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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1920년대에는 물산장려운동·민립대학설립운동 등에 참여하는 한편
이상촌(理想村) 건설운동을 벌였다.
초년
아버지는 석주(碩柱)이고, 어머니는 홍주김씨(洪州金氏)이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생후 8개월 만에 어머니가 죽자 1869년에는 고향을 떠나
유기(鍮器) 제조공업의 중심지인 납청정(納淸亭)으로 이사하여 약 3년간 서당에서 수학했다.
1873년 아버지가 죽자 이듬해 공부를 중단하고 납청정에서 유기제조와 도산매업을 하는 상점의 사환으로 일했다.
1878년 이도제(李道濟)의 딸 경강(敬康)과 결혼했다.
기업활동
1879년부터는 점원을 그만두고 주인이던 임권일(林權逸)에게 물건을 외상으로 받아
평안도와 황해도 각 지역 장시를 돌아다니며 유기행상을 하다가
철산의 오희순(吳熙淳)에게 돈을 빌려 1887년 납청정에 유기공장과 유기상점을 차리고
평양에 지점을 열었다.
이후 공장을 운영하면서 노동환경을 개선하여 공장을 위생적으로 만들었고
근로조건을 개선하여 근로자의 임금을 올려주고 일정한 시간의 휴식을 하도록 했으며,
신분이나 계급의 차별을 두지 않고 근로자를 평등하게 대접했다.
약 7년간 순조롭게 영업을 하다가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덕천으로 피신했다가 돌아왔으나
집과 상점·공장은 모두 파괴되어 있었다.
다시 오희순을 찾아가 자본금을 빌려 다른 사람보다 먼저 상점과 유기공장을 재건하여
근처의 유기공장을 거의 독점했으며 평양 지점을 다시 열고 진남포에도 지점을 열었다.
1901년 평양으로 가서 윤성운(尹聖運)·김인오(金仁梧) 등과 합자하여
무역상회를 일으키기로 결정하고
평양·인천·서울을 오가면서 새로운 사업을 벌였다.
서울과 인천 간의 운송업을 시작하고 인천항에 수입되는 석유·양약 등을 구입하여
이를 황해도와 평안도에 도산매하기도 했다.
또 서울로 들어오는 각종 지물(紙物)을 매점(買占)하고
오르기를 기다렸다가 팔아 큰 이익을 보았는데,
이의 금이 50만 냥에 이르렀다고 한다.
1904년 러일전쟁으로 일어나자 군수품사업에 손을 댔으나 전쟁이 뜻밖에 빨리 끝나자
큰 손해를 보았으며
값싼 일본제 도자기의 대량 수입으로 유기공업도 큰 타격을 받게 되자
1905년 용동으로 돌아가 은거했다.
이후 민족문제에 대해 자각을 하고 다시 활동을 시작하여
1908년 평양에 신민회(新民會)의 산하기관으로
각종 유인물과 서적 등을 출판·공급하기 위해
태극서관(太極書館)을 설립하고 관주(館主)가 되었으며,
1909년에는 평양에 자기회사(磁器會社)를 설립하고 사장에 취임했다.
한편 한국에서 생산되지 않는 외국물품을 이탈리아로부터 수입하고
한국의 특산물을 수출할 생각으로
인천에 파마양행(巴馬洋行)이라는 합작회사를 설립할 것을 계획했으나
서구 무역상사와의 직접 무역거래가 일본상품 불매운동으로 발전할 것을 염려한
일본의 방해로
이탈리아 파마양행측의 지배인이 귀국하여 이 계획은 좌절되었다.
이때 관서자문론(關西資門論)을 주장했는데
이는 일본 자본의 대량 유입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약소민족자본은 합자해야 한다는 것으로, 첫 단계로 관서지방의 상공업자들은 그들대로 자본을 합자하여 회사를 설립할 것이고,
다른 지방의 상공업자들도 서로 자본을 합치면 일본 자본과 대적할 수 있을 것이며,
그렇지 못하면 민족기업은 외래 대자본에 눌려 망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 계획을 실천에 옮기려고 자본을 확대 모집하여 사업을 확장하려던 무렵에
무관학교사건·105인사건으로 인해 체포되면서 이 계획도 수포로 돌아가는 듯 했다.
그러나 이후 1910년대 윤성운·이덕환(李德煥)·김동원(金東元) 등과 함께
선천·박천·정주 등지의 토착자본을 끌어들여 근대적 산업자본화를 위해 노력했다.
