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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70년 전 낡은 사진첩
아버지가 남겨놓은 유품을 들고
아버지의 삶을 찾아 나선 아들의 이야기
전직 기자로서 이제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가장으로 살아가고 있는 저자는 어느 날 집 안 구석에서 낯선 상자를 발
견한다. 그 안에는 자신이 아홉 살 때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필름 꾸러미가 들어 있었다. 그날 어머니는 아버지가
생전에 작성한 수첩들을 전해주었다. 50년 동안 아버지의 존재를 잊고 살았던 그에게 그 수첩과 사진은 아버지의
삶을 한 편의 글로 복원하도록 이끌었다.
그렇게 해서 엮어낸 이 책에는 아버지가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냈던 1950년대 중후반 남쪽 바다 통영의 정겨운
풍경이 담겨 있는가 하면, 아버지와 함께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통해 해방 전후의 일상사가 생생하
게 실려 있다. 한 개인의 인생사 또는 한 가족의 사적 이야기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다채롭고 큰 울림을 선사
하는 이 책은 우리에게 가족의 의미를 반추하게 만들고, 궁극으로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할 것이다.
책 속으로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내가 만나거나 전화로 통화한 거의 모든 경천 시절의 제자들이 아버지에게 뱀을 잡아다
드렸다는 얘기를 빼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 “선생님이 폐병을 앓아서 그때 우리가 계룡산에 가서 구렁이 같은
뱀들을 가끔씩 잡아다 드렸어요. 그러면 그걸 대개는 어머니가 다려주셨지만, 때로는 김 선생님 본인이 다려서 드
시기도 했어요. 그거 먹고 효력을 많이 봤다는 말씀을 하시던 게 생각나네요.”
이 뱀탕 이야기는 단순히 시골이니 그랬겠거니 하기에는 상당히 여운이 남는다. 밀접한 사제 관계의 한 징표로 읽
히기 때문이다. 그 무렵 시골에서 학비나 제대로 낼 수 있었을까? 학교 측도 수업료를 채근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 보니 학생들은 자기들을 위해 애쓰는 교사들에게 무엇이든 도움이 되는 일을 해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_ 46~47쪽
인간의 흔적은 시간과 함께 잔인하게 지워진다. 어딘가에 남은 그 흔적의 끄트머리를 찾아 어린아이 직소퍼즐 맞
추듯 이리저리 꿰어 맞춰보지만 그것이 완전할 리 없다. 전모는 결코 드러나지 않고, 이렇게 노성의 흔적처럼 어
렴풋이 모습을 드러내는 듯하다가 중도에 자취를 감춰버리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자칫 편견과 지금의 기준으로
편집되고 윤색되기 십상이다. 아쉬우니 추론에 추론을 덧붙이고 가설도 세워보지만 그것이 사실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이 작업의 가치는 무엇일까? 불완전하다는 걸 알면서도 ‘과거 찾기’를 계속 시도한다. 그게 인간의
운명인가? 이 ‘표봉기 씨 찾기’도 나에게 결국 실패인가? 그와 아버지가 맺었던 인연의 구체적인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으나 그렇게 하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실패가 분명하다. 그러나 정말 실패일까? 그것이 실패이고 불가피한 운
명이었다손 치더라도, 나는 그 운명을 넘어서는 가치가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삶의 굴곡에도 선한 이웃은
있기 마련이고, 희미하나마 그 흔적을 찾으면 그것으로 고마운 것 아니냐고. _ 62쪽
통영. 두말할 것 없이 참 아름다운 곳이다. 나이 든 사람들은 이곳 자기 고향을 ‘토영’ 또는 ‘퇴영’이라고 말한다.
그래야 살갑다. 그렇게 말을 해야 고향이라는 느낌이 난다고 한다. 받침 ‘ㅇ’이 왜 사라지는지, 모음 ‘ㅣ’가 왜 덧붙
는지는 국어학자들이 따질 일이다. 그에 반해 40~50대 토박이는 ‘충무’라고 말한다. 그 표현이 ‘충무공’에서 온 것
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렇다고 그것이 유신 시절의 잔재라고 오해하지는 마시라. 이미 1955년에 통영군의 중
심부인 통영읍만 충무시로 되었다가 그것이 40년 만인 1995년 통영군과 다시 합쳐 통영시가 되었다. 본래의 이름
통영을 회복한 셈이다. 그러니 지금 50대 이하의 사람들은 ‘충무’가 훨씬 입에 익은 표현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통영’이라는 표준어 발음은 오로지 30대 이하 젊은 사람들만의 몫이다. 이렇게 서너 가지 정겨운 명칭이 공존하
는 도시 통영은 그만큼 다양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다. _ 71쪽
1959년 3월 1일의 삼일절 기념 시가행진에 사용된 피켓의 내용은 이랬다.
