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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혜옹주.
덕혜옹주 돌 사진.
1912년 5월 25일 덕수궁 갓난아기 울음소리
고종의 회갑 생일을 축하하듯 태어난.,덕혜옹주.
고종과 후궁인 '귀인 양씨' 사이에서 태어난.,옹주.
'회갑에 태어난 자녀는 어버이를 똑 같이 닮는다.'
1911년 황귀비를 잃고 우울한 나날을 보내던.,고종.
그 즉시로, 산모 양씨에게 '복녕당'이란 당호를 내렸다.
다음날 고종이 직접 산실로 아기를 보러갔고
그 다음날 종친들이 덕수궁으로 달려와 문안인사
생후 일주일이 되는 날, 왕실 및 종척 알현이 있었다.
삼칠일 되던 날에 종척(왕실 & 외척) 및
책임관 이상 직급이 참석한 덕수궁 축하연
7월 12일에는 생후 2개월된 옹주를
아예, '고종의 침전' 함녕전으로 옮겼다.
그것도 유모를 딸려 함녕전에서 함께 생활.
하루는 옹주의 방에 불쑥 들어왔던.,고종.
젖을 먹이던 유모는 깜짝 놀라 일어나려 하자,
"아이가 깨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그대로 있거라."
황제 앞에서 유모가 누운채
젖을 물리게 허락했던.,고종.
'조선실록'에 의하면
왕녀가 태어나서 이처럼
환영을 받은 전례가 없었다.
"나는 조선의 공주인데.,
왜 일본의 공주에게
절을 해야 하는가?"
소 다케유키 家 모두는
일본황실이 보이는 쪽에서
엎드려 절했으나 덕혜옹주 만
일본황실을 향해 절하지 않았다.
'덕혜옹주 남편'., 소 다케유키.
덕혜옹주 일생에 가려진.,인물.
덕혜옹주와 정략결혼한.,일본인.
'소 다케유키'는
그러한 덕혜옹주를
사랑할 수 있었던걸까?
'대마도 번주' 소 가문.,37대 당주.
임진왜란 선봉장이었던.,고니시 유키나가
'그 사위이자 부장 소 요시토시'., 직계 후손.
작위 백작
영어학자이자
시인이며 화가로
말년에는 레이타쿠 대학
영문과 교수로서 재직했다.
도쿄시 요츠야구 텐마쵸 신1쵸메 20반치
구로다 가 저택에서 4남 막내아들로 출생.
.
아버지는 그가 8살때 사망하였고
어머니도 고등학교에 다닐때 사망
1928년 도쿄대문학부 영문과 진학.
처음 덕혜옹주를 만난건 2년뒤 1930년이었다.
구조 공작의 저택에서 덕혜옹주와 첫 선을 보았다.
1931년 다케유키가 도쿄대를,
덕혜옹주가 여자 가쿠슈인 본과를
각각 졸업한 같은 해 5월 8일에 결혼.
소 가문의 도쿄 저택에서
일본식으로 혼례를 올렸다.
대마도 번주는 일본에서 높은 위치도 아니었고
일본과 조선 사이에서 열심히 중재를 담당한 가문.
조선황실 공주와의 결혼은 소 가문에서 환영했으리라.
'조선황실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게 여겼었지만,
일본정부에 의해., 소 다케유키와 덕혜옹주는 결혼.
정략결혼 2년후 둘 사이에서 태어난.,장녀 마사에(正惠)
1932년 11월 생후 3개월 마사에 유화를 그린.,소 다케유키.
덕혜옹주는 결혼 전에, 이미 신경쇠약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1929년 모친 황귀비.,엄씨가 58세에 장티프스로 사망
1930년 봄, 덕혜옹주는 신경쇠약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
영친왕 별장에서 요양 중 조발성치매증(정신분열증) 진단.
그뒤, 소 다케유키와 결혼해 증상이 호전되는듯 하다가
출산에 따른 우울증이 겹치며, 정신분열증이 악화되었다.
소 다케유키는 그러한 아내 덕혜옹주를 집안에서 간호했다.
백작부인이자 덕혜옹주 신분이기에
정신병이라는 사실이 소문나면 곤란해
밖으로 내보내지 않고 자택에서 요양 치료.
그러나, 한국에서는 "남편이 아내를 감금하고 학대."