105인 사건 관련자들 체포 장면
독립운동과 교육사업
1905년에는 용동에 은거하면서 국내외 정세 변동에 관심을 기울였다.
1906년 통감부가 설치되고,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어나자
은둔지인 용동에서 나와 평양으로 갔다가 민중이 자각해야 한다는
안창호(安昌浩)의 연설을 듣고 뜻을 같이하기로 결심하고
용동에 돌아와 봉건적 교육을 하던 서당을 개편하여 신식교육을 하기 위한
강명의숙을 세우고 산술(算術)·수신(修身)·역사·지리·체조 등을 가르쳤다.
이어 교육과 실업을 통해 실력양성을 하여 독립을 이루려는 비밀결사인
신민회(新民會)의 조직에 참가하여 평북총관(平北總管)이 되었다.
같은 해 11월 24일 중등교육기관으로 오산학교를 열어
백이행(白彛行)이 교장이 되고 그는 학감이 되었다.
오산학교가 처음 개교할 때 학생은 7명으로 여준(呂準)과 서진순(徐進淳)이
수신·역사·지리·산수·법제·경제·체조·훈련을 가르쳤으며 학생들은 모두 기숙사에서
생활했다.
이후 이광수(李光洙)·이종성(李鍾聲)·조만식(曺晩植) 등이 부임하여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찬무회(贊務會)를 조직하여 학교의 재정을 마련했다.
1909년 8월 안창호의 발의로 청년들의 수양과 애국심 함양을 위해 설립한
청년수양단체인 청년학우회에 발기인으로 참가했다.
1911년 2월 안악사건(安岳事件)에 연루되어 1년간 거주제한의 형을 받고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유배 도중 가을에는 105인사건이 일어나 많은 신민회 간부가 체포되자
그도 주모자로 인정되어 제주도에서 서울로 압송되었다.
1912년 10월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으나 1915년 2월 가출옥한 뒤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년 반 동안 공부했다.
1917년 선천의 북교회(北敎會)에서 오산교회의 장로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평북노회에서 활동했다.
1918년 9월 평안북도 선천에서 제7회 장로교 총회가 열렸을 때
상하이[上海] 교민 대표로 참가한 여운형(呂運亨)과 함께 파리 강화회의를 계기로 궐기하자는 논의를 했다.
그해 12월에는 서춘(徐椿)·조만식 등과 더불어 국내 및 상하이·도쿄[東京]에서
각각 독립선언을 발표할 것을 논의했으며, 김승만(金承萬) 등과 더불어
해외로 망명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안전한 통로를 마련하고
국내외의 독립운동을 연락할 거점으로 교통사무소를 설치했다.
3·1운동 때에는 크리스토교측 대표로 참여했다가 구속되어
1920년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고
마포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윤치호(尹致昊)·이상재(李商在)와 함께 광문사(光文社)의 설립발기인으로 추대되었다.
1922년 민족대표 33인 중 가장 마지막으로 가출옥한 후 일본을 시찰하고 나서
3·1운동과 같은 방법을 통한 즉각적인 독립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장래에 독립을 이루기 위해서는 교육과 산업을 통해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1923년 이상재·유진태(兪鎭泰)와 함께 조선교육협회를 창립하고, 민립대학설립기성회 중앙상무위원으로 뽑혔으며, 물산장려운동에도 참여했다.
1924년 김성수(金性洙)·최린(崔麟) 등과 더불어 연정회(硏政會)의 조직에 대한 논의에
참가했으며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 5개월 동안 경영을 맡았다.
이때 조선기근구제회에 관여하는 한편, 출감 후의 환영회나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설립운동, 시국에 관한 것 등에 대해 각지에서 열린 강연회에 참가하여 정치·교육·종교에 관한 강연을 했다. 1925년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이 독립운동 대열에서 떨어져나와
참정권 획득과 자치론으로 기울어지면서 개량주의적 색채를 드러내자
다시 오산학교로 돌아와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공동체 건설운동
초기의 이상촌운동은 1907년 용동으로 돌아와 강명의숙을 세우면서 시작되어
위생·단발·금주·금연·근면·문맹퇴치 등을 당면목표로 하고 있었다.
그 방법으로 온 동리가 술과 담배를 금하고 공동생활을 위한 위생시설과 환경을 개선하고 경제문제의 해결방안을 모색하며 가내작업으로 생산한 물건을 공동으로 모아 판매하기도 했다. 한편 야학을 열어 생활에 관한 지식을 보급했으며 청년회에서는 교육계몽을 실시하고 공동작업 등에 모범을 보였다.
