견하면 위험하진 않다고 하지만
고맙긴 하다, 내 운명
내 몸을 위해 노력하지 않고
매일 술이나 퍼 마시면서
이만큼 이렇게나마 살아있을 수 있었던 것은
그러나,
거 참,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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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노년 진입
임우성
내 아버지
치부책 펼치시면 영락없이
코끝에 걸쳐 쓰시던 돋보기
이제 내가 쓰네
신문을 펼치면 신문 글씨가 이중으로 흐릿흐릿
가까이 할수록 더 흐려 자꾸만
멀리 보게 되는 몸짓도
어머니 돋보기 쓰시고도 자꾸
멀리 하시며 바늘귀에 실 꿰시던 것처럼
멀게 읽으며 버티다버티다 어제
안경점에 들러 하소연했더니 노안이래나
돋보기 하나 샀다네
나들이 할 때
선글라스 쓰기를 질색으로 여기던 내가
돋보기 쓰고 또렷해진 글을
참으로 편안하게 읽고 있네, 나 이제
돋보기를 써야 한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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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달 구워먹기
임우성
둥그렇게 쌓아 지은
거대한 달집
에둘러 주렁주렁 소원지 걸어 놓고
동산에 둥근 달이 덩그렇게 떠오르자
웅치골 남녀노소
횃불로 달집 돌아 불을 지핀다
가차없이 치솟는 현란한 불길
대나무 기총소사
용트림 머리카락 풀어헤친 검은 연기
그슬리는 보름달
올 한 해도 만사형통 풍요로운 신기덕봉
망월이야!
우리 참 잘 살았네
지난 한 해
아쉬운 일들이야 왜 없겠나
털어 내고 더 열심히 해 보는 거지
설익은 보름달
망사철판위에 고실고실 맛있게 구워
달 안주에 얼큰히 젖어보네
정월 대보름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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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달팽이
임우성
베란다에 웬 달팽이 한 마리가
어슬렁어슬렁
여유만만한 것까지는 좋은데
어디서 왔다냐
깎아지른 아파트 육층
틈새 없는 창문 어디를 뚫고 와서는
어떻게 살아간다냐
알로에 대형 화분 하나에
하얀 제비꽃과 철쭉 작은 분 하나씩
그 뿐 틀에 박힌 콘크리트
어디에 둥지를 틀고
사랑은 고사하고 목숨이나 부지할 수 있을까
목숨이다
성가신 일이지만 잘 거두어
아파트 옆 코딱지 정원으로 옮겨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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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동 족
임우성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다른 족속으로 만들었나
비록 전류는 흐르지 않는다 해도
짐승이나 가둘 법한 녹색 철망
몇 발자국 저쪽에서
일하다 말고 등 돌린 채 앉아 있는
여인
먼 거리의 비포장길을
고개 한 번 돌리지 않고 자전거 끌고 가는
남정네
나는 당신들이
우리의 길을 막고 있는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늘 보니
우리가 당신들의 길을 막고 있구나
우리를 갈라놓은 것은 철망이 아니다
철망이 없다 한들
가식 없이 눈 맞추며
마음 나눌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지금까지 만으로도 그러하다
그 어떤 변화로도 되돌릴 수 없을 것 같다
낯설진 않은데
희거나 검은 다른 종족보다도 더
멀게만 느껴지는 서로 다른 우리는 이제
다른 방법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질의 동족이 되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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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들국화
임우성
때가 있던가
사랑
추워지는 늦가을
사랑에 형식이 있던가
혼자 기다리다 말지라도
조건에 개의치 않는 거야 사랑은
벼랑 바위틈에 뿌리내려
혼신을 다해 빚은 하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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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똥친 막대기
임우성
한 때는 너도 꿈으로 사는
빛나는 시절이 있었으리
많은 가지중의 하나에서
잔가지들 털어 버리고 당당히
한 개 막대기로 거듭나
왕할머니 세 번째 다리가 되어
꼭 필요한 지팡이로 대접받고 싶기도 했겠지만
꿈이 다 이루어지던가
