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투력 인플레이션을 주도했으며 지상 최강의 싸움왕이었던 남자. 켄시로, 강백호, 코난과 함께 일본 만화를 대표하는
그 이름은 손오공. 지구를 밥먹듯 구해낸 그 정의감과 도전정신은 세계속의 대 위인으로 추앙받을 만 하나 손오공이
과연 훌륭한 남편이자 아버지였던가 하는 질문을 던져 본다면 분명 고개를 끄덕이기는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손오공이 행한 수많은 대외적인 치적에 가려져 그사이 손오공의 아내였던 치치와 두 아들 오반, 오천이 느꼈을 사무치는 외로움과
처절한 슬픔을 우리는 일부러 외면했던 것은 아닐까?
일단 손오공은 인간이 가져야 할(이라지만 인간은 아니군...)많은 감정이 누락되어있다. 특히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지키는
가장으로서의 개념은 전무하다. 혹자는 손오공이 유년시절부터 드래곤볼의 기적을 체험하면서 친구가 피살되고
스승이 살해당하고 또 그 와중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부활하여 웃고 떠들게 되는 과정을 통해 보통 사람의
인격을 가질 기회가 없었다고 변호하기도 한다. 인간의 존엄이란 지나가던 브루마 팬티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하지만 좀 더 사이어인의 원시성에 가까운 베지터가 비교적 짧은 시간에
인간사회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준 것에 비해 손오공은 만화의 완결까지 그야말로 '자기 멋대로' 살아가는 괴랄한 인생을
보낸 점을 상기해보면 손오공의 개인적인 성격 장애가 더 크다 할 수 있겠다.
우선 손오공은 할아버지에게 구제된 이후 타인과의 관계를 일절 맺지 못했다. '사회성'이라는 부분은 후천적 환경이 크게
좌우하는 것이므로 이것은 손오공에게 무척이나 불행한 조건이다. 특히 어린시절부터 청년기까지 매일 매일을 혼자만의
힘으로 견디어낸 손오공은 (그것도 무척이나 완벽하게) 일반인에 대하여 비뚤어진 시각을 갖게한다. 그것은 바로 누구나
자신처럼 강하고 올곧으며 외로움을 타지 않을 것이라는 시선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손오반의 방치이다. 손오반이 라뎃츠에게 납치된 이후 손오공은 그야말로 아들을 버려두었다.
여차하면 아들이 인질로 변할 수 있는 다급한 상황이었지만 손오공은 당연하다는 듯이 라뎃츠와 전투를 벌인다. 비록
운이 좋아 자신의 사망으로 끝이 났지만 5살 손오반에게 그의 아버지 손오공은 너무나 비정한 아버지였다. 어찌보면
손오반에게는 천만다행으로 피콜로가 그의 교육을 전담하게 된 것이 전화위복이 되었다니 아이러니 할 뿐이다.
손오반의 심층의식에서 투영되는 손오공과 피콜로의 인식차이. 무의식적으로 손오반은 피콜로에게 아버지의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
아버지란 작자보다 훨씬 더 오반을 잘 이해하고 있는 피콜로. 손오공은 무책임하게도 "내 아들도 사이언이니까 나 처럼.."
이라는 안이한 발상으로 손오반을 위험에 빠뜨린다. 신랄하게 비판하는 피콜로에게 손오공은 입이 열개라도 할 말이 없다.
나메크성인은 일단 자웅동체이다. 피콜로 역시 손오공 못지않게 불우한 유년을 보냈지만 나메크성인만의 장점인
부성과 모성을 동시에 지닌 신체구조가 손오공과 피콜로의 차이를 가져온다. 반면 뱃속에서 튀어나오자마자 인생을
감별당하고 방치되는 사이어인의 습성이 손씨 부자에게 있어서는 바람직한 부자관계 형성에 방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건 더 심하다. 말 그대로 어쩌다보니 생긴 마누라와 죽고나니 튀어나온 내 새끼! 라는 상황.