또 국민들의 정신적 퇴폐를 한탄하면서
정신상의 수양을 위해서는 크리스토교를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용동에 교회를 세우고 크리스토교의 보급에 힘을 기울였다.
3·1운동으로 인한 옥고를 치르고 다시 용동으로 돌아온 1920년대에는 용동을 중심으로 한 이상촌운동을 7개 마을로 확대하고자 하여 먼저 각 마을에 동회(洞會)를 조직하도록 했고, 7개 마을의 동회를 묶는 조직으로 협동조합과 소비조합을 두었다.
학생과 주민을 위한 생활필수품, 학용품을 취급하는 협동조합을 운영했다.
이상촌운동의 기본조직으로 조직된 자면회(自勉會)는 오산공동체운동 중 마을공동체의 자치기구로 근면·청결·책임이라는 동시(洞是)를 제정했다.
자면회는 농지개량·연료개량·협동생산·협동노동·소득증대 등
생활의 개선과 생활의 수준향상에 노력했으며 자면회의 협력조직으로는 청년회와 학생조직이 있었고 상부조직으로는 협동조합이 있었다.
죽은 뒤 사회장으로 치러졌으며 오산학교 교정에 묻혔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첫째로 이승훈 선생은 오산학교를 일으켜 세운 민족의 지도자였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가난과 고난의 삶을 살았다.
이승훈은 1864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는데
태어난 지 열 달도 되지 않아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의 품에서 가난과 고난의 인생을 살게 되었다.
할머니도 그가 열 살 때 돌아가고 곧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다.
그는 나중에는 세 차례나 일본 경찰에 의해서 투옥되어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제주도에 유배되는 불행한 삶도 살았다.
그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항상 몸의 고통을 당하다가 죽었다.
그러나 이승훈은 가난과 고난과 불행의 삶 속에서도 그의 삶에 충실했다.
가난과 고난과 불행이 도리어 그에게 자극이 되었고 도전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는 어렸을 때는 열심히 공부했고 사환으로 열심히 일했다.
무슨 일이든지 마다하지 않고 시키기 전에 알아서 열심히 했다.
청년 시절에는 열심히 일을 했으며
장년과 노년 시절에는 나라와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봉사했다.
청장년 시절에는 평양에 가서 장사를 해서 큰 부자가 되었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며 1백억 가까운 엄청난 재산을 가진 대 사업가가 되었다.
그러나 부자가 되었다고 돈 냄새를 풍기지는 않았다.
가난했을 때도 비굴하지 않았고 부자가 되었을 때도 거드름을 피우지 않았다.
그는 항상 나라 걱정만 하고 나라 살리는 길을 찾고 있었다.
1907년 어느 날 일본의 침략의 손길이 깊이 뻗치고 있을 때
그는 답답한 마음으로 평양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그때 그는 우연히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강연을 듣게 되었다.
도산 안창호의 연설은 그의 가슴을 사로잡고 말았다.
도산은 “일본이 우리 나라를 삼켜 먹으려고 하고 있으니
온 국민은 정신을 차리고 썩어빠진 구습을 벗어버리고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쳐서 나라를 지켜야 한다” 라고 역설했다.
이승훈은 자기보다 14살이 연하인 안창호에게 허리를 굳혀 인사하고
그의 손을 굳게 잡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라를 위해서 같이 행동하기로 약속했다.
그리고는 곧 머리를 깎고 술과 담배를 끊기로 결심했다.
이승훈은 곧 사재를 털어 고향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웠다.
그가 43세 되던 1907년의 일이었다.
나라를 지키고 세우려면 인재를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는 평양에서 선교사들이 병원과 학교를 세운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이 훌륭한 일들을 하는데 자기는 한 발 늦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지나가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깊은 관심을 기울이며 보곤 했다.
“저 놈은 눈망울을 보니깐 여간 총명한 게 아니야!”
어느 날 총명해 보이는 아이 하나를 발견했다.
정일선이라는 아이였다.
공부하고 싶지 않냐고 물었다.
공부하고 싶지만 집이 가난해서 공부를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 아이를 데리고 그의 부모에게로 갔다.
부모의 허락을 받고 그 아이를 숭실중학교에 입학시켰다.
그 아이는 나중에 훌륭한 목사가 되었다.
이승훈은 드디어 사재를 털어 정주 오산에 오산학교를 세웠다.