텃밭 오이넝쿨 지주목으로
봄 내 넝쿨 옷을 입고
마디마디 오이들로 치장한
찬란한 시절을 누리기는 했지
무엇으로였던지 감당할 수 밖에 없었던 상황
반드시 치워야 했던 똥
소임을 다한 똥묻은 막대기
당분간 쓰임새를 잃어버리긴 했지만
또 다른 기대의 여지는 있지 않은가
버려져 두엄자리 곁에 누워
한 가닥 꿈에 겨운 똥친 막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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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목포 갓바위
임우성
전설이건, 그냥
이야기이건
결말이 혼자이면 허전하다
그러그러해서 그는 행복하게 잘 살았다더라
보다는 누구랑 행복하게 잘 살았다더라
훨씬 좋아 보이지 않는가
사람은 물론
짐승도 둘이 다정하면 이쁘다
길에 채이는 돌맹이도
한 개가 있는 것 보다는 두 개가 보기에 좋아
목포 갓바위
갓 쓴 아버지와 아들
비록 전설은 슬프고 불행하지만
바람
불려거든 얼마든지 불라고 해
파도
칠려거든 얼마든지 치라고 해
설사 폭풍우 거세게 휘몰아쳐 온다 해도
걱정이 되지 않는 건
혼자가 아님이라
아버지와 아들은 언제나 같이 있으리니
불행해도 같이 있으리니
슬퍼도 서로 의지할 수 있으리니
끝내 외롭지 않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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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목포문학관 3
임우성
- 김우진 관
김우진이 누구데?
심드렁한 여우
그러게 어디서 듣긴 들은 이름인데
막연한 늑대
엘리베이터로 오른 이층 김우진 관
잠잠히 둘러보던 여우의 감탄
멋쟁이, 사의찬미 윤심덕 애인이잖아
자기야, 자기야
자기도 나랑 배 타고 가다가 내가 죽자고 하면
같이 죽을 수 있어?
그만큼 나 사랑해?
아,
참으로 곤혹스런 애정의 시험대
고럼 고럼 마이 달링
이쁜여우 없는 세상
혼자 살아 머하겠나 같이 죽자
사탕 같은 거짓말
여우는 현실적이다
나 같음 절대로 안죽는다
도망가서 끝까지 같이 산다
그렇다 저 여자는
자기보다도
나 죽는게 아까워 못 죽을 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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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拔齒발치
임우성
염증 일으키는 세균과
방어하는 신체 면역기능 사이
균형이 깨어졌을 때 발생한단다
조영사진 어두운 부분
잇몸 하방의 뼈까지 진행된 염증으로
아프다
흔들림이 심하다
제 기능을 상실하고 고통만 유발하는
애물
뽑는게 상책이란다
치주염
수 십년 내 삶의 먹거리를 분해해 준
지대한 공로도 병이 들면
고통의 근원되어 버릴 수밖에 없음이니
마취
집게에 찝혀
피투성이 되어 뽑혀져 나간
애석하고 후련한 내 고통이여
내 몸의 일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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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봄 소묘
임우성
오메오메에 가짠시러라
아직 손도 다 못 펼쳤시야 귀여운거어
산책길 함께 걷던 여우가
뒤처져 동동거리며 호들갑
돌아가 보니 무심히 지나쳐 온
돌담 밑 키 작은 단풍나무
참으로 찌잔스럽게 잎싹을 피우고 있네
빛깔만은 깜찍하게 뚜렷한 연두
꼬드라져 손가락도 펼치지 못한
여리고 어설픈 잎새
여우가 손끝으로 살살 건드려 보네
차아암 요것들 차암
추운 겨울 할딱 벗고
신치럼고 있는거 같드만
속내는 지할짓거리 다 하고 있었구마안
여우 귓볼에 따뜻한 봄 햇살이
솜털마냥 보드랍게 머물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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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분계 해수욕장에서
임우성
허벅지 풍만한 여인송이
가랑이 들어 올리고 물구나무서서
한없이 기다리는 해변
여우와 나 밖에 없는 분계 해변 모래밭
이제껏 만난 햇살 중
가장 밝고 따뜻한 빛으로 아련하고
여인송 전설을 읽으며
모르는 곳 처음 찾을 때마다 느끼는 것
오랜 옛날부터
내가 모르는 곳에서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나름대로 참 열심히들 살고 있었다는 것
나만 힘든 게 아니었다는 것
나만 사랑을 잃어버린 게 아니었다는 것
나만 그리워한 게 아니었다는 것
나만 슬픈 게 아니었다는 것
사람 사는 거 그게 그거라는 것
압해도 송공항에서 배를 타고
암태도 은암대교 자은도로 들어 와
발길 닿는 대로 흘러온 자은면 백산리
아름다운 해변과 여인송의 전설이
우리 사랑과 어우러진
햇살 따뜻한 구월
분계 해수욕장의 오후.
