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변명/남자라는 이유로
[누구나 웃으면서 세상을 살면서도
말못할 사연 숨기고 살아도
나역시 그런저런 슬픔을 간직하고
당신앞에 멍하니 서있네
언제한번 가슴을 열고 소리내여
소리내여 울어볼 날이
남자라는 이유로 묻어두고 지낸
그 세월이 너무 길었어]
서리 내린다는 절기 상강, 이면 도로엔 나뭇잎이 바람에 나딩군다. 뜨내기 손님 왁자지껄하던 박물관앞 도로변 임시 식당들은 전국체전 기간이 지남에 따라 철거에 들어갔다. 식품박람회 그리고 지역 고유의 문화행사가 겹친 가야고분 유적지 일대는 한때 거대한 먹거리 장터가 되었었다.
궁금했다. 같은 형태의 수많은 천막들을 누가 설치했을까? 궁금하면 못참는 성미에 철거작업중인 인부에게 물었다. 그런데 그게 여러회사에서 따로 설치한 것이란다. 일반인들은 천막들의 형태를 똑같이 느끼는데 자신들은 구분이 된단다. 아무렴 그래야 밥먹고 살지.
몇번을 지나치며 식탁에 앉아 본적도 없는데, 시원섭섭했다. 내가 길다니는 곳이라 걸거치니 없는게 시원하고, 오랫만에 사람 모인 모습이 보기 좋은데 없어지니 좀 섭섭하다.
집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예전 직장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6시까지 버스를 타고 오라는 것이었다. 알았다고...
나는 술부름엔 마음이 관대한 편이다. 재직시절 12시 넘어 자다가도 뛰쳐나가 애 엄마로부터 내가 술꾼들의 주범이란 오해도 많이 받았다.
지금이 몇시인데? 오후 2시 반이었다. 거기까지 소요시간 1시간 30분이면 4시차를 타야했다.
집에 들러 옷을 갈아 입고, 작은 배낭을 걸머졌다. 반평생 역마살낀듯 쏘다닐길 좋하해서 바깥으로 갈때면 배낭을 메는게 자연스러웠다.
비가 내렸다. 차창에 빗방울이 흘러 내린다. 도로가 가로수는 여름더위에 시달려 서둘러 잎떨어냈고,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안개 내려낀 먼산은 아직은 푸르럼으로 덮혔다.
버스에서 내려 전화를 걸어 만나자는 장소를 찾았다. 승용차 아닌 택시에서 친구 셋이 내렸다. 따라오라며 인근 식당으로 들어섰다.
홀안쪽방 테이블...어라! 그런데 웬 여자셋이 먼저 와서 앉았다. 도대체 이건 또 뭔 시츄에이션? 두리번 거리는 나에게 두여자가 오랫만이란 표정으로 인사를 건넨다.
이럴경우 참 난감하다. 기억 안나도 우선 아는척 해야함이 예의다. 그래서 안다고 얼버무리고 나니 거참 또 안면이 있는 것같이 느껴졌고...
남자넷, 여자셋. 의자 하나가 비었다. 나에게 가운데 좌석을 정해주는 것이 불안(?)했다. 한친구는 자신의 파트너가 약속을 어기고 안왔다며 투덜댄다. 이나이에 짝맞춰 부루스 출일있냐?
먼곳에서 왔다며 나의 술잔이 바빠졌다. 나이든 여자는 내 이름까지 알고 있고, 내게 뭐 예전에 애인이 있었다나? 뭐라나? 꾸민애길테다.
그녀들이 아직은 낯선데 나의 이름까지 막불러대니, 분명 뭔가 옷깃만 스친 인연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나의 맞은편에 앉은 60대 (?)반, 이 여자는 처음부터 날더러 오빠랬다. 언제 봤냐고? 그래! 연식이 오래니 뚱하지 않아도 시쳇말로 니말이 맞다.
내가 아는 사람과 함께 술을 마셨더란다. 산부인과 어쩌구 저쩌구... 그 교수랑 인연이 닿았던 모양이다. 요즘도 만나냐?고 물으니 NO란다. 그세월이면 무려 20년? 그럼 나는 뭣하러 기억하고 있을꼬?
여성이 앞선시대, 기억력 좋은 여자들이 겁난다. 이건 뭐 죄라도 짓고 도망을 쳤다 잡힌거라면 입살에 추살(송곳에 찔려죽음)을 당할 형국이다.