오산은 정주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마을로 다섯 개의 산이 둘러 있는 마을이었다.
나라를 살리기 위해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세우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이승훈은 오산학교를 세운 다음 자기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불러온 이승일이란 이름 대신 이승훈이라고 바꾸었고
호를 남강이라고 정했다.
오산학교는 처음부터 크리스토교 신앙으로 세운 학교는 아니었다.
나라를 살리기 위한 애국심으로 세운 학교였다.
그러나 3년 후에는 크리스토교 신앙으로 튼튼하게 세워졌다.
1910년 8월 한일합방이 되자마자 이승훈 선생은 가슴을 치며 통곡을 했다.
이승훈 선생은 처절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9월 어느 날
평양 거리를 헤매다가 산정현교회로 발길을 옮겼다.
한석진 목사가 “십자가의 고난”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에 이승훈 선생은 큰 감명을 받았다.
십자가에 나타난 희생과 사랑의 정신이
자기를 구원하고 민족을 구원할 수 있다는 진리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는 그날부터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했다.
이승훈 선생은 참으로 화끈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안창호 선생의 강연을 듣고 민족과 나라를 위해서 살기로 결단을 했고,
한석진 목사의 설교를 듣고 십자가의 예수님을 믿기로 결단을 했으니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승훈 선생은 예수님을 믿은 지 3개월이 지난 1910년 12월 일본경찰에 붙잡혀
서울 총감부 구치소에 수감되어 극심한 고문을 당했지만
그가 새로 가지게 된 십자가 신앙으로 모든 고문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었다.
그는 물 고문 매 달리는 고문 두들겨 패는 고문 등을 당했지만 모든 고문을 이길 수 있었다.
그는 구치소 동료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여기 구치소에 갇혀 그 동안 수 없는 고문을 달게 받으면서 참아낼 수 있었던 것은
신앙의 힘이었지요.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신앙의 힘이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저는 벌써 절망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는 구치소에서 이렇게 기도하곤 했다.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우리 주님께서도 십자가의 큰 고통을 참아 당신의 뜻을 이루었듯이 저도 이 고통을 잘 참아 당신의 높은 뜻을 이루게 하소서.”
그는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오산학교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1913년에 부임한 조만식 교장 선생과 함께
오산학교를 크리스토교 신앙과 민족 사랑의 요람으로 키워갔다.
1916년부터 1919년까지 오산학교에서 공부한 한경직 목사는
이승훈 선생에 대한 회상을 이렇게 했다.
“그때 남강 선생이 우리 어린 학생들에게 주는 감화는 무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정말 큰 것이었어요. 자기 사재를 다 털어서 학교를 세우고… 자기 집은 남촌에 있는데도 매일 학교에 나오시고… 한 60이나 되셨을 겁니다. [사실 그 때 남강은 55세였습니다.]
우리가 4학년인가 되었을 때요.
어느 날 저녁에 졸업반 학생을 한 네댓 명 불렀어요.
가니깐 선생이 자리에 누웠어요. 우리가 가니깐 겨우 일어나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전에 끌려가서 일본 사람들에게 너무 매를 맞아서
언제나 일년이 되면 그 맞은 자리가 아프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그래요.
그래 아프단 이야기를 하면서 매 맞은 그 푸릇푸릇한 자리를 보여요.
그때 3.1운동 일어나기 전인데 그 선생의 말씀 잊지 못하는 건 이런 말을 해요.
‘지금은 일본 사람들이 모든 세력을 다 가지고 모든 걸 다 주장하니깐
일이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아.
그렇게 되니까 애국 지사라는 사람들의 마음이 점점 변한다’ 라고 탄식하시면서
마지막 말씀은 ‘다만 너희들은 분명히 알라.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지
나 이승훈은 조선 사람으로 살다가 조선 사람으로 죽는다’
(여기서 한경직 목사는 목이 메어 울먹였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그 후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노인이 그 이야기 하시려고 우리를 청했단 말이야,
특별히 그날 저녁에…… 그러니깐 이제 그런 이야기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단 말이야요. 그때 오산학교는 크리스토교 학교라서 채플 시간이면 남강 선생이랑
고당 조만식 선생이 보아주셨단 말이야요.
그때 남강이 나이를 잡수셨어도 말씀하실 때는 거저 불을 뿜어요.
그 정신이 살았거든 … 그래서 우리 남강 선생은 내가 잊을 수가 없고.”