☆★☆★☆★☆★☆★☆★☆★☆★☆★☆★☆★☆★
《28》
빈집. 1
-우편함-
웬만한 산골 외진 집까지도 자리잡고
삶을 측정하는 전기계량기
그것이 없었다면 사람들은
삶을 생의 기본이라 여겼을 것이다.
기본은 존재다.
계량기가 돌아가지 않아도 매기는 거다.
존재가 살기 위해 움직이는 것. 그리하여
계량기는 돌아가고
기본 외의 요금이 더해가게 되는
삶은
기본 초과인 거다.
기본에서 천 원도 더 쓰지 못하고
기본 더하기 몇 백 원의 삶으로 연명해 가던
동네 모퉁이 오두막집 할머니
어느 날 구급차에 실려간 뒤로
황당한 건 우편함이었다.
다달이 할머니가
몇 백 원짜리 빈곤을 확인할 때마다
입을 크게 벌리며 웃곤 했던 우편함에
기본요금이
계속 찾아와 쌓아는 것이었다.
이미 계량기는 멈추었다.
존재도 없다.
터무니없는 기본이
매달 찾아와 쌓이는 걸 견디어야 하는
입을 굳게 다문 우편함만
낡은 대문에 매달려 속이 상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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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빈집. 2
-문-
각목을 비껴 대고 못질해버린 낡은 출입문
이제 다시
열릴 이유가 없어진 문( 門 )도 문이랄 수 있는가, 그렇다고
벽( 壁 )이랄 수도 없지 않은가
가까이 있을 땐
멀거니 스치며 살아 온 얼굴
아주 떠난 다음
꼭 한 번만이라도 다시 볼 수 있기를
꼭꼭 찍어 볼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하게 되는 것처럼
할머니 건강할 때 잦은 여닫음
혹사당한다며 눈 흘기고
아프다며 삐걱삐걱 엄살 피우고 하더니
할머니 아주 가신 뒤 못질 당하고 나서야 문은
아주 아주 간절히
열리고 싶다. 삐그덕
노래하며 열리고
할머니 구부정한 허리로 지난 다음
덜그덕 노래하며 닫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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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빈집. 3
-마당-
실체가 죽으면 이름을 남기지만
실체가 바뀌면 이름이 없어진다.
올챙이가 죽으면
죽은 것이'올챙이'라 말하지만
올챙이가 개구리로 바뀌면
'올챙이었던 개구리'라 부르지 않는다.
개구리는 다만 개구리
같은 실체이면서
바뀌어 이름이 없어지는 것
개구리가 됨으로 하여
올챙이라는 이름을 잃어버린 거다.
개구리일 뿐이다.
할머니네 오두막집 마당은
그렇게 사라지고 말았다.