16세 아무것도 모른채 꽃다운 나이에 시집와 팔자에도 없는 과부 노릇을 하며
꿋꿋하게 집안을 지킨 치치 여사. 그저 대견할 뿐이다.
오천과 손오공이 닮아서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어떤 끔찍한 가족사가 벌어졌을지.
손오천은 '손오반의 피콜로'와 같은 아버지를 대신할 정신적 멘토를 얻지 못했다. 그 결과 아버지의
존재를 부정하거나 성장한 이후에도 그다지 아버지와 잘 지내지 못하고 양아치의 길을 걷게 되는 못난 둘째가 된다.
(치치 혼자 뼈빠지게 교육시켜 마침내 학자가 된 엘리트 손오반과는 비교가 된다.)
반면 베지터를 살펴보자. 베지터는 왕자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캡슐코퍼레이션의 기둥서방이
되기 전까지는 일을 했다. 오오 부르마의 '사이어인이란 전혀 일을 안한다니까'라는 오해는 틀린 것이었다.
어릴때부터 강자와의 싸움에서 승리만을 쟁취해 전투와 승리의 쾌감을 쫒는 것에만 인생을 허비한
손오공에 비하면 일단 기본은 되어 있는 셈이다.
이 시절 베지터는 최소한 자기 밥벌이는 자기가 했다. 별을 접수해서 다른 행성에 차익을 남겨 판매하는 영업직 사원이었다.
지구를 구한 영웅이랍시고 덜컥 죽어버린후 마누라에게 생활비를 걱정시킨 한심한 손씨보다야 백배 낫지 않은가.
갑부 우마왕의 독녀로 태어났으나 남편 잘못 만난 덕분에 가산을 전부 소진한 치치. 그야말로 한국의 어머니의 모습이다.
아들을 지구 수호의 방패막이로만 이용한 손오공에 비하면 베지터는 찐한 부성의 정을 여러 장면에 걸쳐서 보여준다.
오천은 트랭크스가 얼마나 부러웠을까.
아들에게 차마 같이 놀러가자는 소리를 못해 저렇게 둘러서 표현하는 초보 아빠 베지터씨. 꼭 우리 아버지 같지 않은가?
한 없이 차가운 도시남자 베지터. 그러나 내 여자와 아이들에게는 따뜻하겠지.
자식자랑은 팔불출이라지만 어느 누가 베지터를 욕할 수 있으리요
수 많은 이의 가슴을 울렸던 드래곤볼 명장면. 비록 손오공에 밀려 영원한 2인자의 인생을
살았지만 트랭크스와 부루마에게는 손오공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만큼 소중한 남자이다.
수신제가 치국평천하라고 하였다. 가정을 다스린 자가 천하를 다스릴 수 있는 법이다.
가족을 내팽게치고 싸움찾아, 별 찾아, 심지어 싸울 상대가 없어지자 치사하게 엄마욕까지
해가면서 남의 어린 아들을 자신의 승리 콜렉션에 채우기 위해 감금 교육하며 막을 내리는 드래곤볼의 주인공
손오공.
오늘도 방구석에 처박혀 부모님 마음에 칼을 박고 키보드를 두르리며 인터넷 영웅을
꿈꾸는 찌질한 나의 모습과 오버랩 되는 슬픈 밤이다.
참고로
하지만 이에 대해서 반론 또한 존재한다.
손오반과
피콜로의 관계는 돈독한 편인데 사실
피콜로가
손오반의 대부나 다름없는 셈이다. 독자들이 드래곤볼을 통한 환생이라는 요소 때문에 간과하기 쉽지만 피콜로가 오반을 맡을 당시에 아버지인 손오공은 이미 죽어있었다. 그 당시에는 손오공의 최강의 라이벌이자 라데츠와의 전투에서 함께 싸우고 반쪽짜리지만 승리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피콜로가 오반의 수련을 맡게 된다.