남강 이승훈 선생은 사재를 털어 오산학교를 세우고
조만식 선생과 함께 민족과 교회의 지도자들을 키운 민족의 지도자였다.
둘째로 이승훈 선생은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한 신앙인이었다.
이승훈 선생은 학교만 세운 것이 아니었다.
1910년 10월에는 정주에 교회를 짓기 시작했다.
평양에서 한석진 목사의 설교를 듣고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한지 한 달밖에 되지 않던 때였습니다. 그는 정말 화끈한 사람이었다.
예수님을 믿은 지 한 달 만에 교회를 지은 사람입니다. 재목을 사 들이고 돌을 날랐다.
두 달 만에 아담한 교회당을 지었다.
교회의 이름을 오산교회라고 지었다.
그리고 정주읍 교회를 시무하던 정기정 목사를 담임 목사로 모셔왔다.
그래서 정주에는 교육의 불길에 이어 신앙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승훈 선생은 12월에 일경에 체포되어 2년 동안 갖은 고초와 고난을 당하다가 1912년에야 오산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오산으로 돌아온 이승훈 선생은 정기정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오산학교와 오산교회를 더욱 더 충성스럽게 섬겼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105인 사건으로 형무소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했다.
두 번째 투옥된 것이었다.
그때 나부열 선교사가 그를 찾아와 위로하며 격려했다.
그리고 천로역정이란 책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는 천로역정을 읽으면서 큰 은혜를 받았다.
그리고 그가 감옥에서 기도하던 어느 날 그는 놀라운 체험을 했다.
기도하는 가운데 크리스토의 모습을 환상 중에 보게 된 것이다.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살을 향해 무릎을 꿇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여” 라고 속으로 부르짖을 때 문득 창살과 햇빛이 온데 간데 없어지고
그보다 더 밝은 크리스토의 형상이 눈앞에 환하게 나타나 보였다.
그는 너무나 감격하며 마치 신음하듯 “주님” 이라고 외치며 두 팔을 앞으로 내 밀었다.
그는 이런 경험을 한 후 어떠한 고난도 이겨내며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에 진력했다.
이승훈 선생은 1915년 2월 감옥에서 풀려 나왔습니다.
그가 52세가 되던 해였다.
그는 오산학교로 달려가 그렇게도 사랑하고 그리워하던 학생들을 만나보고
그 길로 평양신학교로 달려갔다.
3월이었습니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신앙과 신학의 훈련을 받았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일군이 되기 위해서였다.
1년 동안 신학 공부를 하고 다시 오산으로 돌아왔지만
그가 평양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는 많은 동료 학생들에게
깊은 인격적 감화를 끼쳤다.
이승훈 선생은 1916년 오산으로 돌아와서 장로로 장립을 받아
오산학교와 오산교회를 생명을 바쳐 받들어 섬겼는데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까지
4년 동안 그의 신앙이 가장 뜨겁게 불타 올랐다.
바로 그 4년 동안 한경직 목사가
오산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이승훈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었다.
오산학교는 민족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민족의 학교였고
오산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양성하는 영적 도장이었다.
오산교회의 예배는 단정하고 질서정연해서 오산교회를 방문하는
저명한 목사님들이 그 단정함과 질서정연 함에 감탄을 하곤 했다고 한다.
이승훈 장로는 1919년 3.1 운동 때 다시 일경에 체포되어
3년 동안 평양 감옥에 투옥되었는데 그의 믿음은 감옥 안에서
더욱 더 두터워지고 굳건해졌다.
구약을 20번이나 읽었는데 특히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신명기, 시편, 이사야,
예레미아서를 읽으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러면서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을 굳게 다짐하며 자기의 몸을 제물로 바쳤다.
셋째로 이승훈 선생은 민족과 나라를 사랑한 애국자였다.
이승훈 선생은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그는 3.1 운동의 주역이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만약 그의 굳은 결심과 민첩한 활동이 없었다면,
그가 조금이라도 지체하였다면 3월 1일의 거사의 기회는 놓쳐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승훈은 독립운동의 거사를 위하여 질풍 몰아치듯
서울에서 선천으로, 선천에서 평양으로, 또 평양에서 서울로 뛰어다녔다.
서울에서는 함태영, 박희도, 이갑성 등을 만나 동지로 포섭하였고,
만약 천도교에서 주저한다면 크리스토교 단독으로라도 행동할 계획까지 세워 놓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최린과 연락을 긴밀히 취하면서 천도교의 의견을 잘 조절하여
민족의 총의를 묶는데 훌륭히 성공하였다.”