'마당'은 없어졌다.
망초꽃 흐드러진 '풀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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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빈집. 4
-풀-
여린 풀잎 같은 내게
세상은 아스팔트다웠다
흙이 아닌
아스팔트 틈새기에 뿌리내린 듯, 늘상
허기지고 힘겨웠다.
그리워도 볼 수가 있나
기다린들 오기를 하나
그렇다고 찾아 떠날 수가 있나
쓰러져 가는 할머니네 오두막
돌이끼 번지는 해묵은 슬레이트 위
막힌 골, 누적된 잡물에 한 포기 풀
용케도 똘 감나무 그늘진 위치에 있어
말라죽지는 않고 살아 있거니
나 같은 그리움은 없거라
나 같은 기다림도 없거라
너나 나나 이제는
뿌리 거두어 떠날 수도 없으니
목숨이나 부지하고 살거라
끝내 버티어 살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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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서산 시절 2
임우성
자기야, 자기야
바다가 팔딱팔딱 뛰어 온다
팔딱팔딱?
바다가?
바다가 무슨 깨구락지간디
팬티 바람으로 창문에 매달려 보니 바다가
무더기무더기 은사시나무마냥 반짝거리며
종종종 우리 쪽으로 밀려오고 있는 것이다
저걸 어떻게 팔딱팔딱 뛰어 온다고 느꼈을까
징검다리다
삐졌는지 옆으로 간다
천방지축이다
부채살같다
두런두런 구시렁거린다
바다가 수시로 모습을 바꾸고
변화무쌍하다는 생각을 자주 하긴 했지만
그 때마다 바다에 대한 여우의 표현이
놀랍고 특이하다
아침마다 일어나
여우가 창가로 가면
오늘은 바다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여우는 또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궁금해서 슬그머니
바다를 넘겨다보는 버릇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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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세면장 잔혹사
임우성
세면장에서 할랑 벗고
샤워를 하려는데
바퀴벌레 닮은 웬 벌레가 한 마리가
세면장 모서리를 따라
징그랍게 발발발발
기어가 변기 뒤로 숨으려는 것을
화장지 뜯어 잽싸게 잡아
변기에 넣고는
물을 내려버린 거라
랄랄라 샤워를 하다 말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너무 엄청난 짓을 저지른 거라
어쨌거나 살아있는 목숨인데
나를 공격한 것도 아니고
살겠다는 일념으로 숨으려는 것을
보기 싫다는 이유만으로 잡아
변기 휘몰아치는 물결에 던져
십 삼층 배관을 따라 까마득히 떨어져
정화조 더러운 똥통 속에서
몸부림치다 죽어갔으려니
잔혹하기로 이보다 더한 경우가
그리 흔치 않을 터
바로 내가 한 짓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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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애통절통(哀痛切痛)
임우성
못 배워 지식도 언사도 짧으셨던 내 어머니
남 탓하지 말고 항시
입장 바꿔 생각해 보라 하셨다
그리하면 탓보다는 남을
나처럼 이해할 수 있을 거라 하셨다
몇 날 며칠 세월호 선장님
그분도 목숨 다급했을 사람이시니
세월호 선원님들, 그분들도
생명 같은 가족들이 있으시려니
09시 46분 일사구생(一死九生)탈출하시고도
31분이나 경과
님들 구조 안녕 보장 되셨을 때
10시 17분, 착한 내 아이 물에 잠기며
기다리래, 기다리라는 방송 뒤에 다른 안내방송은 안 나와요.