“삼일정신 받들어 북한동포 구출하자”
“잊을손가 삼일운동 전취하자 통일성업”
앳된 얼굴의 여중생들이 이런 피켓을 무표정하게 들고 가는 장면은 차라리 한 편의 블랙 코미디였다.
아무리 들여다보고 다시 생각해봐도 ‘삼일정신’과 ‘북한동포 구출’이 어떤 관계를 갖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삼일운동’과 ‘통일성업’ 또한 굳이 이해하려 들면 ‘민주주의 → 독립운동 → 통일’의 긴 논리적 연결 고리 속에서
그 뜻을 헤아리지 못할 바 아니겠으나 그것이 이런 전투적 구호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었는지 알 수가 없다.
이 여학생들이 ‘전취(戰取)’라는 말의 뜻이나 알고 이런 걸 들고 갔을까? _ 99~100쪽
출판사 서평
‘우연의 발견’에서 시작된 ‘필연의 기록’
아버지가 간 길과 그 뒤를 쫓아 아들이 다시 걸은 길
그것은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인생의 시침이 어느덧 60이라는 숫자에 가까워진 한 남성. 남편이자 아버지
로서 한 집안을 책임지고 있는 가장인 그에게 7년 전 어느 날 필연과도 같은 우연의 사건이 발생한다. 2009년 가
을, 그는 우연찮게 집 안의 한구석에서 낡은 종이 상자 하나를 발견한다. 그의 말처럼 “이사 갈 때 싣고 가서 어느
구석엔가 그냥 두었다가 다음 이사 갈 때 다시 싣고 가선 또다시 처박아두는, 그런 상자”였다. 자기 자신 혹은 가
족의 누군가가 둔 물건이겠지만 낯설기 짝이 없다. 가벼운 호기심으로 열어본 상자 안에는 50년 전의 필름 꾸러
미가 담겨 있었다. 다름 아닌 자신의 아버지가 찍은 것들이었다. 게다가 마침 어머니가 내미신 양철 상자에는 아
버지가 메모해놓은 개인수첩들도 있었다. 그 순간 지나간 시대가 그의 눈앞에 확 다가왔다. 사진과 수첩을 맞춰보
면 어떤 그림이 그려질 것만 같은 생각이 자신도 모르게 들었다.
잘 알지 못하던 과거로부터 빛바랜 영상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다소 충동적으로 몇 가지
결단을 했다. 우선, 무조건 이 모든 자료들을 디지털화, 말하자면 스캐닝하기로 작정했다. 그래야 원본에 손을 대
지 않고도 정리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 둘째로는, 그 디지털화 작업이 끝날 때쯤 되면 그 자료들을 들고
아버지를 기억할 만한 사람들을 찾아 그들의 증언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역사학자들은 ‘자료로 하여금 말하
게 하라!’는 대단히 멋있는 경구를 잘 써먹지만 그것은 기본일 뿐이다. 파편화된 자료와 자료 사이에는 심연이 존
재한다. 그 틈새는 결국 누군가의 기억과 합리적 추론으로 메울 수밖에 없다. 현대사가 특히 그렇다. 그 기억을 찾
아가는 여행이 결국 나의 가장 큰 과제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_ 34~35쪽
20년 넘게 신문기자로 활동했던 이 책의 저자 김창희, 그에게 이런 생각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오래도
록 다른 사람들의 인생을 추적하며 글로 옮겼던 그에게 아버지의 유품은 이제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신의 삶
을 반추할 필연의 계기가 되어준다. 그렇게 그는 50년의 시간을 거슬러 남쪽 바닷가, 아버지가 가장 행복한 시절
을 보냈던 통영으로 떠날 계획을 품는다.