소문이 와전되어 말못할 고통까지 겹친., 소 다케유키.
소 다케유키는 대외적으로 '이구'의 생일 축하연,
이은(영친왕) 부부 은혼식, 대한제국황실 집안행사
등에는 딸 '마사에'와 동반해 지속적으로.,참석했다.
그리고, 일본이 전쟁에서 패망한뒤
1946년 일본에서 재산세법이 시행되며
다케유키는 카미메구로 저택 등 재산을 처분.
귀족에서 일반인 신분으로 돌아오게 되어
아내를 더 이상 직접 간호하기 힘들어지자
도쿄 도립 마츠자와 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딸' 마사에와 '엄마' 덕혜옹주 사이에서
끊임없이 반목 대립이 지속되었던.,불화.
"당신이 엄마라는 사실이 부끄러워.
애들이 뭐라는줄 알아? 조센징 딸이래.
나를 속박하던 모든 것들을 떨쳐버리고
자유롭게 날아갈꺼야. 왜 나를 낳은거야?"
그뒤 딸이 1955년 결혼해 분가하자.,아내와 이혼.
덕혜옹주 이혼은 영친왕 부부와 협의 하에 이뤄졌다.
그뒤 그는 일본여자와 재혼해 대를 이을 장남을 얻는다.
하지만, 소 다케유키의 불행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아
장녀 마사에는 1956년 8월26일 유서 '산에서 자살하겠다.'
딸이 실종된 후, 그 충격으로 인해 더욱 병이 악화된.,덕혜옹주.
1956년 8월 26일.,실종
분가한 딸.,'마사에'의 유서.
그후, 생사를 알 수 없는 마사에.
오늘날까지 실종 상태인 마사에.
소 다케유키 자신이 죽을 때까지
딸의 사망신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
아내의 정신분열증을 지켜보아야 했던.,소 다케유키.
딸 '마사에'의 양육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덕혜옹주.
'마사에' 양육과 아내의 정신병 치료는.,소 다케유키 몫.
그는 죽기 전까지 딸을 찾았지만 찾지 못했고
딸 마사에 장례식은 작은 항아리에 진주를 넣고
다시 상자에 담아 장례를 치루며 시(詩)를 남겼다.
딸에 대한.,그리움과 애잔함.
1976년 발표된.,소 다케유키 作
진주(眞珠)
'혼마 야스코'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딸.
여름 산, 푸른 잎, 우거진 길을 넘어갔음에 틀림 없다.
산속 바위가 많은 곳을 지나 작은 돌들이 뒹구는 강가.
그날 그 언저리에는
비가 내렸을 것이라 한다.
조금만 더 가면 길은 끊겨버린다.
하늘로 날아가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
하늘로 날아가 버린 걸까? 하얀 비둘기처럼
일부러 목숨을 버린걸까? 젊은 날의 갈피를.,,
납골당 작은 항아리에
면으로 휘감겨 있는
작은 진주여!
훗날,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를 만나려고
덕혜옹주가 기거하고 있던 낙선재를 방문한다.
하지만, 덕혜옹주 가족에 의해 면회는 제지 당했다.
그가 25년간 부부생활을 했던., 부인.
만나고 싶었지만, 발길을 돌려야 했다.
그리고, 소 다케유키는 1985년 죽을 때까지
자신의 불행했던 결혼생활, 딸 마사에의 자살.
덕혜옹주를 만나러 왔다가 거절 당하고 귀국 등.
한국 측으로부터 이유없는 비난을 받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변호하는 말은 한마디 하지 않았다.
딸의 죽음 후
그 죽음에 대해
묻는 사람들에게도
이 말을 했을.,뿐이었다
"제발 아무 것도 묻지 말아달라. "
.
말년에 그가 남긴 수필집., '슌 다이라쿠'
그의 어린 시절, 가족관계, 인생에 대한 기록이다.
덕혜옹주와 '1931~1956' 결혼생활 기록은.,단 한줄 뿐.
' 그 25년은 내 인생의 공백기이다 '
단 한마디도 부인 덕혜옹주와
딸 '마사에'는 언급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죽기 몇년 전 1980년 동경 백화점에서
자신이 그린 미술작품들을 전시하는 전시회를 가졌는데
딸 마사에 초상화 4점, 전시회 팜플렛 표지인물은.,마사에.