어머니, 나 어려서부터
절대로 절대로 욕설 하지 말라 하셨다
욕설 없이 얼마든지 따질 수 있고
욕설 없이 얼마든지 다툴 수 있고
내 입만 더러워 진다시며
순한 욕설도 용납지 않으셨거니
만고천하 버러지만도 못한 것들아
내 새끼 물에 갇혀 죽어가던 그 때
주둥이에 밥숟갈이 들어가더냐
목구멍에 커피가 넘어가더냐
호랑말코, 인간말종 찢어죽일 것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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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약깡다리
임우성
전주 시외버스 종합정류장
맞은 편 상가 뒤쪽
흐름조차 멈춘 듯 작은 도시하천 위에
한 사람 겨우 지나다니게 놓여진
약깡다리를 우리는 건넜다
보내기 싫어 투정하는
당신 모습이 이쁘다
나 떠나고 당신 혼자
이 다리를 다시 건너겠지만
이미 우리의 언약은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 까지
유효하므로, 서로
사랑하고 있으므로
쓸쓸히 돌아서는
당신의 뒷모습마저도 우리 삶에
아름다운 추억이 되리니
오래 기다리지 않아도 돼
언제건 내가 다시 와
이 약깡다리를 건너 당신에게로 가리니
그 때는 지금의 아쉬움이
따뜻한 추억으로 남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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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억새
임우성
미련 따위
훌훌 털어 버리라고
그리움 따위도
훨훨 날려보내라고
가을 쓸쓸한 언덕에서
훠이 훠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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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엠보싱(embossing)
임우성
진안에서 전주가는 길, 마지막 모롱이
소리개 재 오른편에 천주교 공동묘지
볼록볼록 단정히 정돈 된 동산을 지나 갈 때마다
홀로 계신 아버지를 떠올리곤 했네
어머닌 큰 길 가
조상님, 친지 몇 분과 어우러 계신 터라
오며 가며 지나쳐도 뵙기가 편안커니
선산 깊은 골 능선에 홀로 계신
아버지, 명절에나 찾아가 뵈면
잡목에 둘러 싸여 하늘만 빼꼼히 올려다 보이는
그 곳 얼마나 외로우실까
살아서 어우러지면
좋다 좋다 하다가도 부딪치고 다투고
하거나 죽어서 외로이 묻힐 일은 아니다 싶었네
저렇게 옹기종기 뽈록뽈록
엠보싱한 동산이라도 이룬다면
어느 회사 화장지 선전처럼
눅눅한 바람이 지나다 보송보송해지고
끕끕한 구름이 스치다 뽀송뽀송해진다면
가신 분들 촘촘히 함께 머무는 그 곳을 지날 때마다
명절에나 땀에 젖어 찾아뵈어야 했던
선산에 홀로 계신
아버지를 떠올리곤 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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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여명(黎明)
임우성
아름다운 것과 슬픈 것은
어디가 닮았을까
아름다운 것과
쓸쓸한 것도 분명 닮은 곳이
있긴 있나 본데, 참
모를 일이네
저렇게 아름다운 시작을 보며
어찌하여 슬픈 생각이 드는 건지
어찌하여
쓸쓸한 생각이 드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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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
유달산 금붕어 이야기
임우성
지난 2월
유달산 조각공원 옆
특정자생식물원 유리온실을 처음 들렀을 때
학독*어항에 혼자 살고 있는
금붕어를 알게 되었지요
외롭겠다
여우 말처럼 참 외롭게 여겨졌더랬습니다
약용식물을 배우고 싶은 우리는
3월 4월
달 걸러 그 곳을 들러 보며
봉의꼬리나 난 같지도 않은 콩짜개난과 미니호랑가시나무등
새로운 식물들을 알게 된 것과 더불어
혼자 사는 금붕어에 대한 애잔한 마음 또한
깊어져만 갔더랬습니다
길을 가다가도 느릿느릿 꼬리 젓던 모습
일을 하다가도 문득 떠오를 만큼
어느 날은 밥을 먹다가 여우가 말했습니다
아찌야 금붕어 파는데 있거든 한 마리 사 와라
6월이던가
식물원의 부쩍 변화된 야외 식물들을 찬찬히 돌아보고
외로운 금붕어를 만나러 갔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이게 웬 일입니까
대여섯 마리의 금붕어들이 오순도순
활발하게 헤엄치며 살고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여우가 얼마나 좋아하던지요
아이처럼 짝짝짝 박수를 치는가 하면
함박꽃같이 밝은 얼굴에
주먹가슴으로 강종거리며 어항을 떠나지 못하고
좋다 참 보기 좋다
이제 가자 해 놓고는 또 보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여우도 나도
금붕어 걱정은 깨끗하게 털어 버렸답니다
얼마 전 우리는 간혹 그러하듯
어물쩡 계획 없는 짬이 생겨
만만한 특정자생식물원을 들렀습니다
꽃을 버리고
열매를 다듬어 가는 식물들
꼼꼼히 살펴보고 익혀 본 다음에
행복하게 살고 있을 금붕어를 상상하며
유리온실 안의 학독어항을 찾았더랬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금붕어가 한 마리도 없는 겁니다
먼 일이데?