북쪽의 만주에서부터 평양과 서울을 거쳐 남쪽의 통영까지
아버지를 찾아가는 여정의 끝자락에서 남녘 바다의 유채꽃 향기를 맡다
저자의 아버지 김필목 씨는 1923년 서울에서 태어나, 하얼빈과 만주의 봉천(지금의 선양)에서 유소년기를 보낸
뒤 평양에서 청소년기를, 그리고 서울에서 20대의 대학 생활을 보냈다. 이후 계룡산 지역을 거쳐 통영에서 중학
교 교사를 지냈으며, 직업을 바꿔 서울에서 약국을 경영하다 1966년 우리 나이로 44세에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
다. 저자의 나이 아홉 살 때의 일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소년 시절에 결핵에 걸린 후 치료와 재발의 과정을 반복하
면서 병마의 그림자와 평생을 함께해야 했다. 지병에 걸려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
록의 노력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음을. 저자의 아버지 역시 다를 바 없었다. 게다가 꼼꼼하고 세심한 성격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에게 각종 증명서와 수첩, 사진, 편지 등 여행용 트렁크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 기록물을 남겨두었
다. 이 방대한 자료를 앞에 둔 아들의 심정을 굳이 언급할 필요가 있을까. 더군다나 남들과 달리 아버지의 정을 오
래 느낄 수 없었던 저자로서는 아버지 사후 50년 만에 발견한 아버지의 수첩과 사진이 예사롭지 않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는 아버지의 삶을 ‘평양’, ‘서울 북아현동’, ‘계룡산’, ‘통영’ 등 아버지가 거쳤던 주요 지역을 토대로 재
구성했다.
누구나 인생을 통틀어 전성기라 할 만한 시절이 있지 않은가. 고인에게서 직접 들을 수는 없으나, 저자는 아버지
의 전성기를 통영 시절로 확신한다. 그곳에서 처음으로 직업다운 직업을 가졌고, 결혼을 했으며, 첫아이까지 태어
났기 때문이었다. 또한 아버지가 사진과 메모 등 가장 많은 기록을 남긴 것도 바로 1953년부터 1959년까지의 통
영 시절이었다. 저자가 이 책의 절반 이상을 통영에 할애하고, 책의 구성을 통영에서 시작해 통영으로 끝맺은 것
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한 시기가 저물고 새 시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아버지는 6년, 어머니는 2년 동안의 통영 시절이 끝나가고 있
었다. 그것은 두 분 모두에게 가장 아름다운 시기였다. 특히 아버지와 어머니가 통영에서 함께한 그 2년은 더할
나위 없는 최상의 시간이었다. 어머니는 그 시간을 더 특정해서 이야기하곤 했다. “너 낳고 나서 첫돌 될 때까지
통영에서 보낸 마지막 1년이 가장 행복한 때였던 것 같다. 너희 아버지는 카메라 하나 사서 시도 때도 없이 너 찍
어준다고 하고, 할아버지도 그 무렵부터 부산에서 통영 내왕하고……. 그런 축복 속에서 지낸 나날이었다.” _
406쪽
고 박경리 작가가 ‘한국의 나폴리’라고 예찬할 정도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항구라 불리는 통영. 이 책에
는 1950년대 중후반 통영의 모습이 100여 점의 사진으로 다양하게 담겨 있다. 여중·여고의 입학식과 졸업식, 소
풍과 시가행진, 체육 활동 등의 학교 풍경, 강구항과 동피랑을 비롯한 통영 항구의 전경, 통영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세병관과 남망산 충무공 동상, 그리고 농민과 어민, 하역 노동자들의 모습이 저자 가족의 일상 풍경과 어우
러져 있다.
저자는 이와 같이 아버지의 카메라 파인더에 잡힌 통영의 풍경과 사람들 하나하나를 아버지와 같은 시선으로 살
펴보며, 때로는 잔잔한 웃음을, 때로는 향수 어린 애수의 감회를 전한다. 그리고 이들 사진과 이야기의 중심에 모
두 아버지가 자리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다. 그는 아버지가 통영을 떠나기에 앞서 카메라를 들고 찾았던 장소
로 가서 다시금 아버지와 같은 시선으로 통영을 바라보며 이 책을 맺는다.