이승훈 선생은 동분서주하면서
길선주 목사, 양전백 목사, 오화영 목사, 정춘수 목사, 김병조, 유여대, 이명룡, 함태영,
이갑성, 박도희 등을 설득해서
결국 크리스토교 지도자 16명이 33인 중에 포함되도록 했다.
하루는 이승훈 선생이 밖에 나갔다가 돌아와보니
좌중의 사람들이 언성을 높여 떠들고 있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순서에 대해서 33인 중 누구를 먼저 쓰느냐의 문제를 놓고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이 광경을 본 이승훈 선생은 “지금이 어느 때라고 이러시오.
이것은 죽는 순서요. 죽는 순서로 손병희를 먼저 쓰시오” 라고 했습니다.
이 말 한 마디에 분위기는 조용해지고 순서는 쉽게 정해졌습니다.
손병희씨의 이름이 제일 먼저 쓰여지게 되었다.
이승훈 선생의 열성과 지혜와 용기 그리고 이해관계를 초월한 의연한 태도가 없었다면
과연 3.1 운동이 질서 정연하게 결행될 수 있었을런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이승훈 선생의 전기를 쓴 오병학씨는 이러게 기록했다.
“3.1 운동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은 남강 이승훈이라는 한 사람의 진두 지휘로
순조롭게 진행되어갔다.
기미년 독립 만세운동은 거의 남강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해도 그리 과언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부언했습니다.
“3.1 운동이 남강의 작품이었다면 그의 일생은 곧 하나님의 작품이었으리라.”
정확한 진술이다.
이승훈 선생은 3.1 운동 후 세 번째로 일경에 의해 투옥되어 온갖 고초를 다 당했다.
그는 날마다 아침과 저녁 사이에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습니다.
기도 시간이 되면 언제나 단정히 무릎을 꿇고 이렇게 통성기도를 했다.
“오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시여, 당신은 항상 이런 어려운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잘못을 깨우쳐 주시고 더욱 크고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연단해 주시는 분이심을 압니다.
오 하나님이시여, 이 고난과 시험을 잘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은혜로 저를 지켜주셔서 제 마음이 약해지지 않게 해 주시고
담대함과 강건함을 주소서.”
그는 옥중에서 구약성경을 20번 신약성경을 40번이나 읽을 수 있었다.
그는 기도로 모든 고난을 이기고 1922년 7월 감옥에서 풀려났다.
오산으로 달려가서 불타버린 오산학교를 다시 재건했다.
그는 자나 깨나 이런 기로를 신음처럼 드렸다. “하나님이여, 이 나라를 구하여 주시옵소서!” 그는 하나님과 함께 민족과 나라를 사랑한 순수한 애국자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할 것이 있다.
이승훈 선생은 편협한 민족주의자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조만식 장로가 민족과 나라를 사랑한 애국자였지만
국수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자는 아니었던 것처럼
이승훈 선생도 국수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자가 아니었다.
언젠가 누가 이승훈 선생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선생님을 가리켜 민족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나 역시 한때는 우리 민족만을 생각하면서 살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이 땅에 많은 민족이 살고 있지만
전체 인류는 결국 한 가족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지금까지 일본을 대항해 싸운 것은 그들의 불의 때문에 그런 것이지
절대로 민족이 서로 다르다는 이유 때문은 아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학교와 하나님과 교회와 민족을 사랑하는데 한 평생을 다 바치다가 1930년 5월 9일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산학교에서 그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성대하게 거행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4년이 지난 1974년 10월 3일 서울 어린이대공원 남쪽 폭포 옆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그의 나라 사랑과 민족 사랑을 기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동상 건립 위원장은 오산학교 출신인 한경직 목사님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삶이 한 나라와 민족의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지를 보게 됩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승훈 선생은 학교와 하나님과 교회와 나라를 사랑하며 한 평생을 희생의 제물로 바치는 삶이 가장 귀중하고 값진 삶임을 보여줍니다. 우리들도 우리의 청소년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우리 민족과 그리고 세계의 백성들을 사랑하는 귀중하고 값진 삶을 살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임명희 목사님과 정경화 사모님과 광야교회 성도들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은혜와 사랑과 축복의 손길을 베풀어주셔서 이승훈 선생님처럼 학교 사랑과 하나님 사랑과 교회 사랑과 나라 사랑과 세계 사랑에 전념하면서 살다가 죽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며 축원합니다. 아멘! 아멘!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