여우가 땡그란 눈으로 관리하시는 분을 찾았습니다
관리하시는 분은 담담히
자신도 금붕어의 생리를 잘 몰라
아실만한 분께 여쭤 봤더니
먼저 살던 놈이나 새로 유입된 놈들도
나름대로 예기치 않은 새로운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스트레스를 받아 모두 죽은 것 같다고
허전한 웃음으로 말씀하시거늘
아뿔싸
참 힘들었겠다
여우가 그렁한 눈으로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그러게
조용히 혼자 살았으면 더 오래 살 수도 있었겠거니
느닷없는 무리 다섯 마리가 현실적으로 나타나
거부할 수도 없는 정해진 공간에서 활개침으로
황당 혼란 오해 삐짐 억울 편가르기 왕따 등등
얼마나 견디기 힘들었으면 죽었을까
계단을 힘없이 내려오며 여우가
내 손을 잡았습니다
여우어깨를 감싸 안고 걸으며 우리가
같은 회한에 빠져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생각만 했어
우리 입장에서만 바라본 거야
금붕어의 상황
금붕어 입장은 전혀 고려해 보지 않은 거야
때로는 외로운 것보다 더 힘든 것이
같이 있어야 한다는 것임을
사람도 더러는 그러하다는 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던 거야
유달산 짙은 초록이
슬프도록 눈부신 날이었습니다.
*학독 : 돌확의 전라도 방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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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유달산 여인목
임우성
유달산에 들어서면 이순신 장군님이
섶을 둘러 왜놈들에게
어마어마하게 큰 노적가리처럼 보이게 해서
겁먹고 도망가게 했다는 노적봉이 있고요
새천년시민의 종각으로 가는 길 노적봉 옆구리에
다산목이라는 탱나무가 있는데요
그 형상이 정말
여인이 거시기를 까발리고 있는 모습이라
오는 이 가는 이 남 여를 불문하고
그 나무를 보면 입들이 쩌억쩍 찢어지는데요
오줌 누는 일 말고
여자 거시기가 도대체 뭘 어쩌간디
비슷하게 생긴 나무만 보고도 저렇게
환장들을 하는지
으이그 천박스러운 인간들
끌끌끌 노적봉을 돌아 나오며 생각해 보니
아무래도
그 중 내 입이 제일 크게 찢어졌던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자책감이 들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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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육로 군사분계선
임우성
말뚝 하나 박아 놓고
멀쩡한 목숨들
이별과 이산의 한(恨)으로 그어진
너무도 확실하고 견고한 선
무너뜨릴 수 있는 장벽도
뜯어버릴 수 있는 철조망도 아닌
뽑아 버린다고 지워질 수 없는 선
빌어먹을 말뚝 하나
☆★☆★☆★☆★☆★☆★☆★☆★☆★☆★☆★☆★
《42》
입맞춤
임우성
세상에서
혼자와 혼자가
가깝게 지어 보일 수 있는 최선의
몸짓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당신과 나는
우리가 되었습니다
우리라는 말은
혼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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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잡초꽃