이른 아침, 아무도 없는 세병관 마루에 걸터앉아 다시 바다를 내려다본다. 호젓하게 앉은 나의 시야에 아침 항구
의 모습이 점점 선명하게 들어온다. ‘파란색 새벽 공기’는 더 이상 불어오지 않는다. 바다는 그 대신 밤새 간직하고
있던 생명을 항구로 마구 토해내고 있다. 그렇게 토해내는 사이에 바다는 짙푸른 색에서 어느덧 황금빛으로 바뀌
어가고 있다. 아버지의 통영이 그랬고, 아들이 다시 찾은 통영 역시 그렇게 싱싱하기만 하다. 결코 싫지 않은 옅은
비린내도 코끝에 스친다. 아, 그 냄새! 아버지가 어느 날 통영과 작별해야 할 시간이 왔을 때 통영 항구를 한 번 더
보기 위해 찾았던 곳도 이 세병관 뒤의 언덕이었다. 이곳에서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맡은 통영의 냄새는 갯비린내
속에 실려 오는 유채꽃 향기였다. 그것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아버지가 다시 시작한 자리에서 이제 나도 다시 시
작이다. _ 467쪽
‘기억’과 ‘기록’의 협업으로 복원한 이야기
기자 특유의 객관적인 시선과 취재력이 돋보인 한 편의 로드무비
저자의 말처럼 그의 아버지는 특별한 것 없는 평범한 시민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가 거쳐 갔던 시대
적 배경을 보면 우리가 쉽게 간과할 수 없는 면면이 적지 않게 자리하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곧이어 벌어진
6·25 전쟁과 1·4 후퇴, 휴전협정, 그리고 이승만 자유당 정권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한 사람의 인생을 통해 한국
근현대사의 격랑과 그 혼란 속에서도 각자의 삶을 살아야 했던 당시 시민들의 의지를 엿보게 된다. 그리고 저자의
부모를 비롯해 당시 사람들이 겪었던 이러저러한 사건담은 우리에게 역사의 추체험을 불러일으킨다. 그중에는
저자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각각 다른 장소에서 맞이했던 해방의 순간에 대한 기억도 있다.
“어느 날 밤 자다가 뛰쳐나가 보니 밖이 벌겋더라. 경상골 언덕 위의 신궁이 불타고 있었다. 궁사들이 불을 질렀다
고도 하고, 궁사들이 그 불에 타 죽었다고도 하더라. 그게 해방이었다. 그런데 그때는 그게 해방인 줄도 몰랐다.
그다음 날 너의 아버지에게 와서 라디오를 켜서 귀를 세워 듣고서야 해방된 줄 알았다.” 최도명 목사(아버지의 평
생지기)가 기억하는 1945년 8월 15일 밤과 그다음 날의 상황이다. _ 181쪽
“어느 날인가 여름철이었는데 남의 집 우물에 빨래하려고 어머니(나의 외할머니)와 함께 갔더니 옆의 사람들이
라디오를 들고 왔다 갔다 하면서 수군수군하데. 그리고 그 잘 들리지도 않는 라디오 주위로 청년들이 하나둘씩 모
여서 귀를 기울이더니 해방됐다고 하더라. 내가 스무 살 때 일이다.” …… 아버지가 평양에서 친우 최도명 목사와
함께 ‘귀를 세워’ 라디오를 듣던 바로 그 시각에 어머니는 고향 합천의 우물가에서 동네 청년들이 같은 내용의 라
디오 방송을 ‘귀를 기울여’ 듣는 가운데 함께 해방의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 “빨래한 걸 들고 집으로 돌아왔더
니 어디서 나왔는지 태극기가 하나 우리 집에 있데. 광목에 태극과 괘를 재봉틀로 박은 것이었는데 아주 단단하게
잘 만들었더라. 그걸 들고 읍내로 나가서 나도 ‘독립 만세’를 불렀지. 정말 속이 다 후련하더라.” _ 371쪽
저자는 독자들에게 이 책은 그저 남의 아버지 이야기에 불과하니 읽고 나면 다 잊어달라고 당부한다. 그러나 단순
히 한 개인의 인생사 또는 한 가족의 사적 이야기로 치부하기에는 이 책에 등장하는 인물이 참으로 많고, 그들이
전하는 이야기 하나하나가 우리에게 크고 작은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저자는 아버지가 남긴 기록의 빈틈을 메우
기 위해 그 기록에 적힌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증언을 들었다. 아버지에게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 아버지
와 어머니의 동료와 이웃 주민, 일가친척, 함께 수학했던 동급생 등 지금은 대부분 70대의 노인이 된 그들은 과거
아버지에게 대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지금 그 아들에게 ‘선한 이웃’이 되어 지난 시절을 행복하게 회상해주었다.
