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언제나 혼자였다. 세계는 둥근 원을 그려 놓고 나를, 그 원 밖에 세워두었다. 나는 원 안으로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어울리고 싶은 마음과, 나만의 원을 그리며 그들의 세계와는 무관하게 살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흔들렸다. 빛이 있을 때, 세계는 원의 내부와 외부가 너무나 선명하게 구별되었다. 그래서 나는 어둠을 좋아했다. 원의 내부와 외부의 구분이 흐려지고 하나로 소통될 수 있기 때문이며, 나의 외로움을 감출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내가 본 가장 뛰어난 성장영화 [렛 미 인](원제 Låt den rätte komma in 영어제목 Let the Right One In)은 북유럽의 흡혈귀 신화를 현대적 소외와 접목시킨, 아름답고 처절한 사랑 이야기이다. 동시에 자아의 왜소한 껍질을 깨고 나오는 순간부터는, 적대적 세계와 마주 쳐서 무섭게 투쟁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아주 뛰어난 성장 영화이다. 누구나 성장기에는 잠깐이라도 어둠 속에 서 있는다. 그리고 자신만이 세계의 둥근 원 밖에 외톨이로 서 있다고 생각한다. 세계와의 소통의 통로를 개척하고 끊임없이 화해의 메시지를 보내지만 세계는 쉽게 문을 열고 화해를 허락하지 않는다.
스웨덴 작가 욘 린퀴비스트의 원작소설을 스웨덴 감독 토마스 알프레드슨이 영화화 한 [렛 미 인]은, 가슴 떨리는 사춘기 소년 소녀의 만남도 섬세하게 표현되어 있지만, 무엇보다 왜소한 개인이 적대적 세계와 부딪치며 얼마나 피 흘리는가를 독창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동원된 것이 유럽 특유의 흡혈귀 신화이다. [렛 미 인]에 등장하는 뱀파이어는 현실적이라기보다는 상징적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좋다. 눈에 보이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의미 자체는 상징적으로 파악해야 한다.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는 12살 소년 오스칼(카레 헤데브란트 분)은 학교에서 그를 괴롭히는 동급생들 때문에 괴로워한다. 한밤중에 집 밖으로 나와 어둠 속에 서 있는 나무를 노려 보며 마치 자신을 괴롭히는 학교의 짱에게 소리치는 것처럼 분노를 표출하고, 나이프를 꺼내서 나무를 찌르는 순간, 그의 등 뒤에 한 소녀가 서 있는 것을 발견한다. 몸에서 이상한 냄새가 나는 소녀 이엘리(리나 레안데르손 분)는 오스칼의 옆 집에 살고 있지만, 오스칼과 친구가 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푸르스름한 눈이 덮인 차가운 겨울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렛 미 인]의 이야기는, 뱀파이어 소재의 호러 영화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상투적 공식을 따라 전개되지는 않는다. 오스칼이나 이엘리에게는 각각 아버지와 어머니가 없다. 오스칼의 어머니는 아들의 학교생활이나 개인적 고민에는 관심이 없다. 하지만 이엘리의 아버지는 늦은 밤 혼자 집 밖으로 나가 숲 속을 걸어오는 청년을 마취제로 실신시켜 놓고 나무에 거꾸로 매단채 목을 긋는다. 중요한 것은 살인이 아니라 살인 후의 행동이다. 머리에서 뚝뚝 떨어지는 피를 받기 위해 뚜껑을 연 작은 플라스틱 통을 그 밑에 세워둔다. 목적은 피다. 피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를 마시는 사람은 어린 소녀 이엘리이다.
이야기는 크게 흡혈을 위한 이엘리의 엽기적이며 연쇄적인 살인과, 오스칼을 괴롭히는 학교 친구들과 오스칼의 갈등을 축으로 전개된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의 피를 빨아 마셔야 하는 이엘리의 생존본능, 그리고 자신을 괴롭히는 학교 친구들을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는 마음이 커져만가는 오스칼의 파괴본능, 이 두 가지가 연결되면서 이야기의 마지막은 눈부시게 빛난다. [렛 미인]이 서 있는 자리는 소년의 마지막 자리이면서 곧 청년의 첫번째 자리가 된다. 청년이 된다는 것, 그것은 모듬 문제를 혼자서 독립적으로 판단하고 실행하며 그것에 책임을 진다는 뜻이다.
이 세상에서 오직 한 사람, 서로의 유일한 친구가 된 오스칼과 이엘리. 오스칼은 이엘리의 신분, 즉 그녀가 뱀파이어이며 수백년 전부터 12살의 나이였고 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의 피를 마셔야 하며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살인을 저질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오스칼은 이엘리의 살인을 도덕적으로 용납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을 죽여야만 하는 본능적인 생존법칙을 오스칼은 어디까지 받아들이는가. 또 이엘리에게 오스칼은 어떤 존재일까? 자신의 살인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며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위험에 빠트리게 할 수 있는 인물일 수도 있다.
긴 침묵 속에서 롱테이크 사이로 전개되는 빠른 컷트의 편집, 인물과 인물의 행동을 입체적으로 바라보는 카메라는 폭넓은 시야를 확보하고 있다. 무엇보다 두 소년과 소녀의 연기가 가슴을 뒤흔들지만, 그러나 뜨거운 이성을 차가운 감성에 담아 표현한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은, 신화의 현대적 변용을 통한 독창적 해석으로, 성장기의 통과제의를 거치는 소년들의 불안함을 가시화한다. 정말 중요한 문제는 충격적인 사건들, 높은 나무 검은 가지 위에 올라가 있다가 지나가는 행인을 덮쳐서 피를 빠는 어린 소녀의 행동이나, 혹은 경찰에 붙잡히기 직전 자신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염산을 얼굴에 부어 버린다거나, 마지막 피를 딸에게 주고 건물 아래로 추락하는 아버지 등의 이야기가 아니다.
외적 잔혹함은 내적 불안의 형상화이다. [렛 미 인]을 지배하고 있는 어둡고 불안하며 흔들리는 세계는 결국 우리 내면에 깃든 어둠의 정체에 다름아니다. 뱀파이어는 다른 사람의 피를 빨아먹는 존재가 아니라 사실은 내가 키운 내면의 공포의 외적 현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