임우성
아직은 바람 찬 삼월 초입
햇살 따순 담 밑 잡초를 뽑으렸더니
잡초에 꽃이
참 작고 찌잔스런 하얀 꽃이
꽃잎 열 개씩을 정확하게 달고
불류칙하게 몇 송이 피어 있거늘
아
꽃이란
식물의 성기라지 않던가
부끄러울 터인데
이렇게 예쁜 음문을 내보이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절실하기 때문일 터인데
번식을 위한
처절한 본능일 터인데
애틋한 삶을 뿌리째 뽑아
생식 불능상태로 만들어야 한다면
이보다 더한 허물이 또 있겠나 싶어
잡초제거
일단 미루기로 했는데
볼에 스치는 바람이 부드러워
좋은 계절, 갖가지
풀들이 음문을 피우는 시절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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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再活재활
임우성
선창 가로수
줄지어 선 느티나무 푸르던 잎새
팔월 태풍에 호되게 얻어맞아
검푸르게 퇴색하더니 점점
갈색으로 시들어
생기 잃은 추한 모습 키 높이만 쓸쓸하다
살다가 병들거나 다쳐 상처 입는다는 것
황당한 불운이 요구하는
수긍할 수밖에 없는 고통과 체념
스치며 보는 눈도 쉽게 받아 들인다
쓰잘때기 없는 태풍
보기 좋던 나무 다 망쳐 버렸네
더위가 풀 죽고 소슬바람 불고
구월이 오고
애착 없이 스쳐보던 내 눈길에
갈청색 병든 빛깔의 잎새 끝
보석처럼 피워 올리는 싱싱한 연초록
아, 그래
당하고 그냥
견디고만 있을 일은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식으로든 다시
시작해 보는 거다.
☆★☆★☆★☆★☆★☆★☆★☆★☆★☆★☆★☆★
《45》
정죄(定罪)
임우성
완전침몰 일곱시간 이십분 후 찍었다는
동영상이 사실이라면
갈갈이 찢겨진 모두의 가슴에
가차없는 칼질 한 번 더 하는 것
기계적인 오류로 촬영 시간이
잘 못된 거라 하면 위로가 되나, 아
과연
침몰 동시 삼백여 목숨
한순간에 질식하여 죽어 갔을까
차라리 충격으로 의식 잃고 죽어 갔으면
그랬다면 오히려 위안이 될까
기다리랬어!
기다리면 돼!
수 분에서 수 십분 거의가
그렇게 기다리다 죽어가지 않았을까
그 중엔 한 두시간
필사적으로 버티며 기다리진 않았을까
바라건데 진정 바라건데
일곱시간 이십분 넘게 기다리다 죽은이
부디 없기를
하루 넘게 기다리다 죽은이
부디 없기를
이틀 사흘 제발 너무 참담한 상상
아니었기를 제발제발 아니었기를
기원하거니
아니다
아무리 간절해도 이것은 아니다
기원이 아니다
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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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죄와 벌
임우성
아직도 백이 넘는 꽃 같은 목숨들
맹골해협 캄캄한 물속에 두고
숙면으로 가볍게 열리는
4월의 새벽이 싱그러워 죄스럽다
창을 열어 상큼한 바람
베란다 화분에 물주고
간편한 상차림
아침 식탁의 이 평화
안아주고 입맞춤하고
다녀올게 손 흔들며
돌아서는 출근길 따뜻하게 느껴지는
아내의 눈길
이 행복
착하고 이쁜 아이들
어른들 말씀 철석같이 믿고
구명조끼 챙겨 입고 얌전히 기다리다가
거세게 차 오르는 물에 잠기며
얼마나 황당하고 무서웠을까
나쁜 어른들 원망할 겨를도 없이
부모 형제 소중한 친구
그리며 질식해 갔을 내 아이들
저주받을 어른들이 버리고 간 세월호
차갑고 어두운 선실에 가둬두고
내게 부여된 평화가
내게 부여된 행복이
너무너무 미안하고 죄스러워서
목놓아 울고 싶은 4월 끝자락.