소 다케유키는 주변사람에 존경받는 인격자였다.
그의 제자 레이타쿠 대학 영어학 교수였던., 타나카
"레이타쿠 대학, 특히 영어학과의 원점을 되돌이켜 보면,
소 다케유키 선생님의 존재가 가장 먼저 머리속에 떠오른다.
구 대마도 번주, 백작가 당주였던 그는 영국인도 반할만한 영어
동서고금 몇개의 언어구사가 가능하고
아주 똑똑하고 게다가 시인, 수필가, 화가
그 누구보다도 소 다케유키 선생님이었다."
또한 소 다케유키와 지인.,일본의 문학자,
"내가 기억하고 있는., 소 다케유키.
항상 온화하고 미소를 띄고 계신 분
그림, 서예, 시, 문학, 영문학, 도덕교육.
마음 깊은 속에 크고 깊은 상처를 지닌 분
그 누구도 그 마음속에 들어갈 수 없는, 그리고
구원 받지 못할 상처를 운명이라고 받아들인 분."
덕혜옹주와 이혼한 시기는 딸 마사에가 20살이 넘어
어른이 되고 결혼을 할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이혼했다.
그뒤 덕혜옹주를 다시 보기 위해 한국방문 때 거절당한 그.
일제의 강압적인 결혼에 의해
둘은 서로 고통받고 괴로워했다.
그리고, 그가 선택할수 있는 일은
그냥 말없이 침묵하며 따르는 것뿐
그러한 점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소 다케유키는 덕혜옹주를 사랑했을까?
훗날, 소 다케유키가 '사미시라 환상 속의
아내를 그리워하는 노래' 제목으로 남긴.,시.
사미시라
미쳤다 해도
성스러운 신의 딸이므로
그 안쓰러움은 말로 형언할 수 없다.
혼을 잃어버린 사람의 병 구완으로
잠시 잠깐에 불과한 내 삶도 이제 끝나가려 한다.
젊은 날에 대한 추억은
무엇을 떠올릴 것이 있어 떠올릴까?
날밝는 것도 아까운 밤 굳게 먹은 맘이 흔들릴 것인가.
꽃이 아름답게 핀 창가에 등을 대고
썼다가 찢어버린 당신에게 보낸 편지 조각인가?
머리카락에서 나는 향기로
생각할 정도로 은은하게 퍼지는 향기.
두릅나무의 새순이 벌어지는 아침.
옷이 스치는 소리의 희미함과 닮아있다.
떡갈나무 잎에 들이치는
소낙비와 함께 저물었다.
사람이란 젊었거나 늙었거나
애처러운 것은 짝사랑이겠지.
지금 감히 어느 쪽이냐고 묻는다면
아직 늙기 전의 탄식이라고 해두자.
이 세상에
신분이 높건 낮건
그리움에 애타는
사람의 열정은 같을 거야.
그래도 대부분은 식어버리겠지.
새벽 별이 마침내 옅어지듯이..
빛 바랠줄 모르는 검은 눈동자.
언제나 조용히 응시하고 있는 것은
환상 속의 그림자.
현실 속의 자신이
어디있는지도 모르네.
물어도 대답없는 사람이여.
사미시라는 영혼과 비슷해서
사람의 숨결로 타고 온다 한다.
한번 사람 맘속에 들어가면
오래 눌러 앉아 나가지 않는다 한다.
호적이라는
종이 한 장으로
누구나 부부라고 하지만
할 일을 해내지 못하는 괘씸한 아내여.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남편도 있겠지.
이름도 모르는
아비의 아이를 가져
어미가되는 일도 있다고 한다.
어깨를 서로 맞댈
기회 조차 없을지라도
서로 통하는 영혼도 있다고 한다.
정상이라고
할 수 없는 모습이 된지
이미 봄 가을이 손가락으로
세고도 남을 정도로 지났다.
귀엽다고도 사랑스럽다고도 보았다.
그 소녀는 이름을 사미시라라고 한다.
나의 넓지 않은 가슴 한편에
그 소녀가 들어와 자리 잡은지
이미 오래인 것을..,
마치, 마음 놓고
쉴 틈 없는 것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신하게 무릎을 딱 붙이고 앉아 있다.
하룻밤도 침실로 들이지 않고
꽃잎 같은 입술도 훔치지 않지만
아내라고 부를 것을, 내게 허락해다오.