라데츠 전 이전까지의 손오공은 "불량가장"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본편에서 자세히 묘사되는 것은 아니지만, 라데츠와 싸우기 바로 전에 오공은
피콜로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요 몇년 동안은 별로 수련을 하지 않았다."는 말을 한다. 이 말은 그 동안은 지구에 특별한 위험이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수련보다는 가족에게 마음을 쏟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또 오반과 함께 근두운을 타고 거북하우스로 날아가는 모습을 보면 그런 부자지간의 여행이 그렇게 드문 일은 아니었을 것이라 추측할 수 있다. 또한 오반은 라데츠 전에서 오공이 공격당하자 크게 흥분하여 잠재력을 이끌어낼 정도로 아버지에게의 깊은 정을 보이기도 한다.
오반은 오공의 사망한 뒤로 피콜로와의 수련, 베지터와 네퍼의 침공, 손오공의 부상, 드래곤볼 탐사를 위한 오반의 여행이 이어지고 다음 번 만남은 프리저군과의 생사를 건 혈투가 이어진다. 사이어인 편과 나메크별 편은 아무래도 지구와 우주의 운명을 건 결전이라, 사소한 것은 넘겨버릴 수 밖에 없는 시기이다.
전투만 함께하고 헤어진 부자는 이후 손오공이 지구로 돌아올 때 다시 만남을 가지지만 미래에서 온 트랭크스를 통해 인조인간들의 공격 소식을 듣고 다시 전투 준비에 돌입하게 된다. 거기에 새로운 적 셀의 등장. 이때 손오공은 시간과 정신의 방에서 손오반과 함께 수련을 하게 되고 오반의 잠재력을 깨달은 오공은 더 이상의 수련이 필요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큰 전투를 앞둔 시점임에도 불구하고 가족과의 시간을 보낸다. 셀전에서 오반에게 큰 짐을 지우는 부분에서는 인정할 수 있지만 자식의 성장에 대해 절대적인 신뢰를 보이는 아버지의 모습으로도 해석할 여지는 충분하다. 그리고 그 전투에서 오반의 자만으로 오공은 또 다시 죽음에 이르게 된다.
다음 번 만남은 마인 부우전의 도입부가 되는 천하제일무도회 당일이고 이 역시 전투로 직결된다. 이상과 같이 오공과 오반이 함께 지낸 시간은 극히 짧았으며 긴장과 위험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오공은 가족과의 시간을 보냈을 뿐만 아니라 셀과의 생사를 건 혈투를 앞둔 시점에서 얻은 둘째 아들
손오천은 손오공과 치치 부부의 관계가 충분히 원만했음을 보여 준다. 그리고 오공과 오천의 관계는 오반보다 더 한데 오천의 시점으로 아버지는 자기가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죽은 사람이니 부정이라는 것을 느낄 기회 조차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이를 죽은 사람 탓으로 돌릴 수 있는가? 또 잠재능력을 완전히 개방하고 부우를 상대하러 떠나는 오반은 결전 때 마다 입었던 피콜로의 옷이 아닌 오공의 옷을 입었다는 점에서 부자간에 유대가 깊다는걸 알 수 있다.
다른 시선으로 보자면, 오공은 그의 인생 전반 동안 그 세계 전체를 통틀어 오직 자기 밖에 해결 할수 없는 사건에 계속 맞닥뜨려 왔고, 범상치 않은 승부근성으로 미루어 보아 명백히 자의로 한 것이지만 어쨌든 자기 밖에 할수 없었기에 그냥 했던 것에 가깝다. 불량가장이고 뭐고를 따지기 이전에 오공이 겪었던 사건은 대부분 그의 의도가 원흉이 되어 벌어진 일이 아니며, 그가 없었으면 지구는 피콜로 대마왕 시기에 이미 아작이 났을 것이다. 불량가장도 가족이 살아있고 난 다음의 일이다.
여담으로
드래곤볼 점프 40주년 기념판에서는 손오공이 밭갈고 씨뿌리는 장면도 나온다. 원작에서도 집에 텃밭이 있던 걸 보면 주 수입원은 농업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