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마(木馬)와 숙녀(淑女)

[강하수]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 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傷心)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愛憎)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 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 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등대(燈臺).....
            불이 보이지 않아도
            그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는 뱀과 같이
            눈을 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목마와 숙녀, 박인환作.
   #
 
  가을의 비색(秘色).. 가을의 정조(情調)를 모조리 태워
  한 잔의 술에 담아 마셔버리고 싶은 저 슬픈 목가(牧歌)...
  세상의 시계가, 인생의 시계가 최후의 시간인 자정을 향하여 거침없이 달리는 듯한...,
 
  그를 힘겹게 지탱해 준 목마도 숙녀도 떠났다.
  한꺼번에 삶도 인생도 떠났다.
  그래서 우지강(江)에서 투신하여 자살한  20기의 가장  위대한 여류작가..
 "버지니아 울프"란 여인의 비극이 그립고 그래서 그리움을 수행(修行)할 대상을 잃었다.
  이제 고독마져도 없다.
  약속되어진 것이라고는 오직 페시미즘의 습하고 암울한 미래뿐인 것을...
 
            왜일까,
            왜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通俗)하다고 말한 이유는 무엇일까..
            작별이라는 비장한 어휘를 쓰고 문학이 죽었다고 사랑의 진리가 애증이라고 했으면서
            왜 잡지의 표지를 인용했으며 왜 통속하다고 했을까,
            인생이, 삶이 목마와 숙녀를 지칭하는.. 사랑이 통속하다면 흡사 삶을 다 살아버린 듯한
            저 참혹한 절규와 탄식과 한탄은 또 무엇이란 말인가..
            문득 어느 평론가의 평론이 생각난다.
            저 詩는 언어의 번롱이라고... 언어를 가지고 희롱했다고....
            그래도 좋다.
            고립에서 오는 비극이 때로는 기쁨보다 값지다는 것을 저 詩에서 느낄 수 있다면
            비록 경멸과 냉소적인 웃음을 흘리며 떠난 목마와 숙녀일지라도
            이미 잃어버린 과거의 통로 어디쯤에 잠시 멈추어 선 채 한 줌 눈물을 뿌려도 좋으리라.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그리움이 되지 못하여 허기진 영혼이라면
   가을의 색조(色調)에 젖어 떠나간 얼굴과 잊혀진 이름과 아니아니 죽어서라도            
   가슴에 품고 싶은 그리운 초상을 회억하며 가을빛깔로 흐르면 된다.
   애상(哀想)에는 가식도 위선도 자존도 없다.
   자신과 가장 가까이 서서 정직하고 온순하게 독대하며 빌어먹을 삶을 확인하는 길밖에는...
   그리움은 언제나 남은 자에겐 더없이 뜨거운 것,
   그립다는 말이 얼마나 모자라는가, 진부한가, 불완전한가...
   이것은 아마 평생을 다 살아도 깨닫지 못할 것임을 아는대도 그 속에 함몰될 수밖에는....
 
   그래,
   이 가을...
   그리움 하나 열렬하게 풀어 놓자.
   가을이 지니고 있는 것 모두를 한껏 끌어 당겨 내 가슴에 풀어 놓자.
   들국화도 단풍도 낙엽도 지는 해까지도 간절하지 않을 도리가 없잖은가.
   목마와 숙녀는 가슴 속에 있는 것,
   무작정 살아가다 보면 내가 소장하고 있는 찬란한 이름과도 해후할 날이 오겠지....

                                                                                              하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