나이 먹지 않고 언제나
어린 아름다운 눈썹의 소녀여.
어떤 때는
당신이 가리키는 입술을
저녁 노을 구름 사이로 보이는
붉은 색의 요염함에 견주었다.
네 눈동자가
깜빡거릴 때의 아름다움은
칠월 칠석날 밤에 빛나는 별 같았다.
동그랗고 달콤한 연꽃씨를
눈물과 함께 먹는 것은 재미가 없다.
연꽃 씨의 주머니가 터지는 것 처럼
내 마음은 가루가 되어 부서지고 말았다.
근심이 있더라도
마음을 찢기는 일 없는.,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야말로
깨달음을 얻은 성인이겠지.
나의 탄식은 마음을
갈기갈기 찢고 말았다.
나도 언젠가 죽어 가겠지.
아아, 신이여,
그리움의 처음과 끝을
그 손으로 주무르실 터인바.
수많은 여자 가운데
이 한사람을 안쓰럽게
여겨주실 수 없는지요.
내 아내는 말하지 않는 아내.
먹지도 않고 배설도 안 하는 아내.
밥도 짓지 않고 빨래도 안 하지만.
거역할 줄 모르는 마음이 착한 아내.
이 세상에 여자가 있을 만큼 있지만
그대가 아니면 사람도 없는 것처럼.
남편도 아이도 있을텐데
현실에서도 꿈속에서도
나는 계속 찾아 헤맨다.
산은 낮은 곳에서 올려다 보고
바다는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거라고 생각하여 어느 날 후지산 꼭대기에 올라
쯔루가의 여울이 빛나는 것도 내려다봤다.
또 어느 날은 파도치는 해변가에 나와
하늘을 가는 구름을 올려다 보았다.
그렇지만
마음은 달래어 지지 않고
바위를 끌어안는 것처럼
애처로운 가슴을 쥐어뜨는 것 같았다.
개미가 모여드는 계곡의 깨끗한 물을
손으로 퍼올리는 사람은 그 맛을 알고 있겠지.
높은 산 봉우리 봉우리에 피는 꽃 향기는
볼을 가까이 대야지만 비로소 맡은 수 있다.
현실세계에서 너를 만나지 못했는데
어찌하여 내세를 기약할 수 있을까.
환상은 마침내 환상에 지내지 않으며
꿈은 꿈으로 깨어나지 않을 뿐이라 할지라도.
세상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어도 별것 아니야.
죄라고 해도 좋아. 벌도 받지 뭐.
유괴도 좋고 함께 도망을 갈 수도 있어.
함께 죽는 것도 주저하지 않겠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뿐인 생명을 받았다.
이 세상을 감히 저주한다는 것일까.
나는 이미 미쳐버렸는가. 아니 아직 미치지 않았어.
지금 내리기
시작한 것은
싸라기 눈인가.
무거운 짐차를 끄는 사람은
가끔씩 쉬면서 땀을 훔친다.
얼마간 돈이 생기면
맛있는 술로 목을 축이겠지.
역에 내려 선 사람들은
각각의 걱정거리를 가슴에 안고
빠른 걸음으로 묵묵히 여기 저기로 흩어져 간다.
집에는 불 밝히며
기다리는 아내가 있으니까.
거리에서 광고하는 사람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애처롭다.
볼에 빨갛게 연지를 칠하고 거리에 서서.
간판을 걸치고 손짓발짓으로 손님을 청한다.
되돌아 나의 처지를 생각해본다.
어린 여학생의 무리는
내게 가벼운 인사를 한 후
느닷없이 명랑하게들 웃더니
무리지어 화려하게 사라져버렸다.
나는 한숨., 휴식.
어디로 가면 좋을까?
남모르는 죄를 진 사람이
정해진 대로 길을 가는 것처럼.
언젠가 너를 만나고 싶다고
정처없이 나는 방황하고 있다.
봄이 아직 일러
옅은 햇볕이 없어지지 않고
있는 동안만 겨우 따뜻한 때.
깊은 밤
도회지 큰 길에 서면
서리가 찢어지듯 외친다.
아내여,
들리지 않니?
.................................
.................................
1962년 1월 26일 서울에 도착한.,덕혜옹주.