☆★☆★☆★☆★☆★☆★☆★☆★☆★☆★☆★☆★
《47》
지팡이
임우성
한적한 밭 두렁에
꾀벗은 유모차가 세 대
대각선으로 각도까지 정확하게
짜란히 주차되어 있네
밭이랑 한 구석에 할머니 세 분
땀에 젖어 호미질로 잡초 매고 계시네
이즘 할머니들 지팡이 대신
유모차 밀고 다니시는 게 유행이데
일하러 가실 때나 마실 가실 때나
안고 가거나 이고 가야할 것들
유모차에 싣고
지팡이 대신 밀고 가는 편리함 때문
일터에 한 대씩
버려진 듯 눈에 띄는 것은 흔한 현상
농한기 마을 회관 앞에
무질서하게 세워져 있는
여러 대의 유모차는 흔한 풍경이 되었네
혼잣몸 걷는 것조차 힘겨워
유모차에 의지해야 하는 연로하신 할머니
세 분의 땀에 절은 노동과
잘 주차 된 현대식 지팡이가
특이한 정경으로 마음 저리고 아프게 하네.
☆★☆★☆★☆★☆★☆★☆★☆★☆★☆★☆★☆★
《48》
진도홍주
임우성
맥주잔에 맥주를 반절 넘게 먼저 따르고
잔을 약간 기울여
지초로 만들었다는 빠알간 진도홍주를 조심조심 따르면
홍주가 가라앉지 않고
밝은 빛깔의 맥주 위에 붉은 빛 홍주가 되더라
홍주 회사 선전용 문구를 보면
해돋이 후 붉은 태양이
바다에서 출렁거리는 것처럼 홍주가 떠 있어, 일명
일출주(日出酒)라 한다는 것인데
해가 없더라
해 없는 일출이 어디 있다냐
일출은 아니다
황혼스럽고 노을스러워
황혼주(黃昏酒)나 노을주(酒)라 부를 수도 있겠지만
일출을 준비하는 여명(黎明)
여명주(黎明酒)가 가장 어울리는 이름이겠더라
취했더라
진도군 임회면 죽림리 바닷가
아담하고 작은
정겨운 벗 황형(兄) 탯줄 묻은 고향 집
내 삶의 어느 한 날
참 좋은 곳에서
따뜻하고 좋은 사람들과
아름답고 멋진 술에 취했더라.
☆★☆★☆★☆★☆★☆★☆★☆★☆★☆★☆★☆★
《49》
한 음절의 배려
임우성
목포 석현동 삼거리 삼학주유소 맞은편
만재피싱 대형 조명간판 밑에는
작은 글씨로
-입구에 차를 세우면-
큰 글씨로
-안되것지라-
참으로 상큼하고 따뜻하게 여겨져
지나칠 때마다 읽으며
기분좋은 웃음을 머금게 되거늘
잡초 위에 낡은 그 글씨판이
경고판이 아니라 주의판이기 때문인데
그 차이가 바로 -것-이더라
-안되지라-가 아닌
-안되것지라-
안되지요와 안되겠지요
이런금지 저런금지 주차금지
이러지요 저러지요 안되지요 보다는
-겠- 하나 더 넣으면 좋겠지요
이러겠지요 저러겠지요 안되겠지요, 그러면
한 음절의 배려로
세상이 훨씬 보드라와지것지라
세상이 훨씬 따뜻해지것지라.
☆★☆★☆★☆★☆★☆★☆★☆★☆★☆★☆★☆★
첫댓글 임우성님의 시모음 배달 수고 하셨어요
감사히 즐감합니다
고운 하루되세요^^
임우성 시 모음 49편
감사합니다.
늘~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