또 궁금한 건 '왜 갑자기 모였냐고? 내앞에 앉은 예쁘고 술잘마시는 새로 생긴 동생의 생일이란다. 그녀 이름 마당발인가?
갑자기 계획되었고, '전부친김에 제사 지낸다'고 백여리밖 나에게도 이성과 마주앉을 영광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었다.
그들끼리는 회합의 기회가 더러 있는지 이야기의 거리가 가깝다. 객인도 오랫만에 받아보는 술잔, 마다함없이 시간 가는줄 몰랐다.
다행이다. 간강하니 만남이 가능하고, 아직도 술잔을 기우린다. 그들도 그냥 헤어지기 아쉬운지, 대략의 다음 기회를 정하고, 우선은 그녀가2차를 쏜단다.
나는 내내 두여자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안다고 답했으니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한편으론 참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살아왔길래 저들은 나를 아는데 나는 모른다니...
그런 시절이 좋았냐고? 아니다. 어릴적 유행했던 제임스 딘이 주연 영화의 제목처럼 '이유없는 반항' 그것이었다. 내 인생의 황금기중에서 방황했고, 후회스런 구간이란 생각도 들었었다. 그래도 내 인생이니 부정하지 말아야지...
우리들은 12시 가까이 늙어가는 중년 세월이 아쉬운지 마음 젊음의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여자들을 보내고도 아쉬움이 남았다. 택시를 타고 친구의 지인이 운영하는 노래방으로 향했다.
손님이란 딸랑 우리셋, 술에다 노안들이니 주인대신 노래 찾아줄 아가씨 한명쯤 필요하단다. 말만 아가씨이고, 40대 중반의 여인이 왔다.
친구들이 담배를 피우려가고, 나혼자 붙잡혔다. 노래를 선곡하란다. 나는 이방인이라 노래도 모르고 술만 마신다고 하였더니 자기 사전에 그런건 없단다.
나이드니 흘러간 노래가 왜 더 좋은지 모르겠다. 좋아하는 남인수의 '추억의 소야곡', 팡파레가 울리고 만원을 붙이란다. 1시가 가까워왔다. 귀속말로 여자더러 더 좋은 일자리 구해야 하지 않느냐?고 말했더니 낮에 직장을 다닌다고 한다. '그러면 잘하는거다'라며 말했다.
2시가 넘었다. 택시를 타고 시내를 벗어난 친구의 집으로 향했다. 창밖에 내리는 빗방울이 굵어졌다. 먹거리 풍성한 비닐하우스촌을 지나 나즈막한 산자락으로 택시가 들어섰다. 주인을 맞이하는 충성스런 개소리가 요란하다.
새벽3시, 그냥자면 좋으련만 징크 지붕에 떨어지는 밤비소리가 노쇠한 우리들의 묵은 감성을 건드렸다. 또다시 가벼운 술판이 벌어졌다.
이나이에 술은 먹고싶어서 먹는 것이 아니라, 지난세월의 삶을 되새김질하며 경험으로 마시는 것이다. 그래도 노래방에서 두시간 가까이 고함을 질렀으니 망정이지 연속하여 많이 먹는건 위험하다.
친구, 운무낀 산자락, 지붕을 때리는 빗방울소리...오늘따라 유달리 술맛이 달다. 술잔을 내리다 멀리 지리산쪽을 바라다 보았다. 그끝엔 많이도 올랐던 천왕봉이 있다. 끝없이 펼쳐진 밤의 운무, 아스라이 번쩍이는 불빛들이 광야가 아님을 알게했다.
살아온 세월, 길다면 긴 세월이었다. 오늘처럼 술에 찌든 삶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애환과 취중 생각나는 변명은 있었다.
술꾼되어 애먹일때 애엄마는 나더러 왜 술을 마시느냐?고 물었다. 스트레스 해소라고 했더니 그럼 여자는 스트레스 없냔다. 맞는 말이다.
그래도 우리들의 변명은 이랬다. 가난한 질곡(桎梏)의 시간들, 우리들은 처자식 벌어먹여야 하는 가장이니까. 참고 견디어야 하니까. 그랬다. 남자라는 이유로...
남은 시간 세상의 창을 열어두고, 지금껏 살아옴을 감사히 여기며 삶에 욕심을 가지지 말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