그때까지 생존해있던.,덕혜옹주 유모 변복동.
덕혜옹주가 탄 비행기를 향해 큰 절을 올렸다.
그때 덕혜옹주를 마중나간 사람들은
모두 울음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었다.
모국을 떠날때 꽃다웠던 옹주는.,칠순노인.
'이미 정신줄을 거의 놓아버린.,정신병자.'
유학을 떠나기 전까지 옹주를 보살폈던.,유모.
'죽을 때까지 덕헤옹주의 곁을 지켰다.'고 한다
낙선재에서.,덕혜옹주 회갑연
이방자 여사와 덕해옹주 사진.
영친왕과 정략결혼을 했던.,일본인 이방자 여사.
이방자 여사 자신의 처지와 비슷했던.,덕혜옹주.
낙선재에서 덕혜옹주를 간병하며 함께 기거했다.
"빨리 깨어나세요.
이대로는 인생이
너무도 슬퍼요." - 이방자 여사 -
"낙선재에서 오래 오래 살고 싶어요."
"이구 씨가.,보고 싶어요."
"전하, 비전하가 보고 싶어요." -덕혜옹주 -
'순종과 순정효황후가 보고팠던 것일까?'
한일합방 때 옥쇄를 치마 속에 감췄던.,일화.
그 일화를 기리기 위해 명명된.,인왕산 '치마바위'.
'덕혜옹주는 자신과 처지가 비슷해 보고팠던걸까?'
'조선 27대 왕' 순종(1873~1926) 재위기간., 1907~1910
34세 순종에게 13세 시집왔던., 순정효황후(1894 ~1966)
순종 재위 3년에 남편을 잃고 15세에 과부가 된.,비운의 황후.
너무 어린 나이에 결혼했고
너무 이른 나이에 홀로 되어
자식조차 없었던.,순정효황후.
1966년 조선 마지막 순종효황후 윤씨는 낙선재에서 운명.
1989년 4월 21일 낙선제에서 향년 77세에 타개한.,덕혜옹주.
'제국의 꽃으로 피어 망국의 한으로 지다.'.,대한민국 마지막 공주.
'꽃이 진다면, 저렇게 지겠지.'
덕혜는 역사의 책갈피 속에서
숨도 제대로 쉬어 보지 못한 채
말라가는 꽃잎이었는지도 모른다.
1919년 고종은 딸을 일제에 뺏기고싶지 않아
'왕실 시종,김황진'의 조카 김장한과 약혼 시도.
그해 1월 21일 고종은 승하 하셨고
김황진은 덕수궁 출입금지를 당했다.
1931년 5월 덕혜옹주 결혼에
조선인들은 비탄했고 분노했다.
그당시 조선일보 기사에는 덕혜옹주의 결혼소식을 전하며,
결혼사진에서 남편의 모습을 지워버리고 신문에 게제하는 등
덕혜옹주가 일본에 시집간다는 소식은 큰 충격이자 국민적 치욕.
...................덕혜옹주(德惠翁主 : 1912 ~1989)..............
조선 26대 왕이자 대한제국 초대 황제 고종과 귀인 양씨의 황녀.
"복녕당 아기씨" 이덕혜는 1962년에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했다.
경성일출심상소학교 재학 중 도쿄로 보내져 여자학습원에서 수학.
1931년 옛 쓰시마 번주 가문의 당주이자 백작 소 다케유키와 정략 결혼
1932년 딸 소 마사에를 낳았고 1930년 정신분열증 증세를 처음 보였으며
결혼 후 병세가 악화되어 1946년부터 마쓰자와 도립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1955년 이혼했고 1962년 귀국해 창덕궁 낙선재 내 수강재에서 거주
1989년 사망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부속림에 안장.
.............................................................................................
고종은 '9남 4녀' 자녀가 있었지만,
3남1녀 만 성인이 될때까지 생존했고
조선왕조에서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
1916년 4월 1일에 고종은 덕혜옹주를 위해
덕수궁 안에 유치원을 설치하도록 명하였고,
'쿄구치 사다코'와 '장옥식'을 보모로 촉탁했다.
유치원은 덕수궁 준명당에 설치되었으며,
덕혜옹주는 귀족의 딸들과 함께 교육받았고
1917년 6월 왕공족 신분을 정식으로 인정받았다.