그리고 저자는 사실관계를 좀 더 정확히 확인하기 위해 관공서, 학교, 교회 등에서 각종 증명서, 졸업장, 학적부와
같은 공적 기록을 찾아 덧붙였다. 이렇게 해서 아버지가 남겨놓은 사적 기록과 행정·교육기관의 공적 기록, 그리
고 다양한 사람들의 기억을 교차대조하여 반세기의 역사를 복원했다. 또 기자 특유의 객관적인 시선을 토대로 개
인적인 감상에 빠지지 않고 아버지의 삶을 진솔하게 담아냈다.
이 책을 역사학 분야의 책이라고 본다면, 내용 면에서는 저자 자신과 선친의 흔적을 찾아가는 ‘가족사’이고 역사
학의 흐름에서 볼 때는 ‘미시사’이며, 또 문학으로 본다면 과거 기록과 이를 바탕으로 한 현장 취재가 적절하게 버
무려진 ‘르포 문학’인 동시에 저자 자신의 존재 근거를 모색하는 ‘성찰적 에세이’라고 할 수 있다. 꼭 어느 한 가지
장르로 규정하기 힘들면서 그 모든 성격을 동시에 갖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이 책의 미덕이다.
우리의 아버지들에게도 저마다 특별한 사연과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다만 삶이 팍팍하다는 핑계로 우리가 그 이
야기를 나서서 찾지 않을 뿐이다. 이 책의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고 책장을 덮는 순간, 독자들은 각자 서로 다르면
서도 비슷한 울림을 받게 될 것이다. 이제 우리가 매일같이 목소리를 듣고 마주하면서도 지나치기만 했던 그 얼굴
에 눈을 돌려보자. 그리고 말을 건네보자. 저자가 얘기했듯이 “우리네 아버지들은, 생존해 계시건 돌아가셨건,
무엇인가 우리에게 답할 준비를 하고 계시므로”.
[책속으로 추가]
그는 주임정 권사였다. 통영여중 동급생으로 같은 교회에 다녔으며 마침 우리가 살던 집에서 한두 채 건너에 그의
집이 있었다고 했다. 그뿐인가? 그는 당시 통영여중의 교장 주영혁 선생의 딸이라는 것이었다. 주영혁 교장이 누
구인가? 바로 아버지를 통영으로 불러준 장본인 아닌가? 그리고 그럴 수 있었던 인연은 평양 시절 이웃에 살아
시작된 것이 아니었던가? 갑자기 이야기가 달라졌다. 나는 주 교장의 자녀를 찾아볼 생각은 전혀 못했는데 기억
이 자기 발로 또 다른 기억을 불러내고 있다고 해야 할지, 심해에 살던 화석종(化石種) 물고기 실러캔스가 잠깐 몸
을 뒤틀어서 수면 위로 모습을 보인 것과 같다고 해야 할지……. 증언의 범위가 통영을 넘어 평양에까지 이를 수
있다는 생각에 잠시 전율했다. _ 149~150쪽
이렇게 해서 단서가 잡힐 듯 말 듯 했던 몇 갈래 시도가 결과적으로는 모두 무위로 끝났다. 북아현동 시절 아버지
의 흔적은 몇 장의 문서와 사진, 그리고 아버지 본인의 ‘병력’ 기록으로 그칠 가능성이 높아졌다. 열릴 듯 말 듯 하
던 ‘기억의 문’이 끝내 열리지 않은 것이다. 문고리를 잡고 여러 차례 두드려보기도 하고 담장 너머로 ‘거기 누구
없느냐?’고 소리쳐 불러보기도 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다. 나름대로는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였건만 기억의 문은
열릴 기미조차 없었다. _ 202~203쪽
“마지막으로 조그만 마을을 지날 때 18세 미만의 소년 인민군 5~6명이 함지박에 고추장, 마늘을 반찬으로 점심을
먹고 있었는데 우리 피난민에게 친절히 길을 가르쳐주었습니다. 영해 아저씨가 ‘숙정아, 이젠 일선을 넘었다’고
하셨고, 1마일도 가기 전에 무장한 국군이 순식간에 산에서 내려와 우리를 둘러싸고선 간첩인가 심사한다며 국군
부대 안의 한 방에 가두었습니다. 그때 국군은 동행했던 친척 오빠를 데리고 그 마을로 가선 점심을 먹고 있던 소
년 인민군들을 다 사살했다고 합니다. 그 대가로 우리를 군 트럭에 태워 함창까지 실어다 주었지만 오빠는 그 일
로 마음의 충격을 많이 받았나 봅니다.”