고종은 덕혜옹주가 영친왕 이은처럼 볼모로 일본에 보내지거나
일본인과 정략 결혼을 하게 될 것을 염려하여 시종 김황진의 조카
김장한(金章漢)과 비밀리 약혼을 계획했지만 일본의 방해로 실패했다
1919년 고종 승하 후에도 덕수궁에 머물다가
1920년 3월 15일에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1920년 심상소학교 1학년을 3인 학우와 같이 교육
1921년 4월 1일에 경성일출심상소학교 2학년에 입학
1921년 5월 4일에 ‘덕혜’ 호를 정식으로 하사받았으며,
일본 궁내성에 상신을 거쳐 옹주 존칭을 이때부터 사용.
1925년 정월, 이왕직 차관 고쿠분 쇼타로(國分象太郞)는
순종에게 덕혜옹주 일본 유학이 결정되었음을 통고했다.
같은 해 3월 28일, 경성을 출발해 3월 30일에 도쿄에 도착.
4월 14일에 여자학습원(女子学習院) 중등과 2학년에 입학
1926년 3월 3일, 덕혜옹주는 영친왕 내외와 같이 귀국
순종을 알현하였다가 3월 11일에 도쿄로 다시 돌아갔다.
하지만, 순종 병세가 심각해 영친왕 내외와 4월 8일 귀국
순종은 4월 25일에 승하했고,
덕혜옹주는 인산에 참석 못한채
5월 10일에 도쿄로 다시 돌아갔다.
1929년 5월 30일에 모친 귀인 양씨가 사망하자
6월 2일 귀국하지만 귀인 양씨가 귀족이 아니므로
복상하지 못하고, 6월 9일에 일본으로 다시 돌아갔다.
48세에 유방암으로 숨진 생모 .,귀인 양씨.
19살 딸, 덕혜옹주에게는 충격이었으리라.
1930년 봄 무렵, 신경쇠약 증세를 보이기 시작
영친왕 저택과 별장에서 요양을 하였으나 결국
조발성치매증(정신분열증) 진단을 받게 되었다.
1931년 증세는 호전
같은 해 3월 27일에는
여자학습원 본과를 졸업.
1955년 영친왕 부부와 협의 후
덕혜옹주는 소 다케유키와 이혼
덕혜옹주는 어머니 성씨 양(梁)과 봉호(封號)인 덕혜를 조합
‘양덕혜’(梁德惠)로 일가를 창립했고 이혼 후에 소 다케유키는
혼례품 및 덕혜옹주와 딸 마사에 한복과 생활용품을 돌려보냈다.
영친왕 부부는 1956년 이 물품을 일본 문화학원 전신
문화여자단기대학 학장 도쿠가와 요시치카에게 기증
1947년 10월에 신적강하로 평민이 되며 자금 지원 중단
덕혜옹주는 생계 곤란을 겪고 입원비는 영친왕이 부담했다.
1956년 8월 26일 딸 마사에가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실종.
'前 서울신문 도쿄 특파원' 김을한은 덕혜옹주 귀국을 추진
1961년 11월 12일, 미국 방문 도중 일본 도쿄에 들린.,박정희.
영친왕비 이방자와 만나 영친왕과 덕혜옹주 귀국 협조를 약속
1962년 1월 26일, 대한민국에 영구 귀국하던 날에
김포공항에서 유치원과 소학교 동창 민용아(閔龍兒)와
당시 72세였던 유모 변복동(卞福童)이 마중나와 극적 상봉.
창덕궁 낙선재 순정효황후 윤씨 접견후 서울대학교병원 입원
같은 해 2월 8일 국적 회복,3월 28일에 최고회의 상임위원회는
덕혜옹주 생계비 지급을 위해 '구황실재산법' 개정 법률안 통과.
1967년 5월 4일 병세 안정후, 병원에서 퇴원,
이후 창덕궁 낙선재 내 수강재에서 기거했다.
소 다케유키가 덕혜옹주를 만나기 위해
낙선재로 왔지만 관계자에 의해 면담 거부
1970년 10월 29일 자궁에 생긴 용종 제거 수술
1983년 5월 24일 노환으로 한강성심병원에 입원
1989년 4월 21일 11시 40분 창덕궁 수강재에서 사망
4월 25일 수강재에서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주관.,영결식
유해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유릉 부속림에 안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