전쟁의 가장 전형적인 상황이라고 해야 할까? 개인의 선의가 철저하게 배신당하는, 그리고 배신할 것을 강요하는
상황이 이런 것 아닐까? 그렇게 강요한 사람은 체제의 이름 아래 전혀 죄의식을 갖지 않았겠지만, 아마도 그 오빠
는 일생 동안 그 일로 괴로워했을 것이다. 고통은 체제의 몫이 아니다. 그것은 가증스럽게도 오로지 개인의 몫일
뿐이다. _ 221쪽
전세가 뒤집힌다고 판단한 인민군은 그 무렵 의용군 또는 전쟁 수행에 필요한 각종 인력을 거의 무차별적으로 징
발했다. 기억을 더듬어 골자를 간추리면 할머니의 무용담은 이렇다.
“누가 숨이 넘어가게 우리 집으로 달려오더니 필목이가 인민군한테 잡혀간다고 알려주는 게 아니냐? 몸뻬 차림으
로 냅다 뛰쳐나가서 인민군 행렬이 갔다는 쪽으로 무작정 달렸다. 어딘지는 모르겠는데 한참을 가니 사람들이 줄
지어 북쪽으로 가는 게 보였다. 필목이 이름을 연신 부르며 뒤에서 앞으로 가면서 대열을 한참 살펴보니 필목이가
중간에서 말도 제대로 못하고 그저 손짓으로만 자기가 거기 있다고 표시를 하더라. 그래서 옳다구나 하고 대장 같
은 사람한테 바로 쫓아가서 이런 아이는 병자라서 데려가 봐야 아무 쓸 데가 없다고 무조건 매달렸지. 그런데 내
가 무슨 소리를 해도 들은 척도 하지 않더라. 그래도 계속 따라갔지. 얘기할 기회다 싶으면 또 사정 얘기를 하고.
그랬더니 밤중이 되어서야 필목이를 슬쩍 빼주기에 그 길로 냅다 달리다시피 해서 집으로 데리고 돌아왔다.”
_ 222~223쪽
그것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아버지의 ‘나그네 의식’에서 비롯된 것이 분명했다. 아버지의 앵글에 담긴 그 어떤
것도 당신에게는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전혀 아니었다. 그곳엔 송화강의 칼바람 대신 남국의 훈풍이 있었고,
왁자지껄한 중국어와 일본어의 소란 대신 귀여운 여중생들의 재잘거림이 귓가를 채웠으며, 무엇보다도 새로운
가족의 소중한 존재들이 자신에게 덧붙여졌다. 30대 중반에 처음으로 맞은 이 상황은 어느 것 하나 새롭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것이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새로운 고향’의 모습을 더욱 기억하고 싶었을 것
이며, 영원히 남기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 나그네 의식은 이렇게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유년 시절부터 무
수히 많은 곳을 전전하는 바람에 있는지 없는지도 불분명한 원초적인 고향과 이렇게 뒤늦게 찾은 새로운 고향 사
이에 존재하는 긴장감 또는 불안감이라고. _ 271쪽
이 무렵 집안의 관심의 추는 거의 나에게 맞춰져 있었다. 아버지의 연배를 염두에 두면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
니었다. 우리 나이로 서른다섯에 결혼해서 그다음 해에 나를 낳았다. 어머니는 그보다 불과 두 살 아래였다.
어머니는 그런 나이를 두고 ‘처녀 총각으로는 환갑 지나서 결혼한 셈’이라고 표현하곤 했다. 그만큼 자식에게 쏟
는 관심과 애정이 각별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을 보아도 그렇다. 수시로 내가 등장한다. 지금처럼 디지털 카메라
가 있어서 이 장면 저 장면 쿡쿡 찍었다가 마음에 안 들면 지워버릴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와 관련
된 일이라면 아버지는 필름 아까워하지 않고 거의 연속 촬영처럼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곤 했다. 거의 다큐멘터리
수준이었다. 나는 행복한 피사체였다. _ 288쪽
이렇게 아버지 자신의 내면을 향한 창문 너머로 나도 고개를 기울여본다. 그 내부의 풍경은 결코 간단하지 않다.
자족감과 불안감, 인내와 활력이 모두 보인다. 사진 속의 아버지보다 이미 스무 살도 더 먹은 아들의 눈에는 그런
것들이 대개 읽힌다. 망국 백성의 불가피한 방랑과 병마와의 끝없는 드잡이, 전쟁 상황에의 끝없는 침몰과 마침내
찾은 남국의 안락함. 이런 것들도 아버지 시선의 뒷면에 깔려 있다. …… 그러나 사진 속의 인물은 무엇인가 말을
할 듯하면서도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의 목소리를 들을 길이 없다. 그의 생각도 알 방도가 없다. 통영 생
활이 얼마나 행복한 것이었는지, 그 무렵 그에게 신은 과연 어떤 존재였는지, 그의 불안감의 원천은 무엇이었는지
를 결국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그러나 어찌 생각하면 그런 말 없는 시선을 마주하는 것이 오히려 나은
것 같기도 하다. 훨씬 많은 것을 더욱 구체적으로 물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도 나는 묻는다. “통영 바닷가의
이맘때 바람도 따스하던가요? 밤바다에서는요? 그 바람결이 지친 마음에 위로가 되던가요?” _ 357~358쪽
이제는 어머니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사실 나는 아버지의 사진과 기록들을 정리하면서 어머니를 주인공, 즉
이 이야기의 대상으로 삼을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그것은 어머니를 소홀히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어머
니와 ‘함께’ 이 이야기를 정리해가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머니 스스로도 이 일에 관한 한 당신의 역할을
‘동역자(co-worker)’로 여기셨던 것 같다. “나 있을 때 많이 물어봐라.” 늘 그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그런 줄로만 알
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어느 날 더 이상 어머니와 이 일을 상의할 수 없는 순간이 찾아왔다. 2014년 9월 28
일, 어머니가 영면(永眠)에 드셨다. 마지막 순간까지 흐트러짐 없이 곱게 가셨다. _ 362쪽
개인적인 기억과 기록이라고 해서 그것이 관공서의 기록보다 값어치가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렇
게 생각한다. 특히 아버지의 기록을 정리해가는 과정에서 그런 생각은 더욱 굳어졌다. 개인적인 기억과 기록이 공
식 기록보다 훨씬 정확하고 한층 깊이가 있으며 더욱 많은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경우가 왕왕 있다. 어머니의 기억
과 기록도 그러했다. 그런데 기억과 기록은 반드시 ‘질문’의 과정을 거쳐야만 제 가치를 드러낸다는 점이 문제다.
누군가 물어주어야만 기억은 망각의 심연을 헤치고 수면 위에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다. 기록도 마찬가지다. 그 자
체로 알려주는 정보는 대단히 제한되어 있다. 기록과 기록 사이에 가로놓인 부정합(不整合)의 골짜기가 얼마나
깊은지 따져보고 가늠해봐야 한다. _ 374쪽
이런 우여곡절 속에 합천과 부산을 잇달아 방문한 데에는 사실 한 가지 숨은 목적도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 입장
에서는 이제 곧 통영 시절을 끝내려 한다는 결심을 친가와 처가에 두루 알리기 위한 것이었고, 어머니 입장에서는
이제 멀리 서울로 떠나게 되니 언제 다시 올지 알 수 없는 고향을 모처럼 별러서 방문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면
두 분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살면서 그다음에 언제 합천을 방문했을까? 전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아버지에
게는 이번 처가 방문이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고, 어머니는 20여 년 뒤에나 친정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그때는
그렇게 될 줄 누구도 알 수 없었다. _ 406쪽
어머니가 사진 속에서 섰던 그 장소쯤에 나도 한번 가서 서본다. 심호흡을 한다. 이름 모를 꽃의 향기가 가슴에 가
득 찬다. 그 시절의 모든 걱정과 기대와 희망을 아버지가 사진과 문자의 기록에 담았고, 어머니가 기억을 되짚어
그것을 설명해주었다. 그렇다. 통영의 한 시대와 거기에 서렸던 향기가 아버지의 기록과 어머니의 기억으로 남은
것이다. 사람이 가고 건물이 사라져도 그 빈 자리에 상상의 집을 다시 짓고 그 집 안에 살던 사람의 꿈을 다시 꿀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상상과 꿈의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나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손에 쥐고 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다. 아니, 그 상상과 꿈의 실체가, 비록 아버지만 못할지언정, 바로 나 자신인데 어디 가서 무엇을 더
찾아야 할까? _ 4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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